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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순(金直淳)


김직순(金直淳)                                                             PDF Download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청부(淸夫)이며, 호는 실암(實庵)이다. 문간공(文簡公) 김양행(金亮行)의 손자이며, 자연와(自然窩) 김이구(金履九,1746~1812)의 아들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의(執義)를 지냈다. ‘유일’이란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조선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지방관의 천거를 받아 등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은일편에 등재되어 있다. 또한 아들 김인근(金仁根)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정헌(靜軒)이다. 아들 역시 유일로 천거되어 장령(掌令)을 지냈다.

그리고 아버지 김이구의 자는 원길(元吉), 호는 자연와(自然窩)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후손으로 산림학자인 미호(美湖) 김원행(金亮行, 1702~1772)의 아들이다. 음직(蔭職)으로 사옹원 첨정을 지냈다. 여기서 ‘음직’이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부모나 조부모의 공으로 벼슬살이를 하는 것으로, 요즘말로 말하면 가문의 빽으로 관직에 진출한 것을 의미한다. 저서로는 「실암집(實庵集)」이 전해진다.

실암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김직순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필사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필사연도를 알 수 없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91수가, 권2에는 소(疏) 2편, 서(書) 42편, 기(記) 2편, 제문 5편, 애사 1편, 묘지 5편, 잡저 1편, 잡록(雜錄) 1편, 전(箋)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의 반 이상은 민치복(閔致福)에게 기증하거나 그를 생각하고 추앙하며 지은 것이다. 「신륵사기유(神勒寺紀遊)」는 여주 신륵사의 경개를 장편으로 묘사한 것이다. 「송죽연국매오영(松竹蓮菊梅五詠)」은 소나무·대나무·연·국화·매화 등의 특수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내용으로, 저자의 고상한 지조를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당시(唐詩)를 차운한 것이 많다.

서(書)도 민치복과의 문답이 대부분으로 수학과 면학을 강조한 내용이다. 「영사감기(榮賜龕記)」는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이 내각(內閣)으로부터 사서삼경을 하사받아 장서하기까지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국가의 융성은 교학(敎學)의 밝음과 유학의 흥기에 있다고 하였다. 잡록은 처세(處世)·수신(修身)·강학(講學)에 관하여 적은 글이다.

이어서 김직순의 아버지와 아들의 시문집을 아울러 소개한다.

자연와집(自然窩集)」은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며 김직순의 아버지인 김이구의 시문집이다. 모두 6권 3책으로 필사본이다. 이 책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필사 시기는 알 수 없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詩) 82수, 권2에는 서(書) 4편, 권3에는 잡저(雜著) 14편, 권4-5에는 차록(箚錄), 권6에는 잡지(雜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권1에 실려있는 시에는 「회고(懷古)」․「만흥(謾興)」․「백운산(白雲山)」․「종국(種菊)」․「사선정(四仙亭)」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권2의 서에는 제문․유사․명(銘)이 있는데, 이 중에 「육육와명(六六窩銘)」은 그 문장이 뛰어나다. 민이현에게 답한 편지는 대공(大功)․복제(服制) 등 예제 6조목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고, 혹인(或人)에게 답한 편지는 상제례(喪制禮) 등 16조목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다. 제문(祭文)은 장인 유언수(兪彦銖)와 외삼촌 권진응(權震應) 등에 대한 것이다. 「유사(遺事)」는 부친 김양행의 행적 24조목이다. 김양행이 당대의 권력자인 홍봉한(洪鳳漢)․홍국영(洪國榮) 등과 거리를 두며 청론(淸論)을 주장하였던 면모 등이 실려 있다.

권3의 잡저에는 「제한남당기문록(題韓南塘記聞錄)」이 있는데, 이것은 남당 한원진이 스승 권상하(權尙夏)의 어록을 자의(自意)로 기록하였기에 오히려 스승에게 누가 되었다고 우려한 글이다. 그리고 「심설(心說)」․「혼백설(魂魄說)」․「성도설(性道說)」․「기질지성설(氣質之性說)」․「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성리학에 대한 일련의 논설들이다. 호론(湖論)의 학설을 비판하는 몇 대목은 낙론(洛論)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공이(公移)」 4편과 「하첩(下帖)」 2편은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 부세와 재정, 흥학(興學) 등의 변통책을 주장한 것이다.

권4는 「중용차록(中庸箚錄)」이다. 원래 27세에 쓴 것을 1799년(정조 23)에 다시 개작하였다. 권두에 「중용위학도(中庸爲學圖)」와 「위학도설(爲學圖說)」이 있고, 이하에 「서문(序文)」·「편명(篇名)」·「편제(篇題)」와 제1장에서 제30장에 대해 본인의 견해를 서술하고 있다.

권5는 「대학자록(大學箚錄)」과 그에 부속된 「도량설변(都梁說辨)」, 「위학도설(爲學圖說)」이다. 「대학차록」의 체제는 「중용차록」과 유사하다. 「공문전수심법(孔門傳授心法)」․「중용위학도설(中庸爲學圖說)」 30장과 「대학」의 서문에 대한 논설이 들어있다. 권6은 「논어」·「대학」·「중용」에 대한 잡지이고, 권7은 「맹자」에 대한 잡지이다. 이처럼 잡지에는 「논어」·「대학」·「맹자」·「태극도설」에 대한 해설이 있어 저자의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김양행․김이구․김직순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안동 김문 가운데서도 산림을 지속적으로 배출한 가계로서 낙론 학계의 큰 줄기이다. 특히 본집은 태반이 경설(經說)로서 낙론의 경학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정헌집(靜軒集)」은 조선후기의 학자이며 김직순의 아들인 김인근의 시문집이다. 4권 2책으로 필사본이다. 1876년(고종 13) 아들 김병우(金炳愚)가 간행을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권두에 이형보(李馨溥)의 서문과 권말에 작은아버지 김명부(金明夫)의 발문이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 시(詩) 3수, 소(疏) 2편, 서(書) 37편, 권2에 서(書) 19편, 서(序) 2편, 기(記) 2편, 제문 10편, 권3에 제발(題跋) 5편, 애사 2편, 묘지명 9편, 잡저 1편, 권4에 부록으로 정헌기(靜軒記)·행장 각 1편, 유사 44편, 제문 14편, 만사 15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가운데에는 친구인 이형보와 주고받은 것 19편이 있는데, 주로 학문과 처신에 관한 내용이다. 사상과 학풍에 있어서는 다분히 실학적 경향을 띠고 있다. 잡저의 「서신김뇌경(書贐金雷卿)」은 김성묵(金聲默)에게 노자 대신으로 준 격려사로서, 도덕·인의(仁義)가 강조된 서적이 아닌 자(子)·사(史)·시(詩)·문(文)을 공부하더라도 그 책 자체보다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허명이나 허세보다 매사를 실지에 착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볼 때, 역시 저자의 학문이 실천적 경향이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끝으로, 조선후기 문인이자 여항시인으로, 방랑자의 삶을 살았던 정종한(鄭宗翰)이 김직순에게 보낸 시 한편을 소개한다.

이것은 김직순이 정종한을 방문했을 때 지은 시이다.

 

驪鄕三秀竹菴名  (려향삼수죽암명)
여주 고을의 세 분의 뛰어난 수재로써 죽암이 알려졌는데

想見天姿鍾地英  (상견천자종지영)
짐작해보니 타고난 자태가 명예로운 땅에 모였네.

曽是先生生長處  (증시선생생장처)
오래전부터 선생이 성장한 곳,

山容如畵水心淸  (산용여화수심청)
그림 같은 산의 모습에 강물도 맑구나.

