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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연과 송석구의 저술 비교1 – 저자 소개와 목차

#7. 황준연과 송석구의 저술 비교1 – 저자 소개와 목차

3. 황준연의 『율곡철학의 이해』와 송석구의 『율곡의 철학사상』

3.1 율곡 철학을 소개한 두 권의 책

황준연과 송석구는 모두 율곡 철학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들이다. 황준연은 1948년생이며 송석구는 그보다 8년 빠른 1940년생이다. 황준연은 1989년에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율곡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 『성학집요』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는데 송석구는 그보다 8년 먼저, 즉 1981년에 『율곡의 철학사상 연구 : 성의정심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동국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두 논문의 제목이 매우 유사한데, 부제목을 붙이는 방식까지 비슷하다. 다만 황준연은 『성학집요』라는 율곡의 저술을 중심으로 율곡의 철학사상을 연구했으며, 송석구는 ‘성의정심(誠意正心)’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율곡의 철학사상을 연구한 것이 다르다.
이 두 학자가 발표한 단행본 제목도 매우 유사하다. 황준연은 학위를 받고 나서 6년 뒤인 1995년에 『율곡철학의 이해』라는 단행본을 발표했으며, 송석구는 학위를 받고 3년 뒤인 1984년에 『율곡의 철학사상』이라는 저술을 발표했다. 이 두 책은 11년의 시간 차이로 두고 발표되었다. 송석구의 저술을 황준연이 얼마나 잘 수용하고 또 그것을 극복하였는지, 두 사람이 주장하는 바가 얼마나 서로 다른지 하는 점이 이 두 저술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2 저자 소개

황준연(1948∽)은 전남 목포 출신으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철학 및 조선 성리학을 연구하여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탈리아, 중국, 미국 등지에서 방문학자 생활을 하였으며, 육군사관학교, 원광대학교, 전북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저서로는 여기에서 소개하는 『율곡 철학의 이해』(1995) 외에, 『한국사상의 이해』(1992), 『이율곡, 그 삶의 모습』(2000), 『한국사상과 종교 15강』(2007), 『신편 중국철학사』(2009), 『중국철학과 종교의 탐구』(2012), 『『한비자』 읽기』(2012), 『중국철학의 문제들』(2013) 등이 있다.
황준연이 발표한 율곡 관련 논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1차 사칠논변자료의 판본에 관하여」, 『유교사상연구』18, 2003(이명수와 공동 집필)
2) 「율곡의 인성론 :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중심으로」, 『율곡사상연구』1, 1994
3)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에 관한 비교연구」, 『성곡논총』21, 1990
4) 「율곡사상에 나타난 “우환의식”; 『성학집요』와 상소문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25, 1985
5) 「율곡의 사회사상에 대한 연구」, 『동대논총』10, 1980
이러한 논문은 주로 1980년대와 90년대에 발표되었으며, 주로 사회사상에 대한 연구와 『성학집요』에 관한 연구가 있다.

한편 송석구(1940∽)는 충남 대전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율곡철학 연구로 철학박사를 받았다. 국립대만대학교 철학연구소에 1년간 수학한 바 있으며,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이후 동국대학교 의료원장, 총장, 동덕여자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 총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송석구 교수의 율곡철학 강의』(2015), 『한국의 유불사상』(1997), 『율곡의 교육사상』(1993), 『불교와 유교』(1993), 『율곡의 철학사상연구: 성의정심을 중심으로』(1987), 『무상을 넘어서』(1985)등이 있다.
율곡과 관련된 연구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율곡학의 지평 확장을 위한 탐색」, 『율곡사상연구』4, 2001
2) 「율곡의 시대와 생애」, 『율곡사상연구』1, 1994
3) 「율곡의 신군주론과 정치개혁」, 『율곡사상연구』1, 1994
4) 「율곡의 정치사상」, 『율곡사상연구』1, 1994
5) 「이이의 근대의식」, 『유학연구』1, 1993
6) 「율곡의 형이상학과 실천철학」, 『동국』19, 1983

주로 1880년대, 90년대에 발표된 것으로 율곡의 정치사상과 정치론에 관한 논문이 많은 편이다.

3.3 목차 소개

황준연 저 『율곡철학의 이해』는 크게 3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별로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부 율곡 사상의 배경
제1장 들어가는 말
제2장 율곡의 생애와 학문 태도
제3장 율곡 사상 형성의 사상사적 배경

제2부 율곡의 철학 사상
제4장 율곡 철학 사상의 본질
제5장 율곡 성학 사상의 구조와 내용
제6장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에 대한 비교 검토

제3부 율곡의 경세 사상
제7장 유교에 있어서 경세의 의미
제8장 율곡 경세 사상의 영역

제2부가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 즉 율곡의 철학에 관한 내용이다. 목차 구성을 이 책의 제목 ‘율곡 철학의 이해’에 비추어보면 저자는 율곡 철학을 그 배경에서 이해하고(제1부) 또 그것을 현실에 어떻게 적응시키려고 하였는지 하는 측면에서 이해하고자(제3부)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율곡 철학 자체만이 아니라 율곡 철학을 둘러싼 배경과 영향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 책의 끝 부분에는 참고문헌이 있으며 5편의 부록이 다음과 같이 첨부되어 있다.
부록 1 : 율곡의 <성학집요> 목록도
퇴계의 <성학십도> 제2 서명도
퇴계의 <성학십도> 제8 심학도
부록 2 : 중국 철학계의 율곡에 대한 관심
부록 3 : 율곡 선생 연보 (박서채 문집본)

참고로 이 책의 집필 바탕이 된 황준연의 박사학위 논문 『율곡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 『성학집요』를 중심으로』의 목차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
제2장 율곡철학사상의 본질
제1절 이기론
제2절 사단칠정론
제3절 심성론
제4절 격치성정론(格致誠正論)
제3장 율곡 성학(聖學)사상의 구조와 내용분석
제1절 중국철학의 성학
제2절 『성학집요』의 저술 동기
제3절 율곡 성학사상의 논리구조
제4절 ‘미상’
제5절 율곡 『성학집요』와 퇴계 『성학십도』의 비교검토
제4장 결론

이러한 학위 논문의 내용은 『율곡철학의 이해』 제2부 ‘율곡의 철학 사상’에 담겨 있다.

한편, 송석구 저 『율곡의 철학사상』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언(序言)
제1장 태극에 관한 이해
제2장 이기(理氣)에 관한 새로운 접근
제3장 심성정(心性情)의 전개
제4장 실천에 관한 이론
율곡의 연표

율곡의 철학사상을 태극론, 이기론, 심성론, 실천론 등 4가지로 나누어 목차를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제2장 이기론 부분에서는 1) 화담과 퇴계의 극복, 2) 독자적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3) 이기지묘(理氣之妙)로 나누어 논하고 제3장 심성론 부분에서는 1)심성정의(心性情意)의 문제, 2)사단과 칠정설의 문제, 3)본연·기질성의 문제, 4) 인심도심의 이론으로 나누어 세밀하게 논하였다.
이렇듯 송석구는, 율곡 철학사상의 배경과 영향까지 다룬 황준연과는 달리 율곡의 철학사상 그 자체만을 다루었다. 송석구의 제1장, 제2장, 제3장의 내용은 황준연의 저술 제4장 ‘율곡 철학 사상의 본질’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준연의 책 송석구의 책
2

4장 율곡 철학 사상의 본질

제1절 태극이란 무엇인가?

제1장 태극에 관한 이해
제2절 이기에 대한 율곡의 견해 제2장 이기에 관한 새로운 접근
제3절 율곡은 사단칠정의 문제를 어떻게 보았는가?

제4절 사람의 마음과 본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제5절 ‘격치’와 ‘성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제3장 심성정(心性情)의 전개

아울러 송석구의 책 제4장 ‘실천에 관한 이론’부분은 황준연의 책 제2부 제5장, 제6장, 제3부 제7장, 제8장에 대응된다. 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준연의 책 송석구의 책
2부 율곡의 철학 사상

제5장 율곡 성학 사상의 구조와 내용

제6장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에 대한 비교 검토

3부 율곡의 경세 사상

제7장 유교에 있어서 경세의 의미

제8장 율곡 경세 사상의 영역

제4장 실천에 관한 이론

그런데 송석구가 제4장에서 논하는 ‘실천’의 문제는 수양론이며 수기론(修己論)으로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도덕적 실천, 즉 수양의 문제를 다루었다. 구체적으로 제4장의 내용(각 절의 제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절 수기(修己)와 입지
제2절 성인에의 이상
제3절 실리·실심과 참(誠)
제4절 참(誠)과 중화
제5절 기질의 교정
제6절 성의정심의 독자적 전개
제7절 수기론의 특징

이것을 보면 송석구가 제4장에서 논의하는 율곡의 실천론은 ‘내성(內聖, 안으로 성인을 추구함)’의 문제이다. 반면에 황준연의 책 제5, 6, 7, 8장에서 논하는 문제는 치인(治人)의 문제이며 외왕(外王, 밖으로 임금의 덕을 갖춤)의 실천이다. 황준연의 책 제5, 6, 7, 8장의 세부 장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5장 율곡 성학 사상의 구조와 내용
제1절 <성학집요> 저술의 시대적 배경
제2절 <성학집요>에 나타난 우환 의식이란 무엇인가?
제3절 중국 철학에서의 성학의 개념
제4절 성학 체계의 논리적 구조
제5절 <성학집요>의 내용
제6절 성학 사상의 이상 : 대동사회

제6장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에 대한 비교 검토
제1절 <성학십도>에 나타난 퇴계 철학의 이상
제2절 <성학십도>에 대한 율곡과 퇴계의 문답

제7장 유교에 있어서 경세의 의미
제1절 경세란 무엇인가?
제2절 경세의 주체는 누구인가? – 유자론

제8장 율곡 경세 사상의 영역
제1절 정치에 대한 율곡의 기대는 어떠했는가?
제2절 바람직한 사회는 어떠한 것인가?
제3절 국방에 대한 율곡의 견해는 어떠했는가?

여기에서 황준연이 논하는 내용은 율곡의 철학이 추구하는 ‘성학(聖學)’과 ‘대동사회’ 그리고 경세사상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한마디로 ‘치인(治人)’, 즉 ‘외왕(外王)’의 사상이다. 황준연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율곡의 철학사상을 『성학집요』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이 책(『율곡 철학의 이해』)에도 그러한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에 송석구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율곡의 철학사상을 ‘성의정심(誠意正心)’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성의 정심’은 바로 ‘수기(修己)’, 수양의 문제이며, ‘내성(內聖)’의 사상이다. 송석구의 책은 바로 이러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송석구가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동국대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저자의 이러한 관심에 수긍이 간다.

황의동과 임옥균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와 주장

#6. 황의동과 임옥균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와 주장

2.4 저자는 왜 이 책을 썼는가?

황의동은 『율곡 이이』의 살림출판사의 ‘e시대의 절대사상’이라는 고전 시리즈의 한 권으로 기획되었다. 출판사의 소개(「e시대의 절대사상을 펴내며」)에 따르면 ‘고전을 잃어야 하지만 읽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면, 고전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응당 고민해야하지 않을까요? …… 고전에 대한 지나친 경외심을 버리고, ……지금 이 시대에 맞는 현대적 감각의 고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이 시리즈는 ‘고전에 담긴 지혜를 재미있게 습득할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했고, 난해한 전문 용어나 개념어들을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저자 황의동은 이 책은 이러한 기획안에 충실하게 내용을 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동일한 주제로 집필하였지만 매우 학술적인 임옥균의 『이이』와는 다르다. 황의동의 책은 내용구성이 읽기 쉽고 설득력 있게 짜여 있다. 왜 우리가 율곡을 읽어야 하는지(1장 중 ‘율곡의 매력’), 율곡의 위상은 어떤 것인지(4장), 율곡 철학의 현대적인 의미는 무엇인지(5장)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배경이 바로 고전을 친근하게 소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고전 자체를 쉽게 읽는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120쪽에 가까운 분량(이 책의 거의 반 정도)을 할애하여 다양한 율곡의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임옥균의 『이이』는 율곡의 저술(『동호문답』) 소개가 80쪽 정도로 책 전체의 1/3에 못 미친다.
11쪽에서 저자 황의동은 우리가 율곡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율곡이 1) 세계에 자랑할 만한 철학자이며, 2) 학문적으로 탁월하고, 3) 송대 성리학에 기반을 두었지만 모방만 하지는 않았으며, 4) 이기지묘(理氣之妙),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 등 독창적인 화두를 제시하였고, 5)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전인적 인간을 추구하였으며, 그의 철학에는 6) 민생과 나라를 근심 걱정하는 우환의식이 녹아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어서 저자는 제1장 ‘율곡과의 만남’에서 자신이 율곡과 만나게 된 계기, 율곡의 매력, 그리고 율곡학의 두 줄기 즉 성리학과 실학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저자의 서문과도 같은 이 글에서 그는 ‘(율곡의) 학문을 대중에게 쉽게 알리고 서양학문과 접목해서 세계적인 학문으로 키워야 한다’(16쪽)고 주장하고 율곡 철학의 매력은 ‘조화와 회통(會通)의 철학’이라는 점이며 율곡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속에서 그의 철학을 시작하며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서 신성과 물성이 하나로 조화되고, 정신과 물질이 하나로 소통하는 세계를 펼친다고 지적하였다.(18쪽) 그는 또 율곡을 ‘지칠 줄 모르는 개혁 정신’을 가지고 ‘뜨거운 애국심과 투철한 우환의식을 지닌 참된 지성인, 독창적인 성리철학의 체계를 지닌 동시에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실학을 겸비한 진정한 유학자’(19쪽)라고 정의하였다. 율곡에 대한 이러한 존경심이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임옥균의 『이이』는 부제목이 ‘정치적 실천철학의 완성’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이기동교수는 이색 이후 한국 성리학의 세 흐름을 수양철학, 정치적 실천철학, 초탈 원융철학으로 나누고, 그 대표자로 각각 이황, 이이, 조식을 들었다’고 언급하고 자신도 그 견해를 받아들여, 책의 부제를 그렇게 정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도 ‘율곡 사상 전반을 다루지만, 그 가운데서도 율곡의 정치사상과 실천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자 한다고 하였다.(머리말)
저자가 제2부에서 율곡의 사상을 소개하면서 정치론(제4장)과 군주론(제5장), 그리고 국방론(제6장)을 하나의 장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집필한 것을 이러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저자가 『율곡전서』 중에서 『동호문답』을 선택하여 번역, 소개한 것은 이 문헌이 율곡의 정치적 실천철학의 완성을 잘 드러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황의동의 『율곡 이이』는 부제목이 ‘성리학과 실학을 겸비한 실천적 지성’이다. 임옥균이 제목에 표현한 ‘정치적’이라는 말은 황의동의 『율곡 이이』의 부제목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성리학’, ‘실학’이라는 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황의동의 저술은 율곡의 정치사상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온다. 제1부 2장의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말과 글’, ‘십만 양병과 우환의식’, 5장의 ‘개혁정신’ 정도이다. 율곡의 저작 소개도 2장의 『만언봉사』와 『육조계』 뿐이며 대부분은 학문과 교육, 그리고 율곡의 삶을 표현한 시문정도이다. 전체적으로는 철학, 특히 성리학 이론소개에 치중한 느낌을 준다.

