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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愼在哲, 1803~1873)


신재철(愼在哲, 1803~1873)                                PDF Download

 

내희(宋來熙, 1791~1867)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금곡(錦谷) 송내희는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1838년(헌종 4)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된 이후 사헌부의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을 거쳐, 뛰어난 학행을 인정받아 1853년(철종 4)에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천거되었다.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857년부터 10년 가까이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내고 뒤에 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송암(松菴) 신재철(愼在哲)은 강원감사 신희남(愼喜男, 1517-1591)의 9세손으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장헌주(張憲周),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류하였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아들인 최영조(崔永祚)가 사위이다. 신재철은 향교 명륜당에서 18년 동안 한학을 강하였고, 설악재(說樂齋)라는 서당을 건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유집으로 송암유고(松菴遺稿)가 전하는데, 손자 신종봉(愼宗鳳)이 편집해놓은 것을 1963년 증손 신문성(愼文晟)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최익현(崔益鉉)의 서문이 있다.

시는 「입춘(立春)」·「한식(寒食)」·「제석(除夕)」 등 계절에 관한 것, 「우음(偶吟)」·「자탄(自歎)」 등 사상에 관한 것, 「독논어(讀論語)」·「독심경(讀心經)」 등 학문에 관한 것, 「계주(戒酒)」·「성경(誠敬)」 등 수신에 관한 것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서(書) 중 「상금곡선생(上錦谷先生)」은 송내희(宋來熙), 「상노사기장(上蘆沙奇丈)」은 기정진(奇正鎭)과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잡저 중 「탄세설(歎世說)」은 명(明)나라가 망하고 오랑캐가 중국을 통치함을 탄식하면서 송시열(宋時烈)의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찬양한 글이다.

한거잡록(閑居雜錄)」은 학행·태극·명덕·학술·사제 등에 대해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며, 「예설문답(禮說問答)」은 주로 상례에 대하여, 「제의(祭儀)」는 제사지내는 방법과 절차를 적은 글로서 참고자료가 된다.

천열부이씨장(薦烈婦李氏狀)」은 소년과부가 되어 남편의 뒤를 따라 음독자살한 이유혁(李儒赫)의 아내 광산이씨(光山李氏)의 포상을 건의한 것이다.

신광묵(辛光默, 1872~1949)


신광묵(辛光默, 1872~1949)                               PDF Download

 

18세 때 유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었다.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은 을미의병의 최고지도자로서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을 위국간난의 때에 온몸을 바쳐 실천하였다. 유인석은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당시 화서 문하에는 임규직, 이인구, 이준,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의 중요 인물들이 운집해 있었고, 훗날 화서학통을 이어받는 김평묵, 유중교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이를 통해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사상을 체득 존신하게 된다.

1893년 제천 장담으로 이사를 가는데, 양가의 재당숙인 유중교가 1888년 춘천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와 제자를 양성하던 중 1893년 작고하자 유중교가 닦아 놓은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바로 이곳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신광묵은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자작리에서 태어났으며, 18세 때 유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에서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湖左義陣)이 봉기하였을 때 참여하였고,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 이후에 이강년(李康秊)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좌종사의 직책을 띠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듬해 이강년이 순국한 후에는 그 시신을 제천으로 반장(返葬)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이후에는 고향에 은둔하여 10여 년간 제자를 기르며 항일 사상 교육을 하였다. 1917년 여름 단양경찰서에 붙잡혀 20여 일 동안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맏아들 신재교가 옥바라지를 하였는데, 부친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고 귀가한 후 그 충격으로 피를 토하고 10여 일 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만년에는 향리에 칩거하였다.

유집으로 『학습재집(學習齋集)』이 전하는데, 권3의 「동방용하설(東方用夏說)」과 「척화설(斥和說)」에는 존화양이적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유집은 한말 의병이며 문인이었던 신광묵의 학문과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임과 동시에 문집에 수록된 서간문, 잡저, 제문 등을 통해 제천 화서학파의 동향을 살필 수 있다.

윤원거(尹元擧, 1601-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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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전습하였다. ⌈국조인물고⌋에는 당질인 윤증(尹拯, 1629-1714)이 쓴 윤원거의 행장이 실려 있는데,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에는 종형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공과 함께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였는데 김 선생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대해주었다.”

라고 적고 있다.

‘허심탄회하게 대해주었다’는 말은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윤원거가 이미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즉위년)에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의 초종장(初終場)에는 합격하였으나 때마침 할머니인 경 부인(慶夫人)의 상을 당하여 복시(覆試)에는 응시하지 못했던 것을 상고하자면, 윤원거의 공부가 이미 틀이 잡혀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자는 백분(伯奮)이고 호는 용서(龍西)이다. 시강원필선 윤전(尹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첨지(僉知) 윤환(尹晥)의 딸이다.

윤원거의 외조부인 첨지공 윤환은 바로 해평윤씨의 형제 재상으로 유명한 윤두수, 윤근수 형제 중 동생인 윤근수의 장남이다.