 

 

[참고문헌]: 「여주읍지」(189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지행(金砥行)


김지행(金砥行)                                                             PDF Download

 

171716(숙종 42)~1774(영조 50). 조선후기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유도(幼道)이며, 호는 밀암(密庵)으로 김시정(金時淨)의 아들이다. 병계 윤봉구(1681~1767)에게서 수업을 받았으며, 학문도 「소학(小學)」·「심경(心經)」 및 사서(四書)․육경(六經) 등에 두루 통달하기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밀암선생문집」이 전해진다.

밀암선생문집」은 조선후기의 학자인 김지행의 시문집이다. 18권 9책으로 필사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찬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판본의 내제지에 ‘원본소장자(原本所藏者) 경성(京城) 김인진(金寅鎭), 등사년월(謄寫年月) 소화(昭和) 14년(1939)’의 기록을 통해, 6대 종손인 김인진(생몰 미상)이 소장한 원본을 1939년에 등사한 판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로, 아들 김이수(金履脩)가 아버지 김지행의 언행(言行) 140여 편과 문경(文經) 5권을 채록하고, 조카 김이홍(金履弘)이 보유(補遺) 42장, 시 90여 수, 부․제문․잡저․서 40편을 채록하였으나 간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밀암선생문집」은 6대 종손 김인진(金寅鎭)이 소장한 등사본(謄寫本)으로, 저자의 아들 김이수와 조카 김이홍이 정리한 것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권1·2에는 시 97수가, 권3∼6에는 서(書) 68편이, 권7∼9에는 「사문질의(師門質疑)」로 어록조품(語錄條稟)·어록조대(語錄條對)·강설문대(講說問對), 권10에 잡지(雜識), 권11∼15에 잡저 26편, 제문 4편, 행장 2편이, 권16에는 서(書) 1편, 잡저 1편이, 권17~18은 부록으로 권17에는 「계하견문(溪下見聞)」, 권18에는 제문 8편, 만사·묘지명·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 등사기(謄寫記)가 있다. 특히 「사문질의」나 제문 등은 18세기 지식인들 간의 상호 교류와 학문경향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주목된다.

시는 스승 윤봉구(尹鳳九)의 심성(心性)을 논한 시에 화답해 지은 시 23수, 송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의 글을 읽고 느낌을 시로 표현한 것, 주희의 도설(圖說)과 성리학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소재로 하여 지은 시 등이 있는데, 이것은 김지행이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시에는 대개 서문을 붙여 그 시를 짓게 된 동기를 밝혔으며, 성현의 말을 인용할 때는 세주로 달아서 전거를 밝혔다.

특히 「화정구암선생논심성시(和呈久菴先生論心性詩)」에는 각 수마다 장편의 해설을 덧붙여, 저자의 성리학설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밖에 한거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읊은 시와 윤봉구의 동생 윤봉오(尹鳳五)와 윤계정(尹啓鼎)·윤심위(尹心緯)·홍양명(洪陽明) 등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 있다.

서(書)는 윤봉구·윤심위·윤창정(尹昌鼎)·임성주(任聖周)·임정주(任靖周)·홍주종(洪柱宗)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주고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성(性)·리(理)·오상(五常) 등 성리학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한 장편의 편지가 많다. 「사문질의」는 스승으로부터 성리학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내용과 질의·응답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잡지는 성리학의 중요한 개념들에 관한 주희·정호(程顥)·장재(張載) 등의 설을 인용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내용이다. 또한 종형 김원행에게 보낸 편지에는 화양서원(華陽書院) 묘정비(廟庭碑) 건립 건에 대한 장문의 글이 있다. 당시 윤봉구가 죽고 발견된 화양 비문(碑文)의 내용을 두고 시비 논쟁이 벌어졌는데, 화양서원 원유(院儒)들은 건립을 주장하는 반면, 원장이던 김원행은 이를 중지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김지행은 이 편지에서 비문 새기는 것을 중지시킨 처사의 부당함을 논하고 스승을 위해 변론을 하고 있다.

권11∼14의 잡저에는 「이정전서」·「주서절요」·「주자어류」 등의 성리학 서적과 만동묘(萬東廟)의 비문의 구절에 해설을 붙이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권익관(權益寬)의 성설(性說)과 왕양명(王陽明) 등의 글을 읽고 비판한 글, 그리고 일상생활 및 학문하는 가운데 꼭 지켜야 할 사항을 모아놓은 글 등이 있다.

권15의 잡저에는 자서(自序)·부(賦)·찬(贊)·잠(箴)·명(銘)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설은 아들 김이수(金履修)의 이름을 풀이한 글과, 송나라 고종의 세실(世室)에 대한 주희설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다. ‘찬’은 심학(心學)과 주역에 관한 글이다. ‘잠’은 신독(愼獨)·존덕성(尊德性) 등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것을 경계하여 지은 것이다. ‘신독’은 「중용」에 나오는 구절로 홀로 있을 때라도 삼감으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공부방법이다.

‘존덕성’ 또한 학문을 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도문학(道問學)과 대조된다. ‘도문학’은 글자 그대로 묻고 배우는, 즉 이목기관으로 보고 듣고 사고하여 객관대상을 고찰해나가는 공부이다. ‘존덕성’은 마음의 덕성을 보존하는, 즉 마음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본성을 자각해나가는 공부이다.

권16의 서(書)는 윤창정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보낸 별지로, 오상에 대해 논의하였다. 부록의 「계하견문」은 아들 김이수가 아버지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 아버지의 언행과 가르침 등을 적어 놓은 글이다. 이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밀암문집(密庵文集)」

김지백(金之白)


김지백(金之白)                                                             PDF Download

 

161623(인조 1)~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자성(子成)이며, 호는 담허재(澹虛齋)이다. 조부는 증 이조참판 김익복(金益福)이고, 아버지는 성균관진사 증 동몽교관 도촌(陶忖) 김연(金沇)이다. 모친은 여산송씨(礪山宋氏)이며 현감(縣監) 송처중(宋處中)의 딸로, 4남 1녀를 두었다.

인조 때의 명현 신독재 김집의 제자로써 스승의 총애를 받았으며, 동창생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1648년(인조 26)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1위로 합격하였고, 생원(生員)이 된 뒤에 덕행으로 교관(敎官)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1667년(현종 8) 중국인 임인관(林寅觀) 등 95인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상륙하자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두려워하여 이들을 본국에 압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선생은 중형 김지중(金之重)과 함께 상소를 올려 그의 불가함을 힘써 주장하였다. 평생 명나라의 숭정(崇禎) 연호를 썼으며, 문장이 아담하기로 이름 높았다. 만년에는 고향 남원에서 후생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많은 훌륭한 제자를 길렀다. 사헌부 집의에 증직되었고, 남원의 요계사(蓼溪祠)에 제향되었다. 산동면 목동리 요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아버지 김연(1596~1661)의 자는 장원(長源)이며, 호는 도촌거사(陶村居士)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오증광사마시(戊午增廣司馬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1637년(인조 15) 이후부터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 속에서 시를 읊조리고 살며 스스로 자신의 호를 ‘도촌거사’라고 하였다.

맏아들 김지명(金之鳴)은 1639년(인조 17) 기묘식년사마시(己卯式年司馬試)에 진사 부장원으로 합격하였고, 김지성(金之聲)은 1648년(인조 26) 무자식년문과(戊子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지중(金之重)은 1651년(효종 2)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김지백(金之白)은 1648년(인조 26) 무자식년사마시(戊子式年司馬試)에 생원 부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딸은 사간(司諫) 이상형(李尙馨)의 아들 이문원(李文源)과 혼인하였다.

또한 맏아들 김지명(1607∼1684)의 자는 자겸(子謙), 호는 양망재(兩忘齋)이다. 품성이 준수하고 기상이 온아하며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나이가 많아질수록 덕도 따라서 높아지니 세인이 모두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학문은 중부(仲父)인 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에게서 수학하였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 의하면, 그가 진사에 합격하던 해에 상소하여 임진왜란에 순절한 증 찬성 황진(黃進)과 증 판서 이복남(李福男)의 사당에 이름을 내려줄 것과, 당시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증전(贈典)을 내려줄 것을 청하고 그 답을 받았다. 만년에는 거처하는 곳을 양망(兩忘)이라 편액하고, 후진을 기르며 주위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양망유고(兩忘遺稿)⌋는 ⌈부안김씨세고(扶安金氏世稿)⌋에 합철되어 간행되었다.