2.5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황의동의 『율곡 이이』와 임옥균의 『이이』는 기본적으로 율곡학 입문서 성격의 단행본이다. 따라서 두 책 모두, 고전으로서의 율곡의 작품을 소개하고 율곡에 대한 생애와 사상을 일반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전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하지만 황의동의 저술은 저자가 율곡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또 다년간에 걸쳐 여러 가지 연구 성과를 학계에 발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의 곳곳에 저자만의 독특한 주장이 적지 않게 보인다.
임옥균의 경우는 율곡을 전공으로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철학을 전공하고 일본의 유학사상에도 조예가 깊은 학자로서 원전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율곡사상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해설을 시도하였다. 다만 율곡의 사상에 대해서 저자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는 않고 문헌의 해석에 충실한 입장을 보여준다. 자기주장이 많은 황의동의 저술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대신, 임옥균의 책에는 율곡의 모든 사상 개념에 대한 원전 소개와 설명, 분석이 소상하게 제공되었다. 황의동의 책에서는 율곡 사상에 대한 설명은 원전 소개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 책을 함께 보완해가면서 살펴보면 율곡 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황의동의 『율곡 이이』가 주장하는 바를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율곡학은 크게 두 줄기로 나뉘는데, 하나는 성리학이고, 다른 하나는 경세학, 즉 실학이다. 달리 말하자면 율곡학은 성리학을 체(體, 몸체)로 하고 경세학을 용(用, 용도)로 한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림)의 학문이며,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을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갖춤)의 학문이다. 성리학과 실학이 모순되지 않고 하나로 묘융(妙融)되는 것이 그 특징이다. 특히 율곡의 경세학은 조선 후기에 실학의 모태가 되었고 정치·경제·사회·법·행정·언론·교육·군사·윤리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21-22쪽)

2) 율곡의 저술은 매우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율곡학에 대한 연구 성과가 철학뿐 아니라 문학·역사·교육·정치·행정·법·언론·군사 각 분야에서 박사학위 논문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이 점이 율곡학의 특징이고 장점이다.(59쪽)

3) 퇴계는 순수한 유학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매우 강해서 불교나 도가는 물론, 같은 유학가운데서도 양명학이나 화담 서경덕의 기학(氣學) 조차도 용남하지 않았다. 그러나 율곡은 조선시대 유교사회의 경직된 풍토에서도 활짝 열린 마음으로 학문을 했다.(60쪽)

4) 율곡의 넉넉하고 개방적인 학풍은 훈날 기호학파가 성리학·예학·실학·양명학·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리학 등으로 다채롭게 전개되는 데 크게 이여한다. 이는 영남의 퇴계학파가 주자학 일색으로 단조로운 것과는 구별되는 점이다.(64쪽)

5) 율곡의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이기지묘(理氣之妙),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이 있다. 이 세 가지 개념은 상호 소통되고 연결되어 율곡철학을 이룬다.(70쪽)

6) ‘이기지묘’란 리와 기가 오묘하게 합해 있다는 말로, 이기묘합(理氣妙合)과 같은 말이다. 율곡이 처음 사용한 말은 아니지만, 그는 이것을 자신의 철학 핵심으로 삼고, 철학 체계로 삼은 이는 율곡이다. 율곡은 이 세계의 만사만물은 모두 리와 기가 오묘하게 합해 있다고 보았다.(70-71쪽)

7) 율곡이 말하는 ‘기발이승’이란 ‘발(發, 작용)하는 기 위에 리가 올라타 있는 존재 자체’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것이 자연이든 인간이든 관계없이 실현·실천하는 주체는 기이고, 리는 그 실현과 실천의 방향이고 원칙이며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생각은 퇴계를 비롯한 주리론 철학자들이 강조한 리의 중요성, 리의 절대성에 대한 하나의 반성적 의미를 갖는다.(78쪽)

8) 이통기국은 리의 보편성과 기의 국한성을 하나로 표현한 것인데, 이는 리와 기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기지묘의 또 다른 표현이 이통기국인 셈이다. 율곡은 이통기국을 설명하면서 이는 자신의 독창이라고 자부심을 강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아마도 ‘이통기국’이라는 말 자체가 갖는 독창성에서 연유하는 말이기도 하고, 이 속에 담긴 깊은 철학적 의미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83쪽)

9) 조선시대 유학, 특히 16세기에는 사상적으로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주리론(主理論)이며, 다른 하나는 주기론(主氣論)이다. 주리론은 이언적과 이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주기론은 화담 서경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이후에 녹문 임성주, 혜강 최한기 등으로 이어졌다.(96-98쪽)

10) 주리론은 윤리적 입장에서 리를 가치의 표준으로 삼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학풍은 당시 사회시대의 산물이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고 4대 사화로 가치관의 전도현상이 심각한 현실에서 국가기강과 윤리와 강상을 세워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공명정대한 사회기풍을 진작하고 유교 본래의 도덕사회를 구현한다는 염원이 배경이었다. 이러한 주리론은 부작용으로 윤리·도덕에 매몰되어 민생을 도외시하고 부국강병을 소홀히 하였으며, 또한 대의명분에 집착해 실리를 망각하고, 도덕적 이상세계에 치우쳐 현실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주기론은 우주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의 형이상학적 탐구와 함께 드러난 자연변화의 이치를 탐구하는데 관심을 두었다.(96-98쪽)

11) 율곡은 주리론과 주기론을 종합하고 조화하는 곳에 있다. 율곡의 입장은 주리도 아니고 주기도 아니다. 율곡의 입장에서는 리도 중요하지만 기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율곡은 주리론과 주기론을 하나로 종합하고 조화하는 이기지묘의 철학을 열었다. 그의 학문도 이기지묘의 학이라 부를 수 있다. 그는 이학(理學)으로 성리학을 세웠고, 기학(氣學)으로서 경세적 실학을 열었다.(99쪽)

12) 율곡은 성리학과 실학의 중간지대를 점유한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성리학 시대와 실학 시대의 교량 역할을 자임했다. 율곡의 경우 성리학을 말하더라도 실학을 포함하고, 실학을 말하더라도 성리학을 내포한다. 진정한 유학이란 성리학적 기반 위에 실학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103쪽)

황의동은 이러한 주장 외에도 별도의 장(5장)을 세워서 율곡철학이 21세기에 갖는 의미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였다. 그는 모두 세 가지 점에서 그 의미를 살폈는데 1)조화정신, 2)개혁정신, 3)실학정신이다.
각각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율곡의 조화정신을 배워야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가치나 주장들이 온전한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보와 보수를 함께 말해야 온전한 것이고, 이상과 현실을 함께 말해야 온전한 것이고, 이상과 현실을 함께 말해야 온전한 것이다. 이 양자 가운데 어느 하나는 반쪽일 뿐이다. 그리고 이 반쪽은 다른 반쪽으로 보완되고 온전해질 수 있다. 율곡의 이기지묘 철학은 이러한 상보성의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115쪽)

2) 율곡의 개혁정신을 배워야한다. 유학자라고 해서 모두 기성질서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수구 골통도 아니다. 율곡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읽고 준비한 선각자다. 그는 변하는 현실을 냉철히 분석하고 대안을 준비했다. 율곡은 개혁의 목적을 집권자의 이해가 아닌 오직 백성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백성의 이익, 백성의 편리, 백성의 행복이 개혁의 목적인 것이다.(117-119쪽)

3) 율곡의 실학정신을 배워야한다. 율곡의 말과 글을 보면 유달리 ‘실(實)’자가 많이 등장한다. 그의 머릿속엔 실학정신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율곡은 주자의 해석에 근거해, 성(誠)은 하늘에는 실리(實理)요, 인간의 마음에서는 실심(實心)이라 규정했다. 우주자연의 진실한 이치, 즉 실리가 인간의 마음속에 녹아들어 진실한 마음, 즉 실심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율곡은 인간 주체의 진실한 마음을 지니고 매사에 임할 때 그 일의 결과가 진실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 진실한 노력을 실공(實功)이라 하고, 그 진실한 효과를 실효(實效)라고 했다. 율곡은 실심으로 실공을 통해 실효를 거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율곡의 실학정신, 무실(務實)정신은 윤리와 경제, 경제와 윤리의 상보성을 기초로 양자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121-125쪽)

한편 임옥균은 그의 저술 『이이』에서 어떠한 주장을 하였을까? 율곡의 사상을 정리, 소개한 제2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이치(理)와 기운(氣) : 저자는 성리학의 ‘리(理)’와 ‘기(氣)’를 우리말의 ‘이치’와 ‘기운’으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다.(사실 저자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이기론을 논할 때 한글 표기가 필요할 경우 이렇게 표기하기도 한다.) 저자는 제2부 사상 중 제1장의 제목을 ‘이치와 기운에 관한 논의’라고 하였는데 ‘이기론’을 그렇게 풀이하여 쓴 것이다. ‘리’는 ‘이치’라는 우리말로 바꿔도 그 뜻이 크게 변함이 없으나 ‘기운’은 다소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말에서 ‘기운’이라는 말은 1) 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힘, 2)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위기 따위로 알 수 있는 느낌, 3)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중에 3번 항목이 중국어(한문) ‘기(氣)’와 유사하나 이기론의 ‘기’는 그것보다 뜻이 더 넓다.
한문의 ‘기(氣)’자는 기운, 공기, 대기, 숨, 혹은 숨 쉴 때 나오는 기운을 뜻한다. 이 외에도 활동하는 힘, 혹은 뻗어가는 기운, 하늘에 나타나는 조짐, 오관(五官)에 닿되 형체가 없는 현상,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그리고 막연한 전체적인 느낌이나 분위기 등을 말한다. 이외에도 사전을 보면 ‘동양철학에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 되는 기운’ 즉 ‘원기(元氣)’를 뜻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이기론에서 말하는 ‘기’의 일부만을 뜻하는 것이지 그 모든 것을 포괄하지는 않는다. 이기론의 ‘기(氣)’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것이 포함되는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저자 임옥균이 말하는 ‘기운(氣)’은 그러한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2)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율곡은 이치와 기운이 실제로 떨어질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실제로’라는 말은 존재론적으로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을 율곡은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 리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음)’라고 표현한다.……이치와 기운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섞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율곡은 그것을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 리기가 서로 섞어지 않음)이라 표현하는데, 이것은 가치론적인 언명이다.”(114쪽)

3) 저자에 따르면, “율곡은 이치와 기운의 관계에 대해서 존재론과 가치론을 다 포함해서 말해야 성리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치와 기운이 서로 섞이지 않는다고 하나만 말해도 안 되고,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만 말해도 안 된다. 이치와 기운이 서로 떨어지지도 않으며 섞이지도 않는다고 한꺼번에 말해야 이치와 기운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곡이 말하는 ‘이치와 기운의 오묘함’이라고 할 수 있다.”(115쪽) 여기서 ‘이치와 기운의 오묘함’이란 ‘이기지묘(理氣之妙)’을 말한다.

4) 저자는 율곡의 ‘이통기국(理通氣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율곡은 이치는 하나이지만 나누어져서 다르게 되는 것은 이치가 기운을 타서 그 탄 기운의 다름 때문에 이치도 다르게 된다’(121쪽)고 본다. 이통기국은 이것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통기국이란, ‘이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므로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통하지만, 기운은 물질, 혹은 물질을 이루기 전의 에너지이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아 국한된다는 것이다.’(121쪽)

5) 저자는 율곡의 수양론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했다. “유학에서 수양은 자신의 수양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자신의 주위로 그것을 확장시켜가야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연결시켜 (율곡이) 설명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특별히 율곡은 임금의 수양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수신과 치국을 연결해주는 매개 고리로서 왕조시대에 임금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133쪽)

6) 저자는 율곡이 선조 임금을 설득하는 방법 중 한 가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율곡은 선조에게 글을 올릴 때에 임금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동중서 이래의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을 자주 언급했다. 사람의 일에 따라 하늘이 좋은 일을 내리기도 하고 나쁜 일을 내리기도 한다는 것으로서, 특히 임금은 백성을 대표하고 백성의 안위를 한 몸에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덕을 닦아 재이(災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175-176쪽)

황의동과 임옥균의 저술 비교1 – 저자 소개와 목차

#5. 황의동과 임옥균의 저술 비교1 – 저자 소개와 목차

2. 황의동의 『율곡 이이』와 임옥균의 『이이』

2.1 율곡을 소개한 두 권의 개론서

2007년은 율곡 연구에 있어서 다소 특이한 해이다. 주목할 만한 개론서 2권이 이해에 동시에 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권은 살림출판사에서 발간한 『율곡 이이』이며 다른 한권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이이』이다. 전자는 오랫동안 율곡을 연구해온 황의동이 집필한 책으로 정식 제목은 『율곡 이이-성리학과 실학을 겸비한 실천적 지성』이다. 후자는 중국 철학을 전공한 임옥균이 지은 책으로 정식제목은 『이이-정치적 실천철학의 완성』이다.
황의동의 책은 살림출판사에서 ‘e시대의 절대사상’이라는 고전 시리즈의 한 권으로 기획되었으며, 임옥균의 책은 성대 출판부에서 유학사상가 총서 시리즈 중 한권으로 기획되었다. 이 두 책이 부제목도 매우 유사하다. 황의동의 책은 ‘성리학과 실학을 겸비한 실천적 지성’이며 임옥균의 책은 ‘정치적 실천철학의 완성’이다. 율곡을 가리켜 ‘실천적 지성’ 혹은 ‘실천철학의 완성자’라 지칭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 두 권의 개론서를 소개하고, 비교해보기로 한다.

2.2 저자 소개

황의동(黃義東, 호는 태암台巖, 1949∽)은 세종시 연동면 출신으로 대전 보문고, 충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충남대 대학원에서 율곡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주대 철학과와 충남대 철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2014년 정년퇴임하였다. 그는 율곡 사상과 한국 유교와 관련하여 다수의 저술을 발표하였는데,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1) 『율곡철학연구』, 경문사, 1987
2) 『한국사상』, 청주대출판부, 1990
3) 『한국의 유학사상』, 서광사, 1995
4) 『율곡사상의 체계적 이해1, 2』, 서광사, 1998
5) 『율곡학의 선구와 후예』, 예문서원, 1999
6) 『유교와 현대의 대화』, 예문서원, 2002
7) 『한국의 사상가 10인, 율곡 이이』, 예문서원, 2002
8) 『위기의 시대 유학의 역할』, 서광사, 2004
9) 『우계학파 연구』, 서광사, 2005
10) 『율곡 이이』, 살림출판사, 2007
11) 『기대승』, 성균관대출판부, 2008
12) 『기호유학연구』, 서광사, 2009
13) 『한국유학사상연구』, 서광사, 2011
14) 『이율곡 읽기』, 세창미디어, 2013
15) 『율곡에서 도산으로』, 충남대출판문화원, 2014
16) 『역사의 도전과 한국유학의 대응』, 책미래, 2015

이러한 저술 가운데 여기서 살펴볼 살림출판사의 『율곡 이이』는 그동안 그가 발표한 율곡 관련 다수의 저술을 바탕으로 집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발표한 주요 논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율곡의 우환의식과 경세론의 의의」, 『한국사상과 문화』54, 2010
「율곡의 ‘이통기국’에 관한 연구」, 『철학논총』56(2), 2009
「퇴계와 율곡의 철학정신」, 『철학연구』107, 2008
「화담, 퇴계, 율곡의 이기관 비교 연구」, 『동서철학연구』, 2008
「율곡 ‘이기지묘(理氣之妙)’의 현대적 의미」, 『유학연구』12, 2005
「율곡의 수기론」, 『유교사상연구』9, 1997
「율곡 경세사상의 철학적 배경」, 『(충남대인문과학연구소)논문집』43,1994
「율곡 격물치지론의 체계」, 『유교사상연구』6, 1993
「조선후기 경세치용 실학과 율곡의 실학적 사유」, 『다산학보』14, 1993

위와 같은 목록을 살펴보면 황의동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율곡 철학과 관련된 주요 주제를 꾸준하게 발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세론, 이통기국, 이기론, 이기지묘, 수양론, 격물치지론, 실학적 사유 등 율곡의 유학사상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한편 임옥균(1959∽2018)은 황의동보다 10년 뒤에 태어났으며 공주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 등을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동양철학과에 편입하여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5년에 그가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은 『대진철학에 나타난 주자학적 사유의 비판에 관한 연구』였다. 이후 서일대학 교양과 동양철학 담당교수, 성균관 한림원 교수,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연구교수, 중국 호남성 형양사범대학 객좌교수, 중국 산동사범대학교 한국어과 교수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대진 – 청대중국의 고증학자이자 철학자』(성대출판부, 2000), 『왕충 – 한대 유학을 비판한 철학자』(성대출판부), 『맹자가 들려주는 대장부 이야기』(자음과모음), 『김정희가 들려주는 실사구시 이야기』(자음과모음), 『주자학과 일본 고학파』(성대출판부),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사서삼경』(사람의무늬)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논어금독』, 『논어징』(공역), 『유술록』 등이 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성대출판부의 『이이 – 정치적 실천철학의 완성』(유학사상가 총서 시리즈)은 저자 임옥균으로서는 율곡과 관련하여 첫 번째 저술이자 마지막 단독 저술이기도 하다.(2015년에 공저로 『새로 읽는 성학집요』(율곡연구원)를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율곡 관련 논문도 발표한 바가 없다. 원래 전공이 동양철학, 특히 중국 유학이기는 하지만 정재(正齋) 남대년(南大秊)이나 간재(艮齋) 전우(田愚) 혹은 가암(柯菴) 전원식(田元植),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성호(星湖) 이익(李瀷) 등 한국 유학자들에 대해서도 꾸준히 논문을 발표하였던 그였지만 율곡에 대해서는 논문이 없다.
율곡 관련 논문이 없다고 해서 그의 책 『이이』의 내용이 부실할 것이라는 의심을 할 필요는 없다. 각 장절의 내용이 학술적인 논문 수준으로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황의동이 『율곡 이이』라고 율곡의 호를 책 이름에 집어넣은 반면에 임옥균은 호를 없애고 『이이』라고 하였다. 그가 발표한 한국 유학자 논문을 보면 대개 호와 함께 이름을 병칭하였다. 예를 들면 남당 한원진, 성호 이익 등과 같다. 그러나 이 개론서에서 그는 과감하게 ‘율곡’이라는 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왜 율곡이라는 호를 제외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호’라는 것은 상대방을 높여서 부르는 존칭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연구자로서 좀 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율곡’이라는 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아닌지 추측해본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황의동 쪽은 율곡을 흠모, 존경하고 율곡의 사상을 매우 긍정적으로 추종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임옥균 쪽은 다소 거리를 두고자 하는 느낌이 강하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이점은 두 서적을 함께 읽으면서 눈여겨 볼 대목이다.

