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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숨은 이야기와 홍의장군


임진왜란의 숨은 이야기와 홍의장군

 

본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이웃 나라와 잘 지내는 나라는 드물다. 국외 여행을 다녀보면 각 나라마다 이웃 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닌 국민들은 많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으로 이웃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한 경험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다행이 과거의 역사를 진솔하게 사과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현재 영토 분쟁과 그에 따른 무력 충돌 또는 무역 갈등 등이 있다면 잘 지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이다. 그 갈등의 원인은 일본이 역사적으로 수차례 우리를 침략하였지만 전혀 사과하지 않고, 우리의 영토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며, 역사·인도적 차원의 문제를 두고 되레 무역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갈등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이렇게 침략한 데는 일본인들 자신의 호전성과 정략적 필요에 근거하지만, 당한 우리에게는 외적을 제대로 막지 못한 책임도 따른다. 이와 관련해 임진왜란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조경남(趙慶男 : 1570~1641)의 『난중잡록(亂中雜錄)』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귤광련을 아시나요?
귤광련(橘光連 : ?~1592)은 일명 강광(康光)이라 하는데, 일본식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대마도의 작은 추장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여러 차례 일본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었는데,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1590년 겐소(玄蘇) 등과 함께 조선을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조선 조정에
“일본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일본은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명나라를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는데도, 우리 조정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귤광련이 조선을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에게 요시토시(義智) 등과 함께 전쟁의 선봉을 나누어 맡아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귤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는 뜻을 타인을 통해 알렸다.
“이번 출병에는 무슨 명분이 있는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이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라고 하자, 요시토시가 이 말을 히데요시에게 전하니, 그가 대노하여 귤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듣고 행장을 버리고 이름을 바꾸고 도망가 숨어 살았다. 그 후 1606년 일본 왕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계신(全繼信)과 역관 박희근(朴希根)을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일본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광련의 아들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사신들이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영순(柳永詢)은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광련의 사당을 부산에 건립했다.

동래부사 송상현
우리는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장렬히 순절한 송상현(宋象賢 : 1551~1592)의 이름은 잘 알지만, 전투 전후의 상세한 내막은 잘 모른다. 그 숨은 이야기는 이렇다.
동래성이 왜군에게 포위당하기 전에 송상현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 서매, 크디큰 진영(鎭營)을 구해 내지 못하는구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
라고 손수 써서, 그것을 집 노비에게 주어 그의 부모한테 가서 알리도록 하였다.
전투가 있던 날 새벽 무렵 적병이 대거 진격해 와서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두건을 씌우는 한편, 등에는 붉은 기를 지우고 허리에는 긴 칼을 채워서 그것을 긴 장대 끝에 꽂아 담 사이에 늘어놓았다. 그러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며 울부짖었었다. 왜적은 칼을 휘두르면서 마구 성 안으로 쳐들어 왔고, 이 때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송상현은 남문 성루에 올라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관대를 띠고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왜적은 그가 부사임을 알고 생포하려 하였으나, 송상현이 왜적을 꾸짖기를,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라고 하니, 왜적이 몹시 화를 내면서 그의 목 베려 할 때에도 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사가 남문의 성루에 있을 때 왜적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부사는 그를 쏘아 죽였으며, 뭇 왜적이 난입하자 부사는 장검으로 두 왜적을 쳐 죽이고 죽었다.”
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의 첩은 북쪽 지방의 기생이었는데 그녀 또한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송상현과 함께 죽였다. 왜적은 그들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는 두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성 동문 밖에 묻고 나무패를 세워 표적을 해주었다. 송상현이 죽음을 당할 그때 관노(官奴) 급창(及唱)이 소리쳐 울며 달려 들어가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고 기꺼이 그와 함께 죽으니, 왜적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왜적들도 조선인 포로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 사람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일 장군과 신립 장군
남명 조식과 율곡 이이의 상소문에서는 당시 조선은 정치가 잘못되어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 외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될지 경고하고 있다. 특히 율곡의 상소와 대책을 보면 국방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세히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개혁하지 못했고, 왜란이 생기자 수군과 일부 장수들을 제외한 관군과 그 지휘관들은 성을 비우고 무기를 버린 채 허둥대다가 도망갔고, 백성들은 우왕좌왕 놀라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는 율곡이 예측한 바이기도 하다.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고, 자기 몸을 청렴하게 하여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심지어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희 나라를 방어해서 어쩔 거냐? 20일이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그 말대로 되었다. 왜적이 한강을 건널 때의 일화도 있다. 적병이 대거 진격하여 한강변·광나루·마포·사평·동작 등에서 일시에 뗏목을 타고 마구 건너오자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어떤 아전이 원수(元帥)의 교의(轎椅 : 작은 가마) 밑에 엎드려서 고하기를,
“적병이 강을 건너왔는데 군졸들이 다 흩어졌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라고 재삼 고하여도 전연 대꾸가 없기에 올려다보았더니, 원수는 이미 간 데 없고 다만 빈 상(床)만 있을 뿐이었다.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 하였고, 군사를 전진시켜 동·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혀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것은 선봉으로 온 왜적이었고 대부대의 왜적이 가득 몰려오기까지는 4~5일의 거리가 되었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조선이 건국한지 200년이 지나 폐단이 노출되어 개혁을 못한 정치가들의 책임도 크지만, 장수들의 자질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일(李鎰 : 1538~1601)과 신립(申砬 :1546~1592) 등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활로 북방의 여진족과 용맹스럽게 싸우면서 잔뼈가 굵은 장수였지만, 왜적들과 싸우는 데 있어서 정보와 방책에 어두웠다.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전한다.
순변사(巡邊使)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도 척후(斥候)에 밝지 못했다. 그러자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가 군중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그를 목 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다.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니, 이일이 대패하여 달아났다.
한편 신립은 곧장 달려 충주를 지나 조령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 타고 활쏘기가 불편할 것 같아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옛날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라고 하니, 신립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는 싸움에 져 후퇴한 데다 또 군중이 놀라 떨게 만드니 군법으로는 목 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라고 하고, 마침내 충주의 달천(㺚川)에 주둔하였다.
신립의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이 이일의 말을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라고 말하고,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과 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라고 보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사들을 놀라게 했다고 화를 내어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관군의 정예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김수 그리고 선조
대한민국 중년 이상의 사람치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 1552~1617)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의 전기가 예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이다. 당시 의병장은 대체로 벼슬 없는 선비로서, 자기 집안의 노비들을 거느리고 사재를 털고 주변의 선비들과 장정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모았다. 특히 의병장 가운데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들이 많았는데, 정인홍(鄭仁弘:1536~1623)을 비롯하여 김면(金沔: 1541~1593), 조종도(趙宗道 : 1537~1597) 등이 있으며,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사위였다.
곽재우는 32살 때 별시라는 과거에서 제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선조가 그의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해 합격을 취소시켜버려서, 그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오해는 줄곧 임진왜란 동안 곽재우가 당시 경상도 감사 김수(金晬 : 1537~1615)와 갈등을 일으켰던 일, 그의 활약에 대한 선조의 반응과도 관련이 있을 듯싶다. 현장의 실전 상황과 원칙을 중시하여 불의와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미 때문이다. 이는 이순신도 그랬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 사람으로서 왜란 초기에 그는 여러 성이 연달아 함락되고, 여러 진(鎭)의 주장들과 방백·수령들이 모두 깊은 산으로 도피하여 감히 교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섭게 나무라며 말하기를
“성스러운 조정에서 2백여 년 동안이나 신하들을 길러 왔건만,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두 자신만 보전할 계책이나 찾고 임금의 어려운 형편을 돌보지 않는다. 지금 만약 초야에 묻힌 몸이라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국 3백 고을을 통틀어 남자란 하나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라고 하고, 자기 재산을 전부 털어서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고,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선 병사들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내주어 병사들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또 충의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그의 전술은 대체로 잽싸게 출몰하는 게릴라전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뒤에 말을 빙그르 돌리고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게 하니, 왜적들은 그의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를 몰라서 감히 바싹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는 진을 친 곳으로부터 왜적이 있는 곳에까지 이르는 길의 도보로 대략 40~60분의 거리마다 잇달아 척후소를 두어 이상 유무를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하여, 왜적이 1백 리 밖에 도착해도 진 안에서 그를 먼저 알고 미리 준비할 수 있어서, 언제나 편하고 힘이 들지 않았으며 재주가 뛰어나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왜적이 많이 오면 그들이 바라보이는 산에다 사람들을 시켜 손잡이 하나에 가지가 다섯씩 달린 횃불을 밤새도록 들고서 무서운 함성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게 하여 천병만마(千兵萬馬)가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왜적들은 바라보다가 곧 달아나 버렸다. 또 정예병을 골라 요새에 잠복시키고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게도 하였으니, 왜적 역시 그를 ‘홍의장군’이라 하고 감히 민가를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항상 군사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왜적을 죽이는 것뿐이다. 목을 베어와 공(功)을 요구해서 무엇 하겠느냐? 만약 공의 대가를 받기 위해서 왜적을 토벌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 하는 일이 아니다.”
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좇아 끝내 수급(首級)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이런 곽재우도 모함을 당했다. 순찰사의 진에 있던 무사 김경로(金景老)·김경납(金景納) 등이 곽재우를 모함하자, 곽재우 역시 감사 김수가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일에 분개하여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그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김수가 곽재우를 모반죄로 몰아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는 바람에 그는 앞날을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었다. 곽재우가 모함을 당한 것은 그가 수하의 용사 50여 명을 시켜 의령(宜寧)·초계(草溪)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내고, 또 기강(岐江)에 거둬들인 배의 조세미(租稅米)를 가져다가 모집한 군사들을 먹인 일이다. 그 때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미쳐 발광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천 군수 전현룡(田見龍)도 그를 토적(土賊)이라고 순찰사에게 보고하여 군졸들이 다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김수 등을 성토하자 그가 역심을 품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일은 다행히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의 중재로 마무리되었지만, 그에 대한 선조의 눈길은 곱지 않았고, 훗날 선조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의병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결국 곽재우는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지 못했다. 전란이 끝난 뒤 그는 여러 벼슬을 주자 잠시 나갔지만 그만 두는 등 거기에 큰 뜻을 두지 않았고, 영산 창암(滄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하며 죽을 때가지 가난하게 살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교훈은 나라가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하는지 되묻게 해준다. 그나마 사대부들은 나은 대우를 받았기에 그 일부라도 의병을 일으켰지만, 평소에 하층민으로서 병역과 요역·납세 등의 의무만 졌던 가난한 백성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도 여전히 전쟁이 나면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 묻게 만드는 좋은 사례이다.

남명 조식과 선비의 기상


남명 조식과 선비의 기상

 

라에 원로가 보이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가 예전보다 여러 모로 시끄러운 것은 사실이다. 다양한 정치 세력이 어떤 이슈를 놓고 투쟁·선전·선동하는 탓도 있지만, 직업별·직능별 또는 지역별 단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놓고 주장하고 시위를 벌이는 일이 흔하며, 언론들이 광고료 수입을 위해 자극적인 보도를 일삼는 면도 있고, 게다가 영리를 위해 시선을 끌만한 가짜 뉴스의 생산도 마다하지 않는 개인 미디어가 인터넷을 통해 범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이니까 이런 일들이 당연하다고 여긴 반면, 어떤 이들은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고 개탄한다.
한 술 더 떠 어떤 이는 시국이 어수선할 때 나라의 원로들이 나서서 갈등을 중재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기를 바라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원로가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원로랍시고 무슨 성명서를 내거나 단체 시위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살아온 행적이나 과거 속했던 집단의 성격,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인식 수준을 고려해 보면, 원로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들러리로만 보인다. 그분들의 치우친 주장에 공감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재야에 올곧은 선비 같은 분이 있겠지만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이른바 장사를 위해 이용 가치가 있어야 알아주니, 누가 스스로 ‘내가 원로다!’ 하고 자신을 드러내겠는가? 더구나 군자는 원래 자신의 덕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지만, 스스로 덕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원로를 만나기 어려운 것은 대중의 취향이 모든 일의 기준이 되고, 인터넷 발달로 과거의 작은 실수마저도 낱낱이 까발리는 한국 사회의 풍조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 자체가 더럽고 치욕스럽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적어도 한 개인의 고결하고 떳떳한 삶과 인생을 위해서도 옛 선비의 기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사회나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렇다면 그런 선비의 기상을 누구에게서 찾아 볼 것이며, 또 어떤 일이 참된 선비의 기상이고, 그런 선비의 공부와 삶의 모습은 어떤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융·복합 학문의 선구자
현대는 융·복합 학문이 대세다. 상고대에는 모든 학문과 예술이 종합적으로 미분화되어 있었으나 근대로 올수록 분과 학문으로 분화되었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이 생겨났고, 분과 학문에서도 더 세밀하게 분화되어 자기 분야가 아니면 가까운 이웃 학문에 대해서도 문외한이 되는 깜깜이 학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유학도 원래는 종합적인 학문이었다. 그러다가 특히 송 대 이후 성리학이 등장하면서 도덕과 윤리의 실천과 그 근원을 탐구하는 이론 분야에 치중한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로는 주자성리학이 이념화 되면서 이론 천착에 매달리고, 그 이념의 순수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도학자가 아니라고 여겼다. 가령 율곡 이이 선생이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 : 1501~1572)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에 대해 “문인들이 그를 추앙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고 평가 했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평가에는 선생이 섭렵한 학문과도 관련이 있다. 선생은 생원·진사과의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유교 경전과 『성리대전』을 섭렵하여 유교적 기초를 닦은 것은 물론이요, 옛 문장과 천문·지리·의방(醫方)·수학(數學)·병법(兵法)까지도 익혔으며, 유학자들이 외도(外道)로 여겼던 노자·장자의 서적은 물론이요, 불교의 그것도 섭렵했다고 한다. 선생의 호가 남명(南冥)인 것도 『장자』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말하면 문학·철학·의학·천문학·지리학·수학·군사학 등을 익혔으니, 그의 삶과 가르침은 자연히 이런 것들이 융합되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학문들은 대체로 현실 생활에 당장 필요한 학문이다. 선생이라고 해서 성리학을 모를 리 없었다. 권별(權鼈)이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선생의 이런 말이 실려 있다.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는 것, 이것이 덕에 나아가는 순서인데, 인사는 버리고 천리를 담론하니, 이것은 입으로만 떠드는 이치일 뿐이다.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많이 듣기만 하는 것은 귀 밑의 배움[耳底之學]일 따름이다.”