김지백은 1655년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하고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를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시문집으로는 ⌈담허재집(澹虛齋集)⌋이 전해진다.

담허재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김지백의 시문집이다. 6권 3책으로 활자본이다. 1895년(고종 32) 후손 김종술(金鍾述)이 편집, 송병선(宋秉璿)이 교열, 8세손 김낙린(金洛麟)․김낙리(金洛鯉)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민종현(閔鍾顯)의 서문과 권말에 김낙리 등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167수가, 권2에는 소 2편이, 권3에는 서(書) 24편이, 권4에는 잡저 8편이, 권5에는 서(序) 4편, 기 7편, 발 1편, 축 2편, 제문 17편, 전(傳) 6편, 행장 3편이, 권6에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유사·요계사축(蓼溪祠祝)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오언절구 22수, 칠언절구 57수, 오언율시 12수, 칠언율시 41수, 오언고시 5수, 만시(輓詩) 29수, 부(賦) 1수 등 각체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김집(金集)에게 보낸 ⌈심경(心經)⌋·⌈가례(家禮)⌋ 등에 관한 문목(問目)·별지(別紙)가 상당수 있다.

잡저 가운데 「독서차기(讀書箚記)」는 모두 8개 항목으로, 1∼3항목은 정(靜)·동(動)·동정교양(動靜交養) 등에 관한 논설이다. 4∼6항목은 심통성정(心統性情)·심지체용감처(心之體用感處)에 관한 것이다. 7항목은 혼실(昏失)의 병(病)을, 8항목은 ⌈논어⌋ 가운데 의심나는 점을 논한 것이다.

심통성정설」에서는 사람의 본성(性)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고, 이러한 성이 대상과 감응하여 드러난 것이 정(情)이다. ‘성’은 고요한 속에 갖추어져 있고, 정은 감응하여 드러나는데, 이때는 반드시 주재자로써의 심(心)이 있어야 한다는 ‘심통성정’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끝에는 도표가 제시되어 있다. 그밖에 「정완책(頂頑策)」 등 4편은 모두 과문(科文)이다. 그 가운데 「사자입언(四子立言)」은 차중(次中), 「역상마(易喪馬)」는 감시이하(監試二下)로 합격한 작품이다.

이어서 1656년(효종 7)에 유유상종한 사우들과 은일자중하며 이안정(怡顔亭)에서 읊은 시 한편을 소개한다.

 

茅軒蕭灑壓淸川  (모헌소쇄 압청천)
띠집(茅軒)의 청결함이 맑은 시내보다 나으니

專壑生涯得百年  (전학생애득백년)
이 골짜기에서 마음껏 한 백년(百年)은 살겠네.

報秋登催善釀  (보추등최선양)
하인이 결실을 알려니 술 잘 빚기를 재촉하고

鳥傳春信覓新篇  (조전춘신멱신편)
새소리가 봄소식을 전하니 새 시편을 구하네.

一庭梧月閒宵裡  (일정오월한소리)
오동나무 뜰에 달빛은 밤 중 내내 한가하고

半畝荷風暮雨邊  (반무하풍모우변)
저녁 비 내린 끝에 작은 연못가에 바람 인다.

靜認主人標額意  (정인주인표액의)
고요함 속에 주인이 내건 편액의 뜻을 알지니

開顔隨處卽怡然  (개안수처즉이연)
얼굴 펴고 사는 것이 곧 기쁨이 아니겠는가.

갈치방을 흐르는 수려한 요천 물가에 비록 소박한 띠집이지만 청결한 분위기가 맑은 시내를 압도하는구나. 이러한 청정 골짜기라면 고고한 마음으로 한 백년은 넘게 살겠네. 일하는 하인이 정자에 와서 가을 곡식을 거둘 것을 알린다. 주인은 먼저 술 담그는 것부터 서둘러 챙긴다. 벌써 늦은 가을이면 생명의 기운은 쇠잔하고 이제 새봄을 기다려야 한다. 벌써 봄소식을 알리는 새소리를 듣는 것 같다. 새로운 시편을 구해야겠다. 뜰 안 오동나무에 걸린 밝은 달은 밤중 내내 외롭다. 저녁에 잠깐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뜰 안의 작은 연못을 스쳐간다. 조용하기만 한 밤. 주인이 걸어 놓은 ‘이안정’이란 편액의 뜻을 헤아려 본다. 세상사 넉넉한 인심으로 과연 얼굴에 근심 없이 사는 것이 큰 기쁨이구나.

[참고문헌]: 호남지, 남원지, 조선호남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조인물고」, 「양망유고」, 「효종실록」

김준영(金駿榮)-2


김준영(金駿榮)-2                                                       PDF Download
181842(헌종 8)~1907(융희 1).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덕경(德卿)이고, 호는 병암(炳菴)이다. 전편의 내용을 이어서 여기서는 김준영의 예학을 소개한다.

스승인 전우가 김준영을 위해 지은 「행장(行狀)」에서 그를 이렇게 칭찬했다.

 

“그는 예학에 있어서 특히 힘을 다했다. 주장하는 것마다 모두 근거가 있고 명확하였으며 억지로 끌어 붙이는 일은 절대로 없다.……예를 바꾸는데 있어서 특별히 신중히 했다. 김준영이 말하기를, 권(權)이란 도를 깨달은 군자가 아니면 함부로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약 배움이 부족하면서도 ‘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학문은 병들은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원칙을 지킬 다름이다.”

 

그의 문집인 병암집에서 예와 관련된 서술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김준영은 특히 각종 예제(禮制)에 대한 연구에 세심했는데, 이와 관련해 때때로 스승인 전우와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예제에 대한 김준영의 서술은 비교적 구체적인데, 여기서는 그의 예론만을 언급한다. 김준영의 예론은 시대적 특징이 뚜렷하며 그의 존화양이(尊華攘夷),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존화양이’는 중국(명나라)을 존중하고 오랑캐(청나라)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중화사상의 일부 관념이다. 줄여서 화이론(華夷論)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원래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춘추」에서 나온 말로, 공자가 주나라를 존중해야 한다고 한 존주론(尊周論)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리학에서는 이를 춘추대의(春秋大義)라 하여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또한 ‘위정척사’는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운동으로, 정학(正學)인 성리학과 정도(正道)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위정),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邪學)으로 보아서 배격하는(척사) 운동이다. 이 운동을 하는 정치세력을 ‘위정척사파’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유교 학파이기도 하다. 또한 전통 사회 체제를 고수했으므로 수구당(守舊黨)이라고 불렸다.

그의 예론은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예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예는 사회구성원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그것들이 고정되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 「예기」에는

 

“예가 아니면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어른과 어린이의 지위를 분별할 수 없다. 예가 아니면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의 친함, 혼인이나 서로 왕래하는 사귐을 분별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또한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의 분수도 예가 아니면 정해질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유가의 전통적인 예론이 주로 정치에서의 군신․상하, 윤리에서의 부자․형제․부부․장유․친소 등의 구별을 통해서 ‘예는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다’를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 예론에서 예를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데 쓰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조선이 서양 오랑캐와 일본 오랑캐의 침략을 받고 있을 때, 심지어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시대를 살았던 김준영은 특별히 예가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경계임을 강조했다. ‘중화와 오랑캐를 분별하는 것’이 예의 사회적 기능임을 강조한 것이 김준영의 예론이 가지는 뚜렷한 특징이다.

