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백, 혁명가의 소양

이시백, 혁명가의 소양 .

 

시백(李時白, 1581-1660)은 이귀(李貴)의 아들이다.

이귀가 누군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다. 일찍이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을 떨쳤다. 1592년 강릉참봉으로 있다가 왜적의 침입으로 선조가 피신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의병을 모집해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던 이다. 광해조의 실정을 보고 두 아들과 함께 반정을 도모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진 이다. 그의 두 아들이 이시백과 이시방이다.

이시백의 기상과 반정에 참여한 내력을 <연려실기술>에서 적고 있다.

“기상이 씩씩하고 원대하였으며 체격이 크고 훌륭하였다. 힘이 뛰어나게 세었으나 항상 깊이 감추어 비록 남에게 곤욕을 당하여도 겨루지 않았다. 이항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시백은 포의로서 사귀어 노는 자는 모두 이름난 사람들이며 그를 믿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닦아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임술년에 어머니가 별세하여 겨우 성복을 마쳤을 때 신경진이 찾아와 조상했다. 이시백의 아버지 이귀가 시사(時事, 반정)를 언급하자 첫마디에 서로 뜻이 맞았다. 신경진이 말하기를, ‘이 일은 맏상제와 의논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마침 애통 중에 있으니 뒷날을 기다려야겠다.’ 하였다. 김귀가 말하기를, ‘이는 대의에 관한 일이니 상주가 일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적인 관례대로 논할 수 없다.’ 하고 공(이시백)을 불러내어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43세(1623)때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44세(1624)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가 되어 이천으로 달려가서 향병을 모집해 길목을 지켰다. 그러나 이괄이 다른 길을 택해 곧바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안현에서 정충신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000을 훈련시켰다.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하기도 하였다.

송준길의 <동춘집>에 실린 글이다.

“공(이시백)이 수원부사로 있을 때 수천 명의 군사와 말이 각 마을에 흩어져 있으므로 만약 위급한 일이 생겨도 쉽사리 모을 수 없다 하여 열 길 되는 깃대를 높은 언덕 곳곳에 세워 놓고 모든 군사들에게 약속하기를, ‘위급하면 내가 꼭 깃대에 방색기(方色旗)를 달고 자호포(子號砲 신호탄)를 세 번 쏠 터이니 깃발을 보거나 포성을 듣거든 서로 알려서 어떤 사람도 시간을 넘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묘호란의 보고가 오자 공은 즉시 갑옷을 입고 정문에 앉아서 깃발을 달고 포를 쏘았다. 날이 겨우 오(午)시 경에 모든 군사가 모두 기약대로 모였으므로 공이 즉시 거느리고 동작나루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임금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어찌 귀신처럼 빠른가?’ 하였다.”

49세(1629)때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관직을 떠났으나 곧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 강화유수가 되었다. 53세(1633)때 병조참판, 56세(1636)때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맞이했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고 다음 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병자년 수어사로 남한산성을 지키던 시절의 일화가 <시장>에 나온다.

“병자년 수어사로 남한산성의 일을 주관했다. 임금(인조)이 남한산성으로 행차하자 공을 불러 이르기를, ‘성중에 여러 가지 미비한 것이 많은데 어찌 경이 수어사의 임명을 받은 후에도 미비한 것이 있는가.’ 하였다. 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임명을 받았을 당초에 오늘의 환란이 있을까 염려하여 체찰부(體察府)에 청하기를 ‘일이 급작스레 일어나면 먼 고을의 군사는 형편상 미처 모이지 못할 것이므로 원컨대 가까운 고을의 군사를 나누어 배속시켜 주시오.’ 하였으나, 체찰부에서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5월에 청하기를, ‘합동 훈련을 시키고 그 지역을 정하여 병기를 수선하게 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자.’고 했으나 체찰부에서 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7월에 다시 합동 훈련을 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또한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부득이 어전에 직접 아뢰기를 청하여 겨우 경기도 내에 소속된 군사를 한 번 야간 훈련을 시키고 약간의 움막을 지어 땔감을 조금 쌓아 놓고 돌아갔는데 금일에 이르러 이 모양이오니, 신 또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했다. 체찰부에서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다른 일로 핑계하여 공을 잡아다 특별한 곤장으로 피가 흐르도록 때리니 해괴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분하게 여기거나 한탄하는 빛이 거의 없었다.”

58세(1638)때 병조판서 때 척화신(斥和臣)으로서 청의 강압에 못 이겨 심양에 아들 이유 대신 서자를 볼모로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에 중도부처 되었다. 다음 해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었다.