윤원거의 조부인 윤창세(尹昌世)는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대사간공 윤황(尹煌)이 둘째이고, 시강원필선 윤전(尹烇)은 셋째로 윤원거의 부친이다. 윤황은 창녕 성씨(昌寧成氏)를 배필로 맞이했는데 바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딸이다. 윤황의 아들 6형제는 윤훈거(尹勳擧), 윤순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 윤성거(尹成擧), 윤선거(尹宣擧)이며 윤성거는 장가들기 전에 죽었다. 행장을 지은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로 윤원거에게는 종질이 된다. 윤증은 을축년에 윤원거가 김장생의 문하에 종형인 윤순거와 같이 출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사촌 간에 학문적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자(正字) 권경(權儆)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권경(權儆)은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사위이다. 윤원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수광(李睟光)의 칭찬을 받았다.

윤증의 「행장」에 이수광이 윤원거의 재주를 높이 산 내용이 나온다.

지봉이 선생의 재명(才名)을 듣고 시험해 보고 싶어서 운(韻)을 부르고 하늘로 시제(詩題)를 삼으니 선생께서 일어나서 즉시 대답하기를, “조화의 성쇠는 초목으로 알고, 음양의 개합은 곤충으로써 알도다. 사람이 살고 죽는 건 조석간의 일이나 성도는 길이 존재하여 시종이 없다오.”라고 하니 칭찬하기를, “이치에 통달한 말이다.” 하였다.

1633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해 1635년 성균관재생으로 들어갔다. 이 때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운동에 참여하여 그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제기했으나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뒤에는 일절 국사를 논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58년(효종 9)부터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공조좌랑·정랑·종부시주부·성균관사업·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 복제예송(服制禮訟)에서 남인 권시(權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송시열(宋時烈) 일파의 비난을 받았다. 질부인 윤증의 처가 권시의 딸이다. 1661년부터 여러 차례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70년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하였다. 그 요지는 솔선수범·입지·정심(正心)·면학·휼민(恤民)·근검절약·무사봉공 등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청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산(尼山)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윤순거(尹舜擧)·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 등의 종형제와 학문을 연마하고 후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윤증은 행장에서 “선생(윤원거)은 동토(윤순거)와 석호(윤문거) 양공(兩公) 및 우리 선자(윤선거)와는 형제이면서 친구처럼 지냈다. 매양 서로 만나면 즐거이 연마하여 낮과 밤을 지새우면서도 피로한 줄을 몰랐는데 성정(性情)과 심의(心意)의 오묘함과 일용(日用) 사물의 떳떳함에서부터 세도 승강(世道升降)의 기수(氣數)와 국가 치란(國家治亂)의 원인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강토(講討)하지 않음이 없었고 때로는 위연(喟然)히 삼대(三代, 하ㆍ은ㆍ주를 가리킴) 이상으로 만회(挽回)하려는 상념(想念)도 가졌었다.”라고 적고 있다.

윤증은 윤원거에 대한 각별한 정의를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윤증(尹拯)이 볼품이 없는 데도 윤원거가 자식같이 사랑해 주었고, 매번 찾아가면 환한 표정으로 회포를 열었고, 물러나오면 반드시 쉬어 가라고 재삼 명하였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얼굴 모습이나 말소리가 마치 어제의 일 같은데 세상을 떠난지 벌써 12년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아쉬운 심사를 토로하고 있다.’

윤증은 윤원거를 전체적으로 이렇게 묘사한다.

선생은 천품이 고매하고 욕심이 없어 명리(名利)와 분화(芬華) 및 일체의 세상사를 담박(淡泊)하게 간과(看過)하였으며 심지어 영욕(榮辱)ㆍ훼예(毁譽)ㆍ화복(禍福)ㆍ우락(憂樂)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마음에 동요되는 바가 없었다. 평거(平居)에도 마음이 즐겁고 화평(和平)하여 질언(疾言)과 거색(遽色)을 하지 않았고 대인(待人) 접물(接物)에는 진실되게 마음을 다하고 꾸미는 바가 없었으며 마음이 탄탕(坦蕩)하고 논의(論議)가 통쾌(痛快)하여 표리(表裡)가 여일하고 물아간(物我間)에 간격이 없어 구인(寠人, 옹졸한 사람)이나 소부(小夫)가 왕왕 곁에서 몰래 비웃어도 스스로 그 마음의 한계를 엿보기 어려움을 알지 못하였다. 지취(旨趣)가 고상하여 사물에 부딪치고 구경거리에 접하고 하면서 도처에서 우유자적(優遊自適)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항상 아들들을 경계하기를,

“나는 젊어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여 현허(玄虛)하고 절실하지 않는 데로 치닫고 진실되게 공부를 할 수 없어 노년에 이르도록 성취함이 없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절실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체로 선생은 자[尺]로 재듯 규율(規律)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나의 선자(先子)가 그럴 때마다 공경은 안팎이 없다고 규간(規諫)하면 선생은 좋아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소시에 스스로 힘쓰지 않아 노년에 후회가 있음을 한탄하였다. 때문에 스스로 한 말씀이 매번 이와 같았다.

시율에 격조가 높았으나 저술은 즐겨하지 않았다.