예의 이러한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의제설(衣制說)」 세 편을 썼다. 예는 사회의 전장제도(典章制度)이고, 의제(衣制)는 그것을 구성하는 중요한 성분이라고 보았다. 중화의 성왕은 ‘반드시 사대부 복장에 대한 제도를 만들어 천하에 대대로 가르침을 전하지만, 오랑캐들은 안장과 말을 집으로 삼고 사냥으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은 옷이 짧고 소매가 좁다. 즉 ‘의제’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만약 사람이 옷을 입지 않는다면 소나 말과 다름없다. 옷을 입었더라도 소매가 짧으면 오랑캐와 같다. 당시 사람들이 조정의 명령에 굴복하여 오랑캐처럼 복장을 바꾸는 것에 직면하여 김준영은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넓은 소매와 좁은 소매 사이는 부모의 유해가 중화가 되느냐 오랑캐가 되느냐 이므로 즉각 결정해야 한다.”

 

둘째, 예는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사회의 전장제도로서의 예는 ‘국가를 다스리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하는 국가의 근본이다. 김준영이 이런 작용을 갖고 있는 예에 대해 논한 것도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입장에서 전개한 것이다. 김준영은 예란 나라를 세우는 근본으로 보고

“정치에 있어서 예로써 풍속을 지도하는 것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

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가 나라의 근본이라는 것은 중화와 조선에서의 근본을 가리킨다. 중화가 중화의 나라가 되고, 조선이 조선이 되는 이유는 바로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오랑캐의 것으로 중화를 변화시키면 조선도 더 이상 조선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예법이 땅에 떨어지면 기강이 끊어진다. 이렇게 되고서도 국가가 국가가 될 수 있겠는가?”

“지금 그 소매를 제거하니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세상의 도를 떠나 더욱 오염되어 국가가 국가가 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김준영의 예는 나라를 세우는 근본으로서의 사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민족의 예의풍속과 민족적 독립성을 보호하여 조선이 일본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이론이다.

셋째, 예의 변화에 신중해야 한다. 김준영의 예론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의 개혁에 있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예제의 개혁에 완전히 반대한 것은 아니다.

 

“고수해야 하면 고수해서 굳세게 계속 따르고, 변통해야 할 때에 변통하는 것 또한 계속 따르는 것이다.”

“전 세대의 그릇된 예에 고쳐야 할 것이 있는데, 고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고쳐서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효(孝)를 행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서술들이 그의 예제 개혁에 대한 융통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난이 눈앞에 닥쳐있는 이때, 예를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만약 ‘오랑캐로써 중화를 변화시킨다’면, 이것은 바로 조선 뿌리의 상실과 조선 민족의 독립성 상실을 의미한다. 이 점을 고려해 김준영은 함부로 변례(變禮)를 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예의 개혁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 조선의 통치자가 의복개량과 단발령 등을 명령한 것을 겨냥하여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군주의 ‘변례’는 이렇지 않고 오랑캐로써 중화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김준영은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이 임금과 신하의 구별보다 엄하다”

 

는 유가의 원칙에 근거해서 당대의 왕의 혼미한 유언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당대 왕의 명령 때문에 폐를 끼치게 되는데도, 그것을 쫒아 짧고 좁은 옷을 입는다면, 이것은 진실로 오랑캐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병암집(炳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병암 김준영 학문의 계승성과 독립성」(마진탁, 「간재학논총」제3집, 간재학회, 2000)

김준영(金駿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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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42(헌종 8)~1907(융희 1).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덕경(德卿)이고, 호는 병암(炳菴)이다. 아버지는 김상억(金相億),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찬(瓚)의 딸이다. 공주 현암(玄岩)에서 출생하였다. 학문이 거의 성숙한 뒤에 간재 전우의 문인이 되었으며, 전우의 여러 제자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의 동문 오진영(吳震泳)은 그를 위해 쓴 「묘갈명」 서문에서 “스승 간재선생 문하에 재덕이 뛰어나고 독실하며 신중한 선비들은 나라가 기울어갈 때 현명한 자이든 우매한 자이든 그 재능에 따라 각기 자질이 더해졌다. 그 덕과 학문의 순수함을 구하고,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성인의 법도를 전하는 것을 보좌하는 후세의 학자 중 병암선생 김공을 넘을 수 있는 자는 없다”라고 썼다. 이는 김준영의 위상을 적절히 나타낸 말이다. 김준영의 학문이 전우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가세가 극도로 곤궁하여 주경야독을 하였으나, 워낙 독실하게 공부하여 임헌회(任憲晦)·신응조(申應朝)·송병선(宋秉璿)·박운창(朴芸牕)·김계운(金溪雲) 등 당시 학자들에게 모두 인정을 받았으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에게 3번씩이나 찾아가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

김준영은 전우를 추종하였으며, 전우는 그의 스승 전재 임헌회를 추종하였다. 전재의 학문은 매산 홍직필에서 나왔고, 매산 홍직필의 학문은 근재 박윤원에서 나왔고, 박윤원의 학문은 미호 김원행을 근원으로 하며, 김원행의 학문은 농암 김창협․삼연 김창흡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며, 김창협․김창흡의 학문은 우암 송시열을 종주로 하며, 송시열은 율곡 이이 제자의 제자이다. 따라서 김준영 성리학은 율곡과 기호학파에 가깝다. 김준영의 이기론(理氣論)과 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설은 일치한다.

이기설(理氣說)과 예학(禮學)에 특히 주력하였으며, 이항로를 중심한 벽문학자(檗門學者)들의 주리설(主理說)과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는 한원진 계열의 학설을 비판하였으며, 반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전우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는 학문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 사이에는 한국 성리학사에 있어서 유명한 ‘인물성동이’논쟁이 있었다.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 것이다. 이 논쟁에서 외암은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동론(同論)을 주장하였고, 남당은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는 이론(異論)을 주장하였다.

논쟁의 결과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양파로 분열되었다. 김준영은 스승인 전우처럼 낙론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김준영은 기질지성은 등급이 가지런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본연지성은 인간이나 사물, 성인이나 보통 사람이 모두 같다고 보았다. 만약 성인과 보통 사람의 본성이 다르게 설정된다면 그들은 덕을 이루어 성인이 되는 희망을 포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이 본래 다르다면 보통 사람들을 넘어 성인으로 들어가는 길이 없으며, 선비는 현자를 희구할 필요가 없고 현자는 성인을 희구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였다.

또한 정부의 개화정책과 천주교에 대하여 적극 반대하는 시국관을 갖는 학자였다. 저서로는⌈병암집(炳菴集)⌋이 전해진다.

병암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 김준영의 시문집이다. 3권 3책으로 석인본이다. 1958년 김준영의 손자 김문호(金文鎬) 등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권두에 전우의 서문과 권말에 오진영(吳震泳)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서(書) 200편, 권2에는 잡저 43편, 권3에는 서(序) 24편, 기 40편, 발 15편, 명·찬(贊) 각 1편, 고축 8편, 제문 13편, 묘갈 5편, 행장 9편, 전(傳) 3편, 시 6수, 부록으로 행장·묘갈·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의 「여김판서(與金判書)」에는 이기설에 관한 그의 학문적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치중화(致中和)와 미발(未發)·이발(已發)을 설명함에 있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학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이·김창협·이간(李柬)·이재(李縡)의 설을 제시한 끝에

 

“내가 본 것과 믿는 것은 이밖에 다시 다른 설이 없다”

 

라고 하여,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모두 같다
(人物性俱同)’

는 낙론 학자들을 지지하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인물성에 대한 견해는 「답조경헌(答趙景憲)」 등에도 나타나 있다. 「답임자경(答林子敬)」에는 ‘의병에 참여하는 것이 옳으냐 산중에 숨어서 보발(保髮)하고 학문을 닦는 길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변한 내용이 있다. 이것은 당시 선비들의 현실 참여에 관한 논쟁에서 스승인 전우의 처지를 해명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밖에 예학(禮學)과 경의(經義)에 관한 문답이 많다.