2.3 목차 소개

황의동의 책 『율곡 이이』는 다음과 같이 3개의 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 시대·작가·사상
2부 율곡 저작선
3부 관련서 및 연보

먼저 제1부를 보면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장 율곡과의 만남
만남의 계기/ 율곡의 매력/ 율곡학의 두 줄기
2장 율곡의 시대와 삶
총명했던 어린 시절/ 출가, 그리고 퇴계와의 만남/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말과 글/우계 성혼과 나눈 우정, 그리고 학술논쟁 / 십만 양병과 우환의식/ 인간 율곡, 유지와 나눈 사랑
3장 율곡의 저술과 학문
『성학집요』 『격몽요결』 「만언봉사」/ 열린 학풍/
성리학이란 무엇인가?/ 이기지묘/ 기발이승/ 이통기국/ 전인적 인간관
4장 위대한 철학자, 율곡의 위상
리 철학과 기 철학의 조화/ 성리학과 실학의 징검다리/
기호학파의 중심적 위치
5장 21세기 율곡철학의 의미
조화정신/ 개혁정신/ 실학정신

율곡의 생애(2장)와 저술, 학문(3장) 외에 1장, 4장, 5장은 율곡을 평가하거나 그 위상을 소개하거나 그 사상의 의미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율곡을 연구하여 학위를 받았으며, 다년간 매우 많은 율곡 관련 저술과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때문에 율곡 자체에 대한 소개와 함께 율곡에 대한 평가와 그 철학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부는 율곡 저작을 소개하는 부분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1장 시
동문을 나서며/ 풍악산에서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에게 시를 지어 주다
/보응스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풍암 이광문(지원)의 집에 이르러
초당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산인의 시축에 차운하다/
고산 구곡가를 부기하다
2장 세상 경영에 관한 글
만언봉사/ 육조계
3장 학문과 교육에 관한 글
자경문/ 격몽요결/ 어린이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 천도책

율곡이 직접 지은 여러 가지 시, 경세론, 학문과 교육에 관한 문장 등 다양하게 소개하였다.

마지막으로 3부는 ‘관련서’와 연보를 소개하였는데 관련서란 율곡이 지은 글을 번역한 책, 율곡을 연구하거나 소개한 서적 등을 말한다. 번역서, 생애와 인격을 다룬 안내서, 철학과 사상을 다룬 전문서, 사회철학 연구서, 그리고 교양서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한편 임옥균의 『이이』도 크게 3개의 부로 구성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제1부 생애
제2부 사상
제3부 저술

황의동은 제1부에 생애와 사상을 함께 소개하고 2부는 율곡의 저술, 3부는 연보 등을 소개하였는데, 임옥균은 율곡의 사상을 독자적인 부로 설정하여 본격적으로 소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록으로 연보, 참고문헌, 찾아보기를 두었다.

제1부 생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출생과 어린 시절
제2장 청소년기
제3장 결혼과 장년 전기
제4장 장년 후기

이 부분은 거의 90쪽에 이르는 분량으로 황의동의 책 제2장에 소개된 ‘율곡의 시대와 삶’보다 3배가 훨씬 넘는다. 생애 서술도 율곡이 직접 지은 시문이나 혹은 직접 했던 대화를 바탕으로 나이 별로 때를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어 읽기에 다소 지루하지만 매우 상세하다. 황의동의 경우는 율곡의 시대와 삶을 핵심적인 내용만을 간략하면서도 읽기 쉽게 소개하였다.
아울러 임옥균의 책에서는 다양한 문헌을 동원하여 율곡의 생애를 매우 현장감 있고 입체적으로 구성한 점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32세 때에는 율곡이 퇴계를 찾아가 나눈 대화를 상세히 소개하였으며, 33세 때 율곡이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가 북경에 서장관으로 다녀오던 해에는 당시 율곡이 썼던 시문이며, 죽은 동료를 위한 만사도 소개하여 당시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또 같은 해 선조 임금과 경연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대화체 형식으로 상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그 이후에 임금과 율곡이 나눈 대화도 연도별(나이별)로 상세하게 제공하여 조정에서의 율곡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38세(1573년) 때 궁중에서 율곡과 선조가 나눈 대화를 소개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선조는 21세로 재위 6년째였다.

율곡: “전하께서는 말씀을 너무 적게 하십니다. 여러 신하의 말에 대해 조금도 답을 하지 않으시는데, 전하께서는 답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신처럼 어리석은 자에게는 본래 물을 만한 것이 없기는 하지만, 들어와 모신 지 여러 날이 되는데 한 번도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전하께서 잘 다스리려고 하는 뜻이 있는지 없는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조: “나 자신을 돌아보건대 좋은 정치를 일으킬 수 없소.”
율곡: “전하께서는 해낼 수 없다고 해도 신은 그 말씀을 믿지 않겠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여색에 빠지셨습니까? 음악 듣기를 좋아하십니까? 술 마시기를 즐기십니까? 말 달리고 사냥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다만 전하께서 조금 부족한 바는 오직 확고한 뜻을 세워서 참다운 정치를 도모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는 바로 학문상에서 실천하는 공부가 부족한 때문입니다.”

임옥균의 『이이』 제2부 ‘사상’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이치와 기운에 관한 논의
1. 이치와 기운
2. 퇴계의 이치와 기운이 서로 발동한다는 설에 대한 비판
3. 이치와 기운의 오묘함(理氣之妙)
4. 기운이 발동하면 이치가 탄다(氣發理乘)
5. 이치는 통하고 기운은 국한된다(理通氣局)

제2장 심성론과 수양론
1. 인심과 도심
2. 네 가지 실마리와 일곱 가지 감정
3. 수양의 과정과 결과

제3장 학문과 교육
1. 학문이란 무엇인가?
2.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목표를 먼저 세워라
3. 나쁜 옛 습관을 고치라
4. 책을 읽는 차례
5. 도통과 이단

제4장 정치론
1. 경장의 강조
2. 정치하는 방법
3. 붕당에 대한 걱정
4. 신분제도의 개혁 주장

제5장 군주론
1. 군주의 중요성
2. 역대의 군주와 신화에 대한 평가
3. 선조에 대한 율곡의 평가
4. 율곡에 대한 선조의 평가

제6장 국방론
1. 군정의 원칙: 문무 병용
2. 군정의 폐단 개혁
3. 족칭의 폐단 개혁
4. 종합적 군정 문제 해결책의 제시

제7장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
1. 평가의 기준: 식견과 덕
2. 평가의 예

율곡의 사상을 이기론, 심성·수양론, 학문·교육론, 정치론, 군주론, 국방론 그리고 율곡이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까지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특히 제7장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율곡이 역사 인물에 대해서 평가한 부분을 한군데 모은 것으로 중국의 역사인물인 관중, 당태종, 소강절, 왕안석 외에도 조선의 인물인 정몽주, 조광조, 기대승, 정철, 서경덕, 퇴계, 이산해, 조식 등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제2부는 황의동의 저술로 보면 3장 ‘율곡의 저술과 학문’, 4장 ‘위대한 철학자, 율곡의 위상’, 5장 ‘21세기 율곡 철학의 의미’에 해당한다.

제3부 저술은 황의동이 율곡의 다양한 시문을 소개한 것과 달리, 『동호문답』만을 다음과 같이 번역, 소개하였다.

1. 임금의 도리를 논함
2. 신하의 도리를 논함
3.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기 어려움을 논함
4. 우리나라가 도학을 행하지 못함을 논함
5. 우리 조정이 옛 도를 회복하지 못함을 논함
6. 지금의 시세를 논함
7. 실질에 힘쓰는 것이 자기를 닦는 요령임을 논함
8. 간사한 자를 분별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는 요령임을 논함
9.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을 논함
10.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논함
11.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이 다스리는 도리의 근본이 됨을 논함

이들 번역문은 모두 원문을 대조하면서 번역한 것이다. 번역에 엄격한 저자의 학문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전체적으로는 황의동의 『율곡 이이』가 개론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임옥균의 『이이』는 매우 상세하고 깊이가 있는 전문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두 권의 책을 함께 읽는다면 율곡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데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광호와 김형찬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와 주장

#4. 이광호와 김형찬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와 주장

1.4 저자는 왜 이 책을 썼는가?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에서 정리된 저자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부분은 머리말과 해제, 그리고 맺음말(<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를 끝내며) 부분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퇴계와 율곡이 서로, 사상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다르고, 서로 꿈꾸는 세계가 다르며 그에 따라 학문을 이해하는 관점과 방법도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퇴계가 하늘을 지향한다면 율곡은 땅을 지향하며, 퇴계가 이상을 지향한다면 율곡은 현실을 지향한다. 퇴계가 인간의 내면성을 중시한다면 율곡은 외적인 성취를 중시한다. 하늘과 땅, 이상과 현실, 내면과 외면은 서로 멀리 떨어진 것 같지만 인간의 삶에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5쪽)
이광호의 이러한 지적은 퇴계와 율곡을 ‘다름’의 입장에서 주목한 것이다. 앞서 이 글의 머리말에서 이동준이 지적한 율곡과 퇴계의 차이점을 기억해보면, 퇴계는 리와 기를 이원적으로 보았는데 율곡은 기를 중심에 두고 ‘이기의 묘’라고 하여 리의 존재도 인정하였다. 퇴계와 율곡이 이기론에서 볼 때 서로 완전히 대척점에 서지는 않았다. 다만 현실의 정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율곡과는 달리 퇴계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수양과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차이점을 이광호는 매우 큰 것으로 평가하고, 퇴계와 율곡의 지향이 서로 완전히 달랐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대립적인’ 지적은 해제의 첫머리에도 등장한다.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의 질문 항목(문목問目)과 답변을 읽고 번역하며 두 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분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당파가 나누어져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그 원인이 두 분 사상의 차이 때문인가? 나는 두 분이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읽으며 두 분의 생각의 차이가 심각할 정도로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같은 유학자이면서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12쪽)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라는 책 제목처럼 저자는 두 학자의 차이점을 주목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퇴계와 율곡의 다른 점이 너무도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전제하고 저자는 이 책의 저술한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이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왜 아직까지 한 번도 함께 모아 편집한 일이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두 분의 시와 편지를 모두 모아 번역하고, 거기에 퇴계가 사망한 뒤 율곡이 지은 만사와 제문도 함께 편집하여 번역하였다. 편지에서 주고받은 문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도 상당수 추가하였다.”(9쪽)
해제에서도 퇴계와 율곡의 문답자료를 한 곳에 모은 이유를 그는 이렇게 소개했다.
“(퇴계와 율곡이) 주고받은 시를 찾아서 장리하고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서 순서대로 정리하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수의 시를 주고받았는지,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몇 번이나 만났는지도 분명하지는 않다. 퇴계의 문집에는 자료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있는 반면 율곡의 문집에 남아있는 자료는 소략하다. 편집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되고 왜곡된 부분도 있는 듯하여 아쉬웠다. 두 학파의 대립의식이 고조된 상황에서 편집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싣기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 삭제한 것이 있는 듯하다.”(14-15쪽)
저자는 말미에 자신은 퇴계의 삶과 학문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유학에 대한 이해를 축적해왔는데, 이것이 혹시 한계가 되어 율곡의 사상을 조명하는데 제약이 될까 염려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정리하자면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는 퇴계의 입장에서 정리한 ‘퇴계와 율곡의 문답서’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을 지지하는 후대의 학자들이 외면한 문답 자료를 새롭게 제시하였으며 율곡과 관련된 퇴계의 사상을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김형찬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다소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퇴계와 율곡이 주고받은 문답을 읽고 난 느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당시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본래 그들은 학문과 삶에 대해 진지하고 치열하게 문답을 주고받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유학과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이상국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동지이기도 했다.”(15쪽)
저자는 책 제목에서 보듯이 ‘제자가 묻고 스승이 답하다’는 분위기를 강조한다. 그는 “이 책에서는 노학자와 청년학도로 만난 스승과 제자의 연을 이어가다가 학문적·정치적으로 대립되는 관계로 평가되기까지, 퇴계와 율곡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 볼 것이다”고 하며, “이를 통해 두 사람이 같은 이상을 가졌으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이들이 시대의 과제에 각기 어떻게 대처했는지 주로 철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9쪽)고 하였다. 퇴계와 율곡이 스승과 제자였으며, 같은 이상을 가졌다고 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 보다는 동질성에 주목한 느낌을 준다.
저자가 책이름으로 제시한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말은 1558년 봄부터 퇴계가 사망한 1570년 겨울까지, 13년 동안 오간 편지를 통한 문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1장 ‘만남’에서 “퇴계와 율곡이 13년 동안 주고받았던 글과 두 사람이 남긴 주요 저술들을 통해 이들의 마음을 천천히 읽어 나갈 것이다. …… 처음에는 청년 율곡이 묻고 노학자 퇴계가 대답했지만, 나중에는 퇴계가 시대에 던진 물음에 율곡이 응답하였다”라고 말했다. 이 책에 사용된 문헌은 두 사람의 서신뿐 만아니라 그들이 남기 주요 저술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특히 ‘퇴계가 시대에 던진 물음’이란 퇴계 사후에 율곡에게 남겨진 퇴계의 물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7장 ‘군왕의 정치와 신하의 정치’에서는 퇴계의 「무진육조소」(1568)와 율곡의 「동호문답」(1569)·「만언봉사」(1574) 그리고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퇴계는 군왕의 정치를 지향하고, 율곡은 신하의 정치를 지향하였으며, 퇴계는 군왕의 마음을 중시하고 율곡은 신하의 도통을 중시하였다는 결론을 내린다.(맺음말)
하지만 역시 저자는 퇴계와 율곡의 공통점을 중시하며 이렇게 지적한다.
“두 사람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후학들에 의해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비판하는 관계로 이해되었다. 현대 학자들에 의해 그러한 경향은 더 심화된 듯하다. 그러나 당시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본래 그들은 학문과 삶에 대해 진지하고 치열하게 문답을 주고받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유학과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이상국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동지이기도 했다.”(15쪽)
아울러 결론 부분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대조적 혹은 대립적인 관계로 평가되어 왔지만, 어느 모로 보나 두 사람이 공유했던 영역은 그들의 차이점을 압도한다. 유학적 가치관, 성리학적 학문 기반과 세계관 그리고 정치적 이상 등이 모두 그러하다.”(243쪽)
저자는 이러한 두 사람 사이의 문답이나 이론 논쟁을 통해서 각각의 철학적 문제의식과 이론적 성과를 검토하는 작업이 자신의 저술에서 이루어지게 될 모든 논의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퇴계와 율곡이 추구하고 구축한 철학을 통해서 1) 각기 제시하고자 했던 인간의 길과 국가의 길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2) 그것이 두 학자가 서로 다른 길을 간 그들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추론해갈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덧붙여서 두 사람의 사상을 논하면서 ‘조선 선비의 정신’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라고 하였다.(10쪽) 이상이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아울러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한 나라가 건국되고 500여 년 동안 존속하는 데 지배적인 철학·이념이 되었던 조선유학이 실제로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또한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그 철학과 현실의 상호작용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10쪽)
이 책의 관심이 단순히 율곡과 퇴계의 문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학자의 사상을 넘어서 조선시대의 사상사에도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단지 철학 사상에만 멈추지 않고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퇴계·율곡과 같은 조선의 선비들은 사단칠정이나 인심도심을 논한 학자이기 이전에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조선을 건국하고 운영한 지식인 관료였다. 조선 선비들의 학술적 논의는 성리학적 이상을 몸소 익히고 실천하며, 당시의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 애썼던 그들의 생각과 삶의 일부로서 이해되지 않는 한 단편적인 이해에 그칠 수밖에 없다.”(10-11쪽)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라는 책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단순히 율곡과 퇴계의 성리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목차 구성에서 저자가 제3장에 ‘사단과 칠정 : 퇴계와 고봉의 8년 논쟁’을 포함시키고, 제6장에 ‘사단칠정과 인심도심 : 율곡과 우계의 논쟁’을 포함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러한 점을 유의하여 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1.5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는 기본적으로 번역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퇴계와 율곡의 문답 내용에 대해서 저자의 주장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는 않다. 각 문장(번역문)의 각주나 해설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율곡의 첫 번째 편지에 대한 퇴계의 답변을 번역 소개하면서 저자는 <해설>(66쪽)에서 사마광의 격물설(格物說)을 두고 퇴계와 율곡은 관점의 차이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그 차이점을 분석하였다.
“율곡은 …… 사마광의 말이 정자·주자의 설명과 위배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퇴계는 학문과 수양에서 다른 사람의 학설을 비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실천함을 통하여 자기완성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율곡은 자연의 객관적 이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 퇴계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도덕적 이법에 대한 체험적 깨달음(體認)을 통한 자기완성을 설명하고 있다. …… 두 지성(율곡과 퇴계)은 주체적 도덕적 수양학의 추구와 객관적 자연학의 추구라는 방향설정 자체에서 차이를 보인다.”
저자는 사마광의 「치지가 격물에 달려 있음을 논함(致知在格物論)」을 번역, 소개하고 상세한 각주와 해설을 달았다. 사마광의 격물치지론은 격(格)자를 막는다고 해석하고 외물을 막을 수 있게 된 뒤에 지극한 도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104쪽)
이러한 사마광의 문장에 대해 저자는 각주 112번(103쪽-104쪽)에서 “사마광의 생각은 정자와 사량좌의 생각과 비슷하다. 욕심을 넘어선 …… 밝은 마음이 사물을, 물질을 넘어 진리의 드러남으로 볼 수 있는 지혜라는 뜻이다. 퇴계가 사마광의 학문과 덕성을 종중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경험적 객관세계에 머물게 되면 형이상의 진리를 알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104쪽)고 하여, 율곡의 경험적 입장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아울러 저자는 사마광 문장의 해설에서도 “욕망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을 중요한 방법으로 여기는 성리학의 입장에서는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외부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율곡의 입장에서는 격물치지에 대한 (사마광의) 이러한 해석을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104쪽)라고 하였다.
이렇듯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라는 책은 퇴계와 율곡의 문답 그리고 저자가 제공하는 보충자료와 각주, 해설 등을 읽어보고 또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해보면서 읽어나가면 율곡의 사상과 입장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도움은 퇴계의 사상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저자 스스로도 <머리말>에서 말했지만, 저자 자신이 퇴계 전공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머리말>과 <끝내면서>에서 퇴계와 율곡의 문답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몇 가지 주장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서 정리해보기로 한다.

