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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동자 김굉필


소학동자 김굉필

 

끄러움을 모르는 사회

우리나라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어 선진국의 대열에 명함을 내밀 위치에 왔다고 자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명암이 분명히 있다. 배고팠던 시절을 경험한 세대들에게는 그 경이로움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 때의 가치와 문화를 고수하며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겠지만, 일터를 잃거나 취업을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하는 젊은이들은 세상이 바뀌기를 바랄 것이다.
이제 사적인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일은 잘 사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모두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전자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후자는 생존을 위해서 그러하다. 그러다보니 법에 저촉 되는 일만 아니라면 이익 추구 앞에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무시 된지 오래이다. 이런 풍조는 우리 현대사가 알게 모르게 만들었고, 거기서 자란 후속 세대들은 사회로부터 배우고 본받을 게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점점 뻔뻔해지고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니,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자본주의의 고약한 최면에 걸려 남과 세상에 아첨해 돈을 벌려는 것이 일상이다. 사회생활이나 어떤 조직에서 도덕적인 사람이 바보 취급을 당한다는 일은 이제 초등학생들도 안다. 예의와 염치와 고상한 품위를 앞세웠던 교과서의 전통문화는 그저 시험 준비에 필요한 지식일 뿐이다.
이런 세상을 도덕적이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문화가 넘치는 사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면 그것을 준비하는 선각자나 그를 따르는 세력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일은 조선 전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는 고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불교를 버리고 유교 이념으로 조선을 새롭게 이끌고자 하였으나, 그것에 실효성이 있는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시기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그 이념의 구체적 규범과 사례를 몸소 실천하고 가르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 1454~1504)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다.

조선의 성리학 정착과 『소학』
성리학(性理學)은 유학의 한 갈래이다. 중국 북송을 거쳐 남송 때 완성한 학문으로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유학의 정신을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학문으로, 달리 송학(宋學)·정주학(程朱學)이라 부른다. 특히 남송 때 그것을 완성한 주희(朱熹)의 학문을 따로 분리해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조선의 성리학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주자학이 고려 말에 들어왔지만 그것이 바로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초기만 해도 여전히 불교문화와 도교의 그것이 사회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왕실에서 불교를 믿기도 하고, 「훈민정음」을 실험해 본 것 가운데 하나도 불경의 번역이었으며, 중종 때까지도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사원인 소격서(昭格署)가 존재했다. 선생이 살았을 때만 해도 여전히 그 영향 아래 있었고, 백성들은 물론 선비들과 고위 관리들마저도 성리학적 가치관과 습속에 철저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유학자들도 한나라 당나라 시대의 시문(詩文)을 익히는 문학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 또한 겉으로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을 표방하였으나 여전히 시문을 짓는 학문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런 풍토에서 선생이 『소학』을 중시한 것은 성리학적 맥락이 있다. 허봉(許篈 : 1551~1588)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면 동방의 선비들이 모두 문사(文詞 : 문학)를 업으로 하였으나, 성리학에 몰입하여 몸가짐을 예로써 하였고, 염락관민(濂洛關閩 : 성리학을 상징하는 말)의 계통을 찾은 이는 김굉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대학에서 조선유학사를 강의할 때 흔히 조선 유학의 도통(道統)을 정몽주(鄭夢周)에서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진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성리학적 이념이 조선에 정착하는 과정과도 일정한 맥락이 통한다. 길재 이하의 공통점은 모두 『소학』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사실 『소학』은 『대학』처럼 전해 오는 책이 없었다. 남송 때 주희가 자신의 감독 하에 제자를 시켜 편찬한 책으로, 유교 경전에 흩어져 있는 기초 교육으로서 필요한 내용들을 모았다. 이는 유학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하·은·주 삼대(三代) 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신서(修身書)이다. 『대학』이 이론적이고 이념적이라면 『소학』은 그것을 현실 생활에서 실천하는 규범과 그 사례로 이루어져 있어서,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경서를 읽을 때 『소학』을 어린 아이들이 읽는 것이라 치부하고 『대학』부터 읽었다고 한다. 주희는 『대학장구』를 지어 『대학』을 성리학으로 해설하였지만, 그런 성리학 이념이 생활에서 실행되도록 반영한 책이 바로 이 『소학』이다. 요즘말로 말하면 성리학 이념의 토대 위에 바른 습관 형성을 위한 도덕 교과서인 셈이다.
그런데 조선 초에 『소학』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선생이 강조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관련이 있다. 훗날 연산군 때 사화의 계기가 된 것도 『소학』의 가르침에 따라 그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는 김종직과 그 제자들의 행적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초에 넣음으로써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이른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을 두고 조정에서 갈등을 일으킨 큰 사건이었다. 물론 『소학』에도 등장하는 이 가르침은 부귀영화라는 현실적 욕망과 충절(忠節)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두고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진정한 선비라면 당연히 선택해야만 했던 화두를 던진 사건이었다.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선생은 이런 부귀영화를 바라는 욕심, 곧 탐욕을 막으려면 작은 욕심부터 막아야 하는데, 그 실천적 규범과 사례가 바로 『소학』의 내용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줄곧 강조하였다.
선생은 교육을 통해 『소학』의 실천을 보급하려 하였고, 중종 때 제자 조광조(趙光祖)의 활약으로 『소학』이 정책적으로 중시되기는 했으나 그의 실각으로 위기가 있었고, 훗날 그가 복권되고 그의 제자인 김안국(金安國) 등의 활약으로 『소학』을 널리 유포하여 성리학적 이념이 생활에 침투되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명실 공히 주희의 성리학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물론 그 폐단도 함께 노출하였다.

