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은 결코 소인이 아니다!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5

정철은 결코 소인이 아니다!

 

강 정철은 〈관동별곡〉 · 〈사미인곡〉 · 〈속미인곡〉 · 〈성산별곡〉 등을 지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국문학사에서 이름이 드높다. 그러나 무려 1천여 명이 죽었다는 기축옥사의 위관으로 있으면서 정여립 모반사건을 당쟁에 이용하였다는 비판적 평가 또한 만만치 않은데, 이는 기축옥사를 기축사화라고도 지칭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인조반정의 주역이었던 이귀가 기축옥사의 위관을 담당한 정철에게 후배로서 옥사 처분에 대한 당부와 의견을 밝힌 글이 있다.

일찍이 정철이 역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고양(高陽)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 이귀(李貴)가 신경진(辛慶晋)과 같이 정철에게 가서,

“옥사를 공평히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시오.”

하며 간절히 말하고,

“돌아간 스승(율곡)이 평일에 대감을 소중히 아끼셨는데, 오늘날 사류(士類)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이 있다면 반드시 그 누(累)가 돌아간 스승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니, 정철이 답하기를,

“군들의 말이 옳다.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해 보리라.”

하였다. 얼마 뒤에 정철이 정언신을 대신하여 우상이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옥사가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널리 번져가는 형편이어서, 정철이 진정시키지 못하고 낭패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두어 달 동안 이귀가 가보지 않았더니, 한번은 정철이 노상에서 이귀를 만나자 서리(書吏)를 보내서 꼭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이귀는 성문준(成文濬)과 같이 가서 시국의 일을 말하면서,

“대감이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후회한들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돌아간 스승에게 누가 미칠 것이 한스럽습니다.”

하니, 정철도 이귀의 말을 옳다고 하였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었다.

연평일기(延平日記》

 

<연평일기>의 저자는 바로 신흠의 아들이자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인 신익성(申翊聖)이다. 그의 가계 당파로 봤을 때 정철을 변호했으면 변호했지 일방적으로 매도할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기축옥사에 대한 당시 사류들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정철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역시 기축옥사의 위관으로 반대파들을 숙청했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아래의 기사는 서인의 영수로서 동인을 숙청한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명운이 걸린 막중한 옥사를 사사로이 이용했다는 혐의를 두는 기록들이다.

○ 임진년에 유성룡과 정철이 안주(安州)에서 만났을 때 정철이 묻기를,

“남들이 말하기를, 대감도 역시 내가 사감으로 최영경을 죽였다고 한다더군요.” 하니, 성룡은, “참 그렇소.” 하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때에 근사(近似)한 형적을 보았으므로 일찍이 그런 말을 하였소.”

하여, 정철이 깜짝 놀랐다.

기재잡기

○ 젊어서 청백하고 곧은 것으로 이름이 나서 총마어사(驄馬御史)의 호칭이 있었으나 동서로 분당된 뒤에 이발(李潑)의 배척을 받아 오랫동안 산직(散職)에 머물러 있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에 우의정이 되어 그 옥사를 두드려서 만들었다는 비방이 있었다.

부계기문

 

<기재잡기>는 정철이 사감에 치우친 바가 있음을 유성룡과의 대화 내용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부계기문>은 당시 유자들이 정철이 기축옥사를 혹 정치적으로 활용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고 전한다. 두 기록 모두 정철의 기축옥사 처분이 적당하지 않다는 평가이다.

전해오는 그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정철의 예술가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술을 즐기고 여색을 밝히는 모습은 정감이 풍부한 예술가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그대로이다. 정철과 막역한 지우였던 율곡도 주색을 삼가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철이 술을 즐기게 된 이유를 조헌은 그의 개인사를 들어가며 변호해준다.

 

○ 공에게 한 명의 형이 있었는데 을사사화 때 곤장을 맞다가 죽었고, 자형 계림군(桂林君)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도망치다가 잡혀서 죽음을 당하니, 공이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사실 완적(阮籍)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한 달간 술을 끊었다. 얼음을 넣은 옥병같이 깨끗했으며 성심으로 공무에 몸을 바쳤다. 시정(市井)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철ㆍ이이 두 분이 헌부에 계실 때는 각사(各司)에서 멋대로 징수하는 일이 없었다.”

고 하였다.

<중봉(重峰)의 병술년 상소>

절제하지 못하는 음주습관은 엄중한 몸단속을 하늘처럼 여겼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분명 흠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한편 기축옥사를 처분할 적에 정철과 손발을 맞추었고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초유의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항복은 술 마시는 정철의 모습에서 그의 천진난만함을 보았다.

○ 최명길(崔鳴吉)이 일찍이 이항복(李恒福)에게 묻기를,

“정송강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반쯤 취했을 때에 손뼉을 치면서 담소하는 것을 바라보면 천상(天上)의 사람 같으니, 어찌 속된 무리들이 방불이나 할 것인가.”

하였다. 명길이 뒤에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송강을 보지는 못했으나 백사(白沙)의 높은 안목으로 존경하고 탄복함이 이와 같으니 그 언론과 풍채를 상상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지천유사(遲川遺事)》

 

이항복의 평가를 기록한 최명길의 이 기록을 보건대, 취기가 오른 후의 정철의 천진무구한 모습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바로 이런 자태가 고결하고 아름다운 가사문학으로 꽃피웠을 것이다.

정철에 대한 평가는 역시 그의 지우인 율곡 이이의 평이 여실한 것 같다.

○ 당시의 논의가 공(정철)을 헐뜯고 배척하므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친구 중에 전별하는 자가 없고 유독 이이와 이해수(李海壽)만이 전별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해수는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이이가 희롱하여 말하기를,

“계함의 강직과 개결에다가 대중(大中, 해수의 자)의 언어로 문식을 한다면 어디를 가도 통하지 않을 곳이 없겠다.”

하였다. 이이가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계함은 강직하고 깨끗하고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이지만, 그 병통이 좁은 데 있을 뿐이니 그 사람을 끝내 버려서는 안 된다.”

하니, 시배들은 수긍하지 않았다. 하루는 임금이 박순에게 묻기를,

“내 생각에는 정철이 재기(才氣)는 있는데 마음이 좁아서 사람들과 대부분 맞지는 않다. 그러나 만약 정철을 소인이라고 한다면 제가 반드시 불복할 것이다.”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정철을 깊이 아십니다. 사람을 알기를 매양 이같이 한다면 누가 심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석담일기

 

이이가 정철을 평하기를,

“계함은 강직하고 깨끗하고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이지만, 그 병통이 좁은 데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속이 좁은 병통은 강직하고 개걸한 것이 지나친 것일 터이다. 기축옥사에서 최영경이 죽은 것을 두고 정철이 사적인 감정으로 죽였다는 비판 또한 이러한 병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매화나무를 베어버린 최영경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4

매화나무를 베어버린 최영경

 

초에 이조전랑 자리가 빌미가 되어 발생한 심의겸과 김효원의 알력이 점차 확전되어 선배 사류와 젊은 사류로 나뉜 동서 붕당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정국은 연산군 때부터 명종 초년까지의 이른바 4대 사화를 겪으면서 입지를 갖지 못했던 사림들이 선조 치세를 통하여 막 기지개를 켜는 정국이라 상호 견제 중에도 상호 협조의 기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기축사화)를 거치면서 서인과 동인의 갈등과 대립은 건너올 수 없는 강을 넘게 된다. 일설에는 3년 동안 옥사로 사망한 사람이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은 정여립과 대동계의 무리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을 공격해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한다. 조정에서는 즉시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로 파견하고 정여립은 진안 죽도로 도망쳤다가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한편 이때 그와 같이 피신했던 아들 정옥남(鄭玉男)은 체포되자, 길삼봉(吉三峯)이 주모자라고 토설하는데, 나중에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고문 끝에 옥사한 이가 바로 남명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이다.