시문집 『용서문집(龍西文集)』이 전한다.

윤방(尹昉, 1563-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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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국조인물고」에는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명으로 유명한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쓴 신도비명이 실려 있는데,

“어릴 적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경전(經傳)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고 종합하여 가끔씩 창을 들고 방에 들어가곤 하니, 그때마다 두 분 선생도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라고 적고 있다.

이식의 신도비명은 상세하기와 추숭하는 마음이 글에 묻어나오는 것이 여느 신도비와 비교하여 각별한 점이 있는데, 이는 이식이 「신도비명」의 서두에서 공의 겸손함의 덕량에 감복하는 바가 있어서 후세에 그 전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는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는 대목에서 그 연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자는 가회(可晦)이고 호는 치천(稚川)이며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황기(黃琦)의 손녀로 참봉 대용(大用)의 딸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윤두수는 이황(李滉)과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었지만 젊어서부터 성혼, 이이, 정철 등과 친교를 맺고 동서분당 시에는 서인에 가담하였다. 1555년 생원이 되고,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급박한 상황에서 평양(平壤)이 위태로워지자 의주(義州)로 피난갈 것을 주장하여 실현시켰고, 요동(遼東)으로 피난하려는 계획을 반대하였다. 1594년 세자를 시종하여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었고 1595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왕비를 해주(海州)로 시종하였다. 1599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남파(南坡)로 돌아갔다.

윤방은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되고 이어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봉교·예조좌랑이 되었다. 곧 사헌부정언으로 옮겨 병조판서 이양원(李陽元)의 인사 부정을 탄핵하다가 성균관전적으로 체직되었다. 1591년 당쟁으로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바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된 사건이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재상으로 다시 기용되자, 예조정랑으로 발탁되어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때 대부인(大夫人)이 서거(逝去)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는데, 선조가 청요직을 두루 제수하고, 이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승진시키기까지 하였으나 모두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이때 왜적이 사방에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낮에는 숨고 밤에 달려가 몰래 빈소(殯所)에 이르러서는 곡읍(哭泣)을 하며 자리를 지켰는데, 몇 번이나 왜적을 만났어도 다행히 빠져 나오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의 효심에 하늘이 감동한 결과라고 일컬었다.

곧 직강·사예가 되고 다시 당론이 일어나 아버지가 파직 당하자 스스로 파직을 요청해 대각(臺閣)에서 물러났다가 곧 군기시첨정에 제수되었다. 이어 경상도순안어사(慶尙道巡按御史)로 나가 치적을 올리고 군기감정(軍器監正), 평산부사를 거쳐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끝나자 추관(推官)으로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순안독찰(巡按督察)이 되어 군량 운반을 담당하고 곧 철원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동부승지로 승진되어 돌아오자 그 곳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1601년 부친상을 마친 뒤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에 보임되었다가 도승지로 전직되었고 다시 한성판윤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올랐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경기도, 경상도의 감사를 지냈다. 이어 겸지춘추관사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15년(광해군 7) 다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해 폐모론이 있자 병을 핑계로 정청(政廳)에 불참해 탄핵을 받고 사직 은퇴하였다.

윤방은 그의 중자(仲子)인 윤신지(尹新之))가 선조의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하여 왕실과 인척(姻戚)의 관계였지만 평소 자신의 몸가짐을 엄하게 단속하여 사사로운 정의를 돌아보지 않았고 자제와 노복(奴僕)들도 감히 이를 어기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궁중에서는 윤방이 집안일을 돌아보지도 않고 인척 관계를 맺은 후의(厚意)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기도 했지만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면서 인척 집안의 중신(重臣)들이 모조리 화망(禍網)에 걸려들었을 적에도 윤방은 초연(超然)히 화를 면할 수가 있었으므로 논하는 이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겼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판서로 등용되고, 이어 우참판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곧 우의정에 올랐다.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 민심 수습에 공헌했으며, 1627년(인조 5) 영의정이 되었다.

이괄의 난을 피하여 대가(大駕)가 천안(天安)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적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에 윤방이 먼저 경성에 들어가서 수습하겠다고 자청하고는 단기(單騎)로 치달려 들어가 보니 도성 사람 가운데 적을 따랐던 자들이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관망(觀望)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윤방은 수악(首惡) 약간 명만을 본보기로 처형한 다음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살려 주어 새로운 길을 걷도록 허락하였다. 이때에 역적을 따른 사람 수천 명의 명단이 적힌 문안(文案)이 발견되었으므로 종사(從事)하는 관원들과 친근한 사람들이 다투어 살펴보려고 하였는데 윤방이 이것을 모두 가져다가 불태워 버리니 도성 안이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피난을 주장해 강화에 호종했고, 영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를 역임한 후 163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40여 신주(神主)를 모시고 빈궁(嬪宮),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였다. 그 후 강화가 체결되고 돌아오는 중에 왕후의 신위 하나를 분실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앞서 윤방은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일삼게 되자 밤에 묘우에 모셨던 40여 개의 신주(神主)를 나누어 담아 땅을 파고 묻어 두었다. 그 다음날 아침 청군이 불을 질러 묘우는 모조리 소실(燒失)되고 말았다. 그 후 남한산성에서 이미 화의를 맺고서 청군이 빈궁과 대군을 맹약(盟約)의 장소에 모이게 할 것을 요구하자 묻어두었던 신주를 꺼내어 두 명의 노복(奴僕)으로 하여금 짊어지고 가게 하다가 길에서 말을 얻어서 그 위에 싣고 가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에 머물러 있던 오랑캐 군사들이 재물을 약탈하는 바람에 공사(公私) 간에 숨겨 보관해 두었던 물건들이 모두 파헤쳐지게 되었다. 종묘의 신주가 전후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왕후(王后)의 신위(神位) 하나가 없어진 것이다.