1) 유학의 학문관은 도를 진리로 하는 지행(知行)의 학문관이자 지행을 통하여 성인(聖人)의 덕업을 이루며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성학(聖學)이다. 그래서 퇴계의 대표작이 『성학십도』라면 율곡의 대표작은 『성학집요』이다.(6쪽)

2) 두 분(퇴계와 율곡)이 주고받은 편지의 질문 항목과 답변을 읽고 번역하며 두 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분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당파가 나누어져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그 원인이 두 분 사상의 차이 때문인가?(12쪽)

3) 우리나라의 유학을 현대적인 사상으로 재창조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일차적 과제는 퇴계와 율곡의 사상에 대한 정당한 재평가와 새로운 이해이다. 두 분의 사상이 크게 달랐다는 것은 결코 약점이 아니다. 크게 다르면 큰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서구 과학 중심의 문화와 동아시아의 인문 중심의 유학 문화가 창조적 융합을 시도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두 분이 주고받은 학술적 자료를 처음으로 한 곳에 모아 번역하고 소개하는 이 일이 21세기 동서 문화의 창조적 융합의 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기 바란다.(8-9쪽)

4) 율곡의 관심은 천지를 넓게 바라보며 넓은 세상을 바로잡아 사람이 살만한 올바른 세상으로 만드는 데에 있었다. 율곡에게 유학은 이상적 경세의 이념이었다. 율곡에게는, 현실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기 보다는 마음과 인간 내면의 문제에 치중하는 듯한 퇴계의 삶과 학문이 바람직한 삶으로 보이지 않았다. …… 율곡이 퇴계를 ‘모방하는 태도가 많은 사람’, ‘환하게 관통한 지경에는 오히려 아직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본 것이 밝지 못한 점이 있고 말이 혹 조금 틀림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13쪽)

5) 퇴계와 율곡 사이의 문답에서 율곡과 퇴계가 견해를 달리한 내용을 보면, 퇴계와 율곡이 같은 유학자이면서도 중시한 내용이 얼마나 다른가를 엿볼 수 있다. …… 퇴계는 주자를 매우 존경하지만 주자를 답습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주자서절요』 가운데도 자신의 철학을 중시하는 퇴계의 태도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율곡이 퇴계가 ‘의양지미(依樣之味, 모방하는 맛)’가 많다고 평한 것은 퇴계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16쪽)

6) 퇴계의 학문적 성향을 매우 명확하여 애매하지 않다. 『성학십도』에 분명하게 드러나며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한 수많은 답서와 많은 시, 그리고 여러 저술들에 드러나는 퇴계의 철학은 애매하지 않고 분명하다. 그러나 학문적 경향을 달리하는 율곡으로서는 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경향이 다르므로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관심이 깊지 않으니 깊은 이해도 불가능하였다.(16-17쪽)

7) 퇴계는 자신이 이해한 유학의 견지에서 주자를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율곡과 토론하고 율곡을 가르치고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나 율곡의 생각은 퇴계와는 달랐다. 율곡은 같은 유학자이지만 내성(內聖)보다는 외왕(外王)에 대한 관심이 앞섰다. 인간의 내면의 빛에 근거하여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사회와 자연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배우고 이해하고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율곡은 퇴계가 중시한 심학(心學)과 경학(敬學)이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으며 심학과 경학에 대한 이해가 일치되지 않으면서 퇴계에 대해서는 존경하면서도 심복되지 않았다.(17쪽)

8) 퇴계와 율곡의 만남은 필자가 보기에 어긋난 만남이었다. 어긋난 만남이기 때문에 한국유학의 다양성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름이 조화로운 만남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갈등이 증폭되는 경향이 우세하였다.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만남을 조화로운 만남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만남의 문제는 언제나 현실적인 것이며 남북이 분단된 우리나라에서 풀어야 되는 지상과제이다.(19쪽)

한편, 김형찬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기본적으로 율곡과 퇴계 사이에 이루어진 문답을 중심으로 집필이 되었으나, 다루는 문제는 ‘문답’의 범위를 넘어서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 율곡과 우계의 사단칠정·인심도심 논쟁, 퇴계와 율곡의 사상비교 등 매우 광범위하다. 그만큼 주장하는 바도 적지 않다.
여기에서는 우선 이 책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제7장 ‘왕의 정치와 신하의 정치’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무진육조소」와 「동호문답」·「만언봉사」의 비교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퇴계의 「무진육조소」가 군왕의 위상과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된 데 반해, 율곡의 「동호문답」과 「만언봉사」는 군왕과 신하의 관계에 초점이 놓여 있다.’(224쪽)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의 시국에 대한 인식과 그 기반이 되는 철학적 관점 그리고 각기 처했던 개인적 상황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2) 『성학십도』와 『성학집요』의 비교

퇴계의 『성학십도』는 ‘편찬 의도에서부터 수신(修身)과 마음공부에 집중’했으나, 율곡의 『성학집요』는 ‘제가·치국·평천하까지 아우르는 성학(聖學) 교과서를 염두에 두고’(237쪽) 편찬되었다. 그러나 율곡도 수신(修身, 수기修己)의 문제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분량이나 논의의 깊이에서 다른 문제보다 가장 크게 비중을 두었다. 아울러 율곡은 ‘기질을 바로 잡는 일(矯氣質)’과 ‘뜻을 세우는 일(立志)’을 특히 강조하였다.
저자는 퇴계와 율곡 사상이 크게 다른 점으로 다음과 같이 군왕에 대한 인식을 들었다.
“퇴계는 군왕의 한 마음(一心)과 그 안의 본성(性卽理)의 공부·수양에 성학의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수양된 한 마음의 본성(性卽理)으로부터 도덕성이 발현되어 세상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것을 이상적인 정치로 보았다. 하지만 율곡은 군왕을 정치에서의 ‘리’로 보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관리들을 ‘기질’로 보았다.”(239쪽)
저자는 율곡이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기질 변화를 공부와 정치의 관건’으로 보았으며, ‘사실상 왕통을 가진 군왕보다 도통을 가진 신하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241쪽)한 것으로 인식했다고 보았다.

맺음말 ‘왕의 마음과 신하의 도통’에서 저자는 퇴계와 율곡의 사상적 차이점을 종합적으로 다시 제시하였는데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글을 읽을 때 퇴계는 전체 맥락에서 필자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주력하였고, 율곡은 분석적·논리적으로 내용을 파고들며 날카로운 비평을 가하였다.

2) 퇴계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전체의 맥락 속에서 차이점을 비교하며 쉽게 설명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율곡은 하나의 일관된 체계 속에서 자연·사회·인간 전체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선호하였다.

3) 퇴계가 일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에 대한 성찰을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실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데 비해, 율곡은 형이상과 형이하의 영역, 자연과 인간의 영역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하여 명료한 언어로 설명해 내고 싶어 하였다.

4) 퇴계는 상대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고 조언하며 설득하려 했던데 비해, 율곡은 자신의 생각을 교과서처럼 명쾌하게 정리하며 자기주장을 펼쳤다.

5) 퇴계가 자신과 같은 일반인은 성인과 같은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데 반해, 율곡은 자신과 같은 사람도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성품과 성향이 본래부터 달랐던 점도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주장은 저자가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한 문답 서신을 읽고 논하면서 느낀 바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책 제2장(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1) 제4장(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2) 제5장(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3)에서 저자는 퇴계와 율곡의 문답 내용이 무엇인지, 그 사상적 배경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등 주로 세부적인 상황설명에 치중하였다.
하지만 가끔은, 드물지만 문답의 분석을 통해 퇴계와 율곡의 사상을 비교하여 주장을 제시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퇴계는 도의 역할에 주목하고 율곡은 사람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두 사람을 비교할 때 분명하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주자학을 자신들의 학문적 토대로 한다는 사실이다.”(168쪽)
“퇴계는 사단칠정논쟁을 하면서 사단과 칠정이 나뉘는 이유, 특히 사단이 사단인 원인을 ‘리(理)’에서 찾으려 했다. 사단이 순선한 이유는 바로 ‘리’의 순선함에 있었다. …… 이에 반해 율곡은 우주·자연·사회의 구조와 운영을 서로 떨어지지도 않고 서로 섞이지도 않는 ‘리’와 ‘기’의 엄밀한 협동작용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리’는 본래 순선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이 어찌 손써볼 방법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율곡은 가변적인 ‘기’를 정화함으로써 ‘리’가 그 정화된 ‘기’의 작용을 통해 온전히 그 순선·완전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았고, 또한 그렇게 ‘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의지에 주목하였다.”(171쪽)

이광호와 김형찬의 저술 비교1 – 저자 소개와 목차

#3. 이광호와 김형찬의 저술 비교1 – 저자 소개와 목차

1.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와
김형찬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1.1 퇴계와 율곡을 다룬 이 두 책

이광호 교수(이하 호칭생략)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는 홍익출판사에서 2013년에 출판하였다. 김형찬 교수(이하 호칭생략)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2018년에 바다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두 책은 5년 간격을 두고 출판되었지만 퇴계와 율곡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고, 제목이 서로 매우 유사하다. 다만 이광호의 제목은 퇴계와 율곡이 경쟁관계인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김형찬의 제목은 제자와 스승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제목의 분위기가 본문의 흐름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살펴나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광호의 책은 저술 형식이 아니라 ‘편역’, 즉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적절히 편집하여 번역한 책이고 김형찬의 책은 직접 쓴 저술이다. 이렇게 편역과 저술이라는 차이가 있으나 두 권 모두 율곡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서적으로 보아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1.2 저자 소개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의 저자 이광호(1948∼)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를 마치고 한림대, 연세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그는 『주자의 격물치지설에 대한 고찰』로 석사, 『이퇴계 학문론의 체용적 구조에 관한 고찰』로 박사를 받았다. 그는 이러한 박사학위 논문과 관련하여, 유학의 ‘학문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유학을 ‘진리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보편적인 현대의 인문학’으로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그는 퇴계의 저술인 『성학십도』를 번역한 바 있으며, 주자의 제자 섭채(葉採)가 지은 『근사록 집해』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논문을 보면 퇴계와 관련하여 「퇴계 이황의 성학에 대한 현대적 성찰」(『퇴계학논집』, 2012), 「남명과 퇴계의 학문관 비교」(『동방학지』, 2002) 등을 발표한 바 있다. 율곡과 관련해서는, 국회 전자도서관이나 리스(RISS)를 검색해보면 발표된 논문이 없다.
한편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의 저자 김형찬(1963∼)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고려대에 철학과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그는 『이기론의 일원론화(一元論化)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조선유학의 자연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공저)이 있으며 <동아일보>학술전문기자를 지내면서 연재한 칼럼집 『오래된 꿈』(생각의 나무, 2001)이 있다. 율곡 관련 논문으로 「기질변화(氣質變化), 욕망의 정화를 위한 성리학적 기획 – 율곡 이이의 심성수양론을 중심으로-」(『철학연구』38, 2009)를 발표한 바 있다.

