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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과 우계 성혼


율곡과 우계 성혼.

 

곡 이이와 우계 성혼은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인조 1년 11월 2일자 『인조실록』에 <춘천부사 신응구(申應榘)의 졸기>가 실렸다. 이 기사에 이런 글이 있다.

“신응구는 젊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부터 큰 기대를 모아,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받들어 칭찬하였다. 그런데 폐조(광해군) 때 임해군(臨海君, 선조의 큰 아들이며 광해군의 친형이고, 정원군의 이복 형임)의 옥사(獄事)을 당하여 조진(趙振) 등과 함께 정훈(正勳) 공신으로 이름이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집에 있으면서 국가를 걱정한 공신이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뒤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서도 행실을 삼가지 못하였다는 비난이 많았으니, 선사(先師, 두 스승)를 욕되게 하였다 하겠다.”

신응구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기사인데 그가 율곡과 성혼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광해군 시대 임해군이 무고로 유배당하여 죽을 때 거기에 참여하여 두 스승을 욕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신응구로서는 억울한 평가이지만 사관은 그가 율곡과 성혼의 공동 제자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성혼(1535년〜1598년)은 율곡(1536년〜1584년) 보다 1살 위이며(양력으로는 2살 위임), 같은 지역, 즉 파주에서 함께 자라면서 같은 선생(휴암 백은걸)에게 글을 배웠다. 율곡은 1548년, 즉 만으로 12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성혼은 16세 때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율곡은 계속해서 과거에 응시하여 1564년(명종 19년, 율곡 28세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화려한 관직생활을 출발하였다. 반면에 성혼은 건강문제로 과거를 포기하여 벼슬길을 버리고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두 사람 사이가 서로 매우 가깝고 생활 터전도 가까워 배우는 제자들이 두 사람을 모두 스승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성리학에 전념하는 성혼과 중앙 조정에서 화려한 관직생활을 해나가던 율곡은 서로 보완적인 환경과 활동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젊은 유학자들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다.
오윤겸, 김장생, 김집, 조헌, 김상용, 이귀, 김자점, 김덕령, 이시백, 조식, 정엽, 윤황, 윤훤, 윤전, 윤방, 조건, 한교, 황신, 정여립, 강황 등이 성혼이나 율곡, 혹은 양쪽을 다 스승으로 모신 인물들이었다. 관직 생활에 바쁜 율곡 보다는 성혼 쪽이 학문에 집중하고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14년을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성혼에게는 제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과의 갈등, 율곡의 죽음, 광해군 시기의 핍박, 성혼의 사망, 인조반정 등을 거치면서 동료의식과 동문의식을 강화해나갔다.
인조 1년 7월 6일 우의정 윤방(尹昉)이 이렇게 임금께 말씀을 올렸다. 윤방은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며 율곡의 문인이다.

“사우(師友, 스승과 벗)의 도(道)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난 선조(先祖) 때에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유풍(儒風, 유학자들의 기풍, 혹은 유학의 풍습)을 흥기시켜 스승의 도가 크게 융성했었는데, 그 후로 차츰 시들해지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정치를 펼치는 청명한 이때에 관학(館學, 성균관)의 많은 선비들이 모두 흥기하려 하는데, 정엽(鄭曄)이 바야흐로 사장(師長, 성균관장 즉 성균관의 정3품 당상관)이 되었으니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교도할 것입니다.”

윤방은 율곡을 퇴계 이황과 함께 병칭하여 자기 스승인 율곡의 이름을 높혔다. 그리고 퇴계와 율곡이 유학자들의 기풍을 흥기시켜 스승의 도가 크게 융성했다고 언급하며 그 후에는 그것이 차츰 시들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율곡 이후에 율곡 만한 유학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윤방이 퇴계를 언급한 것은 아마도 퇴계의 제자들인 남인 세력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과 남인은 공동보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인조가 이렇게 물었다.

“스승과 벗의 도가 어째서 이와 같이 끊어졌는가?”

이러한 임금의 질문에 지사 정엽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이는 세상에 이름을 떨친 대유로서 한 시대의 사표가 되어 후학을 인도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성혼(成渾)과 함께 모두 시배(時輩, 그 당시 사람들. 혹은 한때를 만나서 기세를 편 사람들. 즉 동인 무리를 말함)에게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풍습이 크게 변하여 사우의 도가 끝내 끊어지기에 이르렀으며, 간흉(奸兇,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북인 대북파를 지칭함)이 정권을 잡게 되자 세상은 거의 금수의 지경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사기(士氣)가 조금 진작되어 모두들 수칙(修飭, 몸과 마음을 닦고 말과 행동을 스스로 삼감)하기를 생각하니, 이는 대체로 성상(임금)께서 처음 정사(政事, 즉 정치)를 베풀면서 기구(耆舊, 덕망이 높고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노인들)를 초빙하여 유학을 높이 장려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정엽의 설명에 따르면 성혼과 율곡은 함께 동인들에게 배척을 당했으며, 그 이후 광해군 시기에 북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유학의 도가 무너졌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요즘 젊은이들이 어른을 능멸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모두 사습(士習, 선비들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정엽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기풍이 유행하면 그 말류의 폐단이 어느 지경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선조 때에 유몽학(柳夢鶴)의 아들 유극신(柳克新)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천박하고 경솔하여 젊은이들을 모아 이이와 성혼을 헐뜯고 비웃는 자료로 삼고는 심지어 노래까지 만들어 서로 창화(唱和, 어울려서 부름)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정에 있는 자들이 모두 이이와 성혼을 미워하여 그들의 말을 즐겨 들으면서 그르다고 하지 않았던 까닭에 사습이 각박해져서 차츰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편당(偏黨, 한쪽 당파에 치우침)의 병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임금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병이 든 것은 모두 붕당(朋黨, 뜻이나 이익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의 결합체)때문이다.”

인조는 붕당의 폐해를 말하면서 은근히 ‘지금의 서인들도 문제가 있지 않냐?’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정엽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께서 타파하려 하시나 병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갑자기 제거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정엽의 답변에는 ‘아무리 붕당이 나쁘다고 하지만 서인들이 뭉치는 것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인조 임금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즈음 나라의 어르신이라고 할 영의정에 대해 젊은 무리들이 그의 잘못을 가벼이 말하니 이런 풍습은 금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영의정 이원익을 염두에 두고 한말이었다. 정엽이 임금의 말에 이렇게 맞장구치듯이 말했다.

“이원익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니, 이런 사람은 조정의 벼슬아치 중에서 쉽게 얻지 못합니다. 어찌 가벼이 이런 인물을 논한단 말입니까?”

이원익(李元翼, 1547년〜1634년)은 남인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는 76세의 노구임에도 특별히 조정에 초빙되어 의정부 영의정으로 등용되었다.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과 광해군 시기 비주류로서 대북파의 탄압을 받은 남인이 서로 힘을 합하여 연합정권을 구성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이후에 인조반정이 백성들과 사대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여 이원익은 영의정으로 재직하면서 민심 수습에 힘을 기울였으나 여의치 않았다.(결국 서인과 남인의 연합 정권은 1년 만에 사실상 붕괴된다.) 이러한 어려운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인조는 정엽에게 요즘 ‘젊은 녀석들(年少輩)’이 나이 드신 영의정을 가볍게 비판한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인조 1년 윤10월 28일 인조가 『대학』을 읽으면서 신하들에게 “나라에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온 나라에 인(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지사 이귀(李貴)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무리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이 진실로 제대로 기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온 나라에 인(仁)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공자·맹자 같은 성인일지라도 그 직위에 있지 않으면 또한 교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으로서 어떻게 어진 사람을 위에 모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귀(李貴, 1557년∼1633년)는 성혼과 율곡에게 배우고 1603년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광해군 재위 때인 1616년(광해군 8년)에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그리고 1623년 3월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성혼의 이야기로 말을 이었다.

