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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정(金義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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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연산군 1)~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
자는 공직(公直), 호는 잠암(潛庵) 또는 유경당(幽敬堂)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서울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조참판 김양진(金楊震)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허서(許瑞)의 딸이다.
22세(15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32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홍문관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청요직’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사헌부의 장령 1인, 홍문관 당하관 12인, 이조전랑 6인, 예문관 한림 8인을 지칭한다. 이들은 결코 품계가 높지는 않았으나 고위직 관리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었다. 이 자부심의 배경에는 탐관오리의 자손이 후에 혹 사면을 받더라도 절대로 오를 수 없는 관직이라는 점도 한몫을 하였다. 그래서 2품(육조판서)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청요직을 제대로 수행한 조상이 있다면, 그 가문은 명문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백성과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안국(金安國), 이행(李荇)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때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와의 악연으로 인해 정치적 좌절을 겪었으며, 심정(沈貞)의 집안과 혼인한 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심정은 당시 신진사류들과 대립하던 훈구세력이었다. 심정이 1515년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하였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삼사’는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로,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도 한다. 또한 1518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인 정국공신(靖國功臣)도 삭탈되었다.
이에 심정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중 1519년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말을 퍼트리며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사류들을 숙청했다. 1527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복성군(福城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강서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이항(李沆)․김극핍(金克)과 함께 신묘3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김의정은 인종(仁宗)의 동궁 시절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지낸 것을 인연으로 인종이 즉위하자,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종이 즉위한지 7개월 만에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하여 스스로 ‘잠암’ 또는 ‘유경당’이라는 호를 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삶을 마쳤다. 경상도 예천군 광석산 선영에 묻혔다.
김의정은 조선 중기 뛰어난 문장과 의로운 삶의 행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훈고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네 차례의 사화(士禍)가 일어났던 혼란기였다. 사림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라는 뜻으로 ‘사화’라고 부른다. 연산군 대부터 명종 대에 이르는 60여 년간의 기간은 사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김의정은 『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학문에 힘썼으며, 평생 의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창작한 문학작품에는 이러한 그의 학문과 의리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김의정의 삶과 문학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남곤(南袞, 1471~1527)은 김의정의 뛰어난 재주를 후진 문학자들 가운데 제일로 꼽았으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김의정의 문장과 절의는 세상에 영원히 전해져야 할 것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김의정을 상서로운 세상에 높이 나는 봉황에 비유하였다. 아울러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김의정의 「천형부(踐形賦)」에 대해 문장과 논리가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였으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은 「기강부(紀綱賦)」에 대해 작품의 논리가 매우 훌륭하니 평소 실천의 독실함을 볼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서는 김의정이 특히 부(賦)의 창작에 탁월했다는 평가에 근거하여, 그의 ‘부’ 작품을 소개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는 유가적 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곳곳에 드러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 나타나는 유가적 도리의 실천의지는 쉼 없는 공부를 통해 축적한 학문적 소양이 그의 작품 속에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의정의 부를 ‘수신(修身)의 의지’라는 주제에 기초하여 살펴본다.
