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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숨은 이야기와 홍의장군


임진왜란의 숨은 이야기와 홍의장군

 

본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이웃 나라와 잘 지내는 나라는 드물다. 국외 여행을 다녀보면 각 나라마다 이웃 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닌 국민들은 많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으로 이웃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한 경험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다행이 과거의 역사를 진솔하게 사과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현재 영토 분쟁과 그에 따른 무력 충돌 또는 무역 갈등 등이 있다면 잘 지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이다. 그 갈등의 원인은 일본이 역사적으로 수차례 우리를 침략하였지만 전혀 사과하지 않고, 우리의 영토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며, 역사·인도적 차원의 문제를 두고 되레 무역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갈등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이렇게 침략한 데는 일본인들 자신의 호전성과 정략적 필요에 근거하지만, 당한 우리에게는 외적을 제대로 막지 못한 책임도 따른다. 이와 관련해 임진왜란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조경남(趙慶男 : 1570~1641)의 『난중잡록(亂中雜錄)』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귤광련을 아시나요?
귤광련(橘光連 : ?~1592)은 일명 강광(康光)이라 하는데, 일본식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대마도의 작은 추장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여러 차례 일본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었는데,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1590년 겐소(玄蘇) 등과 함께 조선을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조선 조정에
“일본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일본은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명나라를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는데도, 우리 조정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귤광련이 조선을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에게 요시토시(義智) 등과 함께 전쟁의 선봉을 나누어 맡아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귤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는 뜻을 타인을 통해 알렸다.
“이번 출병에는 무슨 명분이 있는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이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라고 하자, 요시토시가 이 말을 히데요시에게 전하니, 그가 대노하여 귤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듣고 행장을 버리고 이름을 바꾸고 도망가 숨어 살았다. 그 후 1606년 일본 왕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계신(全繼信)과 역관 박희근(朴希根)을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일본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광련의 아들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사신들이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영순(柳永詢)은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광련의 사당을 부산에 건립했다.

동래부사 송상현
우리는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장렬히 순절한 송상현(宋象賢 : 1551~1592)의 이름은 잘 알지만, 전투 전후의 상세한 내막은 잘 모른다. 그 숨은 이야기는 이렇다.
동래성이 왜군에게 포위당하기 전에 송상현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 서매, 크디큰 진영(鎭營)을 구해 내지 못하는구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
라고 손수 써서, 그것을 집 노비에게 주어 그의 부모한테 가서 알리도록 하였다.
전투가 있던 날 새벽 무렵 적병이 대거 진격해 와서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두건을 씌우는 한편, 등에는 붉은 기를 지우고 허리에는 긴 칼을 채워서 그것을 긴 장대 끝에 꽂아 담 사이에 늘어놓았다. 그러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며 울부짖었었다. 왜적은 칼을 휘두르면서 마구 성 안으로 쳐들어 왔고, 이 때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송상현은 남문 성루에 올라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관대를 띠고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왜적은 그가 부사임을 알고 생포하려 하였으나, 송상현이 왜적을 꾸짖기를,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라고 하니, 왜적이 몹시 화를 내면서 그의 목 베려 할 때에도 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사가 남문의 성루에 있을 때 왜적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부사는 그를 쏘아 죽였으며, 뭇 왜적이 난입하자 부사는 장검으로 두 왜적을 쳐 죽이고 죽었다.”
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의 첩은 북쪽 지방의 기생이었는데 그녀 또한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송상현과 함께 죽였다. 왜적은 그들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는 두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성 동문 밖에 묻고 나무패를 세워 표적을 해주었다. 송상현이 죽음을 당할 그때 관노(官奴) 급창(及唱)이 소리쳐 울며 달려 들어가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고 기꺼이 그와 함께 죽으니, 왜적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왜적들도 조선인 포로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 사람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일 장군과 신립 장군
남명 조식과 율곡 이이의 상소문에서는 당시 조선은 정치가 잘못되어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 외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될지 경고하고 있다. 특히 율곡의 상소와 대책을 보면 국방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세히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개혁하지 못했고, 왜란이 생기자 수군과 일부 장수들을 제외한 관군과 그 지휘관들은 성을 비우고 무기를 버린 채 허둥대다가 도망갔고, 백성들은 우왕좌왕 놀라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는 율곡이 예측한 바이기도 하다.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고, 자기 몸을 청렴하게 하여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심지어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희 나라를 방어해서 어쩔 거냐? 20일이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그 말대로 되었다. 왜적이 한강을 건널 때의 일화도 있다. 적병이 대거 진격하여 한강변·광나루·마포·사평·동작 등에서 일시에 뗏목을 타고 마구 건너오자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어떤 아전이 원수(元帥)의 교의(轎椅 : 작은 가마) 밑에 엎드려서 고하기를,
“적병이 강을 건너왔는데 군졸들이 다 흩어졌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라고 재삼 고하여도 전연 대꾸가 없기에 올려다보았더니, 원수는 이미 간 데 없고 다만 빈 상(床)만 있을 뿐이었다.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 하였고, 군사를 전진시켜 동·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혀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것은 선봉으로 온 왜적이었고 대부대의 왜적이 가득 몰려오기까지는 4~5일의 거리가 되었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조선이 건국한지 200년이 지나 폐단이 노출되어 개혁을 못한 정치가들의 책임도 크지만, 장수들의 자질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일(李鎰 : 1538~1601)과 신립(申砬 :1546~1592) 등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활로 북방의 여진족과 용맹스럽게 싸우면서 잔뼈가 굵은 장수였지만, 왜적들과 싸우는 데 있어서 정보와 방책에 어두웠다.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전한다.
순변사(巡邊使)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도 척후(斥候)에 밝지 못했다. 그러자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가 군중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그를 목 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다.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니, 이일이 대패하여 달아났다.
한편 신립은 곧장 달려 충주를 지나 조령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 타고 활쏘기가 불편할 것 같아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옛날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라고 하니, 신립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는 싸움에 져 후퇴한 데다 또 군중이 놀라 떨게 만드니 군법으로는 목 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라고 하고, 마침내 충주의 달천(㺚川)에 주둔하였다.
신립의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이 이일의 말을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라고 말하고,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과 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라고 보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사들을 놀라게 했다고 화를 내어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관군의 정예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김수 그리고 선조
대한민국 중년 이상의 사람치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 1552~1617)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의 전기가 예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이다. 당시 의병장은 대체로 벼슬 없는 선비로서, 자기 집안의 노비들을 거느리고 사재를 털고 주변의 선비들과 장정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모았다. 특히 의병장 가운데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들이 많았는데, 정인홍(鄭仁弘:1536~1623)을 비롯하여 김면(金沔: 1541~1593), 조종도(趙宗道 : 1537~1597) 등이 있으며,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사위였다.
곽재우는 32살 때 별시라는 과거에서 제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선조가 그의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해 합격을 취소시켜버려서, 그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오해는 줄곧 임진왜란 동안 곽재우가 당시 경상도 감사 김수(金晬 : 1537~1615)와 갈등을 일으켰던 일, 그의 활약에 대한 선조의 반응과도 관련이 있을 듯싶다. 현장의 실전 상황과 원칙을 중시하여 불의와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미 때문이다. 이는 이순신도 그랬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 사람으로서 왜란 초기에 그는 여러 성이 연달아 함락되고, 여러 진(鎭)의 주장들과 방백·수령들이 모두 깊은 산으로 도피하여 감히 교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섭게 나무라며 말하기를
“성스러운 조정에서 2백여 년 동안이나 신하들을 길러 왔건만,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두 자신만 보전할 계책이나 찾고 임금의 어려운 형편을 돌보지 않는다. 지금 만약 초야에 묻힌 몸이라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국 3백 고을을 통틀어 남자란 하나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라고 하고, 자기 재산을 전부 털어서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고,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선 병사들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내주어 병사들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또 충의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그의 전술은 대체로 잽싸게 출몰하는 게릴라전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뒤에 말을 빙그르 돌리고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게 하니, 왜적들은 그의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를 몰라서 감히 바싹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는 진을 친 곳으로부터 왜적이 있는 곳에까지 이르는 길의 도보로 대략 40~60분의 거리마다 잇달아 척후소를 두어 이상 유무를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하여, 왜적이 1백 리 밖에 도착해도 진 안에서 그를 먼저 알고 미리 준비할 수 있어서, 언제나 편하고 힘이 들지 않았으며 재주가 뛰어나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왜적이 많이 오면 그들이 바라보이는 산에다 사람들을 시켜 손잡이 하나에 가지가 다섯씩 달린 횃불을 밤새도록 들고서 무서운 함성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게 하여 천병만마(千兵萬馬)가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왜적들은 바라보다가 곧 달아나 버렸다. 또 정예병을 골라 요새에 잠복시키고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게도 하였으니, 왜적 역시 그를 ‘홍의장군’이라 하고 감히 민가를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항상 군사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왜적을 죽이는 것뿐이다. 목을 베어와 공(功)을 요구해서 무엇 하겠느냐? 만약 공의 대가를 받기 위해서 왜적을 토벌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 하는 일이 아니다.”
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좇아 끝내 수급(首級)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이런 곽재우도 모함을 당했다. 순찰사의 진에 있던 무사 김경로(金景老)·김경납(金景納) 등이 곽재우를 모함하자, 곽재우 역시 감사 김수가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일에 분개하여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그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김수가 곽재우를 모반죄로 몰아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는 바람에 그는 앞날을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었다. 곽재우가 모함을 당한 것은 그가 수하의 용사 50여 명을 시켜 의령(宜寧)·초계(草溪)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내고, 또 기강(岐江)에 거둬들인 배의 조세미(租稅米)를 가져다가 모집한 군사들을 먹인 일이다. 그 때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미쳐 발광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천 군수 전현룡(田見龍)도 그를 토적(土賊)이라고 순찰사에게 보고하여 군졸들이 다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김수 등을 성토하자 그가 역심을 품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일은 다행히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의 중재로 마무리되었지만, 그에 대한 선조의 눈길은 곱지 않았고, 훗날 선조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의병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결국 곽재우는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지 못했다. 전란이 끝난 뒤 그는 여러 벼슬을 주자 잠시 나갔지만 그만 두는 등 거기에 큰 뜻을 두지 않았고, 영산 창암(滄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하며 죽을 때가지 가난하게 살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교훈은 나라가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하는지 되묻게 해준다. 그나마 사대부들은 나은 대우를 받았기에 그 일부라도 의병을 일으켰지만, 평소에 하층민으로서 병역과 요역·납세 등의 의무만 졌던 가난한 백성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도 여전히 전쟁이 나면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 묻게 만드는 좋은 사례이다.