본 뜻은 인사를 멀리하고 이론에만 천착하는 성리학자들을 비판하며, 인사를 배우는 것도 덕에 나아가는 일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더 추론할 수 있는 점은 의학·천문학·지리학·수학·군사학 등은 인사에 필요한 학문이요, 성리학은 천리를 다룬다는 점이다. 성리학의 기본 전제인 성즉리(性卽理)도 ‘인간이 본성이 곧 천리’라는 뜻이니, 그 천리를 인간의 심성과 도덕적 규범에 적용시킨다. 사실 도덕의 근거를 따지는 일이 인사에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켜주는 인사가 더 급선무였다. 이렇듯 현실 문제는 율곡 선생의 상소문이나 대책 등에도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결국 선생은 학문적으로 개방적인 선비로서 폭넓은 공부를 했다는 뜻이며, 이는 ‘군자는 한 분야만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공자의 정신을 실천했다고 하겠다. 곧 전인적(全人的)이고도 융·복합적 지식을 탐구하는 학자의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실천 중심의 공부와 그 영향
선생이 이렇게 아카데믹한 이론 연구에 천착하지 않은 것은 선생만의 학문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 외에 다른 학문을 섭렵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었지만, 학문이나 공부는 실생활에 직접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부법에 대한 『해동잡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곧 선생의 독서는 장(章)마다 해석하고 구(句)마다 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열 줄 정도 읽어 가다가 자기에게 절실한 곳에 가면 그때는 알고 넘어갔다. 언제나 제자를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도시의 큰 시장에 놀러 가면 금은과 진귀한 보물 등 없는 것이 없다. 종일 거리를 다니면서 그 값을 묻곤 하지만, 그것들은 끝내 자기 집에 소용되는 물건이 아니고 남의 집 물건일 뿐이다. 차라리 내게 쓸모 있는 포목(布木) 한 필이나, 물고기 한 마리를 사오는 것만 못한 것이다. 지금 학자들이 성리학을 소리 높게 떠들고 있지만, 자기에게 얻는 것이 없으니 이것과 다를 게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내게 필요한 것 그것을 얻는 것이 독서의 진정한 목표였다. 이는 지식 자체만을 위한 이론 공부가 아니라 나의 수양과 실천에 당장 필요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과 통한다. 이런 학문 태도는 ‘몸을 닦아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이다. 이렇게 선생이 성리학에 더 이상 천착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완성된 이론으로 수양하여 실천하는 일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또 『해동잡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염락(濂洛 : 주렴계와 정호·정이 등 북송의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를 상징하는 말) 이후로 저술하고 주석한 것이 학문의 단계와 맥락을 환히 나타내기를 해와 별처럼 하여서, 새로 배우는 자들이 책만 펼치면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공부하는 마음가짐이 깊고 얕은 것은 그것을 구하는 성의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정자나 주자 등의 넓고 깊은 학문이 이미 책으로 완성되어 있으므로 따로 이론 탐구에 천착하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정성을 가지고 수양하고 실천하는 것이 후학들의 참된 학문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 그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유학만이 아니라 병법을 익힌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들이 많다. 그 가운데 정인홍(鄭仁弘)은 그의 수제자이고,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곽재우(郭再祐)는 선생의 외손사위이다. 조경남(趙慶男 : 1570~1641)이 지은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정인홍이 전승(戰勝)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서 군공(軍功)은 남의 맨 끝자리에 있었으나, 사실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서 정인홍이 첫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면 선생의 학문이 얼마나 실천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또 선생의 제자 가운데 최영경(崔永慶)이란 분이 있는데, 『석담일기』에는 최영경이 전에 선생을 좇아 배웠고 청렴하고 절개가 세상에 뛰어나서 의가 아니면 한 터럭만큼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더니 부모가 돌아가자 가산을 모두 기울여 장사지내니 마침내 곤궁하여졌다. 집을 성안에 두었으나 친구를 사귀지 아니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 있는 선비라 할 뿐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선생의 제자라고 해서 모두 이런 것은 아니지만, 문하에 선생의 가르침을 이렇게 몸소 실천하는 제자들이 많았다.
이렇게 벼슬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산다고 해서 국가나 사회의 현실과 무관하게 유유자적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의 상소와 각종 기록에는 관리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말들이 많다. 『해동잡록』에는 언제나 선비들과 이야기하다가 대화가 정치의 잘못과 민생의 곤궁함에 이르면, 주먹을 불끈 쥐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꿋꿋한 선비의 기상
선생은 그 누구에게도 비굴하지 않는 꿋꿋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모습은 『석담일기』에서 선생은 성품이 청렴하고 꿋꿋하였으며, 주고받는 것을 반드시 의(義)로써 하여 구차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 『해동잡록』에는 기량이 크고 태도와 행실에는 과단성 있고 확실하였다고 말하고, 친구를 사귀는 데도 반듯하여 친구로 삼지 못할 사람이면, 설사 벼슬이 높고 귀한 사람이라도 시궁창 보듯 하여 그와 마주대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였고, 이 때문에 교제가 넓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집에 있을 때도 엄격하여 집의 아랫사람들이나 시중드는 자들도 머리카락을 묶지 않거나 더벅머리를 단정하게 하지 않으면 선생이 무서워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남의 나쁜 일을 들으면 혹시나 한 번이라도 만날까 두려워하여 마치 원수를 피하듯 하였고, 눈은 음란한 것을 보지 않고 귀는 엿듣지 않으며,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항상 마음에 있어서 게으른 빛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런 성격과 태도는 물론 타고난 성품일 수도 있겠지만, 수양이 없었다면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면 선생은 아랫사람에게만 이렇게 대했느냐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선생의 유명한 「단성소」라는 상소가 있는데, 『석담일기』에는 이렇게 소개한다. 곧 선생이 벼슬에 뜻이 없어 상소로 사직하고 동시에 나라의 폐단을 말하였는데, 그 글에는
“자전(慈殿 : 임금의 어머니)께서 사리 깊고 착실하시나 단지 깊은 대궐 안의 한 과부에 불과하시고 전하께서는 나이가 어려서 선왕의 한 외로운 상속자에 불과하시다.”
라고 말고, 또
“노래는 처량하고 의복은 희니 나라가 망할 징조가 드러났다.”
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명종은 욕이 대비께 미쳤다고 하여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래도 산림처사로 대우하여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이 상소에는 심한 말은 더 있다. 이것으로보다 윗사람에게도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과격하게 보일 정도로 직언(直言)하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해동잡록』에 선생이 직접
“내가 평생에 단 하나 장점이 있는 것은 죽어도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 않는 일이다.”
라고 한 말에서도 보이지만, 이 말의 핵심은 남을 따르지 않는 일보다 ‘구차하지 않다’는 데 있다. 곧 지위나 이익이나 명예 또는 권세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뜻과 통한다. 선생의 ‘구차하지 않다’는 말은 『석담일기』에도 보인다.
이렇듯 선생이 보인 불굴의 선비다운 기상과 학문은 유교적 도통(道統 : 도가 전해지는 계통)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적이고, 청렴하고 과단성이 있고 자신에 대해 엄격하며, 세상을 감시하는 비판정신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산림처사와 현실 참여
선생이 살았을 16세기 조선은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와 앞선 시대부터 점점 성장하기 시작한 사림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사화(士禍)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던 시기였다. 이 싸움에서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며 훈구파가 승리하는 결말로 이어졌다. 오늘날도 그렇듯이 경제적·정치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묘사화 때는 선생의 숙부 조언경이 화를 당하고 부친도 좌천되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선생은 평생 벼슬길에 나아지 않았다.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오로지 수양하며 제자를 기르는데 전념하였다. 이런 모습은 『석담일기』에도 보이는데, 선생이 직접
“후세 사람들이 나를 처사(處士)라 하면 옳지만 만일 유자(儒者)로 지목한다면 실상이 아니다.”
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선생이 스스로 유학자가 아니라고 한 점은 겸사(謙辭)인지 아니면 속된 유학자를 비판하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처사로 대우받기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에 퇴계 선생도 임종하기 직전의 유언에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계와 도산에서 만년에 은거한 진성이공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 하였다. 남명 조식이 이것을 듣고 씩 웃으며 말하기를,
“퇴계는 이 칭호에 마땅하지 못하다. 나 같은 이도 은사(隱士)라 칭하는 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
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선생이 은사 곧 처사로 자처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그것도 감당키 어려운 일로 여겼다.
흔히 처사라고 하면 초야에 묻혀 살며 세상일에 무관심안 은둔형 선비를 일컫지만, 선생의 예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은 초야에 있어도 마음은 조정과 세상에 있었다. 마음이 조정에 있었다는 것은 관직에 연연했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 정치를 비판하며 그것이 백성을 살리는 올바른 것이 되기를 바랐다는 뜻이다. 그렇게 세상의 일에 근심했다는 의미에서 ‘은사(隱士)라 칭하는 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선생이 유학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말 가운데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치인’을 소홀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선생은 정치 비판과 제자 양성을 통해 현실 에 분명히 관여하고 있었다.
사실 선생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벼슬이 싫어서가 아니다. 왕의 외척과 훈구파 대신들이 자신들의 정권을 정당화하고 선전하기 위하여, 실권이 없는 직책이나 허명(虛名)으로서 산림의 선비들을 유혹하고 농락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직에 나아 가 보았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군사 독재 시절 그런 인사들이 좀 많았던가? 국무총리니 무슨 자문위원장 자리를 주면 얼씨구나 덥석 받았다가, 실제로는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얼굴마담’ 노릇만 한 자가 그 얼마였던가? 그래서 선생은 실속 없는 헛된 명성에 이름을 팔지 않았다. 선비의 지조를 지켰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의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원칙 곧 출처관(出處觀)은 뚜렷했다. 올곧은 선비라면 이래야 한다. 이런 모습은 훗날 조선 사회에서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벼슬을 주는 산림 출신을 숭상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큰 유학자로 추앙받았던 송시열(宋時烈)과 허목(許穆)도 이런 산림 출신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두 분은 신도비(神道碑)를 써서 선생을 추앙했고, 과거 출신보다 산림을 더 높이는 기풍을 만들었다.
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라는 두 글자로 집약되고, 이 글자를 그가 소지했던 칼에 새기고, 만년에 제자를 가르쳤다는 산천재(山天齋)의 창 좌우에 ‘경’자와 ‘의’자를 적어 두었다고 하는데, “안으로 밝은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단성 있는 것의 의이다.”라고 풀이했다고 한다. 곧 경은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내적 수양을 뜻하는 말이요, 의는 밖으로 만사에 대처하는 과단성 있는 태도를 말한다. 이 또한 수기치인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에는 참다운 선비로서 원로가 있는가? 없다면 왜 없는가?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상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야 따돌림 당하지 않고 출세하고 먹고 살아남기 때문이다. 허나 그 옛날에도 꿋꿋한 선비가 되려면 처음엔 가난과 냉대를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선비를 더욱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가 세상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퇴계의 노년과 매화 사랑


퇴계의 노년과 매화 사랑

 

세 시대의 노인 폄하

한 사람의 노년을 보면 그의 인생이 더 잘 보인다. 젊은이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살 날보다 살아 온 날이 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요즘은 평균 수명이 늘어나 옛날 기준으로 보면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다.
정상적으로 오래 살다보면 나름의 지혜가 생기기 마련인데, ‘세상에는 다 좋은 것도 없고, 다 나쁜 것도 없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등에 보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 1501~1570)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 스스로 지었다는 묘갈명(墓碣銘)에 “걱정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가운데 걱정 있다.”는 표현도 그런 종류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이 늙어서 새롭게 깨닫는 지혜도 없고 판단력이 흐려질 때는, 국가와 가족에게 누를 끼치고 사회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젊었을 때 사회적으로 명망과 영향력이 있었더라도, 배움에 더 이상 진보가 없어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옛 생각만 가지고 이리저리 길 때 안 낄 때 나대면서 사회적 이슈마다 참견하고 나무란다면, 젊은이들이 노인 공경은 고사하고 노인 모두를 ‘꼰대’로 매도하는 장본인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세상에 대한 인식과 문제해결 능력이 젊은이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다면, 죽은 듯이 조용히 수양하며 덕을 쌓는 게 좋다. 노인들이 천대받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노인 자신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 알아서 ‘뒷방 늙은이’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존경받는 삶을 모색하자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이미 천덕꾸러기가 되어 백세를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선생은 고명한 대학자이자 선비로서 훌륭한 가르침과 학술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그것들을 밝혀내었고 또 현재에도 계속 연구하고 있어서, 이 글에서 새삼스럽게 그걸 소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요즘 세상을 보면 경로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노인이 되레 폄훼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척 안타까워서, 선생의 삶 가운데 은퇴 후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찾아볼까 한다.
여기서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경제·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다 살펴 볼 수 있는 필자의 역량과 지면이 허락지 않는다. 단지 노후의 품격 있는 삶을 위하여 노인 자신의 수양과 관련지어 선생의 삶에서 몇 가지 가르침을 찾고자 한다.

벼슬 자체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선생은 조금 자라서 말과 행동이 반드시 예법에 맞았고 더욱 돈독하게어버이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닭이 울면 반드시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의대를 갖추고 모부인을 살폈는데, 말소리는 부드러웠고 나지막하였으며 상냥스럽고 기쁜 안색으로 저녁에 어머니를 위해 잠자리를 보아 드릴 때까지 이와 같이 하였다. 잠자리를 펴고 이부자리를 개 드리는 일도 반드시 몸소 하였다고 전한다.
선생은 태어난 그 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어머니 박씨 부인은 늘 아이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부의 자식은 교육이 없다고 비웃는데, 너희들이 글공부를 백배로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비웃음거리를 면할 수 있겠느냐고 늘 훈계를 했고,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해서 자식들을 길러냈다고 한다. 선생의 평생 학문과 몸가짐은 어머니의 이런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선생은 어머니와 형제의 기대에 부응하여 가문을 일으켜야 할 책임감도 크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여타 사대부 가문의 자녀들처럼 일찍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여섯 살 때 이웃집 노인에게서 『천자문』과 『소학』 등 기초적 교육을 받고, 열두 살 때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웠다고 한다. 숙부는 가끔씩 선생의 총명함을 두고
“가문을 유지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라고 칭찬했으니, 그의 책임감을 더욱 부채질 했을 것이다.
선생은 34살 때 비로소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것도 27살 때 형님과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가정 형편상 할 수 없이 경상도 향시(鄕試)에 응시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로부터 12~13년 동안에는 비록 한두 번 물러난 적이 있었지만 줄곧 관리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49살 때부터 벼슬에 큰 뜻이 없어 항상 물러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선생을 놓아주지 않았다. 70살이 될 때까지 사직하고 관직에 나아가는 일이 거의 21여 년 동안 반복되었다. 그 기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5회였고, 벼슬한 기간은 약 5년 남짓인데, 해당 기간의 약25%에 해당한다. 사실상 이 시기는 은퇴 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사직 의사를 밝혀도 허락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니, 그 사이 총53회의 사직의 글을 올렸다고 한다.
또 선생은 벼슬이 높아질수록 사직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정3품 이상의 벼슬은 하나도 받아들인 적이 없다고 한다. 보통의 관리들은 품계가 높아지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그에 따른 권력이 따르고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보아 선생은 벼슬을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한 도구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정통성이 없는 반민족적 독재 정권이라도 불러만 주면 달려가는 것은 물론이요, 불러달라고 아첨하거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소인배들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다.
선생이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사직하려는 데는 명종 대의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 등의 외척들이 주도하는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정권과 일종의 거리두기라 하겠다. 정3품 이상의 벼슬은 더욱 정권 실세와 가까이 가는 길이기에 경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면 될 터인데, 왜 사직과 출사를 반복하는가라는 혹자의 비판이 가능하다. 그에 대한 선생의 변명이랄까 입장이 보이는 글이 있다. 52살 때 남명(南明) 조식(曺植 : 1501~1571)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셨기 때문에 억지로 과거를 보아 이득과 녹봉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가문과 경제적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비록 그러하였지만 정3품 이상의 벼슬을 사양하고, 또 49살 이후에는 관직을 떠나려고 한 것을 보면, 관직을 통해 출세와 권력을 탐할 생각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맹자(孟子)도 부모 봉양과 처자 부양을 위해서는 임금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문지기나 야경꾼 정도의 하찮은 벼슬은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당시의 사대부는 벼슬하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여기자. 반면 궁핍을 견디며 제자 양성과 학문에만 종사한 선비들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하자. 현실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사퇴와 복직을 반복한 데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이 점은 뒤에서 논의하기로 하자. 대신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관직에서 물러나는 일과 머무르는 문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이 : (이황을 뵙고) 어린 임금이 처음 자리에 오르시고 국정 현안에 어려움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선생께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황 : 도리상 물러날 수 없지만 내 몸을 생각해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소. 몸에 병도 많고 일을 감당할 능력도 없소.
혹자 : (이이를 보고) 성혼(成渾)에게 참봉(參奉)을 시켰는데 왜 나오지 않소?
이이 : 성혼은 병이 많아 관직에 종사하지 못하오. 만약 강제로 벼슬을 주면 그를 괴롭히는 것이오.
이황 : (이이를 보고) 그대는 성혼은 후하게 대접하면서 나에게는 어찌 그리 박하게 대접하오?
이이 :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개인의 입장을 봐 줄 여지가 없습니다. 성혼이 낮은 벼슬에 분주해 봤자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유교 경전 등을 강의하는 일)에 계신다면 나라에 이익이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한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 : 벼슬은 참으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약 남에게 이로움이 없고 자신에게 병통이 절실하면 할 수 없는 것이오.
이이 : 선생이 조정에 계시면서 설령 아무런 계책이 없다 하더라도 임금께서 중하게 생각하여 의지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쁘게 힘이 되니, 이 또한 남에게 이익이 됩니다.
이황은 이이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황의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 사람들이 대유(大儒)로 지목하고 어린 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룩하기 바랐으나, 스스로 경세제민(經世濟民 :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의 재주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오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 기록은 선조1년 곧 선생의 나이 68세 때 8개월 동안 재직할 당시이다. 선생은 몸에 병이 있고 능력이 없어 나라에 보탬이 없다고 떠나려고 하고, 율곡은 경연을 통해서라도 보탬이 있다고 만류하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관직을 사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대체로 선생이 병과 노쇠함과 능력 부족으로 인한 직책 감당의 부당성 등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렇다고 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정치력의 한계와 학문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특히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는 점에 설득력이 있는데, 학문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저작이 대체로 50세 이후에 나오고, 특히 기대승(奇大升)과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이 50대 후반에 있었고, 「성학십도」는 68세 때 지었다.