“성혼(成渾)이 일찍이 ‘이이(李珥)가 집안을 다스리는 법은 근래에 드문 바이다. 서모(庶母) 대접하기를 마치 계모를 섬기듯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가훈(家訓)을 지어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온 집안사람들을 나이 순서대로 한자리에 모아 앉혀 놓고 읽도록 하였으며, 또 허물이 있는 자는 그때마다 장부에 적어 두고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었는데, 하인들에게까지도 그렇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도성의 사대부·서인 모두가 곡을 하고 제사를 올렸으며 서리(胥吏)들도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백성은 부모를 잃고 임금은 보필을 잃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근무하는 군사들도 모두 울음으로 애도 하였으니, 어진이의 효험이란 이런 것입니다. 아내와 자식에게 교화가 행해지는 것은 쉬운 듯도 하지만 이는 반드시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부끄러울 일이 없어야 그들이 공경하고 복종하는 법입니다. 혼자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는 답변이었지만 이귀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율곡의 사례를 성혼의 입을 빌려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성혼은 율곡이 사망한 뒤에 율곡의 행동을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조 3년(1625년) 2월 22일에 해주의 진사 오첨 등 40여명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인조 1년에 유순익이 율곡의 문묘종사를 청원할 때는 율곡만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이때는 율곡과 성혼을 함께 종사하도록 요청하였다. 『인조실록』의 이날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 해주의 진사 오첨(吳瀸) 등 40명이 상소하였다. 상소문에서 선정(先正) 이이와 성혼을 문선왕묘(文宣王廟, 즉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인조 임금은 이러한 상소문을 받아보고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상소문을 살펴보고 그 뜻을 잘 알았다. 공자의 사당에 종사하는 일은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가 지극히 중요하니 아무나 해당될 수도 없고 쉽사리 거행할 수도 없는 것이다. 스승을 존중하는 그대들의 마음이 간절할지라도 국가의 전례(典禮)를 경솔하게 논할 수 없으니,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고 다시는 이런 일을 말하지 말라.”

인조는 이전에 율곡의 문묘종사를 단호한 태도로 물리쳤듯이 이번에도 굳게 물리치고 ‘다시는 이런 일을 말하지 말라.’고 엄명하였다. 위 인용문에서 ‘공자의 사당’이란 바로 문선왕묘(文宣王廟) 즉 문묘를 말한다.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아무나 해당될 수 없고 쉽게 할 수도 없다는 말에서 율곡과 성혼에 대한 인조의 판단을 엿볼 수 있다. 인조는 서인들의 힘을 빌려 비록 임금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들의 영수인 율곡과 성혼이 공자의 사당에 모실 정도의 뛰어난 인물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 조선의 유학자 중에는 최치현이 1020년에(고려 현종 11년), 설총(薛聰)이 1022년에, 안향(安珦)이 1319년(고려 충숙왕 6년), 1517년(중종 12)에 에 정몽주(鄭夢周)가 각각 배향되었다. 그리고 조선조에서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이 1610년(광해군 2년) 때 문묘 배향이 실현되었다.
이들의 문묘 배향을 유학자들이 선조 때부터 무수히 건의하였으나 선조는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가 중대하는 핑계로 모두 물리쳤다. 광해군 때도 전국의 유생들이 계속하여 상소하고, 고위 관리들이 강경하게 요청을 하였음에도 빈번히 거부하다가 이황이 사망하고 나서 겨우 허가가 났다.
사관은 인조의 답변 아래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평가를 기록하였다.

“반정(反正, 구데타)한 뒤에 이미 이런 의논이 있었고 관학(館學, 성균관)에서도 항소(抗疏)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정지되었다. 대개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던 것은 영남 사람들 때문이었다. 오첨 등이 재차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이어 이 뒤로 이와 같은 상소는 받아들이지 말도록 명하였다.”

영남사람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른다. 혹시 퇴계의 제자들일 수 있다. 이들은 서인과 함께 인조반정 뒤 권력을 함께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조정 내에서는 서로가 경쟁관계였기 때문에 율곡과 성혼이 퇴계와 동급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다.
아니면 남명 조식(曺植, 1501년 〜1572년)의 제자들일 수 있다. 조식은 퇴계(음력 1501년〜1571년)와 같은 나이로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난 성리학자로 영남학파의 거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경상우도에는 남명이 있다고 할 정도로 퇴계와는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었으며 사실상 사림들이 선조 때 대거 관가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을 때 남명의 영향력은 퇴계 못지않았다. 류성룡, 김성일, 박승임, 김효원, 심의겸 등이 그의 문하생이며, 광해군 때 정권을 잡아 활약한 정인홍(鄭仁弘), 이이첨 등이 그의 학맥이다. 북인 세력을 이끌었던 이들은 광해군과 함께 몰락하였는데 그래도 여전히 세력을 가지고 있어서 인조는 이들 세력을 경계하였다.

정치의 모범이 된 율곡


정치의 모범이 된 율곡.

 

곡을 아는 제자들과 지인들이 대거 조정에 발탁된 결과 율곡의 가르침과 지난 행적은 인조 시대 초기 조정의 행정과 정치의 기준이 되었다.
예를 들면 인조 임금은 인조 1년 5월 7일 예조 판서 이정구를 불러들여 사묘(私廟, 임금 집안의 사당)에 대한 전례에 대해서 물었다.

“두 사묘(私廟)의 선비(先妣, 돌아가신 어머니) 신위에 대해 함께 고제(告祭, 큰일을 치른 뒤에 그 사정을 사당에 모신 조상에게 고하는 제사)를 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중략) 이번에 사묘의 두 어머니 신위에 대해 친제(親祭,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냄)한다면 고제를 병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은 내가 친제를 드려야 마땅한데 먼저 관원을 보내 고제하고 다음에는 친제를 행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고제가 이처럼 지연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러한 인조의 고민에 대해서 이정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친제를 올리는 일에 대해서는 지금 바깥 의논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옛적에 선묘(선조임금)께서 덕흥(선조의 친 아버지)의 묘(廟)에 제사지내려 하자 그 당시 삼사가 논의하였는데, 이이(李珥)만은 ‘친제를 드려도 무방하다.’고 하였습니다. 소신의 의견도 이이의 주장을 통론(通論)이라고 여기니, 오늘날 친제를 행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정구의 답변은 당시 바깥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율곡이 선조 임금 당시에 그와 유사한 상황에서 임금이 친제를 올려도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인조 임금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율곡의 주장이 당시에 소수의견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율곡의 판단이 통론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지난날 율곡의 생각이 현재 이정구 자신에게는 판단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같은 날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이조참판 이귀(李貴)가 인조 임금에게 관리의 임명에 관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때의 상황이다. 이귀는 김류·이서(李曙)·심기원(沈器遠)·김자점 등과 함께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다. 그는 반정에 성공한 뒤 호위대장(扈衛大將),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우참찬·대사헌·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인조 1년) 3월 14일 그는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영변 판관(寧邊判官) 조정호(趙廷虎)가 전일 혐의를 피하고자 한 것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이귀가 말한 조정호는 1590년(선조 2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년)때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관직 생활을 하다 한 때 자기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사퇴했다가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가 승문원저작에 임명되었을 때, 동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사헌부지평으로 발탁되고, 이어 성균관직강·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간으로 승진되었다. 그는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말함)을 태묘(太廟, 종묘)에 합제(合祭)하려고 할 때, 여러 언관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퇴출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일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일이며 그는 이때 언관(사간 즉 대간臺諫)에서 쫓겨나 외직인 영변 판관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이귀는 조정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변호를 하였다.

“그러나 그만한 인물을 조신(朝臣) 가운데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짝할 자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나이 80이 된 노모가 있는데 갑자기 영변으로 떠난다는 것도 형편상 쉽지 않고 어미와 서로 이별하게 하는 것도 차마 못할 일입니다. 지금처럼 효를 기본으로 다스리는 때를 당해서는 더욱 정리 상으로도 애달프게 여겨 살펴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율곡 때의 일을 사례로 들어 제안했다.

