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추성시 맹자연구원 강연 행사

2015년 12월 20일 최영진 사업단장이 추성시 맹자연구원에서
율곡학과 한국유학에 대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만언소의 뒷 이야기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7

만언소의 뒷 이야기

 

선조실록⌋에는 율곡이 올린 「만언소」 자체에 대해서 아무런 평이 없다. 다만 1574년 1월 21일자 기록에 다음과 같이 부제학 유희춘이 선조 임금에게 올린 말이 나온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형벌이 맞지 않는 일이 드물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부역(賦役)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는 본래 그전부터 행해져 내려온 것이지만 지금 수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무(時務)를 아는 것이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데, 지난번에 올린 이이의 상소문에 대해 성상께서 답하신 말씀이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그의 제안을 권장하고 허용하신 것이므로, 각기 보고 듣는 사람마다 모두 감격하였습니다. 소신도 역시 재질과 학식이 이이만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일 이 사람만 하다면 어찌 그처럼 권장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이이의 상소로 인하여 공물(貢物)·선상(選上)·군정(軍政)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이 곤궁함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율곡이 올린 상소문에서 공물(貢物), 선상(選上), 군정(軍政)의 세 제도에 대한 개혁안을 중시하여 그것의 시행을 건의한 것이다.

율곡은 만언소에서 ‘공물(貢物)’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그동안 선대 임금들은 조정에서 쓰는 것을 매우 절약하고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도 매우 적었습니다. 그런데 연산군(燕山君) 중년에 쓰는 것이 사치스럽게 늘어나서 일상적인 공물(貢物)로서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물을 더 늘이도록 함으로써 그 세수를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신은 지난날에 노인들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들었으나 감히 그대로 믿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전에 승정원에 있을 적에 호조(戶曹)의 공문을 가져다가 보니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가 연산군 7년(1501)에 늘려서 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문서를 덮고 긴 한숨을 쉬면서 “이럴 수가 있나! 그때라면 지금부터 74년 전이니, 그동안 성군(聖君)이 왕위에 있지 않았던 것도 아닐 테고, 현명한 선비가 조정에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닐 터인데, 이런 법이 어째서 개혁되지 않은 채로 있는가?”하고 한탄했습니다.

 

공물을 받아들이는 법이 74년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음을 보고 한탄하였다는 내용이다. 더구나 그 제도는 궁궐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백성들로부터의 수탈은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율곡은 선상(選上)의 제도, 즉 노비법(奴婢法)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선상 제도의 본뜻은 면포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관청의 종들만 가지고는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외지의 공노비(公奴婢)들로써 번갈아 가며 서울에서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고 그 제도를 ‘선상’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난하고 천한 노비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머물러 있는 동안 당하는 고통이 막심하여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비로소 베를 가지고 부역에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오직 베만을 거두어들일 따름이지 한 사람도 와서 부역을 치루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날로 곤궁해지고 호구(戶口)는 날로 줄어들고 있는데 노비도 역시 백성이거늘 어찌 그들만이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며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한번 부역을 치루고 나면 집안이 망하게 되지 않는 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2년은 공물 바치는 일에 동원되고, 1년은 선상의 사역을 맡아야 하니, 대체로 3년이면 반드시 한 번은 집안을 망치게 되어 공노비들의 고통은 극도에 달해 있습니다.

 

공노비의 부역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서 면포를 거두었는데, 그들은 면포도 바치고 공물도 바치는 일에 동원되니 고통이 극에 달했다는 내용이다. 율곡은 공노비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들의 문제를 임금에게 알린 것이다. 이 내용 가운데에는 당시 ‘백성들의 삶은 날로 곤궁해지고 호구(戶口)는 날로 줄어듣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국가적인 대개혁이 절대적으로 시급함을 알리고 있다.

또 그는 군정(軍政)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이렇게 지적했다.