남명 조식과 선비의 기상


남명 조식과 선비의 기상

 

라에 원로가 보이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가 예전보다 여러 모로 시끄러운 것은 사실이다. 다양한 정치 세력이 어떤 이슈를 놓고 투쟁·선전·선동하는 탓도 있지만, 직업별·직능별 또는 지역별 단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놓고 주장하고 시위를 벌이는 일이 흔하며, 언론들이 광고료 수입을 위해 자극적인 보도를 일삼는 면도 있고, 게다가 영리를 위해 시선을 끌만한 가짜 뉴스의 생산도 마다하지 않는 개인 미디어가 인터넷을 통해 범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이니까 이런 일들이 당연하다고 여긴 반면, 어떤 이들은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고 개탄한다.
한 술 더 떠 어떤 이는 시국이 어수선할 때 나라의 원로들이 나서서 갈등을 중재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기를 바라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원로가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원로랍시고 무슨 성명서를 내거나 단체 시위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살아온 행적이나 과거 속했던 집단의 성격,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인식 수준을 고려해 보면, 원로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들러리로만 보인다. 그분들의 치우친 주장에 공감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재야에 올곧은 선비 같은 분이 있겠지만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이른바 장사를 위해 이용 가치가 있어야 알아주니, 누가 스스로 ‘내가 원로다!’ 하고 자신을 드러내겠는가? 더구나 군자는 원래 자신의 덕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지만, 스스로 덕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원로를 만나기 어려운 것은 대중의 취향이 모든 일의 기준이 되고, 인터넷 발달로 과거의 작은 실수마저도 낱낱이 까발리는 한국 사회의 풍조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 자체가 더럽고 치욕스럽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적어도 한 개인의 고결하고 떳떳한 삶과 인생을 위해서도 옛 선비의 기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사회나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렇다면 그런 선비의 기상을 누구에게서 찾아 볼 것이며, 또 어떤 일이 참된 선비의 기상이고, 그런 선비의 공부와 삶의 모습은 어떤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융·복합 학문의 선구자
현대는 융·복합 학문이 대세다. 상고대에는 모든 학문과 예술이 종합적으로 미분화되어 있었으나 근대로 올수록 분과 학문으로 분화되었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이 생겨났고, 분과 학문에서도 더 세밀하게 분화되어 자기 분야가 아니면 가까운 이웃 학문에 대해서도 문외한이 되는 깜깜이 학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유학도 원래는 종합적인 학문이었다. 그러다가 특히 송 대 이후 성리학이 등장하면서 도덕과 윤리의 실천과 그 근원을 탐구하는 이론 분야에 치중한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로는 주자성리학이 이념화 되면서 이론 천착에 매달리고, 그 이념의 순수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도학자가 아니라고 여겼다. 가령 율곡 이이 선생이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 : 1501~1572)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에 대해 “문인들이 그를 추앙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고 평가 했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평가에는 선생이 섭렵한 학문과도 관련이 있다. 선생은 생원·진사과의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유교 경전과 『성리대전』을 섭렵하여 유교적 기초를 닦은 것은 물론이요, 옛 문장과 천문·지리·의방(醫方)·수학(數學)·병법(兵法)까지도 익혔으며, 유학자들이 외도(外道)로 여겼던 노자·장자의 서적은 물론이요, 불교의 그것도 섭렵했다고 한다. 선생의 호가 남명(南冥)인 것도 『장자』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말하면 문학·철학·의학·천문학·지리학·수학·군사학 등을 익혔으니, 그의 삶과 가르침은 자연히 이런 것들이 융합되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학문들은 대체로 현실 생활에 당장 필요한 학문이다. 선생이라고 해서 성리학을 모를 리 없었다. 권별(權鼈)이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선생의 이런 말이 실려 있다.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는 것, 이것이 덕에 나아가는 순서인데, 인사는 버리고 천리를 담론하니, 이것은 입으로만 떠드는 이치일 뿐이다.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많이 듣기만 하는 것은 귀 밑의 배움[耳底之學]일 따름이다.”

본 뜻은 인사를 멀리하고 이론에만 천착하는 성리학자들을 비판하며, 인사를 배우는 것도 덕에 나아가는 일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더 추론할 수 있는 점은 의학·천문학·지리학·수학·군사학 등은 인사에 필요한 학문이요, 성리학은 천리를 다룬다는 점이다. 성리학의 기본 전제인 성즉리(性卽理)도 ‘인간이 본성이 곧 천리’라는 뜻이니, 그 천리를 인간의 심성과 도덕적 규범에 적용시킨다. 사실 도덕의 근거를 따지는 일이 인사에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켜주는 인사가 더 급선무였다. 이렇듯 현실 문제는 율곡 선생의 상소문이나 대책 등에도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결국 선생은 학문적으로 개방적인 선비로서 폭넓은 공부를 했다는 뜻이며, 이는 ‘군자는 한 분야만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공자의 정신을 실천했다고 하겠다. 곧 전인적(全人的)이고도 융·복합적 지식을 탐구하는 학자의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실천 중심의 공부와 그 영향
선생이 이렇게 아카데믹한 이론 연구에 천착하지 않은 것은 선생만의 학문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 외에 다른 학문을 섭렵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었지만, 학문이나 공부는 실생활에 직접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부법에 대한 『해동잡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곧 선생의 독서는 장(章)마다 해석하고 구(句)마다 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열 줄 정도 읽어 가다가 자기에게 절실한 곳에 가면 그때는 알고 넘어갔다. 언제나 제자를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도시의 큰 시장에 놀러 가면 금은과 진귀한 보물 등 없는 것이 없다. 종일 거리를 다니면서 그 값을 묻곤 하지만, 그것들은 끝내 자기 집에 소용되는 물건이 아니고 남의 집 물건일 뿐이다. 차라리 내게 쓸모 있는 포목(布木) 한 필이나, 물고기 한 마리를 사오는 것만 못한 것이다. 지금 학자들이 성리학을 소리 높게 떠들고 있지만, 자기에게 얻는 것이 없으니 이것과 다를 게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내게 필요한 것 그것을 얻는 것이 독서의 진정한 목표였다. 이는 지식 자체만을 위한 이론 공부가 아니라 나의 수양과 실천에 당장 필요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과 통한다. 이런 학문 태도는 ‘몸을 닦아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이다. 이렇게 선생이 성리학에 더 이상 천착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완성된 이론으로 수양하여 실천하는 일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또 『해동잡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염락(濂洛 : 주렴계와 정호·정이 등 북송의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를 상징하는 말) 이후로 저술하고 주석한 것이 학문의 단계와 맥락을 환히 나타내기를 해와 별처럼 하여서, 새로 배우는 자들이 책만 펼치면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공부하는 마음가짐이 깊고 얕은 것은 그것을 구하는 성의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정자나 주자 등의 넓고 깊은 학문이 이미 책으로 완성되어 있으므로 따로 이론 탐구에 천착하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정성을 가지고 수양하고 실천하는 것이 후학들의 참된 학문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 그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유학만이 아니라 병법을 익힌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들이 많다. 그 가운데 정인홍(鄭仁弘)은 그의 수제자이고,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곽재우(郭再祐)는 선생의 외손사위이다. 조경남(趙慶男 : 1570~1641)이 지은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정인홍이 전승(戰勝)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서 군공(軍功)은 남의 맨 끝자리에 있었으나, 사실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서 정인홍이 첫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면 선생의 학문이 얼마나 실천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또 선생의 제자 가운데 최영경(崔永慶)이란 분이 있는데, 『석담일기』에는 최영경이 전에 선생을 좇아 배웠고 청렴하고 절개가 세상에 뛰어나서 의가 아니면 한 터럭만큼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더니 부모가 돌아가자 가산을 모두 기울여 장사지내니 마침내 곤궁하여졌다. 집을 성안에 두었으나 친구를 사귀지 아니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 있는 선비라 할 뿐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선생의 제자라고 해서 모두 이런 것은 아니지만, 문하에 선생의 가르침을 이렇게 몸소 실천하는 제자들이 많았다.
이렇게 벼슬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산다고 해서 국가나 사회의 현실과 무관하게 유유자적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의 상소와 각종 기록에는 관리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말들이 많다. 『해동잡록』에는 언제나 선비들과 이야기하다가 대화가 정치의 잘못과 민생의 곤궁함에 이르면, 주먹을 불끈 쥐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꿋꿋한 선비의 기상
선생은 그 누구에게도 비굴하지 않는 꿋꿋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모습은 『석담일기』에서 선생은 성품이 청렴하고 꿋꿋하였으며, 주고받는 것을 반드시 의(義)로써 하여 구차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 『해동잡록』에는 기량이 크고 태도와 행실에는 과단성 있고 확실하였다고 말하고, 친구를 사귀는 데도 반듯하여 친구로 삼지 못할 사람이면, 설사 벼슬이 높고 귀한 사람이라도 시궁창 보듯 하여 그와 마주대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였고, 이 때문에 교제가 넓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집에 있을 때도 엄격하여 집의 아랫사람들이나 시중드는 자들도 머리카락을 묶지 않거나 더벅머리를 단정하게 하지 않으면 선생이 무서워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남의 나쁜 일을 들으면 혹시나 한 번이라도 만날까 두려워하여 마치 원수를 피하듯 하였고, 눈은 음란한 것을 보지 않고 귀는 엿듣지 않으며,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항상 마음에 있어서 게으른 빛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런 성격과 태도는 물론 타고난 성품일 수도 있겠지만, 수양이 없었다면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면 선생은 아랫사람에게만 이렇게 대했느냐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선생의 유명한 「단성소」라는 상소가 있는데, 『석담일기』에는 이렇게 소개한다. 곧 선생이 벼슬에 뜻이 없어 상소로 사직하고 동시에 나라의 폐단을 말하였는데, 그 글에는
“자전(慈殿 : 임금의 어머니)께서 사리 깊고 착실하시나 단지 깊은 대궐 안의 한 과부에 불과하시고 전하께서는 나이가 어려서 선왕의 한 외로운 상속자에 불과하시다.”
라고 말고, 또
“노래는 처량하고 의복은 희니 나라가 망할 징조가 드러났다.”
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명종은 욕이 대비께 미쳤다고 하여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래도 산림처사로 대우하여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이 상소에는 심한 말은 더 있다. 이것으로보다 윗사람에게도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과격하게 보일 정도로 직언(直言)하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해동잡록』에 선생이 직접
“내가 평생에 단 하나 장점이 있는 것은 죽어도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 않는 일이다.”
라고 한 말에서도 보이지만, 이 말의 핵심은 남을 따르지 않는 일보다 ‘구차하지 않다’는 데 있다. 곧 지위나 이익이나 명예 또는 권세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뜻과 통한다. 선생의 ‘구차하지 않다’는 말은 『석담일기』에도 보인다.
이렇듯 선생이 보인 불굴의 선비다운 기상과 학문은 유교적 도통(道統 : 도가 전해지는 계통)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적이고, 청렴하고 과단성이 있고 자신에 대해 엄격하며, 세상을 감시하는 비판정신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산림처사와 현실 참여
선생이 살았을 16세기 조선은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와 앞선 시대부터 점점 성장하기 시작한 사림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사화(士禍)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던 시기였다. 이 싸움에서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며 훈구파가 승리하는 결말로 이어졌다. 오늘날도 그렇듯이 경제적·정치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묘사화 때는 선생의 숙부 조언경이 화를 당하고 부친도 좌천되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선생은 평생 벼슬길에 나아지 않았다.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오로지 수양하며 제자를 기르는데 전념하였다. 이런 모습은 『석담일기』에도 보이는데, 선생이 직접
“후세 사람들이 나를 처사(處士)라 하면 옳지만 만일 유자(儒者)로 지목한다면 실상이 아니다.”
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선생이 스스로 유학자가 아니라고 한 점은 겸사(謙辭)인지 아니면 속된 유학자를 비판하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처사로 대우받기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에 퇴계 선생도 임종하기 직전의 유언에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계와 도산에서 만년에 은거한 진성이공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 하였다. 남명 조식이 이것을 듣고 씩 웃으며 말하기를,
“퇴계는 이 칭호에 마땅하지 못하다. 나 같은 이도 은사(隱士)라 칭하는 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
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선생이 은사 곧 처사로 자처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그것도 감당키 어려운 일로 여겼다.
흔히 처사라고 하면 초야에 묻혀 살며 세상일에 무관심안 은둔형 선비를 일컫지만, 선생의 예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은 초야에 있어도 마음은 조정과 세상에 있었다. 마음이 조정에 있었다는 것은 관직에 연연했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 정치를 비판하며 그것이 백성을 살리는 올바른 것이 되기를 바랐다는 뜻이다. 그렇게 세상의 일에 근심했다는 의미에서 ‘은사(隱士)라 칭하는 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선생이 유학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말 가운데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치인’을 소홀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선생은 정치 비판과 제자 양성을 통해 현실 에 분명히 관여하고 있었다.
사실 선생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벼슬이 싫어서가 아니다. 왕의 외척과 훈구파 대신들이 자신들의 정권을 정당화하고 선전하기 위하여, 실권이 없는 직책이나 허명(虛名)으로서 산림의 선비들을 유혹하고 농락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직에 나아 가 보았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군사 독재 시절 그런 인사들이 좀 많았던가? 국무총리니 무슨 자문위원장 자리를 주면 얼씨구나 덥석 받았다가, 실제로는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얼굴마담’ 노릇만 한 자가 그 얼마였던가? 그래서 선생은 실속 없는 헛된 명성에 이름을 팔지 않았다. 선비의 지조를 지켰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의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원칙 곧 출처관(出處觀)은 뚜렷했다. 올곧은 선비라면 이래야 한다. 이런 모습은 훗날 조선 사회에서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벼슬을 주는 산림 출신을 숭상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큰 유학자로 추앙받았던 송시열(宋時烈)과 허목(許穆)도 이런 산림 출신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두 분은 신도비(神道碑)를 써서 선생을 추앙했고, 과거 출신보다 산림을 더 높이는 기풍을 만들었다.
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라는 두 글자로 집약되고, 이 글자를 그가 소지했던 칼에 새기고, 만년에 제자를 가르쳤다는 산천재(山天齋)의 창 좌우에 ‘경’자와 ‘의’자를 적어 두었다고 하는데, “안으로 밝은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단성 있는 것의 의이다.”라고 풀이했다고 한다. 곧 경은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내적 수양을 뜻하는 말이요, 의는 밖으로 만사에 대처하는 과단성 있는 태도를 말한다. 이 또한 수기치인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에는 참다운 선비로서 원로가 있는가? 없다면 왜 없는가?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상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야 따돌림 당하지 않고 출세하고 먹고 살아남기 때문이다. 허나 그 옛날에도 꿋꿋한 선비가 되려면 처음엔 가난과 냉대를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선비를 더욱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가 세상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퇴계의 노년과 매화 사랑