최영경이 길상봉이 아니라는 결론은 이미 조선시대에 그에 대한 신원 회복을 통해서도 밝혀졌지만 최영경이라는 인물이 실제 어떠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기록들을 추려보면 대강 이러하다.

○ 공은 날 때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조금 자라서 상소리를 입에 담지 아니하고 걸음걸이도 법도가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을 당하자 애통함이 지나쳐서 거의 살아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장사 할 때에는 힘을 다하여 유회(油灰)를 구하여 썼으며, 3년 동안 묘 앞에서 여막을 짓고 살면서 조석으로 상식(上食)할 때 반드시 어육(漁肉)을 잊지 아니하였다. 한번은 큰 비가 와서 냇물이 넘쳤으므로 시장에 갈 수 없어 묘에서 울고 있는데, 범이 산돼지를 잡아다가 상석(床石) 위에 놓고 갔다. 또 진주에 살 때에 제사 날을 당했는데도 어육이 없어 종일 슬피 근심하고 있었는데, 노루 한 마리가 후원에 들어왔으니, 이런 것은 다 그의 정성스러운 효도에 감동된 것이라 하겠다. 〈행장〉

 

○ 선조 6년 계유에 행실이 높은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있어 최영경을 6품직에 제수하였다. 영경은 일찍이 조식(曺植)에게 배웠는데 청렴하고 개결함이 세상에 제일이었다. 의로운 일이 아니면 털끝만큼도 취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버이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부모가 죽으니 가산을 기울여서 장사하여 마침내 가세가 가난해졌다. 성중에 있으면서 남과 교제하기를 일삼지 아니하니, 그를 아는 자가 별고 없었고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장이 선비’라고 하였다. 안민학(安敏學)이 처음으로 방문하였다가 그 말을 듣고 특이한 것이 있음을 알고 성혼에게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 이인(異人)이 있으나 모르고 있다가 지금에야 알았으니, 가서 보지 아니하겠소.”

하였더니, 성혼이 성중에 들어와서 일부러 찾아가 문을 두들기니, 한참 만에 맨발의 작은 여종이 나와서 맞이하므로 들어갔더니 뜰에 방초가 가득하였다. 조금 뒤에 영경이 나오는데 베옷에 떨어진 신을 신은 궁한 차림이나 그 얼굴은 엄중하여 남이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앉아서 이야기하니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성혼이 매우 기뻐서 백인걸(白仁傑)에게 (《괘일록》에는, “이이(李珥)에게 말했다.”고 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최영경을 보고 돌아오니, 홀연히 맑은 바람이 소매에 가득함을 깨달았다.”

하였다. 이때부터 영경의 이름이 사림(士林)에 널리 퍼졌다. 《석담일기》

 

○ 공의 기상은 천길 높이의 바위벽 같고 가을 서리와 따가운 햇살 같았다. 흉금이 깨끗하고 시원하여 옥으로 만든 병이나 얼음과 달 같았다. 바라보면 신선 같아서 그 기상과 풍모는 조남명(曺南冥)과 서로 견줄 만하였다. 《괘일록》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최영경이 고결하고 청렴한 처사로 극진한 효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괘일록>에서 최영경의 기상이 천길 높이의 바위벽 같고 가을 서리와 따가운 햇살 같으며, 흉금이 깨끗하고 시원하여 옥으로 만든 병이나 얼음과 달 같아서 바라보면 신선 같다 하고 적어 두었는데, 이는 그가 극심한 국문 중에 보여준 의연한 모습들에 잘 드러난다.

 

○ 이전에, 영경이 진주 옥에 갇히자 거의 천여 명의 선비들이 옥문 밖에 모여들었다. 영경이 옥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하니, 그들은 밖에서 노숙해 가면서 수일 동안 흩어지지 아니하였었다. 어떤 이가 묻기를,

“선생이 옥중에서 여러 달 있으면서 털끝만큼이라도 뜻에 동요됨이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나는 죽고 사는 것은 잊은 지가 벌써 30년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식욕(食欲)이 가장 중한 것이야. 내가 잡혀서 들어오는 길에 동문을 지나다가 길가에 상추잎이 푸른 것을 보고는 그 잎에 밥을 싸서 한 번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울컥 솟더라.”

하고는 크게 웃었다
. 《괘일록》

 

○ 이항복이 일찍이 말하기를,

“기축옥사를 다스릴 때에 여러 사람의 진술하는 모양을 보니 모두가 황급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최영경은 고문을 받는 중에도 마치 자기 집 방 가운데 앉아 있는 것처럼 정신과 기색이 태연하였고, 말도 평상시 자기 집에서 손님과 수작하는 것같이 조리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니, 그 기백이 다른 사람보다 매우 지나침이 있었다.”

하였다.
석실어록(石室語錄)》 《백사(白沙)》 《청음문답(淸陰問答》

 

○ 공은 남보다 뛰어나고 드높은 기백이 있어 흰 머리와 흰 수염에 형상이 엄하여 가히 사람이 바라보고 두려워할 만하였다. 이항복이 극구 칭찬하기를,

“죄수들을 문초하다가 참 큰 사람을 보았다.” 하였고,

좌상 김명원(金命元)도 칭찬하기를,

“비록 오랏줄에 묶여 있으나 늠연(凜然)히 공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였다.《미수기언

이항복이 참 큰 사람을 보았다고 격찬할 정도로 생명이 타들어가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최영경의 기상이 손에 잡힌다. 그러나 최영경이 이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린 데에는 평소의 언행과 처신이 무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 인조 갑자년에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신이 사천(泗川)에 귀양 갔을 때에 그 고을에 사는 최영경의 족인(族人)이 말하기를, ‘영경은 항상 맨 머리로 망건도 쓰지 않고 안석에 기대어 눕기를 즐겨했는데, 감사가 찾아와도 병을 빙자하고 보지 않았으며, 두세 번 찾아 온 후에야 비로소 보면서 말하기를, 「아무 수령은 치적이 나쁜데 어찌 그를 쫓지 않느냐. 아무 수령은 치적이 좋은데, 네가 어찌 포상하지 않는가.」하였고, 진주 목사가 와서 봐도 또한 너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사대부를 억누르고 다른 사람을 능멸히 아는 것을 기특한 행실로 삼았다. 오직 제사 때는 반드시 보름 동안 재개하고 친히 제물을 보살폈다.’고 합니다.” 하였다. 《성옹집(醒翁集)》

○ 영경은 정구(鄭逑)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구가 매화나무 백 그루를 사랑방 앞에 심어 놓고 그 집 이름을 ‘백매헌(白梅軒)’이라 하였다. 하루는 영경이 정구를 찾아 왔다가 마침 주인이 없으므로 종을 불러서 도끼를 가져오라 하여 매화나무 백 그루를 다 베어버리고 돌아갔다 한다. 《석실어록

 

벼슬하지 않는 처사가 관작의 고하에 따라 처신을 좌지우지 않는다는 것은 고결한 처사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이 사대부를 억누르고 다른 사람을 능멸히 아는 것을 기특한 행실로 삼았다.” 하는 평가는 방외지사라면 모를까 조식에게서 경세지학을 배운 유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과한 감이 없지 않으며, 정구의 집 매화나무 백 그루를 모두 베어버렸다는 기사는 그 진위를 우선 판단해야겠지만 이 또한 최영경의 방외지사풍의 성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명종 연간에 실력자들이 반대파를 제거하고자 할 적에 이모는 신실한 사람이라고 하여 화를 면했다는 퇴계의 고사와는 사뭇 다른 기풍이 엿보인다.