자칭 소학동자
선생은 21살 때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을 스승으로 찾았다. 그 때 그에게서 『소학』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듣게 된다. 권별(權鼈 : ?~?)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따르면 선생은 김종직에게 『소학』을 배웠고, 이때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글을 읽어도 아직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였더니(業文猶未識天機)
『소학』책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小學書中悟昨非)
이것을 좇아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 다하리니(從此盡心供子職)
구차하게 좋은 옷 살찐 말을 부러워해 무엇 하리(區區何用羨輕肥)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김종직이 이를 평하기를,
“이 말은 곧 성인(聖人)이 되는 기초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은 21살 때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고, 27살 때 생원시에 합격한 뒤로 출사를 위해 과거에 응한 기록은 없고, 40세가 되어서야 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관직에 오른다. 그러니까 적어도 23년의 동안은 재야에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서당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해동잡록』에서는 일찍이 김종직을 따라 『소학』을 배웠는데 평생을 『소학』으로써 몸을 단속하였고, 성리학에 정통하여 이 학문을 일으키고 후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고 전하여, 선생이 스스로 수양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이 기록에는 선생은 후배를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고 한다.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 온 학생들이 집안에 차고, 날마다 경서를 가지고 당(堂)에 오르므로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그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서 『소학』으로 자신의 몸을 닦고 옛 성현을 법도로 삼아 후학을 불러다가 성심껏 쇄소(洒掃)의 예를 가르쳤으므로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은 이가 앞뒤로 가득하여 비방하는 의론이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고 전하여, 그것이 『소학』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쇄소(물 뿌리고 비질하는 것)의 예’와 ‘육예(예절·음악·활쏘기·글쓰기·수레몰기·셈하기)의 학문’이란 고대 소학에서 가르쳤다는 내용으로 『소학』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선생이 교육에만 전념했을까? 어떤 교육이든 교육자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몸소 체현해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가르침이 먹히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선생의 평소 몸가짐과 태도가 중요하게 드러난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선생은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닭이 울 때 일어나 종일 똑바로 앉아 학문을 닦고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집안사람들도 일찍이 그의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또 김정(金淨 : 1486~1521)의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에 기록된 상소에서는 선생의 행동에는 포용성이 있었고, 일처리에도 도량이 있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데에 공경함이 없는 데가 없었고, 순순하게 지성으로 제자를 가르쳤고,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 여러 차례 환난을 겪었으나 고요하게 처신하였으며, 공경하는 마음을 독실하게 하여 죽을 때까지 해이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몸가짐은 선생이 귀양 가서 참형을 당한 순간에도 목욕하고 관대(冠帶)를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벗겨진 한 쪽 신을 도로 신고 손으로 그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동잡록』은 전한다. 죽을 때까지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소학』의 가르침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이런 삶을 살았기에,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평소에 누가 당시의 시사(時事)를 물었을 때 선생은 대뜸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라고 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로 칭했다고 한다. 사실 선생은 평생 『소학』만 공부하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30살이 넘어서 다른 책도 섭렵했다고 한다. 여기서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한 말의 배경은 두 가지로 상상할 수 있다. 하나는 정말로 『소학』에 몰두 하여 그렇게 칭했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남들이 여태 『소학』만 공부하고 가르치는 ‘소학동자’의 노릇을 한다고 빈정대는 말을 받아서 할 수도 있다. 사실이 어떻든 선생이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소학』의 내용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친 것만은 분명했다.
사실 선생이 이 같은 도학군자가 된 것은 교육과 『소학』의 영향도 컸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선생은 어렸을 때 호탕하고 놀기 좋아하고 거리끼는 바가 없어, 거리나 시장에 돌아다니면서 도리에 어긋나는 모습을 모면 사람이나 시장의 물건 할 것 없이 막대기로 후려쳤다고 한다. 이렇게 과격했지만 교육과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사람이 좋게 변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마 자신의 경험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입증해 보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선생은 교육을 통해 조용한 혁명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성리학의 가르침을 통해 부귀영화보다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도덕적 사회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것도 지도자인 왕과 그 왕을 보좌하는 사대부들이 앞장서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함을 말한다. 선생이 가르친 내용은 사소한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것이 체득되지 않으면 한없는 탐욕에 빠져들어 자신의 몸과 나라를 망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선생의 교육은 바로 이런 우려에서 출발하였다.

꿈의 좌절과 그 영향
교육과 실천을 통해 성리학의 실효성을 입증해 보이려는 선생의 학문 특징은 몸을 닦는 수기(修己)에 치중해 있다. 그럼으로써 조선 사회를 성리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이상 사회가 될 것이라 믿었다. 이것이 선생이 꿈꾸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꿈은 선생이 억울하게 죽음으로써 좌절되었다. 그 실패는 이미 당시의 훈구파와 사림의 갈등 속에서 예고되어 있었다. 갈등은 언제나 그렇듯이 칼자루와 힘을 가지고 있는 보수파가 이기게 되어 있다. 무오·갑자사화는 겉보기에는 폭군 연산군의 일탈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신진사류와 훈구대신들의 오래된 갈등과 반목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이런 상황은 선조 중반까지 크고 작은 옥사(獄事)로 반복된다. 아니 지금도 양상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선생은 사화에 직접 관련된 당자자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연루된 것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사림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을 사화를 주동한 자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이념을 최전선에서 실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던 남효온(南孝溫)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은 “『소학』으로 몸을 다스리고 성인을 표준으로 하고 후학을 불러 차근차근 잘 이끌어 가니 『소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앞뒤로 가득하였다. 그를 비방하는 논의가 앞뒤로 가득 하려고 하자, 정여창(鄭汝昌)은 그만 두도록 권하였으나 김굉필은 듣지 않았다.”라고 한다. 곧 『소학』의 내용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그 이념에 충실한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 훈구파들에게는 이미 눈에 가시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신진사류들은 틈만 나면 훈구파 대신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대신들은 신진사류가 버릇없다 한 반면, 신진사류는 대신들이 탐욕스럽고 덕이 없다는 것이 그 주요 동기였다. 그러니까 신진사류가 훈구대신들을 비판하는 무기가 바로 『소학』의 가르침이 들어 있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진보 진영의 인사들은 주로 도덕성을 가지고 보수 진영을 공격하지 않는가?
사실 선생도 그 스승이 출사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고 시로 비판한 적이 있다. 곧 성종 16년(1485)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자 선생이 시를 보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전한다.

도는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얼음물을 마시는 것에도 있는데(道在冬裘夏飮氷)
비가 개면 가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만 온전히 능숙하겠습니까(霽行潦止豈全能)
난초 같은 이도 세속에 따라 마침내 변해야 하는 것이라면(蘭如從俗終當變)
이제 소가 밭 갈고 말이 탈만한 것임을 누가 믿겠습니까(誰信牛耕馬可乘)

라고 하니 김종직은 당혹스러웠다. 그는 답장에서 성리학적 이념 실천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후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고, 또한 시세에 아부하며 이해득실에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우명행록』에는 두 사람이 시를 주고받고 ‘마침내 갈렸다’고 적었다. 이로 보면 선생의 학문 목표와 스승의 그것과 달랐다고 하겠다. 모르긴 해도 그의 스승은 『소학』을 수양하는 데만 활용하고, 학문은 시와 문장을 짓는 데 치중한 같다. 바로 선생의 이런 근본주의적 학문의 성격과 실천 태도 때문에 사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훈구파에 의한 ‘요주의 인물’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의 죽음으로써 꿈마저 좌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제자 조광조가 수기(修己)의 차원을 넘어서서 치인(治人)의 단계에 적용하여 국가의 제도를 개혁하였고, 또 그것을 더 진행하다가 그도 좌절을 당해 그 일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이후 신지 사류가 대거 진출함으로써 명실 공히 성리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훗날 조선 사회가 이상 국가가 된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도덕적 이념만으로 세상을 이끌 수 없는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다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이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해 그 실효성을 입증해내야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이 성리학이 지배하는 국가로 완전히 정착하는 데 선생의 공이 크다고 하겠다. 오늘날은 사회 변혁을 위해 어떤 이념과 그 실천이 필요할까?