퇴계의 노년과 매화 사랑

 

세 시대의 노인 폄하

한 사람의 노년을 보면 그의 인생이 더 잘 보인다. 젊은이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살 날보다 살아 온 날이 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요즘은 평균 수명이 늘어나 옛날 기준으로 보면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다.
정상적으로 오래 살다보면 나름의 지혜가 생기기 마련인데, ‘세상에는 다 좋은 것도 없고, 다 나쁜 것도 없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등에 보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 1501~1570)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 스스로 지었다는 묘갈명(墓碣銘)에 “걱정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가운데 걱정 있다.”는 표현도 그런 종류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이 늙어서 새롭게 깨닫는 지혜도 없고 판단력이 흐려질 때는, 국가와 가족에게 누를 끼치고 사회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젊었을 때 사회적으로 명망과 영향력이 있었더라도, 배움에 더 이상 진보가 없어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옛 생각만 가지고 이리저리 길 때 안 낄 때 나대면서 사회적 이슈마다 참견하고 나무란다면, 젊은이들이 노인 공경은 고사하고 노인 모두를 ‘꼰대’로 매도하는 장본인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세상에 대한 인식과 문제해결 능력이 젊은이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다면, 죽은 듯이 조용히 수양하며 덕을 쌓는 게 좋다. 노인들이 천대받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노인 자신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 알아서 ‘뒷방 늙은이’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존경받는 삶을 모색하자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이미 천덕꾸러기가 되어 백세를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선생은 고명한 대학자이자 선비로서 훌륭한 가르침과 학술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그것들을 밝혀내었고 또 현재에도 계속 연구하고 있어서, 이 글에서 새삼스럽게 그걸 소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요즘 세상을 보면 경로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노인이 되레 폄훼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척 안타까워서, 선생의 삶 가운데 은퇴 후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찾아볼까 한다.
여기서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경제·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다 살펴 볼 수 있는 필자의 역량과 지면이 허락지 않는다. 단지 노후의 품격 있는 삶을 위하여 노인 자신의 수양과 관련지어 선생의 삶에서 몇 가지 가르침을 찾고자 한다.

벼슬 자체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선생은 조금 자라서 말과 행동이 반드시 예법에 맞았고 더욱 돈독하게어버이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닭이 울면 반드시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의대를 갖추고 모부인을 살폈는데, 말소리는 부드러웠고 나지막하였으며 상냥스럽고 기쁜 안색으로 저녁에 어머니를 위해 잠자리를 보아 드릴 때까지 이와 같이 하였다. 잠자리를 펴고 이부자리를 개 드리는 일도 반드시 몸소 하였다고 전한다.
선생은 태어난 그 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어머니 박씨 부인은 늘 아이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부의 자식은 교육이 없다고 비웃는데, 너희들이 글공부를 백배로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비웃음거리를 면할 수 있겠느냐고 늘 훈계를 했고,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해서 자식들을 길러냈다고 한다. 선생의 평생 학문과 몸가짐은 어머니의 이런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선생은 어머니와 형제의 기대에 부응하여 가문을 일으켜야 할 책임감도 크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여타 사대부 가문의 자녀들처럼 일찍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여섯 살 때 이웃집 노인에게서 『천자문』과 『소학』 등 기초적 교육을 받고, 열두 살 때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웠다고 한다. 숙부는 가끔씩 선생의 총명함을 두고
“가문을 유지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라고 칭찬했으니, 그의 책임감을 더욱 부채질 했을 것이다.
선생은 34살 때 비로소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것도 27살 때 형님과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가정 형편상 할 수 없이 경상도 향시(鄕試)에 응시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로부터 12~13년 동안에는 비록 한두 번 물러난 적이 있었지만 줄곧 관리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49살 때부터 벼슬에 큰 뜻이 없어 항상 물러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선생을 놓아주지 않았다. 70살이 될 때까지 사직하고 관직에 나아가는 일이 거의 21여 년 동안 반복되었다. 그 기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5회였고, 벼슬한 기간은 약 5년 남짓인데, 해당 기간의 약25%에 해당한다. 사실상 이 시기는 은퇴 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사직 의사를 밝혀도 허락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니, 그 사이 총53회의 사직의 글을 올렸다고 한다.
또 선생은 벼슬이 높아질수록 사직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정3품 이상의 벼슬은 하나도 받아들인 적이 없다고 한다. 보통의 관리들은 품계가 높아지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그에 따른 권력이 따르고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보아 선생은 벼슬을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한 도구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정통성이 없는 반민족적 독재 정권이라도 불러만 주면 달려가는 것은 물론이요, 불러달라고 아첨하거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소인배들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다.
선생이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사직하려는 데는 명종 대의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 등의 외척들이 주도하는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정권과 일종의 거리두기라 하겠다. 정3품 이상의 벼슬은 더욱 정권 실세와 가까이 가는 길이기에 경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면 될 터인데, 왜 사직과 출사를 반복하는가라는 혹자의 비판이 가능하다. 그에 대한 선생의 변명이랄까 입장이 보이는 글이 있다. 52살 때 남명(南明) 조식(曺植 : 1501~1571)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셨기 때문에 억지로 과거를 보아 이득과 녹봉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가문과 경제적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비록 그러하였지만 정3품 이상의 벼슬을 사양하고, 또 49살 이후에는 관직을 떠나려고 한 것을 보면, 관직을 통해 출세와 권력을 탐할 생각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맹자(孟子)도 부모 봉양과 처자 부양을 위해서는 임금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문지기나 야경꾼 정도의 하찮은 벼슬은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당시의 사대부는 벼슬하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여기자. 반면 궁핍을 견디며 제자 양성과 학문에만 종사한 선비들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하자. 현실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사퇴와 복직을 반복한 데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이 점은 뒤에서 논의하기로 하자. 대신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관직에서 물러나는 일과 머무르는 문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이 : (이황을 뵙고) 어린 임금이 처음 자리에 오르시고 국정 현안에 어려움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선생께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황 : 도리상 물러날 수 없지만 내 몸을 생각해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소. 몸에 병도 많고 일을 감당할 능력도 없소.
혹자 : (이이를 보고) 성혼(成渾)에게 참봉(參奉)을 시켰는데 왜 나오지 않소?
이이 : 성혼은 병이 많아 관직에 종사하지 못하오. 만약 강제로 벼슬을 주면 그를 괴롭히는 것이오.
이황 : (이이를 보고) 그대는 성혼은 후하게 대접하면서 나에게는 어찌 그리 박하게 대접하오?
이이 :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개인의 입장을 봐 줄 여지가 없습니다. 성혼이 낮은 벼슬에 분주해 봤자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유교 경전 등을 강의하는 일)에 계신다면 나라에 이익이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한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 : 벼슬은 참으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약 남에게 이로움이 없고 자신에게 병통이 절실하면 할 수 없는 것이오.
이이 : 선생이 조정에 계시면서 설령 아무런 계책이 없다 하더라도 임금께서 중하게 생각하여 의지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쁘게 힘이 되니, 이 또한 남에게 이익이 됩니다.
이황은 이이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황의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 사람들이 대유(大儒)로 지목하고 어린 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룩하기 바랐으나, 스스로 경세제민(經世濟民 :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의 재주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오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 기록은 선조1년 곧 선생의 나이 68세 때 8개월 동안 재직할 당시이다. 선생은 몸에 병이 있고 능력이 없어 나라에 보탬이 없다고 떠나려고 하고, 율곡은 경연을 통해서라도 보탬이 있다고 만류하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관직을 사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대체로 선생이 병과 노쇠함과 능력 부족으로 인한 직책 감당의 부당성 등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렇다고 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정치력의 한계와 학문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특히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는 점에 설득력이 있는데, 학문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저작이 대체로 50세 이후에 나오고, 특히 기대승(奇大升)과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이 50대 후반에 있었고, 「성학십도」는 68세 때 지었다.