이광호와 김형찬 두 학자 모두 한문에 조예가 깊고 유교철학, 특히 성리학과 주희의 사상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광호는 김형찬 보다 15살 위이며 학술적으로 본다면 한세대쯤 위라고 할 수 있다. 이광호는 자기소개에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 4년,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교육과정 5년을 마쳤다고 하였다.
한문에 대한 이러한 각별한 애정이 그의 책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책은 주 내용이 퇴계와 율곡의 한문 시, 편지 등의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치밀한 번역과 꼼꼼한 역주와 해설이 돋보인다. 동양철학, 혹은 유교나 한국철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이나 후배 학자들에게는 여러 면에서 매우 도움이 될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지로 이광호의 저술은 뒤에 출판된 김형찬의 책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김형찬의 책에 이광호의 견해에 대한 언급이 보이고,(32쪽) 이광호의 ‘다투다’는 관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견(169쪽)도 보이기 때문이다.
김형찬의 책은 매끄러운 한국어 표현이 돋보인다. 신문사 기자로 활동한 경력 덕분인지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한 느낌을 준다. 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가끔 추상적인 어휘를 남발하여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의 책은 매우 정제된 느낌을 갖게 한다. 이광호의 책과 김형찬의 책은 서로 매우 보완적이며, 두 책을 한권으로 묶어도 서로 잘 어울릴 것 같다. 다만 효과적인 독서를 위해서는 김형찬의 책을 먼저 읽고 이광호의 책을 나중에 읽는 것이 좋다. 이광호의 책은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3 목차 소개

이광호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는 다음과 같이 모두 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율곡과 퇴계가 주고받은 시
제2장 율곡과 퇴계가 주고받은 편지
제3장 퇴계가 사망한 뒤 율곡이 퇴계를 위하여 지은 글

모두 율곡과 퇴계의 한문 문장을 번역한 것으로 제1장은 시문 4편을, 제2장은 서신 14편을, 그리고 제3장은 만사, 제문, 유사 등 문장 5편을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단연 제2장이다.
제2장의 목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율곡의 첫 번째 편지-별지, 퇴계의 답서를 부록함(1558년)
2. 퇴계의 첫 번째 답서(1558년)
3. 퇴계의 두 번째 답서-별지(1558년)
4. 퇴계의 세 번째 답서-별지(1558년)
5. 퇴계의 네 번째 답서(1558년)
6. 퇴계의 다섯 번째 답서(1564년)
7. 퇴계의 여섯 번째 답서(연도 미상)
8. 율곡의 두 번째 편지(1567년)
9. 율곡의 세 번째 편지(1568년)
10. 율곡의 네 번째 편지(1570년)
11. 퇴계의 일곱 번째 답서(1570년)
12. 퇴계의 여덟 번째 답서-문목에 답함(1570년)
13. 율곡의 다섯 번째 편지-문목(1570)
14. 퇴계의 아홉 번째 답서-물음에 답함(1570)

12, 13번 항목에서 ‘문목’이란 ‘질문 항목’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서간문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558년의 서간문과 그 이후의 서간문이다. 1558년은 율곡이 23세로, 예안(안동)으로 퇴계 선생을 방문한 해이다. 그는 그 전해 가을에 성주목사였던 노경린(盧慶麟, 1516-1568)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고 겨울 내내에 성주 처가에서 지냈다. 다음해 봄에 율곡은 강릉의 외가에 가는 길에 퇴계 선생을 만났다.
퇴계 선생은 당시 58세로 율곡보다 35세 위였다. 율곡은 21세 때 한성시에 합격을 하였지만 아직 크게 두각을 나타낸 때는 아니었다. 1번부터 5번까지의 서간문은 이시기에 써졌으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젊은 율곡의 입장과 그러한 젊은이에게 기대를 걸고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자 하는 퇴계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1558년 겨울에 율곡은 별시에서 『천도책』으로 장원 급제하고, 6년 뒤인 1564년에는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명경시에 급제한 뒤에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율곡의 이름은 ‘구도장원공’이라고 하여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한 인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율곡은 이미 과거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아니라 어엿한, 촉망받는 관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호조좌랑을 거쳐, 1565년에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에 임명되었으며, 1566년에 이조좌랑, 1568년에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 등에 임명되었다. 1569년에는 『동호문답』을 지어 임금에게 올렸다. 1570년은 퇴계가 사망한 해였다. 따라서 1564년 이후의 서간문은 율곡이 학문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성장함에 따라 퇴계와의 관계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광호는 이러한 서간문 외에, 서간문에 등장하는 문헌 중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17편의 보충자료를 제공하였다. 예를 들면 보충자료 13은 『중용』1장의 번역문과 원문을 제시하였으며, 보충자료 17은 「성호원에게 답함」이라는 율곡의 문장을 실었다. 323쪽에 이러한 보충 자료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이 책에는 또 「퇴율 비교논문 목록」과 상세하고도 정성스러운 색인이 첨부되어 매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본문이 번역 위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저자 이광호의 생각이나 주장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각주나 해설 등에 산재되어 있어 다소 산만한데, 「머리말」, 「해제」, 「끝내면서」를 읽어보면 저자의 주장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먼저 「머리말」, 「해제」, 「끝내면서」를 잘 읽어보고 저자의 저술 의도를 잘 파악한 뒤에 율곡과 퇴계의 문장을 원문과 비교하면서 천천히 한편씩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김형찬의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는 다음과 같이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만남
2.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1
3. 사단과 칠정 : 퇴계와 고봉의 8년 논쟁
4.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2
5.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3
6. 사단칠정과 인심도심 : 율곡과 우계의 논쟁
7. 군왕의 정치와 신하의 정치

이 중에 제3장과 제6장은 퇴계와 율곡이 묻고 답하는 내용이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퇴계와 고봉의 논쟁(3장), 율곡과 우계의 논쟁(6장)을 추가한 것이다. 이 책의 뒷 표지를 보면 ‘조선유학 500년 퇴계·율곡·고봉·우계 그들은 무엇을 묻고 어떻게 답했는가. 퇴계, 율곡, 고봉, 우계는 조선을 성리학의 이념 위에서 기획하고 만들고 운영해온 지식인들의 후예였다’라는 책소개가 있다. 이것을 보면 저자는 율곡과 퇴계의 대화를 넓혀서 고봉, 우계까지를 포함한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유학 사상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이 책의 목차를 이렇게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실지로 이 책의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제2장,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1 (1558년)
제4장,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2 (1570년, 『중용』관련 문답)
제5장,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3 (1570년, 『성학십도』관련 문답)

저자는 율곡의 질문과 퇴계의 답변을 위와 같이 3개의 장으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제2장은 1558년 율곡이 관직에 나가기 전 시기에 이루어졌던 문답, 제4장과 제5장은 율곡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후의 문답이다.
제2장과 제4장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율곡은 1564년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이듬해(1665년, 명종 20년) 20여년간 정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하였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이 실각하고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이전에 을사사화(1545년)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이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1567년에 선조 임금이 즉위하였다. 이해에 퇴계도 새롭게 변한 분위기 속에서 상경을 하여 일시적으로 대제학에 취임하기도 하였다.(1568년) 이즈음 퇴계는 젊은 선조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율곡은 「동호문답」(1569년)을 지어 올렸다. 이와 같은 상황의 변화가 있고난 뒤에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2’가 있었던 것이다.
제4장은 『중용』관련 문답을, 제5장은 『성학십도』에 대한 율곡의 질문과 퇴계의 답변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이러한 소개는 이미 제3장에서 이루어진 퇴계와 고본의 사단·칠정 논쟁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어서 매우 체계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뒤이어 소개되는 제6장의 율곡과 우계의 논쟁은 퇴계 사후에 율곡의 철학사상이 어떻게 변화, 완성되어 가는지 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퇴계 사상이 율곡의 학문적인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제7장은 율곡과 퇴계의 문답을 넘어서 율곡과 퇴계의 사상을 비교한 부분이다. 저자는 퇴계의 『무진육조서』(1568년)와 율곡의 『동호문답』(1569년), 『만언봉사』(1574년)를 비교하고 나아가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를 비교 검토하였다. 이 장의 제목인 ‘군왕의 정치와 신하의 정치’는 바로 ‘군왕’을 주목한 퇴계의 사상과 ‘신하’를 주목한 율곡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맺음말의 제목인 ‘군왕의 마음과 신하의 도통’도 그러한 의미로 붙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록’으로 첨부된 ‘한국유학의 쟁점과 퇴계·율곡의 위상’은 퇴계와 율곡의 사상을 조망하면서 조선시대 유학사를 쟁점별로 소개한 것이다. 이 부록까지 읽어보면 이 책은 전체적으로 퇴계와 율곡의 문답을 키워드로 집필한 한권의 ‘조선시대 사상사’와도 같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작하면서 2 – 율곡사상 요약

#2. 시작하면서 2 – 율곡사상 요약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참고로, 이동준이 1996년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율곡 사상을 소개한 내용을 알기 쉽게 재구성, 요약하여 제공한다. 여기에는 학계에서 1990년대 초까지 연구된 율곡 사상의 연구 성과가 담겨 있다. 물론 이동준의 입장이 반영된 것인데, 그는 1975년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16세기 한국 성리학파의 역사의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
이러한 내용을 꼼꼼하게 읽고 기억하여, 즉 여기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지렛대로 삼아 본문에서 소개하는 6권의 단행본을 잘 읽어보면 율곡 철학의 전모 나아가 율곡 사상이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율곡은 자기 시대를 어떻게 보았는가?

율곡(1536년∽1584년)은 자신이 살던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쇠퇴기’로 판단해 경장(更張), 즉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그는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만언봉사』)이라 하고,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 사례로 세종 시대의 『경제육전(經濟六典)』이나 세조 시대의 『경국대전』을 들었다. 따라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다.

2) 율곡에게 성리학은 무엇이었는가?

율곡에게 성리학, 즉 주자학은 단순히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실공(實功, 실질적인 공적)’이나 ‘실효(實效, 실질적인 효과)’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리고 정치를 할 때, 현실의 상황(時勢)을 잘 파악하여 옳게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앞에 두고 실질적인 업적에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만언봉사』)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처신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잘못된 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율곡은, 성현의 도는 ‘시의(時宜)와 실공(實功)’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업무를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과 같은 훌륭한 왕이나, 공자·맹자와 같은 훌륭한 성현이 있더라도 현실의 폐단을 고치지 않고서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성리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의 관계에서 파악하였는데, 이것이 율곡이 주장하는 성리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의 개혁사상은 율곡의 성리학 이론, 즉 이기론 자체에서 출발한 것이다.

3) 율곡의 사상이 성숙된 시기는 언제인가?

율곡은 29살이 되던 1564년에 과거(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8년 뒤, 37세가 되던 1572년에 그는 친구 성혼과 편지로 성리설에 대한 학문적인 논의를 벌였다. 그는 이전에도 성혼과 경학이나 성리학에 관한 문답을 교환하였으나 이때는 매우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당시는 퇴계가 사망한 지 2년 뒤였는데, 1년간 모두 9차례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았다.
서신을 통한 이러한 논의는 이황과 기대승(고봉高峰 奇大升)의 논변처럼 율곡에게는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다만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은 무려 13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성혼과의 논의는 단지 1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대개는 성혼이 율곡에게 질문을 하고 율곡이 회답을 하는 것이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로 성리학의 핵심 주제였다. 성혼은 원래 퇴계와 기대승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기대승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러나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이와 기가 서로 발동함)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혼은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율곡에게 물었다. 율곡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퇴계 외에도,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과 나흠순(羅欽順, 1465년~1547년,호는 정암整菴. 명나라의 철학자)에 대한 논평, 그리고 경전의 본래 의미와 송나라 시대 여러 유학자들의 성리설을 정리해서 보냈다. 이러한 답변을 통해서 율곡은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나중에 율곡이 발표한 『성학집요』나 「인심도심설」의 핵심내용은 이러한 논쟁을 통해서 정리, 발전되었다.

4) 율곡과 퇴계의 사상적 차이는 무엇인가?

율곡은 퇴계의 이원적(二元的) 이기론, 즉 이와 기가 각각 별도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퇴계가 이와 기를 서로 대립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퇴계 자신이 잇단 사화를 겪으며 형성된 것이다.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퇴계는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공의(公義, 공적인 의리)와 사리(私利, 사적인 이익)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와 인욕(人慾, 인간의 욕심), 인심(人心, 인간의 마음)과 도심(道心, 도의 마음), 사단(四端, 네 가지 착한 마음)과 칠정(七情, 일곱가지 감정), 그리고 본연지성(本然之性, 본래의 성품, 즉 인간의 순수하고 착한 본성)과 기질지성(氣質之性, 기질의 성품, 기에서 나온 본성)을 대립적인 것, 즉 분리적인 것으로 보고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자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퇴계에게 이발(理發, 이가 발동하는 것. 이의 주체성)과 기발(氣發, 기가 발동하는 것, 기의 주체성),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뜻한다. 퇴계는 이와 기가 왕과 신하의 관계에 있으며, 인심(인간의 마음, 즉 신하의 마음)은 항상 도심(도의 마음, 왕의 마음)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뒤바뀌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상실을,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퇴계 자신은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이론을 정립하여 후인들에게 도(道)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율곡은 퇴계와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565년에 오랫동안 섭정을 하면서 권세를 휘둘렀던 문정왕후가 사망하였다. 2년 뒤에는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율곡은 1564년부터 관직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바로 새로운 변화의 시기였다. 그동안 탄압을 받았던 사림이 다시 복귀하고, 사람들은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율곡은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서 학문적인 진리를 찾았다. 율곡이 리와 기를 불상잡(不相雜, 서로 섞이지 않음)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不相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의 묘(妙)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 같은 희망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율곡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퇴계의 이기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5) 인심(人心)은 ‘기’, 도심(道心)은 ‘리’인가?

율곡은 인간의 칠정(七情)을 형기(形氣)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본연지성(本然之性)’ 또한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율곡이 보기에 기란 단순히 ‘혈기의 기(血氣之氣)’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다. 적극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기는 인간의 ‘본연의 성’을 엄폐(掩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리’ 만을 선한 것으로 보는 퇴계의 입장과 확연이 다른 점이다.
율곡은 “인심과 도심이 다 기에서 발동한 것이다. 기가 본연의 리(本然之理)를 따른다면 기가 원래 본연의 기(本然之氣)이다”라고 하였다. “기가 하늘의 명령을 따를지 여부는 모두 기가 하는 일이다. 그러니, 호발(이도 발동하고, 기도 발동하는)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심(人心, 인간의 마음)’이란 ‘구체(口體, 입과 몸)’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道義)’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따라서 율곡은 인심은 기가 발동한 것이고, 도심은 리가 발동한 것으로 보는 퇴계의 입장과는 달리,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하나의 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율곡의 주장에 따르면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이 바로 천리(天理)라고 하였다. 율곡은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역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도심’이라는 것이 어디 다른 세상에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6) 율곡은 기 철학자인가?

조선의 기철학자, 즉 기를 일원적으로 보고 오직 ‘기’만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는 철학자로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 호는 화담花潭)을 든다. 그런데 율곡도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고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율곡은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하며, 기의 측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율곡은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不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極本窮源, 본원을 철저하게 추구함)하는 리(理)의 측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율곡은 ‘리’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의 긍정적인 역할을 이해하였다.
율곡은 나아가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張載, 1020~1077, 호는 횡거橫渠이며 중국의 기철학자)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妙契, 묘하게 와 닿는 생각)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율곡은 또 서경덕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오직 ‘기’만을 중시하는 논의에 치중하는)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理通氣局, 리는 만물에 통해 있지만 기는 사물이나 현상마다 국한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함)’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만 본 사람(見一隅者)’라 폄하했다.
서경덕은 궁극적인 존재를 ‘태허의 기(太虛之氣)’로 보았다. 그러나 율곡은 그렇게 보지 않고, ‘태극의 리(太極之理)’로 이해하였다. 율곡은 오히려 퇴계처럼 리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리가 기에 우월하다는 ‘이우위설(理優位說)’을 긍정하였다. 리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리는 기의 중추요 근저(根柢)이며 주재(主宰)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리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건과 사물에서 유행(즉 통행)하는 것이요 삼라만상이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퇴계와 다른 점은 퇴계가 리와 기를 각각 주체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들이 각각 실질적인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율곡은 리와 기가 이합(離合, 떨어지고 합함)이 없으며, 선후(先後, 앞 뒤)도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기가 발하고 리가 그것을 탄다고 하는 하나의 길 학설)을 주장했다.
퇴계는 리와 기를 처음부터 분리하여 이원적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율곡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를 떠나서 이발(理發, 리가 발동함)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고 본 것이다.
퇴계는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리를 강조하고 그것이 독자적으로 발동이 가능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 서경덕은 리를 기 자체에 작용상의 자율성이 존재한다고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결국 퇴계는 ‘리’ 우위설을 논해 리의 구극성(究極性)을 강조하고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한 것이다. 서경덕과 퇴계 이황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와 같이 서로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 즉 리는 모든 사물에 통하지만 기는 어떤 사물에 국한된 것이라는 주장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퇴계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 즉 기가 발하면 리가 거기에 편승하여 하나의 현상이 된다는 논리로 대응했다.