성삼문과 ‘나리’


성삼문과 ‘나리’

 

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굴욕

역사적으로 어떤 정권이 정통성이 없고 부당한가? 왕조 시대에 있을 법한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모시던 왕을 시해(弑害)하고 왕위를 찬탈한 정권, 곧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을 말한다. 반면 폭군인 왕을 몰아내고 새 왕을 세우는 일은 혁명(革命)이라 부르지 찬탈이라고 하지 않는다. 혁명이란 말 그대로 하늘의 명이 다른 이에게 옮겨갔기에 하는 일이다. 『맹자』에는 혁명의 정당성을 매우 제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국가에서는 부정 선거나 쿠데타 또는 내란을 일으키고 민심을 선동하여 정권을 잡는 경우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찬탈이냐 혁명이냐를 규정하는 기준 자체는 민심의 향배에 의하여 좌우될 수밖에 없지만, 그마저도 집권 후의 정권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라는 현실적 논리에 따라, 지면 역모가 되고 이기면 혁명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그런 억지 주장은 훗날 역사의 심판에 따른 단죄를 피해갈 수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춘추대의(春秋大義 : 공자가 『춘추』를 기록한 의리와 그 정신)’를 기준으로 역사를 평가하려는 전통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史觀)은 다양하다.
우리 역사에서 부당하다고 평가되는 정권은 여러 개 있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정권에 저항한 성삼문(成三問 : 1418~1456) 등은 멸문의 화를 당하고, 그에게 협조한 한명회(韓明澮) 같은 이는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그의 조정에 출사해야 했던 대다수 선비들은 내적인 갈등을 겪으며 굴욕적 삶을 살았다.
이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고두고 조선 선비들이 저항이냐 굴욕이냐를 두고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간신이 득세한 조정에서 또 일제 강점기 일제에 저항하느냐 협조하느냐 또는 호구지책을 위해 굴욕적으로 벼슬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이 상황의 연장이고, 광복 후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서 영달을 위해 협력하든지 아니면 굴욕적으로 묵인해야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비록 말단 공무원이라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적극 협조하는 자도 있고, 굴욕적이지만 생계 때문에 해당 정권에 협조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행적은 단지 전근대적 충(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정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의 의리란 어떤 것이며, 권력의 정당성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일신의 영달과 공동체 질서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서야할지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그의 삶과 행적을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집현전의 학사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과 출신의 출중한 인재들을 모아 집현전 학사로 임용하였다. 20명의 학사를 두었는데 주로 왕과 세자의 학문을 위해 강의하거나 서적 편찬, 연구 등의 임무를 주었다. 근무 규정은 매우 엄격하여 일찍 출군하고 늦게 퇴근하는 방식이며, 아침과 저녁밥은 궁에서 제공했다고 한다. 또 숙직하는 인원을 두어 왕과 세자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학문상의 자문에 응할 수 있게 하였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따르면 이런 일도 있었다.

“문종이 동궁(왕세자)에 오래 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학문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달이 밝고 사람이 잠든 뒤면 간혹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와서 어려운 것을 물었다. 당시 성삼문 등은 숙직할 때에 밤이라도 감히 의관을 풀지 못하였다. 하루는 한밤중이 되어 세자(문종)가 오지 않을 줄 알고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우려고 하다가 갑자기 문밖에 신발소리가 나며 성삼문을 부르면서 오니, 놀라 당황하여 얼떨결에 절할 정도였다. 학문에 대한 근면과 선비를 좋아하던 마음은 천고에 드문 일이었다.”

문종이 학문을 좋아하고 사적으로 성삼문과 친하게 지낸 사례는 허봉(許篈 : 1551~1588)이 기록한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에도 보인다. 문종과 집현전 학사와의 관계는 이것 외에도 많은데, 가령 심광세(沈光世 : 1577년~1624)의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신숙주(申叔舟)가 젊었을 때에 성삼문·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하고, 옥당(玉堂 : 홍문관)에 있으면서 함께 문종의 탁고(托孤 : 어린 자식에 대한 부탁)의 분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문종은 집현전 출신의 학사들을 이렇게 의지하고 믿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학사들 가운데서 젊고 총명한 자를 엄선해서 장기간의 휴가를 주고 절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성삼문은 박팽년·신숙주·하위지(河緯地)·이석형(李石亨) 등과 함께 삼각산(북한산) 진관사에 가서 학문을 닦았다. 또 이들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를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죄를 지어 요동(遼東)에 귀양 와 있었는데, 성삼문·신숙주로 하여금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가 요동에 가서 황찬을 보고 음운(音韻)을 질문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요동에 왕래하는 것이 열세 번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협력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세종의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신임은 『해동잡록』에서 성삼문이 국문장에서 신숙주에게 한 말에서도 보이는데,
“처음 그대와 집현전에 같이 있었을 때 세종께서 매일 왕손(단종)을 안고 집현전에 나와 산보를 즐기시면서 여러 학사들을 보고, ‘내가 죽은 뒤에 경들은 모름지기 이 애를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대 혼자 잊어버렸느냐?”
라고 한 말에서도 세종 또한 학사들을 얼마나 믿었는지 증언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집현전 학사 출신들에게는 자기들을 아끼고 믿어주었던 임금에 대해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도덕적이고 이념적인 유교적 가르침을 떠나, 인간적인 관계에서 볼 때도 배반하기 참으로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성삼문과 수양대군의 정당성 논쟁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은 명분 가운데 하나는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들의 무리로부터 왕권을 확립하고 이들로부터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좋게 말하면 왕권 강화였다. 실제로 단종은 어리고 김종서(金宗瑞)나 황보인(皇甫仁) 같은 신하들의 정치력이 컸으므로, 이들이 딴마음을 먹으면 왕권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호사가나 일부 학자들은 개국 이래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부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에 따른 왕자의 난, 조광조의 개혁의 좌절 등도 그런 것이라 규정한다. 그래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부득이한 조처라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이런 관점에서 중종과 선조 그리고 숙종 때의 사화나 수많은 정변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그것을 악용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 논리라면 왕권 강화에 따른 희생이 너무 컸으니 조선은 진작 망했어야 했다.
아무튼 성삼문과 수양대군의 논리 싸움은 단종 복위 운동이 김질(金礩)의 밀고로 실패로 끝난 뒤, 국문하는 현장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의 내용이 반영된 『해동잡록』과 권응인(權應仁 : ?~?)의 『역대요람(歷代要覽)』, 『동각잡기』 등을 참고하여 그 때의 대화를 재구성해 보았다.

수양대군 : (김질의 밀고대로 사실 여부를 따져 묻자)
성삼문 : 모두 사실이오.
수양대군 :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는가?
성삼문 : 상왕이 한창 젊은데도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려는 것은 신하로서의 당연히 할 일이오. 다시 무엇을 물으시오? 나리가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周公 : 중국 고대의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사람)으로 자처하더니,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수양대군 : (발을 구르며) 내가 처음 왕위를 물려받을 때는 무엇 때문에 말리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의지하다가 지금에 와서 나를 배반하는 것인가?
성삼문 : 내가 처음 그렇게 못한 것은 형세 때문에 그리하였소. 처음에 죽으려고 했으나 헛되이 죽는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기 때문에 거사를 기다려 일의 결과를 노렸던 것이오.
수양대군 : 너는 신하라 말하지도 않고 나를 ‘나리’라 하는데,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내가 너를 병방(兵房) 승지에서 예방(禮房) 승지로 바꾼 것은 그 일을 잘하라고 한 것인데, 말은 상왕을 복위시키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성삼문 : 상왕이 계시는데 나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 말할 수 있소? 나는 사실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 만약 믿지 못하겠으면 나의 가산(家産)을 몰수하여 계산해 보시오. 나리의 말씀은 모두 허망된 것으로 쓸 데가 없소.
수양대군 : (크게 노하여)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찔러라.
성삼문 : (팔이 끊어져도 굴복하지 않고, 천천히) 나리의 형벌이 참혹하오!
수양대군 : (쇠가 식자) 다시 달구어 오너라.