고요하고 겸손한 성품
선생이 늦은 나이에도 제자 양성과 저술을 왕성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학문에 대한 열정, 곧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배움이란 주로 성현들이 남긴 서적을 읽는 것이지만, 제자를 가르치거나 그들과 논쟁하거나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듯이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면서도 배우게 된다. 그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해야 하고 때로는 토론하는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한 것을 제자를 통해 깨닫게 된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은 대개가 그렇다.
이렇듯 제자나 동료들을 통해 배우려면 겸손해야 한다. 권위를 내세우거나 우기면 배우지 못한다. 기대승과의 사단칠정을 논쟁할 때도 상대를 존중하며 혹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인정하여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런 예는 윤두수(尹斗壽 : 1533~1601)가 지은 『오음잡설(梧陰雜說)』에도 인다. 인종의 비 박씨가 편찮을 때 선생은
“예법에 형수[嫂]와 시숙[叔] 사이에는 상복이 없으니, 상감께서는 복을 입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다.”
라고 했다가, 얼마 뒤 기대승이
“인종께서는 한 나라의 임금이셨는데 지금 상감께서 자연히 왕위를 계승하는 상복이 있는데, 어찌하여 형수의 예법을 인용할 수 있겠소?”
라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명언(明彦 : 기대승의 자)의 말이 옳다. 내가 잘못 대답하였으니, 나의 죄를 면할 수 없다.”
고 했다고 전한다. 선생은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으면 금방 인정하였다. 사실 사람은 이래야 발전한다. 특히 남의 윗사람이거나 노인일수록 이래야 한다. 그들은 대개 자신보다 어리거나 아랫사람의 의견을 좀처럼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성품이 고요하고 온화하여 남에게 모질게 대할 줄 몰랐던 것 같다.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과거시험을 볼 수밖에 없었던 일도 그렇지만, 윤근수(尹根壽 : 1537~1616)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임형수(林亨秀)라는 사람은 동료들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있어, 아무리 선배일지라도 모두 버릇없는 말을 퍼부었지만, 오직 퇴계에 대해서는 존경하면서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 『오음잡설』에 선생이 서울에 올라왔을 때 대문에 대기자가 있을 정도로 찾아오는 손님이 너무 많아 조금도 틈이 없었는데, 나중에 영의정을 찾아 갔다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묻자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시간이 없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선생에게 찾아 와 봤자 청탁할 건더기도 없는데 왜 모여들었을까? 그것은 선생의 인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 『석담일기』에는 을사사화 때 이기(李芑)가 퇴계의 명성을 꺼려 임금에게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니,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기가 다시 아뢰어 복작(復爵)시켰다는 간단한 기록만 있다. 그 내막은 이중열(李中悅 : 1518~1547)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 자세하다. 곧 이기의 조카 이원록(李元祿)이 원래 선생을 중히 여겨, 이기에게 힘써 간하기를,
“이 아무개는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어, 시속(時俗)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라고 하였으며, 윤원형·이기와 함께 을사사화를 주도했던 임백령(林百齡)도 이기에게 선생의 무고를 주장하였다고 전한다. 이로 보면 선생이 평소 욕심이 없었고 남에게 모질거나 모나지 않게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매화를 유달리 좋아하다
선생이 고요한 성품은 시끄러운 도시보다 산수가 좋은 전원생활을 좋아하고, 매화를 유달리 좋아하는 취향으로 드러난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선생은 매화를 유달리 좋아해서 매화 시첩 한질이 있다고 하였고, 운명하는 그날 아침에도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매화처럼 고고하게 군자의 향을 풍기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선비들이 좋아하는 대상이다. 『해동잡록』에 실려 있는 「도산기」에 따르면 도산서당을 지을 당시 몽천(蒙泉)이란 샘을 만들고, 샘 위의 산기슭을 따서 추녀와 맞대고 평평하게 단(壇)을 쌓고, 그 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는 매화의 고고하고 맑은 향기를 좋아하여 이렇게 매화를 심어 놓고 그와 관련된 많은 시를 남겼다.
그런데 임종 당시 물을 주라는 매화의 출처는 어디서 왔을까? 다른 기록에 의하면 선조 초년에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서 8개월 동안 살았던 때 소유했던 것인데, 훗날 이것을 선생의 문인이 선생의 손자 이안도(李安道)를 통해 배에 실어 가져왔다고 한다. 이 때 그것을 가져온 것이 기뻐서 남긴 시도 있다.
단양 지방에 떠도는 설화와 문학 작품 속에 선생과 기녀 두향(杜香)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두향도 매화를 좋아했고 훗날 선생과의 이별이 아쉬워 매화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가 선생 48세 때이니 그 때부터 매화를 좋아했는지 알 수 없으나, 만년까지 그의 매화 사랑은 각별했다.
사실 매화는 선생이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도산기」를 읽어보면, 도산서당을 자리 잡고 꾸미는 것을 마치 신선이 사는 것처럼 했는데, 그만큼 자연과 산수를 좋아했다는 뜻이다. 선생이 이처럼 전원생활과 산수를 좋아 한 것은 몸의 병에 좋기도 했지만, 도의를 즐기며 심성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한다. 몸을 더럽힐까봐 속세를 등지고 세상을 초월하여 신비한 무엇을 찾는 도가(道家)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혹자는 심성의 수양을 위해 마음속에서만 깨달음을 얻고 바깥 사물에 기대지 않는다고 하면서,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처럼 누추한 빈민가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 될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그것은 그의 형편이 그랬던 것이고, 그 때문에 거기에 맞게 즐겁게 여긴 것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도 좋은 산수를 만났더라면 그 즐거워함이 어찌 우리들보다 깊지 않았겠냐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자나 맹자도 일찍이 산수를 자주 칭찬하였고 아주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현대의 노인들은 건강 상태도 좋아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일도 한다. 다만 외물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본심을 잃는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방심하다간 추한 노탐에 빠진다. 비록 세상이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 굴러가지 않더라도 자신의 인식과 판단에 문제가 없는지 반성하며, 올곧은 젊은이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행여 세상을 바른 데로 이끌 능력이라도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을 수양하고 채찍질 하여 후세와 자연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나마 남으로부터 공경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욕이라도 덜 먹는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

 

도삼절

민간에 널리 전해진 ‘송도삼절(松都三絶)’에는 서화담·박연폭포·황진이가 있는데, 사실 이것은 황진이 자신이 꼽았다고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30년 동안 수도했다는 개성의 유명한 고승 지족선사(知足禪師)는 그녀의 유혹에 넘어 왔지만,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 1489~1546)은 온갖 유혹에도 넘어오지 않았다나? 사실 황진이는 그렇게 얄궂은 인물은 아닌 것 같다. 나름의 고결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전래동화나 설화에 보면 화담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 도술(道術)을 부려 시집가려는 신부를 호랑이로부터 살려 준 이야기, 지리산에 올라 신선과 서로 대화하는 기록 등이 있다. 모두 선생의 행적과 관계있다.
과연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대동야승(大東野乘)』 속의 기록을 더듬으면, 그에 대한 면모를 어느 정도 자세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벼슬도 마다한 궁핍한 삶
조선 중기 이덕형(李德馨 : 1561~1613)이 기록한 『송도기이(松都記異)』를 보면 서경덕은 송도(松都 : 개성) 사람으로 여러 대에 걸쳐 가문이 변변치 못하여 집이 본래 가난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덕을 숨기고 곤궁함을 편안히 여겼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다 그를 공경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일찍이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으며, 그는 태어날 때부터 영리해서 보통 아이와는 크게 달랐고, 자라면서 스스로 글 읽는 것을 알아 눈 가는대로 금방 외었으며, 넓게 책을 보고 많이 기억했다고 전한다. 차천로(車天輅 : 1556 ~ 1615. 그의 부친 車軾이 선생의 문인)가 쓴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는 양식이 자주 떨어졌고, 항상 담식(淡食 : 채소 위주의 소박한 상차림)을 하였고, 누가 어쩌다 고기나 생선을 보내와도 먹지 않았으나, 다만 말린 밴댕이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의 자질에 대해 신흠(申欽 : 1566~1628)이 쓴 『상촌잡록象村雜錄』에는 선생의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났으며 시골에서 태어나 스스로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고, 중국에 태어나서 큰 학자나 스승에게서 교육을 받았다면, 그 높고 명철함이 지금의 조예에 그칠 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조선 중기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면 선생의 삶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보인다. 허봉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의 형이고, 그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선생의 문인이다. 그러니까 허봉의 이 기록도 앞의 차천로의 그것과 함께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앞의 이덕형의 기록처럼 집이 가난하여 때로는 며칠 동안 밥을 짓지 못하여서, 안자(顔子)의 가난에 비교할 정도로 항상 태연하였다고 한다. 안자는 공자의 수제자로서 가난하여도 학문의 즐거움을 잊지 않았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주인공이다.
게다가 율곡 이이(李珥)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그가 전혀 생업에 몰두 하지 않아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굶주림을 참았고, 남들은 이것을 견딜 수 없었으나 그는 태연히 지나곤 하였으며, 그 문하생 강문우(姜文佑)가 쌀을 지고 부엌으로 가 그 집 사람에게 물으니, 어제부터 양식이 없어 불을 못 피웠다고 전한다.
현대 문화와 생활 속에서 생업에 힘쓰지 않아 가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가장은 학문은 고사하고 대의를 위해 싸우더라도 가정적으로나 사회적 평판으로부터 결코 환영받을 일이 못되고, 혹 그런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가정을 갖지 않도록 권하는데, 그래도 당시는 사회나 문화적 풍토가 학문이나 그 밖의 무엇을 위해 뜻을 이루려는 선비의 이런 행태를 용인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어려워도 그는 호구지책만을 위해서라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앞의 이이의 말에 따르면 젊어서 과거의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곧 뜻을 버리고 화담에 집을 짓고, 오로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일삼아 어떤 때는 여러 날을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이덕형의 기록에서도 선생은 처음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태학(太學)에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가난하지만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까닭이 무엇일까? 퇴계나 율곡처럼 벼슬하면서 학문을 이룬 사람들도 있지만,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한 특별한 이유나 시대적 배경이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경우도 그렇지만, 그의 시대에는 이전 시대부터 이어진 사화(士禍)가 있어서 뜻있는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아가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고, 또 그런 식으로 정치 투쟁에서 승리한 인물들이 정권을 잡은 조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발을 들여 놓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참여하는 것이 치욕이 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처럼 나름의 출처관(出處觀 : 벼슬길에 나가고 물러나는 대 대한 어떤 원칙)이 뚜렷했다고 하겠다.