잡저의 「유집변(柳集辨)」·「유집여기사김씨왕복서의의(柳集與其師金氏往復書疑義)」·「유집심설정안의의(柳集心說正案疑義)」·「독퇴계선생집(讀退溪先生集)」 등은 성리설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이항로를 중심으로 이른바 벽문학자(檗門學者)들의 주리설을 집중적으로 논박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간졸수임창계이설(看拙修林滄溪二說)」에서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비판한 조성기와 임영의 학설을 논박하고, 이들의 학설을 은근히 인정한 김창협·김창흡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으며, 이들의 학설에 적극 찬성한 이항로와 기정진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판하였다. 「독송연재잡저(讀宋淵齋雜著)」에서는 천주교와 개화 정책에 반대하며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성리설에 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조선 말기 성리학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병암집(炳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병암 김준영 학문의 계승성과 독립성」(마진탁, 「간재학논총」제3집, 간재학회, 2000)

 

김준업(金峻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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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인조(仁祖) 때의 사람이다.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여수(汝修). 호는 동계(東溪)이다. 전주 출신이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직제학 김영(金英)의 후손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분연히 항소하였다. 이것이 ‘인목대비 폐비 또는 인목대비 폐모’ 사건으로, 1618년 조선 조정에서 대비였던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西宮)에 감금, 유폐시킨 사건을 말한다.

1614년에는 일곱 명의 서자들이 강도가 되어 상인을 약탈하는 ‘칠서의 변’이 발생했는데, 이때 이이첨 일파는 사건을 확대시켜 이들이 김제남과 연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를 근거로 김제남은 처형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형 당한다. 그 뒤 역적의 딸이며 역적의 어머니인 인목왕후가 대비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1617년부터 인목대비의 폐비론이 나타나게 된다. 이후 경연과 정청에서 인목대비 폐비론의 가부를 논하게 된다. 이때 이이첨과 허균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폐비 여론을 주도하였다.

1년간의 논의 끝에 인목왕후의 폐비가 결정되었다. 이때 곽재우, 정구, 송갑조, 이여빈, 이항복 등은 전은설을 주장하여 친모자는 아니지만 선조의 후비와 아들들이므로 친모, 친형제의 의와 다름이 없다며 인목대비 폐비 반대와 영창대군을 구명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또한 남인이었으나 친북인계 인사였던 이덕형 등도 폐비론에 반대하였다. 고산 윤선도와 미수 허목 등도 인목왕후 폐비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다가 과거 시험 응시자격을 박탈당한다. 같은 북인대북이었던 기자헌 역시 폐비론에 반대하다가 같은 북인의 공격을 받고 면직되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에 감금되었고, 인목왕후의 폐비에 저항한 서인 선비 송갑조는 비밀리에 서궁의 담을 넘어와 인목대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패륜아로 몰려 정죄당하게 된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항소(抗疏)하여 그 그릇됨을 극언하고 과거에는 응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 유일(遺逸)로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24년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고 난이 평정된 뒤에 남은 곡식을 모두 국가에 반납하였다. 고향 전주에서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교육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이괄의 난은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반란이다.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23년 음력 3월에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반정 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다. 그러던 중 1624년 음력 1월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한명련․정충신․기자헌․현집․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하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했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이에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함락시켰다.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하다.

또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의 막하로 행재소(行在所)에 나갔고, 그 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척화(斥和)에 앞장섰다. 정묘호란은 조선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 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이며, 이로 말미암아 후금은 명나라와는 불가능하였던 교역의 타개책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최명룡(崔命龍)·김동준(金東準) 등과 강학하여 삼현(三賢)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는 보광사(葆光祠)에 배향되어 있다. ‘보광사’에는 동계 김준업 이외에 오무당(五無堂) 류정(柳頲), 이락당(二樂堂) 이지도(李至道), 연독재(聯牘齋) 이지성(李至誠), 모암(慕庵) 이언핍(李彦愊)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삼현’ 중의 하나인 최명룡(1567∼1621)은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윤(汝允), 호는 석계(石溪)이다. 이우기(李迂棋)의 문하에서 많은 서책을 섭렵하였다. 변산사(邊山寺)에 들어가 10여년을 밖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역학에 깊고 수학에도 정통하였다 한다.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렸으나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유작으로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국립중앙박물관소장)는 한쪽으로 치우친 편파구도(偏頗構圖)에 주제가 되는 신선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어서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계(浙派系)의 소경산수인물화풍(小景山水人物畫風)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동준(1573∼1661)은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김동기(金東起). 자는 이식(而式), 호는 봉곡(鳳谷)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김구수(金龜壽)이고, 아버지는 생원 김희지(金熙止)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사건이 일어날 무렵 전주에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광해군의 처사에 부화뇌동하여 찬성하는 소를 올리려 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였다. 161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의 추천으로 의금부도사로 임명되고 감찰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고, 적군이 후퇴한 뒤 경기도 양성현감·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전주의 석계사(石溪祠)와 인봉사(麟峯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사계집(沙溪集)」,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조선호남지, 호남지, 전북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종호(金鍾昊)


김종호(金鍾昊)                                                             PDF Download

 

181874(고종 11)∼1949. 근현대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윤청(允淸). 호는 패현(佩弦)으로, 익산군 고현리(古縣里: 오늘날의 이리시 기현동) 출신이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이다.

성균관 박사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투신하여 순직한 매하(梅下) 김근배(金根培)의 아들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김현교(金顯敎)의 손자이다.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약재(約齋) 송병화(宋炳華),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았으며, 시와 글에도 뛰어난 저술을 하였으며, 많은 후학을 가르쳤고, 서예에도 능하였다. 김종호의 유고는 다섯 권이 전해지는데, 이 가운데 ⌈성학십도설집(聖學十圖說集註)⌋1권과 ⌈금강산유람기(金剛山遊覽記)⌋1권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우석문(禹錫文)의 시문집인 ⌈아천집(啞川集)⌋(3권 1책, 석인본)에도 김종호의 서문이 있다.

실제로 김종호에 대한 자료는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김종호의 부친인 김근배의 자료를 조금 보충한다. 특히 아버지 김근배는 익산을 빛낸 근현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김근배(金根培)는 1847(헌종 13)∼1910(융희 4). 조선후기의 유학자이며 우국열사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광원(光元), 호는 매하(梅下)로 전북 익산 출신이다. 김현교(金顯敎)의 아들이며, 수하 조옥승(曺玉承)씨에게 사사하여 시문을 닦았다. 모현동 출신으로 한때 옥구군 수호에 은거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는 아직 약관의 나이로 의병을 모집하려는 토적의거격문(討賊義擧檄文)을 지어 올렸으며, 이듬해 성균관 박사가 되어 문명(文名)을 날렸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관헌을 피하여 나주, 김제, 옥구 등에 은거하면서 청장년을 모아 항일투쟁을 기획하였다. 1905년 11월에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 강제 체결로 국권이 상실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청장년에게 교육을 통한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0년 8월에 일제의 한일합방 뒤 헌병주재 소장을 통하여 그를 회유하기 위한 은사금(恩賜金)을 보내는 등 온갖 위협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였다. 은사금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이완용(李完用)이 15만엔(32억=대략 현재가치로 환산함), 이지용(李址鎔)이 10만엔(20억원), 이재면(李載冕): 83만엔(166억), 윤택영(尹澤榮)이 50만엔(100억), 박영효(朴泳孝)가 28만엔(56억) 등이 있다.

