이귀(李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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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이귀의 정묘호란 때에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主和論)의 내용을 소개한다. 정묘호란은 1627년(인조 5)에 후금(後金)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0일도 지나지 않아서,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적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모문룡(毛文龍)과 협력하여 후금을 칠 것을 약속한다. 모문룡은 후금의 요동 공격으로 인해 조선으로 도망쳐온 명나라 무장이다. 모문룡은 후금과 싸운다는 명분으로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머무르며, 정묘호란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자이기도 한다.
후금과의 전면전을 두고, 이귀는 조선의 임금 인조(仁祖)와 보는 시각이 달랐다. 정묘호란이 있기 4년 전에 이귀는 서변정세의 급박함을 알고 매우 구체적인 방어책을 내놓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이것은 스승 율곡 이이가 임진왜란 9년 전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지만 거부된 것과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5년이 지난 후, 이귀가 눈앞에 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몸을 던져 외쳤으나 허사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이가 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10만 대군을 양성하자고 했으나, 정적이었던 유성룡이 반대해 무산되었다’는 말은 다들 한 번 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인데, 실제로 이이가 직접 쓴 글에서는 ‘십만 대군을 양성하자!’는 식의 주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유사한 기록으로는 「만언봉사」에 나와 있는, 즉 “지금 사회가 썩어 있어서 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10년 뒤에 화가 미칠 것이다”라는 정도이다. 하지만 ‘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10년 뒤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라는 주장은 당대에 김성일(金誠一)․이언적(李彦迪) 등도 이미 주장한 바가 있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의 출처는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율곡행장」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율곡행장」에는 “이이가 일전에 십만 양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라고만 나와 있을 뿐,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는 언급되어 있지 않아 신뢰도가 떨어진다.
또한 이귀는 정묘호란 이전에 다섯 차례에 걸쳐 호패법을 시행하여 환란에 대비할 것을 임금에게 상소한다. 이후 많은 논란 끝에 호패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호패법은 조선시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주어졌던 오늘날의 민증(주민등록증)에 해당한다. 호패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양반과 노비 모두에게 골고루 발행하는데, 이를 실시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인구수 조사와 병력 기피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호패로 인하여 국방의 의무를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계의 원로였던 이원익(李元翼)과 산림의 영수인 김장생(金長生) 등은 호패법을 끝까지 반대하였는데, 반대한 이유로는 민심을 거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조 역시 처음에는 호패법을 거부하다가 윤방․신흠 등 대신이 거듭 청하고 장유․이식 등도 시행을 촉구하자, 마침내 호패법 시행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귀는 호패법의 시행으로 16세기 이래의 고질적인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여 군사력을 증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정묘호란이 반발한다. 정묘호란 당시 서로(西路)의 방어체제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였으며, 상황은 이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방향으로 치달았다. 의주성과 안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곽산의 능한산성은 산성임에도 불구하고 함락된다. 산성으로서 방어에 성공한 것은 의주의 용골산성뿐이었고, 그것도 의병에 의해서였다. 평안도 지역의 백성들이 조직한 의병에 의해 간헐적으로나마 후금 군대에 타격을 줄 뿐이었다. 평안감사와 황해병사는 이미 후금 군대를 피하여 각각 평양성과 황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후금의 침입 소식을 듣자, 조선의 임금 인조는 평안도는 지킬 수 없다고 보고 황해도에 병력을 동원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그러나 이귀는 황해도 역시 지킬 수 없다고 보고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청하지만, 인조로부터 ‘그런 논의는 천천히 하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이때 후금의 군대가 황해도 중동부의 평산(平山)에 주둔하자, 강홍립 등은 후금 사신들과 강화(講和)를 맺어 전쟁을 완화시킬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를 주장했다는 훗날의 비난을 피하려고 조정에 모인 대신들은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이때 후금과 싸울 것을 주장한 자들을 척화(斥和)라고 부르고, 후금과 화친을 해서 나라의 힘을 키우자고 주장한 자들을 주화(主和)라고 부른다. 척화파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김상헌(金尙憲)이 있고, 주화파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최명길(崔鳴吉)이 있다.
그러나 이귀는 “일에는 권(權)과 경(經)이 있고, 때에는 완(緩)과 급(急)이 있다. 지금 나라를 보존하느냐 망하느냐의 절박한 형편이니 한갓 헛된 이름만 지키고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미책(覊縻策)을 써서 적의 칼날을 늦추는 것이 낫다”라고 하고서, 여러 대신들과 교린(交隣)의 의리로써 강화를 맺을 것을 약속한다.