사물 탐구를 학문의 출발로 삼다
선생이 학문을 시작한 일에 대해 허봉의 기록에는 그가 총명하고 강하며 굳세어,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었고, 18세에 처음으로 『대학』을 배웠는데, 문을 닫고 꿇어앉아 오로지 사물의 이치 탐구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대학’이란 학교 이름이면서 동시에 책 이름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태학(太學)과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이나 성균관(成均館)이니 하는 것이 대학으로 해당 국가의 최고 교육 기관이다. 물론 그 연원은 고대 중국의 제도에서 비롯한다. 그 대학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 유교 경전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대학』이다.
『대학』에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라는 8가지 실천해야 할 일이 등장하는데, 그 맨 앞에 등장하는 것이 격물이다. 격물이란 쉽게 말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행위이다. 그것을 통해 앎을 이루는 것이 치지(致知)이다. 보통 ‘격치’ 곧 ‘격물치지’라 함은 바로 사물을 연구하여 앎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훗날 개화기 때 서양의 자연 과학을 수입하면서 ‘격치학(格致學)’이라고도 불렀는데,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아무튼 『대학』 공부는 ‘격치’부터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다. 허봉의 말에 따르면 그는 사물의 이치를 연구할 때에, 그 이름을 일일이 적어 벽에 붙이고, 차례로 연구한 뒤에 그 사물을 해설하였다고 한다. 한 물건을 생각하다가 끝내지 못한 채 화장실이라도 가면 거기서도 마음을 다하여 생각하고 멈추지 아니하고 한참 뒤에 그대로 일어났다고 전한다. 게다가 3년 동안 힘들게 공부하여, 여러 날 동안이나 낮에는 식사를 잊고 밤에는 자는 것을 잊으며, 문을 닫고 판자 위에 꿇어앉아서 깔고 덮지도 아니하다가, 몸의 기혈(氣血)이 막혀 통하지 않아서 소리를 들을 적마다 놀라게 되었다고 한다.
또 『석담일기』에는 선생이 연구할 때 하늘의 이치를 알려면 ‘天’ 자를 벽에다 써놓고 궁리한 뒤에는 다시 다른 글자를 써두고 궁리하였으며, 그 세밀한 생각과 힘찬 연구는 남이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러 해가 지나니 도리가 환하게 밝아졌고, 그의 학문은 독서에만 전념하지 않고 오로지 생각으로만 탐색하다가 이치를 안 뒤에 다시 독서하여 이것을 증명하였다. 선생은 언제나
“내가 스승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힘과 노력을 깊이 쏟아야 하였다. 뒷사람들이 내 말에 의지한다면 힘과 노력을 나같이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선생은 특별한 스승 없이 스스로 연구하며 독서하여 자신의 학문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18세에 『대학』을 읽기 시작했으니 보통의 선비들보다 상당히 늦은 때였다. 그러나 늦다고 학문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늦게 시작해도 탐구하는 열의가 있고 사고하는 훈련이 되어 있으면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당시 큰 스승으로 알려진 이황·조식·이이 등이 대체로 이름 있는 스승 없이 공부했다는 점이다. 특별한 스승의 학문을 답습하거나 모방하는 것보다 더 자유로운 입장에서 학문을 닦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창의성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오래 뒤에 유교 경전을 취하여 읽는데, 마음속으로 깨달음이 있고 이에 더욱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자신의 공부를 성리학으로 자임하였고 더욱 『주역(周易)』에 연구가 깊었으므로, 제자가 되어 배우기를 구하는 자가 문에 끊어지지 않았다고 허봉은 전한다.

문하생이 된 황진이
세인들이 선생을 말할 때 실과 바늘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황진이(黃眞伊)이다. 이참에 그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오해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겠다. 이 기록은 『송도기이』에 보이는데, 기록자는 황진이의 친척이 되는 80세 노인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그는 생전에 그녀를 볼 수 있었으므로 세간에 떠도는 소문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는 기록일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황진이는 송도의 기생으로 그의 어머니 현금(玄琴)이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노래도 아주 잘 했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녀라고 불렀다. 진이가 비록 기생으로 있기는 했지만 성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비록 관청의 술자리가 있더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잡배들에게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다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문자를 꽤 많이 알아서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 뵈니, 선생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했다. 어찌 절세의 명기(名妓)가 아니랴?”

이상은 이덕형이 황진이에 대해서 들은 기록의 요약이다. 내용을 보면 황진이는 비록 직업상 기생이기는 해도 몸가짐이 단아했음을 알 수 있다. 화장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하게 치장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테고 그렇게 하려면 돈 많은 사내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 게다가 수령이나 관리들이 막무가내로 수청을 들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던 것을 보면, 그녀는 관기(官妓)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를 보면 황진이는 잔치나 모임에 흥을 돋우는 품격 있는 연예인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세간의 풍문처럼 황진이가 정말로 선생을 유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흠모하여 문하생으로서 배움을 청했고 선생도 그것을 허락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하찮은 기생이라면 이런 재미없고 꼿꼿한 도학자를 흠모할 까닭이 없다.
선생은 관작이나 녹봉을 탐하여 마음에도 없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황진이의 예를 보아도 여색을 탐하지 않은 성품을 알 수 있다. 만약 황진이가 값싼 기생이었다면 제자로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인품은 남달랐다고 전한다. 또 『송도기이』에 보면 황해도 관찰사 가운데 화담 선생과 서로 아는 자가 있었는데, 선생에게 한 번 들르기를 청하므로 선생이 손님이 되어 갔다고 한다. 관찰사는 사우(師友 :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의 예법으로 대접하였다.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즐겼는데 선생이 취한 뒤에 일어나 춤을 추니, 사람들이 신선으로 여겼다. 하루를 지내고 즉시 돌아오는데, 관찰사가 많은 노자와 종이와 붓을 드렸으나, 선생은 모두 받지 않고 단지 쌀 다섯 되만 받았을 뿐이라고 전한다. 선생은 비록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는 것을 사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기록에
“퇴계 선생의 문집에 ‘서화담이 만월대(滿月臺)에 올라갔는데 어떤 손님이 율무로 쑨 죽을 올렸더니, 화담은 이것을 마시고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일찍이 의아하게 여겼다.”
라는 말이 보인다. 이덕형은 선생이 율무죽을 먹고 춤을 춘 것이 생뚱맞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비교적 신빙성이 있는 허봉의 기록에는
“화담은 산수가 좋은 곳을 만나면 문득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라고 하여, 바로 여기서 춤을 춘 까닭을 알 수 있다. 죽 때문이 아니라 만월대의 경치에 취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좋은 산수를 보고 춤을 춘다는 것은 천성의 적극적 발로이다. 좋은 산수를 보면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던가?

조선 기론의 선구자
앞의 『대학』의 격물을 놓고 사물을 탐구했다는 점은 경전에 천착하기보다 실제 사물에서 이치를 찾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점은 그의 학문의 출발이 무엇이며 앞으로 그의 학문의 방향을 암시하는 사례가 된다. 차천로가 쓴 『오산설림초고』에 나무를 깎아 선기옥형(璿璣玉衡 : 천문 관측기구)을 만들었다는 일이나, 『석담일기』에서 임금이 서경덕의 저서를 보고
“기수(氣數 : 사물이 변화하는 주기 또는 절기)를 논의한 것이 많고 수신(修身)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수리학(數理學 : 수로서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닌가? 그리고 그 공부가 의심나는 데가 많다.”
라고 평가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학문의 출발은 유교 경전을 통해 윤리적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생이 순수한 성리학자인지 의심하는 기록들이 있다. 가령 『석담일기』에 중종 말년에 서경덕이 도학(道學)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그의 이론에 기를 리라고 여긴 것이 많아서 이황이 이것을 병통으로 여겨 글로써 옳고 그름을 가려 반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홍명(鄭弘溟 : 1582~1650, 鄭澈의 아들)의 『기옹만필(畸翁漫筆)』에 율곡 선생이 화담 서경덕의 학문에 대해 말할 때에는 기를 리로 아는 병폐가 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들을 종합해보면 선생의 학문이 정통 성리학에서 약간 벗어나는 기 중심의 학문이라 하겠다. 어찌 보면 퇴계 이황의 학문도 정통 성리학에서 보면 지나치게 리 중심의 학문이라 평가되는데, 이는 각자의 학문과 상대방의 그것 사이의 차이점을 두고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어떤 학문을 두고 정통 따위의 시비를 가리는 것이 해당 학자의 독창성을 말살하는 우스운 일이겠으나, 성리학을 이념의 도구로 삼았던 조선 시대나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두자.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유학자로서 그의 명성에 흠이 될지 몰라 선생의 문인 또는 그 후인이 기록한 자료, 가령 『오산설림초고』에는 선생이 저자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학문에 유(儒)가 가장 어렵고, 불(佛)이 다음이고, 선(仙)이 가장 아래이다.”
라는 글이 보이고, 또 이덕형의 글에도 선생이 지리산에 갔을 때 어떤 신선을 만나
“신선 황백(黃白)의 술법은 비록 혹 전하지만, 유자(儒者)는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공자를 배우는 자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어쨌든 선생은 유학자이고 성리학에서 말하는 윤리적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조선철학사에서 기론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전개한 인물임은 확실하다.