유덕한 외척 심의겸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3

유덕한 외척 심의겸

 

의겸이라 하면 조선 정치사에서 김효원과 함께 동서분당의 시발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동서분당의 시발자로서 거론되는 외에 심의겸에 대한 여타의 자세한 기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당시 동인의 영수로 활동하던 김효원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찌 절조와 학행이 없었다면 중진 사류들의 존망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연려실기술>에는 동서분당을 논한 최명길의 <지천집> 한 대목이 전재되어 있다.

동과 서의 틈은 심의겸과 김효원에서 시작되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권신(權臣)의 사위(윤원형(尹元衡)의 사위인 이조민(李肇敏))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본래 사실이었다. 김효원은 심의겸을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외척(外戚)으로서 정치에 간여한다.”

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사실이었다. 김효원이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후에는 절조를 닦았으니 옛사람도 이런 것을 허여한 바이며, 심의겸은 행적은 비록 척리(戚里)이지만 사류(士類)에게 공(功)이 있으니, 역시 군자가 막을 바가 아니다.

그런데 전배(前輩)는 심의겸의 편을 들면서 김효원을 가리켜 안으로 사사로운 유감을 품었다 하고, 후배는 김효원의 편을 들면서 심의겸을 가리켜 궁중의 세력에 의탁한다 하였으나 두 사람 모두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이의 ‘둘다 옳고 둘다 그르다.’는 의논이 나오게 된 근거이다.
지천집(遲川集)》

 

최명길은 여기서 동서 분당이 김효원과 심의겸의 알력에서 발단하였지만 결국에 동서 분당으로 굳어진 정황을 살펴보면, 선배 사류는 심의겸의 편을 들면서 김효원을 가리켜 안으로 사사로운 유감을 품었다고 비판하고 후배 사류는 김효원의 편을 들면서 심의겸을 가리켜 궁중의 세력에 의탁한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격화된 것으로 정작 심의겸과 김효원 당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아마도 최명길의 이 평이 가장 사실에 부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심의겸을 두고서

“행적은 비록 척리(戚里)이지만 사류(士類)에게 공(功)이 있으니, 역시 군자가 막을 바가 아니다.”

라는 말은 심의겸에 대한 배척과 옹호가 발생하는 지점을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한 편은 그가 외척이기 때문에 혹간 궁중의 세력에 의탁한 것이라는 혐의를 두는 데에서 배척한 것이고 한 편은 명종 연간에 외척으로 전횡을 부리던 자신의 외삼촌인 이량을 그가 탄핵하여 퇴출시킨 공적을 염두에 둔 것이다.

동인들이 심의겸에 혐의를 두는 데에는 저간의 사정도 있었으니, 바로 선조 초년에 을사년의 원통함을 풀고 을사년의 위훈(僞勳)을 삭제하는 과정이었다. 본래 을사사화에 연류되어 피해를 입은 사류들을 신원 하는 데에는 이론이 많지 않았지만 을사사화와 관련하여 훈작을 받은 사류들을 삭직하는 문제는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중론이 분분했는데, 당시 심의겸의 처신을 <연려실기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 임금이 공론을 굳이 거절하므로 온 조정이 흉흉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비의 동생 심의겸에게 권하여 대비에게 여쭈라고 하니 심의겸이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백인걸이 듣고 말하기를,

“이량(李樑)을 귀양 보낼 때에는 심의겸이 사실을 대비에게 내통하였으면서, 이번에는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 이것은 심의겸이 삭훈을 반대함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삭훈할 일로 심의겸에게 물은 사람이 있었는데, 심의겸이 말하기를,

“원종공신(原從功臣)이 천여 명이나 되는데 궁중과 연결된 자가 많아서, 그 사람들이 반드시 죽기로 기를 쓰고 방해하려 할 것이니, 만일 거사하였다가 성사하지 못하면 오히려 해가 있을 것이니 아직은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오.”

하니 식자들이 그 때문에 심의겸을 못마땅하게 여기었다.
석담유사

당시 삭훈에 관해서는 심의겸만이 소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준경 또한 선조가 재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현실 정치의 역관계를 고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외척이라 궁중과 관계를 고려한다는 혐의는 갖게 된 셈이다.

그러나 <연려실기술>에는 심의겸의 인품과 학행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는데 그가 선배 사류들의 존망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대강 알 수 있게 해준다.

○ 기개가 활달하고 용모가 장대하였으며, 스스로 몸을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효성과 우애와 공손함과 검소함이 천성에서 나왔으므로 비록 외척이었으나 사류 중에 추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명동 말년ㆍ선조 초년을 당하여 억울함을 씻어주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니 청명(淸明)한 정치가 후세가 미칠 바가 아니었는데, 이는 모두 의겸의 힘이었다. 퇴계가 일찍이 글을 보내 국사에 힘쓰기를 권하기를,

“외척 중에 어진이가 있는 것은 국가의 복이다.”

하였다. 율곡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의겸은 외척 중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였다. <묘비>

 

퇴계와 율곡은 선조의 묘정에 배향된 명신일 뿐 아니라 조선의 유자를 대표하는 명현들이다. 양현이 공히 심의겸을 허여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그의 인망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학행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

동인의 영수 김효원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2

동인의 영수 김효원

 

선 정치사를 비판적으로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용어가 ‘사색당파(四色黨派)’라는 말이다. 네 가지의 색깔을 들어 네 개의 붕당(朋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처음에는 동인(東人)•서인(西人)•남인(南人)•북인(北人)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어진 뒤에는 노론•소론•남인•북인의 4대 당파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붕당은 선조(宣祖) 8년(1575)에 동•서로 나뉘어졌는데, 바로 이 최초의 동서 분당의 중심인물이 심의겸과 김효원(1542-1590)이다. 심의겸을 편든 사람들을 심의겸이 살았던 건천동을 빗대어 도성 서쪽 파당이라는 의미의 서인이라 하고 김효원을 편든 사람들을 김효원이 살았던 정릉동(현재의 정동)을 빗대어 도성 동쪽의 동인이라고 하였으니 바로 여기서부터 조선의 봉당이이자 당파가 태동한 것이다.