이보다 먼저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일 당시 성삼문은 관리로서 궁에서 당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난공신으로 인정하여 칭호를 내려주고 녹을 주었던 것이다. 그 때 공신들은 돌아가면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성삼문만은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담당 승지로서 나라의 옥새를 그에게 넘길 때 실성통곡하자 수양대군은 그를 째려보았다고 전한다.
바로 여기서 수양대군의 논리는 성삼문은 이미 자신의 공신이 되어 녹을 받았고, 그가 옥새까지 전달해 왕위를 정당하게 물러 받았는데, 신하로서 왜 자기를 배신했냐는 것이다. 성삼문의 논리는 당시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고, 죽으려고 해도 단종 복위를 위해서는 의미가 없어서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가 세조를 ‘나리’라고 부르고 그의 녹을 먹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때까지도 세조를 왕으로 그리고 자신을 그의 신하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배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역대 조정의 논평 기피
성삼문 등에 의한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는 이후 조선 역사에 큰 파장을 남겼다. 이후 오랫동안 그 일을 입에 담을 수 없는 하나의 금기가 작동하였다. 왜냐하면 수양대군이 왕이 된 이후로 역대의 왕은 그의 후손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곧 그 때의 일을 부정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은 자신이 섬기는 왕과 그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연산군 때 사화의 효시가 된 무오사화는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넣은 것이 발각됨으로써 일어났다. 그 때 이미 죽은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벌을 주면서 연산군이
“너희들이 누구의 조정에서 녹을 먹었느냐?”
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신진 사림은 어릴 때 『소학』을 읽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라 절의를 숭상하여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늘 생각하며 살았다. 김굉필이나 조광조 등이 성리학이나 도학을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런 이념을 실천하고자 한 일이다. 관련된 김종직의 일화도 이이(李珥 : 1536~1584)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보인다. 곧 전에 김종직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성삼문이 충신입니다.”
라고 하자 성종이 놀라 낯빛이 변하므로 종직이 천천히 아뢰기를,
“불행히 변고가 있으면 신이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니, 성종의 안색이 펴졌다고 전한다. 김종직은 성종의 성삼문이 되겠다는 임기응변으로 겨우 화를 면했지만, 실로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편한 발언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선조 때에도 그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석담일기』에 따르면 당시 박계현(朴啓賢)이 경연 자리에서 성삼문의 충성을 말하면서,
“『육신전』은 남효온이 지은 것이니, 주상께서 보시면 자세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육신전』을 보고는 놀라고 분하여 분부하기를,
“많은 말이 그릇되고 망령되게 조상을 욕하였으니, 내가 장차 조사하고 찾아내어 전부 불사르고, 또 그 전(傳)을 서로 이야기하는 자의 죄를 묻겠다.”
라고 하였다. 다행히 영의정 홍섬이 입시하였다가 육신의 충성을 극력 말했는데, 말이 심히 간절하여 모시는 신하들 가운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으니, 임금이 감동되어 깨달아 그만두었다는 기록을 보면, 성삼문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하나의 금기였다.
이 일에 대해 율곡 이이는 사육신이 진실로 충절이 있는 선비이나, 지금은 말할 것이 아니다 하고, 『춘추』에 “나라를 위하여 악한 것을 숨긴다.”고 했으니 이것도 역시 고금의 공통된 도리로 보고, 박계현이 때에 맞지 않게 말을 경솔히 내어 선조가 지나친 명령을 내리게 할 뻔 했으니 어리석어 일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토록 도학을 부르짖던 그마저도 그런 금기 사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형국이었다.
사육신의 일은 두고두고 조선의 선비 사회에서 서로 눈치 보며 침묵하다가, 드디어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의 관작이 복구되었고, 성삼문은 영조 34년(1758)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5세기의 일이 200여년이 지닌 17세기 끝에 해서 매듭지어진 일이다. 그때까지 일종의 원죄로서 선비들의 의식을 짓누른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에 대한 회한도 없지 않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하지만, 그 사건 결말에 대한 필연성과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사람 가운데 하나인 심정(沈貞)의 손자 심수경(沈守慶 : 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세조는 왕위를 노산(단종)에게서 물려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이라고 하니, 박팽년·성삼문·유성원·이개·하위지·유응부·김질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과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를 꾀하였다.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실패할 줄 알고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과 대신 김종서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을 정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당직으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이 되었다.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승지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과 선위할 때 실성통곡한 상황을 의심하고 조사하였다면 어찌 그가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현실에 어둡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에‘臣’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신 자를 쓰지 않은 그의 속마음을 조사하였다면 그가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박팽년의 처사도 물정에 어둡다고 할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어둡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이 글에는 단지 성삼문과 박팽년이 실정에 어두워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하늘의 뜻이라고 적고 있다. 이 글은 세조 정권의 탄생이 하늘의 뜻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그 실패의 책임도 그들이 치밀하지 못했다는 데 두었다. 이런 평가는 남효온의 소신 있는 기록과 달리 자기 검열의 결과일 수 있다.
이처럼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은 조선 역사에서 아주 나쁜 선례를 남겼다. 세조 자신은 물론이요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부정한 일에 가담한 자들도 심판을 받지 않음으로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나쁜 사례가 그것이다. 그 때문에 이후 수많은 사화를 일으켜 젊은 인재들을 죽인 장본인이나, 친일을 해서라도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 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아부하고 출세한 자들이 심판받지 않고 계속해 살아남았다.