고요하고 겸손한 성품
선생이 늦은 나이에도 제자 양성과 저술을 왕성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학문에 대한 열정, 곧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배움이란 주로 성현들이 남긴 서적을 읽는 것이지만, 제자를 가르치거나 그들과 논쟁하거나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듯이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면서도 배우게 된다. 그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해야 하고 때로는 토론하는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한 것을 제자를 통해 깨닫게 된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은 대개가 그렇다.
이렇듯 제자나 동료들을 통해 배우려면 겸손해야 한다. 권위를 내세우거나 우기면 배우지 못한다. 기대승과의 사단칠정을 논쟁할 때도 상대를 존중하며 혹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인정하여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런 예는 윤두수(尹斗壽 : 1533~1601)가 지은 『오음잡설(梧陰雜說)』에도 인다. 인종의 비 박씨가 편찮을 때 선생은
“예법에 형수[嫂]와 시숙[叔] 사이에는 상복이 없으니, 상감께서는 복을 입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다.”
라고 했다가, 얼마 뒤 기대승이
“인종께서는 한 나라의 임금이셨는데 지금 상감께서 자연히 왕위를 계승하는 상복이 있는데, 어찌하여 형수의 예법을 인용할 수 있겠소?”
라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명언(明彦 : 기대승의 자)의 말이 옳다. 내가 잘못 대답하였으니, 나의 죄를 면할 수 없다.”
고 했다고 전한다. 선생은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으면 금방 인정하였다. 사실 사람은 이래야 발전한다. 특히 남의 윗사람이거나 노인일수록 이래야 한다. 그들은 대개 자신보다 어리거나 아랫사람의 의견을 좀처럼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성품이 고요하고 온화하여 남에게 모질게 대할 줄 몰랐던 것 같다.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과거시험을 볼 수밖에 없었던 일도 그렇지만, 윤근수(尹根壽 : 1537~1616)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임형수(林亨秀)라는 사람은 동료들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있어, 아무리 선배일지라도 모두 버릇없는 말을 퍼부었지만, 오직 퇴계에 대해서는 존경하면서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 『오음잡설』에 선생이 서울에 올라왔을 때 대문에 대기자가 있을 정도로 찾아오는 손님이 너무 많아 조금도 틈이 없었는데, 나중에 영의정을 찾아 갔다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묻자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시간이 없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선생에게 찾아 와 봤자 청탁할 건더기도 없는데 왜 모여들었을까? 그것은 선생의 인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 『석담일기』에는 을사사화 때 이기(李芑)가 퇴계의 명성을 꺼려 임금에게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니,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기가 다시 아뢰어 복작(復爵)시켰다는 간단한 기록만 있다. 그 내막은 이중열(李中悅 : 1518~1547)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 자세하다. 곧 이기의 조카 이원록(李元祿)이 원래 선생을 중히 여겨, 이기에게 힘써 간하기를,
“이 아무개는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어, 시속(時俗)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라고 하였으며, 윤원형·이기와 함께 을사사화를 주도했던 임백령(林百齡)도 이기에게 선생의 무고를 주장하였다고 전한다. 이로 보면 선생이 평소 욕심이 없었고 남에게 모질거나 모나지 않게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매화를 유달리 좋아하다
선생이 고요한 성품은 시끄러운 도시보다 산수가 좋은 전원생활을 좋아하고, 매화를 유달리 좋아하는 취향으로 드러난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선생은 매화를 유달리 좋아해서 매화 시첩 한질이 있다고 하였고, 운명하는 그날 아침에도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매화처럼 고고하게 군자의 향을 풍기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선비들이 좋아하는 대상이다. 『해동잡록』에 실려 있는 「도산기」에 따르면 도산서당을 지을 당시 몽천(蒙泉)이란 샘을 만들고, 샘 위의 산기슭을 따서 추녀와 맞대고 평평하게 단(壇)을 쌓고, 그 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는 매화의 고고하고 맑은 향기를 좋아하여 이렇게 매화를 심어 놓고 그와 관련된 많은 시를 남겼다.
그런데 임종 당시 물을 주라는 매화의 출처는 어디서 왔을까? 다른 기록에 의하면 선조 초년에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서 8개월 동안 살았던 때 소유했던 것인데, 훗날 이것을 선생의 문인이 선생의 손자 이안도(李安道)를 통해 배에 실어 가져왔다고 한다. 이 때 그것을 가져온 것이 기뻐서 남긴 시도 있다.
단양 지방에 떠도는 설화와 문학 작품 속에 선생과 기녀 두향(杜香)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두향도 매화를 좋아했고 훗날 선생과의 이별이 아쉬워 매화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가 선생 48세 때이니 그 때부터 매화를 좋아했는지 알 수 없으나, 만년까지 그의 매화 사랑은 각별했다.
사실 매화는 선생이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도산기」를 읽어보면, 도산서당을 자리 잡고 꾸미는 것을 마치 신선이 사는 것처럼 했는데, 그만큼 자연과 산수를 좋아했다는 뜻이다. 선생이 이처럼 전원생활과 산수를 좋아 한 것은 몸의 병에 좋기도 했지만, 도의를 즐기며 심성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한다. 몸을 더럽힐까봐 속세를 등지고 세상을 초월하여 신비한 무엇을 찾는 도가(道家)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혹자는 심성의 수양을 위해 마음속에서만 깨달음을 얻고 바깥 사물에 기대지 않는다고 하면서,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처럼 누추한 빈민가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 될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그것은 그의 형편이 그랬던 것이고, 그 때문에 거기에 맞게 즐겁게 여긴 것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도 좋은 산수를 만났더라면 그 즐거워함이 어찌 우리들보다 깊지 않았겠냐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자나 맹자도 일찍이 산수를 자주 칭찬하였고 아주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현대의 노인들은 건강 상태도 좋아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일도 한다. 다만 외물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본심을 잃는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방심하다간 추한 노탐에 빠진다. 비록 세상이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 굴러가지 않더라도 자신의 인식과 판단에 문제가 없는지 반성하며, 올곧은 젊은이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행여 세상을 바른 데로 이끌 능력이라도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을 수양하고 채찍질 하여 후세와 자연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나마 남으로부터 공경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욕이라도 덜 먹는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

 

도삼절

민간에 널리 전해진 ‘송도삼절(松都三絶)’에는 서화담·박연폭포·황진이가 있는데, 사실 이것은 황진이 자신이 꼽았다고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30년 동안 수도했다는 개성의 유명한 고승 지족선사(知足禪師)는 그녀의 유혹에 넘어 왔지만,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 1489~1546)은 온갖 유혹에도 넘어오지 않았다나? 사실 황진이는 그렇게 얄궂은 인물은 아닌 것 같다. 나름의 고결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전래동화나 설화에 보면 화담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 도술(道術)을 부려 시집가려는 신부를 호랑이로부터 살려 준 이야기, 지리산에 올라 신선과 서로 대화하는 기록 등이 있다. 모두 선생의 행적과 관계있다.
과연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대동야승(大東野乘)』 속의 기록을 더듬으면, 그에 대한 면모를 어느 정도 자세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벼슬도 마다한 궁핍한 삶
조선 중기 이덕형(李德馨 : 1561~1613)이 기록한 『송도기이(松都記異)』를 보면 서경덕은 송도(松都 : 개성) 사람으로 여러 대에 걸쳐 가문이 변변치 못하여 집이 본래 가난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덕을 숨기고 곤궁함을 편안히 여겼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다 그를 공경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일찍이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으며, 그는 태어날 때부터 영리해서 보통 아이와는 크게 달랐고, 자라면서 스스로 글 읽는 것을 알아 눈 가는대로 금방 외었으며, 넓게 책을 보고 많이 기억했다고 전한다. 차천로(車天輅 : 1556 ~ 1615. 그의 부친 車軾이 선생의 문인)가 쓴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는 양식이 자주 떨어졌고, 항상 담식(淡食 : 채소 위주의 소박한 상차림)을 하였고, 누가 어쩌다 고기나 생선을 보내와도 먹지 않았으나, 다만 말린 밴댕이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의 자질에 대해 신흠(申欽 : 1566~1628)이 쓴 『상촌잡록象村雜錄』에는 선생의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났으며 시골에서 태어나 스스로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고, 중국에 태어나서 큰 학자나 스승에게서 교육을 받았다면, 그 높고 명철함이 지금의 조예에 그칠 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조선 중기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면 선생의 삶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보인다. 허봉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의 형이고, 그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선생의 문인이다. 그러니까 허봉의 이 기록도 앞의 차천로의 그것과 함께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앞의 이덕형의 기록처럼 집이 가난하여 때로는 며칠 동안 밥을 짓지 못하여서, 안자(顔子)의 가난에 비교할 정도로 항상 태연하였다고 한다. 안자는 공자의 수제자로서 가난하여도 학문의 즐거움을 잊지 않았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주인공이다.
게다가 율곡 이이(李珥)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그가 전혀 생업에 몰두 하지 않아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굶주림을 참았고, 남들은 이것을 견딜 수 없었으나 그는 태연히 지나곤 하였으며, 그 문하생 강문우(姜文佑)가 쌀을 지고 부엌으로 가 그 집 사람에게 물으니, 어제부터 양식이 없어 불을 못 피웠다고 전한다.
현대 문화와 생활 속에서 생업에 힘쓰지 않아 가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가장은 학문은 고사하고 대의를 위해 싸우더라도 가정적으로나 사회적 평판으로부터 결코 환영받을 일이 못되고, 혹 그런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가정을 갖지 않도록 권하는데, 그래도 당시는 사회나 문화적 풍토가 학문이나 그 밖의 무엇을 위해 뜻을 이루려는 선비의 이런 행태를 용인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어려워도 그는 호구지책만을 위해서라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앞의 이이의 말에 따르면 젊어서 과거의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곧 뜻을 버리고 화담에 집을 짓고, 오로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일삼아 어떤 때는 여러 날을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이덕형의 기록에서도 선생은 처음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태학(太學)에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가난하지만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까닭이 무엇일까? 퇴계나 율곡처럼 벼슬하면서 학문을 이룬 사람들도 있지만,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한 특별한 이유나 시대적 배경이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경우도 그렇지만, 그의 시대에는 이전 시대부터 이어진 사화(士禍)가 있어서 뜻있는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아가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고, 또 그런 식으로 정치 투쟁에서 승리한 인물들이 정권을 잡은 조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발을 들여 놓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참여하는 것이 치욕이 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처럼 나름의 출처관(出處觀 : 벼슬길에 나가고 물러나는 대 대한 어떤 원칙)이 뚜렷했다고 하겠다.

사물 탐구를 학문의 출발로 삼다
선생이 학문을 시작한 일에 대해 허봉의 기록에는 그가 총명하고 강하며 굳세어,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었고, 18세에 처음으로 『대학』을 배웠는데, 문을 닫고 꿇어앉아 오로지 사물의 이치 탐구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대학’이란 학교 이름이면서 동시에 책 이름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태학(太學)과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이나 성균관(成均館)이니 하는 것이 대학으로 해당 국가의 최고 교육 기관이다. 물론 그 연원은 고대 중국의 제도에서 비롯한다. 그 대학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 유교 경전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대학』이다.
『대학』에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라는 8가지 실천해야 할 일이 등장하는데, 그 맨 앞에 등장하는 것이 격물이다. 격물이란 쉽게 말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행위이다. 그것을 통해 앎을 이루는 것이 치지(致知)이다. 보통 ‘격치’ 곧 ‘격물치지’라 함은 바로 사물을 연구하여 앎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훗날 개화기 때 서양의 자연 과학을 수입하면서 ‘격치학(格致學)’이라고도 불렀는데,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아무튼 『대학』 공부는 ‘격치’부터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다. 허봉의 말에 따르면 그는 사물의 이치를 연구할 때에, 그 이름을 일일이 적어 벽에 붙이고, 차례로 연구한 뒤에 그 사물을 해설하였다고 한다. 한 물건을 생각하다가 끝내지 못한 채 화장실이라도 가면 거기서도 마음을 다하여 생각하고 멈추지 아니하고 한참 뒤에 그대로 일어났다고 전한다. 게다가 3년 동안 힘들게 공부하여, 여러 날 동안이나 낮에는 식사를 잊고 밤에는 자는 것을 잊으며, 문을 닫고 판자 위에 꿇어앉아서 깔고 덮지도 아니하다가, 몸의 기혈(氣血)이 막혀 통하지 않아서 소리를 들을 적마다 놀라게 되었다고 한다.
또 『석담일기』에는 선생이 연구할 때 하늘의 이치를 알려면 ‘天’ 자를 벽에다 써놓고 궁리한 뒤에는 다시 다른 글자를 써두고 궁리하였으며, 그 세밀한 생각과 힘찬 연구는 남이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러 해가 지나니 도리가 환하게 밝아졌고, 그의 학문은 독서에만 전념하지 않고 오로지 생각으로만 탐색하다가 이치를 안 뒤에 다시 독서하여 이것을 증명하였다. 선생은 언제나
“내가 스승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힘과 노력을 깊이 쏟아야 하였다. 뒷사람들이 내 말에 의지한다면 힘과 노력을 나같이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선생은 특별한 스승 없이 스스로 연구하며 독서하여 자신의 학문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18세에 『대학』을 읽기 시작했으니 보통의 선비들보다 상당히 늦은 때였다. 그러나 늦다고 학문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늦게 시작해도 탐구하는 열의가 있고 사고하는 훈련이 되어 있으면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당시 큰 스승으로 알려진 이황·조식·이이 등이 대체로 이름 있는 스승 없이 공부했다는 점이다. 특별한 스승의 학문을 답습하거나 모방하는 것보다 더 자유로운 입장에서 학문을 닦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창의성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오래 뒤에 유교 경전을 취하여 읽는데, 마음속으로 깨달음이 있고 이에 더욱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자신의 공부를 성리학으로 자임하였고 더욱 『주역(周易)』에 연구가 깊었으므로, 제자가 되어 배우기를 구하는 자가 문에 끊어지지 않았다고 허봉은 전한다.

문하생이 된 황진이
세인들이 선생을 말할 때 실과 바늘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황진이(黃眞伊)이다. 이참에 그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오해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겠다. 이 기록은 『송도기이』에 보이는데, 기록자는 황진이의 친척이 되는 80세 노인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그는 생전에 그녀를 볼 수 있었으므로 세간에 떠도는 소문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는 기록일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황진이는 송도의 기생으로 그의 어머니 현금(玄琴)이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노래도 아주 잘 했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녀라고 불렀다. 진이가 비록 기생으로 있기는 했지만 성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비록 관청의 술자리가 있더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잡배들에게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다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문자를 꽤 많이 알아서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 뵈니, 선생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했다. 어찌 절세의 명기(名妓)가 아니랴?”

이상은 이덕형이 황진이에 대해서 들은 기록의 요약이다. 내용을 보면 황진이는 비록 직업상 기생이기는 해도 몸가짐이 단아했음을 알 수 있다. 화장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하게 치장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테고 그렇게 하려면 돈 많은 사내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 게다가 수령이나 관리들이 막무가내로 수청을 들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던 것을 보면, 그녀는 관기(官妓)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를 보면 황진이는 잔치나 모임에 흥을 돋우는 품격 있는 연예인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세간의 풍문처럼 황진이가 정말로 선생을 유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흠모하여 문하생으로서 배움을 청했고 선생도 그것을 허락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하찮은 기생이라면 이런 재미없고 꼿꼿한 도학자를 흠모할 까닭이 없다.
선생은 관작이나 녹봉을 탐하여 마음에도 없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황진이의 예를 보아도 여색을 탐하지 않은 성품을 알 수 있다. 만약 황진이가 값싼 기생이었다면 제자로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인품은 남달랐다고 전한다. 또 『송도기이』에 보면 황해도 관찰사 가운데 화담 선생과 서로 아는 자가 있었는데, 선생에게 한 번 들르기를 청하므로 선생이 손님이 되어 갔다고 한다. 관찰사는 사우(師友 :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의 예법으로 대접하였다.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즐겼는데 선생이 취한 뒤에 일어나 춤을 추니, 사람들이 신선으로 여겼다. 하루를 지내고 즉시 돌아오는데, 관찰사가 많은 노자와 종이와 붓을 드렸으나, 선생은 모두 받지 않고 단지 쌀 다섯 되만 받았을 뿐이라고 전한다. 선생은 비록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는 것을 사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기록에
“퇴계 선생의 문집에 ‘서화담이 만월대(滿月臺)에 올라갔는데 어떤 손님이 율무로 쑨 죽을 올렸더니, 화담은 이것을 마시고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일찍이 의아하게 여겼다.”
라는 말이 보인다. 이덕형은 선생이 율무죽을 먹고 춤을 춘 것이 생뚱맞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비교적 신빙성이 있는 허봉의 기록에는
“화담은 산수가 좋은 곳을 만나면 문득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라고 하여, 바로 여기서 춤을 춘 까닭을 알 수 있다. 죽 때문이 아니라 만월대의 경치에 취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좋은 산수를 보고 춤을 춘다는 것은 천성의 적극적 발로이다. 좋은 산수를 보면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던가?

조선 기론의 선구자
앞의 『대학』의 격물을 놓고 사물을 탐구했다는 점은 경전에 천착하기보다 실제 사물에서 이치를 찾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점은 그의 학문의 출발이 무엇이며 앞으로 그의 학문의 방향을 암시하는 사례가 된다. 차천로가 쓴 『오산설림초고』에 나무를 깎아 선기옥형(璿璣玉衡 : 천문 관측기구)을 만들었다는 일이나, 『석담일기』에서 임금이 서경덕의 저서를 보고
“기수(氣數 : 사물이 변화하는 주기 또는 절기)를 논의한 것이 많고 수신(修身)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수리학(數理學 : 수로서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닌가? 그리고 그 공부가 의심나는 데가 많다.”
라고 평가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학문의 출발은 유교 경전을 통해 윤리적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생이 순수한 성리학자인지 의심하는 기록들이 있다. 가령 『석담일기』에 중종 말년에 서경덕이 도학(道學)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그의 이론에 기를 리라고 여긴 것이 많아서 이황이 이것을 병통으로 여겨 글로써 옳고 그름을 가려 반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홍명(鄭弘溟 : 1582~1650, 鄭澈의 아들)의 『기옹만필(畸翁漫筆)』에 율곡 선생이 화담 서경덕의 학문에 대해 말할 때에는 기를 리로 아는 병폐가 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들을 종합해보면 선생의 학문이 정통 성리학에서 약간 벗어나는 기 중심의 학문이라 하겠다. 어찌 보면 퇴계 이황의 학문도 정통 성리학에서 보면 지나치게 리 중심의 학문이라 평가되는데, 이는 각자의 학문과 상대방의 그것 사이의 차이점을 두고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어떤 학문을 두고 정통 따위의 시비를 가리는 것이 해당 학자의 독창성을 말살하는 우스운 일이겠으나, 성리학을 이념의 도구로 삼았던 조선 시대나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두자.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유학자로서 그의 명성에 흠이 될지 몰라 선생의 문인 또는 그 후인이 기록한 자료, 가령 『오산설림초고』에는 선생이 저자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학문에 유(儒)가 가장 어렵고, 불(佛)이 다음이고, 선(仙)이 가장 아래이다.”
라는 글이 보이고, 또 이덕형의 글에도 선생이 지리산에 갔을 때 어떤 신선을 만나
“신선 황백(黃白)의 술법은 비록 혹 전하지만, 유자(儒者)는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공자를 배우는 자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어쨌든 선생은 유학자이고 성리학에서 말하는 윤리적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조선철학사에서 기론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전개한 인물임은 확실하다.