온갖 위협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다가, 죽음으로써 충절을 지키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1910년 12월 13일 돌을 몸에 매고 샘에 빠져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매하유고(梅下遺稿⌋ 4권 2책이 전해지고 있다. 1963년에 건국유공자로 기미독립선언기념회에서 준 표창장과 대통령표창장을 받은 바 있으며, 1980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매하유고⌋는 김종호의 아버지이자 조선 말기의 우국지사 김근배의 시문집이다. 5권 2책으로 석인본인데, 1947년 아들 김종호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소학규(蘇學奎)․오진영(吳震泳)․송기면(宋基冕)의 서문과 권말에 김종호의 발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는 시(詩) 81수, 서(書) 5편, 기(記) 1편, 발(跋) 2편, 설(說) 3편, 논(論) 3편, 제문 4편, 묘표 1편, 행장 2편, 가장 1편, 서(序) 3편이 들어있다. 권3∼5는 부록으로 제문 13편, 만사 207수, 애사 2편, 찬 1편, 상량문 1편, 축문 2편, 기 1편, 행장 1편, 묘지 1편, 묘갈명 1편, 어록·유사·퇴계선생서절요목록(退溪先生書節要目錄)·가간왕복서(家間往復書)·왜적퇴거후인가제고유문(倭賊退去後因家祭告由文)·유고고성문(遺稿告成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書)는 시사와 국가를 걱정하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경전과 처신하는 도리에 대하여 논한 것이 약간 있으며, 특히 전우(田愚)와 왕복한 것이 많다. 잡저 중의 「유서(遺書)」는 헌병소에서 보낸 사은금을 거절하고 자결하면서 자기가 죽은 뒤에 금표(金標)를 헌병소로 보내라는 내용이다. 「회석투정(懷石投井)」은 절명시(絶命詩)로서 수금(讐金)이 몸을 더럽히기 전에 죽어서 가문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시이다. 「사일계서(事一契序)」는 1890년(고종 27) 김종호 등이 스승인 이학중(李學中)을 위하여 조직한 계의 서문이다.

 

최근에 전주역사박물관에는 전북지역 독립유공자 유물이 기증·기탁됐다. 전주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전북지역의 자결순국자 김근배 유물 70점도 기탁되어 연구·전시·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유물의 기증·기탁은 광복 70주년 특별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특별전을 계기로 진행된 것이다. 그의 유물은 총 70점으로, 초상화 1점과 문집인 「매하유고」 2권, 벼루 및 성균관 박사 임명장,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고문서 등이다.

그의 초상화는 조선 말 대표적 초상화가인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작품으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세심하게 표현하는 채용신의 필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채용신은 전북이 낳은 조선시대 최고의 어진화가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을 가리킨다.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채용신은 사진처럼 정밀하고 섬세한 ‘석지필법’을 창안했고 고종 어진을 비롯한 이하응, 최익현, 최치원, 김영상 등 100여 점의 초상화를 남겼다. 또한 화조화, 산수화, 영모화 등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또한 김근배와 김종호의 출생지인 익산은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하며 노령산맥의 지맥인 천호산과 미륵산이 동부에 아름다운 산세를 이루고 있다. 서북부에 함라산 줄기가 이어져 남서로 향하는 구릉과 크고 작은 하천이 비옥한 평원을 이룬다.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 논산시와 부여군에 서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다. 호남선이 남북으로 중앙을 관통하고 익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전라선과 군산선(장항선)이 동서로 통과하며. 호남고속도로는 동부를 지나 금마 진입로에 있고, 1번 국도와 23번 국도 및 10여개의 국도와 지방도 등 전국각지를 이을 수 있는 편리한 교통망이 갖추어져 있다.

익산은 서해와 옥구, 김제 평야를 어머님 품안으로 껴안고 있는 형상이다. 배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물류가 유통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일맥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익산시는 전라선과 호남선, 군산선(장항선)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유동인구가 유난히 많고 익산 공단내에 있는 국내 최대 귀금속단지를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고장 솜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거학(居學) –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라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라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지만 이 『학교모범』은 1582년(선조15) 율곡 선생이 왕의 명에 의하여 지은 책으로 당시 교육제도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청소년·청년 교육을 새롭게 하기 위한 여러 주장들이 들어 있다.

총1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그 순서에 따라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다만 내용상 유사한 독서와 독서의 방법의 항목만 통합하여 총15개의 주제로 소개했는데, 이 글이 마지막에 해당된다.

그런데 당시의 문화적 배경 그리고 교육과 학문의 목적 그리고 그 방법이 오늘날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그 시간적 틈새를 좁히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오늘날의 청년이나 청소년들에게 선생이 말하는 글의 요지를 오해 없이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몇 가지 주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그것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유학 그 가운데서도 성리학의 학문적 성격과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만족할 수준인지 모르겠다. 이제 쉽고 가벼운 주제로서 이 글을 맺으려고 한다.

학교모범』의 열다섯 번째 주제는 학교생활과 관련된 거학(居學)이다. 이것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우리 청소년들은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선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여 짜여 진 시간표대로 공부하다가 집에 돌아온 다음, 학원에 가서 또 공부하다가 밤늦게 돌아와 자는 일이 요즘 다수 청소년들의 생활이다. 수업은 교사의 설명을 듣거나 문제를 풀기도 하고, 때로는 토론과 발표를 하며 필요에 따라 실습을 하거나 견학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다양한 교과를 학습하기 때문에 수업방식이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학교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도 있지만, 대체로 해당 학교의 정해진 프로그램(교육과정)과 규칙(규정)에 따라 진행된다. 문제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대학입시 때문에 수업이 다양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입시위주의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전인적(全人的) 인격함양과 다양한 체험의 기회가 줄어들고, 비판적 사고와 문제해결력을 기르는 데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취업을 위한 입시준비 때문에 대학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본래의 교육목표에 충실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대학은 취업준비 학원의 역할이 더 강조된 ‘취업의 전당’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른바 학문의 전당이란 말은 겨우 대학원에나 진학한 학생들과 교수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이 살았을 그 당시 학교 사정을 어땠을까? 또 어떤 생활태도가 요구되었을까?

 

학교에 있을 때에는 배우는 자의 행동이 모두 한결같이 학교규칙을 따라야 한다.

글을 읽거나 글을 짓거나 식후에 잠깐 노닐며 산책하면서 정신을 한가롭고 여유롭게 만든다.

돌아와서는 하던 공부를 다시 익히고 저녁을 먹은 뒤에도 그렇게 한다.

 

이 부분은 학생의 개인생활에 관한 내용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교의 규칙을 지켜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또 이 내용을 보면 학교는 기숙학교이다. 선생이 살았던 시대의 학생들은 대부분 자기 집과 멀리 떨어져 있는 향교나 성균관에서 공부하려면 기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향교나 성균관의 구조를 보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는데, 그것이 당시 학생들의 기숙사였다. 또 식사도 공동으로 하였는데, 성균관에는 지금도 ‘진사식당’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

개인적인 공부는 독서와 작문이었다. 독서의 교재는 대개 유교의 경전과 사서(史書)였고, 작문의 경우는 시와 문장을 짓는 일이었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공부의 내용이 인문학에 국한되는 것이지만, 이 또한 대단한 독서량이 필요했다. 참고로 앞서 독서를 주제로 말할 때 소개했듯이 선생이 제안하는 독서의 순서는 『소학』부터 시작하여 『대학』·『근사록』·『논어』·『맹자』·『중용』에 이어 오경(五經)과 『사기』 등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유학과 역사에 관련된 책이다.

그 종류와 내용면에서 오늘날 학생들이 읽는 책과 꽤 거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학이나 한국철학과 동양철학 또는 고전문학이나 중국문학 또 한국사나 중국역사를 전공한 대학생 이상은 아직도 이런 책을 한문으로 공부하고 있다. 결코 골동품 같은 책들이 아니다. 관심이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읽어두면 좋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처럼 공부 시간 틈틈이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실 독서는 독서로서만 끝내서는 안 된다. 그 독서한 내용에 대한 사색이 필요하다. 그래서 산책을 하면서 그 내용을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을 텅 비게 하여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제 선생은 수업현장에서 여럿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한다.