서경덕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인가?
선생이 오늘날 우리에게 학문적 관심 이외에 던지는 메시지가 또 있을까? 더구나 전통 학문으로서 성리학이나 기론은 이제 더 이상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그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빛을 던지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선생의 삶을 단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시가 하나 있다. 『상촌잡록』에 보인다.

글 읽던 당일에 나라 경륜에 뜻을 두었지만(讀書當日志經綸)
늘그막에 되레 안씨(顔氏 : 공자의 제자)의 가난을 달게 여기네(歲暮還甘顔氏貧)
부귀에는 다툼이 있어 손을 대기 어렵고(富貴有爭難下手)
산림에 숨어 사는 일이야 금하지 않으니 편안할 수 있네(林泉無禁可安身)
나물 캐고 낚시하여 배 채울 만 하고(採山釣水堪充腹)
달과 바람을 노래하면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데 족하다(詠月吟風足暢神)
학문이란 변절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참으로 쾌활하니(學到不移眞快活)
백년을 헛되게 사는 인생을 면하리라(免敎虛作百年人)

백 년을 살까말까 한 우리 인생이 어디에 힘써야 할까? 아무리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고는 하지만, 후회 없이 살려면 나름의 가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부귀영화와 권세는 배우지 않아도 경쟁하며 찾지만, 선생처럼 인생을 걸고 즐기고 편안할 수 있는 길은 탐구해야만 찾을 수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 것이다.

모재 김안국의 덕망과 우애


모재 김안국의 덕망과 우애

 

스로 불러들인 재앙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겪는 재앙에는 천재지변과 같이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스스로 불러들인 경우가 많다. 그 원인에는 무지와 탐욕, 그리고 성격과 수양 부족 탓도 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라 여겨, 늘 수양하여 덕을 쌓아 혹여 만날 수 있는 재앙을 피하거나 또 어쩔 수 없이 닥치는 재앙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주역』에서는 흉한 괘가 나와도 흉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계하고 수양하는 여부에 따라 흉하지 않게 하는 길이 있음도 알려준다.
오늘날의 재앙이라고 해봤자 경제적 손실과 사고 등이 다반사이지만, 조선 시대 사대부들에게는 정치적 재앙이 가장 무서운 것이어서, 잘못 엮이면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가족의 목숨까지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혹여 생길 줄 모르는 모함과 비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수양하고 덕을 쌓으며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화를 당한 사건은 매우 빈번했고,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만 큰 것이 아니라 이에 못지않은 사화도 부지기수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 1478~1543)은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기묘사화(1519) 때 조광조의 당류로 몰렸지만, 조광조·김식(金湜) 등이 죽음을 면치 못한 반면, 그는 파직을 당하는 선에서 목숨을 보전하고, 20년 뒤 다시 등용되어 재기하였다.
그의 삶이 재앙 속에서도 이렇게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덕을 쌓아 인간관계가 원만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는 이런 종류의 재앙은 없지만, 사고나 직장에서의 해고와 승진 탈락 또는 사업 실패 그리고 가족 친지와의 불화에 따라 크고 작은 고통과 스트레스를 당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의 원인이 모두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양하며 경계한다면, 인생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모재 김안국(이하 모재로 약칭)의 삶이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성리학 이념의 교화와 문예
『대동야승』 속의 여러 문헌에 모재만큼 많이 언급된 인물도 흔치 않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그가 관리로서 이룬 업적과 시문(詩文)을 잘 지었다는 점과 원만한 인간관계와 우애, 시를 보고 사람을 잘 감별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안로(安璐 : ?~?)가 1638년에 기록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따르면 모재는 정축년에 영남 지방을 살피면서 효자 및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을 방문하여 그 집에 가기도 하고 음식을 보내 주기도 하며, 뛰어난 자는 조정에 천거했다고 한다. 『이륜행실록언해(二倫行實錄諺解)』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고, 백성들에게 반포하면서 풍속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가르치기에 힘썼다. 기묘년에 조정에 들어와서 우참찬 겸 홍문관제학이 되었는데, 특지로써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하면서, 앞서 경상도에 있을 때의 공적이 현저하였으므로 백성을 위해 모재를 선택해 제수한다 하였다. 모재가 감격하여 교화를 성취시킬 조목을 생각하였는데, 전보다 주밀하고 상세하였다. 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되니 이천(利川)의 주동(注洞) 집에 물러가 살았고, 따로 작은 집을 지어서 은일재(恩逸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날마다 여러 학생과 강학(講學)하니 학도가 점점 많아졌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무거운 처벌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성리학의 이념을 수양 차원에서 몸소 모범을 보이고 교육한 이가 김굉필이라면, 조광조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 그것을 제도적으로 실천하였고, 모재는 지방에서 직접 교화에 힘써 실질적으로 그것이 민간에 침투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니까 성리학의 이념과 전통이 뿌리 내린 것은 모재의 공이라 하겠다.
모재는 시문에도 능하였다. 글을 잘 지어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의 작성만이 아니라 사신들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가령 이기(李墍 : ?~?)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사대는 중국에, 교린은 일본 등과 관련된 외교이다. 물론 일본과 중국 사신과의 일화도 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시문에 능하였는데, 윤근수(尹根壽 :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 그 일화가 있지만 너무 길어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모재는 벼슬하기 전부터 벌써 시를 볼 줄 안다고 당시에 이름이 났다. 판서 성현(成俔)이 한 해 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요양하였다. 그 사이에 두보(杜甫)의 시를 숙독해서 사운(四韻) 여덟 수를 짓고 스스로
‘마음에 만족한 작품이니 옛날 사람의 시에 견줄 수 있다.’
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아들 하산(夏山)에게 말하기를,
“내 이 시는 옛 사람의 작품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들으니 네 친구 김 아무개는 시의 장단점을 가려낸다고 하니, 네가 보통 종이에다 하인을 시켜서 베끼고 이것을 부엌 위에 수십 일 동안 매달아 연기에 그을려 오래 묵은 것처럼 만든 뒤, 김 아무개에게 보여 그것이 어느 시대의 시인가를 물어보라.”
라고 하였다. 그 뒤 하산이 자기 집에 모재를 초청하여 손님 자리에 같이 앉고, 판서는 벽을 사이에 두고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하산이 묻기를,
“집의 어른께서 묵은 책 상자 속에서 시를 찾아내셨는데, 이것이 참으로 옛날 사람의 작품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송나라 말엽의 작품인지 아니면 원 나라 사람의 작품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어, 자네에게 이 시의 감정을 청하네.”
라고 하였다. 모재는 두 편을 읽고 말하기를,
“이 시는 격이 낮다. 송 말엽의 시는 벌써 아니고, 원 나라 시 또한 아니다. 바로 현대 작품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최치원(崔致遠)이나 이색(李穡)의 작품은 아니겠는가?”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최치원과 이색의 시는 격이 높다. 그러니 그들의 작품은 아닐 것이고, 진짜 현대 작품이다. 그러나 현대 사람의 작품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다른 사람은 아마 이렇게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들으니 대감(성현을 가리킴)께서 요즘 두시를 읽으셨다고 하는데, 만약 정밀하게 생각하고 다듬으면 이만한 작품을 쓰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대감의 작품일 게다.”
라고 하였다. 판서가 안에서 이 얘기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와서 모재를 보고 말하기를,
“너의 시 공부가 이 정도가지 이른 것은 뜻밖이구나.”
하고, 드디어 술상을 차리고 마주 앉아서 오랫동안 조용히 얘기한 뒤에 파하였다.

이렇게 시문과 관련된 모재의 일화는 매우 많다. 그래서 온 세상의 평론이 모재는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 : 전례와 고사)에 널리 통하였으나 학문상의 공부에 이르러서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월정만필』에서 평하였는데, 이 학문이란 아마도 이론 중심의 성리학을 말하는 것 같다. 역으로 생각해 달리 말하면 성리학 이론보다 실천에 충실했다고 하겠다. 아무튼 이 말은 그의 학문 수준이 결코 얕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기록에는 퇴계 이황이 한 때 경상도와 서울로 오가면서 이천의 모재를 찾았는데,
“모재를 뵌 뒤부터 비로소 마음씨가 올바른 군자(正人君子)의 도를 알았다.”
라고 전하며,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유자(儒者)의 사범(師範)이 되었고, 당시의 학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선생의 힘이라고 전한다.

덕망과 인간관계
모재는 성품이 섬세하고 인정이 많았다. 『해동잡록』에 모재는 성품이 부지런하고 상세하고 치밀하여 방아를 찧을 때에는 싸라기와 쌀겨도 함께 거두어 저장하였다가 춘궁기에 굶주린 백성을 먹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이 물건을 낼 때에 모두 쓰일 곳이 있도록 마련하였으니, 마구 없애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간혹 비방하면, 모재는 웃으며 말하기를
“범인은 마음이 거칠고 성인은 마음이 세밀하니라.”
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백성을 사랑하며 성격이 주도면밀하고 섬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은 권응인(權應仁 : ?~?)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모재가 성주(星州) 기생 의침향(倚沉香)에게 준 시에도 엿보인다.