“일찍이 선묘조(宣廟朝, 선조시대) 때에 김효원(金孝元, 동인의 영수)이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가게 되자 선정신(先正臣, 지난 시대의 신하)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김효원은 평소 질병이 많아 멀리 변방에 부임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가까운 고을로 옮겨 제수(임명)하소서.’ 하니, 이에 선묘(선조 임금)께서 삼척(三陟)으로 옮겨 제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번에 조정호도 내지로 옮겨 제수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이귀의 제안은 선조 임금이 율곡의 의견을 들어서 임지를 조정하였듯이 조정호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집안의 사정을 참작하여 가까운 곳으로 발령을 내주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조 임금은 갑자기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였다.

“그렇다면 파직시켜라.”

효도를 그렇게 하고 싶으면 차라리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파직을 시켜라는 뜻이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집의 조희일(趙希逸)이 다음과 같이 발언을 하였다.

“조정호가 모자간에 서로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은 실로 성은이라 하겠습니다.(파직되어 어머니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필자) 다만 이 일로 인하여 파직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인조는 자기 아버지 원종을 종묘에 모시는 문제에 적극 반대했던 조정호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대간의 직책 수행에 있어서는 임금의 과실을 지적하는 것이 으뜸이고, 그 다음이 풍속을 바르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죄를 준다면 안 되겠지만, 만약 사정을 좇아 당파를 비호하려는 잘못이 있었을 경우에는 어찌 대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죄를 다스리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경들은 조정호가 직간을 하다가 죄를 입었다고 생각하는가? 동문서답을 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인조는 조정호의 죄를 당파 비호로 몰아가면서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귀는 이러한 임금의 생각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들이 어찌 그가 직간했다고 감히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그는 착하지 않은 사람은 아닙니다.”

임금이 다시 말했다.

“나는 당파를 비호하려 했던 죄가 착하지 않은 것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인조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조로서는 아무래도 조정호가 괘씸했던 것이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은 자기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로 몰려 죽는 것을 보았다. 아들이 죽고 그는 홧병을 얻어 술을 가까이 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147권, 광해 11년 12월 29일)에는 그의 졸기(<원종 대왕 정원군의 졸기>)가 실려 있다.

“왕(광해군. 정원군의 이복형)이 왕위에 올라 골육을 해치고는 더욱 대왕(정원군)을 꺼렸다. 능창 대군(綾昌大君, 정원군의 3째아들)을 죽이고는 그 집을 빼앗아 궁으로 만들고, 인빈(仁嬪, 정원군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할머니)의 장지(葬地)가 매우 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늘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해서 죄에 얽어 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왕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선조 임금)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사망할 때의 나이가 40세였다.”

결국 인조는 이귀가 말한 율곡의 전례는 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율곡의 제자들과 지인들, 즉 서인 세력이 조정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어서 수시로 율곡과 관련된 이야기나 사례를 듣고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향으로 쫓겨났던 조정호는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병조참의, 강원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다.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함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함.

 

조 1년(1623년) 3월 27일, 율곡의 제자들과 지인들이 새 조정의 고관으로 대거 임명되고 10일이 채 지나기 전이었다. 특진관 유순익(柳舜翼)이 인조 임금에게 율곡에 대한 문묘종사를 건의하였다.

“임금은 마땅히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겨 문치(文治, 학문을 통한 통치)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창을 버리고 문예를 닦으며, 말(馬)을 세워 두고 도(道)를 강론한 이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눈을 씻으며 새로운 교화를 바라는 때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욱더 유술(儒術, 유교 사상과 문화)을 권장해야 합니다. 선현 이이(李珥)를 문묘에 종사(從祀)하면 사론(士論, 유학자들의 공론, 즉 지식인들의 여론)이 흡족해 할 것입니다.”

문치란 학문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정치에서 무력이나 무인을 배제하고 학문을 주요 수단으로 하는 통치를 말한다. 말하자면 성리학에 바탕을 둔 통치를 말한다. 이미 조선은 시작부터 이러한 문치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성리학이 주요 시험 과목인 과거시험으로 관리들을 뽑고 있었다.
인조에게 율곡의 문묘 종사를 건의한 유순익(柳舜翼, 1559년〜1632년)은 서인 출신으로 1582년(선조 15)에 사마시를 거쳐 159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1606년에 면천군수를 거쳐 예조좌랑·병조정랑·함경도도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는 대북파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주장할 때 적극 반대하며, 여론을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그는 큰 공을 세웠다. 서궁(西宮, 즉 인경궁仁慶宮)에 있으면서 반정군이 들어올 때 궁궐의 호위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인조 시대에 율곡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의견은 그가 처음이었다.
유순익의 의견에 대해 인조는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라 가벼이 결단할 수 없다.”

이에 승지 민성징이 유순익을 거들었다.

“만약 부당한 일이라면 언제라도 따르기 어렵겠지만, 타당한 일이라면 어찌 어렵게 여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민성징(閔聖徵, 1582〜1647, 나중에 민성휘閔聖徽로 개명함)은 1606년(선조 3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 1년) 증광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사관·호군(護軍)·사용(司勇), 강원도사, 영변판관(寧邊判官), 금산군수, 여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인조반정을 계기로 내직으로 발령을 받아 동부승지·우승지에 임명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율곡의 문묘종사 논의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나중에 개성부유수, 전라도관찰사, 형조참판, 평안감사, 함경 감사, 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민성징에 이어서 시독관 이민구도 이렇게 건의하였다.

“이이는 범상한 선비가 아니니 속히 종사해야 합니다. 성상께서 이이의 학문에 대해 그 깊이를 모르시기 때문에 가벼이 배향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의 문집을 가져다 보시면 그의 학문의 조예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민구의 이 말은 언뜻 생각하면 인조 임금에게는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시독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시독관(試讀官)이란 경연청(經筵廳)에 속해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정5품의 관리이다. 그래서 율곡의 학문에 대해 임금이 그 깊이를 모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율곡의 문집을 읽어보라고 권한 것은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추천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임금이 기분을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민구는 그해 조정의 추천을 받아 사가독서(賜暇讀書,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된 관리이기도 하였다.
그는 1609년(광해군 1년)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진사에 임명되었고, 1612년에는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수찬으로 등용되었다. 이후 예조좌랑, 병조좌랑, 지평 등을 거쳐서 1623년에는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당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관리 중에서도 문장력이 뛰어난 사람이 선발되었다. 그만큼 그는 문장을 잘 쓰고 또 다른 사람의 문장을 읽고 그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율곡의 학문을 말한 것은 그만큼 권위가 실린 것이었다.
이민구는 나중에 대사간, 병조참의, 이조참판, 대사성,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사부(詞賦)를 잘 지었다고 하며, 글쓰기를 좋아해서 평생 쓴 책이 4,000권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다 소실되어 버렸다. 그의 저술은 『동주집(東州集)』, 『독사수필(讀史隨筆)』, 『간언귀감(諫言龜鑑)』등이 아직 남아있다.
검토관 유백증(兪伯曾)도 나서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율곡의 문묘 종사를 촉구하였다.

“이이의 문묘 종사는 곧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 다만 지난날에 공론이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거행되지 못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문집을 보시지 않더라도 속히 문묘 종사를 허락하심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율곡에 대해서는 이미 온 나라의 공론이라고 단정하고 문집을 볼 것도 없이 신속히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헌납 이경여(李敬輿)도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헌납은 사간원의 정5품 관직으로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일을 의무로 삼는 관리, 즉 간관諫官이다.)

“이이를 종사하자는 건의가 실로 공론에서 나왔음을 성상(聖上, 임금)께서도 필시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시니 그 문집도 혹시 이미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의리가 막히고 도학이 밝지 못하여 선비들의 마음이 그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쾌히 허락하여 일국의 선비들로 하여금 지향할 바를 알게 하소서.”