‘수신’은 유가적 실천항목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고, 『대학』의 팔조목에 의하면 수신을 위해 이루어야 할 공부가 격물․치지․정의․정심이다. 『대학』은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로, 그 내용은 크게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으로 나눌 수 있다. 삼강령은 밝은 덕을 밝히고(明明德), 백성을 친애하며(親民), 최고의 선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을 말한다. 또한 팔조목은 사물에 나아가는 격물(格物), 지식을 이루는 치지(致知), 뜻을 진실하게 하는 성의(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 몸을 닦는 수신(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제가(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김의정은 이 항목들의 중요성과 실천의지에 대해 여러 작품에서 언급하였다. 「환우부(寰宇賦)」에서는 우주의 진실하고 쉼 없는 운행을 본받아 인간도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 자강불식의 자세로 마음을 수양하여 중화(中和)를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중화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써, 감정이나 성격 등이 지나치거나 치우치지 아니함을 말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 즉 기쁜․성냄․슬픔․즐거움의 감정이 아직 사람의 행동에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 하며, ‘화’는 그러한 것이 이미 행동으로 나타나 절도에 맞음을 말한다. 이러한 중화의 덕이 지극히 이루어지면, 세상이 안정되고 만물이 모두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또한 「뇌전부(雷電賦)」에서는 번개나 우레와 같은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동요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는 것에서 비롯함을 피력하였다. 「방예부(放麑賦)」에서는 선행을 베풂에 시비판단이 명확하게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격물․치지와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검각부(劒閣賦)」․「무광지자황부(務廣地者荒賦)」 등에서는 통치자가 수신을 이루어 덕치(德治)를 시행해야만 국가를 온전하게 통치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형부(踐形賦)」는 『맹자』「진심(盡心)」에 보이는 “사람이 지닌 형색(形色)은 천성(天性)이니, 오직 성인의 경지에 이른 뒤라야 형색을 실천할 수 있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可以踐形.)라는 말에 착안하여 창작한 것이다. 조광조의 논평을 참고하면,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그의 나이 19세 이전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음양의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을 그대로 품부 받은 인간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이지만, 각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품부받은 대로 살아가지 못함을 개탄하며, 동시에 천형(踐形)을 실현할 것과 나아가 정심(正心) 공부를 통해 본성을 보존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형색이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니,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각자의 형색을 발현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 있는 눈․코․입․귀는 각각 나름의 기능이 있으니, 어느 하나 헛되이 있는 것은 없고, 그것 자체가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도덕적 준칙이다. 그러므로 나의 형색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의정은 맹자가 언급한 ‘천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천형’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 하여 본성을 보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스스로 법도를 다해야 하니, 어찌 꼭 형체를 실천할 필요가 있으랴? 진실로 나의 이 본성을 다한다면, 형체가 저절로 따라서 드러나리라. 형체는 드러나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이치는 묘하게 숨었으니 마음으로 터득해야 한다오. 마음에서 찾지 않고 형체에서 찾는다면 또한 덕을 다할 수 없다네. 천(踐)이라는 한 글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 아니네. 이것은 없는 것을 책하여 있기를 바라고, 고요한 것을 두드려 소리를 얻음과 같다오. 돌아보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뜻이 더욱 깊다네. 실천하면 참다운 내가 있고, 실천하지 않으면 참다운 내가 없다네. 마음을 따라 사지(四肢)를 관장하여야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터럭 하나와 머리칼 한 올도 혼연하여 나의 마음을 막지 않으리니. 저 신령한 혼(魂)이 백(魄)을 떠나면 마음이 멋대로 날아가 방종하고, 오직 육체만이 홀로 남아서 마치 빈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같네. 비록 귀와 눈으로 보고 듣더라도 모든 이들은 그것이 빈껍데기 인줄 안다네. 나는 이를 슬퍼하고 두려워하여 이 가르침을 지켜 날마다 살피노라.”

사람이 타고난 형색(품성)을 실천하고 본성을 지극히 해야 함을 강조한 부분이다.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보존한다면, 형색은 저절로 발현될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지 못한 형색은 방종하게 되고, 그것은 마치 텅 빈 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비록 사람의 형체는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상은 한 덩어리 혈기로 이루어진 몸뚱이일 뿐이요, 물건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바로 하지 못하여 본성을 보존하지 못하게 됨은 그 무엇보다 애통한 일이다. 때문에 김의정은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자신을 성찰할 것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김의정의 부는 어려운 시어를 구사하지 않고, 경전의 내용을 쉽게 풀이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광조는 이 작품의 문장과 논리를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한 것이다.

[참고문헌]: 「잠암 김의정 賦문학 연구-작품에 형상화된 주제 의상을 중심으로-」(김진경, 『우리어문연구』38, 우리어문학회,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발(李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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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중종 39)~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의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菴)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 이중호(李仲虎)는 예조참판․전라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어머니 해남윤씨는 최산두(崔山斗)․유성춘(柳成春)과 더불어 호남 3걸이라고 불리는 윤구(尹衢)의 딸이다. 1544년(중종 39)에 해남의 백련동 외가에서 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윤의중(尹毅中)의 사위이며,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고모부이다. 이발의 처조카인 윤선도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음에도 연루되어 온 가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 정여립 옥사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도 부른다. 기축옥사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 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1568년(선조 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9월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호당은 독서당으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이다. 그 뒤 이조정랑․대사간․대사성․부제학 등을 역임한다. 경학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선비들의 여론을 주도하고, 임금이 공부하는 곳인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한다.