이를 두고 처음에는 신위 전부가 소실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사태가 일단 진정된 뒤에 조정이 뒤바뀌면서 의논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신주 봉안에 잘못이 있었다는 탄핵을 받고 1639년 연안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 후 풀려나 다시 영중추부사에 기용되었다.

임종(臨終)할 때에 윤방은 의기(意氣)가 편안하고 한가롭기만 하였으며 사적(私的)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소 ‘낙천지명 승화귀진(樂天知命乘化歸盡)’이라는 여덟 글자를 썼는데, 자획(字畫)이 평상시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리에 누워 운명하였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이식은 윤방의 풍모와 행적을 「신도비」의 말미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은 얼굴이 넓적하고 체구가 우람한 데다 온몸에서 덕기(德氣)가 흘러 넘쳤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바라보기만 해도 공이 대인(大人)이요 장자(長者)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극한 성품으로 순후하고 근실하여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었으며, 관직 생활을 하며 일을 처리할 때에도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경계(境界)를 두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준과 척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리에는 결코 현혹되는 법이 없었다.

공은 풍도(風度)가 중후하고 심원하였으며, 기뻐하고 성내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종신토록 옆에서 모신 자도 공이 급하게 말을 하거나 야비한 언사를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비록 느닷없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항상 평소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공의 덕량(德量)과 기국(器局)을 우러러 사모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공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공이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로 말하면, 그야말로 난세(亂世)를 평정하고 새로운 개혁 정치를 행하려던 때였다. 그래서 훈신(勳臣)과 명사(名士)들이 각각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하고 있었고, 여러 대신(大臣)들도 이에 따라서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공은 오직 성심(誠心)으로 대하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쪽에 가담하였을 뿐, 편당(偏黨)을 지어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기 때문에, 여론에 막히는 일이 없는 가운데 모두들 공을 모시고 일하기를 즐겨하였다.

공은 집안에서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부모의 안색을 살피며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적에는 옷을 그대로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은 것이 거의 1년이나 되기도 하였다. 형제로부터 시작해서 내외의 친척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집안이 성대하였는데, 공은 치우침이 없이 두루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어느 집을 막론하고 모두 공을 의지하며 귀의하였다.

공은 세 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는데도 돌아오는 보따리 속에는 중국 물건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으며, 조정에 몸담은 50년 세월 동안 여러 번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도 끝내 전장(田庄) 하나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집에는 사방에 벽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따름이었으며, 의복(衣服)이나 기용(器用)을 보아도 검소하기가 마치 빈한한 선비의 생활을 연상케 하였다. 이처럼 청렴결백한 절조가 당대에 둘도 없을 정도였는데도, 정작 공은 털끝만큼도 자긍(自矜)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윤방의 중후한 인품과 지극한 효성이 손에 잡힌다.

저서로는 ⌈치천집⌋이 전한다.

윤급(尹汲, 1697-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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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은 어려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서도 수학했고 박필주(朴弼周, 1665-1748)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김창협은 신임사화 노론 4대신의 한 명인 김수항의 둘째 아들로 낙론의 종장으로 당시 문학과 유학의 으뜸으로 추앙받은 유신이요,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계승한 수제자로 영조조에 노론 벽파의 영수로서 정국 전개에 영향을 주었고, 박필주는 노론 낙론 계열의 산림학자로서 김창협의 동생인 김창흡 아래에서 수학하였다.

자는 경유(景孺)이고 호는 근암(近庵)이며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윤세수(尹世綏)이고 어머니는 이하(李夏)의 딸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형제 정승으로 유명한 윤두수(尹斗壽)와 윤근수(尹根壽) 형제의 후손으로서 윤두수의 넷째 아들 윤휘(尹暉)의 4대손이다. 그의 가계는 윤근수, 윤두수 형제가 집안을 일으킨 뒤 5대조 윤두수, 종5대조 윤근수, 종고조부 윤방이 모두 공신으로 부원군의 봉작을 받았다. 고조부 윤휘는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부 윤면지(尹勉之)는 첨정을 지내고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윤계는 호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아버지 윤세수는 만학도로 4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47세인 1705년에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사간과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서인으로 후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자, 그의 친족들도 노론과 소론으로 각각 갈라졌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윤계 때 노론을 선택하였다.