아름다움과 추함 인연도 말하지 말자(不論姸醜不論緣)
오래 있다 보니 사람 마음이 저절로 끌리게 하는구나(處久令人意自牽)

이 시에서 정이 많은 그의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 같은 기록에서도 “호음(湖陰 : 鄭士龍의 호)은 좀처럼 남을 칭찬하는 일이 없었는데, 모재는 그렇지 않아서 남의 좋은 글귀를 보면 감탄하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남의 장점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과의 약속이나 의리는 꼭 지켰다.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따르면 김모재가 장원(壯元) 강태수(姜台壽) 집안과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다가 후에 자녀가 모두 장성하여 혼인할 시기가 되었는데, 강태수의 아들이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언약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드디어 그와 혼례를 이루었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성격에는 섬세함과 신의도 있었지만 그에 더해서 은혜도 잊지 않았다. 앞의 기록에 따르면 모재는 이천(利川)으로 물러나 살았고, 사재(思齋 : 모재의 아우 金正國의 호) 고양(高陽)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사재가 이천에 갔는데, 동네에서 풋콩을 삶거나 참외를 따서 모재에게 드렸다. 모재는 모두 받아서 책에 기록하니, 사재가 얼굴을 찡그리며
“형님은 이런 물건을 받아쓰면서 어찌하여 책에 기록합니까?”
라고 하니, 모재가
“남이 성심으로 주는 것인데 내가 어찌 물리치며, 만약 책에 기록하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잊어버릴 것이니, 어찌 남의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라고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 사람의 덕망과 성품은 그가 직접 만든 가훈과 자녀들의 가르침에도 드러난다. 『해동잡록』에 기록에 모재는 항상 겸(謙)과 공(恭) 두 글자를 가지고 자제를 가르치며 말하기를,
“겸손과 공손은 오로지 군자의 성대한 덕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명심하여 종신토록 잊지 말라.”
라고 전한다. 이런 생각이 조밀하게 반영된 것이 그의 가훈이다. 같은 기록에 보면 ①말을 삼갈 것 ②자기의 장점을 자랑하거나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 것 ③남의 허물은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말하지 말 것 ④조정 정치의 잘되고 못됨을 말하지 말 것 ⑤수령이나 재상의 잘한 일 못한 일을 말하지 말 것 ⑥음란하고 추잡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⑦남을 헐뜯는 말을 하지 말 것 ⑧오만한 말을 하지 말 것 ⑨상도(常道)에 어긋나고 흉악하고 도리에 벗어나는 말을 하지 말 것 ⑩허풍을 떨거나 허황된 말을 하지 말 것이 그것이다. 주로 말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행장」에는 이와 약간 다른데 말조심 외에 충성·효도·우애·화목 등의 덕목이 들어 있다. 물론 이것들은 유교에서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시하는 가르침이고 교화의 주요 내용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애와 인물 감별
모재는 또 형제 사이에 우애가 있기로 소문난 당사자였다. 보통 어렸을 때 한 집에 살 때는 형제 사이의 우애가 있거나 있을 법 하다가도, 가정을 이루어 따로 살면 쉽지 않다. 유산의 분배 문제도 있고, 또 딸린 부인이나 식구나 하인들의 입장도 있어서 형제끼리 우애의 도리를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형제 가운데 누가 망하거나 환난을 당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해동잡록』에 모재가 영남 관찰사로 있을 때에 형제간에 전답을 가지고 다투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효도하고 우애하며 화목해야 하는 도리를 타일렀더니, 두 사람이 감복하여 두 번 절하고 물러갔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도 형제끼리 유산으로 다투는 일이 잦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기록에서 모재는 동기 사이는 우애를 더욱 도탑게 하고, 재물에 대하여서는 사양하기를 힘써 더 얻으려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자녀를 가르친 것을 보면, 평소에 우애를 잘 실천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 1485~1541)은 모재의 아우이다. 임보신(任輔臣 : ~1558)이 기록한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따르면 사재 김정국의 자는 국필(國弼)인데, 모재의 아우였다. 기묘년에 파직된 후에 고양(高陽)의 농막으로 돌아가서 호를 은휴(恩休)라 하였다. 고아한 선비로서 후생들의 모범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그 형제를 가리켜 이난(二難 : 세상에 흔하지 않은 일)이라 했다고 한다. 이로 보면 두 형제 사이의 깊은 우애가 소문났음을 알 수 있다.
또 윤기헌(尹耆獻 : ?~?)이 기록한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 두 사람 사이의 일화가 있다. 모재와 사재 형제는 소인배에게 배척을 받아 시골에 살고 있었다. 늘 서로 왕래하며 유숙하였는데 때로는 한 달이 되기도 하였다. 작별하면서 모재가 사재에게 말하기를,
“내 이미 연로하고 그대 또한 병이 많은데,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리오. 서로 만나면 기쁘고 떨어지면 슬픈데, 서로 함께 살며 여생을 마칠 수 없겠는가?”
하니, 사재가 말하기를
“저의 뜻은 좀 다릅니다. 형제가 동거함은 실로 기쁜 일이오나, 양가의 하인들 사이에 딴 말이 없을 수 없고, 부인들은 성질이 편벽하여 오해하기는 쉽고 풀기는 어려우니, 만약에 반목이 생긴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로 각각 사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생각나고, 서로 만나면 즐거우니 우애의 정은 날로 더욱 두터워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듣는 사람이 더러는 사재의 말에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소인배에게 배척을 받은 것은 기묘사화의 일을 말한다. 두 형제는 다행히 죽음과 유배를 면하여 파직만 당한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모재는 경기도 이천, 사재는 경기도 고양에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왜 떨어져 살았는지 기록은 없으나, 대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남자가 혼인하면 처가 쪽에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딸도 유산을 상속 받았으므로, 그 상속받은 농토를 관리하려면 부득이 거기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두 사람 사이에는 우애가 깊어서 서로 간에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또 모재가 유명한 점 가운데는 인물을 잘 감별했다고 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시를 보고 지은 사람의 상황을 판단하기도 하고 때로는 운명을 점치기도 했다. 이덕형(李德馨 : 1561~1613)이 지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 모재는 감식이 신과 같아서 남이 지은 글을 보면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궁달(窮達)과 수명까지도 아는데, 이것은 열에서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일례로 이제신(李濟臣 : 1536~1583)이 쓴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김모재는 한 유생이 시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시를 보니
“푸른 나무 그늘 속에 다시 주저하네(綠樹陰中更躊躇)”
라는 거였다. 모재는
“이 시가 매우 짧고 초라하니 머지않아 반드시 죽으리라.”
라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고 전한다.
게다가 『송와잡설』에는 정소종(鄭紹宗)은 꿈에 어떤 노인이 손바닥에 시를 써 주었는데, 그는 훗날 과거에서 해당 시구에 각각 두 글자씩 보태 지어 급제했다고 한다. 시험관인 모재가 그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며 “이것은 실로 귀신의 말이다.”라고 했는데, 나중에 정소종이 모재를 뵙자 시상이 거기에 미치게 된 연유를 밝히자, 모재의 글을 알아보는 명성이 이때부터 알려졌다고 전한다.
모재는 성리학 이념이 백성들의 실생활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교화에 힘쓴 공이 있고, 또 시문을 통하여 외교 활동만이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게다가 성격이 섬세하고 인정이 많아 환난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며, 형제 사이에 우애도 뛰어났다. 이만하면 동시대나 후세의 관심과 추앙을 받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흔히 처세술을 말할 때 소인의 아첨과 군자의 너그러움을 구별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가 환난에서 살아남고 한 시대에 명성을 얻은 것은 단순히 세상에 아첨했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성리학을 기초로 덕을 쌓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늘날의 덕은 무엇을 기반으로 쌓아야 할까?

정암 조광조와 이상 사회


정암 조광조와 이상 사회

 