이에 인조 임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불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묘 종사는 중대한 일이라 경솔히 할 수 없다. 또 그의 문인 제자 및 서로 아는 자의 말만 가지고 갑자기 종사하는 것도 타당치 않은 것 같다.”

인조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사실 대답은 이렇게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율곡을 문묘에 종사하게 되면 다른 쪽에 서 있는 관리들이나 선비들의 비판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자신이 앞선 임금(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임금에 오른 입장에서 자신 역시 어떤 빌미를 주어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경여는 1601년(선조 34년)에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년)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1611년에 검열에 임명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었다. 이후 12년이 지난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광해군이 쫓겨나가자 다시 관직에 복귀되어 수찬(修撰)에 취임했다. 그는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경여가 율곡의 문묘 종사에 대한 임금의 생각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신들의 이러한 건의는 곧 일국의 공론이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경여의 이 말에는 광해군 시대에 관직을 멀리하고 10여년간 재야에 은거하면서 격은 고초와 고통이 묻어나 있다. 또한 동시에 백성들의 여론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임금을 끌어내려 준엄하게 몰아낸 혁명세력의 자신감도 언뜻 드러나 보인다.

성혼의 관작 회복


성혼의 관작 회복.

 

1623년(인조 1년) 3월 25일,(『인조실록』의 기록)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예조판서에 임명된 이정구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올렸다.

“기묘사화를 겪은 후부터 사람들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성혼(成渾)이 차분히 학문하여 사림의 창도자가 되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유일(遺逸, 초야에 묻힌 재능 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로 발탁하여 참찬(參贊)을 제수하기까지 하시니 높이고 권장함이 극진하였습니다. 뒤에 정인홍의 무고(근거 없는 고발)를 입어 관직을 박탈당함에 이르렀으므로 사림(士林, 유학자들)이 지극히 분노하였습니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 11월(음력)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다.
이정구는 정철,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장생과도 친분이 깊었으며 서인에 속하는 정엽(鄭曄)과도 가까운 사이였다.(오세현, 『월사 이정구의 문한활동과 학통의식』,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004, 국문초록 참고) 이 때문에 율곡과 우계 성혼이 사망한 뒤 서인측 선비들이 율곡과 성혼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서인의 학통을 정비하는데 이정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정구는 또 율곡과 성혼의 행장을 짓고 시호를 요청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이보다 9일전, 즉 3월 16일에 예조 판사에 임명되어 인조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있었다.
이정구의 발언을 듣고 인조 임금이 이렇게 물었다.

“정인홍의 탄핵이 언제 있었는가?”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대북파의 영수였다. 광해군이 이 해(1623년) 실각하면서 처형당했다. 인조는 80세 이상의 재상은 처형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그를 참형에 처한 바 있다.
임금이 탄핵시기를 물은 것은 어느 왕 때의 일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정구가 이렇게 답하였다.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에 있었습니다. 근래에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선비의 풍습이 혼란한 것이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3월 16일 대사헌에 임명된 오윤겸이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인홍의 탄핵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성혼이 일찍이 정인홍의 옳지 못한 점을 말하였고, 또 최영경(崔永慶)의 처신이 옳지 못함을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못하는 짓이 없이 모함하였습니다. 최영경이 죽음에 이르자 성혼 또한 원통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아들 성문준(成文濬)을 시켜 위문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어려서 부터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였기 때문에 그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혼은 곧 이이(李珥)의 친구입니다. 이이와 성혼은 이황(李滉) 이후 일인자로서 그 학문을 펴지 못하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으니 애석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성혼의 제자 오윤겸은 이이와 성혼을 나란히 언급하면서 두 사람은 친구사이이고, 퇴계 이후 학문의 일인자라고 소개하며 그들이 학문을 펴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애석해하였다.
이에 이정구는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선조 임금 즉위 초에 특별한 예우를 받고 심지어 임금 스스로가 이이와 성혼의 당(黨, 즉 서인당)이 되고 싶다는 하교(임금의 말씀)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동인들의) 당론으로 쫓겨나 영원히 뜻을 펴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근래 유학자로서 학문의 올바름에 이이와 성혼 같은 이가 없으니, 국가에서 의당 사제(賜祭, 임금이 칙사를 보내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 줌)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기에 아룁니다.”

이러한 건의를 듣고 임금이 말했다.

“성혼이 죄를 입은 것은 선왕조의 일이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다.”

정인홍이 성혼을 탄핵한 것을 결국 선조 인금의 결정에 따른 일이니 인조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결정한 사항을 자신이 뒤집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만약 광해군 때였다면 인조가 그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윤겸이 임금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임금께서) 새로 즉위하신 때라 좋고 나쁨을 분명히 보여주셔야 합니다. 시비를 잘 살펴 조처해야지, 어찌 선왕조 때의 일이라 하여 망설이실 수 있겠습니까.”

예조판서 이정구가 대사헌 오윤겸의 말을 거들었다.

“선왕조(선조 임금시기)때는 초기에 즉시 명묘조(明廟朝, 명종 때)의 위훈(僞勳, 잘못된 공훈. 잘못 지정된 공신 칭호)을 혁파하였으니, 이것 또한 선왕 때의 일이 아니었습니까? 오직 일의 시비에 달렸을 뿐입니다.”

시비를 따져서 옳으면 추진하면 되는 것이지 선조 임금이 결정한 사항이라고 하여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에 인조는 다음과 같이 성혼에 대한 복권을 허락하였다.

“공론이 이와 같다면 그 관작을 회복하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기록을 하던 사관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견을 덧붙여 놓았다.

“성혼은 자질이 순수하고 태도와 행실이 확고하였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계를 받아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도덕의 완성을 추구하는 학문)에 전심하였고, 또 이이와 사귀어 절차탁마의 도움이 있었다. 학문과 실천의 성과를 함께 이루었고, 평소의 언행이나 집안을 다스리는 예법을 한결같이 『가례(家禮)』(주자가례)와 『소학(小學)』에 의해서 행하였다. 파산(坡山)에 은거하여 영달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생을 마치려 하였는데, 선묘(宣廟, 선조임금)께서 그 명성을 듣고 여러 차례 초빙하여 은총과 예우가 극진하였다.”

성혼에 대한 이러한 우호적인 평가는 물론 사관이 서인이거나 서인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파산은 파주 파평면에 있는 산으로 현재 이곳 파평면 눌노리에는 파산 서원이 있다. 파산 서원 뒤편에 경사가 가파른 파산이 있으며 서원 앞으로 우계(牛溪)가 흐르는데 지금은 눌로천(訥老川)이라 부른다.
파산서원은 동쪽으로는 감악산이 우뚝 솟아있고 맞은편에는 파평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작은 마을 파평면 눌노리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뒤편 파산(坡山)은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앞으로는 우계(牛溪, 소 개울)가 흐르는데 우계는 현재 눌로천이라 불리며 임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혼의 호가 우계인 것은 바로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선조가 성혼을 자주 부르게 된 것은 율곡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관은 이어서 성혼이 억울하게 탄핵을 받고 결국에는 복권을 하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신묘 사화(辛卯士禍, 1591년 선조 24년에 일어난 사화)가 일어나자 평소 성혼이 정철(鄭澈)과 친했다는 이유로 연좌되었고, 최영경의 죽음을 구제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한 다른 당의 지목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께서 임진강에 이르러 성혼의 집이 이곳에서 어디쯤인가 하고 그 원근을 물었을 때 이홍로(李弘老)가 망령되게 근처 강변의 민가를 가리켜 (거짓으로) 대답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격발하기도 하였다.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 정인홍이 그 무리를 사주해 상소하여 지난 일들을 들추어내며 불측하게 모함함으로써 끝내는 관작이 박탈되기까지 하였다.
앞서 최영경이 옥에 갇혔을 때 성혼이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매우 강력하게 구제하니, 정철이 조정에 들어가 임금께 최영경의 구제를 간곡하게 건의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상(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뒤에 와서 도리어 (동인들이 성혼이) 최영경을 모함한 것이라고 죄목을 만들었으니, 이는 군소배(群小輩,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들)가 평소 성혼의 높은 명망을 시기하여 반드시 모함해 해치고자 한 것이다.
성혼이 선조임금과의 만남에서 유종의 미를 보지 못한 것 역시 임금께서 이홍로의 거짓된 보고에 현혹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림(유학자들)이 몹시 애통해 하였고, 태학(太學, 성균관)에서는 여러 차례 상소하여 그 원통함을 호소하기까지 했으나 다 반응이 없었다. 이제 와서 드디어 인조 임금께서 복관을 명하고 이어 제사를 내리며 시호를 주었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축하하였다.”