1725년(영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수학했는데, 과제로 지은 글이 우수하여 바로 그 해의 정시문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 해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이 때 시권(試券)의 비봉(祕封 : 시험지 끝에 응시자 본인의 관직·이름·본관·거주지 및 부·조·증조의 관직 이름, 외조의 관직 이름과 본관 등을 다섯 줄로 쓴 뒤, 관원들이 응시자의 이름을 알아볼 수 없도록 그 위를 종이로 붙여 봉한 곳)에 나이와 본관을 쓰지 않아 격식 위배로 탈락하게 되었으나, 헌납 채응복(蔡膺福)의 상소로 구제되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윤급을 따라다니게 되는데, ⌈영조실록⌋ 3년에 윤급이 사직하는 소를 올리는 기사에서 윤급이 스스로 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겸설서(兼說書) 윤급(尹汲)이 사직하는 소를 올리고, 잇달아 스스로 한계를 지어 처신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니, 답하기를, “지난날의 일이 비록 잘 처리한 것은 아니나 그 일은 사소한 것이요, 세상에 나와 임금을 섬기는 것은 그 의리가 크니, 그대는 다시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대개 윤급이 등과(登科)할 때 봉미(封彌)가 규격에 어긋남이 있어 방목(榜目)에서 뽑아 버리게 되었는데, 왕명으로 과방(科榜)이 회복되었다. 그 뒤 묘당(廟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간하면서 그를 과방에서 뽑아내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실록⌋ 5년 조에서는 조상행(趙尙行)이 소를 올려 윤급이 대과시험에서 위격한 것을 문제 삼아 사관으로 추천하는 것이 불가함을 논하고 있다.

1727년 설서가 된 뒤 정언, 지평, 수찬, 교리 등을 차례로 지냈다. 1734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전주권(銓注權)을 독점해 불법을 자행하는 이조판서 송인명(宋寅明)을 비난하다 파직되었다. 1736년 사간으로 다시 기용된 뒤 집의·검상·부응교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교리로서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우부승지·대사간 등을 지내고, 1741년 대사성이 되어 유생의 기강 쇄신과 학풍의 진작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유생들이 사원(祠院)의 훼철에 반대해 농성을 벌이자 그 책임으로 이조참의로 체직되었다. 1744년에는 인사 행정의 잘못으로 일신현감(一新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746년 부제학이 되어 동의금부사·한성좌윤을 역임하고,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참판이 되었다.

1749년 이조판서 정우량(鄭羽良)이 그의 당(黨)인 이창수(李昌壽)를 이조참의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하다 홍원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다시 부제학으로 기용된 뒤, 예문제학·형조판서·개성유수·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 때 문무식년회시(文武式年會試)에서 왕의 소패(召牌)를 어겨 도배(徒配)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63년 참찬이 된 뒤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영의정 신만(申晩)의 아들 광집(光輯)의 초사(初仕) 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가 곧 우참찬이 되었다. 이후 이조판서·판의금부사·한성판윤·예조판서·형조판서·좌참찬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영조실록⌋ 46년에 윤급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영조의 윤음은 다음과 같다.

“윤급은 근년에 와서 더욱 성실하고 정백(精白)하여, 이 때문에 배척을 받아 조정에서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매우 마음에 걸렸다. 이 부음을 갑자기 접하니 슬프고 애석함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관재(棺材)를 가려서 보내고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릴 것이니, 삼명일(三明日)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여 나의 뜻을 표하라. 듣건대 내년이 곧 회혼(回婚)이라 하니 옷감과 식물(食物)을 그 부인(夫人)에게 보내어 한편으로 저승에 있는 혼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살아 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위로하게 하라.”

사관이 기록하기를, ‘윤급의 자(字)는 경유(景孺)이니, 고 상신 윤두수(尹斗壽)의 5대손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거쳐 마침내 1품에 올랐다. 사람들은 혹시 논의가 지나치게 준엄(峻嚴)하다고도 말하지만, 그러나 충역(忠逆)의 의리에 엄격하고 지조(志操)가 확고하였다’고 적고 있다.

준급한 언론으로 영조의 탕평책을 계속 반대하여 자주 파직 혹은 좌천되었으나 의로운 주장이 많았기에 곧 서용되곤 하였다. 특히, 글씨에 뛰어나 독특한 서체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근암집⌋, ⌈근암연행일기⌈ 등이 전한다.

유척기(兪拓基, 1691-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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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서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 1662년-1713)에게서 배웠다. 스승 김창즙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당시 형 김창집(昌集), 김창협(昌協), 김창흡(昌翕), 김창업(昌業)과 함께 문장대가로 평가를 받았으며, 막내 동생 김창립(金昌立)과 함께 육창(六昌)이라 불렸다.

김창즙은 168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였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00년 아버지의 유문인 『문곡집(文谷集)』을 간행했고, 1710년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지냈다. 문장과 훈고(訓詁)에 능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우(李㘾)는 유척기의 유교인 ⌈지수재집(知守齋集)⌋의 발문에서 유척기가 어렸을 적에 포음 김창즙에게서 배웠는데, 김창즙이 국기(國器)로서 칭찬하고 격려하였다고 적고 있다.