상 사회

현실의 부조리가 심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보통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미륵이나 구천상제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꾸었던 민중 종교만이 아니라, 기성 종교 가운데서도 종말론적 교파가 등장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왕조 말기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신라 말 궁예의 등장도 그랬고, 구한말 한국 신종교의 출현도 그와 관련이 있다.
이런 종교적 신앙과 별개로 현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실망에서 새로운 사회를 이론적으로 꿈꾸기도 했다.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론과 플라톤의 국가론을 비롯하여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각종 소설과 담론은 현실의 삶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반증한다. 20세기 소련과 동구에서 실험했던 공산주의도 적어도 그 출발은 노동자로 구성된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다.
동아시아에도 일찍이 이상 사회의 담론이 있었다. 『예기』 「예운」편에 등장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는 살기 좋았던 때로 묘사하고 있고, 전설적 제왕인 요순(堯舜)이 다스리던 시대를 이상 사회로 믿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가 경전에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 유학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동아시아 역사·철학의 담론에서 이상 사회의 모델이 되었으며, 복고적 가치관이 지배하게 되었다.
조선 중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 1482~1519)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 이상 사회의 정치 모델로 생각한 것도 바로 요순시대의 그것이었다. 이는 유학자 특히 성리학자들이 유가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도통(道統)의 시작을 요순으로부터 이어진다고 보는 생각과 일치한다.
여기서 어떤 유토피아 사상도 그렇지만 선생의 이상 정치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또 유가의 이상적 이념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을까? 곧 정치 행위란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자산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데 있어서 정치 세력 간의 타협을 이끌어 내는 일이라고 소박하게 정의해볼 때, 선생의 개혁 정치의 실패 원인과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훗날 문묘에 배향되고 선비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지치주의로 이상 사회 건설
안로(安璐)가 1638년에 쓴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따로 「조정암전(趙靜庵傳)」이 있는데, 우부승지 박세희(朴世熹)의 입을 빌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는 젊어서 김굉필에게 배웠고 장성하여서는 스스로 깨닫고 분발하였다. 도학(道學)에 침잠하여 경전의 문구(文句)를 따지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으며, 의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그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널리 배우고 힘껏 행하였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남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고 도에서도 이탈하지 않았으니, 사림이 다 추중(推重)하였다. 국가가 중흥할 운수를 당해서 조야에서 유신하기를 바랐다. 까닭에 공은 홀로 침착하게 건의하여 선왕의 법도를 회복하도록 청하였다. 아는 것은 임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임금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
요약하면 선생은 도학에 뜻을 두었고, 젊어서부터 선비들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국가의 유신 곧 개혁을 추진했고 그 모델과 방법은 선왕의 법도를 회복하는 일이었고,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그가 실각하지 전까지의 행적과 일치한다. 실제로 그는 출사하기 전부터 산림의 영수(領袖)로 추앙을 받았다.
그의 학문의 성격에 대해서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서는 선생이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고, 『소학』을 독신하고 유학을 일으키며, 임금과 백성을 요순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그가 공부한 도학으로 중종을 요순임금처럼, 백성들을 그 시대의 백성들처럼 유학의 법도에 잘 맞게 만들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회복하고자 한 ‘선왕의 법도’는 곧 요순시대의 법도 또는 그런 모델에 가까운 성왕(聖王)들의 법도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도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이이(李珥 : 1536~1584)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는 도학과 선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학이란 이름이 예전엔 없었다. … 이치를 궁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도(道)를 기준으로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을 도학이라 지목하게 되었던 것이니, 도학이라 이름을 세운 것은 말세의 부득이한 일이다. … 세속이 더욱 저급해져서 경서나 읽고 저술이나 하는 사람이면 도학자로 부르지만, 그 심성(心性)의 공부나 세상에 드는 큰 절개에는 생각해 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더욱 세도가 변했음을 알 수 있다. … 그는 조정에 서서 오로지 도를 행하려 힘써서 삼대(三代)의 도가 아니면 결코 임금 앞에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러므로 그가 도학자(道學者)란 이름을 얻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도학이란 쉽게 말해 유교적 성인(聖人)이 되는 학문을 말한다. 앞의 인용에서 자신의 임금을 요순처럼 만든다는 것이니, ‘내면적으로는 성인이요 겉으로는 왕’인 내성외왕(內聖外王)이 되는 학문이다. 신하의 입장에서도 비록 왕은 아니지만 내면으로는 성인이요 외면으로는 그런 왕을 돕는 자가 되는 일이다. 이 또한 유학의 본령이 ‘자기 몸을 수양하여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정신의 발로이다. 그렇게 되려면 이치를 탐구하여 심성을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도학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의 결과를 ‘지치(至治)’라고 불렀다. 곧 중국 고대의 하(夏)·은(殷)·주(周) 삼대 정치를 이상으로 달리 말하면 요순시대처럼 잘 다스려지는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석담일기』에 선생은 경연(經筵)에서 매양 도덕을 숭상하여 인심 바로잡고 성현을 본받아 지치를 일으켜야 한다는 논설을 반복하여 아뢰니, 그 말하는 뜻이 간절하였다고 전한다. 이 말을 분석해 보면, 지치를 일으키는 기본 전제로서 ‘도덕을 숭상하고 인심을 바로잡는 일’이 선행되어함을 말하고 있다. 곧 수기(修己)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치주의는 무엇보다 통치자의 도덕성이 그 전제로서 가장 우선되는 정치이다. 통치자의 도덕성이 정치 현장이나 민생에 직접 연결 될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이 됨은 분명하다. 유교적 도덕과 근본이념이 잘 발휘된 이상 사회가 지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다스리는 도리에 대하여 개진하면서 성(性)과 정(情), 선과 악, 의(義)와 이(利)의 분별에서부터 천(天)과 인(人), 왕도와 패도, 옳음과 사악함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잡아내어 벌려놓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해동잡록』은 전하는데, 자세히 보면 모두 선악이라는 어떤 이분법적 잣대로서 정치 행위에 임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당시 연산군의 폐정에 따른 시대적 배경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진단이라 하더라도, 정치 현장에서 이런 이분법적 구분은 통합에 매우 좋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결과적으로 선생의 이상 사회를 지향하는 개혁 정치는 그가 모함을 받아 실각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그의 개혁 정치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 현대 학자들의 연구도 많이 축적되어 있지만, 그가 살았던 직후의 후학들에 의해서 지적되기도 하였다. 『석담일기』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체로 선생의 학문이 숙성되지 않았고 개혁이 급진적이었다고 한다. 곧 학문이 미처 크게 이루기 전에 벼슬길에 나왔고, 현량과 설치 이후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섞이어 조정에 진출하게 되어 논의가 대단히 날카로워지고 일을 수행하는 것이 급진적이었다는 점이다.
또 안로(安璐)가 1638년에 쓴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서도 박세희(朴世熹)의 입을 빌어 나중에 진출한 여러 선비들은 기세가 날카로워서,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점진적 개혁이 없었으므로 험한 세정(世情)에 저촉되어 인심이 크게 어그러졌다고 하여,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인심을 크게 잃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개혁의 당위성을 앞세우면서 같은 당내에서도 급진파의 입김이 세지면, 인심을 잃어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점은 현대 정치에서도 자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대동야승』의 여러 자료에서는 개혁의 진행에서 사람을 질리게 하여 인심을 잃은 경우를 소개하고 있다. 예컨대 도교 사원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일에 있어서도 『기묘록보유』에서 기록하기를 임금의 허락하지 않자 새벽닭이 울 때까지 주청을 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고,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승지들은 모두 책상에 기대서 졸았으니 모두 염증과 괴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것은 반드시 충성과 착한 도로써 임금의 마음과 맺고, 임금의 마음이 트인 곳으로부터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토록 핍박하고도 무사한 자가 있을 수 없다고 다소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혁을 위해 주변의 신하는 물론 왕까지 질리게 만들어 인심을 잃게 했다는 지적이다. 아무리 당위성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이러하다면 인심을 얻기 어렵다. 또 거기서 전하기를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당연한 도리로써 인도하고 지성(至誠)으로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 힘쓸 뿐이니, 어찌 딴 짓을 헤아릴 것인가 하고, 만약 임금이 듣기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헤아리고 후일을 기다린다면, 어찌 군자가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기에 급한 마음으로 할 것인가 하고 비판적인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인심을 잃은 사례는 또 있다. 작자 미상인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에 선생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선생이 이욕(利欲)이란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것이요, 국가의 병폐의 근원도 이 이(利)의 근원에 있다고 하여, 중종반정 때에 공이 없어 허위로 공신이 된 사람을 공적을 삭제하여 그 욕심을 징계하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선생이 끝내 이것도 관철시켰다고 한다. 물론 선생의 이런 주장은 명분상 옳다. 그러나 명분이 옳다고 해서 모두 진정으로 수긍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성보다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명분은 또 다른 명분으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선생이 실각한 명분도 있다. 물론 이것은 선생을 실각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민 자들의 명분이기도 하다. 『기묘록속집』에 선생에게 죄가 있다는 상소에 보인다.

“조광조가 서로 붕당을 만들어 자기에게 붙는 사람은 진급시키고 자기와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하여 명성과 위세가 등등하고, 권세와 요직을 모조리 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개인적인 행동만 하여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후진들을 유인하여 공정하지 못하고 과격한 것으로 습성을 만들어 젊은이로서 어른을 능멸하며 천한 자로서 귀한 사람을 무시하게 하여, 나라 형세가 뒤집어지고 조정의 정사를 날마다 해쳤습니다.”

요지는 선생이 편당을 지어 자기 사람으로 조정의 요직을 채우고, 과격하고 임금을 속이고 젊은이가 어른과 귀한 사람을 능멸하여 정치를 해쳤다는 명분이다. 물론 임금의 허락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젊은 사림을 등용과 급진적 개혁을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겠으나, 임금을 속이고 어른을 능멸한다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도덕적 이념의 잣대로 훈구대신들을 인간적으로 멀리 했음을 뜻한다. 선생을 선두로 훈구대신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한 모습은 여러 자료에도 보인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개혁의 주체가 그 대상이자 상대를 바라보는 시각이라 하겠다.
또 국방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가령 『기묘록보유』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북방의 여진족이 국경을 넘어와 백성들을 약탈해 가자 조정에서는 불시에 군사를 풀어 덮치기로 논의했는데, 선생이 뒤늦게 나와서,
“이번 일은 바로 도둑과 같은 짓입니다. 기미를 엿보는 간사한 꾀는 왕다운 왕이 오랑캐를 제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당당한 큰 나라에서 요망한 오랑캐를 잡기 위해 도적과 같은 꾀를 행해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엄을 손상하는 일을 신은 속으로 부끄러워합니다.”
라고 하자, 임금이 곧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좌우에서 진언하기를,
“군사 전술에는 기습전과 정규전이 있고, 오랑캐를 제어하는 데에는 정상적인 전투보다 융통성 있는 전투가 있습니다. 여러 의논이 이미 같았는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전쟁마저도 선생은 선왕의 법, 곧 큰 천자의 나라가 오랑캐를 치거나 달래는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법의 현대적 적용에 대한 선생의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반대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거나 현실에 어둡다는 명분을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래서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
“밭가는 것은 농사짓는 노비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고, 베 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방에 출입하여서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신의 말을 들을 것을 청합니다. 쓸모없는 선비의 말이 예로부터 이러한 바, 비록 이치에는 근사하나 다 따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그 지방으로 군사를 보내려던 것도 중지시켜 버렸다. 선생은 3품 관원인데 능히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뜻을 움직여 조정의 큰 논의를 바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는 기록에서도 선생이 인심을 잃음이 이러했다.
그러니까 지치주의의 이념으로 무장한 도덕 정치만으로는 인심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한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어떤 이념이나 도덕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과거 공산주의가 철저하게 이념으로 무장하여도 결국 무너졌다. 율곡 이이가 『석담일기』에서 퇴계 이황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 사람들이 대유(大儒)로 지목하고 어린 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룩하기 바랐으나 스스로 경세제민의 재주가 없다고 했는데,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도학 이상의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더구나 도덕을 명분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또한 도덕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앞의 훈구대신들이 선생을 공격할 때도 편당을 짓고 요직을 독차지 하고 임금을 속이고 과격하고 어른을 능멸한다는 것이 그 점이다. 최근 우리나라 검찰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것을 반대하는 검찰이 법무부 장관의 도덕성 심지의 가족의 그것마저 이 잡듯이 수사하여 혐의를 들추어냄으로써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려고 하였다. 사실 도덕을 잣대로 상대를 공격하기는 매우 쉽지만, 똑같은 기준을 자기에게 들이대지는 않는다. 게다가 도덕성이 뛰어나다고 해서 반드시 유능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도덕은 정치를 성공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런 점을 선생의 개혁 정치가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하지만, 아무튼 선생은 끝내 중종임금마저도 설득하지 못했다. 들어주다가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상 사회를 꿈꾸는 선비의 표상
이상 사회를 지향하는 선생의 개혁은 좌절되었으나, 그렇다고 전혀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석담일기』에 일찍이 도학으로 군주에게 고한 사람은 없었는데, 오직 선생이 성리학으로 중종을 보필하여 세도가 거의 변화하려 하였다고 하여 도학이 선생으로부터 유래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배우는 이들이 이때에 이르러서야 성리학을 높일 만하고 왕도가 귀하며 패도가 천한 것을 알았으니, 그가 유학의 도리에 끼친 공로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그 의의를 밝혀, 유학이 지향해야 할 기준을 선생이 제시하였다고 하겠다.
또 『기묘록보유』에서도

“조광조는 젊어서부터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김굉필에게서 학업을 받았다. 김굉필의 학문은 김종직에게 배웠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비인 김숙자(金淑滋)에게서 전해 왔으며, 김숙자의 학문은 고려 신하였던 길재(吉再)한테서 전해 왔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니, 실상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이다.”

라고 하여, 선생은 유학의 도통을 잇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훗날 문묘에 배향되어 조선 유학에 있어서 선생의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상 사회를 꿈꾸는 선비의 표상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옛 것만 파먹으면 그로써 충분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더구나 도덕으로 상대를 공격하기는 쉬워도 자신은 그렇게 되기 어려우며, 선악의 잣대를 가지고 갈등을 해소하고 자원을 잘 배분하는 정치는 쉽지 않다. 상대가 생각하는 선악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성 못지않은 큰 정치력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