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충(尙忠) –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라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라

 

옛날 선비들은 학문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이 그것이다.

원래 이 구별은 『논어』에 등장하는데, 직역하면 전자는 자기를 위한 학문, 후자는 남을 위한 학문이다. 얼핏 보아 전자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학문이고 후자는 남을 위한 좋은 학문일거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 있겠다. 그러나 뜻은 정반대이다.

본래의 뜻은 전자는 쉽게 말해 참된 자기를 위한 학문 곧 자신의 인격이나 덕을 위한 학문이며, 후자는 남에게 인정받거나 보이기 위한 또는 남을 가르치고자 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런데 자신의 인격을 완성한 사람이 어찌 남을 가르치는 일이 없겠냐마는 그러니까 공부하는 동기자체가 다르다 하겠다.

이렇게 학문의 동기나 목적에서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것을 해석해 보면, 위기지학이 되는 동기는 자기 안에 있고, 위인지학의 그것은 자기 밖에서 온다. 가령 내가 왜 공부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좋은 성적을 얻어 부모에게 칭찬을 받고, 또 일류대학에 진학하여 이웃과 친척들로부터 인정받고 부러움을 사며, 그 대학을 졸업하여 사람들이 선망하는 지위에 올라 명예를 얻고, 좋은 수입으로 행복하게 보이며 살려고 한다면, 그 동기는 분명 가족이나 친지 이웃 그리고 남의 시선이라는 외부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동기는 대개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외부의 인정이나 평판보다는 바람직한 자아실현이나 인격완성에 관심을 갖고 남이 보든 안 보든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 공부의 동기가 자기 안에 있다고 할 것이다. 성인(成人)이 되어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다.

비단 공부만이 아니라 직장일이나 사회생활에서 나의 행동의 동기가 이렇게 외부의 평판이나 시선에 있느냐 아니면 내부의 성실성이나 추구하는 가치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행위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특히 현대는 상업적인 문화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도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되어 자기를 홍보해야만 제대로 대우를 받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력서나 프로필 등을 통해 실제의 능력이나 경력을 과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남의 눈에 띄거나 실제보다 잘 보이게 꾸며서 제시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내면의 성실성이나 충실함을 배제하고 오로지 외적인 것만 숭상하다 보니, 꿋꿋한 원칙 없이 권력자나 부자 앞에서 한없이 비위를 맞추거나 비굴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반면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면 거만하고 야박하게 구는 풍토가 자리 잡게 된다.

바로 이런 전형적인 모습이 이른바 최근의 ‘최〇〇 국정농단 사건’에서 보이듯 최〇〇 앞이나 권력 실세에게 보여준 공무원들의 아첨하고 비굴한 행동과 또 일부 재벌회장이나 그 가족이 자신들의 돈만 믿고 보여준 인간 경멸과 모욕의 거만한 ‘갑질’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내면의 성실로서 최선을 다했다면, 과연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런 문제는 비단 오늘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논어』에서 두 종류의 학문을 제시하였고, 율곡 선생 또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등장하는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였다.

이 『학교모범』의 열세 번째 주제는 바로 이런 문제와 관련된 문제로서 충(忠)을 숭상하는 상충(尙忠)이다. 여기서 말하는 충이란 충실·성실하거나 참마음·정성·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럼 선생의 견해를 살펴보자.

 

충실한 마음과 꿋꿋한 절개는 서로 속과 겉이 된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는 절개가 없이 두루뭉술한 것을 충실한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근본적인 덕이 없이 과격한 것으로 꿋꿋한 절개로 삼아서도 안 된다.

 

선생은 충을 다루면서 그것을 내면적인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고 내면과 외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이것은 내면적인 덕과 외적인 행동의 문제로서 내용과 형식의 문제와 유사하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이 무질서하거나 애매하고 내용이 없으면 형식 또한 공허하기 때문이다. 곧 행동에 절개가 없으면 그가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 알 수 없으며, 덕이 없이 행동하는 절개는 조폭의 의리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나 신념에 충실하거나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충이고, 그런 가치의 실현을 위해 외부의 유혹이나 협박 따위에 넘어가지 않는 꿋꿋한 행동이 절개 또는 지조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그렇듯이 그 옛날 선생이 살았던 조선시대에도 이런 내면적 성실함이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선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명색이 학문을 한다는 선비들이 재주와 현명함을 핑계로 남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것은 그 피해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비들의 행동을 보면 내면이 충실하지 않다. 다시 말해 내적인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자신의 학식이나 인격이 완성될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이니, 지적되는 선비들은 아직 학식이나 인품이 보잘 것 없다고 하겠다. 그러니 내면이 성실하거나 충실할 수도 없고 그 때문에 꿋꿋한 절개는커녕 남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거만함만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충(忠)을 달리 충성(忠誠)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잘못 알고 사용하는 일이 더러 있다. 가령 맹목적으로 윗사람을 섬길 때 ‘충성을 다 바친다.’고 말하는데, 조폭의 부하가 두목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도 충성인가? 또 잘못된 지도자의 결정에 앞 다투어 따르는 것도 충성인가?

물론 지도자가 잘 할 때 따르는 것도 충성이지만, 잘못할 때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길로 가도록 조언하는 것도 충성이다. 과거 선비들 가운데는 왕이 정치를 잘 할 때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된 길을 가면 목숨을 걸고 간(諫)하는 것도 충성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런 내면적 충성이 있었기에 목숨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 있는 행동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충성이다.

오늘날 옛날처럼 충성과 절개 또는 지조를 강조하지도 않고, 또 그런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면, 그만큼 중요한 가치도 별로 없다. 단지 우리가 충성이니 절개니 하는 말 따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내면의 성실함 그리고 그 성실함에서 우러나오는 일관된 행동을 소유한 사람이 어디나 없겠는가?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고, 시험의 답을 몰라서 고민할 때 누가 답안지를 보여줘도 커닝을 안 하는 학생들도 있다. 더구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벼슬자리마저도 사양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해 각자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가치를 실천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다. 그러나 한편 거액의 돈이 생기고 직장에서의 승진을 한다면, 아무 줏대 없이 비굴해지거나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그 돈의 액수가 크고 승진하려는 자리가 높을수록 그러해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사람들이 만약 고위직 공무원이거나 정치가라면, 나라는 그만큼 더 잘못되어 갈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게 된다.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어찌 중요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