선조 연간은 비록 전쟁의 상흔이 깊게 드리운 시절이기는 하지만 명유들이 속출한 시대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바로 이런 시기에 젊은 사류들의 중심에 우뚝 서있었던 김효원이라면 필시 그에 필적할 학행을 갖추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통상적으로 접하는 김효원에 대한 현대의 기록들은 주로 동서분당의 주역으로 당시 동인의 맹주였다는 정도로 멈추고 있어서 아쉬운 감이 있다.

<연려실기술>의 김효원에 대한 기사들은 그 학행의 대강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용모가 단정 엄숙하고 아름다운 수염은 길이가 1자에 이르렀으며, 술을 1말을 마셔도 어지러운 언동이 없었다. 공무에서 여가가 생기면 짚신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채 산수를 찾아 소요하였다. 매양 아름다운 산수와 그윽하고 한적한 곳을 만나면 종일 시를 읊고 즐기며 돌아갈 줄을 모르니, 사람들이 군수의 행색인 줄 알지 못하였다. 《동유사우록》

 

풍채가 엄연(儼然)하여 바라보면 존경심이 일어났다. 어느 날 창릉(昌陵)에 배제(陪祭)하였는데, 제사를 마치고 임금이 내시에게 묻기를,

“통례 한 사람이 주선(周旋)하고 진퇴(進退)하는 것이 조용하고 법도에 맞았는데 누구냐?”

하니, 내시가 김효원이라 대답하자, 임금이 탄식하기를,

“못 본지가 오래다.”

하고, 영흥부사로 승진시켰는데, 관아에서 죽었다.

동유사우록

 

이 기록은 박세채가 쓴 <동유사우록>에 기록된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박세채는 동국 18현의 한 명으로 송시열과 윤증 간에 회니(懷泥)논쟁 등을 통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적에 화해를 위해 각방으로 주선했던 인물로, 일방적으로 편당하거나 배척하는 심사가 없어 보인다. 이 두 기사는 비록 짧지만 김효원의 학문과 풍모를 추정하는 데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또한 인조반정 후에 광해군 당시 북인 주도록 간행한 <선조실록>을 문제 삼으면서 서인이 중심이 되어 기록한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김효원의 졸기에는 이런 내용들이 들어있다.

 

효원은 벼슬살이에 있어서 청렴결백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정결하고 민첩하게 하였으며 세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젊었을 때 날렵하여 일을 좋아하였고 논의가 과격하였으므로 동류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그의 밑에 있었는데 또한 이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사기도 하여 끝내 당파의 괴수라는 명목으로 죄를 얻어 외직에 보임되었다.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잘못을 반성하여 낮은 벼슬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시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친구에게 보내는 서찰 내용에도 조정의 득실에 대해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늘 탄식하면서 ‘당초 전조(銓曹)의 석상에서 발언한 한 마디 말은 단지 나라를 위해서였는데 어찌 이토록 분란이 생길 줄이야 생각했으랴. 나로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은 일찍이 그의 위인에 대해 논하기를 ‘인백(仁伯)은 강방정직(剛方正直)하니 의당 동류 중에서 제일인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수정선조실록> 개수에 주도적인 자리에 있던 서인들이 쓴 동인의 영수 김효원의 졸기이니 최소한 김효원을 일방적으로 편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효원은 성품이 강방정직하고 청렴결백하며 유능한 관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효원에게는 아우 김신원(金信元)과 김의원(金義元)이 있는데 모두 문과 급제한 영재들로 효원의 ‘졸기’에 이 두 동생들도 명성이 있는 인물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김효원은 당대에 명망이 높던 사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그에 대한 자료나 문헌이 거의 보이지 않는 데에는 다소 의아하다.

필시 서인들이 조선 후기 정치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생 김신원이 대북(大北)에 속하여 임해군(臨海君)을 사사하게 하고, 소북을 제거하기 위한 계축옥사를 잘 다스렸다 하여 익사공신(翼社功臣)에 책훈되고 숭양부원군(嵩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가 인조반정으로 훈작이 추탈되었고, 그의 사위가 대북파로 광해조에 참형에 처해진 허균이었다는 점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광해 치세 기간 북인들은 소북과 대북으로 나뉘어서 국정을 좌지우지 했지만 인조반정 후에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다시는 조선 정치사에 등장하지 못했다.

선조 임금의 덕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

선조 임금의 덕

 

조(재위기간: 1567-1608)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임진왜란(1592-1598)이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평가는 무능함이라는 세 글자일 것이다. 더욱이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결행했을 때 선조에게는 백성을 버린 왕이라는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가 새겨진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岧)의 셋째아들로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선조의 치세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있었던 시기였고 정치적으로는 훈구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라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만약 선조가 국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제대로 재건했다면 위기를 기회로 극복한 위대한 군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은 위기를 잘 넘긴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엄정한 역사의 잣대로 평가했을 때 결코 성공한 왕은 아니지만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선조의 아름다운 덕’이라는 조목을 할애하여 선조의 아름다운 일화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선조의 근검절약 정신을 다룬 기사는 단연 눈에 띄는 대목이다.

 

임금의 검소한 덕행은 여러 제왕 중에 높이 뛰어났다. 만년에 병이 났을 적에 내의가 들어가 진찰하였는데, 푸른 무명요를 깔고 이불은 자주 명주였다. 입은 옷도 역시 극히 굵은 푸른 명주였으며, 약을 마시는 그릇도 백자기에 무늬 없는 것이었고, 흰 책상에 글씨 쓴 병풍이 있을 뿐, 휘장도 없었더라고 한다.《지소록

비단 어의(御衣)가 없고 수라에도 두 가지 고기가 없었다. 서교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아들일 때, 내시가 점심을 올렸다가 물릴 때 여러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을 불러 주시는데 보니, 차린 것은 물에 만 밥 한 그릇과 마른 생선 대여섯 조각, 생강 조린 것, 김치와 간장뿐이었다. 여러 의빈들이 먹고 나니, 임금이 그 남은 것을 싸가지고 가라 하며, “이것이 예이다.”하였다.《공사견문

입시한 대간이 근래에 복색이 사치해진다고 말하자 임금이 속옷을 헤쳐 보이며, “내 옷도 면포를 쓰는데, 신하들의 의복이 나보다도 나은 자가 있단 말이냐.” 하니, 여러 신하가 황송하고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왔는데, 그 후로는 사치한 습속이 없어졌다.
공사견문

정숙옹주(貞淑翁主)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가 그 뜰이 좁은 것을 싫어하여 임금에게,

“이웃집이 너무 가까워 말소리가 서로 들리고, 처마가 얕고 드러나서 막히는 것이 없으니, 값을 주시어 그 집을 사게 하여 주소서.”

하고 여쭈자 임금은,

“소리를 낮게 하면 들리지 아니할 것이고, 처마를 얕게 하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뜰이 굳이 넓어야 할 것이 있느냐. 사람의 거처는 무릎만 들여 놓으면 족한 것이니라.”

하고 굵은 발 두 벌을 주시며,

“이것으로 가리게 하여라.”

하였다.