서경덕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인가?
선생이 오늘날 우리에게 학문적 관심 이외에 던지는 메시지가 또 있을까? 더구나 전통 학문으로서 성리학이나 기론은 이제 더 이상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그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빛을 던지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선생의 삶을 단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시가 하나 있다. 『상촌잡록』에 보인다.

글 읽던 당일에 나라 경륜에 뜻을 두었지만(讀書當日志經綸)
늘그막에 되레 안씨(顔氏 : 공자의 제자)의 가난을 달게 여기네(歲暮還甘顔氏貧)
부귀에는 다툼이 있어 손을 대기 어렵고(富貴有爭難下手)
산림에 숨어 사는 일이야 금하지 않으니 편안할 수 있네(林泉無禁可安身)
나물 캐고 낚시하여 배 채울 만 하고(採山釣水堪充腹)
달과 바람을 노래하면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데 족하다(詠月吟風足暢神)
학문이란 변절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참으로 쾌활하니(學到不移眞快活)
백년을 헛되게 사는 인생을 면하리라(免敎虛作百年人)

백 년을 살까말까 한 우리 인생이 어디에 힘써야 할까? 아무리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고는 하지만, 후회 없이 살려면 나름의 가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부귀영화와 권세는 배우지 않아도 경쟁하며 찾지만, 선생처럼 인생을 걸고 즐기고 편안할 수 있는 길은 탐구해야만 찾을 수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 것이다.

모재 김안국의 덕망과 우애


모재 김안국의 덕망과 우애

 

스로 불러들인 재앙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겪는 재앙에는 천재지변과 같이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스스로 불러들인 경우가 많다. 그 원인에는 무지와 탐욕, 그리고 성격과 수양 부족 탓도 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라 여겨, 늘 수양하여 덕을 쌓아 혹여 만날 수 있는 재앙을 피하거나 또 어쩔 수 없이 닥치는 재앙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주역』에서는 흉한 괘가 나와도 흉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계하고 수양하는 여부에 따라 흉하지 않게 하는 길이 있음도 알려준다.
오늘날의 재앙이라고 해봤자 경제적 손실과 사고 등이 다반사이지만, 조선 시대 사대부들에게는 정치적 재앙이 가장 무서운 것이어서, 잘못 엮이면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가족의 목숨까지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혹여 생길 줄 모르는 모함과 비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수양하고 덕을 쌓으며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화를 당한 사건은 매우 빈번했고,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만 큰 것이 아니라 이에 못지않은 사화도 부지기수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 1478~1543)은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기묘사화(1519) 때 조광조의 당류로 몰렸지만, 조광조·김식(金湜) 등이 죽음을 면치 못한 반면, 그는 파직을 당하는 선에서 목숨을 보전하고, 20년 뒤 다시 등용되어 재기하였다.
그의 삶이 재앙 속에서도 이렇게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덕을 쌓아 인간관계가 원만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는 이런 종류의 재앙은 없지만, 사고나 직장에서의 해고와 승진 탈락 또는 사업 실패 그리고 가족 친지와의 불화에 따라 크고 작은 고통과 스트레스를 당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의 원인이 모두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양하며 경계한다면, 인생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모재 김안국(이하 모재로 약칭)의 삶이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성리학 이념의 교화와 문예
『대동야승』 속의 여러 문헌에 모재만큼 많이 언급된 인물도 흔치 않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그가 관리로서 이룬 업적과 시문(詩文)을 잘 지었다는 점과 원만한 인간관계와 우애, 시를 보고 사람을 잘 감별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안로(安璐 : ?~?)가 1638년에 기록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따르면 모재는 정축년에 영남 지방을 살피면서 효자 및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을 방문하여 그 집에 가기도 하고 음식을 보내 주기도 하며, 뛰어난 자는 조정에 천거했다고 한다. 『이륜행실록언해(二倫行實錄諺解)』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고, 백성들에게 반포하면서 풍속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가르치기에 힘썼다. 기묘년에 조정에 들어와서 우참찬 겸 홍문관제학이 되었는데, 특지로써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하면서, 앞서 경상도에 있을 때의 공적이 현저하였으므로 백성을 위해 모재를 선택해 제수한다 하였다. 모재가 감격하여 교화를 성취시킬 조목을 생각하였는데, 전보다 주밀하고 상세하였다. 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되니 이천(利川)의 주동(注洞) 집에 물러가 살았고, 따로 작은 집을 지어서 은일재(恩逸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날마다 여러 학생과 강학(講學)하니 학도가 점점 많아졌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무거운 처벌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성리학의 이념을 수양 차원에서 몸소 모범을 보이고 교육한 이가 김굉필이라면, 조광조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 그것을 제도적으로 실천하였고, 모재는 지방에서 직접 교화에 힘써 실질적으로 그것이 민간에 침투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니까 성리학의 이념과 전통이 뿌리 내린 것은 모재의 공이라 하겠다.
모재는 시문에도 능하였다. 글을 잘 지어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의 작성만이 아니라 사신들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가령 이기(李墍 : ?~?)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사대는 중국에, 교린은 일본 등과 관련된 외교이다. 물론 일본과 중국 사신과의 일화도 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시문에 능하였는데, 윤근수(尹根壽 :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 그 일화가 있지만 너무 길어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모재는 벼슬하기 전부터 벌써 시를 볼 줄 안다고 당시에 이름이 났다. 판서 성현(成俔)이 한 해 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요양하였다. 그 사이에 두보(杜甫)의 시를 숙독해서 사운(四韻) 여덟 수를 짓고 스스로
‘마음에 만족한 작품이니 옛날 사람의 시에 견줄 수 있다.’
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아들 하산(夏山)에게 말하기를,
“내 이 시는 옛 사람의 작품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들으니 네 친구 김 아무개는 시의 장단점을 가려낸다고 하니, 네가 보통 종이에다 하인을 시켜서 베끼고 이것을 부엌 위에 수십 일 동안 매달아 연기에 그을려 오래 묵은 것처럼 만든 뒤, 김 아무개에게 보여 그것이 어느 시대의 시인가를 물어보라.”
라고 하였다. 그 뒤 하산이 자기 집에 모재를 초청하여 손님 자리에 같이 앉고, 판서는 벽을 사이에 두고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하산이 묻기를,
“집의 어른께서 묵은 책 상자 속에서 시를 찾아내셨는데, 이것이 참으로 옛날 사람의 작품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송나라 말엽의 작품인지 아니면 원 나라 사람의 작품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어, 자네에게 이 시의 감정을 청하네.”
라고 하였다. 모재는 두 편을 읽고 말하기를,
“이 시는 격이 낮다. 송 말엽의 시는 벌써 아니고, 원 나라 시 또한 아니다. 바로 현대 작품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최치원(崔致遠)이나 이색(李穡)의 작품은 아니겠는가?”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최치원과 이색의 시는 격이 높다. 그러니 그들의 작품은 아닐 것이고, 진짜 현대 작품이다. 그러나 현대 사람의 작품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다른 사람은 아마 이렇게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들으니 대감(성현을 가리킴)께서 요즘 두시를 읽으셨다고 하는데, 만약 정밀하게 생각하고 다듬으면 이만한 작품을 쓰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대감의 작품일 게다.”
라고 하였다. 판서가 안에서 이 얘기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와서 모재를 보고 말하기를,
“너의 시 공부가 이 정도가지 이른 것은 뜻밖이구나.”
하고, 드디어 술상을 차리고 마주 앉아서 오랫동안 조용히 얘기한 뒤에 파하였다.

이렇게 시문과 관련된 모재의 일화는 매우 많다. 그래서 온 세상의 평론이 모재는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 : 전례와 고사)에 널리 통하였으나 학문상의 공부에 이르러서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월정만필』에서 평하였는데, 이 학문이란 아마도 이론 중심의 성리학을 말하는 것 같다. 역으로 생각해 달리 말하면 성리학 이론보다 실천에 충실했다고 하겠다. 아무튼 이 말은 그의 학문 수준이 결코 얕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기록에는 퇴계 이황이 한 때 경상도와 서울로 오가면서 이천의 모재를 찾았는데,
“모재를 뵌 뒤부터 비로소 마음씨가 올바른 군자(正人君子)의 도를 알았다.”
라고 전하며,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유자(儒者)의 사범(師範)이 되었고, 당시의 학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선생의 힘이라고 전한다.

덕망과 인간관계
모재는 성품이 섬세하고 인정이 많았다. 『해동잡록』에 모재는 성품이 부지런하고 상세하고 치밀하여 방아를 찧을 때에는 싸라기와 쌀겨도 함께 거두어 저장하였다가 춘궁기에 굶주린 백성을 먹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이 물건을 낼 때에 모두 쓰일 곳이 있도록 마련하였으니, 마구 없애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간혹 비방하면, 모재는 웃으며 말하기를
“범인은 마음이 거칠고 성인은 마음이 세밀하니라.”
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백성을 사랑하며 성격이 주도면밀하고 섬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은 권응인(權應仁 : ?~?)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모재가 성주(星州) 기생 의침향(倚沉香)에게 준 시에도 엿보인다.

아름다움과 추함 인연도 말하지 말자(不論姸醜不論緣)
오래 있다 보니 사람 마음이 저절로 끌리게 하는구나(處久令人意自牽)

이 시에서 정이 많은 그의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 같은 기록에서도 “호음(湖陰 : 鄭士龍의 호)은 좀처럼 남을 칭찬하는 일이 없었는데, 모재는 그렇지 않아서 남의 좋은 글귀를 보면 감탄하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남의 장점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과의 약속이나 의리는 꼭 지켰다.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따르면 김모재가 장원(壯元) 강태수(姜台壽) 집안과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다가 후에 자녀가 모두 장성하여 혼인할 시기가 되었는데, 강태수의 아들이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언약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드디어 그와 혼례를 이루었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성격에는 섬세함과 신의도 있었지만 그에 더해서 은혜도 잊지 않았다. 앞의 기록에 따르면 모재는 이천(利川)으로 물러나 살았고, 사재(思齋 : 모재의 아우 金正國의 호) 고양(高陽)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사재가 이천에 갔는데, 동네에서 풋콩을 삶거나 참외를 따서 모재에게 드렸다. 모재는 모두 받아서 책에 기록하니, 사재가 얼굴을 찡그리며
“형님은 이런 물건을 받아쓰면서 어찌하여 책에 기록합니까?”
라고 하니, 모재가
“남이 성심으로 주는 것인데 내가 어찌 물리치며, 만약 책에 기록하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잊어버릴 것이니, 어찌 남의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라고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 사람의 덕망과 성품은 그가 직접 만든 가훈과 자녀들의 가르침에도 드러난다. 『해동잡록』에 기록에 모재는 항상 겸(謙)과 공(恭) 두 글자를 가지고 자제를 가르치며 말하기를,
“겸손과 공손은 오로지 군자의 성대한 덕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명심하여 종신토록 잊지 말라.”
라고 전한다. 이런 생각이 조밀하게 반영된 것이 그의 가훈이다. 같은 기록에 보면 ①말을 삼갈 것 ②자기의 장점을 자랑하거나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 것 ③남의 허물은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말하지 말 것 ④조정 정치의 잘되고 못됨을 말하지 말 것 ⑤수령이나 재상의 잘한 일 못한 일을 말하지 말 것 ⑥음란하고 추잡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⑦남을 헐뜯는 말을 하지 말 것 ⑧오만한 말을 하지 말 것 ⑨상도(常道)에 어긋나고 흉악하고 도리에 벗어나는 말을 하지 말 것 ⑩허풍을 떨거나 허황된 말을 하지 말 것이 그것이다. 주로 말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행장」에는 이와 약간 다른데 말조심 외에 충성·효도·우애·화목 등의 덕목이 들어 있다. 물론 이것들은 유교에서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시하는 가르침이고 교화의 주요 내용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애와 인물 감별
모재는 또 형제 사이에 우애가 있기로 소문난 당사자였다. 보통 어렸을 때 한 집에 살 때는 형제 사이의 우애가 있거나 있을 법 하다가도, 가정을 이루어 따로 살면 쉽지 않다. 유산의 분배 문제도 있고, 또 딸린 부인이나 식구나 하인들의 입장도 있어서 형제끼리 우애의 도리를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형제 가운데 누가 망하거나 환난을 당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해동잡록』에 모재가 영남 관찰사로 있을 때에 형제간에 전답을 가지고 다투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효도하고 우애하며 화목해야 하는 도리를 타일렀더니, 두 사람이 감복하여 두 번 절하고 물러갔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도 형제끼리 유산으로 다투는 일이 잦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기록에서 모재는 동기 사이는 우애를 더욱 도탑게 하고, 재물에 대하여서는 사양하기를 힘써 더 얻으려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자녀를 가르친 것을 보면, 평소에 우애를 잘 실천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 1485~1541)은 모재의 아우이다. 임보신(任輔臣 : ~1558)이 기록한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따르면 사재 김정국의 자는 국필(國弼)인데, 모재의 아우였다. 기묘년에 파직된 후에 고양(高陽)의 농막으로 돌아가서 호를 은휴(恩休)라 하였다. 고아한 선비로서 후생들의 모범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그 형제를 가리켜 이난(二難 : 세상에 흔하지 않은 일)이라 했다고 한다. 이로 보면 두 형제 사이의 깊은 우애가 소문났음을 알 수 있다.
또 윤기헌(尹耆獻 : ?~?)이 기록한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 두 사람 사이의 일화가 있다. 모재와 사재 형제는 소인배에게 배척을 받아 시골에 살고 있었다. 늘 서로 왕래하며 유숙하였는데 때로는 한 달이 되기도 하였다. 작별하면서 모재가 사재에게 말하기를,
“내 이미 연로하고 그대 또한 병이 많은데,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리오. 서로 만나면 기쁘고 떨어지면 슬픈데, 서로 함께 살며 여생을 마칠 수 없겠는가?”
하니, 사재가 말하기를
“저의 뜻은 좀 다릅니다. 형제가 동거함은 실로 기쁜 일이오나, 양가의 하인들 사이에 딴 말이 없을 수 없고, 부인들은 성질이 편벽하여 오해하기는 쉽고 풀기는 어려우니, 만약에 반목이 생긴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로 각각 사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생각나고, 서로 만나면 즐거우니 우애의 정은 날로 더욱 두터워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듣는 사람이 더러는 사재의 말에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소인배에게 배척을 받은 것은 기묘사화의 일을 말한다. 두 형제는 다행히 죽음과 유배를 면하여 파직만 당한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모재는 경기도 이천, 사재는 경기도 고양에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왜 떨어져 살았는지 기록은 없으나, 대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남자가 혼인하면 처가 쪽에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딸도 유산을 상속 받았으므로, 그 상속받은 농토를 관리하려면 부득이 거기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두 사람 사이에는 우애가 깊어서 서로 간에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또 모재가 유명한 점 가운데는 인물을 잘 감별했다고 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시를 보고 지은 사람의 상황을 판단하기도 하고 때로는 운명을 점치기도 했다. 이덕형(李德馨 : 1561~1613)이 지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 모재는 감식이 신과 같아서 남이 지은 글을 보면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궁달(窮達)과 수명까지도 아는데, 이것은 열에서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일례로 이제신(李濟臣 : 1536~1583)이 쓴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김모재는 한 유생이 시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시를 보니
“푸른 나무 그늘 속에 다시 주저하네(綠樹陰中更躊躇)”
라는 거였다. 모재는
“이 시가 매우 짧고 초라하니 머지않아 반드시 죽으리라.”
라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고 전한다.
게다가 『송와잡설』에는 정소종(鄭紹宗)은 꿈에 어떤 노인이 손바닥에 시를 써 주었는데, 그는 훗날 과거에서 해당 시구에 각각 두 글자씩 보태 지어 급제했다고 한다. 시험관인 모재가 그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며 “이것은 실로 귀신의 말이다.”라고 했는데, 나중에 정소종이 모재를 뵙자 시상이 거기에 미치게 된 연유를 밝히자, 모재의 글을 알아보는 명성이 이때부터 알려졌다고 전한다.
모재는 성리학 이념이 백성들의 실생활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교화에 힘쓴 공이 있고, 또 시문을 통하여 외교 활동만이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게다가 성격이 섬세하고 인정이 많아 환난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며, 형제 사이에 우애도 뛰어났다. 이만하면 동시대나 후세의 관심과 추앙을 받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흔히 처세술을 말할 때 소인의 아첨과 군자의 너그러움을 구별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가 환난에서 살아남고 한 시대에 명성을 얻은 것은 단순히 세상에 아첨했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성리학을 기초로 덕을 쌓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늘날의 덕은 무엇을 기반으로 쌓아야 할까?