왕도정치는 맹자(孟子)가 주장한 정치사상이다. 무력이나 강압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도덕적 교화를 중시하는 정치를 말한다. 맹자는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게 되고,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진심으로 따르게 되니, 덕에 의한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유가들이 가장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사상이다.
조광조의 지치주의란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조광조가 추구한 이상적 정치이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치’란 『서경』「군진(君陳)」편 ‘지치형향 감우신명(至治馨香 感于神明)’에서 따온 것이다.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신명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치’가 조광조에 의해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실천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유가에서의 이상사회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의 삼대를 가리킨다. 따라서 지치주의란 이상적 정치이념으로써 당시의 백성들을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삼대의 백성들로 만들려는 이상정치의 현실적 실천운동이다. 『서경』은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이다. 사서삼경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데, 사서는 『대학』․『논어』․『맹자』․『중용』을 말하며, 삼경은 『시경』․『서경』․『주역』을 이른다.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발은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로 교외에서 ‘죄를 기다리던’ 중 잡혀서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그해 12월에 매에 맞아 죽었다. 동생 이급(李洁)도 연좌되어 죽었고, 그의 82세 노모와 10세의 아들도 이때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발과 이길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이들의 죽음은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더욱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죄를 기다리는 것’은 보통 석고대죄(席藁待罪)라고 부른다. ‘석고대죄’는 죄지은 사람이 거적에 꿇어앉아 윗사람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처벌을 자청하는 것이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저놈에게 곤장 백 대를 쳐라.” 이런 처분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석고대죄는 보통 속옷 차림에 가깝도록 의관을 벗고 하는데, 몹시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큰 벌이다. 죄를 처분할 사람이 결단할 때까지 밤이 깊든, 눈비가 오든 그대로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정조의 아버지이고, 회고록인 ‘한중록’을 남긴 혜경궁 홍씨의 남편이며, 아버지(영조)와의 갈등으로 뒤주에서 굶어죽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석고대죄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 동생인 이길과 함께 죄가 면해지고 관작이 복원되었으며, 몰수한 재산은 되돌려졌다. 숙종 26년(1694)에는 이발과 이길의 절개와 행실을 기려 그 옛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정문’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다.

여기서는 이발의 학문경향을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나아가 남인과 북인의 분당을 둘러싼 논점을 통하여 소개하겠다. 즉 성종(成宗)대 이래 비교적 단일한 색채를 유지하던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다시 동인이 각각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원인이 무엇인지를 이들의 학문경향과 연결시키겠다는 것이다.
분당의 원인은 야사(野史)에서 전해지듯, 단순히 서로 간의 사사로운 감정 대립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파와 학파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각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거나 또는 학문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는 주자학에 입각한 유교적 가치관과 도덕규범이 보편화되는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경향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즉 주자학적 사유체계의 정착과 함께 새로운 사유체계의 모색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기가 주자학의 강경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사회․경제의 발전과 시대상황이 변동됨에 따라, 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비(非)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에 대한 지식인들 내부에 이견이 생기는데, 이것이 결국 정치입장과 정치이념의 차이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 학문의 공통분모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이었다. 그러나 학자와 학파에 따라 이기설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달리하고, 궁극적으로 주자학과 비주자학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학문경향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서인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그 중심으로 하였으며, 동인은 이들에서 제외된 다양한 학파의 집합체였다. 동인 내부에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그리고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다. 때문에 이황과 조식 또는 이황과 서경덕의 사상적 차이가 제자들에 이르러 표면화되고, 급기야 중앙정계에서 남인과 북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된다.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인’의 동질성은 더 이상 부각되지 않게 된다.