공사견문

아마도 이 기사들은 임진왜란 이후의 내용일 것이다. 전국토를 유린한 7년간의 긴 전쟁, 그리고 연이어 찾아온 가뭄과 흉년. 이런 상황에서 왕이 근검절약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선조 치세기에만 국란이 있었고 흉년과 가뭄이 들었던가. “임금의 검소한 덕행은 여러 제왕 중에 높이 뛰어났다.”라는 기사를 보면 선조의 근검절약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어전에서 대간이 근래에 신하들의 복색이 사치하다고 진언하자 선조가 자신의 속옷을 헤쳐 보이면서,

“내 옷도 면포를 쓰는데 신하들의 의복이 나보다도 나은 자가 있단 말이냐.”

하는 대목은 선조 개인의 근검절약이라는 미덕을 넘어, 지도자의 몸가짐과 생활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어서

“여러 신하가 황송하고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왔는데, 그 후로는 사치한 습속이 없어졌다.”

라고 기사를 마무리 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한 습속이 이 한 가지 일로 일시에 없어질 수 있겠는가마는 선조의 궁행 실천이 당시 신료들로 하여금 근검절약에 더욱 매진하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틀림없을 것이다.

역린(逆鱗)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최초로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의 라이벌로 유명한 한비자가 쓴 <한비자(韓非子)> ‘설난(說難)’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용은 상냥한 짐승이다. 가까이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는 지름이 한 자나 되는 비늘이 거슬러서 난 것이 하나 있는데, 만일 이것을 건드리게 되면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만다. 군주에게도 또한 이런 역린이 있다.”

이 말에 연유하여 군주의 노여움을 ‘역린(逆麟)”이라 한다.

정사를 올바로 펼치기 위해서는 국정의 동반자인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고 국정의 책임자인 임금은 신하의 고언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역시 신하의 입장에서는 혹 역린을 범할까 조심하게 되고 임금의 입장에서는 혹 역정을 내서 충언을 막아버릴까 삼가야 한다.

재위 초년의 혈기왕성한 선조가 여색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이에 신하들이 경연의 자리를 빌어 간언한 기사가 <연려실기술>에 게재되어 있다.

 

그때에 여자를 총애함이 점점 성하였는데, 홍섬(洪暹)ㆍ박대립(朴大立) 등이 고시관이 되어, 왕소(王素)가 임금에게 왕덕용(王德用)이 진상한 여자를 받지 말기를 청하는 옛글로 시제(試題)를 내었더니, 그 후에 홍섬 등이 입시하였을 때 임금이 조용히 이르기를,

“전날 시제는 누가 냈는지 모르겠으나, 신하의 도리로 임금에게 간할 것이 있으면 간할 것이지 어찌 그렇게 자취를 남기게 한단 말이냐. 내가 유감스럽다.”

하니, 박대립이

“시제는 신이 낸 것입니다. 신하가 간하는 데는 그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니어서, 정당하게 간하는[正諫] 방법과, 풍자로 간하는[諷諫] 방법과 꾀로 간하는[譎諫] 방법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바가 아님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경의 말이 진실로 옳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당하게 간하는 것이 그 중 옳을 것이다.”

하였으니,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이것이 선조 초년 정치의 아름다움을 이룩한 것이다.

부계기문

 

경연관으로 참가한 박대립이 북송시대에 간관으로 유명한 왕소가 인종(仁宗)에게 왕덕용이 진상한 여자를 받지 말 것을 간하고 이에 인종이 왕소의 간언을 채납하여 출궁시킨 고사를 들어 선조에게 간언한 일화인데, 이 기록을 남긴 김시양(金時讓)이 <부계기문( 涪溪記聞)>에서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이것이 선조 초년 정치의 아름다움을 이룩한 것이다.”

라고 자평한 대목은 선초 초년 정치의 아름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마도 이런 기풍이 살아 있었기에 서둘러 을사사화에 화를 당한 신료들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명종 연간에 그리 불러도 오지 않던 퇴계 이황이 몸소 나오는 등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연제도를 비판한 율곡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30

경연제도를 비판한 율곡

 

곡이 지은 ⌈경연일기⌋의 1574년 정월(正月) 기록을 보면 ‘임금이 감기로 오랫동안 정사(政事)를 돌보지 못하였다. 신하들이 문병하면 반드시 편안하다고 답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정사를 돌보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과 신하들이 문병하면 언제나 편안하다고 답하였다는 기록이 묘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임금은 감기로 오랫동안 일을 못하면서도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 해 정월은 천재 이변이 계속 일어나 궁궐 안팎으로 뒤숭숭한 때였다. 그런데 선조 임금은 감기 외에도 음식을 먹을 때마다 체했다고 한다. 1월 7일의 선조실록기록을 보면 임금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침해를 받아 체하고 내려가지 않는다. 식사를 하고서 체해 있을 때마다 자못 답답하여 편치 못하지만 먹지 않으면 편안하여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였다.

1월 5일 기록에는 임금이

“요사이 감기에 걸려 기운이 편하지 못하다. 집무는 다음으로 미루자.”

고 하였다. 그날 승정원과 홍문관 관료들이 병문안을 하자 임금은 ‘편안하다’고 하였다. 1월 8일에는 약을 제조하는 관리가 문안을 가서 살피자 선조는

“지난밤에는 조금 편안했다. 문안하지 마라.”

고 답하였다. 승정원과 홍문관 관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문안하지 마라’고 전했다.

1월 10일에는 유희춘이 비장과 위장을 보호하는 방법과 음식물에 관한 메모를 올렸다. 선조 임금은 “그대의 메모를 살펴보니 충성이 지극하다. 치료에 도움이 있을 것이므로 진실로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고 하는 비망기를 내려 보냈다.

1월 18일에는 20일까지 경연을 중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율곡은 당시 승정원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신하들이 천안(天顔, 임금의 얼굴)을 오래 동안 뵙지 못하여 상하(上下)가 격조되었다. 임금께 감히 정사를 돌보시라고 청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때고 신하들을 불러 보시라고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선대의 대왕들께서는 비록 편치 않으신 중이라도 신하들을 불러 보시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셨습니다. 누우신 방에 들어오라 하시기까지 했기 때문에 상하가 서로 믿어 간격이 없었습니다. 임금과 신하란 아비와 자식 같은 것입니다. 부모가 병이 있을 때 자식이 얼굴을 못 뵐 도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편하신 자리로 신하들을 자주 불러보시고 아울러 의관더러 진찰하라 하시어 증세에 대한 약제를 의논하실 뿐 아니라 수심양기(修心養氣)의 방법도 물으시면 옥체를 조섭하시는 데 큰 도움이 되실 것이요, 아랫사람들이 주상께서 신하들을 불러 보신다는 말을 들으면 주상의 증세가 대단하지 않은 것을 알고 모두들 좋아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전 대왕들 시기의 사례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율곡으로서는 자신이 올린 만언봉사의 시행 여부도 아직 명확히 결정이 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감기며 위장병 등의 이유로 정치를 뒷전으로 돌리니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율곡의 문장에 담겨있다.

율곡의 이러한 간곡한 요청에 부응하여 선조는 다음과 같이 답을 내렸다.