 

하늘의 재변(災變)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어서, 본시 무슨 일에 따라서 일어난 것인지 지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 역사를 가지고 증험(證驗)하건대,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은 대부분이 전란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 볼 것 같으면 군정(軍政)은 무너지고 국경사방이 무방비 상태입니다. 만약 급박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비록 장량(張良)·진평(陳平)같은 이가 지혜를 내고 오기(吳起)나 한신(韓信)같은 이가 통솔을 한다 하더라도, 거느릴 병졸이 없는데 어떻게 홀로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떨리고 간담(肝膽)이 서늘해집니다.

 

율곡은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은 대부분이 전란의 상징’이라고 단정하였다. 아울러 국경 사방이 현재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아무리 장량, 진평, 오기, 한신 등과 같이 훌륭한 장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따를 병졸이 없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일어난 상황을 눈에 선하게 보듯이 율곡은 지적하였다. 율곡은 이글에 이어 당시 군정의 폐단을 설명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였다.

당시 선조의 학문적 스승으로 선조에게 영향력이 컸던 유희춘이 율곡의 제안을 실행하도록 선조에게 거듭 요청한 것은 율곡의 개혁 방안이 그만큼 현실적이고 절실했기 때문이다.

유희춘은 그해 1월 29일 조강하던 때에도 선조 임금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전하께서는 전번에 이이의 상소를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칭찬하셨고, 또 김우옹에게 ‘내가 너의 학문을 잘 알고 있으니, 네가 사우(師友)에게 들은 것과 자신이 공부한 것으로 잠계를 지어 오라.’고 분부하셨으니, 보고들은 사람들이 누군들 탄복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 오늘날의 큰 강령과 시급한 일은 이이의 상소에 이미 다 말했다고 여겨집니다. 이이는 시무를 아는 사람으로 소활한 서생들과는 다르니 진실로 채택하여 쓰셔야 합니다.”

그해 3월 6일자 경연 때에도 유희춘은 다음과 같이 율곡의 만언소를 언급했다.

“지금 민생의 고통은 바로 공물(貢物) 및 신역(身役)이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이이의 만언소대로 시정하여 병폐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선조는 율곡의 만언소에 대해서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칭찬을 하였지만 그것의 실행 여부에는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한 분위기는 ⌈선조실록⌋의 기사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흉조가 있으니 정전을 피해서 정사를 돌본 이야기, 직언을 구하는 칙명에 들어있는 문장의 구절을 고쳐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 선조 임금이 감기에 걸린 이야기, 음식을 먹고 체한 이야기, 밤에 잠을 못 잔다는 이야기 등으로 가득 차있다. 1월 20일자 선조실록에는

“천심(天心)이 편치 못한 것은 진실로 내가 덕이 없고 어둡기 때문이다. 지금 직언한 것을 보니 매우 가상하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경계하고 반성하겠다.”

라고 한 선조의 말이 실려 있을 뿐이다.

선조의 말대로 율곡의 만언소는 ‘요순시대를 만들겠다’는 한 이상주의자의 이상론이었을 뿐이었다.

율곡, 만언소를 올리다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6

율곡, 만언소를 올리다

 

1574년 정월, 선조 임금은 기상이변이 계속되자 친서를 내려 널리 의견을 구했다. 당시 우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율곡도 글을 올렸다. 이 글이 ⌈만언봉사(萬言封事)⌋, 즉 ‘만 글자에 이르는 상소문’이다. 만언소(萬言疏)라고도 불리는 이 글은 기상이변의 흉조를 당하여 앞으로 다가 올지 모르는 국가적 위기를 미리 대비하는 일을 적어 올린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 율곡의 ⌈경연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이가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이변이 너무 심하여 주상(임금)이 마음으로 두려워하면서도 이변을 풀 계책은 알지 못하고 한갓 의혹만을 조장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의혹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의혹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내가 상소를 하여 작금의 폐단을 극진히 말씀드리고 그러한 폐단을 극복할 계책을 올리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것을 박순(朴淳)이 듣고 만류하며 말하기를,

“성상의 위엄을 범하여 더욱 불안하게 될까 우려되오.”

하였다.