너그럽지만 엄격한 황희 정승


너그럽지만 엄격한 황희 정승

 

골호인과 원칙주의자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너그러운 상사와 깐깐한 상사를 자주 비교하게 된다. 대체로 너그러운 상사가 포용성이 있고 공감 능력이 있다고 선호한다. 반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평가할 때는 너그러운 무골호인(無骨好人)보다 깐깐한 원칙주의자를 선호한다. 그는 소신과 신념이 있고 직무에 충실하다는 평을 듣는다. 만약 아랫사람이 무골호인이라면 줏대가 없이 두루뭉술하고 아첨하여 남의 비위를 다 맞추는 사람이라고 핀잔하고, 윗사람이 원칙주의라면 융통성이 없고 리더십이 경직 되었다고 불평한다.
그렇다면 상사가 되면 너그러워야 하고 부하가 되면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글쎄.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지만, 남의 기대에 본인의 행동을 일치시키기도 어렵고 그러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매사를 남의 기준으로 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의 상사도 되지만 부하인 중간 관리자의 경우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사실 한 사람의 역량과 자질을 두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양자를 구사해야 한다. 쉽게 말해 관용을 베풀 때와 원칙을 고수할 때의 상황이 제각기 있다는 것이다. 때와 형세에 딱 맞게 처신하는 것이 유학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이다. 그래서 중용을 취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말하고 있다.
조선 역사에서 너그러움의 대명사를 말할 때 흔히 황희(黃喜 : 1363~1452) 정승을 꼽는다. 예전에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실린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그가 젊었을 때 길을 가다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잡고 있는 농부에게 큰 소리로
“어느 소가 일을 잘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농부는
“쉬!”
하며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로 답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느 소가 일은 잘한다고 크게 말하면 다른 소가 화를 낼지 모르니 그랬다고 한다. 그 뒤로 황희 정승(이하 정승으로 약칭)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남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항상 너그럽게 했다는 일화이다.
이렇게 정승의 너그러운 점과 관련된 일화는 많다. 그러나 한편 정승은 공무(公務)에 있어서는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몇 개의 일화가 보인다. 이렇게 한 인물의 인격에 관용과 원칙을 고수하는 두 가지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이상적인 성품일까? 그 장점에 가려진 어두운 면은 또 없을까? 정승의 일화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되돌아보면 직장이나 가정생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너그러운 성품
정승은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고, 90살까지 살았으니 조선조 최장수 재상으로 꼽힌다. 또 정치 현장에서 관용의 리더십을 잘 발휘하여, 조선 초 국가의 기틀을 반석 위에 올리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렸다. 권별(權鼈 : ?~?)이 기록한 『해동잡록(海東雜錄)』의 종합적 평가는 이렇다. 그의 본관은 남원(南原) 장수현(長水縣)이며 자는 구부(懼夫)이고 초명이 수로(壽老),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 공양왕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네 임금을 내리 섬겼으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의정부(議政府 : 조선시대 백관을 통솔하고 여러 정무를 총괄하던 국정의 최고 기관)에 24년간을 있으면서 역대 왕들이 정해둔 법제를 준수하기에 힘쓰고 어지럽게 고치기를 즐기지 않았다. 규모가 원대하여 대신다운 풍채가 있어, 세종은 왕실의 비밀스러운 일까지도 반드시 그에게 자문했으니, 우리 왕조의 어진 재상으로는 반드시 공(公)을 제일로 친다.
이런 평가는 그가 어진 재상으로서 얼마나 임금의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어질다는 말은 너그러움과 통한다. ‘역대 왕들이 정해둔 법제를 준수하기에 힘쓰고 어지럽게 고치기를 즐기지 않았다’는 말은 그의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런 사례는 뒤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너그러운 성품이 보이는 사례는 우선 성현(成俔 :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인다. 정승은 도량이 넓어서 조그만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겸손하여, 나이 90여 세인데도 한 방에 앉아서 종일 말없이 책을 읽을 뿐이었다. 방 밖의 마당에 늦복숭아가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와서 함부로 따도, 느린 소리로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마라.”
라고 말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보니 복숭아가 모두 없어졌다. 아침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주며,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 사례는 아이들에게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것인데, 물론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좀 지나친 경우도 있다. 이 사례는 『해동잡록』에 보인다.

“공(公)이 무슨 일을 의론하고 붓으로 문서를 쓰려는데 어린 종이 그 위에다 오줌을 누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내는 기색이 없이 다만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아이들이 좌우에 몰려들어 울고불고 장난치고 깔깔대도 조금도 금하지 않았으며, 혹은 그의 턱살을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친족 가운데 고아가 되거나 과부가 되어 빈궁하여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이에 게는 반드시 재산을 털어 구휼해 주어 편안히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성가시게 굴어도 너그럽게 대했다는 사례이다. 게다가 그런 성품은 어려운 친족을 돌보는 데서도 드러나, 청빈하게 살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지금까지도 보통 사람들은 정승이 너그럽고 청빈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노라면 옛 속담의 ‘손자를 너무 귀여워하면 할애비 상투를 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승은 절제되지 않는 이같은 아이 사랑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 점은 지나치게 너그러운 데 따른 부작용일 수 있는데, 뒤의 관련된 곳에서 설명하겠다.
물론 이런 관용은 아랫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세종이 내불당(內佛堂 : 궁궐 안의 절)을 지을 당시에 정승으로 있었는데, 성균관의 유생들이 길에서 정승의 면전에서 나무라기를,
“당신은 정승이 되어 임금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오?”
라고 했으나, 정승은 성을 내지 않고 도리어 기쁘게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 세종은 대신들이 절을 짓지 못하게 간언해도 듣지 않았다. 집현전 학사들도 강력하게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집현전은 텅 비었다. 그러자 세종은 눈물을 흘리며 정승을 불러 이르기를,
“집현전 제생(諸生)이 나를 버리고 가버렸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소?”
라고 하자, 정승은
“신이 가서 달래보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학사들의 집을 두루 다니며 간곡히 청하여 왔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궁궐 안에 절을 짓는 일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유교 국가에서 있을 없는 일이지만, 정승은 그것을 봐 준 셈이다. 또 유생들이 반발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선비들의 의기(義氣)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포용성을 발휘한 일이다. 만약 정승이 훗날 조광조(趙光祖)처럼 성리학의 이념에 투철했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이 일을 용납했을지 의문이 든다. 사림이 정권을 장학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라서 이런 포용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엄격한 태도
재상이라는 직분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너그러운 성품만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른바 문란해질 수 있는 기강을 바로 잡고, 혼란해질 수 있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행정에서 일정한 원칙이랄까 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그럽지만 엄격한 태도가 요청되었다.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따르면 정승은 마음이 너그럽고 성격이 모가 나지 않아,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한결같이 예의로써 대하고, 나라 일을 논의할 때에는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너그럽지만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데서 일정한 원칙주의자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그 점은 앞의 『해동잡록』에서도 대사헌이 되어서도 원칙을 세워 하나하나 까다롭게 굴지 않아도 간악한 자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조정의 기강이 바로 서고 엄숙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통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몇 개 있다. 우선 그 가운데 하나는 『해동야언』의 기록이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폐하자 정승과 이직(李稷)이 당시에 판서(判書)로 있었는데, 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굳이 고집하다가 거의 6년 동안을 지방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는 일이 그것이다. 장자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한번은 김종서(金宗瑞)와 관련된 일인데 역시 『해동잡록』에 보인다. 곧 황희는 정승으로, 김종서는 공조 판서로 있으면서 일찍이 공적 회합을 한 적이 있었다. 김종서가 공조에 명령하여 술과 과일을 간단히 차려 올리게 했다. 정승이 그 것의 출처가 어디냐고 물었다. 공조의 서리(書吏)는 공조에서 차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승은 화를 내며,
“국가에서 의정부 곁에다 예빈시(禮賓寺)를 설치해 둔 것은 삼공(三公 : 의정부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세 정승)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만약 시장하다면 마땅히 예빈시로 하여금 차려오라고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는, 임금께 아뢰어 김종서의 죄를 청하려고 했다. 다른 여러 제상들이 말해 겨우 그만두었는데, 정승 김극성(金克成)은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이 일을 아뢰고 나서,
“대신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조정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해당 관청에서 정승을 간단히 대접하는 게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느냐마는 정승은 그 문제를 결코 묵과하지 않고 문제 삼았다. 이는 그것이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극성의 지적대로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는 기회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이런 원칙주의자다운 모습은 많은 관리들의 수장으로서 기장을 바로잡는 일이 되겠고, 또 그래서 그가 장수한 정승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부나 군대처럼 많은 사람을 관리하는 데는 사실 어떤 원칙과 기강이 필요하다. 지금은 그것이 국무총리나 국방부 장관의 소임인데, 그래서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이들에게 국회의원들의 질책이 쏟아지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다. 정승의 원래 성품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직책상 어쩔 수 없는 일기이도 하였던 것이다.