자는 전보(展甫)이고 호는 지수재(知守齋)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 유철(柳㯙)이고 아버지는 목사 유명악(柳命岳)이며, 어머니는 이두악(李斗岳)의 딸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후 정언(正言), 수찬, 이조정랑,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세제(世弟)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신임사화 때 소론의 언관 이거원(李巨源)의 탄핵을 받고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서 이조참의, 대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승지로 참찬관을 겸하다가 경상도관찰사, 양주목사, 함경도관찰사, 도승지,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1739년 우의정에 오르자, 신임사화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연좌되어 죽은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두 대신의 복관(復官)을 건의해 신원(伸寃)시켰다.

앞서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등극하는데,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면서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告變事件)이 발생한다. 고변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 옥사는 노소론간의 대립이 경종 즉위 후 왕에 대한 충역 시비의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는 경종대의 문제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 문제는 영조대에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었다.

한편 유척기는 신임사화의 중심인물인 유봉휘(柳鳳輝), 조태구(趙泰耉) 등의 죄를 공정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그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당시의 명류(名流) 조관빈(趙觀彬)·김진상(金鎭商)·이기진(李箕鎭) 등도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천보(李天輔)가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영조에 의해 중용되어 영상으로 임명되었다. 1760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국(器局)이 중후하고 고금의 일에 박통했으며, 대신의 기풍을 지닌 노론 중의 온건파에 속하였다. 당대의 명필가요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경주의 「신라시조왕비(新羅始祖王碑)」, 청주의 「만동묘비(萬東廟碑)」 등을 남겼다.

「영조실록」 43년에 유척기의 졸기가 실려 있다.

“봉조하 유척기(兪拓基)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연석(筵席)에서 애석해 한탄하고 꿈에서 보았다는 하교까지 하면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시호(諡號)를 의논하라고 하였다. 문익(文翼)이란 시호를 내렸다. 유척기는 너그럽고 후덕하여 대신다운 도량이 있었으므로, 위아래가 의지하며 중히 여겨 온 지 거의 수십 년이나 되었다.”

짧은 이 글에서도 유척기에 대한 영조의 신망과 동료들의 인망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저서로는 「지수재집(知守齋集)」이 전한다.

유숙기(兪肅基, 1696-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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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년-1722)의 문인이다. 김양행(金亮行, 1715-1779)은 유숙기의 겸산집(兼山集 서문에서, 유숙기가 일찍이 김창흡의 문하에서 배울 적에 경전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서 그 단서만을 알려주어도 단박에 깨달아서 본래 제자들을 쉽게 허여하지 않는 김창흡이지만 유독 유숙기에 대해서는 매우 흡족해하고 허여했다고 적고 있다.

김창흡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를 지낸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응시하여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장자』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으며,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하여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그는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형 김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형 창협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한 이이의 주장을 찬성하였다.

자는 자공(子恭)이고 호는 겸산(兼山)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의정부우참찬 명웅(柳命雄)이며, 어머니는 임천조씨(林川趙氏)로 인천부사 현기(趙顯期)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여 헛되이 말을 하지 아니하고 행동을 엄격히 자제하여 어른을 잘 섬겼으며, 스스로 학업에 힘써서 1715년(숙종 41)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한때 송산(松山)에서 성리서(性理書)에 전념하였으며, 교하(交河)의 매음(梅陰)으로 이거한 뒤 원근의 선비들을 가르쳤다.

1733년 명릉참봉(明陵參奉)으로 벼슬길에 들어가 효릉참봉(孝陵參奉)·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금구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뒤 임피현령(臨陂縣令)과 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김양행은 유숙기의 겸산집(兼山集 서문에서 유숙기의 학문적 성취를 이렇게 적고 있다.

“삼연 선생(김창흡)은 사람들의 질문에 따라 대략적으로 알려줄 뿐 극진하게 변론하지는 않았는데 겸산 선생(유숙기)이 호락논쟁에 대한 제가들의 변론이 극성할 적에, 저들의 글을 모두 읽어보고 취사선택하여 지당한 귀결을 내리고자 하였다. 올바른 관점에다가 표현이 정확한데, 가령 미발오상(未發五常)과 심기(心氣) 등의 변론은 매우 훌륭하다.”

유숙기는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에서 심과 성에 대해 김창흡의 이론을 지지하면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였고, 「심여기질부동설(心與氣質不同說)」은 심과 기질에 대하여 논술한 것으로 이기(理氣)에 있어서 역시 김창흡과 가까운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하였다. 「태극도설차의(太極圖說箚疑)」에서는 태극도설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고 주돈이(周敦頤)·주희(朱熹) 등 송유(宋儒)의 이론을 중심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학설을 광범위하게 인용,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밖에 한원진(韓元震)의 심자설을 논변한 「심자설변(心字說辨)」과 정언환(鄭彦煥)의 이기설에 대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이론을 인용하여 논변한 「이기설변(理氣說辨)」,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었을 때 그 입장을 변호한 「우암선생변무소(尤庵先生辨誣疏)」, 윤지술(尹志述)의 신원을 청한 「북정윤지술신원소(北汀尹志述伸寃疏)」가 있다. 「중용차의(中庸箚疑)」와 「서경차의(書經箚疑)」 등은 경서 연구에 도움이 된다.