정암 조광조와 이상 사회


정암 조광조와 이상 사회

 

상 사회

현실의 부조리가 심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보통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미륵이나 구천상제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꾸었던 민중 종교만이 아니라, 기성 종교 가운데서도 종말론적 교파가 등장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왕조 말기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신라 말 궁예의 등장도 그랬고, 구한말 한국 신종교의 출현도 그와 관련이 있다.
이런 종교적 신앙과 별개로 현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실망에서 새로운 사회를 이론적으로 꿈꾸기도 했다.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론과 플라톤의 국가론을 비롯하여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각종 소설과 담론은 현실의 삶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반증한다. 20세기 소련과 동구에서 실험했던 공산주의도 적어도 그 출발은 노동자로 구성된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다.
동아시아에도 일찍이 이상 사회의 담론이 있었다. 『예기』 「예운」편에 등장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는 살기 좋았던 때로 묘사하고 있고, 전설적 제왕인 요순(堯舜)이 다스리던 시대를 이상 사회로 믿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가 경전에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 유학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동아시아 역사·철학의 담론에서 이상 사회의 모델이 되었으며, 복고적 가치관이 지배하게 되었다.
조선 중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 1482~1519)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 이상 사회의 정치 모델로 생각한 것도 바로 요순시대의 그것이었다. 이는 유학자 특히 성리학자들이 유가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도통(道統)의 시작을 요순으로부터 이어진다고 보는 생각과 일치한다.
여기서 어떤 유토피아 사상도 그렇지만 선생의 이상 정치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또 유가의 이상적 이념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을까? 곧 정치 행위란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자산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데 있어서 정치 세력 간의 타협을 이끌어 내는 일이라고 소박하게 정의해볼 때, 선생의 개혁 정치의 실패 원인과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훗날 문묘에 배향되고 선비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지치주의로 이상 사회 건설
안로(安璐)가 1638년에 쓴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따로 「조정암전(趙靜庵傳)」이 있는데, 우부승지 박세희(朴世熹)의 입을 빌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는 젊어서 김굉필에게 배웠고 장성하여서는 스스로 깨닫고 분발하였다. 도학(道學)에 침잠하여 경전의 문구(文句)를 따지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으며, 의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그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널리 배우고 힘껏 행하였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남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고 도에서도 이탈하지 않았으니, 사림이 다 추중(推重)하였다. 국가가 중흥할 운수를 당해서 조야에서 유신하기를 바랐다. 까닭에 공은 홀로 침착하게 건의하여 선왕의 법도를 회복하도록 청하였다. 아는 것은 임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임금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
요약하면 선생은 도학에 뜻을 두었고, 젊어서부터 선비들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국가의 유신 곧 개혁을 추진했고 그 모델과 방법은 선왕의 법도를 회복하는 일이었고,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그가 실각하지 전까지의 행적과 일치한다. 실제로 그는 출사하기 전부터 산림의 영수(領袖)로 추앙을 받았다.
그의 학문의 성격에 대해서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서는 선생이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고, 『소학』을 독신하고 유학을 일으키며, 임금과 백성을 요순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그가 공부한 도학으로 중종을 요순임금처럼, 백성들을 그 시대의 백성들처럼 유학의 법도에 잘 맞게 만들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회복하고자 한 ‘선왕의 법도’는 곧 요순시대의 법도 또는 그런 모델에 가까운 성왕(聖王)들의 법도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도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이이(李珥 : 1536~1584)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는 도학과 선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학이란 이름이 예전엔 없었다. … 이치를 궁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도(道)를 기준으로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을 도학이라 지목하게 되었던 것이니, 도학이라 이름을 세운 것은 말세의 부득이한 일이다. … 세속이 더욱 저급해져서 경서나 읽고 저술이나 하는 사람이면 도학자로 부르지만, 그 심성(心性)의 공부나 세상에 드는 큰 절개에는 생각해 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더욱 세도가 변했음을 알 수 있다. … 그는 조정에 서서 오로지 도를 행하려 힘써서 삼대(三代)의 도가 아니면 결코 임금 앞에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러므로 그가 도학자(道學者)란 이름을 얻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도학이란 쉽게 말해 유교적 성인(聖人)이 되는 학문을 말한다. 앞의 인용에서 자신의 임금을 요순처럼 만든다는 것이니, ‘내면적으로는 성인이요 겉으로는 왕’인 내성외왕(內聖外王)이 되는 학문이다. 신하의 입장에서도 비록 왕은 아니지만 내면으로는 성인이요 외면으로는 그런 왕을 돕는 자가 되는 일이다. 이 또한 유학의 본령이 ‘자기 몸을 수양하여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정신의 발로이다. 그렇게 되려면 이치를 탐구하여 심성을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도학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의 결과를 ‘지치(至治)’라고 불렀다. 곧 중국 고대의 하(夏)·은(殷)·주(周) 삼대 정치를 이상으로 달리 말하면 요순시대처럼 잘 다스려지는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석담일기』에 선생은 경연(經筵)에서 매양 도덕을 숭상하여 인심 바로잡고 성현을 본받아 지치를 일으켜야 한다는 논설을 반복하여 아뢰니, 그 말하는 뜻이 간절하였다고 전한다. 이 말을 분석해 보면, 지치를 일으키는 기본 전제로서 ‘도덕을 숭상하고 인심을 바로잡는 일’이 선행되어함을 말하고 있다. 곧 수기(修己)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치주의는 무엇보다 통치자의 도덕성이 그 전제로서 가장 우선되는 정치이다. 통치자의 도덕성이 정치 현장이나 민생에 직접 연결 될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이 됨은 분명하다. 유교적 도덕과 근본이념이 잘 발휘된 이상 사회가 지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다스리는 도리에 대하여 개진하면서 성(性)과 정(情), 선과 악, 의(義)와 이(利)의 분별에서부터 천(天)과 인(人), 왕도와 패도, 옳음과 사악함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잡아내어 벌려놓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해동잡록』은 전하는데, 자세히 보면 모두 선악이라는 어떤 이분법적 잣대로서 정치 행위에 임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당시 연산군의 폐정에 따른 시대적 배경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진단이라 하더라도, 정치 현장에서 이런 이분법적 구분은 통합에 매우 좋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결과적으로 선생의 이상 사회를 지향하는 개혁 정치는 그가 모함을 받아 실각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그의 개혁 정치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 현대 학자들의 연구도 많이 축적되어 있지만, 그가 살았던 직후의 후학들에 의해서 지적되기도 하였다. 『석담일기』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체로 선생의 학문이 숙성되지 않았고 개혁이 급진적이었다고 한다. 곧 학문이 미처 크게 이루기 전에 벼슬길에 나왔고, 현량과 설치 이후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섞이어 조정에 진출하게 되어 논의가 대단히 날카로워지고 일을 수행하는 것이 급진적이었다는 점이다.
또 안로(安璐)가 1638년에 쓴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서도 박세희(朴世熹)의 입을 빌어 나중에 진출한 여러 선비들은 기세가 날카로워서,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점진적 개혁이 없었으므로 험한 세정(世情)에 저촉되어 인심이 크게 어그러졌다고 하여,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인심을 크게 잃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개혁의 당위성을 앞세우면서 같은 당내에서도 급진파의 입김이 세지면, 인심을 잃어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점은 현대 정치에서도 자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대동야승』의 여러 자료에서는 개혁의 진행에서 사람을 질리게 하여 인심을 잃은 경우를 소개하고 있다. 예컨대 도교 사원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일에 있어서도 『기묘록보유』에서 기록하기를 임금의 허락하지 않자 새벽닭이 울 때까지 주청을 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고,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승지들은 모두 책상에 기대서 졸았으니 모두 염증과 괴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것은 반드시 충성과 착한 도로써 임금의 마음과 맺고, 임금의 마음이 트인 곳으로부터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토록 핍박하고도 무사한 자가 있을 수 없다고 다소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혁을 위해 주변의 신하는 물론 왕까지 질리게 만들어 인심을 잃게 했다는 지적이다. 아무리 당위성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이러하다면 인심을 얻기 어렵다. 또 거기서 전하기를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당연한 도리로써 인도하고 지성(至誠)으로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 힘쓸 뿐이니, 어찌 딴 짓을 헤아릴 것인가 하고, 만약 임금이 듣기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헤아리고 후일을 기다린다면, 어찌 군자가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기에 급한 마음으로 할 것인가 하고 비판적인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인심을 잃은 사례는 또 있다. 작자 미상인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에 선생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선생이 이욕(利欲)이란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것이요, 국가의 병폐의 근원도 이 이(利)의 근원에 있다고 하여, 중종반정 때에 공이 없어 허위로 공신이 된 사람을 공적을 삭제하여 그 욕심을 징계하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선생이 끝내 이것도 관철시켰다고 한다. 물론 선생의 이런 주장은 명분상 옳다. 그러나 명분이 옳다고 해서 모두 진정으로 수긍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성보다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명분은 또 다른 명분으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선생이 실각한 명분도 있다. 물론 이것은 선생을 실각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민 자들의 명분이기도 하다. 『기묘록속집』에 선생에게 죄가 있다는 상소에 보인다.

“조광조가 서로 붕당을 만들어 자기에게 붙는 사람은 진급시키고 자기와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하여 명성과 위세가 등등하고, 권세와 요직을 모조리 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개인적인 행동만 하여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후진들을 유인하여 공정하지 못하고 과격한 것으로 습성을 만들어 젊은이로서 어른을 능멸하며 천한 자로서 귀한 사람을 무시하게 하여, 나라 형세가 뒤집어지고 조정의 정사를 날마다 해쳤습니다.”

요지는 선생이 편당을 지어 자기 사람으로 조정의 요직을 채우고, 과격하고 임금을 속이고 젊은이가 어른과 귀한 사람을 능멸하여 정치를 해쳤다는 명분이다. 물론 임금의 허락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젊은 사림을 등용과 급진적 개혁을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겠으나, 임금을 속이고 어른을 능멸한다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도덕적 이념의 잣대로 훈구대신들을 인간적으로 멀리 했음을 뜻한다. 선생을 선두로 훈구대신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한 모습은 여러 자료에도 보인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개혁의 주체가 그 대상이자 상대를 바라보는 시각이라 하겠다.
또 국방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가령 『기묘록보유』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북방의 여진족이 국경을 넘어와 백성들을 약탈해 가자 조정에서는 불시에 군사를 풀어 덮치기로 논의했는데, 선생이 뒤늦게 나와서,
“이번 일은 바로 도둑과 같은 짓입니다. 기미를 엿보는 간사한 꾀는 왕다운 왕이 오랑캐를 제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당당한 큰 나라에서 요망한 오랑캐를 잡기 위해 도적과 같은 꾀를 행해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엄을 손상하는 일을 신은 속으로 부끄러워합니다.”
라고 하자, 임금이 곧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좌우에서 진언하기를,
“군사 전술에는 기습전과 정규전이 있고, 오랑캐를 제어하는 데에는 정상적인 전투보다 융통성 있는 전투가 있습니다. 여러 의논이 이미 같았는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전쟁마저도 선생은 선왕의 법, 곧 큰 천자의 나라가 오랑캐를 치거나 달래는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법의 현대적 적용에 대한 선생의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반대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거나 현실에 어둡다는 명분을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래서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
“밭가는 것은 농사짓는 노비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고, 베 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방에 출입하여서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신의 말을 들을 것을 청합니다. 쓸모없는 선비의 말이 예로부터 이러한 바, 비록 이치에는 근사하나 다 따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그 지방으로 군사를 보내려던 것도 중지시켜 버렸다. 선생은 3품 관원인데 능히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뜻을 움직여 조정의 큰 논의를 바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는 기록에서도 선생이 인심을 잃음이 이러했다.
그러니까 지치주의의 이념으로 무장한 도덕 정치만으로는 인심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한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어떤 이념이나 도덕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과거 공산주의가 철저하게 이념으로 무장하여도 결국 무너졌다. 율곡 이이가 『석담일기』에서 퇴계 이황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 사람들이 대유(大儒)로 지목하고 어린 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룩하기 바랐으나 스스로 경세제민의 재주가 없다고 했는데,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도학 이상의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더구나 도덕을 명분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또한 도덕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앞의 훈구대신들이 선생을 공격할 때도 편당을 짓고 요직을 독차지 하고 임금을 속이고 과격하고 어른을 능멸한다는 것이 그 점이다. 최근 우리나라 검찰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것을 반대하는 검찰이 법무부 장관의 도덕성 심지의 가족의 그것마저 이 잡듯이 수사하여 혐의를 들추어냄으로써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려고 하였다. 사실 도덕을 잣대로 상대를 공격하기는 매우 쉽지만, 똑같은 기준을 자기에게 들이대지는 않는다. 게다가 도덕성이 뛰어나다고 해서 반드시 유능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도덕은 정치를 성공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런 점을 선생의 개혁 정치가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하지만, 아무튼 선생은 끝내 중종임금마저도 설득하지 못했다. 들어주다가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상 사회를 꿈꾸는 선비의 표상
이상 사회를 지향하는 선생의 개혁은 좌절되었으나, 그렇다고 전혀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석담일기』에 일찍이 도학으로 군주에게 고한 사람은 없었는데, 오직 선생이 성리학으로 중종을 보필하여 세도가 거의 변화하려 하였다고 하여 도학이 선생으로부터 유래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배우는 이들이 이때에 이르러서야 성리학을 높일 만하고 왕도가 귀하며 패도가 천한 것을 알았으니, 그가 유학의 도리에 끼친 공로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그 의의를 밝혀, 유학이 지향해야 할 기준을 선생이 제시하였다고 하겠다.
또 『기묘록보유』에서도

“조광조는 젊어서부터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김굉필에게서 학업을 받았다. 김굉필의 학문은 김종직에게 배웠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비인 김숙자(金淑滋)에게서 전해 왔으며, 김숙자의 학문은 고려 신하였던 길재(吉再)한테서 전해 왔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니, 실상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이다.”

라고 하여, 선생은 유학의 도통을 잇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훗날 문묘에 배향되어 조선 유학에 있어서 선생의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상 사회를 꿈꾸는 선비의 표상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옛 것만 파먹으면 그로써 충분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더구나 도덕으로 상대를 공격하기는 쉬워도 자신은 그렇게 되기 어려우며, 선악의 잣대를 가지고 갈등을 해소하고 자원을 잘 배분하는 정치는 쉽지 않다. 상대가 생각하는 선악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성 못지않은 큰 정치력이 요구된다.

소학동자 김굉필


소학동자 김굉필

 

끄러움을 모르는 사회

우리나라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어 선진국의 대열에 명함을 내밀 위치에 왔다고 자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명암이 분명히 있다. 배고팠던 시절을 경험한 세대들에게는 그 경이로움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 때의 가치와 문화를 고수하며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겠지만, 일터를 잃거나 취업을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하는 젊은이들은 세상이 바뀌기를 바랄 것이다.
이제 사적인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일은 잘 사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모두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전자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후자는 생존을 위해서 그러하다. 그러다보니 법에 저촉 되는 일만 아니라면 이익 추구 앞에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무시 된지 오래이다. 이런 풍조는 우리 현대사가 알게 모르게 만들었고, 거기서 자란 후속 세대들은 사회로부터 배우고 본받을 게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점점 뻔뻔해지고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니,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자본주의의 고약한 최면에 걸려 남과 세상에 아첨해 돈을 벌려는 것이 일상이다. 사회생활이나 어떤 조직에서 도덕적인 사람이 바보 취급을 당한다는 일은 이제 초등학생들도 안다. 예의와 염치와 고상한 품위를 앞세웠던 교과서의 전통문화는 그저 시험 준비에 필요한 지식일 뿐이다.
이런 세상을 도덕적이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문화가 넘치는 사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면 그것을 준비하는 선각자나 그를 따르는 세력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일은 조선 전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는 고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불교를 버리고 유교 이념으로 조선을 새롭게 이끌고자 하였으나, 그것에 실효성이 있는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시기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그 이념의 구체적 규범과 사례를 몸소 실천하고 가르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 1454~1504)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다.