사관의 이러한 평가는 선조 35년(임인년), 즉 1602년 성혼이 탄핵을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당시 사헌부는 동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정철은 천하의 간흉인데, 성혼이 정철과 교분이 깊고 정이 친밀하여 한 몸이 되었으니 모든 모의에 참여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경인년(1590년, 선조 23년) 무렵에 정철이 사방으로 통문을 보내어 쌀과 포목을 수합하여 성혼의 아비 성수침(成守深)의 청송당(聽松堂)의 옛터에 큰 집 한 채를 지어놓고는 정철이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날마다 모여서 성혼의 지휘를 들으며 흉모를 자행하였으니, 성혼은 곧 정철의 모주(謀主, 모의를 꾸미는 두목)입니다.
또 신묘년(1591년 선조 24년) 무렵에 정철이 강계(江界)로 귀양갈 때는 성혼이 파주(坡州)로부터 송도(松都)에까지 따라가서 이틀 밤을 함께 자며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임진년에 적(왜군)이 경성에 접근했을 때는 성혼은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하로서 경기의 하룻길 거리에 있었는데도 변란의 소식을 듣고 달려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가(大駕, 임금을 모신 가마)가 그가 사는 곳을 지나갈 때에도 나와서 뵙지 아니하였으니, 간사한 인간(정철)의 편을 들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이에 이르러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비판을 받았던 성혼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제자들과 지인들 덕분에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율곡은 그러한 성혼의 친구로서 성혼과 나란히 새로운 조정의 권력자들이 존경하며, 칭송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복직과 복권


복직과 복권.

 

조 1년(1623년) 3월 16일의 일이다.

“김장생(金長生)을 장령(掌令)에 임명하였다. 김장생은 타고 난 자질이 훌륭하고 순수하였다. 일찍부터 이이(李珥)를 사사하면서 학문에 침잠하여 당대의 대유(大儒)가 되었다.
계축옥사 때 그의 동생 두 사람이 고발을 당하니, 광해군(전 임금)이 반역을 고발한 자(박응서 – 필자주)에게 친히 이렇게 물었다.
‘김모(金某, 김장생)도 미리 알고 있었는가?’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김모는 현인이라, 저희들의 모의를 그가 들어서 알까 염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장생은 죄에서 벗어나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뒤 두문불출하고 부지런히 학문을 강론하니,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의 선비들이 모두 높이 추앙하였다. 이때에 와서 맨 먼저 헌직(憲職, 사관헌의 관직 즉 장령)으로 불러들였다.”

『인조실록』1권, 인조 1년(1623년) 3월 16일자 다섯 번째 기사에 실린 기록이다. 김장생을 사헌부의 장령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워 나중에 대유학자가 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장령(掌令)’이란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4품 관직이다. 사헌부(司憲府)는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으로, 지금의 감사원에 해당한다. 정치를 살피고 관리들을 규찰하는 직책이다.
김장생(金長生, 1548년 〜1631년)은 나중에 문묘에 종사된 인물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대유학자의 반열에 든 사람으로 『인조실록』의 ‘대유(大儒)’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예학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그 아들 김집(金集)은 이를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김장생이 철원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1613년(광해군 5년)에 계축옥사(癸丑禍獄) 사건이 발생했다.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 등이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범인 일당들이 모두 서얼(庶孼)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적서 차별을 폐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상소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무륜당(無倫堂)을 만들고 화적질을 일삼았다.
당시 대원군 밑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 관리들은 그들이 반란을 모의했다고 조작하였다. 그들은 역모를 일으켜 영창대군(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으로, 계모 인목왕후의 아들)을 옹립하려고 하였으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가담했다고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때 김장생의 서제(庶弟, 서자 동생)인 김경손(金慶孫)과 평손(金平孫)의 이름도 거론되어 그 역시 역모의 의심을 받았다. 당시 그 동생들은 모두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김장생도 체포되었는데, 심문 과정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앞에 소개한 『인조실록』의 기록에는 당시 임금이던 광해군이 직접 심문에 참여하여 반역을 고발한 자에게 김장생도 관계하였는지 물었으며, 심문을 받던 자는 박응서였다. 박응서는 우호적인 답변으로 김장생은 위기를 모면하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대원군이 권좌에서 끌려 내려오고 정권을 잡고 있던 북인의 대북파 관리들이 물러나자 그 자리를 서인과 남인들이 차지하였다. 이들이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대원군을 몰아내는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조가 즉위한 직후에 공신들에 대한 사례가 추진되었고 대원군 시대에 배척 받았던 많은 관리들이 복권되었다.
고향에 내려가 있던 김장생 역시 복권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상소문을 올려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다만 임금을 위하여 반정(구데타) 공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임금을 잘 보좌할 것, 민생을 구제할 것, 폐주(광해군)의 생명을 보전할 것, 옥사를 삼갈 것, 인재를 수용할 것, 기강을 진작시킬 것, 공도(公道, 바른 도리 혹은 정의)를 넓힐 것, 탐욕의 폐풍을 혁신할 것 등을 간곡히 경계하였다.
김장생은 어렸을 때, 처음에 구봉 송익필(宋翼弼, 1534년∼1599년)에게 예학을 배웠다. 송익필은 서얼 출신으로 나중에 환천(還賤, 양민의 자격을 잃고 천민으로 돌아감)의 위기에 처했으나,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가 그를 10여년간 먹여 살린 적이 있다. 송익필 외에도 김장생은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이날 『인조실록』의 김장생 관련 기록에는 김장생의 스승으로 오직 율곡만 거론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이 다시 권력을 잡음으로써 율곡의 지인들이나 제자들이 다수 중앙의 권력 있는 자리에 속속 배치되었다.
3월 16일자로 김장생과 같이 복권된 인물 몇 사람의 기록을 소개한다.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이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앞선 조정 때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온 나라 사람들의 중망(重望, 큰 기대)을 받았다. 혼란한 시절 임해군(臨海君, 선조의 장자이며 광해군의 친형)의 옥사 때 맨 먼저 은혜를 온전히 하는 의리로 그 일의 부당함을 개진하였고, 폐모론(廢母論,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이 한창일 때에 또 상소문을 올려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힘껏 개진하였으므로 흉도들(광해군 당시 집권세력인 대북파)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시골마을로 귀향해 있었다.”

이원익(1547년〜1634년)은 율곡(1536년〜1584년)보다 11살 어리다. 17살의 나이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그는 율곡이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선조 7년, 1574년경), 율곡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일을 잘 처리하여, 율곡의 눈에 들었는데, 율곡의 추천으로 1576년 정언이 되었으며, 1578년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이후 선조시대에 그는 우의정과 영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광해군 때에도 초기에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는 인품이 곧았으며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불필요하게 사람을 사귀거나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율곡은 이러한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자기보다 11살이나 어리지만 존경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원익은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정여립의 옥사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남인의 편에 섰다. 학문적으로 남명 조식을 따르던 사람들은 북인으로, 퇴계 이황을 따르는 사람들은 남인으로 모였다. 광해군 때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 하다가 집권파인 대북파에 밉보여 유배를 당했었다.