후에 이 글들은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제자 金載順(1732년-미상)과 아들 유언부(柳彦傅) 가 상의하여 1775년(영조 51)에 간행한 겸산집(兼山集)에 수록되었다.

유기일(柳基一, 1845-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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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항로는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그의 이기론(理氣論)은 주리철학(主理哲學)의 입장을 고수하여 이(理)와 기(氣)는 대등한 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이(理)를 중요시하는 그의 주리설(主理說)은 객관적 입장에서 논리상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으나 도덕의식이 피폐된 당시의 상황에서 순선(純善)을 지향하고 대의(大義)를 실천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그는 영남의 이진상(李震相), 호남의 기정진(奇正鎭)과 더불어 한말 주리철학(主理哲學) 3대가로 일컬어졌다.

그는 주리철학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한말(韓末) 위정척사(衛正斥邪) 의리론(義理論)의 대표자로서 일본과 서양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의 선봉이 되었다. 그의 문하(門下)에서 척사위정(斥邪爲正)과 창의호국(倡義護國)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최익현(崔益鉉), 김평묵(金平黙), 유중교(柳重敎), 유인석(柳麟錫) 등이 그들이었다.

자는 성존(聖存)이고 호는 용계(龍溪) 또는 용서(龍西)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문녕군(文寧君) 유병철(柳秉喆)이다.

일찍이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1868년 이항로 사후에는 그 적전(嫡傳)을 계승한 김평묵을 사사함으로써 이 양현의 학문과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다. 또한 동문 선배로 동향이던 최익현(崔益鉉), 춘천의 동문 홍재구(洪在龜) 등과 일생토록 두터운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1876년 개항 문제를 두고 조야에서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날 때, 유인석(柳麟錫), 윤정구(尹貞求) 등 화서학파 48인과 함께 개항 반대상소인 「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잉청절화소(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請絶和疏)」를 올리는 등 화서학파 위정척사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점차 일제 침략으로 인해 시국이 혼탁해지자 향리의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여기서 『척양록(斥洋錄)』을 짓는 등의 저술활동과 도학 강명을 통한 문인 양성에 일생토록 진력하였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화서학파의 특징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 정신에 입각한 위정척사, 존화양이(尊華攘夷)에 철저하게 근저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주희(朱熹), 송시열(宋時烈), 이항로 등을 특히 존숭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국상황에서는 유인석, 이소응(李昭應) 등 유중교 계열의 화서학파 인물들이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전면에 투신했던 경향과는 처신의 방편을 달리하였다. 그리하여 홍재구(洪在龜) 등과 함께 자정수의(自靖守義)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총 114권의 방대한 수고본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중 그 대부분이 산일되고 일부를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이 외에 불분권(不分卷)의 문집 18책과 2책의 『능언(能言)』 등 총 20책의 미간행 수고본 문집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하성문고(霞城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오준선(吳駿善, 1851-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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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오준선은 유년기에는 족숙 오태규(吳泰圭, 1843~?)에게 수학하였다. 오준선이 18세 되던 해에 당시 71세의 기정진(奇正鎭)을 찾아가 예법과 경전 등을 탐구하게 되었으며 기정진의 기대를 받았다. 이때 기우만, 고광순과 동문수학하였다.

스승 기정진은 19세기 호남유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받는 유장으로서 정조 22년(1798) 6월 3일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조동(槽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금빛 얼굴을 가진 큰 사람이 남자아이를 안고 오는 꿈을 꾼 뒤 12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기정진은 어려서부터 영특함이 남달랐다. 네 살 때  「효경(孝經)」과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읽었고, 이때부터 5~6년 동안  「소학」,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비롯한 경서와  「강목」,  「춘추」 등의 역사서를 두루 공부했는데, 기억력이 매우 좋아 보는 것은 모두 외웠다. 판단력과 행실도 올발라 네 살 때는 이웃집 과일이 자기 집 마당에 떨어지자 모두 주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왼쪽 시력을 잃는 불행을 겪는다.

후일 학문이 대성하여 독창적이면서 탁월한 저작을 남긴다. 그의 주요 저작은 4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산출되어 노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기정진의 성리설은 이(理)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일원론(理一元論) 관점의 주리론이라고 요약된다. 특정한 사승(師承) 관계나 학맥에 의존하지 않고 성리학의 근원인 중국 송대의 학문을 직접 연구해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대표저작으로는 40대 중반에 저술한 「납량사의(納凉私議)」(1843, 46세 완성 이후 1874년 77세 수정)를 비롯해 50대 중반에 지은 「이통설(理通說)」(1853, 55세)과 81세의 노령에 발표한 「외필(猥筆)」(1878) 등이 꼽힌다.

오준선은 학문의 범위를 넓히기 위하여 이후 기호학파의 전통을 이은 전재(全齋) 임헌희(任憲晦, 1811-1876)와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1818-1903)를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임헌희는 이이와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당대의 석학이고, 송근수는 은진 송씨로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전승자로서 1882년 좌의정 재임 시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였다.