 

여럿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강론(講論)으로 서로 성장하게 하고 예법에 맞는 몸가짐으로써 가지런히 하고 엄숙하게 한다.

만약 선생으로서 스승이 학교에 있으면 읍(揖)을 행한 후 질문하여 편안히 앎을 보태되 마음을 비우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여 응용해 본다.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나 책에 대해서는 질문하여 심력(心力)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강론으로 서로 성장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듯하다. 이것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과 관계되는데, 가르치고 배우다보면 배우는 사람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게 된다는 뜻으로 서로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또 바른 자세와 예법에 맞는 몸가짐은 비록 예법은 조금 다를지라도 오늘날도 학교에서 강조하고 있다. 스승에게 읍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 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할 때 반장이 ‘선생님께 경례’하는 것과 유사한데, 손을 앞으로 모아들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는 옛날 식 인사이다.

여기서 인상 깊은 점은 질문을 하라는 내용이다. 요즘 학생들은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그런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지적 호기심이 없기 때문인데, 아마도 지나친 입시교육으로 이미 가공되고 만들어진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에 지친 탓인지 모르겠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어떤 문제를 고민해서 질문할수록 머릿속에 깊이 남고, 그 답을 찾아냈을 때의 희열 때문에 공부에 즐거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 맛에 또 공부를 하게 되었다. 유명강사의 강의가 실제 큰 도움이 안 되는 이유는 너무 설명을 잘해준 탓에 들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지만, 정작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학생이 스스로 고생하거나 노력해서 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한 후 듣는다면 효과가 크겠다.

끝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나 책은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유학과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예컨대 불교나 노자나 장자 또는 기타 잡술에 관계된 책이며, 또 유학 안에서도 양명학(陽明學)처럼 성리학이 아닌 학문이 그것이다. 모두 이단(異端)이나 외도(外道)로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독서에 제한을 두지는 않지만 성장과 학습에 해로운 것은 피해야 한다.

이상은 비록 조선시대의 학교생활에서 지켜야 할 내용이지만, 우리가 참고할 것도 적지 않은 것은 중요한 교육적 원리나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옛날사람의 지나간 말로만 여기지 말고, 옛것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발견한다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독경(篤敬) – 자기 마음을 감독하라


자기 마음을 감독하라

 

보통의 어린이들은 세상 물정을 몰라서, 대개 행동의 준칙을 외부적인 것에 의존한다. 그래서 부모나 교사의 가르침을 따라 행동한다.

그러다가 청소년이 되면 부모나 교사의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거나 거기에 반항하기도 하며, 자신이나 동료의 감정이나 생각에 충실하기도 하고 때로는 연예인과 같은 우상으로 여기는 인물을 따라 하기도 한다.

성인이 되면 그 양상은 더 복잡하다. 어떤 경우는 그 행동의 준칙이 비록 부모나 교사의 가르침에서 종교나 철학 또는 특정한 어떤 사상의 그것으로 대체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그것을 추종한다는 의미에서는 그 기준이 외부에 있다. 이보다 한 단계 진전된 사람의 경우는 그런 사상이나 철학 또는 종교의 가르침을 내면화하여 마치 자신의 생각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자기행동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기준의 여전히 자기 외부의 종교나 사상에 있다. 또 드물게 어떤 이들은 자기 행위의 입법자와 심판관이 모두 자기 자신인 사람도 있다.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자율적으로 정한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바로 이때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감독 또는 심판하는 정신의 기능 또는 역할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처럼 인간은 어렸을 때는 대개 부모나 교사를 공경(恭敬)하고, 자라면서 인류의 훌륭한 스승을 존경(尊敬)하며, 종교를 가짐으로써 경천(敬天)·경배(敬拜)하여 신을 섬기며 동시에 경건(敬虔)한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와 달리 앞서 말한 자기 자신이 자기 행위의 입법자요 심판자의 경우에는 무엇을 공경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떤 경건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사실 이런 질문은 윤리적·도덕적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중요한 질문이다. 유학은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많은 변모를 하였는데, 특히 송대의 성리학이 완성된 이후 앞서 말한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학의 세계관에서는 그리스도교와 같은 절대적인 인격신이 없으므로 자율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감독하거나 살피거나 유지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한 학문적 태도 또는 자세를 경(敬)이라 불렀다. 이렇듯 경이란 내 마음의 검찰이요 심판관과 같다. 당시의 유학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敬)이라는 글자를 대개 ‘공경(恭敬)하다’라고 풀이하는데, 그 뜻이 대체로 공손히 섬긴다는 의미여서, 철학적으로 변화된 의미를 다 담지 못한다. 경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낱말은 존경(尊敬)·경천(敬天)·경로(敬老)·경애(敬愛)·경배(敬拜) 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敬虔)·경외(敬畏)·외경(畏敬) 등의 엄숙하거나 삼간다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모범』의 열네 번째 주제는 바로 이 경(敬)을 돈독히 하라는 독경(篤敬)이다. 이 말은 앞장에서 말한 충(忠)이 포함된 충신(忠信)과 함께 『논어』에 ‘행동이 독경하다’는 ‘行篤敬’이라는 말에 등장하는데, 이 독경의 풀이를 놓고 여러 학자들의 다른 주장이 있다.

그 요지는 독(篤)과 경(敬)을 독립된 두 개의 술어로 보아 ‘행동이 중후하고 공경하다’로 볼 것인지, 아니면 독(篤)만을 술어로 보아 ‘행동이 경에 돈독하다’라고 볼 것인지 크게 구별된다. 율곡 선생은 ‘독경은 경에 돈독한 것[篤敬者, 敦篤於敬]’으로 풀이한 남송의 장식(張栻)의 견해를 따랐다. 선생이 이를 따른 데는 조선 유학사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 등이 경을 중시하여 논의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배우는 자들이 덕에 나아가고 학업을 닦는 일은 오로지 경을 돈독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경에 돈독하지 않으면[不篤於敬] 다만 이것은 빈말일 뿐이다.

그래서 속의 마음과 겉의 행동이 하나같아야 하고, 이 경을 돈독히 하는 자세에 조금도 멈추거나 끊어지는 틈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말에는 가르침이 있고 행동에는 법도가 있으며 낮에는 하는 것이 있고 밤에는 얻는 것이 있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도 보존되는 것이 있고 쉴 때에도 길러지는 것이 있게 된다.

비록 공부하는 노력을 오랫동안 하더라도 그 효과를 섣불리 보려고 하지 말고 오직 날마다 부지런히 힘쓰다가 죽은 뒤에라야 그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학문이다.

만약 이것을 힘쓰지 않고 단지 변설을 잘하고 박식함을 가지고 자신을 꾸미는 도구로 삼는 자는 유학을 해치는 도적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용문의 맨 앞 첫 문장은 조선 초 학자 김종직도 했던 말이다. 전체 내용을 보면 선생이 말한 경이란 단순히 외적인 대상만을 두려워하거나 공경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송대 이후 조선까지 이 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송대에는 경을 주일무적(主一無適) 곧 마음이 하나에 집중하여 다른 데로 옮겨감이 없는 상태로 해석했다.

그래서 공부태도에서 경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치를 찾을 것을 요구하는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주장했고, 행동하기 전이나 그 이후에도 틈이 없게 경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요구했다. 조선의 김굉필은 마음을 하나에만 집중시키는 것으로 풀이하였고, 조광조는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로 보았으며, 이언적(李彦迪)은 활동하거나 머물러 있거나 인간의 내면과 외적인 행동을 꿰뚫어 적용되는 마음의 상태를 일컬었으며, 특히 이황은 경을 그의 학문의 중심에 놓고 논의하였는데, 인간다움을 실천하려는 인간의 자율적 정신에 해당된다.

