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만언소를 올리다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6

율곡, 만언소를 올리다

 

1574년 정월, 선조 임금은 기상이변이 계속되자 친서를 내려 널리 의견을 구했다. 당시 우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율곡도 글을 올렸다. 이 글이 ⌈만언봉사(萬言封事)⌋, 즉 ‘만 글자에 이르는 상소문’이다. 만언소(萬言疏)라고도 불리는 이 글은 기상이변의 흉조를 당하여 앞으로 다가 올지 모르는 국가적 위기를 미리 대비하는 일을 적어 올린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 율곡의 ⌈경연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이가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이변이 너무 심하여 주상(임금)이 마음으로 두려워하면서도 이변을 풀 계책은 알지 못하고 한갓 의혹만을 조장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의혹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의혹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내가 상소를 하여 작금의 폐단을 극진히 말씀드리고 그러한 폐단을 극복할 계책을 올리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것을 박순(朴淳)이 듣고 만류하며 말하기를,

“성상의 위엄을 범하여 더욱 불안하게 될까 우려되오.”

하였다.

 

임금이 의혹을 조장한다는 것은 당시 선조가 흉조를 신하들의 탓으로 여기는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율곡의 생각은 당시의 폐단은 더 큰 틀에서 파악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순(朴淳, 1523-1589)은 훈구파와 신진 사림(士林)이 교체되는 시기에 사림운동에 힘쓴 관료였다. 당시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키는데 큰 공을 세워 사림파의 시대를 연 선비이기도 하였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청백리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장원급제자가 영의정에 오르는 경우가 몹시 드물었는데, 그런 징크스를 깬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생이었는데, 율곡이나 성혼(成渾)과도 가깝게 지냈다.

율곡이 상소를 올리겠다는 것을 만류한 박순에 대해서 율곡은 “대신이란 인망이 달려있는 것인데, 자기도 말을 다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까지 말을 못하게 합니까?”(경연일기)라고 항변하였다.

또 당시 열린 경연의 자리에서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임금에게 위장에 해로운 음식물에 대하여 설명한 적이 있었다.

“신(유희춘)이 외람하게도 경연에서 모시며 임금님의 증세를 살펴보고는 염려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약물과 음식물을 쓰는 일이야 어의(御醫)가 이미 의술대로 다하여 더 이상 남아 있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식료로 원기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은 그래도 말씀드릴 만한 것이 있습니다. 신이 의가(醫家)에는 조금도 접해보지 못했으니 감히 그 내용이야 논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제가 어려서부터 약했기에 병이 나는 것을 막으려고 양생하는 글을 조금 보았습니다. 이번에 구구하게 변변치 못한 정성으로 비장과 위장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다섯 가지 해설을 뽑아 열거하여 올립니다. 생각해 보시고 채택하여 성상의 몸을 요양하신다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 율곡은 임금에게 “병을 다스리는 데는 약과 음식물뿐이 아니라 모름지기 마음을 다스리고 기(氣)를 기른 뒤에라야 병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시에 ‘온갖 보양이 모두 필요 없고 마음을 잡는 것만이 요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요, 음식물은 말단의 일인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어찌 양생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선조가 왕에 오르기 전에 선조를 가르친 학자로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유희춘의 덕이 크다”라고 하면서 각별히 존경하였던 인물이다.

율곡은 그렇게 존경을 받는 학자가 국가적인 재앙을 앞두고 있는 절박한 시기에 그렇게 밖에 왕에게 올릴 말이 없었는가 하면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주상께서 대신에게 묻는 말씀은 간절하신데, 대신이 올린 대답은 작금의 폐단을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유희춘 부제학(副提學)이 아뢴 음식에 대한 금기는 왕을 모시는 어의(御醫)의 임무인데, 유 부제학이 임금의 덕을 보좌하고 인도하는 것이 고작 여기에 그치는가?”(⌈경연일기⌋)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 고위 관료들의 한계를 절감한 율곡은 자신이 직접 만언소를 올렸다. 마침 선조가 널리 직언을 올리라는 칙명을 내리자 바로 그는 만자에 이르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만언소의 주요 내용은 첫째, 제도 개혁을 이루어 당시의 상황에 맞는 변법을 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일곱 가지 실속 없는 일을 버리고 실질적인 일에 힘쓰자는 내용이다. 셋째는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율곡에게 호의적으로 기록된 ⌈선조수정실록⌋(1574년 1월 1일)에는 율곡의 ⌈만언소⌋가 원문 그대로 실려 있다. 1만자가 훨씬 넘는 이 글에 대해서 선조는 이렇게 반응하였다.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내용 가운데는 개혁과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하였다. 또

“이 상소문을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는 한편, 복사본을 만들어 올리라”

고 명하였다. 당시 인심이 불안하던 차에 율곡의 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비답을 보고서는 백성들의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선조의 말대로 율곡은 요순시대와 같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율곡과 같은 신하를 두고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하겠는가? 선조 임금 자신이 바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기록에 남겨두고 교훈으로 삼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만약에 자신이 일본의 군대에 의해서 도망가게 되고, 백성들이 자신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백성들은 도망가는 임금의 가마 행렬 뒤를 쫒아 돌멩이를 던지고, 도망가는 길을 일본 군인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도망가는 임금’의 모습은 백성들에게는 몹시 충격적이면서도 생소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서 선조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 관리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생소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