북인의 학문적 연원이라 할 서경덕과 조식은 기적(氣的) 사유에 기초하여 정치․사회의 운영론을 모색한다. 서경덕은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주희의 입장보다는 소옹(邵雍)과 장재(張載) 등 북송 성리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여 세계의 시원과 운동의 원리를 ‘기’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 세계관을 체계화한다. 이것은 당시 조선학계에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기적인 사유를 종합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이선기후(理先氣後)․이본기말(理本氣末)에 입각하여 ‘리’를 사상의 중심에 세우는 주자학(=이학)과는 그 근본에서부터 성격을 달리하는 사유이다. 이에 바탕하여 서경덕과 그의 후학들은 다양한 형태의 기론적 사유를 수용하는데, 이들이 대부분 소옹의 상수학(象數學)에 밝으며, 노장사상이나 양명학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식의 학문도 서경덕의 학문과 유사한 면모를 지닌다. 그가 노장학을 숭상한다거나 양명학을 수용하였다는 세간의 평가는 ‘기’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사상적 면모를 부각시킨 것이라 하겠다.
북인은 대체로 서경덕과 조식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서울․호남과 경상우도 지역을 근거지로 학문 활동을 펼친다. 이들은 서경덕과 조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들이거나 혹은 재전 제자들이다. 호남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발은 모두 서경덕의 학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발은 서경덕의 학문에 연원을 둔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의 문하에서 배웠고, 부친인 이중호 또한 민순에게서 배웠다. 이발의 친구이자 사돈인 홍가신(洪可臣) 또한 민순의 제자였다. 또한 이발은 조식의 고제인 최영경(崔永慶)과 가장 친하였으며, 직접 최영경과 정여립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이발과 사승관계나 친교를 맺는 인물 중 김근공․민순․홍가신은 서경덕 문인이며, 최영경․김우옹은 조식 문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발은 비록 조식과 직접적인 사승관계에 있지는 않았지만, 조식의 문인들과 학문적 교류가 왕성하다. 이렇듯 이발은 서경덕 문인과 조식 문인과 고르게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이발의 학문이 서경덕과 조식 학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서인들이 정여립 역모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은 북인계의 주요 인물을 처벌하여 그들의 정치력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주자학적 학문경향을 척결하는데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남인들은 서인의 옥사처리를 관망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북인세력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발이 정여립을 이조전랑으로 추천하였을 때, 이황의 문인인 이경중(李敬中)은 정여립의 사람됨을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시킨 일이 그것이다. 예컨대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 역모에 대해, 유성룡 등 남인은 정여립이 일찍부터 ‘훌륭한 선비(善士)’가 아님을 알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반면 정여립을 ‘아름다운 선비(佳士)’로 추대했던 이발․정인홍․정언신․백유양 등 북인은 역모가 조작된 모함이라는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정여립을 둘러싼 학자들 간의 상반된 평가는 남인과 북인 붕당의 중요한 빌미가 된다. 서인들은 정여립을 역모 혐의와 별개로 사상적으로 주자학을 벗어난 이단(異端)적 인물로 평가한다. 또한 남인들도 정여립을 ‘훌륭한 선비’가 아닌 인물로 경시한다. 이처럼 정여립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친화적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마도 조식․서경덕 학파에 비해 이황학파가 이이․성혼학파의 주자학적 정치론을 공유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볼 때, 북인과 서인, 북인과 남인이 서로 대립하는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정여립을 둘러싼 정치적․학문적 견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축옥사에서 북인이 많이 죽은 것은 정여립이 북인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은 북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정여립에 대한 상반된 입장은 단순히 정여립 개인에 대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내포하는 북인의 학문이나 정치사상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인은 학문방법, 정치론, 현실인식 등에서 서인은 물론 남인과도 서로 대비되는 모습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이로써 기축옥사는 북인과 서인뿐만 아니라, 북인과 남인 간의 정치적․학문적 특성을 명확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서경덕․조식의 기론적 사고에 근거한 정여립의 사상과 그 사상에 동조하는 북인은 이이학파의 서인이나 이황학파의 남인과는 달리, 주자학과는 다른 정치성향을 모색한다. 이발의 학문 또한 이러한 ‘기’를 중심으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주자학 이외의 다른 학문까지도 폭넓게 포용하는 비주자학적 학풍을 견지한 북인의 학문적 전통 속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이발은 서경덕․조식의 학풍 속에서 당시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정국의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던 북인의 대표적인 학자요 관료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동암 이발의 학문경향과 정치활동-청신정치의 청산을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심으로-」(김정신, 『호남문화연구』46, 호남학연구원,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