이런 맥락에서 율곡 선생의 경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이 경만 말하지 않고 『논어』에 있는 말을 끌어와 독(篤)이라는 글자를 덧붙임으로써 더욱 강조하였다고 하겠다. 그래서 마음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에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며 사람이 죽은 뒤에라야 경을 할 필요가 없느니, 경이란 마음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기를 감독하고 심판하는 마음의 고등기능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교(儒敎)는 신이 필요 없는 고등종교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유학자들이 불교는 물론이고 서양의 그리스도가 전파되었을 때도 그것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완벽한 도덕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재물을 구하기도 명예를 탐하기도 한다. 설령 선생의 주장처럼 살아온 선비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조선이나 지금의 사회가 이상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모두가 이러한 경을 돈독히 함으로써 학문을 한다면 그렇게 되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만약 이것을 힘쓰지 않고 단지 변설을 잘하고 박식함을 가지고 자신을 꾸미는 도구로 삼는 자는 유학을 해치는 도적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한탄을 한 것 같다. 모든 철학이 그렇듯이 그 논리대로 모든 사람이 이상적 인격자가 되기 어렵다는 데 그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 한계는 모든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 수 없는 이유와 관계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이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대는 문화도 다양하고 종교도 다양하며 철학도 다양하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문화나 철학 그리고 종교를 섬기고 따르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자율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거나 감독하는 또 다른 마음이 요청된다. 그것이 자신이 경외하는 신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양심의 소리일수도 있으며 달리 초자아(super ego)나 참나[眞我]든 뭐가 되었든 간에 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렇다면 결국 제일 두렵고 조심해야할 상대는 타자가 아니라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이다.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는가?

상충(尙忠) –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라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라

 

옛날 선비들은 학문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이 그것이다.

원래 이 구별은 『논어』에 등장하는데, 직역하면 전자는 자기를 위한 학문, 후자는 남을 위한 학문이다. 얼핏 보아 전자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학문이고 후자는 남을 위한 좋은 학문일거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 있겠다. 그러나 뜻은 정반대이다.

본래의 뜻은 전자는 쉽게 말해 참된 자기를 위한 학문 곧 자신의 인격이나 덕을 위한 학문이며, 후자는 남에게 인정받거나 보이기 위한 또는 남을 가르치고자 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런데 자신의 인격을 완성한 사람이 어찌 남을 가르치는 일이 없겠냐마는 그러니까 공부하는 동기자체가 다르다 하겠다.

이렇게 학문의 동기나 목적에서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것을 해석해 보면, 위기지학이 되는 동기는 자기 안에 있고, 위인지학의 그것은 자기 밖에서 온다. 가령 내가 왜 공부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좋은 성적을 얻어 부모에게 칭찬을 받고, 또 일류대학에 진학하여 이웃과 친척들로부터 인정받고 부러움을 사며, 그 대학을 졸업하여 사람들이 선망하는 지위에 올라 명예를 얻고, 좋은 수입으로 행복하게 보이며 살려고 한다면, 그 동기는 분명 가족이나 친지 이웃 그리고 남의 시선이라는 외부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동기는 대개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외부의 인정이나 평판보다는 바람직한 자아실현이나 인격완성에 관심을 갖고 남이 보든 안 보든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 공부의 동기가 자기 안에 있다고 할 것이다. 성인(成人)이 되어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다.

비단 공부만이 아니라 직장일이나 사회생활에서 나의 행동의 동기가 이렇게 외부의 평판이나 시선에 있느냐 아니면 내부의 성실성이나 추구하는 가치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행위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특히 현대는 상업적인 문화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도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되어 자기를 홍보해야만 제대로 대우를 받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력서나 프로필 등을 통해 실제의 능력이나 경력을 과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남의 눈에 띄거나 실제보다 잘 보이게 꾸며서 제시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내면의 성실성이나 충실함을 배제하고 오로지 외적인 것만 숭상하다 보니, 꿋꿋한 원칙 없이 권력자나 부자 앞에서 한없이 비위를 맞추거나 비굴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반면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면 거만하고 야박하게 구는 풍토가 자리 잡게 된다.

바로 이런 전형적인 모습이 이른바 최근의 ‘최〇〇 국정농단 사건’에서 보이듯 최〇〇 앞이나 권력 실세에게 보여준 공무원들의 아첨하고 비굴한 행동과 또 일부 재벌회장이나 그 가족이 자신들의 돈만 믿고 보여준 인간 경멸과 모욕의 거만한 ‘갑질’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내면의 성실로서 최선을 다했다면, 과연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런 문제는 비단 오늘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논어』에서 두 종류의 학문을 제시하였고, 율곡 선생 또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등장하는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였다.

이 『학교모범』의 열세 번째 주제는 바로 이런 문제와 관련된 문제로서 충(忠)을 숭상하는 상충(尙忠)이다. 여기서 말하는 충이란 충실·성실하거나 참마음·정성·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럼 선생의 견해를 살펴보자.

 

충실한 마음과 꿋꿋한 절개는 서로 속과 겉이 된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는 절개가 없이 두루뭉술한 것을 충실한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근본적인 덕이 없이 과격한 것으로 꿋꿋한 절개로 삼아서도 안 된다.

 

선생은 충을 다루면서 그것을 내면적인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고 내면과 외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이것은 내면적인 덕과 외적인 행동의 문제로서 내용과 형식의 문제와 유사하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이 무질서하거나 애매하고 내용이 없으면 형식 또한 공허하기 때문이다. 곧 행동에 절개가 없으면 그가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 알 수 없으며, 덕이 없이 행동하는 절개는 조폭의 의리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나 신념에 충실하거나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충이고, 그런 가치의 실현을 위해 외부의 유혹이나 협박 따위에 넘어가지 않는 꿋꿋한 행동이 절개 또는 지조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그렇듯이 그 옛날 선생이 살았던 조선시대에도 이런 내면적 성실함이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선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명색이 학문을 한다는 선비들이 재주와 현명함을 핑계로 남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것은 그 피해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비들의 행동을 보면 내면이 충실하지 않다. 다시 말해 내적인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자신의 학식이나 인격이 완성될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이니, 지적되는 선비들은 아직 학식이나 인품이 보잘 것 없다고 하겠다. 그러니 내면이 성실하거나 충실할 수도 없고 그 때문에 꿋꿋한 절개는커녕 남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거만함만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충(忠)을 달리 충성(忠誠)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잘못 알고 사용하는 일이 더러 있다. 가령 맹목적으로 윗사람을 섬길 때 ‘충성을 다 바친다.’고 말하는데, 조폭의 부하가 두목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도 충성인가? 또 잘못된 지도자의 결정에 앞 다투어 따르는 것도 충성인가?

물론 지도자가 잘 할 때 따르는 것도 충성이지만, 잘못할 때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길로 가도록 조언하는 것도 충성이다. 과거 선비들 가운데는 왕이 정치를 잘 할 때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된 길을 가면 목숨을 걸고 간(諫)하는 것도 충성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런 내면적 충성이 있었기에 목숨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 있는 행동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충성이다.

오늘날 옛날처럼 충성과 절개 또는 지조를 강조하지도 않고, 또 그런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면, 그만큼 중요한 가치도 별로 없다. 단지 우리가 충성이니 절개니 하는 말 따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내면의 성실함 그리고 그 성실함에서 우러나오는 일관된 행동을 소유한 사람이 어디나 없겠는가?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고, 시험의 답을 몰라서 고민할 때 누가 답안지를 보여줘도 커닝을 안 하는 학생들도 있다. 더구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벼슬자리마저도 사양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해 각자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가치를 실천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다. 그러나 한편 거액의 돈이 생기고 직장에서의 승진을 한다면, 아무 줏대 없이 비굴해지거나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그 돈의 액수가 크고 승진하려는 자리가 높을수록 그러해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사람들이 만약 고위직 공무원이거나 정치가라면, 나라는 그만큼 더 잘못되어 갈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게 된다.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어찌 중요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