“근래에 없었던 일이니 경솔히 행동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잘 조절하여 일을 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직전에 율곡은 만언소를 올렸다.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흉조가 나타나자 선조는 널리 직언을 구하였는데, 율곡이 응한 것이다. 율곡의 만언소는 당연히 돋보여 선조는 만언소를 칭찬하고 필사하여 오도록 하였다. 아울러 관리들은 율곡의 제안을 서로 검토해보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런데 율곡의 만언소에는 선조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정면으로 비판한 점이 적지 않다. 선조를 모시는 관리들이 차마 할 수 없는 말도 율곡은 만언소에 거침없이 쏟아 냈다. 그중에 하나가 ‘경연의 성과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것이다.

율곡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옛날에는 삼공(三公)의 벼슬을 두어 사(師)는 교훈(敎訓)으로 교도하여 주었고, 부(傅)는 덕의(德義)를 가르쳐 주었고, 보(保)는 신체를 잘 보전케 하여 주었습니다. 이러한 법도가 폐지된 뒤로는 사(師)·부(傅)·보(保)의 책임이 오로지 경연(經筵)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도 ‘임금의 덕의 성취는 책임이 경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경연을 설치한 것은 다만 글을 놓고 강독(講讀)하여 장구(章句)의 뜻이나 놓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혹(迷惑)을 풀어줌으로써 도(道)를 밝히려는 것이요, 교훈을 받아들여 덕(德)을 더하게 하려는 것이요, 정치를 논하여 올바른 다스림을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임금들께서는 경연관을 예로써 대우하고 은덕(恩德)으로써 친근히 하여, 집안사람이나 부자지간처럼 정의(情意)가 서로 잘 통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경연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고 경연제도를 실시하였던 옛 임금들의 경우를 소개한 것이다.

“지금의 경연에 참가한 신하들은 대부분 학문이 부족하고 성의도 결핍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경연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그것을 기피하려는 자까지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찌 정성과 깊은 생각을 품고서 성상을 친근히 모시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근자엔 경연도 자주 열리지 않고 접견(接見)하는 일도 극히 드물거니와 예모(禮貌)를 엄숙히 하고 사기(辭氣)도 제대로 펴지 못하여, 말을 주고받는 일도 매우 드물고 강의(講議)와 질문도 자세하지 못하며, 정치의 요점과 시국의 폐단에 대하여도 물어보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간혹 한두 명의 강관(講官)이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권하는 일이 있었으나 역시 덤덤히 들으시기만 할 따름이었지, 몸소 시험하고 실천해 보려는 실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경연의 문제점을 소상히 지적한 것이다. 경연에 참가한 신하들의 자질부터 경연에 임하는 임금의 정신자세와 태도까지 거침없는 비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물었다.

“경연이 파한 뒤에 전하께서는 깊숙이 들어가 버리시니, 그곳을 쳐다보며 그저 안타까워할 따름입니다. 전하의 좌우에는 오직 내시들과 궁녀들만이 있을 따름이니 전하께서 평소에 무슨 책을 보고 계시고 무슨 일을 하고 계시며 어떤 말을 듣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신하들도 이것을 알 수 없는 형편이니 하물며 밖의 신하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이어서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맹자는 아성(亞聖)이시니 제(齊)나라 임금의 존경도 지극하였는데도, 임금이 일을 하다 말다 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탄식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를 모시는 신하들이야 옛 사람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많은데다가 그처럼 소외까지 당하고 있으니 더 어떠하겠습니까?”

그동안 신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경연활동을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한 선조로서는 너무나 노골적인 비판이었다. 이러한 비판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다시 신하들과 경연을 개최하고 그들의 의견을 묻기에는 너무 체면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1574년 정월, 율곡이 만언봉사를 올린 직후 건강을 핑계로 신하들과의 면담과 경연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니었을까?

율곡과 친구이자 대간(臺諫)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던 유몽학(柳夢鶴)은 율곡에게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한 것을 도우려는 뜻이 있으면 아무리 구차스럽다 하더라도 물러갈 것이 아니다.”(경연일기)라고 하였다. 아마도 율곡이 선조 곁을 떠나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으니 이러한 말을 하였을 것이다.

율곡은 만언소를 올리면서 이미 선조의 한계를 절감하고 조정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유몽학은 구차스럽지만 더 버텨서 기울어가는 국운을 다시 붙들어 세워야 한다고 권했다. 유몽학은 또 이렇게 말했다.

“비록 크게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때에 따라 일에 따라 보좌하여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 역시 하나의 도리일 것이다.”

율곡은 이러한 친구의 조언에

“그것은 나라의 정권을 맡은 대신의 일이겠지. 대신은 이미 중임을 맡았으니 마땅히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하고 물러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대신이 아니니 기미를 보아 일어나 행동할 것이요, 목숨을 버릴 수는 없다.”

율곡이 여기에서 ‘일어나 행동한다’는 것은 아마 조정을 떠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결국 그는 2월에 병을 이유로 선조에게 사퇴의사를 밝혔다. 선조는 그런 율곡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나 3월에도 재삼 사퇴를 밝히는 율곡에게

“옛 시에, ‘귀를 씻어 인간의 일을 듣지 않고, 푸른 솔 벗 삼아 사슴들과 어울려 논다’ 하였으니, 은거가 어찌 즐거움이 아니랴?”

하면서 사퇴를 허락하였다. 선조의 마지막 말에는 자신의 곁을 떠나려는 율곡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잔뜩 담겨있었다.

율곡이 올린 ⌈만언봉사⌋의 각오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9

율곡이 올린 ⌈만언봉사⌋의 각오

 

곡이 만언소(⌈만언봉사⌋)를 올린 뒤, 조정에서는 율곡의 상소문을 필사하여 돌려보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실질적으로 율곡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조는 감기나 위장병을 이유로 경연이나 관료들과의 면담도 회피하고 있었다.

1574년 1월 21일 경연의 자리에서의 일이다.

부제학 유희춘이 임금에게 비장과 위장에 해가되는 음식물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하였다. 이에 이이가 이렇게 임금에게 건의를 하였다.

“병 치료는 단지 약물과 음식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마음을 다스리고 원기를 양성한 다음에야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의 시에, ‘오만 가지 보양도 다 쓸데없고 단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요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고 음식물은 말단이니, 진실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양생(養生)할 수 있겠습니까?”

유시춘의 의견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지만, 사실 당시 조정이 임금의 건강 문제라든지 간언을 담당한 관료들의 교체문제, 칙명에 들어간 문장 구절의 수정 문제 등 지엽적인 문제에 너무 몰두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선조 임금을 가르치고 그 의중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던 유희춘이 이렇게 말을 돌렸다.

“정무와 관련된 시급한 업무를 파악하는 것은 지혜가 뛰어난 인물에게 달렸습니다. 일전에 이이가 올린 상소를 임금께서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명령하셨으므로 모든 아랫사람들이 모두 기쁘고 즐겁게 여깁니다.”

유희춘의 말은 자신의 의견을 공박하는 율곡의 기분을 맞추어주기 위해서 꾸민 말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율곡의 제안을 시급히 시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만한 인물이 못되니 율곡과 같은 인물에게 귀를 기울여 정무와 관련된 시급한 업무를 파악해야 된다는 뜻에서 ‘지혜가 뛰어난 인물’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명령하였음을 다시 확인하고 그 점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공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 것이다. 율곡의 제안을 실천하자고 임금에게 재차 건의한 것이다.