청백리와 여러 의혹
정승은 또 청백리(淸白吏)로서도 정평이 나 있다. 『해동잡록』에 황익성(黃翼成 : 황희의 시호)이 죽자, 모든 관청의 서리들에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 포화(布貨 : 화폐로 쓰이는 포목)를 내어 제사를 차렸는데, 다투어 풍성하게 차리려고 거리낌 없이 재화를 내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장례비를 남이 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추론해 보면 정승이 죽었을 때 장례치를 비용도 넉넉지 못할 정도로 청빈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 소개한 『해동잡록』에서 친족 가운데 고아가 되거나 과부가 되어 빈궁하여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이에 게는 반드시 재산을 털어 구휼했다는 기록도 그가 가난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기간 의정에 재임하거나 역임한 재상이면서도 초라한 집에서 궁핍한 생활로 일생을 보낸 인물에 대해서 조선 시대 청백리 재상의 상징으로 칭송되고 있는데, 정승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과연 청백리인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단종실록』에 보면 『세종실록』을 편찬할 당시 사관 이호문의 정승에 대한 기록을 의논한 일이 있다. 그 요지는 의논에 참여했던 허후(許詡)의 말에 등장한다. 그가 말하기를
“재상이 된 지 거의 30년에 진실로 탐하거나 더러운 일이 없었는데, 어찌 남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獄事)에서 뇌물을 받아서 재물이 많았겠는가?”
라는 것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호문의 기록은 황희가 남을 중상하고 관직을 팔고 뇌물을 받아 재물이 많았다는 기록이었던 것 같다. 구체적 내용으로 노비가 많았고 또 김익정(金益精)이 황희와 함께 서로 앞뒤로 대사헌이 되어서, 모두 중[僧] 설우(雪牛)의 금(金)을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일컬었다는 이호문의 글을 지적하고 있다.
이 논의에서는 이호문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고 단정치 못하다고 보고, 이호문의 사적인 감정에 따라 그렇게 기록했다는 성삼문(成三問)의 논증에 따라 그 기록을 삭제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그러나 정승의 자식들에게는 노비가 많음을 인정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혼인하면서 부인 쪽에서 노비를 데려 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승의 자녀들에게 노비 곧 재산이 많았던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는 정승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벼슬하여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을 하면서 잔치를 열었는데,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 때 정승은 그 일이 못마땅해
“선비가 청렴하여 비가 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집을 이렇게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느냐?”
라고 말하고 음식도 들지 않고 가버렸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에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더기가 된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둘째 아들 수신(守身)은 『해동잡록』에 따르면 음관(蔭官 : 부모의 공으로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직에 나가감)으로 출사하여 세조 때 성삼문 등의 계획을 미리 알린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이 되었고 훗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술을 잘 마셔서 주량이 홍윤성(洪允成)과 더불어 서로 적수여서 하루 종일 실컷 마셔도 조금도 취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로 보면 그의 자녀들은 정승과 풍모가 많이 달랐음을 엿볼 수 없다. 자녀들은 청렴과 지조 등의 선비의 풍격보다 부귀영화나 일신의 영달을 취했기 때문에 훗날의 평가가 그들에게는 별로 후하지 않다. 사실 이 점은 정승의 가정교육 결과일 수 있고 그 또한 그의 성품의 영향인지 모르겠다.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정승이 평소 아이들에게 너무 너그러이 대한 것도 거기에 해당되겠다. 쉽게 말해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있듯이 자녀에게도 아비로서 엄격한 가르침이 있었더라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지나친 기대일지는 모르나 아무튼 아쉬운 대목이다.
사실 정승 자신에게 아무런 허물이 없었느냐 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가 있는 법,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가령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따르면 사헌부에서 좌의정 황희가 감목관(監牧官) 태석균(太石均)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하여, 대관(臺官) 이심 (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주선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니, 황희를 파면시켜 청탁으로 법을 어기는 징조를 막으라고 탄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해동잡록』에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신창군(新昌郡) 아전 표운평(表芸平)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그 이튿날로 보방(保放 : 보증인을 세우거나 보증금을 내고 죄인을 석방함)되고 그들의 관직만 파면되었을 뿐, 후임을 내지 않고 있다가 10여 일이 지나 도로 제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건은 아마도 정승의 성품을 보아 재물의 욕심보다 인정상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여 연루되었을 수도 있겠다. 인정에 이끌리면 원칙을 지키기 어려워,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공존하기 힘들다. 천하의 황의 정승도 이렇게 한 때의 실수와 허물이 있었고, 또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남들이 흠모하는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공적과 삶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것은 작은 허물이 큰 공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품에 장점이 많고 단점이 적다면, 그 단점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너무 야박한 일이다. 그렇게 평가하는 당사자 자신을 되돌아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 그는 보통 사람이 갖추기 어려운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한 성품을 갖추었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은 서로 상충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사회생활에서도 이런 성품이 필요하다. 윗사람은 엄격하기 쉽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굴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규정과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너그러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

 

명가 삼봉 정도전

『대동야승』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삶을 알아보는 사료는 정사로서 『왕조실록』 등이 있으나, 야사로서 개인이 기록한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아니 세밀한 삶의 모습을 살피는 데는 후자가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역사 속 유교 이야기’의 이번 시리즈는 야사를 중심으로 하는데, 그 주제가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로 그 첫 번째 순서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 1342~1398)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동야승』은 한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여러 저자들이 편집하거나 기술한 총서의 이름이다.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사건이 전개되거나 인물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조선 초부터 인조 때까지이다. 해당하는 문헌은 너무 많아 여기에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고 인용하는 곳에서 저자와 서명을 밝히겠다. 또 각 문서의 내용에는 서로 중복된 것도 있는데 나중 기록이 먼저 것을 보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원본은 72권 72책의 필사본으로 편찬자나 편찬 연대는 미상이다.

 

이성계를 만나다

정도전(삼봉으로 약칭함)이 없었으면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반문해보는 것은 전혀 무리한 가정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을 건국하는 데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선의 제도와 이념과 종교·문화 등을 고려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는 왜 역성혁명을 꿈꾸었을까?