조선의 성리학 정착과 『소학』
성리학(性理學)은 유학의 한 갈래이다. 중국 북송을 거쳐 남송 때 완성한 학문으로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유학의 정신을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학문으로, 달리 송학(宋學)·정주학(程朱學)이라 부른다. 특히 남송 때 그것을 완성한 주희(朱熹)의 학문을 따로 분리해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조선의 성리학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주자학이 고려 말에 들어왔지만 그것이 바로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초기만 해도 여전히 불교문화와 도교의 그것이 사회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왕실에서 불교를 믿기도 하고, 「훈민정음」을 실험해 본 것 가운데 하나도 불경의 번역이었으며, 중종 때까지도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사원인 소격서(昭格署)가 존재했다. 선생이 살았을 때만 해도 여전히 그 영향 아래 있었고, 백성들은 물론 선비들과 고위 관리들마저도 성리학적 가치관과 습속에 철저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유학자들도 한나라 당나라 시대의 시문(詩文)을 익히는 문학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 또한 겉으로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을 표방하였으나 여전히 시문을 짓는 학문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런 풍토에서 선생이 『소학』을 중시한 것은 성리학적 맥락이 있다. 허봉(許篈 : 1551~1588)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면 동방의 선비들이 모두 문사(文詞 : 문학)를 업으로 하였으나, 성리학에 몰입하여 몸가짐을 예로써 하였고, 염락관민(濂洛關閩 : 성리학을 상징하는 말)의 계통을 찾은 이는 김굉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대학에서 조선유학사를 강의할 때 흔히 조선 유학의 도통(道統)을 정몽주(鄭夢周)에서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진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성리학적 이념이 조선에 정착하는 과정과도 일정한 맥락이 통한다. 길재 이하의 공통점은 모두 『소학』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사실 『소학』은 『대학』처럼 전해 오는 책이 없었다. 남송 때 주희가 자신의 감독 하에 제자를 시켜 편찬한 책으로, 유교 경전에 흩어져 있는 기초 교육으로서 필요한 내용들을 모았다. 이는 유학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하·은·주 삼대(三代) 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신서(修身書)이다. 『대학』이 이론적이고 이념적이라면 『소학』은 그것을 현실 생활에서 실천하는 규범과 그 사례로 이루어져 있어서,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경서를 읽을 때 『소학』을 어린 아이들이 읽는 것이라 치부하고 『대학』부터 읽었다고 한다. 주희는 『대학장구』를 지어 『대학』을 성리학으로 해설하였지만, 그런 성리학 이념이 생활에서 실행되도록 반영한 책이 바로 이 『소학』이다. 요즘말로 말하면 성리학 이념의 토대 위에 바른 습관 형성을 위한 도덕 교과서인 셈이다.
그런데 조선 초에 『소학』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선생이 강조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관련이 있다. 훗날 연산군 때 사화의 계기가 된 것도 『소학』의 가르침에 따라 그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는 김종직과 그 제자들의 행적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초에 넣음으로써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이른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을 두고 조정에서 갈등을 일으킨 큰 사건이었다. 물론 『소학』에도 등장하는 이 가르침은 부귀영화라는 현실적 욕망과 충절(忠節)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두고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진정한 선비라면 당연히 선택해야만 했던 화두를 던진 사건이었다.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선생은 이런 부귀영화를 바라는 욕심, 곧 탐욕을 막으려면 작은 욕심부터 막아야 하는데, 그 실천적 규범과 사례가 바로 『소학』의 내용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줄곧 강조하였다.
선생은 교육을 통해 『소학』의 실천을 보급하려 하였고, 중종 때 제자 조광조(趙光祖)의 활약으로 『소학』이 정책적으로 중시되기는 했으나 그의 실각으로 위기가 있었고, 훗날 그가 복권되고 그의 제자인 김안국(金安國) 등의 활약으로 『소학』을 널리 유포하여 성리학적 이념이 생활에 침투되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명실 공히 주희의 성리학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물론 그 폐단도 함께 노출하였다.

자칭 소학동자
선생은 21살 때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을 스승으로 찾았다. 그 때 그에게서 『소학』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듣게 된다. 권별(權鼈 : ?~?)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따르면 선생은 김종직에게 『소학』을 배웠고, 이때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글을 읽어도 아직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였더니(業文猶未識天機)
『소학』책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小學書中悟昨非)
이것을 좇아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 다하리니(從此盡心供子職)
구차하게 좋은 옷 살찐 말을 부러워해 무엇 하리(區區何用羨輕肥)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김종직이 이를 평하기를,
“이 말은 곧 성인(聖人)이 되는 기초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은 21살 때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고, 27살 때 생원시에 합격한 뒤로 출사를 위해 과거에 응한 기록은 없고, 40세가 되어서야 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관직에 오른다. 그러니까 적어도 23년의 동안은 재야에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서당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해동잡록』에서는 일찍이 김종직을 따라 『소학』을 배웠는데 평생을 『소학』으로써 몸을 단속하였고, 성리학에 정통하여 이 학문을 일으키고 후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고 전하여, 선생이 스스로 수양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이 기록에는 선생은 후배를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고 한다.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 온 학생들이 집안에 차고, 날마다 경서를 가지고 당(堂)에 오르므로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그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서 『소학』으로 자신의 몸을 닦고 옛 성현을 법도로 삼아 후학을 불러다가 성심껏 쇄소(洒掃)의 예를 가르쳤으므로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은 이가 앞뒤로 가득하여 비방하는 의론이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고 전하여, 그것이 『소학』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쇄소(물 뿌리고 비질하는 것)의 예’와 ‘육예(예절·음악·활쏘기·글쓰기·수레몰기·셈하기)의 학문’이란 고대 소학에서 가르쳤다는 내용으로 『소학』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선생이 교육에만 전념했을까? 어떤 교육이든 교육자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몸소 체현해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가르침이 먹히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선생의 평소 몸가짐과 태도가 중요하게 드러난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선생은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닭이 울 때 일어나 종일 똑바로 앉아 학문을 닦고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집안사람들도 일찍이 그의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또 김정(金淨 : 1486~1521)의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에 기록된 상소에서는 선생의 행동에는 포용성이 있었고, 일처리에도 도량이 있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데에 공경함이 없는 데가 없었고, 순순하게 지성으로 제자를 가르쳤고,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 여러 차례 환난을 겪었으나 고요하게 처신하였으며, 공경하는 마음을 독실하게 하여 죽을 때까지 해이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몸가짐은 선생이 귀양 가서 참형을 당한 순간에도 목욕하고 관대(冠帶)를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벗겨진 한 쪽 신을 도로 신고 손으로 그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동잡록』은 전한다. 죽을 때까지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소학』의 가르침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이런 삶을 살았기에,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평소에 누가 당시의 시사(時事)를 물었을 때 선생은 대뜸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라고 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로 칭했다고 한다. 사실 선생은 평생 『소학』만 공부하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30살이 넘어서 다른 책도 섭렵했다고 한다. 여기서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한 말의 배경은 두 가지로 상상할 수 있다. 하나는 정말로 『소학』에 몰두 하여 그렇게 칭했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남들이 여태 『소학』만 공부하고 가르치는 ‘소학동자’의 노릇을 한다고 빈정대는 말을 받아서 할 수도 있다. 사실이 어떻든 선생이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소학』의 내용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친 것만은 분명했다.
사실 선생이 이 같은 도학군자가 된 것은 교육과 『소학』의 영향도 컸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선생은 어렸을 때 호탕하고 놀기 좋아하고 거리끼는 바가 없어, 거리나 시장에 돌아다니면서 도리에 어긋나는 모습을 모면 사람이나 시장의 물건 할 것 없이 막대기로 후려쳤다고 한다. 이렇게 과격했지만 교육과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사람이 좋게 변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마 자신의 경험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입증해 보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선생은 교육을 통해 조용한 혁명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성리학의 가르침을 통해 부귀영화보다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도덕적 사회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것도 지도자인 왕과 그 왕을 보좌하는 사대부들이 앞장서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함을 말한다. 선생이 가르친 내용은 사소한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것이 체득되지 않으면 한없는 탐욕에 빠져들어 자신의 몸과 나라를 망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선생의 교육은 바로 이런 우려에서 출발하였다.

꿈의 좌절과 그 영향
교육과 실천을 통해 성리학의 실효성을 입증해 보이려는 선생의 학문 특징은 몸을 닦는 수기(修己)에 치중해 있다. 그럼으로써 조선 사회를 성리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이상 사회가 될 것이라 믿었다. 이것이 선생이 꿈꾸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꿈은 선생이 억울하게 죽음으로써 좌절되었다. 그 실패는 이미 당시의 훈구파와 사림의 갈등 속에서 예고되어 있었다. 갈등은 언제나 그렇듯이 칼자루와 힘을 가지고 있는 보수파가 이기게 되어 있다. 무오·갑자사화는 겉보기에는 폭군 연산군의 일탈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신진사류와 훈구대신들의 오래된 갈등과 반목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이런 상황은 선조 중반까지 크고 작은 옥사(獄事)로 반복된다. 아니 지금도 양상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선생은 사화에 직접 관련된 당자자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연루된 것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사림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을 사화를 주동한 자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이념을 최전선에서 실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던 남효온(南孝溫)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은 “『소학』으로 몸을 다스리고 성인을 표준으로 하고 후학을 불러 차근차근 잘 이끌어 가니 『소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앞뒤로 가득하였다. 그를 비방하는 논의가 앞뒤로 가득 하려고 하자, 정여창(鄭汝昌)은 그만 두도록 권하였으나 김굉필은 듣지 않았다.”라고 한다. 곧 『소학』의 내용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그 이념에 충실한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 훈구파들에게는 이미 눈에 가시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신진사류들은 틈만 나면 훈구파 대신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대신들은 신진사류가 버릇없다 한 반면, 신진사류는 대신들이 탐욕스럽고 덕이 없다는 것이 그 주요 동기였다. 그러니까 신진사류가 훈구대신들을 비판하는 무기가 바로 『소학』의 가르침이 들어 있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진보 진영의 인사들은 주로 도덕성을 가지고 보수 진영을 공격하지 않는가?
사실 선생도 그 스승이 출사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고 시로 비판한 적이 있다. 곧 성종 16년(1485)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자 선생이 시를 보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전한다.

도는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얼음물을 마시는 것에도 있는데(道在冬裘夏飮氷)
비가 개면 가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만 온전히 능숙하겠습니까(霽行潦止豈全能)
난초 같은 이도 세속에 따라 마침내 변해야 하는 것이라면(蘭如從俗終當變)
이제 소가 밭 갈고 말이 탈만한 것임을 누가 믿겠습니까(誰信牛耕馬可乘)

라고 하니 김종직은 당혹스러웠다. 그는 답장에서 성리학적 이념 실천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후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고, 또한 시세에 아부하며 이해득실에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우명행록』에는 두 사람이 시를 주고받고 ‘마침내 갈렸다’고 적었다. 이로 보면 선생의 학문 목표와 스승의 그것과 달랐다고 하겠다. 모르긴 해도 그의 스승은 『소학』을 수양하는 데만 활용하고, 학문은 시와 문장을 짓는 데 치중한 같다. 바로 선생의 이런 근본주의적 학문의 성격과 실천 태도 때문에 사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훈구파에 의한 ‘요주의 인물’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의 죽음으로써 꿈마저 좌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제자 조광조가 수기(修己)의 차원을 넘어서서 치인(治人)의 단계에 적용하여 국가의 제도를 개혁하였고, 또 그것을 더 진행하다가 그도 좌절을 당해 그 일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이후 신지 사류가 대거 진출함으로써 명실 공히 성리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훗날 조선 사회가 이상 국가가 된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도덕적 이념만으로 세상을 이끌 수 없는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다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이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해 그 실효성을 입증해내야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이 성리학이 지배하는 국가로 완전히 정착하는 데 선생의 공이 크다고 하겠다. 오늘날은 사회 변혁을 위해 어떤 이념과 그 실천이 필요할까?

성삼문과 ‘나리’


성삼문과 ‘나리’

 

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굴욕

역사적으로 어떤 정권이 정통성이 없고 부당한가? 왕조 시대에 있을 법한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모시던 왕을 시해(弑害)하고 왕위를 찬탈한 정권, 곧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을 말한다. 반면 폭군인 왕을 몰아내고 새 왕을 세우는 일은 혁명(革命)이라 부르지 찬탈이라고 하지 않는다. 혁명이란 말 그대로 하늘의 명이 다른 이에게 옮겨갔기에 하는 일이다. 『맹자』에는 혁명의 정당성을 매우 제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국가에서는 부정 선거나 쿠데타 또는 내란을 일으키고 민심을 선동하여 정권을 잡는 경우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찬탈이냐 혁명이냐를 규정하는 기준 자체는 민심의 향배에 의하여 좌우될 수밖에 없지만, 그마저도 집권 후의 정권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라는 현실적 논리에 따라, 지면 역모가 되고 이기면 혁명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그런 억지 주장은 훗날 역사의 심판에 따른 단죄를 피해갈 수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춘추대의(春秋大義 : 공자가 『춘추』를 기록한 의리와 그 정신)’를 기준으로 역사를 평가하려는 전통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史觀)은 다양하다.
우리 역사에서 부당하다고 평가되는 정권은 여러 개 있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정권에 저항한 성삼문(成三問 : 1418~1456) 등은 멸문의 화를 당하고, 그에게 협조한 한명회(韓明澮) 같은 이는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그의 조정에 출사해야 했던 대다수 선비들은 내적인 갈등을 겪으며 굴욕적 삶을 살았다.
이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고두고 조선 선비들이 저항이냐 굴욕이냐를 두고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간신이 득세한 조정에서 또 일제 강점기 일제에 저항하느냐 협조하느냐 또는 호구지책을 위해 굴욕적으로 벼슬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이 상황의 연장이고, 광복 후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서 영달을 위해 협력하든지 아니면 굴욕적으로 묵인해야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비록 말단 공무원이라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적극 협조하는 자도 있고, 굴욕적이지만 생계 때문에 해당 정권에 협조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행적은 단지 전근대적 충(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정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의 의리란 어떤 것이며, 권력의 정당성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일신의 영달과 공동체 질서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서야할지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그의 삶과 행적을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집현전의 학사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과 출신의 출중한 인재들을 모아 집현전 학사로 임용하였다. 20명의 학사를 두었는데 주로 왕과 세자의 학문을 위해 강의하거나 서적 편찬, 연구 등의 임무를 주었다. 근무 규정은 매우 엄격하여 일찍 출군하고 늦게 퇴근하는 방식이며, 아침과 저녁밥은 궁에서 제공했다고 한다. 또 숙직하는 인원을 두어 왕과 세자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학문상의 자문에 응할 수 있게 하였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따르면 이런 일도 있었다.

“문종이 동궁(왕세자)에 오래 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학문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달이 밝고 사람이 잠든 뒤면 간혹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와서 어려운 것을 물었다. 당시 성삼문 등은 숙직할 때에 밤이라도 감히 의관을 풀지 못하였다. 하루는 한밤중이 되어 세자(문종)가 오지 않을 줄 알고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우려고 하다가 갑자기 문밖에 신발소리가 나며 성삼문을 부르면서 오니, 놀라 당황하여 얼떨결에 절할 정도였다. 학문에 대한 근면과 선비를 좋아하던 마음은 천고에 드문 일이었다.”

문종이 학문을 좋아하고 사적으로 성삼문과 친하게 지낸 사례는 허봉(許篈 : 1551~1588)이 기록한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에도 보인다. 문종과 집현전 학사와의 관계는 이것 외에도 많은데, 가령 심광세(沈光世 : 1577년~1624)의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신숙주(申叔舟)가 젊었을 때에 성삼문·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하고, 옥당(玉堂 : 홍문관)에 있으면서 함께 문종의 탁고(托孤 : 어린 자식에 대한 부탁)의 분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문종은 집현전 출신의 학사들을 이렇게 의지하고 믿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학사들 가운데서 젊고 총명한 자를 엄선해서 장기간의 휴가를 주고 절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성삼문은 박팽년·신숙주·하위지(河緯地)·이석형(李石亨) 등과 함께 삼각산(북한산) 진관사에 가서 학문을 닦았다. 또 이들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를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죄를 지어 요동(遼東)에 귀양 와 있었는데, 성삼문·신숙주로 하여금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가 요동에 가서 황찬을 보고 음운(音韻)을 질문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요동에 왕래하는 것이 열세 번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협력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세종의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신임은 『해동잡록』에서 성삼문이 국문장에서 신숙주에게 한 말에서도 보이는데,
“처음 그대와 집현전에 같이 있었을 때 세종께서 매일 왕손(단종)을 안고 집현전에 나와 산보를 즐기시면서 여러 학사들을 보고, ‘내가 죽은 뒤에 경들은 모름지기 이 애를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대 혼자 잊어버렸느냐?”
라고 한 말에서도 세종 또한 학사들을 얼마나 믿었는지 증언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집현전 학사 출신들에게는 자기들을 아끼고 믿어주었던 임금에 대해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도덕적이고 이념적인 유교적 가르침을 떠나, 인간적인 관계에서 볼 때도 배반하기 참으로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성삼문과 수양대군의 정당성 논쟁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은 명분 가운데 하나는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들의 무리로부터 왕권을 확립하고 이들로부터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좋게 말하면 왕권 강화였다. 실제로 단종은 어리고 김종서(金宗瑞)나 황보인(皇甫仁) 같은 신하들의 정치력이 컸으므로, 이들이 딴마음을 먹으면 왕권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호사가나 일부 학자들은 개국 이래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부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에 따른 왕자의 난, 조광조의 개혁의 좌절 등도 그런 것이라 규정한다. 그래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부득이한 조처라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이런 관점에서 중종과 선조 그리고 숙종 때의 사화나 수많은 정변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그것을 악용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 논리라면 왕권 강화에 따른 희생이 너무 컸으니 조선은 진작 망했어야 했다.
아무튼 성삼문과 수양대군의 논리 싸움은 단종 복위 운동이 김질(金礩)의 밀고로 실패로 끝난 뒤, 국문하는 현장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의 내용이 반영된 『해동잡록』과 권응인(權應仁 : ?~?)의 『역대요람(歷代要覽)』, 『동각잡기』 등을 참고하여 그 때의 대화를 재구성해 보았다.

