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소의 뒷 이야기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7

만언소의 뒷 이야기

 

선조실록⌋에는 율곡이 올린 「만언소」 자체에 대해서 아무런 평이 없다. 다만 1574년 1월 21일자 기록에 다음과 같이 부제학 유희춘이 선조 임금에게 올린 말이 나온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형벌이 맞지 않는 일이 드물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부역(賦役)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는 본래 그전부터 행해져 내려온 것이지만 지금 수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무(時務)를 아는 것이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데, 지난번에 올린 이이의 상소문에 대해 성상께서 답하신 말씀이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그의 제안을 권장하고 허용하신 것이므로, 각기 보고 듣는 사람마다 모두 감격하였습니다. 소신도 역시 재질과 학식이 이이만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일 이 사람만 하다면 어찌 그처럼 권장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이이의 상소로 인하여 공물(貢物)·선상(選上)·군정(軍政)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이 곤궁함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율곡이 올린 상소문에서 공물(貢物), 선상(選上), 군정(軍政)의 세 제도에 대한 개혁안을 중시하여 그것의 시행을 건의한 것이다.

율곡은 만언소에서 ‘공물(貢物)’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그동안 선대 임금들은 조정에서 쓰는 것을 매우 절약하고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도 매우 적었습니다. 그런데 연산군(燕山君) 중년에 쓰는 것이 사치스럽게 늘어나서 일상적인 공물(貢物)로서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물을 더 늘이도록 함으로써 그 세수를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신은 지난날에 노인들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들었으나 감히 그대로 믿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전에 승정원에 있을 적에 호조(戶曹)의 공문을 가져다가 보니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가 연산군 7년(1501)에 늘려서 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문서를 덮고 긴 한숨을 쉬면서 “이럴 수가 있나! 그때라면 지금부터 74년 전이니, 그동안 성군(聖君)이 왕위에 있지 않았던 것도 아닐 테고, 현명한 선비가 조정에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닐 터인데, 이런 법이 어째서 개혁되지 않은 채로 있는가?”하고 한탄했습니다.

 

공물을 받아들이는 법이 74년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음을 보고 한탄하였다는 내용이다. 더구나 그 제도는 궁궐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백성들로부터의 수탈은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율곡은 선상(選上)의 제도, 즉 노비법(奴婢法)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선상 제도의 본뜻은 면포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관청의 종들만 가지고는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외지의 공노비(公奴婢)들로써 번갈아 가며 서울에서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고 그 제도를 ‘선상’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난하고 천한 노비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머물러 있는 동안 당하는 고통이 막심하여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비로소 베를 가지고 부역에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오직 베만을 거두어들일 따름이지 한 사람도 와서 부역을 치루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날로 곤궁해지고 호구(戶口)는 날로 줄어들고 있는데 노비도 역시 백성이거늘 어찌 그들만이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며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한번 부역을 치루고 나면 집안이 망하게 되지 않는 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2년은 공물 바치는 일에 동원되고, 1년은 선상의 사역을 맡아야 하니, 대체로 3년이면 반드시 한 번은 집안을 망치게 되어 공노비들의 고통은 극도에 달해 있습니다.

 

공노비의 부역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서 면포를 거두었는데, 그들은 면포도 바치고 공물도 바치는 일에 동원되니 고통이 극에 달했다는 내용이다. 율곡은 공노비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들의 문제를 임금에게 알린 것이다. 이 내용 가운데에는 당시 ‘백성들의 삶은 날로 곤궁해지고 호구(戶口)는 날로 줄어듣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국가적인 대개혁이 절대적으로 시급함을 알리고 있다.

또 그는 군정(軍政)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이렇게 지적했다.

 

하늘의 재변(災變)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어서, 본시 무슨 일에 따라서 일어난 것인지 지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 역사를 가지고 증험(證驗)하건대,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은 대부분이 전란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 볼 것 같으면 군정(軍政)은 무너지고 국경사방이 무방비 상태입니다. 만약 급박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비록 장량(張良)·진평(陳平)같은 이가 지혜를 내고 오기(吳起)나 한신(韓信)같은 이가 통솔을 한다 하더라도, 거느릴 병졸이 없는데 어떻게 홀로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떨리고 간담(肝膽)이 서늘해집니다.

 

율곡은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은 대부분이 전란의 상징’이라고 단정하였다. 아울러 국경 사방이 현재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아무리 장량, 진평, 오기, 한신 등과 같이 훌륭한 장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따를 병졸이 없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일어난 상황을 눈에 선하게 보듯이 율곡은 지적하였다. 율곡은 이글에 이어 당시 군정의 폐단을 설명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였다.

당시 선조의 학문적 스승으로 선조에게 영향력이 컸던 유희춘이 율곡의 제안을 실행하도록 선조에게 거듭 요청한 것은 율곡의 개혁 방안이 그만큼 현실적이고 절실했기 때문이다.

유희춘은 그해 1월 29일 조강하던 때에도 선조 임금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전하께서는 전번에 이이의 상소를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칭찬하셨고, 또 김우옹에게 ‘내가 너의 학문을 잘 알고 있으니, 네가 사우(師友)에게 들은 것과 자신이 공부한 것으로 잠계를 지어 오라.’고 분부하셨으니, 보고들은 사람들이 누군들 탄복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 오늘날의 큰 강령과 시급한 일은 이이의 상소에 이미 다 말했다고 여겨집니다. 이이는 시무를 아는 사람으로 소활한 서생들과는 다르니 진실로 채택하여 쓰셔야 합니다.”

그해 3월 6일자 경연 때에도 유희춘은 다음과 같이 율곡의 만언소를 언급했다.

“지금 민생의 고통은 바로 공물(貢物) 및 신역(身役)이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이이의 만언소대로 시정하여 병폐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선조는 율곡의 만언소에 대해서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칭찬을 하였지만 그것의 실행 여부에는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한 분위기는 ⌈선조실록⌋의 기사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흉조가 있으니 정전을 피해서 정사를 돌본 이야기, 직언을 구하는 칙명에 들어있는 문장의 구절을 고쳐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 선조 임금이 감기에 걸린 이야기, 음식을 먹고 체한 이야기, 밤에 잠을 못 잔다는 이야기 등으로 가득 차있다. 1월 20일자 선조실록에는

“천심(天心)이 편치 못한 것은 진실로 내가 덕이 없고 어둡기 때문이다. 지금 직언한 것을 보니 매우 가상하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경계하고 반성하겠다.”

라고 한 선조의 말이 실려 있을 뿐이다.

선조의 말대로 율곡의 만언소는 ‘요순시대를 만들겠다’는 한 이상주의자의 이상론이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