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남자!

김육,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남자!.

 

육, 그 이름을 부르면 대동법이 떠오른다. 대동법 하면 김육이 튀어 나온다. 입시 교육의 학습효과다.
그런 대동법만큼은 아니지만 풍류를 아는 애주가들 사이에 잘 알려진 김육의 시조가 있다.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하옴세,
백년 덧 시름 잊을 일 의논코자 하노라.”

고단한 노정객의 운치가 느껴진다. 소소한 즐거움을 잊지 않는 소박함도, 백년 덧 시름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을 수 없는 벼슬아치의 운명도 보인다.

김육(金堉, 1580-1658)은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다.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김비(金棐)이고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피난길에 올랐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 김흥우가 사망하여 15세에 가장이 되었다.

26세(1605, 선조 38년)때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30세(1609, 광해군 1년)때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 이 때부터 스스로 호를 잠곡(潛谷)이라 했다.

44세(1623)때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했다. 45세(1624)때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 10월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54세(1633)때 9월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 온 뒤 예조참의,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가 되었다.

59세(1638)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고 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다.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辟瘟方)> 등을 편찬하여 간행했다. 이때는 호란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던 시절이다.

60세(1639)때 동부승지, 대사성, 부제학을 지냈다. 이후 대제학, 대사간, 도승지 겸 원손보양관, 병조참판,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등 현직(顯職)을 지냈다.

70세(1649)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이듬해 1월에 중추부영사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71세(1650)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실록청총재관을 겸하였다.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고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하였다.

75세(1654)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김육은 경세의 뜻을 어려서부터 간직했다.

“공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가졌다. 12살 때 <소학>을 읽다가, ‘일명(一命: 처음 받는 하급 관직)의 선비라도 진실로 남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둔다면 사람에게 반드시 구제해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구절에 이르러서는 문뜩 깨달고서 ‘반드시 일명의 선비만이 그러할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진실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고, 남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일명 이상의 것이다.’ 했다.”

사람을 구제하는 뜻, 경세의 웅지는 대동법을 통해 역사에 찬란히 전해진다.

“충청 감사가 되자 소를 올려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 법은 토지의 면적을 계산하여 나라에 바칠 것을 비교하고 관청의 지출을 예산하되, 세금 부과가 고르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하고, 부역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공평하게 하고, 균등하지 않은 것을 균등히 하여, 덜 것은 덜고 보탤 것은 보태어 조절하여, 모두 대동(大同)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임금이 소를 비변사에 내려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더니 호조에서 어려운 일이라고 고집하였다.”

“정승에 임명되자 상소문을 올려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청하고 2책의 안을 만들어서 올렸더니, 조정의 이의가 위로는 중신으로부터 아래로는 대관에 이르기까지 떼를 지어 일어났다. 안방준(安邦俊) 같은 자는 나라를 그르친다고 공을 배척하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았다.”

“임금이 호조에 재촉하여 우선 호서(湖西)에서 시행토록 하였더니 호서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전날 불편할 것이라고 말하던 자들도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김육은 일평생 경세의 꿈을 대동법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새로운 길은 힘들다. 낯설어서 다른 사람들이 섣불리 찬동하기 어렵다. 기성 이해관계에 맞서며 부수는 길이라면 오늘날 카르텔이라고 하는 기성 기득권 세력의 반발은 더욱 거세진다. 김육은 이 험난한 시도를 어떻게 밀어붙였을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승평부원군 김류가 공이 일찍 출근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 평생에 일찍 출근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더니, 이제 김정승에게는 한 걸음 양보해야겠다.’ 했다.”

요즘 말로 하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워커홀릭이다. 이 부지런함이 김육이 평생 대동법을 밀어붙일 수 있던 힘이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육(金堉)>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