수양대군 : (김질의 밀고대로 사실 여부를 따져 묻자)
성삼문 : 모두 사실이오.
수양대군 :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는가?
성삼문 : 상왕이 한창 젊은데도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려는 것은 신하로서의 당연히 할 일이오. 다시 무엇을 물으시오? 나리가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周公 : 중국 고대의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사람)으로 자처하더니,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수양대군 : (발을 구르며) 내가 처음 왕위를 물려받을 때는 무엇 때문에 말리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의지하다가 지금에 와서 나를 배반하는 것인가?
성삼문 : 내가 처음 그렇게 못한 것은 형세 때문에 그리하였소. 처음에 죽으려고 했으나 헛되이 죽는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기 때문에 거사를 기다려 일의 결과를 노렸던 것이오.
수양대군 : 너는 신하라 말하지도 않고 나를 ‘나리’라 하는데,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내가 너를 병방(兵房) 승지에서 예방(禮房) 승지로 바꾼 것은 그 일을 잘하라고 한 것인데, 말은 상왕을 복위시키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성삼문 : 상왕이 계시는데 나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 말할 수 있소? 나는 사실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 만약 믿지 못하겠으면 나의 가산(家産)을 몰수하여 계산해 보시오. 나리의 말씀은 모두 허망된 것으로 쓸 데가 없소.
수양대군 : (크게 노하여)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찔러라.
성삼문 : (팔이 끊어져도 굴복하지 않고, 천천히) 나리의 형벌이 참혹하오!
수양대군 : (쇠가 식자) 다시 달구어 오너라.

이보다 먼저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일 당시 성삼문은 관리로서 궁에서 당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난공신으로 인정하여 칭호를 내려주고 녹을 주었던 것이다. 그 때 공신들은 돌아가면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성삼문만은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담당 승지로서 나라의 옥새를 그에게 넘길 때 실성통곡하자 수양대군은 그를 째려보았다고 전한다.
바로 여기서 수양대군의 논리는 성삼문은 이미 자신의 공신이 되어 녹을 받았고, 그가 옥새까지 전달해 왕위를 정당하게 물러 받았는데, 신하로서 왜 자기를 배신했냐는 것이다. 성삼문의 논리는 당시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고, 죽으려고 해도 단종 복위를 위해서는 의미가 없어서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가 세조를 ‘나리’라고 부르고 그의 녹을 먹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때까지도 세조를 왕으로 그리고 자신을 그의 신하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배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역대 조정의 논평 기피
성삼문 등에 의한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는 이후 조선 역사에 큰 파장을 남겼다. 이후 오랫동안 그 일을 입에 담을 수 없는 하나의 금기가 작동하였다. 왜냐하면 수양대군이 왕이 된 이후로 역대의 왕은 그의 후손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곧 그 때의 일을 부정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은 자신이 섬기는 왕과 그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연산군 때 사화의 효시가 된 무오사화는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넣은 것이 발각됨으로써 일어났다. 그 때 이미 죽은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벌을 주면서 연산군이
“너희들이 누구의 조정에서 녹을 먹었느냐?”
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신진 사림은 어릴 때 『소학』을 읽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라 절의를 숭상하여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늘 생각하며 살았다. 김굉필이나 조광조 등이 성리학이나 도학을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런 이념을 실천하고자 한 일이다. 관련된 김종직의 일화도 이이(李珥 : 1536~1584)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보인다. 곧 전에 김종직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성삼문이 충신입니다.”
라고 하자 성종이 놀라 낯빛이 변하므로 종직이 천천히 아뢰기를,
“불행히 변고가 있으면 신이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니, 성종의 안색이 펴졌다고 전한다. 김종직은 성종의 성삼문이 되겠다는 임기응변으로 겨우 화를 면했지만, 실로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편한 발언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선조 때에도 그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석담일기』에 따르면 당시 박계현(朴啓賢)이 경연 자리에서 성삼문의 충성을 말하면서,
“『육신전』은 남효온이 지은 것이니, 주상께서 보시면 자세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육신전』을 보고는 놀라고 분하여 분부하기를,
“많은 말이 그릇되고 망령되게 조상을 욕하였으니, 내가 장차 조사하고 찾아내어 전부 불사르고, 또 그 전(傳)을 서로 이야기하는 자의 죄를 묻겠다.”
라고 하였다. 다행히 영의정 홍섬이 입시하였다가 육신의 충성을 극력 말했는데, 말이 심히 간절하여 모시는 신하들 가운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으니, 임금이 감동되어 깨달아 그만두었다는 기록을 보면, 성삼문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하나의 금기였다.
이 일에 대해 율곡 이이는 사육신이 진실로 충절이 있는 선비이나, 지금은 말할 것이 아니다 하고, 『춘추』에 “나라를 위하여 악한 것을 숨긴다.”고 했으니 이것도 역시 고금의 공통된 도리로 보고, 박계현이 때에 맞지 않게 말을 경솔히 내어 선조가 지나친 명령을 내리게 할 뻔 했으니 어리석어 일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토록 도학을 부르짖던 그마저도 그런 금기 사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형국이었다.
사육신의 일은 두고두고 조선의 선비 사회에서 서로 눈치 보며 침묵하다가, 드디어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의 관작이 복구되었고, 성삼문은 영조 34년(1758)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5세기의 일이 200여년이 지닌 17세기 끝에 해서 매듭지어진 일이다. 그때까지 일종의 원죄로서 선비들의 의식을 짓누른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에 대한 회한도 없지 않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하지만, 그 사건 결말에 대한 필연성과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사람 가운데 하나인 심정(沈貞)의 손자 심수경(沈守慶 : 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세조는 왕위를 노산(단종)에게서 물려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이라고 하니, 박팽년·성삼문·유성원·이개·하위지·유응부·김질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과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를 꾀하였다.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실패할 줄 알고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과 대신 김종서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을 정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당직으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이 되었다.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승지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과 선위할 때 실성통곡한 상황을 의심하고 조사하였다면 어찌 그가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현실에 어둡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에‘臣’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신 자를 쓰지 않은 그의 속마음을 조사하였다면 그가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박팽년의 처사도 물정에 어둡다고 할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어둡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이 글에는 단지 성삼문과 박팽년이 실정에 어두워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하늘의 뜻이라고 적고 있다. 이 글은 세조 정권의 탄생이 하늘의 뜻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그 실패의 책임도 그들이 치밀하지 못했다는 데 두었다. 이런 평가는 남효온의 소신 있는 기록과 달리 자기 검열의 결과일 수 있다.
이처럼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은 조선 역사에서 아주 나쁜 선례를 남겼다. 세조 자신은 물론이요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부정한 일에 가담한 자들도 심판을 받지 않음으로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나쁜 사례가 그것이다. 그 때문에 이후 수많은 사화를 일으켜 젊은 인재들을 죽인 장본인이나, 친일을 해서라도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 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아부하고 출세한 자들이 심판받지 않고 계속해 살아남았다.

너그럽지만 엄격한 황희 정승


너그럽지만 엄격한 황희 정승

 

골호인과 원칙주의자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너그러운 상사와 깐깐한 상사를 자주 비교하게 된다. 대체로 너그러운 상사가 포용성이 있고 공감 능력이 있다고 선호한다. 반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평가할 때는 너그러운 무골호인(無骨好人)보다 깐깐한 원칙주의자를 선호한다. 그는 소신과 신념이 있고 직무에 충실하다는 평을 듣는다. 만약 아랫사람이 무골호인이라면 줏대가 없이 두루뭉술하고 아첨하여 남의 비위를 다 맞추는 사람이라고 핀잔하고, 윗사람이 원칙주의라면 융통성이 없고 리더십이 경직 되었다고 불평한다.
그렇다면 상사가 되면 너그러워야 하고 부하가 되면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글쎄.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지만, 남의 기대에 본인의 행동을 일치시키기도 어렵고 그러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매사를 남의 기준으로 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의 상사도 되지만 부하인 중간 관리자의 경우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사실 한 사람의 역량과 자질을 두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양자를 구사해야 한다. 쉽게 말해 관용을 베풀 때와 원칙을 고수할 때의 상황이 제각기 있다는 것이다. 때와 형세에 딱 맞게 처신하는 것이 유학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이다. 그래서 중용을 취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말하고 있다.
조선 역사에서 너그러움의 대명사를 말할 때 흔히 황희(黃喜 : 1363~1452) 정승을 꼽는다. 예전에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실린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그가 젊었을 때 길을 가다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잡고 있는 농부에게 큰 소리로
“어느 소가 일을 잘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농부는
“쉬!”
하며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로 답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느 소가 일은 잘한다고 크게 말하면 다른 소가 화를 낼지 모르니 그랬다고 한다. 그 뒤로 황희 정승(이하 정승으로 약칭)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남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항상 너그럽게 했다는 일화이다.
이렇게 정승의 너그러운 점과 관련된 일화는 많다. 그러나 한편 정승은 공무(公務)에 있어서는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몇 개의 일화가 보인다. 이렇게 한 인물의 인격에 관용과 원칙을 고수하는 두 가지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이상적인 성품일까? 그 장점에 가려진 어두운 면은 또 없을까? 정승의 일화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되돌아보면 직장이나 가정생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너그러운 성품
정승은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고, 90살까지 살았으니 조선조 최장수 재상으로 꼽힌다. 또 정치 현장에서 관용의 리더십을 잘 발휘하여, 조선 초 국가의 기틀을 반석 위에 올리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렸다. 권별(權鼈 : ?~?)이 기록한 『해동잡록(海東雜錄)』의 종합적 평가는 이렇다. 그의 본관은 남원(南原) 장수현(長水縣)이며 자는 구부(懼夫)이고 초명이 수로(壽老),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 공양왕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네 임금을 내리 섬겼으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의정부(議政府 : 조선시대 백관을 통솔하고 여러 정무를 총괄하던 국정의 최고 기관)에 24년간을 있으면서 역대 왕들이 정해둔 법제를 준수하기에 힘쓰고 어지럽게 고치기를 즐기지 않았다. 규모가 원대하여 대신다운 풍채가 있어, 세종은 왕실의 비밀스러운 일까지도 반드시 그에게 자문했으니, 우리 왕조의 어진 재상으로는 반드시 공(公)을 제일로 친다.
이런 평가는 그가 어진 재상으로서 얼마나 임금의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어질다는 말은 너그러움과 통한다. ‘역대 왕들이 정해둔 법제를 준수하기에 힘쓰고 어지럽게 고치기를 즐기지 않았다’는 말은 그의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런 사례는 뒤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너그러운 성품이 보이는 사례는 우선 성현(成俔 :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인다. 정승은 도량이 넓어서 조그만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겸손하여, 나이 90여 세인데도 한 방에 앉아서 종일 말없이 책을 읽을 뿐이었다. 방 밖의 마당에 늦복숭아가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와서 함부로 따도, 느린 소리로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마라.”
라고 말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보니 복숭아가 모두 없어졌다. 아침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주며,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 사례는 아이들에게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것인데, 물론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좀 지나친 경우도 있다. 이 사례는 『해동잡록』에 보인다.

“공(公)이 무슨 일을 의론하고 붓으로 문서를 쓰려는데 어린 종이 그 위에다 오줌을 누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내는 기색이 없이 다만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아이들이 좌우에 몰려들어 울고불고 장난치고 깔깔대도 조금도 금하지 않았으며, 혹은 그의 턱살을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친족 가운데 고아가 되거나 과부가 되어 빈궁하여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이에 게는 반드시 재산을 털어 구휼해 주어 편안히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성가시게 굴어도 너그럽게 대했다는 사례이다. 게다가 그런 성품은 어려운 친족을 돌보는 데서도 드러나, 청빈하게 살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지금까지도 보통 사람들은 정승이 너그럽고 청빈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노라면 옛 속담의 ‘손자를 너무 귀여워하면 할애비 상투를 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승은 절제되지 않는 이같은 아이 사랑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 점은 지나치게 너그러운 데 따른 부작용일 수 있는데, 뒤의 관련된 곳에서 설명하겠다.
물론 이런 관용은 아랫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세종이 내불당(內佛堂 : 궁궐 안의 절)을 지을 당시에 정승으로 있었는데, 성균관의 유생들이 길에서 정승의 면전에서 나무라기를,
“당신은 정승이 되어 임금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오?”
라고 했으나, 정승은 성을 내지 않고 도리어 기쁘게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 세종은 대신들이 절을 짓지 못하게 간언해도 듣지 않았다. 집현전 학사들도 강력하게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집현전은 텅 비었다. 그러자 세종은 눈물을 흘리며 정승을 불러 이르기를,
“집현전 제생(諸生)이 나를 버리고 가버렸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소?”
라고 하자, 정승은
“신이 가서 달래보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학사들의 집을 두루 다니며 간곡히 청하여 왔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궁궐 안에 절을 짓는 일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유교 국가에서 있을 없는 일이지만, 정승은 그것을 봐 준 셈이다. 또 유생들이 반발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선비들의 의기(義氣)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포용성을 발휘한 일이다. 만약 정승이 훗날 조광조(趙光祖)처럼 성리학의 이념에 투철했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이 일을 용납했을지 의문이 든다. 사림이 정권을 장학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라서 이런 포용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엄격한 태도
재상이라는 직분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너그러운 성품만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른바 문란해질 수 있는 기강을 바로 잡고, 혼란해질 수 있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행정에서 일정한 원칙이랄까 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그럽지만 엄격한 태도가 요청되었다.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따르면 정승은 마음이 너그럽고 성격이 모가 나지 않아,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한결같이 예의로써 대하고, 나라 일을 논의할 때에는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너그럽지만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데서 일정한 원칙주의자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그 점은 앞의 『해동잡록』에서도 대사헌이 되어서도 원칙을 세워 하나하나 까다롭게 굴지 않아도 간악한 자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조정의 기강이 바로 서고 엄숙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통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몇 개 있다. 우선 그 가운데 하나는 『해동야언』의 기록이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폐하자 정승과 이직(李稷)이 당시에 판서(判書)로 있었는데, 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굳이 고집하다가 거의 6년 동안을 지방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는 일이 그것이다. 장자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한번은 김종서(金宗瑞)와 관련된 일인데 역시 『해동잡록』에 보인다. 곧 황희는 정승으로, 김종서는 공조 판서로 있으면서 일찍이 공적 회합을 한 적이 있었다. 김종서가 공조에 명령하여 술과 과일을 간단히 차려 올리게 했다. 정승이 그 것의 출처가 어디냐고 물었다. 공조의 서리(書吏)는 공조에서 차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승은 화를 내며,
“국가에서 의정부 곁에다 예빈시(禮賓寺)를 설치해 둔 것은 삼공(三公 : 의정부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세 정승)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만약 시장하다면 마땅히 예빈시로 하여금 차려오라고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는, 임금께 아뢰어 김종서의 죄를 청하려고 했다. 다른 여러 제상들이 말해 겨우 그만두었는데, 정승 김극성(金克成)은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이 일을 아뢰고 나서,
“대신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조정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해당 관청에서 정승을 간단히 대접하는 게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느냐마는 정승은 그 문제를 결코 묵과하지 않고 문제 삼았다. 이는 그것이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극성의 지적대로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는 기회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이런 원칙주의자다운 모습은 많은 관리들의 수장으로서 기장을 바로잡는 일이 되겠고, 또 그래서 그가 장수한 정승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부나 군대처럼 많은 사람을 관리하는 데는 사실 어떤 원칙과 기강이 필요하다. 지금은 그것이 국무총리나 국방부 장관의 소임인데, 그래서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이들에게 국회의원들의 질책이 쏟아지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다. 정승의 원래 성품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직책상 어쩔 수 없는 일기이도 하였던 것이다.