7) 이기지묘(理氣之妙)란 무엇인가

‘이기지묘(理氣之妙)’은 ‘리와 기의 교묘함’ 혹은 ‘이기의 교묘한 결합’이라는 뜻으로, 율곡은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여 리와 기의 두 영역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양면의 극단을 함께 거부하였다. 즉 그는 기의 사실성과 리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양자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묘한 결합이라고 정의하였다.
율곡은 나아가 이기의 묘처(妙處, 기묘한 곳)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태극과 음양, 리와 기의 관계는 하나 이면서 둘(一而二)이요, 둘이면서 하나(二而一)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이기는 하나(一)이면서 둘(二)이요, 둘(二)이면서 하나(一)이다. 이기가 혼연무간(渾然無間, 구별이나 차별이 없으며 서로 간에 틈이 없음)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는 곧 도(器卽道)요, 도는 곧 기(道卽器)’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하나의 사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리는 스스로 리요, 기는 스스로 기’라고 한 것이다.”
율곡은 또 “리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리는 통(通)하고 기는 국한(局)된다.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發)하고 리는 승(乘)한다. 무형무위(無形無爲, 형태가 없으며 하는 것도 없음)하면서 유형유위(有形有爲, 형태가 있으며 하는 것이 있음)한 것의 주인(主)인 것은 ’리‘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器, 도구)인 것은 기(氣)이다”(『성학집요』)라고 주장하였다. 율곡이 주장한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달리말하자면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지어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8) 율곡 사상이 개혁을 지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율곡의 주장에 따르면 ‘리’는 모든 사물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본연의 리’는 스스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리’가 현실에서 변화하는 현상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 즉, 현실과 관련된 ‘유행의 리(流行之理, 흐르고 움직이는 리, 즉 운행 변화하는 리)’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보편적 원리가 각 사물의 개별적인 존재를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현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것은 율곡이 성리(性理)와 실사(實事, 실재 사물)가 ‘혼융무간(混融無間, 둘 이상의 사물이 서로 섞여 완전히 융합되고 서로간의 간격이 없어짐)’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이러한 논리를 발전시켜 율곡은 이른바 의(義, 의리)와 이(利, 이익)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났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義理)와 실리(實利)를 서로 ‘불가리(不可離, 떠날 수 없음, 즉 분리 불가능)’의 관계로 보았다. 그의 개혁사상은 이러한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율곡은 “옳음(是)과 그름(非)은 도(道)에서 병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로움(利)과 해로움(害)은 일(事)에서 함께 할 수 없다. 이해(利害)가 급하다고 옳고 그름의 소재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일을 처리하는 마땅함에서 어긋난다. 또한 옳고 그름을 생각해 이익과 해로움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應變之權, 변화에 대응하는 처신)에서 어긋난다. …… 중(中, 중용)을 얻고 마땅함(宜)에 합하면, 즉 옳음(是)과 이익(利)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시무칠조책(時務七條策)」)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절절히 ‘득중(得中, 중용을 얻음)’, ‘합의(合宜, 마땅함에 부함됨)’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서 옮음(是)과 이익(利)의 조화라는 하나의 목표로 향한다고, 율곡은 주장하였다.

9)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율곡은 당시 가장 큰 악법(弊法)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동호문답』)

1) 일가절린(一家切隣, 세금을 못내는 가구는 이웃과 단절됨)의 폐해
2) 진상번중(進上煩重, 진상품이 번잡하고 무거움)의 폐해
3) 공물방납(貢物防納, 공물을 관리나 상인들에게 대신 납부함)의 폐해,
4) 역사불균(役事不均, 노역일이 균등하지 못함)의 폐해,
5) 이서주구(吏胥誅求, 관리들이 백성의 재물을 빼앗음)의 폐해

이들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율곡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고통을 잘 파악하여 제시한 것이었다. 또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악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만언봉사」·『성학집요』 그리고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관하여 필요한 개혁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아래로부터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언로의 개통을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공론(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율곡은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였는데, 시무를 잘 알고 국사를 걱정하는 사람들 중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 율곡이 후세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율곡은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을 그의 철학과 함께 제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나중에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후대에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율곡의 성리학 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

율곡 사상 입문을 위한 6권의 단행본 소개


율곡 사상 입문을 위한 6권의 단행본 소개

 

임태홍

#1. 시작하면서 1 – 율곡학 입문서 6권

어떤 인물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쓴 글, 혹은 그 사람에 대해서 쓴 글을 읽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은 인문학적 방법이다. 율곡 선생이 직접 쓴 글은 이 사이트(율곡학 사업단의 율곡학 프로젝트 전용 홈페이지)에 적지 않게 올라와 있다. 율곡 선생이 한문으로 쓴 글을 한글로 번역, 풀이하여 이곳에 지금까지 공개된 저작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격몽요결(공개된 자료명: 새로 읽는 격몽요결 상, 하)
2. 성학집요(공개된 자료명: 중급편- 새로 읽는 성학집요)
3. 동호문답
4. 만언봉사
5. 율곡의 상소문
6. 율곡의 학교모범 – 선비가 되는 공부

율곡의 저작물은 이외에도 『석담일기』, 『경연일기』, 『소학집주』, 『기자실기』, 『순언』, 「자경문」, 「천도책」 등이 있으나, 율곡 사상의 핵심을 전하는 중요한 저술은 모두 이 사이트 안에 공개되어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자료를 읽고 또 읽으면서 잘 생각해보면 율곡선생이 가지고 있던 철학과 사상을 정확히, 그리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몹시 지루해질 수 있다. 거기다 자칫 잘못하면 선생의 사상을 엉뚱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율곡 선생의 이러한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둔 글을 찾아서 같이 읽어보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이란 대개 학자들을 말하며 그들이 쓴 글은 논문이나 단행본 형태로 시중에 발표되어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불명의 글을 참고할 수도 있으나 깊이 있는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율곡 선생의 사상에 관한 논문은 이 사이트에서 2013년부터 발표된 목록을 정리해둔 것이 있다. 『한국유교연구 레포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국고 지원을 받아 매년 발간하고 있는 이 레포트는 연구 연감 형식인데, 율곡 선생 외에도 한국 유교와 관련된 연구논문들이 다수 소개되어 있다. 율곡 관련 논문은 이 레포트의 ‘제5장 한국 성리학 연구’편에 있다.
혹은 국회전자도서관(https://dl.nanet.go.kr/)에 들어가 키워드로 ‘율곡’을 검색해보면 1500편이 넘는 연구 논문 목록을 직접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 논문 목록을 직접 찾아서 읽는 것은 전공하는 학생이나 연구자가 아니면 역시 쉽지 않다. 무엇부터 읽어야할지, 어떤 논문이 중요한 지도 막연하다.
그래서 여기에서 율곡 선생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입문서를 몇 권 소개하고자 한다. 그동안 국내에서 발표된 단행본 중에 도움이 될 만한 6권의 단행본을 소개한다. 이들 책을 끼고 읽으면서 율곡 선생이 지은 글을 읽어보면 그의 삶과 철학 사상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율곡 선생의 ‘생애 및 활동사항’, 그리고 ‘학문세계와 저서’에 대해서는 1996년에 이동준 교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잘 정리 해둔 것이 있다. 이를 참고하면 율곡 선생의 개략적인 생애와 사상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같은 글에서 이동준 교수(이하 모든 저자의 호칭 생략)는 참고 문헌으로 율곡 관련 단행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1. 황의동, 『율곡 사상의 체계적 이해』(서광사,1998)
2. 황의동, 『율곡철학연구』(경문사,1987)
3. 황준연, 『이이 철학 연구』(전남대학교,1989)
4. 송석구, 『율곡의 철학 사상 연구』(형설출판사,1987)
5. 송석구, 『율곡의 철학사상연구』(형설출판사,1987)
6. 채무송, 『퇴계율곡철학의 비교연구』(성균관대학교출판부,1974)
7. 이병도, 『율곡의 생애와 사상』(서문당,1973)
8. 이준호 편, 『율곡의 사상』(현암사,1973)

이들 서적은 대개 1970년대, 80년대에 출판된 단행본이다. 황의동은 1987년에 충남대에서 『율곡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 리기지묘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황준연은 성대에서 1989년에 『율곡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 <성학집요>를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송석구는 동국대에서 1981년에 『율곡의 철학사상 연구 : 성의정심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채무송은 『퇴율성리학의 비교연구 : 퇴율의 사상입장을 중심으로 하여』라는 비교논문으로 1972년에 성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여기서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출판된 서적을 포함하여 다음과 같이 6권의 단행본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송석구, 『율곡의 철학사상』(중앙일보사, 1984)
2. 황준연, 『율곡철학의 이해』(서광사, 1995)
3. 황의동, 『율곡 이이-성리학과 실학을 겸비한 실천적 지성』(살림, 2007)
4. 임옥균, 『이이 – 정치적 실천철학의 완성』(성대출판부, 2007)
5. 이광호,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홍익출판사, 2013)
6. 김형찬,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바다출판사, 2018)

이들 서적을 선정하는데 특별한 기준은 없다. 가능하면 요즘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내용도 믿을 만한 단행본을 선택했다. 이들 단행본 외에도 율곡 철학·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서적이 많이 있으나 지면관계상 여기에서는 이들 서적만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소개하는 방법으로 두 권씩 모아서 소개하기로 한다. 제목이 비슷하거나, 내용이나 출판년도가 유사한 두 책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다. 두 권씩 비교하면서 읽다 보면 서로 보충이 되는 내용도 있고, 어느 한쪽으로 자신의 생각이 끌리기도 하여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도 키울 수 있다. 또 내용이 어려운 책, 특히 철학사상 관련 책을 읽을 때 느끼는 지루함에서도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두 권씩 다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광호, 2013,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김형찬, 2018,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이 두 책은 제목이 비슷하다. 율곡과 퇴계의 문답에 주목한 점이 유사하며, 2010년대에 5년 간격을 두고 출판되었다. 이 두 책은 2020년대 들어선 지금, 율곡학 나아가서 퇴계학이나 한국유학 연구에서 비교적 핫한, 즉 ‘유행의 첨단에 서 있는’ 단행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제목만 본다면 이광호는 퇴계와 율곡의 사상적 차이점을 강조한 듯하며, 김형찬은 책 제목을 보면, 율곡과 퇴계의 관계를 ‘묻고 답하는’ 학생과 선생의 관계로 규정하고 그 점을 주목한 듯하다. 율곡의 초기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퇴계와의 관련성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 율곡은 나중에 크게 성장하면서 퇴계학과 율곡학이라는 조선시대 유학의 2대 주류 중 한축을 담당하게 되는데 퇴계와 율곡의 차이점을 아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맨 처음 이 두 저서를 소개하기로 한다.

<2>
황의동, 2007, 『율곡 이이 – 성리학과 실학을 겸비한 실천적 지성』
임옥균, 2007, 『이이 – 정치적 실천철학의 완성』

두 번째로 소개할 황의동과 임옥균의 단행본은 2000년대 후반에 출간한 율곡 사상 입문서다. 같은 해에 이 같은 입문서가 두 권이나 출간된 것도 특이하지만 두 사람 모두 율곡 사상에 대해서 ‘실천’이라는 단어를 동원하여 부제목을 사용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황의동은 앞서 소개하였듯이 율곡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임옥균은 1995년 성대에서 『대진(戴震)철학에 나타난 ‘주자학적 사유의 비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철학, 특히 중국유학의 전문가이다.

<3>
황준연, 1995, 『율곡철학의 이해』
송석구, 1984, 『율곡의 철학사상』

세 번째 소개는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90년대에 출판된 서적들이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황준연과 송석구는 율곡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송석구는 1981년에 학위를 받고 3년 뒤에 『율곡의 철학사상』을 발표하였다. 황준연은 1989년에 학위를 취득하고 6년 뒤에 이 단행본을 발표하였다. 두 사람 모두 ‘율곡의 철학 사상 연구’라는 비슷한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단행본도 위와 같이 매우 비슷한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황준연은 송석구보다 10년 정도 뒤이어 학위를 받고 단행본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황준연의 작품에 송석구의 연구 성과가 얼마만큼 녹아 있는지, 혹은 극복이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두 사람의 저술을 통해서 율곡 철학의 전모에 대해서 좀 더 철저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 두 권을 소개하기로 한다.

선비와 로맨스

선비와 로맨스

인간의 욕망과 ‘내로남불’

오늘날 정치 현장에서 여야 정당이 서로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내로남불’이라는 것이 있다. 곧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는 말을 가리킨다. 로맨스는 대체로 청춘 남녀가 꿈꾸는 일이지만, 때로는 기혼자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해서 오래전부터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였다. 그것은 인간 삶의 동력이자 에너지로서 욕망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에 딱 맞는 적당한 일화가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어떤 기생이 어버이를 여의고 절에서 여러 기생과 함께 재(齋)를 올렸다. 한 젊은 스님이 채소를 썰다가 문득 벽에 기대어 섰기에, 주지 스님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아름답게 단장한 기생들을 보니 마음이 산란하고, 정이 발동하여 참을 수 없어 그럽니다.’라고 하자, 주지 스님이 말하기를, ‘쓸데없는 소리 마라. 오늘 기생의 재에 누군들 정이 움직이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욕망이 일어남은 당연한 일이다. 『필원잡기』에 정몽주도 일찍이 “여색을 좋아함은 인지상정이다. 공자께서도 말하기를, ‘(수양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라.’라고 하셨으니,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남녀의 연애 사건으로서 로맨스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 또한 사회 질서를 위한 적절한 규범이 있으니 함부로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구나 성리학에 종사하는 선비로서는 하나의 경계의 대상으로서 금기였을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도덕적 관념과 본능 사이에서 다양한 변주가 생길 수밖에 없다. 조선 선비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가장 손쉬운 로맨스 대상

조선의 사대부라면 집안에 노비라고 부르는 하인 또는 종이 적게는 한두 명 많게는 수십 명씩 거느리고 산다. 노비도 재산처럼 물려받고 물려주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예쁘고 젊은 여자 하인은 간혹 주인의 첩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 거느리던 여자 종을 사랑한다고 해서 첩으로 삼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부인이 묵인하거나 허락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적당한 명분, 가령 본부인에게 아들이 없다거나 병이 있거나 늙어 부부생활이 곤란할 때 가능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첩을 들였다간 갈등을 피할 수 없고, 그 피해는 젊은 첩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젊은 하인을 첩으로 맞이하기 위해 모종의 꼼수를 부리기도 하였다. 권별의 『해동잡록』에 보이는 권람(權擥, 1416~1465)의 일화가 그것이다.
“권람에게 젊은 여자 하인이 있었는데, 태도와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다워 그는 늘 마음속에 그녀를 품고 있었으나, 부인이 무서워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 한명회에게 그 일을 상의하니, 그가 말하기를, ‘상사병을 앓는 것처럼 하자.’라고 하였다. 권람이 그의 말처럼 하고 있는데, 한명회는 밤중에 몰래 와서 회화나무꽃 삶은 물을 전해주며, 온몸에 이것을 발라 황달 증상같이 만들게 하였다. 며칠 후에 또 한명회가 와서 울며 말하기를, ‘내 친구가 죽겠구나. 맥박은 느리고 기운이 이렇게 약해서야 금방 곧 쓰러지겠구나. 부인은 어찌 한 젊은 여종을 아껴 주인의 목숨을 살리지 않는고?’라고 하였다. 부인이 곧 알아차리고 드디어 날을 택하여 여자 하인을 첩으로 삼았다. 다음날 한명회가 다시 가니, 권람이 말하기를, ‘대사는 이미 이루어졌다.’라고 하고, 둘이 서로 낄낄대고 웃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모의하여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책략가이다. 친구가 사랑하는 젊은 여종을 첩으로 만든 술책이었다. 아마도 부인이 모르는 척 속아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귀여운 일이고, 무리하게 젊은 여종을 첩으로 만든 경우는 허다하다. 가장 손쉬운 로맨스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쉬운 대상은 기생이었다. 남녀유별 사회에서 기생만은 드러내 놓고 남성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런데 기생이라고 해서 모두가 아무 남성과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황진이였고, 그녀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로맨스를 이루려는 기생도 있었다. 그 사례가 『용재총화』에 보인다.
“손님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볼기를 맞은 수원 기생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어우동(於宇同)은 음란한 짓을 좋아하여 죄를 얻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다고 하여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법이 어찌 이처럼 다른가?’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옳은 말이라 하였다.”
이 기생은 춘향처럼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의지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모든 기생이 이렇지는 않았다. 대다수는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대부의 첩이 되어 안정적 삶을 누리는 것이 꿈이었다.
한편 기생을 첩으로 맞아들일 형편이 안 되었던 선비들 가운데는 그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하거나 그리워하기도 하였다. 『해동잡록』의 사례이다.
“박신(朴信)이 일찍이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가 되어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했었는데, 강릉 부윤 조운흘(趙云仡)이 거짓으로 홍장이 벌써 죽었다고 전하니, 박신은 슬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조운흘이 박신을 초청하여 경포대에 나가 놀았는데, 몰래 홍장을 단장시키고 그림을 그린 배를 준비시켰다. 그리고는 처용(處容)을 닮은 아전과 홍장이 거기에 탔다. 그 배가 천천히 포구로 들어와 물가에 돌아다니니, 조운흘이 박신에게 말하기를, ‘이 땅은 옛날 신선의 유적이 있어, 지금도 신선이 오가는 일이 있습니다. 혹 꽃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이면 사람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하지는 못합니다.’라고 하니, 박신이 말하기를, ‘산천은 이와 같고 풍경이 특이하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세히 배 안을 보니 곧 홍장이었다. 온 좌석이 크게 웃으며 즐겁게 놀다가 파했다.”
상대를 그리워하는 남성을 놀려주기 위한 계책이었다. 관리로서 외지에 나가 기생과 사귀는 일이 흔했다. 능력이 있으면 첩으로 데리고 왔었지만, 대부분 아쉬움만 남기고 헤어졌다.