율곡은 1574년 정월에 올린 ⌈만언봉사⌋(만언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펴보건대, 지금의 상황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고 백성들의 기력은 날로 소진(消盡)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권세 있는 간신들이 세도를 부렸을 적보다도 더 심한 듯하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권세 있는 간신들이 날뛰던 시절에는 앞의 임금들이 남겨주신 은택이 어느 정도 다하지 않고 남아 있어서, 조정의 정치는 혼란했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힘은 어느 정도 지탱할 수가 있었습니다.”

‘권세 있는 간신들’이란 훈구파 대신들을 말한다. 율곡의 시기는 훈구파 대신들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파의 학자들이 정권을 잡아가던 시기였다. 그들 세력이 권력을 농단하던 때보다 더 상황이 나쁘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오늘날에는 선왕들이 남기신 은택은 이미 다하고, 권세 있는 간신들이 남겨놓은 해독이 작용을 일으키고 있어서, 훌륭한 논의(論議)가 비록 행해진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힘은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비유를 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창 젊었을 적에 술에 빠지고 여색(女色)을 즐기어 그 해독이 많겠으나, 혈기가 강성한 때문에 몸에 손상이 가는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만년에 이르러서야 그 해독이 노쇠함을 따라 갑자기 나타나 비록 근신하며 몸을 보양한다 해도 원기(元氣)가 이미 쇠퇴하여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백성들의 힘이 바닥나 있다는 것을 율곡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13살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후로 29살 때까지 과거 공부를 하였다. 중간에 부모님을 여의고, 결혼을 하고, 19살 때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잠시 불교에 귀의한 적도 있었다. 또 9차례나 장원에 급제를 하면서 성혼, 정철, 송익필 등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였다. 이 덕분에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날카롭고 정확할 수 있는 경륜이 쌓아졌다. 그가 29살 때부터 담당했던 관직은 호조좌랑, 예조좌랑, 이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이었고 홍문관, 춘추관, 승정원의 고급 관료를 거쳐 외직으로 청주목사도 역임한바 있다. 조선시대 관료 중에서 핵심 엘리트에 속하였다.

율곡은 ⌈만언봉사⌋에 계속해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의 시사(時事)는 실로 이와 같으니, 10년이 못가서 화란(禍亂, 재앙과 난리)이 반드시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열 간(間)의 집과 백 묘(百畝)의 전답을 자손에게 물려주면 자손은 또 그것을 잘 지키어 선조들에게 욕되지 않게 할 것을 생각합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조종 백 년의 사직(社稷)과 천 리의 봉강(封疆)을 물려받으셨는데, 화란이 닥쳐오려 하고 있으니 어찌하시겠습니까?”

혹자는 율곡이 십만 양병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와 관련된 문장에 그런 주장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율곡은 10년 못가서 조선의 종묘사직과 영토를 위협하는 난리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 말 가운데, 양병의 제안은 당연히 들어가 있는 것이다. 10만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해결책을 구한다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해도 아주 엉뚱한 결과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며,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스스로 구제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권세를 잡고 계시고 사리(事理)에 밝으시며, 시국을 구원할 능력이 충분이 있으시니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소신(小臣)은 나라의 두터운 은총을 받아 백 번 죽는다 해도 보답하기 어려운 정도이니,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로 목을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신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율곡의 각오가 잘 드러나 있다. 그만큼 율곡이 보기에 조선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나라를 위해서는 자신의 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지겠다는 뜻으로,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로 목을 잘리는 형벌’도 달게 받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더구나 지금 전하께서는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놓고 의견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시기에 그 친서를 내리심이 간절하십니다. 신이 만약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실로 전하를 배반하는 셈이 되겠기에, 충정(衷情)의 마음을 극진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병을 앓고 난 끝이라서 정신은 흐릿하고 손은 떨리어 글이 저속하고 한 말이 중복되었으며 자획도 겨우 이루어 놓은 터이라 볼 만한 것이 못됩니다. 비록 그러나 글 뜻은 먼듯하면서도 실은 가까운 것이고, 그 계책은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실은 절실한 것이니, 비록 삼대(三代)의 제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진실로 왕정(王政)의 근본이어서 그대로 시행하면 효과가 드러날 것이며 왕정을 회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찬찬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성상의 마음속에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신 다음,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으시어 가부를 의논한 후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삼대의 제도란 중국에서 이상적인 시대라고 칭송되는 하․은․주 삼대의 제도를 말한다. 율곡은 단지 자신이 말한 ‘그대로 시행하면’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니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자신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이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널리 조정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 가능한 것부터 시행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자신의 만언소를 이렇게 마무리 하였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것을 능력 있는 사람에게 맡기시고, 정성으로 그것을 시행하며 확신으로 그것을 지켜나가 주십시오. 다만 습속을 따르고 전례나 지키려는 의견들 때문에 바꾸시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 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 때문에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시어 3년이 지나도 나라가 발전이 없고, 백성들이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며, 군대가 정예화 되지 않는다면, 신을 기만한 죄로 다스리시어 요상한 말을 하는 자들의 훈계가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신의 진언(進言)이 지나칠 정도로 과격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므로 황송함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율곡의 생각에 3년이면 조선의 군대가 정예화 되고 외국 군대의 침입으로 인한 전란의 화는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어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선조는 율곡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율곡이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판했기 때문일까? 율곡의 만언소 첫머리에는 조정에서

‘위(임금)와 아래 사람들이 서로 믿지 않는다,’ ‘(임금이 참여하는) 경연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 ‘(임금이) 현명한 사람을 불러 놓고도 그들을 활용하지 않는다,’ ‘(임금이) 재변(災變)을 당하여도 하늘의 뜻에 대응하지 않는다,’ ‘(임금이 추진하는) 여러 가지 정책이 백성을 구제하는 효과가 없다.’

고 지적하였다.

유희춘이 임금 앞에서 자신을 추켜세우고 자신이 제시한 만언소의 제안을 임금이 처리하라고 했음을 확인해주자 율곡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사례를 표하고 이렇게 한마디를 하였다.

“신은 별다른 소견이 없습니다. 다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우직한 충정을 털어놓은 것인데, 지나치게 칭찬하시니 매우 감격스럽고 또한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죽은 말도 사들이는데 하물며 산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신의 말 같은 것도 허용하셨으므로 사방 사람 중에 반드시 좋은 말을 올리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위에 계시면서부터는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사람마다 진언한 것이 적지는 않았지만 공언(空言)일 뿐이고, 한 푼 한 치의 혜택도 민생에게 미친 것이 없었습니다. 곁에서 보는 사람들은 실효가 없는 것을 가지고 일을 제안한 사람에게 허물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사기(士氣)가 떨어지게 것이니 성상께서 되도록 실효가 있도록 하시고 공언이 되지 않게 하소서. 재변을 만난 날에 성상의 마음은 참으로 놀라셨겠지만 오래 지나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점 해이해지므로 저의 천한 의견에 응답하셨던 진실한 마음이 없어질까 염려됩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은 단지 빈말일 뿐입니다. 반드시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지런한 일을 실행한 다음에라야 재변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하셔야 할 것은 학문이 근본이니, 실제적인 공부를 하시되 유신(儒臣)들을 자주 접견하여 의리를 강론하셔서 상하(上下)가 서로 믿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조시대에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훌륭한 유학자들이 활동하여 선조의 가까이에서 조언을 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런 선조시대에 일본의 침략을 당하여 국토가 유린되고 종묘사직이 위험에 처한 일도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빈말이 가득한 조정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8

빈말이 가득한 조정

 

조 7년, 즉 1574년 1월 21일, 강연이 끝나고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이 선조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를 하였다.