삼봉은 경상도 봉화(奉化)의 향리 출신인 정운경(鄭云敬)의 맏아들이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진출하면서 비로소 사족(士族)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염의선생(廉義先生)’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처럼, 그의 아버지는 청렴하고 정의롭게 처신하여 집안이 매우 가난해서 처자가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지 못했다고 한다.

삼봉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 큰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고, 늘 가난에 쪼들렸다. 그래서 평소에 먹는 문제에 대해 신경을 썼는지 이런 기록이 있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먹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으로 하루라도 먹지 않을 수 없는데, 또한 하루라도 구차하게 먹을 수 없으니, 먹지 않으면 생명을 해치고 구차히 먹으면 의리를 해친다.”는 그의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삼봉은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親元) 정책을 반대하다가 9년간 유배와 유랑 생활을 했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 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해동잡록』에서는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우왕 초기에는 어떤 일로 회진현(會津縣)에 귀양 갔으며, 뒤에 삼각산(북한산)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학자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일’이란 바로 친원 정책을 반대한 일이며 ‘회진현에 귀양 가고 삼각한 아래 집을 지었다’는 것은 전라도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으로 유배가고, 그 뒤 삼각산과 경기도 부평과 김포를 전전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때를 가리킨 말이다. 이 유배 생활에서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가 있다. 그 내용은 다른 총서인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먼저 아내가

 

“당신은 평일에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아침에 밥을 짓는지 저녁에 죽을 쑤는지 몰랐소. 집이 곤궁하여 한 섬 곡식도 없어 아이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울부짖을 때, 내가 안살림을 맡아 끼니를 겨우 이어간 것은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여 입신양명해서 처자식이 바라보고 힘을 얻고 가문의 영광을 일으킬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오. 마침내 나라의 형법에 걸려 이름이 욕되고 자취가 깎여서 몸이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 독한 장기(瘴氣 :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를 마시게 되었소. 형제가 나가쓰러지고 가문이 분산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렇게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현인군자도 정말 이렇게 되는 수가 있나요?”

 

라는 편지를 보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도 남편의 출세를 믿고 기다렸는데, 되레 죄를 얻어 유배를 당해 난감하다는 거였다. 삼봉이 보낸 답장의 요지는 이렇다.

 

“부부의 도는 한번 혼인을 하게 되면 종신토록 변하지 않으니,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허망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할 것이니 여기에 어찌 다른 일이 있겠는가? 각각 자기 직분을 다할 따름이다.”

 

삼봉의 답장은 아내를 신뢰하나 사대부 부부의 내외라는 직분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시사점은 ‘나는 나라를 근심한다’는 말로서, 그 기대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혁명을 꿈꾸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이런 유배와 유랑 생활과 당시 재상들의 핍박에 견대다 못해 1388년 42살 때 드디어 동북방의 군사지휘관으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다.

사실 그가 당시 재상들의 핍박을 받은 데는 정책의 노선 차이도 있지만, 또 하나는 출신 신분 때문이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였다. 이같이 당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교의 타락, 그리고 민생의 어려움 외에 삼봉 자신이 신분 차별을 당한 것도 혁명을 꿈꾸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처지와 상황에서 혁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추가 이성계를 만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해동잡록』에서 이렇게 전한다. 삼봉이 일찍이 이성계가 있는 동북면에 갔었는데, 군대의 호령이 분명하고 엄숙하며 병졸의 대오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가서 조용히 말하기를,

“장합니다.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이룩하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이성계가

“무슨 말인가?”

라고 하자 삼봉이 둘러대며 말하기를,

“동남방에서 왜적을 친다는 말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를 시작으로 삼봉은 57세에 죽을 때까지 15년간 이성계를 등에 업고 조선 왕조 창업이라는 거대한 혁명 사업을 이끌어 갔는데, 앞서 말한 9년 동안의 유배와 방랑의 세월 속에서 이 혁명의 구상을 마쳤던 것으로 보인다. 위화도회군 직후 그는 전제(田制) 개혁을 주동하였고 군권을 장악하자, 혁명의 낌새를 알아차린 보수파의 반격으로 잠시 유배를 당하였으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정권의 핵심 인사로 등장하였다.

훗날 이성계가 삼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는 『해동잡록』에 보인다. 곧 태조가 일찍이 경신일(庚申日) 밤에 정도전과 여러 훈신(勳臣)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태조가 삼봉에게,

“과인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경(卿)의 힘이요.”

라고 한 말에 보인다.

 

혁명가의 자격과 병법

혁명은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모두 성공하는 일도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쿠데타나 정변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나,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 주체가 혁명 과정의 치밀한 계획과 내세우는 이념과 구체제를 대신할 만한 구체적 방안이나 방책의 마련에 미흡했고, 혁명 이후의 실천 과정이 미숙하여 구세력에 의해 반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준비 없는 혁명은 성공하지 못한다.

삼봉은 그렇지 않았다.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였다. 찬술(撰述)한 문헌만 보아도 그가 혁명을 위하여 얼마나 준비했는지 알 수 있다. 한갓 무부(武夫, 군인 혹은 무인)가 총칼만 들고 설쳐댄다고 혁명이 완수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가 공부하여 찬술한 문헌의 종류가 너무 많아 다 거론하기 힘들지만 대표적인 것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우선 유교 국가를 만들기 위한 이념 투쟁의 일환으로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한 『심문천답(心問天答)』·『심기리편(心氣理篇)』·『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이 있고, 국가의 통치에 관한 것으로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경제문감별집』 등이 있다. 여기서 고전에서 말하는 ‘경제’는 오늘날 ‘economy’가 아니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인 말로서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안이다. 또 역사서를 편찬하고, 문학·의학·군사학·예술과 관련된 저술도 있다. 이렇듯 그는 실천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구비하여 혁명가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것은 그가 병법에도 능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우리나라 형편에 맞는 독자적인 전법을 개발하였다는 점이다. 아래는 『해동잡록』에 수록된 병법에 관한 몇 가지 사례이다.

 

〇공격하지 않고 성을 지키는 경우 : ①적군이 정예병일 때 ②우리의 원병이 장차 오게 되어 있는 경우 ③성이 튼튼하고 방어할 기구를 갖추었을 때 ④적의 군사를 지치게 하려는 경우 ⑤적의 변동을 관찰하려고 할 때

〇전투를 꼭 피해야 할 경우 : ①적의 토지가 넓고 사람이 많을 때 ②적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여 혜택이 골고루 퍼졌을 때 ③적이 벌을 주고 용서하는 일에 믿음이 있고 출발과 정지가 적당할 때 ④적의 행군하는 대오와 수레의 대열을 현명하고 유능한 지휘관에게 맡겼을 때 ⑤적의 군사가 명령에 익숙하고 무기가 정밀하고 날카로울 때 ⑥적의 사방 이웃 나라의 도움이 있고 큰 나라가 와서 도울 때

〇적을 헤아리는 방법 : ①적이 공격할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군사를 더 낼 수 없다. ②적의 정세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서약(誓約)을 받아들일 수 없다. ③적의 장수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먼저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 ④적의 군사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먼저 진을 칠 수 없다.