청백리와 여러 의혹
정승은 또 청백리(淸白吏)로서도 정평이 나 있다. 『해동잡록』에 황익성(黃翼成 : 황희의 시호)이 죽자, 모든 관청의 서리들에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 포화(布貨 : 화폐로 쓰이는 포목)를 내어 제사를 차렸는데, 다투어 풍성하게 차리려고 거리낌 없이 재화를 내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장례비를 남이 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추론해 보면 정승이 죽었을 때 장례치를 비용도 넉넉지 못할 정도로 청빈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 소개한 『해동잡록』에서 친족 가운데 고아가 되거나 과부가 되어 빈궁하여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이에 게는 반드시 재산을 털어 구휼했다는 기록도 그가 가난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기간 의정에 재임하거나 역임한 재상이면서도 초라한 집에서 궁핍한 생활로 일생을 보낸 인물에 대해서 조선 시대 청백리 재상의 상징으로 칭송되고 있는데, 정승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과연 청백리인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단종실록』에 보면 『세종실록』을 편찬할 당시 사관 이호문의 정승에 대한 기록을 의논한 일이 있다. 그 요지는 의논에 참여했던 허후(許詡)의 말에 등장한다. 그가 말하기를
“재상이 된 지 거의 30년에 진실로 탐하거나 더러운 일이 없었는데, 어찌 남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獄事)에서 뇌물을 받아서 재물이 많았겠는가?”
라는 것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호문의 기록은 황희가 남을 중상하고 관직을 팔고 뇌물을 받아 재물이 많았다는 기록이었던 것 같다. 구체적 내용으로 노비가 많았고 또 김익정(金益精)이 황희와 함께 서로 앞뒤로 대사헌이 되어서, 모두 중[僧] 설우(雪牛)의 금(金)을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일컬었다는 이호문의 글을 지적하고 있다.
이 논의에서는 이호문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고 단정치 못하다고 보고, 이호문의 사적인 감정에 따라 그렇게 기록했다는 성삼문(成三問)의 논증에 따라 그 기록을 삭제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그러나 정승의 자식들에게는 노비가 많음을 인정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혼인하면서 부인 쪽에서 노비를 데려 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승의 자녀들에게 노비 곧 재산이 많았던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는 정승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벼슬하여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을 하면서 잔치를 열었는데,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 때 정승은 그 일이 못마땅해
“선비가 청렴하여 비가 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집을 이렇게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느냐?”
라고 말하고 음식도 들지 않고 가버렸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에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더기가 된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둘째 아들 수신(守身)은 『해동잡록』에 따르면 음관(蔭官 : 부모의 공으로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직에 나가감)으로 출사하여 세조 때 성삼문 등의 계획을 미리 알린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이 되었고 훗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술을 잘 마셔서 주량이 홍윤성(洪允成)과 더불어 서로 적수여서 하루 종일 실컷 마셔도 조금도 취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로 보면 그의 자녀들은 정승과 풍모가 많이 달랐음을 엿볼 수 없다. 자녀들은 청렴과 지조 등의 선비의 풍격보다 부귀영화나 일신의 영달을 취했기 때문에 훗날의 평가가 그들에게는 별로 후하지 않다. 사실 이 점은 정승의 가정교육 결과일 수 있고 그 또한 그의 성품의 영향인지 모르겠다.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정승이 평소 아이들에게 너무 너그러이 대한 것도 거기에 해당되겠다. 쉽게 말해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있듯이 자녀에게도 아비로서 엄격한 가르침이 있었더라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지나친 기대일지는 모르나 아무튼 아쉬운 대목이다.
사실 정승 자신에게 아무런 허물이 없었느냐 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가 있는 법,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가령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따르면 사헌부에서 좌의정 황희가 감목관(監牧官) 태석균(太石均)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하여, 대관(臺官) 이심 (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주선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니, 황희를 파면시켜 청탁으로 법을 어기는 징조를 막으라고 탄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해동잡록』에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신창군(新昌郡) 아전 표운평(表芸平)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그 이튿날로 보방(保放 : 보증인을 세우거나 보증금을 내고 죄인을 석방함)되고 그들의 관직만 파면되었을 뿐, 후임을 내지 않고 있다가 10여 일이 지나 도로 제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건은 아마도 정승의 성품을 보아 재물의 욕심보다 인정상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여 연루되었을 수도 있겠다. 인정에 이끌리면 원칙을 지키기 어려워,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공존하기 힘들다. 천하의 황의 정승도 이렇게 한 때의 실수와 허물이 있었고, 또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남들이 흠모하는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공적과 삶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것은 작은 허물이 큰 공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품에 장점이 많고 단점이 적다면, 그 단점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너무 야박한 일이다. 그렇게 평가하는 당사자 자신을 되돌아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 그는 보통 사람이 갖추기 어려운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한 성품을 갖추었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은 서로 상충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사회생활에서도 이런 성품이 필요하다. 윗사람은 엄격하기 쉽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굴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규정과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너그러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

 

명가 삼봉 정도전

『대동야승』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삶을 알아보는 사료는 정사로서 『왕조실록』 등이 있으나, 야사로서 개인이 기록한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아니 세밀한 삶의 모습을 살피는 데는 후자가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역사 속 유교 이야기’의 이번 시리즈는 야사를 중심으로 하는데, 그 주제가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로 그 첫 번째 순서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 1342~1398)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동야승』은 한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여러 저자들이 편집하거나 기술한 총서의 이름이다.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사건이 전개되거나 인물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조선 초부터 인조 때까지이다. 해당하는 문헌은 너무 많아 여기에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고 인용하는 곳에서 저자와 서명을 밝히겠다. 또 각 문서의 내용에는 서로 중복된 것도 있는데 나중 기록이 먼저 것을 보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원본은 72권 72책의 필사본으로 편찬자나 편찬 연대는 미상이다.

 

이성계를 만나다

정도전(삼봉으로 약칭함)이 없었으면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반문해보는 것은 전혀 무리한 가정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을 건국하는 데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선의 제도와 이념과 종교·문화 등을 고려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는 왜 역성혁명을 꿈꾸었을까?

삼봉은 경상도 봉화(奉化)의 향리 출신인 정운경(鄭云敬)의 맏아들이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진출하면서 비로소 사족(士族)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염의선생(廉義先生)’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처럼, 그의 아버지는 청렴하고 정의롭게 처신하여 집안이 매우 가난해서 처자가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지 못했다고 한다.

삼봉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 큰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고, 늘 가난에 쪼들렸다. 그래서 평소에 먹는 문제에 대해 신경을 썼는지 이런 기록이 있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먹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으로 하루라도 먹지 않을 수 없는데, 또한 하루라도 구차하게 먹을 수 없으니, 먹지 않으면 생명을 해치고 구차히 먹으면 의리를 해친다.”는 그의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삼봉은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親元) 정책을 반대하다가 9년간 유배와 유랑 생활을 했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 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해동잡록』에서는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우왕 초기에는 어떤 일로 회진현(會津縣)에 귀양 갔으며, 뒤에 삼각산(북한산)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학자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일’이란 바로 친원 정책을 반대한 일이며 ‘회진현에 귀양 가고 삼각한 아래 집을 지었다’는 것은 전라도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으로 유배가고, 그 뒤 삼각산과 경기도 부평과 김포를 전전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때를 가리킨 말이다. 이 유배 생활에서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가 있다. 그 내용은 다른 총서인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먼저 아내가

 

“당신은 평일에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아침에 밥을 짓는지 저녁에 죽을 쑤는지 몰랐소. 집이 곤궁하여 한 섬 곡식도 없어 아이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울부짖을 때, 내가 안살림을 맡아 끼니를 겨우 이어간 것은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여 입신양명해서 처자식이 바라보고 힘을 얻고 가문의 영광을 일으킬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오. 마침내 나라의 형법에 걸려 이름이 욕되고 자취가 깎여서 몸이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 독한 장기(瘴氣 :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를 마시게 되었소. 형제가 나가쓰러지고 가문이 분산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렇게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현인군자도 정말 이렇게 되는 수가 있나요?”

 

라는 편지를 보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도 남편의 출세를 믿고 기다렸는데, 되레 죄를 얻어 유배를 당해 난감하다는 거였다. 삼봉이 보낸 답장의 요지는 이렇다.

 

“부부의 도는 한번 혼인을 하게 되면 종신토록 변하지 않으니,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허망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할 것이니 여기에 어찌 다른 일이 있겠는가? 각각 자기 직분을 다할 따름이다.”

 

삼봉의 답장은 아내를 신뢰하나 사대부 부부의 내외라는 직분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시사점은 ‘나는 나라를 근심한다’는 말로서, 그 기대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혁명을 꿈꾸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이런 유배와 유랑 생활과 당시 재상들의 핍박에 견대다 못해 1388년 42살 때 드디어 동북방의 군사지휘관으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다.

사실 그가 당시 재상들의 핍박을 받은 데는 정책의 노선 차이도 있지만, 또 하나는 출신 신분 때문이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였다. 이같이 당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교의 타락, 그리고 민생의 어려움 외에 삼봉 자신이 신분 차별을 당한 것도 혁명을 꿈꾸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처지와 상황에서 혁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추가 이성계를 만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해동잡록』에서 이렇게 전한다. 삼봉이 일찍이 이성계가 있는 동북면에 갔었는데, 군대의 호령이 분명하고 엄숙하며 병졸의 대오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가서 조용히 말하기를,

“장합니다.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이룩하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이성계가

“무슨 말인가?”

라고 하자 삼봉이 둘러대며 말하기를,

“동남방에서 왜적을 친다는 말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를 시작으로 삼봉은 57세에 죽을 때까지 15년간 이성계를 등에 업고 조선 왕조 창업이라는 거대한 혁명 사업을 이끌어 갔는데, 앞서 말한 9년 동안의 유배와 방랑의 세월 속에서 이 혁명의 구상을 마쳤던 것으로 보인다. 위화도회군 직후 그는 전제(田制) 개혁을 주동하였고 군권을 장악하자, 혁명의 낌새를 알아차린 보수파의 반격으로 잠시 유배를 당하였으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정권의 핵심 인사로 등장하였다.

훗날 이성계가 삼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는 『해동잡록』에 보인다. 곧 태조가 일찍이 경신일(庚申日) 밤에 정도전과 여러 훈신(勳臣)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태조가 삼봉에게,

“과인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경(卿)의 힘이요.”

라고 한 말에 보인다.

 

혁명가의 자격과 병법

혁명은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모두 성공하는 일도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쿠데타나 정변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나,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 주체가 혁명 과정의 치밀한 계획과 내세우는 이념과 구체제를 대신할 만한 구체적 방안이나 방책의 마련에 미흡했고, 혁명 이후의 실천 과정이 미숙하여 구세력에 의해 반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준비 없는 혁명은 성공하지 못한다.

삼봉은 그렇지 않았다.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였다. 찬술(撰述)한 문헌만 보아도 그가 혁명을 위하여 얼마나 준비했는지 알 수 있다. 한갓 무부(武夫, 군인 혹은 무인)가 총칼만 들고 설쳐댄다고 혁명이 완수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가 공부하여 찬술한 문헌의 종류가 너무 많아 다 거론하기 힘들지만 대표적인 것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우선 유교 국가를 만들기 위한 이념 투쟁의 일환으로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한 『심문천답(心問天答)』·『심기리편(心氣理篇)』·『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이 있고, 국가의 통치에 관한 것으로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경제문감별집』 등이 있다. 여기서 고전에서 말하는 ‘경제’는 오늘날 ‘economy’가 아니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인 말로서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안이다. 또 역사서를 편찬하고, 문학·의학·군사학·예술과 관련된 저술도 있다. 이렇듯 그는 실천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구비하여 혁명가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것은 그가 병법에도 능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우리나라 형편에 맞는 독자적인 전법을 개발하였다는 점이다. 아래는 『해동잡록』에 수록된 병법에 관한 몇 가지 사례이다.

 

〇공격하지 않고 성을 지키는 경우 : ①적군이 정예병일 때 ②우리의 원병이 장차 오게 되어 있는 경우 ③성이 튼튼하고 방어할 기구를 갖추었을 때 ④적의 군사를 지치게 하려는 경우 ⑤적의 변동을 관찰하려고 할 때

〇전투를 꼭 피해야 할 경우 : ①적의 토지가 넓고 사람이 많을 때 ②적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여 혜택이 골고루 퍼졌을 때 ③적이 벌을 주고 용서하는 일에 믿음이 있고 출발과 정지가 적당할 때 ④적의 행군하는 대오와 수레의 대열을 현명하고 유능한 지휘관에게 맡겼을 때 ⑤적의 군사가 명령에 익숙하고 무기가 정밀하고 날카로울 때 ⑥적의 사방 이웃 나라의 도움이 있고 큰 나라가 와서 도울 때

〇적을 헤아리는 방법 : ①적이 공격할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군사를 더 낼 수 없다. ②적의 정세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서약(誓約)을 받아들일 수 없다. ③적의 장수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먼저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 ④적의 군사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먼저 진을 칠 수 없다.

〇적을 이기는 데에 3가지 헤아릴 점 : ①적의 식량을 헤아려서 식량을 공략하되 식량이 보존되었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②설비를 헤아려서 설비를 공략하되 설비가 보존되었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③적의 수효를 헤아려서 집중된 것을 공략하되 집중된 것이 정연하면 공격하지 않는다.

〇군대를 부리는 8가지 방법 : ①재물을 모아 군수에 사용함 ②공장(工匠)을 세워 병기를 만듦 ③기구를 제정하여 무기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며 기(旗)와 휘(麾 : 대장의 지휘기)가 선명하게 함 ④군사를 가려낼 때 용감한 자와 겁내는 자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골라냄 ⑤명령을 바르게 하여 호령이 엄명하고 상벌하는 데 반드시 미덥게 함 ⑥복종하는 것을 익히는 것으로 금지할 일과 금(金 : 퇴각을 알리는 징소리)과 고(鼓 : 전진을 명하는 북소리)의 절차를 밝히고, 나아가고 물러서고 치고 찌르는 기술을 익힘 ⑦지세의 험하고 평탄한 것과 주장(主將)의 능숙하고 무능한 것과 군사들이 용감하고 겁내는 것, 그리고 군사의 무리가 많고 적은 것을 아는 것 ⑧기회를 재빨리 포착하는 것으로 때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만들고 때에 따라 변법을 쓰는 일

 

혁명의 완수와 후세의 평가

조선의 기틀은 삼봉의 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젊어서 공부할 때 궁핍하고 또 유배를 당해 어려움에 처했으나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혁명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흔치 조선 왕조의 탄생을 연극에 비유하여 정도전 각본, 이성계 주연, 이방원 연출이라고 하는데, 삼봉은 각본을 쓴 이상의 역할을 하였다. 권근이 기초한 「교판삼사사정도전(敎判三司事鄭道傳)」에서 태조가 이르기를,

 

“경은 학문은 경전과 역사에 정통하고 지식은 고금을 관철하였다. 정당한 논의는 모두 성현의 말에 근본을 두고, 인물의 선악에 밝음은 반드시 충성과 사악함에 따라 분별하였으며, 나를 도와 개국하여 큰 공을 이루었다. 아름다운 꾀는 정교(政敎)의 시행을 보충할 만하고, 웅장한 필치는 제작(制作)의 책임을 부탁할 만하다. 온화한 유학자의 기상이요, 준수한 대신의 풍도이다. 내가 즉위하던 처음에 나는 경의 유용한 학문을 알았다. 이에 재상의 반열에 있게 하고, 또 국사(國史)를 편수하는 관직을 겸하게 하였는데, 과연 직무를 수행하는 여가에 편수하는 공적을 이루었다.”

 

라고 할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의 내조도 크다 하겠다. 권근이 쓴 ‘삼봉부인최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 남편을 섬김에는 순종하면서 의로웠고, 자손을 가르침에는 사랑하면서 엄하였고, 친족에게 대하여는 은혜로우며 앞서서 일을 처리하였고, 노비를 다루는 데는 무섭게 하면서도 용서하였다고 하고, 또 이것은 비록 그의 아름다운 천품에 의한 것이겠으나 역시 인격적으로 서로 대하는 데에서 얻은 바 있다(『동문선』)고 하였다.

그러나 삼봉은 조선 시대 내내 간신으로 평가되다가 고종 때 와서야 신원이 회복되었다. 그것은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삼봉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삼봉이 이렇게 대우를 받은 것은 훗날 성삼문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여 역대 조정으로부터 받았던 대우와 유사하다. 어찌 보면 삼봉이 조선 왕조를 개창한 공이 성삼문보다 더 크지만 그 대우는 그보다 더 가혹하다 하겠다. 그렇게 된 까닭은 이른바 ‘1차 왕자의 난’과 관련이 있는데, 『해동잡록』에는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으려 모의하여 이방원이 그를 죽였다고 한다. 곧 삼봉이 방석을 세자로 삼으려고 꾀하였는데, 이방원이 이를 알고서 무사를 거느리고 삼봉 등을 찾으니, 삼봉이 도망하여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다고 한다. 이 때 민부가 큰 소리로

“배불뚝이가 내 집에 들어왔소.”

라고 하여, 군인들이 곧 찾으니, 정도전이 기어서 칼을 짚고 나오자 붙잡아서 이방원 앞에 나아갔다. 삼봉이 우러러보며,

“나를 살려 주신다면 힘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이방원이

“네가 이미 왕씨를 배반하고 또 이씨를 배반하려느냐?”

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베어 죽였다. 그 아들 유(游)·영(泳)도 죽임을 당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의 분위기에는 삼봉을 비하하는 느낌도 발견되는데, 이는 조선 시대 삼봉의 위상을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권근은 개인적으로 삼봉과 매우 친하여 삼봉의 글에 대한 서문도 지은 사람인데, 가령 『삼봉집』 서문에서 선생은 절의가 가장 높고 학술이 가장 정밀하였으며, 일찍이 바른 말로 재상을 거슬려 남방으로 유배되어 10년을 났으나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하였고, 공리(功利)의 무리와 이단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업신여기고 헐뜯어도 그 지킴이 더욱 견고하니, 선생은 도의 믿음이 독실하여 의혹하지 않는 분이라 이를 만하다고 하였으나, 훗날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신도비에서 ‘간신 정도전’이라 쓸 정도로 공식적으로는 삼봉을 간신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삼봉은 세자 자리가 막내 방석에게 돌아가는 데 동의했을까? 물론 태조의 뜻이라 거역할 수도 없었겠고, 왕은 상징적 존재이고 재상이 정치적 실권을 가져야 한다는 평소의 이상도 작용했고, 또 태조의 전 처 소생의 왕자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혁명을 성공시킬 정도로 명민한 그가 사태가 나쁘게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태조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방원이 왕명을 거역하고 형제를 죽일 수도 있다는 점을 유학자로서 상상도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 일은 실로 안타까운 사건이고, 그것이 선례가 되어 훗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등도 거리낌 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런 일은 훗날 위세와 억압으로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는 선례로 때로는 자기 검열로도 작용하여, 조선 시대 선비들은 삼봉과 성삼문 등의 일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거론조차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봤을 때 고려의 충신으로 상징되는 정몽주는 문묘에 배향되어 선비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 반면, 삼봉은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하고 기초를 다진 불멸의 공이 있지만, 단지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줄곧 간신으로 평가되었다. 여기에는 삼봉의 출신이 사대부들로부터 줄곧 따돌림을 당하는 빌미가 되었고, 혁명을 통한 이전 왕조의 배반이라는 도덕적 판단, 또 학맥에 따라 사공(事功 : 공적)보다 절의를 높이는 유생들이 그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 분위기, 무엇보다 이방원이 역대 왕들의 조상이었기 때문에 그와 대립적 입장에 있던 삼봉이 좋게 평가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한 시대만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두고두고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