순간의 로맨스 그리고 약속과 배신

한순간 욕정에 못 이겨 상대 여성을 범하고 팽개치는 일은 진정한 로맨스가 아니다. 사실 ‘춘향전’도 그것을 경계한다. 또는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사례도 있다. 『용채총화』의 일화이다.
“홍재상(洪宰相)이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못한 때였다. 길을 가다 비를 만나 조그만 굴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그 안에 집이 있고 17~18세 정도의 어여쁜 여승이 홀로 앉아 있었다. 공이 ‘어째서 홀로 앉아 있느냐?’라고 물으니, 여승은 ‘세 여승과 같이 있사온데 두 여승은 양식을 탁발하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마침내 그 여승과 정을 통하고 약속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그대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리라.’라고 하였다. 여승은 이 말만 믿고 매양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날이 지나가도 나타나지 않자 마음에 병이 들어 죽었다. 공이 나중에 남쪽 지방의 절도사가 되어 진영(鎭營)에 있을 때, 하루는 도마뱀 같은 조그만 동물이 공의 이불을 지나가니, 곁에서 모시던 아전이 그것을 죽여버렸다. 다음날에도 조그만 뱀이 들어오므로 아전은 또 죽여버렸다. 또 다음날에도 뱀이 방에 들어오니 공은 비로소 전에 약속했던 여승의 화신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위세를 믿고 아예 없애버리려고 명하여 죽여버렸더니, 이 뒤로는 매일 올 뿐만 아니라, 나올 때마다 몸뚱이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큰 구렁이가 되었다. 공은 군영에 있는 모든 군졸을 모아 칼을 들고 사방을 둘러싸게 하였으나 구렁이는 여전히 포위를 뚫고 들어왔다. 군졸도 들어오는 대로 다투어 찍어버리거나 장작불 가운데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래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공은 구렁이를 함 속에 넣어 방 안에 두고, 낮에 변방을 순행할 때도 함을 짊어지고 앞서가게 하였다. 그러다가 공의 정신이 점점 쇠약해지고 얼굴빛도 파리해지더니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어떤 사실과 경계하는 일이 잘 배합된 이야기로 보인다. 조선 시대 여승은 억불정책의 여파로 하찮은 존재였다.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로맨스는 신중해야 하고,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교훈이 들어 있다. 사대부들의 비뚤어진 하룻밤 풋사랑을 경계하였다.

삼각관계

흔히 로맨스를 거론할 때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한 사람을 두고 두 사람이 경쟁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조선 시대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송사까지 이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인간사가 어딘들 없겠는가? 먼저 『해동잡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한 중신(重臣)이 변방에 장군으로 나가서 무뢰배 한 사람을 데려다가 막하(幕下: 주장이 거느리는 사람)로 삼자 사람들이 그것을 이상히 여겼다. 얼마 안 되어서 무뢰배가 가벼운 군율을 범하니 담당 장수가 심문하고 장군에게 품의(稟議)하였더니, 장군이 판결하기를 ‘극형에 처하라.’라고 하였다. 그가 물러나 방문 밖에 서서 혹시 다른 분부라도 있을까 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장군이 장막 안에서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하는 말이, ‘에이! 고약한 놈이로고. 저 젊은 놈이 나의 사랑하는 여자를 훔쳤지.’라고 하였다.”
사실 그 무뢰배는 장군의 연적이었다. 아마도 곁에 두고 감시할 의도로 그 무뢰배를 막하에 두었던 모양이다. 가벼운 군율로 극형에 처하는 것도 연적임을 반증한다.
한편 삼각관계의 압권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싸움이 한창일 때 윤원형의 당이었던 임백령(林百齡)과 윤임 사이의 일이다. 저자 미상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의 사례이다.
“임백령이 윤임과 한마을에 있으면서 일찍이 기생 옥매향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임백령이 질투하고 미워하여 윤임을 역모로 몰았으니, 을사년의 화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또 윤임을 죽인 뒤에 그의 처첩을 종으로 만들어 공신들에게 나누어 줄 적에, 임백령이 옥매향을 자기의 종으로 삼기를 원했으니, 마침내 그의 계책을 이룬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일로 더욱 그의 간사하고 악독함을 분하게 여겼다.”
삼각관계의 연적이 정치적 투쟁과 복수의 동기 가운데 하나로 이어진 사건이다.

여색을 멀리하는 사람

그런데 로맨스고 뭐고 아예 병적으로 여성을 멀리한 사람도 있었다. 무슨 곡절이나 사연이 있을 것이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엄숙한 도덕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하는 사람의 성격 또는 취향이다. 이는 여러 선비의 말에 보이는데,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남녀의 정욕은 타오르기 쉽고 막기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근신해야 할 일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남녀가 한 방에 자주 있으려고 하면 음란의 해가 심하다.”라고 하였다.
또 『용재총화』에도 여러 사례를 섞어 소개한다.
“음식과 남녀는 사람들의 큰 욕망인데도 지금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 제안(齊安)대군은 참으로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나 항상 말하기를, ‘부녀자는 더러워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부인과 마주 앉지 않았다. 생원 한경기(韓景琦)는 한명회의 손자인데,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그 아내와 서로 말한 일이 없었다. 간혹 여자 하인의 소리라도 들리면 막대기를 들고 내쫓았다. 김자고(金子固)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남녀의 일도 알지 못하므로 자고는 그 후손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였다. 그 일을 아는 여자를 단장시켜 함께 자게 하고 남녀의 정을 가르치려 하니, 그 아들은 놀라 상 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뒤에는 족두리 쓴 여자만 보면 울면서 달아났다.”

삶의 에너지로서 욕망의 분출과 그 처리

조선 선비들의 로맨스의 특징은 혼인 전의 젊은 청춘의 그것이 아니라 대체로 기혼자 남성 중심으로 벌어진 일이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개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혼인해야 했으니 각자의 취향과 무관한 일이어서, 부부생활에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어서이다. 그래서 그 대상이 주로 기생이었고, 다음으로 거느리던 여자 하인이다. 기생은 오늘날 연예인과 매춘부를 포함한 그 범위가 넓었는데, 분 바르고 눈썹 짙게 그리며 시와 음악과 춤에 능했으니, 적어도 재주와 외모상 자기 부인과 비교가 안 되었을 것이다. 젊은 여자 하인은 나이 든 부인보다 젊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로맨스로 곤경에 천한 일도 잦아 파란만장한 인생의 무늬를 더했다.
아무튼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남성 중심의 일방적 로맨스이다. 외견상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도리 또는 ‘음을 누르고 양을 돕는’ 억음부양(抑陰扶陽)의 문화 속에서 여성이 적극적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대상인 여성이 지체 높은 양반의 첩이라도 되면, 약간의 신분 상승과 아울러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있어서, 완전히 일방적인 강요만이라고 할 수 없다. 선비들의 로맨스는 남성의 적극적 ‘대시’와 여성의 수동적 ‘기대’ 속에 양자의 욕망이 적절히 섞이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물론 음란과 색욕을 경계한 선비들도 있어서, 수양하여 불미스러운 일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욕망을 억제하든 거기에 빠지든 결국 인간의 본능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느냐의 문제이고, 그것은 해당 제도와 문화가 어디까지 허용하느냐 또는 무엇을 귀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남녀의 문제는 강력한 삶의 에너지를 분출한다. 어떤 이념이나 제도로 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어서, 욕망의 적절한 배출구가 필요하다. 과거의 풍습을 전근대적 악습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왜 그것을 묵인했는지 통찰이 필요하다. 현대의 우리는 또 다른 이념에 사로잡혀 그걸 억압하고 있지 않은지, 아니면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그때보다 더 문란하지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최고의 술꾼

조선 최고의 술꾼

한국인의 음주문화

인류가 언제부터 술을 마셨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3150년경 부장한 포도주 단지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깊어 그보다 오래전부터 마셨을 것이다. 세계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 가운데서 한국을 제외한다면 우리나라 주당들이 매우 섭섭하겠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인이 한 달에 한 번 이상 폭음한 비율만 봐도 남자는 52.7%, 여자는 25.0%로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하기야 우리 고대 역사에서부터 제천의식 후의 음주 가무가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유교가 들어온 후 제사 뒤에 마시는 음복도 음주문화에 한층 이바지했을 것이다. 최근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 코드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성인 한국인이 즐기는 것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음주·가무’가 가장 빈도수가 높았다는 점은 우리의 문화 유전자 속에 그것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술집이나 노래방이 성행하고, 코로나19 유행에도 그곳이 전파의 매개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 외국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따르면 이렇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조선에 와서 놀라운 일 세 가지를 보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사신을 접대하는 관원이 큰 술잔으로 셀 수 없이 대작하여 한 섬의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 세 번째로 놀라운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술은 집에서나 관청에서나 마셨던 모양이다. 이이의 『석담일기』에 따르면 “강사상(姜士尙)이 죽었다. 그는 집에 있으나 관청에 있으나 하는 일 없이 단지 술 마시기만을 좋아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술은 분명 좋은 점이 있으나 과하면 좋지 않으니 양면성이 있다. 좋아하더라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 음주이다. 조선 전기 음주문화와 그 실태를 살펴보고, 오늘날의 경계로 삼아보자.

누가 최고의 술꾼일까?

『대동야승』에는 음주 관련 기록도 꽤 등장한다. 음식에 대식가가 있는 것처럼 술에도 대단한 술꾼들이 있었다. 우선 『필원잡기』의 기록을 보면 수양대군의 수하였던 홍윤성(洪允成)은 주량이 커서 종일 마셔도 취한 적이 없었고, 또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는 그가 날마다 잔치를 벌였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그의 위력에 눌려 만취하여 말을 거꾸로 타고 집에 돌아갈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이 홍윤성에 못지않은 사람도 있었다. 같은 책에 등장하는 홍일동(洪逸童)이 그 주인공이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과 국수 세 주발과 밥 세 바리때와 두붓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사람이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와 물고기국 세 주발과 생선회 한 쟁반과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단지 미숫가루와 전술[물 타지 않은 술]을 먹을 뿐이고 밥은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 뒤에 죽었는데, 사람들은 배가 터져 죽었다고 의심하였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터질 일은 만무하고, 술로 인해 죽었을 것이다. 이 홍일동 다음이라고 말하면 섭섭할 인사가 또 있다. 홍일휴(洪日休)가 그 주인공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려 있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여러 번 북경에 왕래하였다. 일찍이 사신이 되어 남방으로 갔다가 하룻저녁에 술을 여러 말[斗] 마시고 그만 죽었다. 김수온(金守溫)이 그를 슬퍼하여 시를 지어 추모하기를,

실컷 마실 때는 천 잔의 술을 중히 여기고 痛飮千杯重
덧없는 인생은 한 털만큼 가볍다. 浮生一羽輕

라고 하였다.”
앞의 두 분 모두 폭음으로 목숨을 잃었다. 또 평소의 과음으로 죽은 이도 있다. 앞의 같은 책에 보인다.
“이효식(李孝植)은 민보익(閔輔翼)과 한 동리에 살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여 취하도록 마셨다. 두건이 벗어져 맨머리가 되면서도 매일 술 마시자고 약속하였다. 민보익은 황달에 걸려 얼굴이 먹처럼 시커멓게 되었는데도 되레 술을 끊지 않아, 내가 늘 책망하였다. 민보익은 근무 중에 몰래 술을 마시면서 판서가 알지 못하도록 당부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이효식은 몹시 슬퍼하다가 민보익이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죽었다. 두 분은 술을 삼가지 아니하여 서로 이어서 세상을 떠나니, 술이 사람에게 끼친 화가 심각하다.”
요즘 식으로 보면 음주로 인한 지방간에서 간경화로 진행하여 황달이 온 모양이다. 그래도 마셨으니 어찌 살겠는가? 같이 술을 마신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과음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다. 좀 기이한 사례이지만 술이 세면 독약에도 잘 죽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 일화는 이중열(李中悅, 1518~1547)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 등장한다.
“임형수(林亨秀)의 주량이 한이 없었다. 사약을 내렸을 때 독약을 넣은 술을 열여섯 주발까지 먹어도 취하지 않았다. 다시 더 독한 술 두 주발을 먹어도 취하지 않으므로, 이에 목을 매어 죽였다. 그 고을 사람들이 울며 이르기를, ‘공의 억울함을 천지신명까지도 알아주어 공이 잠깐이라도 이 세상에 머물게 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술이 센 분들이다. 필자는 여기서 누가 최고의 술꾼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술을 진정으로 사랑한 분들

사대부들이 술을 마실 때는 대체로 시와 음악과 춤과 기생이 빠질 수 없었다. 그것들은 묶어 실행하는 한 세트였다. 하지만 음주 자체만 즐기는 분들도 있었다. 권별이 『해동잡록』의 기록이다.
“윤회(尹淮)는 성품이 술을 좋아하였다. 한 번은 집에서 잔뜩 취해 있는데 세종이 급히 부르기에 주변 사람들이 부축해 일으켜 말에 태웠으나 취하여 깨지 않았다. 하지만 임금의 앞에 이르자 조금도 취한 기색이 없었고, 교지(敎旨)를 기초하라고 명령하니 붓 놀림이 나는 것 같았다. 모두 임금의 뜻에 맞아 참으로 천재라고 하였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 술을 마실 적에는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로부터 공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셨다.”
술을 많이 마셔도 제 할 일을 잘한 경우이다. 술을 마시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어 석 잔만 마시라 하니, 큰 잔으로 대체한 그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이륙의 『청파극담』에도 술을 좋아하는 이가 등장하는데 정인지(鄭麟趾)가 그 주인공이다.
“정인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술은 노인의 젖이다. 곡식으로 만들었으니 마땅히 사람에게 유익할 것이다. 내 평생에 밥을 먹을 수 없었으니, 술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을까?’라고 하였다. 서달성(徐達城)과 이평중(李平仲)과 손칠휴(孫七休)도 또한 술로써 밥을 대신했다. 오장(五藏)의 강약이 다르고, 또 술도 술술 들어가는 곳이 따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사람은 반드시 술에 지게 되어, 술을 끊으려 하여도 끊지 못하고, 술기운이 없게 되면 다시 마시어 정신이 이미 안에서 사라진다.”
술을 밥처럼 먹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알코올 중독을 경계하였다. 또 욕심을 버리고 평생 술만 마시고 간 사람도 있다. 정홍명(鄭弘溟, 159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에 보인다.
“윤광계(尹光啓)는 남도의 문사이다. 한평생 시와 술로 즐기며 명예나 재물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벼슬을 따라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인왕산 아래에 집을 짓고, 꽃을 심고 약초를 기르면서 조금도 풍진 세상의 기운이 없었다. 날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었는데 날마다 가져다 마시되 값을 묻지 않았고, 술집 주인 역시 언제 갚을지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배가 남쪽에서 쌀을 싣고 강가에 와 닿으면, 쌀을 술집에 보내면서 수효를 계산하지 않았다. 정봉은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윤광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살맛을 잃고 병과 술에 잠겨 있다가 겨우 60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임종 시에 술을 가져오게 하여 멀거니 보다가 작은 술잔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한평생 이것만을 좋아했는데, 지금 떠나가면서 어찌 한 방울만 마시겠느냐?’라고 하며, 다시 큰 술잔을 가져오게 하여 두 잔을 마신 뒤 쓰러져 베개를 벤 채 가고 말았다.”
정말로 술을 좋아한 사람들이다. 특히 벼슬까지 마다하고 술과 함께 유유자적한 삶, 죽는 순간에도 두 잔을 연거푸 마셨으니 정말로 술을 사랑했다고 하겠다. 술꾼들은 흔히 술에 대한 무용담(?)을 자랑하곤 하는데, 이 정도가 돼야 그래도 진정한 술꾼이라 하지 않겠는가? 술집에서 외상도 문제 삼지 않고, 갚을 때도 값을 따지지 않았다니 알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단순히 술이 좋아서 마신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책에 보인다.
“김영휘(金永暉)는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수련하는 방법을 매우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자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를 좁쌀과 함께 쪄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셨다. 때로는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얼른 내놓고 권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郭再祐)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양생법이란 주로 선가(仙家)에서 생명과 장수·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 아무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은 신선이 되었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신선은 죽은 경우에도 된다고 믿었다. 아무튼 술을 절제하며 마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발주’를 아는가? 몇십 년 전에 잠깐 유행했던 일로서, 결혼식이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 신랑 친구들이 구두에 술을 부어 신랑에게 마시게 했던 짓궂은 장난인데, 그 원조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앞의 『필원잡기』에 등장한다.
“이사철(李思哲)이 젊어서 여러 친구와 삼각산의 절에서 놀 때,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가 새로 만든 말 가죽신을 신었었는데, 이사철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여러 선비도 차례로 마셨다. 서로 보며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으로 삼은 유래가 우리로부터 고사(故事)가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뒤에 이사철이 귀하게 되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 금잔의 술맛이 산에서 놀 때의 가죽신 잔보다 못하구려.’라고 하였다.”