64세(1644)때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았따. 이어 한성판윤, 형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와 중신들은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을 것을 희망했으나 이경여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66세(1646)때 병조판서가 되어 휴가를 받아 공주로 성묘 가던 중, 호서에 토적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와 토벌을 자원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이미 토평되어 그대로 돌아왔다. 69세(1649)때 인조가 불러 술을 대접하고, 또 세자를 소개하면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나와 같이 대접하라.’ 하며 위로했다.

이시백의 <시장>에 실린 내용이다.

“기축년에 임금(인조)이 어수당에 나와서 공 등 두어 사람을 입시하게 하였다. 술과 찬이 모두 안으로부터 나왔다. 임금이 친히 잔을 잡고 묻기를, ‘병조 판서는 주량이 얼마나 되오.’ 하자, 공이 답하기를, ‘신은 본래 술을 마실 줄 모르는데다가 항상 병을 앓고 있어 더욱 마시지 못합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병은 남한산성에서 너무 애써서 생겼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자손은 몇이나 되는가.’ 하여, 공이 수를 들어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많은데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음은 웬 까닭인가. 만약 나라 일을 담당하고자 하려면 비록 무과(武科)라도 좋다. 경의 선친이 나라 일에 충성을 극진히 바쳤으므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수원(水原)을 맡았을 때 집에 돌아와 선신(先臣, 이귀)을 뵈었더니, 선신이 어떻게 다스리려 하느냐 물었습니다. 신이 대답하길, 누가 아버지에게 수원에서 밤낮으로 군사를 준비하는데 그 마음을 추측할 수 없다 하였다니 인심이 이 지경이니 비록 나라 일에 정성을 다하고자 하여도 그 사세가 또한 어렵습니다, 했습니다. 선신이 그 말을 듣고 일어나서 신을 뜰아래에 잡아 놓고 말하기를, 임금께서 너의 무능함을 살피지 않고 너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겼으니 네 분수에 맞게 오직 성의를 다할 뿐이지 너의 몸을 어찌 돌아보며 남의 말을 어찌 염려할 것이냐. 남의 허망한 말을 듣고 장차 네 직책을 폐하려 하느냐, 하고 격노하여 매를 때리려 하다가 친척들의 만류로 그만두었습니다. 선신이 죽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받사오니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탄식하다가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들을 보기를 팔다리[股肱]처럼 하니 너도 뒷날 대접하기를 나와 같이 하라.’ 했다.”

70세(1650, 효종 1년)때 우의정에 올랐다. 71세(1651)때 김자점의 모역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다.
72세(1652)때 사은사로 청나라를 다녀와 언사로 견책을 받은 조석윤 등을 신구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에 봉해졌다.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다. 1658년에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尹善道) 등이 수원에 능을 정하자고 건의했으나 이시백이 교통이 빈번해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寧陵)을 택하도록 하였다.

끝으로 이시백의 충정과 검소한 삶을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한다.

“공이 살던 집은 충정공(이귀)이 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으로 뜰 위에 전부터 한 그루의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다. 그 이름은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 하였고 세상에 전하기는 그 꽃나무가 중국으로부터 왔다 하였다. 갑자기 어느 사람이 일군을 데리고 찾아왔으므로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는 대전별감(大殿別監)으로 임금의 명을 받고 그 꽃나무를 캐어 가려는 것이었다. 공이 꽃나무에 가서 그 뿌리까지 뽑아 부수어 뜨리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는데 임금께서 어진 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하시려는가. 내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다. 모름지기 이 뜻을 아뢰라.’ 하였다. 그 후 임금이 공을 대접함이 더욱 두터웠는데 그 충성스럽게 간한 뜻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다.”

“공의 집이 대대로 청렴과 검소함을 지켜왔다. 어느 날 자기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뜰아래 부들자리를 깔게 하고 부인을 청하여 함께 앉아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가 옛날부터 깔던 것이오. 내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외람되이 공경의 자리에 올랐으니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기며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써 망하기를 재촉한단 말이오. 부들자리도 오히려 불안한데 하물며 비단방석이겠소.’ 하고 한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부인이 부끄러워 사과하고 곧 뜯어버렸다.”

대전별감 앞에서 꽃나무를 파헤쳐 버리는 과감함이 멋지다. 이시백의 삶을 보건대 충분히 그럴 만하다. 부인에게 청렴과 검소할 것을 조언하는 자세는 사뭇 정중하면서도 지혜롭다. 이시백이 혁명가로 시작하여 현달한 관직에 올라 국정을 담당할 수 있던 평소의 소양이 느껴진다.

참고 자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시백(李時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귀(李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