같은 날 『인조실록』에는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의 복직 기사도 실렸다.

“오윤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오윤겸은 그 사람됨이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온화하였다. 일찍부터 성혼(成渾)의 문하에 수학하여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성혼이 자주 칭찬하였다. 또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고상한 지조를 지녀 이국인들이 또한 존경하였다. 경신년 이후에 중국에 갈 때는 해로를 이용하였는데, 사신을 보낼 때면 사람들이 모두 기피하였다. 그러나 오윤겸은 사명을 받은 즉시 출발하였으므로 광해군이 이를 가상히 여겨 ‘신하가 된 자의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주위에 권장하였다.”

오윤겸은 우계 성혼의 제자였다. 1602년(선조 35년) 성혼이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스승을 변호하다가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쫒겨 났다가 그 뒤 7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때는 다시 서울로 들어와 호조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광해군 아래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정인홍을 탄핵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으나 계축옥사 사건이 일어나 정계가 혼란해지자 부모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여 외지로 나갔다.
그는 1617년에는 일본 파견 사절단의 정사로서 400여 명의 인원을 이끌고 일본에 가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구해오기도 했으며, 1618년 북인들이 인목대비 폐모론을 제기할 때는 이를 반대하다 탄핵을 받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1622년는 다시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단에 선발되어,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당시 육로는 여진족의 후금에 의해서 봉쇄되어 있었다. 광해군이 그를 칭찬한 것은 그러한 어려움을 피해서 명나라에 잘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 성혼은 성리학에 일가견이 있었던 부친 성수침(成守琛)에게 글과 성리학을 배우고 휴암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당시 같은 고을 파주에 살던 율곡도 백인걸에게 글을 배웠는데 두 사람은 이때부터 동문으로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서로 동문, 동창 관계이다.
한편 성혼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대신 학문 연구에 뜻을 두었는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을 찾아가 사물의 이치 등을 논하기도 하였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에 깊이 감동하였다. 성혼의 이러한 태도가 오윤겸에 영향을 미쳐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탄핵하였던 것 같다. 오윤겸은 1623년 대사헌에 임명된 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위에 소개한 인물들 외에도 서성(徐渻), 정경세(鄭經世), 이수광(李睟光), 박동선(朴東善), 김덕함(金德諴), 윤지경(尹知敬), 조정호(趙廷虎), 정온(鄭蘊), 엄성(嚴惺) 등이 복권되거나 복직되었다. 이들은 대개가 광해군 시대 때 탄핵을 받고 쫓겨났거나 탄압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조정의 율곡 이야기


조정의 율곡 이야기.

 

인조실록』에는 다른 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대화들이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임금을 둘러싼 고관들의 대화, 그리고 각 기관에서 올라오는 상소문, 상주문(보고서)들이 편년체로, 즉 일자별, 시간별로 소개되어 있다. 그 기록 가운데 율곡 이이(李珥)가 언급된 기사는 모두 62건이 있다. 그 기사들을 연도별, 일자별(음력)로 간략한 내용(대화의 주제)과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인조 1년(1623년) 3월 16일: 이원익·이정구 등 관직 임명
2)인조 1년(1623년) 3월 25일: 성혼의 관작 회복
3)인조 1년(1623년) 3월 27일: 이이의 문묘 종사 논의
4)인조 1년(1623년) 5월 7일: 서북 인재의 등용 등 논의
5)인조 1년(1623년) 5월 7일: 사묘(私廟)에 대한 전례 논의
6)인조 1년(1623년) 5월 29일: 김장생·장현광·박지계를 임명
7)인조 1년(1623년) 6월 12일: 유공량에게 형편을 물음
8)인조 1년(1623년) 7월 6일: 사우(師友)의 도에 대하여 논함
9)인조 1년(1623년) 윤10월 28일: 주강에 『대학』을 강함
10)인조 1년(1623년) 11월 2일 : 춘천 부사 신응구의 졸기
11)인조 2년(1624년) 3월 21일: 붕당의 제거와 대간의 폐를 논함
12)인조 2년(1624년) 5월 15일 : 가뭄 대책을 논의함
13)인조 2년(1624년) 8월 9일 : 붕당의 폐단 등에 대해 논함
14)인조 2년(1624년) 9월 6일 : 이귀가 대관 교체의 취소를 건의함
15)인조 2년(1624년) 10월 11일 : 어영청의 군사조직과 조련법 개선 논의
16)인조 2년(1624년) 10월 22일 : 이이 등의 서원 사액에 대한 논의
17)인조 3년(1625년) 2월 22일 : 이이와 성혼의 문선왕묘에 종사 청원
18)인조 3년(1625년) 3월 11일 : 변법에 관하여 논의함
19)인조 3년(1625년) 3월 25일 : 특진관 이귀의 건의
20)인조 3년(1625년) 4월 11일 : 전 대사헌 정엽의 졸기.
21)인조 3년(1625년) 8월 8일 : 왕의 마음의 공부를 간청함
22)인조 3년(1625년) 8월 26일 : 대간 포용 등에 대해 건의함
23)인조 4년(1626년) 5월 7일 : 국경 방어에 대한 계책 건의
24)인조 6년(1628년) 5월 5일 : 당쟁의 폐를 논함
25)인조 7년(1629년) 3월 18일 : 이귀의 건의 등
26)인조 7년(1629년) 3월 21일 : 임금이 『서전』의 내용을 물음
27)인조 7년(1629년) 윤4월 12일 : 이귀가 3권의 책을 만들어 올림
28)인조 7년(1629년) 5월 6일 : 임금이 『서전』을 강하고 그 내용을 물음
29)인조 7년(1629년) 7월 23일 : 속오군의 충원 등을 논함
30)인조 7년(1629년) 10월 17일 : 『격몽요결』을 인쇄하여 올림
31)인조 8년(1630년) 1월 23일 : 속오군 등 국정에 대해 논의함
32)인조 8년(1630년) 1월 27일 : 낭관, 왕세자 책봉 등에 관해 논함
33)인조 8년(1630년) 9월 7일 : 강릉 유생들이 서원 사액을 건의함
34)인조 8년(1630년) 10월 30일 : 주강에 『서전』을 강의함
35)인조 9년(1631년) 8월 9일 :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의 졸기
36)인조 9년(1631년) 10월 17일 : 선비가 공관(空館)한 원인을 논함
37)인조 10년(1632년) 2월 6일 : 태학의 교육 과정 개편 등을 진언함
38)인조 10년(1632년) 7월 1일 : 복제 등을 정할 것을 건의함
39)인조 10년(1632년) 9월 13일 : 붕당의 폐해를 논함
40)인조 10년(1632년) 10월 9일 : 복색에 대하여 의논함
41)인조 12년(1634년) 7월 20일 : 인목 왕후의 부묘에 대해 논의함
42)인조 13년(1635년) 5월 11일 : 성혼과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함
43)인조 13년(1635년) 5월 11일 : 채진후 등이 문묘종사 제안을 반대함
44)인조 13년(1635년) 5월 12일 : 윤방과 김상용이 문묘종사의 상소 올림
45)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문묘 종사 건으로 상소를 올림
46)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문묘 종사에 대한 임금의 답변을 논함
47)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심지원 등이 문묘 종사를 건의함
48)인조 13년(1635년) 6월 6일 : 조익이 임금의 무성의에 사의를 표명함
49)인조 13년(1635년) 6월 6일 : 이이 등의 문묘 종사 문제로 의견 대립
50)인조 13년(1635년) 8월 3일 : 심지원 등이 정사의 바른 도를 건의함
51)인조 13년(1635년) 8월 9일 : 윤방이 문묘종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함
52)인조 13년(1635년) 9월 26일 : 민여기 등이 문묘 종사를 건의함
53)인조 13년(1635년) 12월 21일 : 사서 김익희가 상례에 대해 건의함
54)인조 14년(1636년) 10월 19일 : 이이·성혼을 문묘에 제사하도록 건의함
55)인조 14년(1636년) 10월 21일 : 한극술이 정거문제로 상소함
56)인조 16년(1638년) 7월 19일 : 감사의 구임에 대해 의논함
57)인조 16년(1638년) 7월 22일 : 수군과 인재 등용에 대해 의논함
58)인조 19년(1641년) 2월 12일 : 대제학 이식의 『실록』 관련 건의
59)인조 22년(1644년) 8월 23일 : 대신과 정사를 논의함
60)인조 22년(1644년) 12월 23일 : 장령 이만영이 유백증 등을 논죄함
61)인조 22년(1644년) 12월 28일 : 서경우가 이만영의 논의를 변호함
62)인조 23년(1645년) 10월 9일 : 김집과 송시열을 부름