술을 경계하라

술이란 좋은 점도 있지만 자칫하면 건강도 잃고 실수하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술을 경계하여 아예 끊거나 조심하는 일도 생겼다. 앞의 『해동잡록』에 실려 있는 일화이다.
“정여창(鄭汝昌)이 중년에 소주를 마시고 광야에 쓰러져서 밤을 지내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매우 걱정되어 밥을 굶었다. 이때부터 제사 뒤의 음복 이외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성종이 술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정여창이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의 어미가 살았을 때 술 마시는 것을 꾸짖어서, 신이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였사오니, 감히 어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감탄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그는 한 번 한 약속을 당사자가 죽어도 지키는 도학자다운 면모를 보였다. 한편 술을 경계하는 말을 술잔에 새겨 후손들에게 훈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수경의 『견한잡록』의 기록이다.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라고 하기에 내가 써주기를,

술의 덕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큰 화목을 기른다(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많이 들지 말기를(唯願酌無多)

라고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술잔을 구워 보냈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저자 심수경은 여든 살이 넘게 장수했으며 83세에 관직에서 은퇴했고, 75세와 81세 때에 젊은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아 노익장을 과시했으니, 아마도 술을 절제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우리의 삶과 음주

지금까지 우리 조상들의 에너지 넘치는 파란만장한 음주 사례를 살펴봤다. 술을 매개로 삶의 에너지가 다양하게 분출하였고, 도덕적 이념을 지키기 위해 절제하는 일은 극히 일부 인사에 한정되었고, 나라에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술을 금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이런 술 문화 때문인지 그동안 음주로 인한 과실은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해서 음주운전이 줄어들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술에 취해 한 일이라고 둘러댄다. 경각심이 필요하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과음하게 되고, 그래서 실수하거나 건강을 해친다. 술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
나이 든 사람은 대개 술을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젊을 때 술에 많이 얻어맞아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까닭이다. 늦었지만 그래도 조심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젊은이들은 이런 점을 귀담아들었으면 좋겠다. 건강을 잃기 전이나 실수를 하기 전에 예방하는 일이 최선의 방책이기 때문이다.

소인들의 전성시대

소인들의 전성시대

사화와 권간

우리 역사에서 선비들이 집단으로 화를 당한 일을 사화(士禍)라 부른다. 이는 무고한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의미의 도덕적 규정으로 선조 때부터 나온 용어이다. 중등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 흔히 4대 사화로 불리는 것에는 연산군 때의 무오(1495)·갑자사화(1504)와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 그리고 명종 때의 을사사화(1545)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대표적인 몇 가지만 언급하면 사실을 제대로 못 볼 위험성이 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사화가 무수하게 있어서 많은 선비가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설명하기 좀 복잡하다. 시기에 따라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조선 전기에는 주로 성리학의 이념과 『소학』적 실천 방식을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사림(士林)과 보수적 기득권을 지닌 훈구파와 외척들의 정치·경제적 갈등, 때로는 왕권 강화와 권력을 지닌 간신들의 전횡과 관련이 있다. 교과서에서 그것을 싸잡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라 설명하고 있다.
4대 사화에 한정해 본다면 이를 주도하는 인물이 있다. 연산군 때의 유자광(柳子光, ?~1512)과 임사홍(任士洪, ?~1506), 중종 때의 남곤(南袞, 1471~1527)과 심정(沈貞, 1471~1531), 그리고 명종 때의 윤원형(尹元衡, ?~1565)과 이기(李芑, 1476~1552) 등이 있다. 당시 선비들은 이들을 권력을 지닌 간신이라는 의미로 권간(權奸) 또는 소인(小人)이라 불렀다. 소인이라는 말은 군자(君子)와 더불어 예부터 고전에 등장하고, 특히 『논어』에서 이 둘을 비교하여 다양한 정의를 내리지만, 그 가운데 핵심적 표현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는 말이 있다.
『대동야승』의 여러 기록에는 사화를 주도한 사람들을 소인이나 권간 또는 간신 등으로 표현하여 자주 등장한다. 이른바 ‘간신전(奸臣傳)’이라는 별도의 책을 엮어도 될 정도로 그 사례가 풍부하다. 이 글은 지면 관계상 간단히 다루고자 하며, 이들이 왜 그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으며, 그것을 일으킨 동기의 단면을 고찰하고, 어떤 이념이나 관념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실천 또는 저항 당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유자광과 임사홍

연산군 조정에서 간신으로 불리는 두 사람을 고르라면 단연코 유자광과 임상홍을 의심할 사람은 별로 없겠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문헌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자광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보이지만, 『해동잡록』·『동각잡기』·『해동야언』에 자세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일단 그는 서자였다. 그것은 그가 신분상 차별을 받았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때로는 출세를 위해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의 행적을 종합하면 그런 부분이 분명히 감지된다. 『해동야언』에는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같이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고, 어려서부터 무뢰배가 되어서 도박을 하여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에도 노상에 다니며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붙들어서 강간하곤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처음에 군졸(軍卒)로 출발하였는데,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벌을 상소하여 발탁되었다. 그 후 난이 끝나자 출세 가도에 오른다. 그리고 예종 때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이 역모를 일으킨다고 고변하여 그 공으로 무녕군(武寧君)에 책봉되었다.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건물의 현판에 쓴 유자광의 시를 유치하게 여겨 떼어낸 적이 있는데, 유자광은 이른 매우 분하여 여겼으나 당시는 김종직의 영향이 컸으므로 도리어 아부하여 사귀었다고 전한다.
그 후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사초로 촉발된 그 사건에서 유자광은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의 숨은 뜻을 해석해 사화가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초가 문제 된 까닭은 사관인 김일손이 당상관이었던 이극돈의 행위를 비난하는 글이 거기에 들어 있었고, 그것을 본 이극돈이 김일손의 흠을 찾은 빌미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다.
그러니까 사화가 촉발된 동기는 사초의 문제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신구(新舊) 신하들의 정치적 알력, 개인적 보복심리와 출세욕 등이 어우러진 일이라 하겠다. 곧 유자광이 민감한 정치적 국면을 주도한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서자라는 신분의 낙인을 극복하고 출세하려는 욕망, 그리고 김종직을 비롯한 그 제자들에 대한 묵은 원한이다.
한편 임사홍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일을 거론하여 갑자사화를 주도한 장본인이다. 그는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하였고, 두 아들 또한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당시 그의 권력이 너무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대간(臺諫)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가 왕실과 지나친 혼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이런 대간의 비판으로 유자광과 함께 크게 활약하지 못했고, 둘 다 귀양을 갔다 온 경험이 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그가 총애한 성종의 사위였던 아들 임숭재(任崇載, ?~1505)와 며느리 휘숙옹주의 연줄로 막강한 권력자가 되었다.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이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을 겨눴던 일이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일으킨 갑자사화였다. 바로 그 동기는 자신의 권력욕을 좌절시키고 유배까지 가게 한 선비들에 대한 보복이었다.

남곤과 심정

남곤과 심정은 기묘사화를 주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남곤은 「유자광전(柳子光傳)」을 쓸 정도로 나름의 간신에 대한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이에 대해 『해동야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자광전」은 남곤이 자광의 죄악을 기록하는 데 정성을 다하더니, 기묘년에 이르러서는 자광이 한 일을 모방하여 밤에 북문을 열게 하여, 당시 깨끗한 선비들을 한 그물로 다 없앴으니, 그가 한 짓을 찾아보면 무오년 일(무오사화)보다 심하다. 이것은 남곤이 이 전(傳)을 지으면서 스스로 자기의 죄악을 적은 것이다.”
남곤이 유자광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다. 남곤은 원래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개혁적인 성향으로 대신들을 탄핵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는 훗날 예조 판서가 되었고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대립하였다. 예조 판서는 주로 문장에 능한 사람이 맡는데, 문장은 의리와 수신(修身)을 중시하는 도학자들이 의리와 거리가 먼 사장(詞章)의 학문이라 여겨 배척하였다. 이런 학문 경향으로 자연히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내부는 개혁적 젊은 관원과 보수적 대신들 간의 갈등이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기묘사화였다.
이이의 『석담일기』에는 남곤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였다.
“죽은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남곤은 젊을 때 문명(文名)이 세상에 울렸으나, 출세에 급급하여 박경(朴耕)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그를 죽게 했다. 이로 인해서 깨끗한 언론에 용납되지 않았으며, 마침내 심정과 함께 조광조를 모함하여 바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었다.”
반면 이런 평가도 있다. 『월정만필』에 기록된 김안국의 말이다.
“남곤이 기묘년 선비들을 죄에 빠뜨릴 때 그의 본의는 그 기세를 죽이기 위해 파직시켜 내쫓으려 했을 뿐, 애당초 살해할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혹시 왕께서 말을 들어 주지 않을지 염려하여, 일부러 장황하게 죄를 만들어 임금의 귀가 솔깃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중종이 그 말을 지나치게 믿고 극히 무겁게 처분하였으므로 조광조 등이 마침내 그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남곤이 비록 이것을 후회는 하면서도 자기가 설치한 함정을 자기가 도로 구해낼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한평생 한스럽게 여겼다.”
이 글의 마지막 내용은 남곤이 죽기 전에 자기가 쓴 글을 모두 불태우면서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인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다는 뜻에서 그랬다는 해석이다.
한편 심정도 남곤과 함께 안로(安璐: ?~?)가 편찬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전(傳)으로 기록될 만큼 기묘사화의 주도적 인물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말과 용모가 교활하고 아첨이 넘쳤다. 자칭 꾀를 잘 내고 임기응변에 능하다 하니, 사람들이 지혜 주머니라 하였다.”
라고 하니 술수에 능한 인물로 보인다. 그는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이 되었고, 자연히 개혁파의 개혁 대상이기도 하였다. 곧 조광조 등이 공신들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여, 반정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았다. 이에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통하여 ‘조씨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라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홍경주(洪景舟) 등과 모의하여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을 일망타진하였다.
하지만 훗날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관련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강서(江西)로 귀양 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기묘록보유」의 ‘심정전(沈貞傳)’에서는 그가 경빈박씨와 정을 통했다고 전하며, 경빈박씨는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의 수양딸이다.

윤원형과 이기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 쓴 『죽창한화(竹窓閑話)』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백 년 이전의 일은 비록 감히 알 수가 없지만, 중고(中古) 이래 권간이 권력을 휘둘러 선비들을 죽인 것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그 세력이 꺾이거나 그들이 죽은 지 오래되어야 비로소 그 일을 의논한다. 기묘년의 남곤·심정과 을사년의 이기·윤원형의 일이 바로 그렇다.”
기묘·을사사화의 원흉을 가리키는 지적이다. 율곡 이이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한 세대 아래 살았기에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한다. 『석담일기』 속의 기록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며 사람됨이 음흉·독살스럽고 재물을 탐했다. 인종이 돌아가자 명종이 즉위하였다. 윤원형 등이 그 기회에 이기·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 등과 음모하고 말을 만들어 퍼뜨려 큰 옥사를 일으키니, 당시 선비들 가운데 그 화를 면한 사람이 드물었다. 윤원형은 서울에 큰 집 10여 채가 있었고, 그 안에는 재물이 넘쳐날 지경이었으며, 분수 넘치게 의복과 수레를 마치 대궐 안의 그것처럼 하였다. 또 본처를 내쫓고 첩 난정(蘭貞)을 매우 사랑하여 아내로 삼아, 그녀의 말이면 다 들어주었다. 뇌물을 받아들이고 수탈하는 것도 그녀의 충동질 때문이다. 그가 권력을 잡은 지 20년 동안 사림은 분함을 품고서도 감히 처단하지 못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첩 난정과 함께 귀양 가서 죽었다. 여기에서는 말하는 ‘큰 옥사’란 이른바 소윤인 윤원형이 대윤인 윤임(尹任, 1477~1545) 등을 몰아낸 정권투쟁에서 선비들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를 말한다. 그것이 끝난 뒤에도 여파는 계속되었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많은 선비가 희생되고,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선비들은 100여 명에 달한다. 겉으로는 왕실 외척 간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이전처럼 사림과 훈구파의 대립이자 일종의 복수극이었다.
한편 이기는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부정한 관리여서 그 영향으로 젊을 때 좋은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직으로만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그동안의 고생한 공으로 병조 판서에 임명하려고 하자 반대가 있었으나 승승장구하여 우의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윤임 등이 부적합하다고 탄핵하여 병조 판서로 강등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명종 4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를 반대한 사림은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그가 받은 훈록(勳祿)은 선조 초년에 모두 삭탈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후손 가운데 바른길로 간 이들이 있다.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任熙載, 1472~1504)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산군을 풍자하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임사홍도 그의 죽음에 동조했다고 한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은 심정의 손자로 훗날 명성이 자자해 할아버지의 허물이 그로 인해 덮어졌다고 전한다. 또 당시 이기 등을 비판하고 이황(李滉)·정황(丁煌) 등의 많은 선비를 구하여 준 이원록(李元祿, 1514~1574)은 권신 이기의 조카였다.

군자와 소인

간신이 처음부터 간신은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이들도 시대의 희생물이다. 서얼 출신으로 인한 따돌림과 차별에 대한 빗나간 출세욕이 그렇게 만들고, 이념에 따른 현실 인식에서 젊은 선비들의 이들에 대한 비난과 냉대가 분노를 키웠다고 보겠다. 신진 선비들은 관념이나 이념에 철저하였지만, 현실의 벽은 그만큼 더 두꺼워서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경험이다.
하지만 간신으로 지목당한 사람들은 거의 말로가 좋지 않다. 비록 약아빠진 처세로 천수를 누렸다 해도, 훗날 뜻있는 선비들과 희생당한 후손들이 억울하게 죽은 일을 밝히고 바로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만든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온갖 권모술수와 줄타기와 요령으로 살아도 후세 역사가의 날카로운 필봉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걸 알고 매사를 엄중하게 처신하는 자가 군자이고, 눈앞의 부귀영화에 눈멀어 무리수를 두는 자가 소인이리라.
소인이 득세한 데에 대한 반성도 없지 않다. 『해동야언』에 보인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시행할 때는 항상 지나치게 너그러운 데서 일이 잘못되고, 소인의 보복하는 데는 반드시 상대를 전멸시키고 나서야 그만둔다.”
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문제이다. 국민 화합이니 뭐니 하면서 역사 청산을 철저하게 하지 않은 데서 생기는 현상이다. 상대가 진정성 있게 뉘우치고 반성해야 사면과 복권을 시킬 수 있는데, 항상 섣부른 결정에서 폐단이 생긴다.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