〇적을 이기는 데에 3가지 헤아릴 점 : ①적의 식량을 헤아려서 식량을 공략하되 식량이 보존되었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②설비를 헤아려서 설비를 공략하되 설비가 보존되었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③적의 수효를 헤아려서 집중된 것을 공략하되 집중된 것이 정연하면 공격하지 않는다.

〇군대를 부리는 8가지 방법 : ①재물을 모아 군수에 사용함 ②공장(工匠)을 세워 병기를 만듦 ③기구를 제정하여 무기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며 기(旗)와 휘(麾 : 대장의 지휘기)가 선명하게 함 ④군사를 가려낼 때 용감한 자와 겁내는 자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골라냄 ⑤명령을 바르게 하여 호령이 엄명하고 상벌하는 데 반드시 미덥게 함 ⑥복종하는 것을 익히는 것으로 금지할 일과 금(金 : 퇴각을 알리는 징소리)과 고(鼓 : 전진을 명하는 북소리)의 절차를 밝히고, 나아가고 물러서고 치고 찌르는 기술을 익힘 ⑦지세의 험하고 평탄한 것과 주장(主將)의 능숙하고 무능한 것과 군사들이 용감하고 겁내는 것, 그리고 군사의 무리가 많고 적은 것을 아는 것 ⑧기회를 재빨리 포착하는 것으로 때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만들고 때에 따라 변법을 쓰는 일

 

혁명의 완수와 후세의 평가

조선의 기틀은 삼봉의 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젊어서 공부할 때 궁핍하고 또 유배를 당해 어려움에 처했으나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혁명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흔치 조선 왕조의 탄생을 연극에 비유하여 정도전 각본, 이성계 주연, 이방원 연출이라고 하는데, 삼봉은 각본을 쓴 이상의 역할을 하였다. 권근이 기초한 「교판삼사사정도전(敎判三司事鄭道傳)」에서 태조가 이르기를,

 

“경은 학문은 경전과 역사에 정통하고 지식은 고금을 관철하였다. 정당한 논의는 모두 성현의 말에 근본을 두고, 인물의 선악에 밝음은 반드시 충성과 사악함에 따라 분별하였으며, 나를 도와 개국하여 큰 공을 이루었다. 아름다운 꾀는 정교(政敎)의 시행을 보충할 만하고, 웅장한 필치는 제작(制作)의 책임을 부탁할 만하다. 온화한 유학자의 기상이요, 준수한 대신의 풍도이다. 내가 즉위하던 처음에 나는 경의 유용한 학문을 알았다. 이에 재상의 반열에 있게 하고, 또 국사(國史)를 편수하는 관직을 겸하게 하였는데, 과연 직무를 수행하는 여가에 편수하는 공적을 이루었다.”

 

라고 할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의 내조도 크다 하겠다. 권근이 쓴 ‘삼봉부인최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 남편을 섬김에는 순종하면서 의로웠고, 자손을 가르침에는 사랑하면서 엄하였고, 친족에게 대하여는 은혜로우며 앞서서 일을 처리하였고, 노비를 다루는 데는 무섭게 하면서도 용서하였다고 하고, 또 이것은 비록 그의 아름다운 천품에 의한 것이겠으나 역시 인격적으로 서로 대하는 데에서 얻은 바 있다(『동문선』)고 하였다.

그러나 삼봉은 조선 시대 내내 간신으로 평가되다가 고종 때 와서야 신원이 회복되었다. 그것은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삼봉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삼봉이 이렇게 대우를 받은 것은 훗날 성삼문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여 역대 조정으로부터 받았던 대우와 유사하다. 어찌 보면 삼봉이 조선 왕조를 개창한 공이 성삼문보다 더 크지만 그 대우는 그보다 더 가혹하다 하겠다. 그렇게 된 까닭은 이른바 ‘1차 왕자의 난’과 관련이 있는데, 『해동잡록』에는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으려 모의하여 이방원이 그를 죽였다고 한다. 곧 삼봉이 방석을 세자로 삼으려고 꾀하였는데, 이방원이 이를 알고서 무사를 거느리고 삼봉 등을 찾으니, 삼봉이 도망하여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다고 한다. 이 때 민부가 큰 소리로

“배불뚝이가 내 집에 들어왔소.”

라고 하여, 군인들이 곧 찾으니, 정도전이 기어서 칼을 짚고 나오자 붙잡아서 이방원 앞에 나아갔다. 삼봉이 우러러보며,

“나를 살려 주신다면 힘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이방원이

“네가 이미 왕씨를 배반하고 또 이씨를 배반하려느냐?”

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베어 죽였다. 그 아들 유(游)·영(泳)도 죽임을 당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의 분위기에는 삼봉을 비하하는 느낌도 발견되는데, 이는 조선 시대 삼봉의 위상을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권근은 개인적으로 삼봉과 매우 친하여 삼봉의 글에 대한 서문도 지은 사람인데, 가령 『삼봉집』 서문에서 선생은 절의가 가장 높고 학술이 가장 정밀하였으며, 일찍이 바른 말로 재상을 거슬려 남방으로 유배되어 10년을 났으나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하였고, 공리(功利)의 무리와 이단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업신여기고 헐뜯어도 그 지킴이 더욱 견고하니, 선생은 도의 믿음이 독실하여 의혹하지 않는 분이라 이를 만하다고 하였으나, 훗날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신도비에서 ‘간신 정도전’이라 쓸 정도로 공식적으로는 삼봉을 간신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삼봉은 세자 자리가 막내 방석에게 돌아가는 데 동의했을까? 물론 태조의 뜻이라 거역할 수도 없었겠고, 왕은 상징적 존재이고 재상이 정치적 실권을 가져야 한다는 평소의 이상도 작용했고, 또 태조의 전 처 소생의 왕자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혁명을 성공시킬 정도로 명민한 그가 사태가 나쁘게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태조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방원이 왕명을 거역하고 형제를 죽일 수도 있다는 점을 유학자로서 상상도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 일은 실로 안타까운 사건이고, 그것이 선례가 되어 훗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등도 거리낌 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런 일은 훗날 위세와 억압으로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는 선례로 때로는 자기 검열로도 작용하여, 조선 시대 선비들은 삼봉과 성삼문 등의 일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거론조차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봤을 때 고려의 충신으로 상징되는 정몽주는 문묘에 배향되어 선비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 반면, 삼봉은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하고 기초를 다진 불멸의 공이 있지만, 단지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줄곧 간신으로 평가되었다. 여기에는 삼봉의 출신이 사대부들로부터 줄곧 따돌림을 당하는 빌미가 되었고, 혁명을 통한 이전 왕조의 배반이라는 도덕적 판단, 또 학맥에 따라 사공(事功 : 공적)보다 절의를 높이는 유생들이 그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 분위기, 무엇보다 이방원이 역대 왕들의 조상이었기 때문에 그와 대립적 입장에 있던 삼봉이 좋게 평가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한 시대만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두고두고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