이상의 연도별 율곡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인조 등극 초기인 인조 1년(10건), 2년(6건), 3년(6건)에 율곡과 관련된 많은 언급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조 5년인 1627년에는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침입한 해였다.(정묘호란) 이해는 조정에서 율곡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 전인 인조 4년과 그 1년 후인 인조 6년에는 율곡에 대한 기록이 각각 1건씩 있었다. 전란 상황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율곡에 대한 기억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전후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인조 7년과 8년에는 율곡에 대한 언급이 다시 늘어나 6건과 4건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2건(인조 9년), 4건(인조 10년), 0건(인조 11년), 1건(인조 12년)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다 인조 13년인 1635년에는 다시 율곡 관련 기록이 12건으로 급증하였다. 이해는 특이하게도 조정에서 율곡의 문묘 종사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문묘 종사(文廟 從祀)’란 무엇인가? ‘문묘(文廟)’는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묘우(廟宇, 신위를 모시는 사당)를 말한다. 공자는 유교를 집대성하기는 하였으나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후대인들은 그를 존경하여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 文宣王)에 추증하여 약칭으로 ’문선왕(文宣王)’이라 부른다. 그래서 문묘는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 있는 문묘는 현재 명륜동 성균관대학의 입구 쪽에 있다.
‘종사(從祀)’란 ‘제사를 지내다’, ‘위패(位牌, 신위)를 모시다’, 혹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는 뜻이다. ‘배향(配享)’을 하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묘종사는 문묘배향(文廟配享)이라고도 한다.
문묘에는 공자의 위패와 함께 중국과 한국의 유명 유학자들의 위패도 함께 모신다. 현재 성균관에 있는 문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배향하고 있으며, 공문(孔門, 공자의 제자) 10철(十哲, 10인의 현자)이라고 하여 열 명의 제자들의 위패도 모시고, 송조(宋朝, 송나라) 6현( 六賢, 6명의 현자)의 위패도 함께 모셔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東方) 18현인(十八賢)의 위패도 함께 모시는데, 여기에 현재는 율곡도 함께 들어가 있다.
율곡을 문묘에 모시자는 논의가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큰 시각에서 보면 중국 중원의 문명과 문화, 즉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발달된 중국문명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문명의 나라 명나라와 오랑캐의 나라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이 명나라에 더욱 기울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로 밀려오는 서구 문명보다는 중국에서 전해진 유교문명의 부활을 통해서 조선을 더욱 평화롭고 안정된 나라로 만들자는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잘못되었지만 당시 지식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조를 둘러싼 지식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것도 이러한 선택의 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조 14년, 즉 1636년에는 율곡 관련 기사가 2건으로 줄었다. 이해 12월에 대청제국으로 간판을 바꿔 단 여진족들이 북쪽에서 침략해 들어왔다.(병자호란) 이 때의 전쟁에 패배한 결과 인조는 1637년 1월 말경 삼전도(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까지 밀고 들어온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 끌려 나가 항복의 예를 올리는 치욕을 당하였다. 그래서 1637년에 조정은 율곡에 대해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율곡에 대해서 1638년(인조16년)에 2회, 3년 뒤인 1641년(인조 19년)에 1회, 또 그 3년 뒤인 1644년(인조 22년)에 3회, 그 다음해에 1회의 언급이 있었다. 인조 시대, 율곡에 대한 기억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럼 이하 각 장면별로 어떤 내용으로 율곡이 언급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제16대 조선왕 인조의 시대


제16대 조선왕 인조의 시대.

 

조가 임금으로 있던 시기는 1623년부터 1649년까지 26년간이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조선으로서는 다사다난(多事多難, 여러 가지 일들이 많고 곤란함도 많음)한 시기였다.
나라 안에서는 쿠데타로 임금이 바뀌고 이어서 그 임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여진족이 북쪽에서 두 차례나 침략해왔으며 조정은 역시 두 차례나 피난을 갔는데 결국에는 임금이 항복하여 맨몸으로 신생 청나라의 대장에게 절을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그 여진족에게 60만명 가까운 백성들이 끌려가고 인질로 왕세자들이 잡혀갔다.
눈을 세계로 돌려보면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등장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에도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여 공전의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유럽에서는 장차 지구 전체의 판도를 바꿔버릴 서구 문명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한 때였다.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년〜1642년)가 활동을 하고 있었고,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년 〜 1650년)가 『방법서설』을 집필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근본 원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또 상인들의 국가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지루한 독립전쟁(1567년〜1648년)을 치루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년〜1669년)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년)>, <돌다리가 있는 풍경 (1637년)>, <야경(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1642년)> 등을 그리면서 중세 기독교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씩 걷어내고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년〜1662년)도, 영국의 과학자 뉴턴(Sir Isaac Newton, 1642년〜1727년)도 모두 이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 그리고 종교로 꿈틀거리는 시대였으며 전체적으로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인조의 시대 26년을 간략한 연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23년(인조 1년) 반란이 일어나 광해군이 하야하고 인조가 등극함
1624년(인조 2년) 공신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함
1627년(인조 5년) 만주의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침입(정묘호란)
1628년(인조 6년)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이 제주도 표류
1632년(인조 9년) 사신 정두원이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 등 전래
1636년(인조13년) 만주에 청 제국이 성립함. 청나라가 침입(병자호란)
1637년(인조14년) 삼전도에서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함
1642년(인조19년)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남
1644년(인조21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함
1645년(인조22년) 소현세자가 청에서 과학문물, 서양서적을 들여옴
1649년(인조26년) 인조 사망.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임금(효종)으로 즉위