“선왕(先王)의 법을 멋대로 고치는 것도 해가 크지만, 폐기해버리는 것도 또한 적지 않습니다. 생각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아 방종과 해이를 편안히 여기면, 반드시 쇠퇴하여 멸망하는 화가 닥칠 것이니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성상께서 재변(災變)을 만나 두려워하시며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고 말을 살피시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실행하는 일이 모자랍니다. 실행을 하신다면 국가와 백성들이 실지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김우옹은 경상북도 성주출신으로 남명 조식의 문인이다. 그가 보기에 선조 임금의 최대의 문제점은 실행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임금에게

“실행을 하신다면 국가와 백성들이 실지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을까? 그만큼 선조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결단력이 부족했다.

지도자의 리더십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단력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생각만하고 결정내리는 것을 주저하며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자신의 결정으로 생길 수도 있는 위험을 너무 두려워한 것이다. 좋게 말한다면 완벽주의자의 행동이기도 하다. 가장 좋은 결과만을 뒤쫓다보면 시작도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결정은 미루면서 지엽적인 일에 몰두한다. 실행은 뒷전으로 미루고 말만을 앞세울 뿐이다. 선조는 불행하게도 그런 인물이었다.

선조실록의 편찬자들은 율곡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김우옹의 말 중에는 율곡의 만언소를 언급한 대목도 있는데 그 내용은 빼버렸다. 율곡이 지은 ⌈경연일기⌋에는 김우옹이 그때

“지금 이이(율곡)의 상소를 대신에게 보이라 하셨는데, 이이더러 대신과 함께 의논하라 하시고 또 주상의 면전에서 친히 물으시어 그의 생각을 남김없이 아뢰도록 하심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 발언도 하였다.

그리고 나서 선조 임금에게 실행력이 부족하니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실행을 하시라고 한 것이다. 김우옹은 임금의 우유부단함이 얼마나 답답하였는지, 경연이 끝난 후 율곡에게 “요사이 일은 빈말(空言)일 뿐이니, 혜택이 어떻게 백성들에게 미치겠는가?”하고 반문을 하였다.

그로부터 4일이 지난 1월 25일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경연의 자리에서 김우옹이 또 임금의 결단을 촉구한다.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 모름지기 일할 재능이 있어야 해내는 것이다. 나를 돌아보니 재능도 없고 덕도 없는데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경연의 자리에 참석한 정유일이 답을 하였다.

“전하께서는 총명이 남들보다 뛰어나시지만 많은 신하들 중에는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전하께서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여기시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선조 임금이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조정에 어찌 현인이 없겠는가. 삼공(三公,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만 하더라도 모두가 인망이 있는 사람들인데 어찌 일을 할 수 없겠는가? 다만 내가 일을 하지 못해서이다.”

정유일이 또 이렇게 아뢰었다.

“개혁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어서 정유일과 임금 그리고 김우옹 사이에 주자(朱子)와 송 태조(宋太祖) 그리고 삼대의 제도와 관련하여 개혁과 관련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선조는 갑자기 김우옹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자질이 이미 뛰어나고 학문에 있어서도 공부한 것이 많아 경연에서 진언하는 말이 매양 정성스러우므로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다만 나는 학문이 진보되지 않아 한마디 말도 실행하지 못하므로 항시 부끄럽게 여긴다. 학문하는 일에 대해 옛사람들이 이미 두루 말해 놓기는 했다. 그러나 오늘날 내 몸에 절실한 진언만은 못하니 그대가 물러가거든 나를 위해 잠계(箴戒) 하나를 지어 올려서 학문하는 요체로 삼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앞으로 옆에 두고 보겠다.”

김우옹은 임금의 칭찬에 감사함을 표하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기강을 세워야 하고 갖가지 계책들을 써야 하며, 폐정을 개혁해야 하고 민간의 병폐를 제거해야 하는 등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지만 오직 전하의 뜻이 먼저 정해진 다음에야 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겸허한 자세로 능히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시니 진실로 훌륭한 덕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덕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서 그만두지 않고 더욱 진보하는 것입니다. (중략) 전하께서 일을 하기로 뜻을 결단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오직 먼저 마음속으로 정하시기만 하면, 자연히 전하를 도와 힘을 다해 일을 하는 신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김우옹은 나중에 여섯 가지의 잠언을 지어 올렸다. 그 내용은 뜻을 정하라(定志), 학문을 닦고 연구하라(講學), 몸가짐을 삼가하라(敬身), 자신을 극복하라(克己), 군자를 가까이 하라(親君子), 소인을 멀리 하라(遠小人) 등이었다.

율곡의 ⌈경연일기⌋에는 김우옹의 이야기 다음에 자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적혀 있다.

 

이이가 비록 임금으로부터 대우는 받았으나 말은 쓰이지 않았다. 친구인 송익필(宋翼弼)이 묻기를,

“숙현(叔獻, 율곡의 자)이 조정에 머문 지 두어 달이 지났는데 무슨 공적이 있었는가?”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비록 나라의 정권을 맡은 사람이라도 두어 달만에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말은 올리지만 시행을 하지는 못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하였다.

 

율곡의 만언소는 비록 임금의 칭찬을 받고 조정의 관료들에게도 읽히고 알려졌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친구인 송익필은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율곡에게 그동안 조정에서 무슨 기여를 하였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율곡 자신은 행정의 집행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임금에게 간언을 올리는 일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변명 같기도 하지만 실상이 그랬다. 건의하고 제안하고 임금과 조정의 잘못을 지적만 할 수 있을 뿐, 실질적인 행정업무는 왕의 명령을 받는 다른 관료들이 하고 있었다. 요컨대 ‘자문’만 가능할 뿐이었다.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은 율곡보다 2살 위로 서얼출신으로 신분상의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일찍이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학문연구와 후학교육에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율곡과는 친구로 사귀었는데, 예학과 성리학, 경학에 능한 학자였다. 경연일기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송익필이

“식자들은 숙헌이 이번에 조정에 오래 머무르니 지난번 퇴거(退居)한 일과는 다르다고 의심하고 있더라.”

라고 말했다. 이이는

“물러가려 하나 혹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까 염려되고, 머물러 있고자 하나 말을 채용하지 아니하므로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송익필은

“식자들은 임금의 마음을 결코 돌릴 수 없다고들 하던데…”

라고 하였다. 이이는 이에 대해

“내가 듣기에는 성현은 그와 같이 단정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라 하였다.

 

송익필이 전하는 여론은 선조의 마음이 이미 개혁과는 멀다는 것이다. 겉으로 화려한 말을 남발하고 훌륭한 관리들을 불러 이러저러한 말을 듣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일종의 쇼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율곡은 이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동감을 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