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운을 누린 정태화

관운을 누린 정태화.

 

벼슬살이를 환해(宦海)라고 한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빗댄 말이다. 바다는 파도가 늘 일렁인다. 바람이 잔잔하면 배는 미풍을 받으며 쏜살처럼 미끄러져 흐른다. 그러다 바람이 거세지면 파도는 배를 삼킬 듯 달려든다. 잘못하면 난파한다.

임금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군사부일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량없는 성은에 신하는 감복하여 눈물을 뚝, 뚝, 흘린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가사를 보면 정말 그렇다. 그러다 어느 순간 차디찬 벽지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는 멸문지화를 당한다.

정태화( 鄭太和, 1602-1673)는 관운이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났다.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의 5대 손이며, 정유길(鄭惟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창연(鄭昌衍)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이다.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와 예조참판 정만화(鄭萬和)의 형이다. 그의 아들 정재승도 우의정을 지냈다. 조선왕조 500년간 관운이 가장 좋았던 집안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다.

23세(1624, 인조 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27세(162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36세(1637)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어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가기까지 당하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수찬·교리·응교를, 사간원에서는 정언·헌납·사간을, 사헌부에서는 집의를, 세자시강원에서는 설서·사서·필선을, 성균관에서는 사예·사성을 각각 지냈다. 또 행정부서에서는 예조의 좌랑, 이조의 좌랑·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30세(1631)때,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뽑혀 숙마(熟馬) 1필을 수상하는 문재를 보였다. 35세(1636)때에는 사간으로 있다가 청나라 침입에 대비해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휘하에서 군무에 힘썼다. 병자호란을 맞자 황해도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는 무용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비변사가 유장(儒將)으로 합당한 인물 4인을 천거하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것도 이 까닭이었다.

36세(1637) 말 그는 심양으로부터 귀국하자 그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리고 6개월만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이후 48세(1649)우의정에 오르기까지, 육조의 참의·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 평안도·경상도의 관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지내다가 1644년 말부터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되풀이 역임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계 문제로 조정에서 심한 충돌이 일었다. 그 결과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가 사사되고 그 아들들이 제주에 유배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정태화는 김육과 함께 봉림대군 책봉을 반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로서 적통을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중진 관료로서 처신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조·형조·사헌부의 장관과 같은 난감한 직책을 되풀이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성품이 온화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적대세력을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한다.

뒷날 중국 사신이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고 평했다.

우의정에 오른 직후 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 연경에 갔고, 그 뒤 곧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향리에 머물렀다.

50세(1651, 효종 2년)에 상복을 벗으면서 영의정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58세(1659)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처리하였다. 기해예송이 발생하자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하여 이를 시행토록 하였다. 72세(1673, 현종 14)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하기까지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북벌정책과 예송으로 신료들의 반목이 격화되던 시기여서 당색을 기피했고 또한 정치화·정만화·정지화 등을 비롯한 일가 친족들이 현·요직에 많이 올라 있었다. “이 나라를 정가(鄭哥)가 모두 움직인다.”는 야유를 듣기도 하고, 또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 일은 적극 담당하지 않고 처신만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는 비평을 듣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시기의 예송에서 일어나기 쉬웠던 선비들의 희생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청나라와의 어려운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청나라의 고위 관원들과도 적절히 교유했기 때문에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대체로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해결의 책무가 주어졌다. 그가 노구를 무릅쓰고 61세(1662)에 진하 겸 진주사로 연경에 다시 다녀온 것도 이 까닭이었다.

기해예송에서 정태화는 기년설을 찬동했다. <기재잡기>에 보면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영돈녕 이경석, 연양부원군 이시백, 완남부원군 이후원, 영중추 원두표 등이 헌의하기를, ‘신 등이 옛 예법에 능통하지는 못하나, 시왕(時王)의 제도로 상고하면 대왕대비께서 마땅히 기년의 복제를 입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 송시열과 우참찬 송준길은 헌의하기를, ‘고금의 예법이 이미 같고 다른 것이 있으며 제왕가의 제도는 더욱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운데 여러 대신이 이미 시왕(時王)의 제도로 하기로 의논하였으니 신 등은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니, 명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당시 기년설을 주장한 근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정태화는 시왕의 제도임을 근거로 내세웠다. 후일 송시열이 현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이 처음 네 가지의 설을 말하니 정태화가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 설은 인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사람이 반대당의 모함이 있을 줄 미리 알았던 선견(先見)이었습니다.”

효종이 서거한 이후 당시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서인들은 계모후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기년복으로 정하고자 하였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중자(둘째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인 학자였던 윤휴는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족이 참최복(3년복)을 입는다는 <주례> 규정을 들어 참최복을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3월에 기년복의 기한이 다가오자 남인 허목은 ‘왕위를 계승한 아들은 장자로 간주한다’는 <의례> 주소를 근거로 자의대비의 복제 개정을 주장하였다. 이에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은 <의례> 주소에서 대통을 계승해도 참최를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예외 규정[사종설(四種說)] 중에서 세 번째에 있는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가 계승한 경우)’을 들어 기년복을 주장했다.

서인과 남인들의 논쟁이 격화되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는 두 설을 다 버리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어머니는 장자와 중자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을 들어 기년복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국왕은 몇 번의 의견 수렴을 거쳐 기년복으로 확정했다.

효종 초년에 정태화가 모친상으로 향리에 있을 적 일이다.

“이때 임금(효종)은 새로 즉위해서 분발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은밀한 계책이 있었는데, 혹 그 일이 누설되어 그들이 의심하고 노할까 염려하여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였는데, 사신이 온다는 소문이 있자 또 무슨 일로 사문할 것인지 몰라서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튿날 이경석이 입대하여 자기가 용만으로 달려가서 일의 기미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몸에 병이 있는데 어떻게 먼 길을 갈 수 있는가. 경이 멀리 나가면 여기서는 누가 대응하겠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좌의정 조익(趙翼)이 청한 대로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니 빨리 부르시고, 정태화는 계책이 있으니, 비록 상중(喪中)에 있으나 비변사로 하여금 가서 묻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이경석이 위급한 상황에서 정태화는 계책이 있으니 비록 상중에 있지만 비변사로 가서 묻게 하라는 말은 당시 정태화에 대한 대신들의 평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대사헌이 아뢰기를 ‘통제사 유정익의 서매(庶妹)가 자점의 첩이 되어 김자점과 가장 친밀하였으니 통제사의 중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정익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 나오지 않았는데 만약 의심스럽다 하여 유정익을 체직하면 장차 사람마다 스스로 의심할 것입니다.’ 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도다. 옛사람이 나의 진심을 남의 뱃속에 넣어 주라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김자점이 오랫동안 정승의 직에 있었으니 한때 문무관 중에 누가 그 집에 출입하지 아니하였으리까. 만약 평소에 서로 잘 아는 것으로써 모두 억지로 죄를 씌우면 아마 조정에 한 사람도 완전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인심을 진정시키는 계책은 전부 대신에게 있으며 나와 경이 벌써 굳게 정한 바가 있으니 비록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감히 제 뜻대로 할 수 있으리오.’ 하였다.”

정태화가 관운을 누린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이와 같은 면모를 들 수 있을 듯하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해예송(己亥禮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태화(鄭太和)>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