인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기는 참으로 임금노릇하기가 힘든 시기였다. 자신이 광해군 정권을 뒤엎고 왕권을 쟁취하였지만 그 다음해 바로 자신이 반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반란군은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흥안군(선조의 서자)을 왕으로 옹립하여, 인조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 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반란군내부에서 분란이 발생하여 우두머리 이괄은 부하 장수들에게 살해당하고 능지처참 되었다. 인조는 당시 공주로 피난을 가 있었는데 그 곳으로 그 두목의 머리가 배달되었다.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해가던 3년 뒤인 1627년(인조 5년)에 만주의 후금이 침략해 들어왔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조선 조정을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 정묘호란 때 후금의 홍타이지가 보낸 군사는 주력부대가 3만여명으로 3월초(양력)에 약 10여일 만에 정주성, 안주성을 거쳐 평양성으로 치고 들어왔다. 조선의 북방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북방을 책임지고 있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락하고 그 휘하의 부대들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당시 첫째 아들 소현세자를 전주로 피난시키고, 자신은 조정 대신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긴 싸움은 피하고 곧바로 조선의 조정과 강화를 맺었다. 조선과 후금이 형제관계를 맺는다는 조건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오랑캐로 무시하였던 여진족의 추장을 형님으로 모시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 뒤 10년 정도 지난 1636년에 후금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 때 후금은 이미 더욱더 강성해져서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홍타이지는 청태종이라는 천자의 존호를 자칭하고 조선에 대해서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와 전쟁을 선포하였고, 그해 12월 청나라가 침략하였다.(병자호란)
홍타이지가 보낸 청나라 군대는 약 12만명이었다. 이들은 이전에 침입하였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속히 서울로 진격하여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조선의 임금과 조정을 막았다. 당시 인조는 수군이 약한 청나라 군대를 생각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장기전에 돌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수를 읽은 청나라 군대는 신속히 피난길을 막았다. 인조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항전 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은 1만 3천여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사전에 전쟁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군량이 부족하였다. 또 조정에서 전국 각지의 관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청나라 군대가 가로 막아 남한산성은 고립되었다.
청군은 세자빈과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등이 피난을 간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거기에는 왕실 관계자들과 역대 임금의 신주도 함께 피난해 있었다. 청군은 예상을 깨고 수전 경험이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여 강화산성을 함락시켰다. 강화도 함락 사실을 전해 받은 인조는 식량도 떨어지고 있어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청나라에 항복을 하였다.
홍타이지가 이끈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뒤에 50만명이 넘는 조선인들을 포로로 삼아 데려갔다. 인질로 인조의 아들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데려갔다. 이후 그는 명나라를 제압하고 북경을 장악한 뒤에 천하를 평정하였다.
앞서 소개한 연표에서 유심히 봐야할 대목은 세계 역사의 대변화이다.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이 1628년(인조 6년)에 제주도 표착한 것은 그러한 변화의 시작을 조선에 알리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인조는 자기 스스로 반란 세력이 되어 선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임금이 되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반란 세력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고 반란의 두목은 살해되었다. 그리고 외부의 적인 여진족의 침입도 견뎌냈다. 비록 그들을 극복하여 쫒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어차피 중국 천하를 정복하게 될 세력이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신하의 예로 섬기는 것으로 위협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인조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양문명이었다.
박연은 조선에 처음으로 유럽의 존재를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의 선원이었다. 제주도에 표류해온 그는 한양으로 호송되어 심문을 받고 훈련도감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에 임시기구로 설치된 군사기관이다. 이후 상설기구로 바뀌었다. 정예 병사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훈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는 그 자체에 군사 조직 체계도 갖추게 되었다. 급료를 받는 병사들 약 100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훈련도감군이라 부르며 삼수군, 즉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로 구분되는 군사조직이 있었다.
박연은 이곳에 소속되어 나중에는 조선 사람으로 귀화를 하고 조선 이름을 가지고 무신으로 병자호란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는 1648년(인조 2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그는 네덜란드에서 같이 온 부하 2명과 함께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관리하는 일을 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 오랑캐포)’의 제작법과 조종법을 지도했다.
박연이 보여준 새로운 세계의 문물에 이어서 1632년, 명나라에 간 사신 정두원이 서양의 망원경(천리경), 시계(자명종), 그리고 화포 등을 받아왔다. 또 그보다 13년이 지난 1645년(인조22년) 인조가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큰 아들 소현세자가 과학문물과 서양서적을 들여왔다. 인조는 이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 이를 경계하던 터였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해에 사망하고, 인조는 아들의 미망인이자 며느리인 세자빈 민회빈 강씨와 소현세자의 아들들이자 자신의 손자들 두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자신을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서양문물 전래의 싹을 자른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율곡은 왜, 어떤 이유로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 그의 개혁사상이 재평가 되었을까, 아니면 유학 연구의 업적 때문이었을까?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서 정치를 하였을까? 『인조실록』에 나타난 율곡 관련 기사를 읽으며 살펴보기로 한다.

『인조실록』과 율곡


『인조실록』과 율곡.

인조실록』
(『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은 1623년부터 1649년까지 인조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총 50권 5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6년에 걸친 인조 시대 국정 전반에 관한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중 한권이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으로 검색하면 3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첫 번째 기사는 인조 2년, 즉 1624년 7월 19일(음력)자 기사로 「황해도로 하여금 이율곡의 『성학집요』를 인쇄하여 바치게 하다」라는 기사다. 율곡의 문집 『성학집요』를 지칭할 때 사용된 것이다.

두 번째는 인조 3년(1625년) 4월 11일 대사헌 정엽이 사망하였다는 졸기(卒記)에 나온다. 졸기란 나라의 일을 맡았던 관리나 왕실 관련 인물이 죽었을 때, 사망한 사실과 함께 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정엽(鄭曄, 1563년〜1625년)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그리고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도승지,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기사는 정엽을 소개하면서 “일찍이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에 뜻을 두고 율곡 이이,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 참여하여 학문적인 조예가 더욱 깊었다. 가정에 있어서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고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장례와 제사 등은 모두 『가례(家禮)』(주자朱子의 저술)를 따랐다.”고 하였다. 정엽의 스승으로 율곡을 지칭한 것이다.

마지막은 인조 9년(1631년) 8월 9일자 기사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의 졸기」이다. 사관은 김장생이 자질이 훌륭하고 효도와 우애가 깊으며 순수하고 지극하였다고 소개하고 이어서 “율곡 이이를 따라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쏟아 독실히 좋아하였다. 독서할 적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경전(經傳)과 염·락(濂洛) 의 여러 책들을 가지고 담겨 있는 뜻을 탐색하였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낮으로 사색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그 귀취(歸趣, 일이 되어 나가는 형편이나 상황)를 얻고 난 다음에야 그쳤다.”고 칭찬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조실록』에서 ‘율곡’이라는 호는 제자들 김장생과 정엽의 졸기를 기록할 때 스승으로서 소개할 때 사용되었으며 또 율곡의 저술 『성학집요』를 소개할 때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은 1584년(선조 17년)에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나고 임금도 선조→광해군→인조로 바뀌었지만 율곡은 조정에서 그의 저술을 출판하게하고 그 제자들이 사망할 때 스승으로 주목하는 등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이이(李珥)’라는 이름으로 『인조실록』을 검색하면 관련기사가 62건이나 발견된다. 인조는 재위기간이 1623년부터 1649년까지 26년간이었다. 율곡이 사망한지 4, 50년이 지났지만 일 년에 2번 이상씩 조정에서 율곡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퇴계와 비교해보면, 퇴계의 경우 ‘퇴계’라는 호칭은 『인조실록』에 1차례 기록되었으며, ‘이황(李滉)’이라는 이름은 10번 등장한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기억은 퇴계 보다 여섯 배가 넘는다는 것이다.

물론 더 많이 기억된다고 더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러한 기록이 율곡의 철학적 성과나 사상사적 성과가 퇴계 보다 더 뛰어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의 조정은 퇴계보다 율곡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기록은 이전의 광해군 시대와 비교해보면 이상하리만큼 많다. 율곡 관련 기사는 『광해군일기 중초본』에서 20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6건이 있다.(검색조건: ‘이이(李珥)’) 인조의 다음 임금인 효종의 시대를 보면 32건의 율곡 관련 기사가 검색된다. 『인조실록』의 62건에 비하면 1/2에 불과하다. 효종 다음 임금인 현종 때의 실록을 보면 『현종실록』 54건, 『현종개수실록』 93건으로 또 급증한다. 현종 시대(재위: 1659년∼1674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이 활동한 시대다. 이 시기에 율곡의 기록이 많은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송시열은 현종의 스승이었으며 현종의 아버지 효종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또 그는 율곡을 최고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 안팎에서 활동하면서 율곡을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조선 주자학의 대가이기도 하고 서인이 분당한 뒤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사람이다. 그는 앞서 졸기에 나온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며,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다시 『인조실록』으로 돌아와 율곡과 관련된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조정에서 율곡에 대한 기억이 급격히 많아 진 것과 동시에 율곡에 대한 평가가 질적으로 크게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과 퇴계는 과연 서로 대립적이고 서로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 최고의 두 유학자, 혹은 대표적인 두 사상가․철학자일까?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조선 유학을 형성하는 양대 산맥의 최고봉일까? 『인조실록』에 나타난 율곡 관련 기록을 읽어보면서 당시 율곡에 대한 기억이 변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