기미책은 광해군이 여진족에 대하여 쓴 정책이기도 하고,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변방의 오랑캐를 다루기 위해 오래 전부터 써오던 정책이기도 하다. ‘기(羈)’는 말의 얼굴에 씌우는 굴레를 뜻하고, ‘미(縻)’는 소를 붙잡아 매는 고삐를 뜻한다. 그러므로 ‘기미’는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또한 ‘교린’은 조선시대에 일본 및 여진에 대한 외교 정책이다. ‘적국항례(敵國抗禮)’, 즉 적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예를 행한다는 뜻으로써, 상대의 나라와 대등한 의례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조선 초기 교린의 대상으로는 일본․유구․여진․동남아시아 국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 사간 윤황(尹煌)은 이름만 화친(和親)이지 사실상 항복과 다름없다면서, 후금의 사신을 참하고, 주화를 주도하여 나라를 잘못되게 만드는 이귀와 최명길의 목을 벨 것과 패전한 장수를 참하여 군율을 진작할 것을 주장한다. 이때 71세의 이귀는 “오늘의 일은 광명정대하다”고 말한다.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자들은 도성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피난한 것, 임진강을 사수하지지 않은 것, 이서가 남한산성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 것 등을 모두 주화론자들의 책임으로 돌렸다. 국가가 망하더라도 강화조약을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 계속된다.
이귀는 화친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신하들에게 “일에는 권도(權道)가 있는데, 어찌 작은 절개에 구애될 것인가”라는 권도론을 내세운다. 이어 신하들이 군대의 일에 어두워서 척화를 주장한다고 한다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일을 망치는 것이다”라고 비난한다.
‘권도’는 경도(經道) 또는 정도(正道)를 불규칙한 상황에 임시로 맞추는 행위규범을 말한다. 권도는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하고 불변적인 행위규범을 가지지 못하며, 그때마다 다른 행위양식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다. 유학에서 권도는 불변의 정도에 대해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된다. 정도가 항상 지켜야 하는 것과 달리, 권도는 현실에 따라 응용하는 것을 말한다. 원칙을 지키되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원칙만 찾지 말고 화급(火急)을 다투는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불이 났는데 양반의 도리만 찾고 있어선 안 된다. 우선 불부터 끄고 봐야 한다. 천하의 일이 그 본질은 같아도 형세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형세에 따라 처신을 달리 해야 하는 것이다. 평화롭고 무사할 때에는 정도(經)를 지켜야 하지만, 위태롭고 다급할 때에는 권도(權)를 행해야 한다. 집중무권(執中無權)이란 말이 있다. 오직 중만 고집하고 권도를 모른다는 말이다.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정도만을 고집해서도 안되지만, 권도를 남용해서도 안된다. 상황에 따라 처신하고 행동해야 한다.상황에 따라 응용한다고 모두 권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권도는 정도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변통론이다. 그 기준은 선(善)에 있다. 선을 따르는 변통이 곧 권도이다. 권도를 따르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변통하되 악(惡)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악을 따르는 변통은 교활하고 사악함만 낳기 때문이다. 악을 따르는 변통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이고, 권도를 남용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장자방(張子房)이나 유비(劉備)의 책사인 제갈량(諸葛亮)은 권도를 행하면서도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전 세계가 경제위기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권도의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런데 고집불통의 우리 국회는 거꾸로 위기극복 노력의 발목만 잡고 있어 많은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금의 선택이 선(善)의 변통인지 악(惡)의 변통인지는 훗날의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과감하게 권도를 선택해 위기 타개에 앞장서는 큰 정치인의 모습이 그리운 오늘이다. 누가 이 나라의 장자방이나 제갈량이 되어 줄 것인가? 이귀는 국가를 위한 방도에 대하여 “국가를 도모하는 방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經)도 있고 권(權)도 있는데, 형세가 있는 곳에서는 권도가 변해서 정도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권(權)은 원래 저울질하는 것을 말한다. 저울질할 때 저울추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는 물건의 무게에 따라 늘 이동하는 것처럼,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맞게 임시변통할 수 있는 것이 권도이다. 맹자도 “남자와 여자가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에 건져주는 것은 권도이다”라고 말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지 않아야 하지만(경도), 물에 빠진 것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손을 잡아 구해야 한다(권도)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귀는 척화를 주장하는 장유 등에게 “오로지 당당한 정론(正論)만을 고집할 뿐 변화에 대처하는 권도(權道)의 마땅함을 모른다”고 비판한다. 장유의 주장은 국가의 존망은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 듣기에 좋게만 큰 소리를 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귀는 강화가 국가의 존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부모된 자로써 적군이 우리의 어린 자식들을 양떼를 몰고 다니듯이 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있겠느냐”면서, 백성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이귀는 자신의 주화론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처럼 이귀의 주화론 사상은 이념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정치가로서의 책임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장한 주화론의 밑바탕은 이념보다 국가와 국민을 우선하는 사고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묵재 이귀의 생애와 사상 연구」(이기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