 

임금이 의혹을 조장한다는 것은 당시 선조가 흉조를 신하들의 탓으로 여기는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율곡의 생각은 당시의 폐단은 더 큰 틀에서 파악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순(朴淳, 1523-1589)은 훈구파와 신진 사림(士林)이 교체되는 시기에 사림운동에 힘쓴 관료였다. 당시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키는데 큰 공을 세워 사림파의 시대를 연 선비이기도 하였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청백리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장원급제자가 영의정에 오르는 경우가 몹시 드물었는데, 그런 징크스를 깬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생이었는데, 율곡이나 성혼(成渾)과도 가깝게 지냈다.

율곡이 상소를 올리겠다는 것을 만류한 박순에 대해서 율곡은 “대신이란 인망이 달려있는 것인데, 자기도 말을 다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까지 말을 못하게 합니까?”(경연일기)라고 항변하였다.

또 당시 열린 경연의 자리에서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임금에게 위장에 해로운 음식물에 대하여 설명한 적이 있었다.

“신(유희춘)이 외람하게도 경연에서 모시며 임금님의 증세를 살펴보고는 염려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약물과 음식물을 쓰는 일이야 어의(御醫)가 이미 의술대로 다하여 더 이상 남아 있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식료로 원기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은 그래도 말씀드릴 만한 것이 있습니다. 신이 의가(醫家)에는 조금도 접해보지 못했으니 감히 그 내용이야 논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제가 어려서부터 약했기에 병이 나는 것을 막으려고 양생하는 글을 조금 보았습니다. 이번에 구구하게 변변치 못한 정성으로 비장과 위장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다섯 가지 해설을 뽑아 열거하여 올립니다. 생각해 보시고 채택하여 성상의 몸을 요양하신다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 율곡은 임금에게 “병을 다스리는 데는 약과 음식물뿐이 아니라 모름지기 마음을 다스리고 기(氣)를 기른 뒤에라야 병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시에 ‘온갖 보양이 모두 필요 없고 마음을 잡는 것만이 요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요, 음식물은 말단의 일인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어찌 양생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선조가 왕에 오르기 전에 선조를 가르친 학자로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유희춘의 덕이 크다”라고 하면서 각별히 존경하였던 인물이다.

율곡은 그렇게 존경을 받는 학자가 국가적인 재앙을 앞두고 있는 절박한 시기에 그렇게 밖에 왕에게 올릴 말이 없었는가 하면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주상께서 대신에게 묻는 말씀은 간절하신데, 대신이 올린 대답은 작금의 폐단을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유희춘 부제학(副提學)이 아뢴 음식에 대한 금기는 왕을 모시는 어의(御醫)의 임무인데, 유 부제학이 임금의 덕을 보좌하고 인도하는 것이 고작 여기에 그치는가?”(⌈경연일기⌋)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 고위 관료들의 한계를 절감한 율곡은 자신이 직접 만언소를 올렸다. 마침 선조가 널리 직언을 올리라는 칙명을 내리자 바로 그는 만자에 이르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만언소의 주요 내용은 첫째, 제도 개혁을 이루어 당시의 상황에 맞는 변법을 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일곱 가지 실속 없는 일을 버리고 실질적인 일에 힘쓰자는 내용이다. 셋째는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율곡에게 호의적으로 기록된 ⌈선조수정실록⌋(1574년 1월 1일)에는 율곡의 ⌈만언소⌋가 원문 그대로 실려 있다. 1만자가 훨씬 넘는 이 글에 대해서 선조는 이렇게 반응하였다.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내용 가운데는 개혁과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하였다. 또

“이 상소문을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는 한편, 복사본을 만들어 올리라”

고 명하였다. 당시 인심이 불안하던 차에 율곡의 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비답을 보고서는 백성들의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선조의 말대로 율곡은 요순시대와 같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율곡과 같은 신하를 두고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하겠는가? 선조 임금 자신이 바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기록에 남겨두고 교훈으로 삼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만약에 자신이 일본의 군대에 의해서 도망가게 되고, 백성들이 자신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백성들은 도망가는 임금의 가마 행렬 뒤를 쫒아 돌멩이를 던지고, 도망가는 길을 일본 군인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도망가는 임금’의 모습은 백성들에게는 몹시 충격적이면서도 생소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서 선조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 관리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생소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