호는 후석(後石)이고 자는 덕행(德行)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그의 선대를 살펴보면, 고려 혜종(惠宗, 914~945)의 모친 장화왕후(莊和王后)는 나주오씨(羅州吳氏)의 역사 속에 크게 이름을 나타난 인물이다. 가장 오래된 오씨 족보(吳氏族譜)는 오희도(吳希道, 1583-1624)가 적은 필사본이 전하고 있다. 나주오씨는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오언(吳偃)을 1세로 하고, 5세손 오자치(吳自治)는 세조13년(1467)에게 영정을 하사 받은 인물이다. 오준선의 8대조 병조좌랑 오이익(吳以翼, 1618-1666)은 오희도(吳希道)의 아들이다. 부친은 오하규(吳夏圭, 1829-1872)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오항규(吳恒圭, 1824-1874)에게 입양되었다. 오준선은 평소 형제간의 깊은 우애가 깊었는데, 동생 오영선(吳泳善, 1854-1872)과 오유선(吳裕善, 1857-1886)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영선의 양아들 오동수(吳東洙, 1878-1945)와 유선의 아들 오남수(吳南洙, 1884-1933)를 친자식처럼 기르고 가르쳤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기정진이 지은 「납량사의(納凉私議)」를 두고 이 글은 당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모두 쓸어버릴 정도라고 격찬하였다. 이 글에서 기정진은 기를 중시하는 주기론과 기의 존재를 일정하게 인정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부정하고 이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리론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의 이 학설은 기호 학맥의 원류인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송병선(宋秉璿, 1836-1905)과 전우(田愚, 1841-1922)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때, 오준선은 기정진이 이이에게 심복하면서도 다만 이기설에서는 이견을 보인 것이며, 그것은 이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후현이 선현의 이론을 변론(辯論)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정진이 「외필(猥筆)」에서

‘이(理)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하고 변화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로서 기(氣)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理)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라고 했는데, 오준선은 스승의 학설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기호학파 중 이일원론을 전개한 스승 기정진의 주리론적 입장을 따른 오준선은, 기정진의 설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며 모든 행동의 근원은 명령을 내리는 자가 주인이고, 주인은 바로 이(理)요, 명령을 받은 자는 종이니 종은 바로 기(氣)다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오준선은 망국의 현실을 통곡하며 오백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금수의 오랑캐 나라가 되었으니 망국에서 살아남은 자가 몸을 던져 죽을 수 없다면, 뜻에 따르는 충의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입산하였다. 처음 석문산에 은거했으나, 용진산으로 문도들이 거처를 축성하여 용진산으로 옮겼다. 용진산으로 들어간 오준선은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들의 행적을 수집하여 「의병전」을 저술하였다. 그는 「의병장 기삼연전」, 「의병장 고녹천광순전」, 「의사 김준 전수용 합전」을 지었고 「의병장 심남일 행장」, 「의병장 고광순 행장」 등 5명의 의병장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문집으로 「後石遺稿」가 전한다.

오원(吳瑗, 1700-1740)


오원(吳瑗, 1700-1740)                                          PDF Download

 

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스승 이재는 낙론의 거두인 김창협의 수제자로 1725년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 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그러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 서울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자는 백옥(伯玉)이고 호는 월곡(月谷)이다. 할아버지는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로 이재와는 처질(처조카) 간이다. 오태주(吳泰周)에게 입양되었다.

조부 오두인은 1648년(인조 26)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효종조에 지평(持平)을 거쳐 장령(掌令) 헌납(獻納), 사간이 되었다.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副校理),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조에는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고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 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 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는데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김창협이 쓴 비명에 이렇게 적혀있다.

“금상(今上) 15년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중궁(中宮,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이 손위(遜位)하니, 판서(判書) 양곡(陽谷) 오두인(吳斗寅)공이 참판(參判) 이세화(李世華)공과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공 등 80여 인과 더불어 대궐에 나아가 상서(上書)하여 극간(極諫)하였는데, 오공이 기실 수장이었다.”

김창협의 셋째 딸이 오원의 생부인 오진주에게 시집을 갔으니, 오두인과 김창협은 사돈 간이다.

부친 오진주는 1714년(숙종 40) 갑오(甲午) 증광시(增廣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급제하였으며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다. 진사(進士)로 나아가 관직이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형제로는 여흥 민씨 소생의 오관주(吳觀周), 원주 김씨 소생의 오정주(吳鼎周), 상주 황씨 소생인 오태주(吳泰周), 오이주(吳履周)가 있다. 오진주는 오태주의 동생이다.

오태주는 12세인 1679년(숙종 5)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명덕대부(明德大夫)의 위계를 받았다. 숙종은 누이동생인 명안공주를 지극히 사랑하여 청나라에서 고급 비단이 들어오면 후궁보다 명안공주에게 먼저 보냈고, 공주의 거처인 명안궁을 전례가 없는 1,826칸의 대규모로 지어주었다. 1687년(숙종 13)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는데, 공주가 갑자기 사망하자 숙종이 매우 슬퍼하여 소복 복장에 머리를 풀고 10일간이나 육식을 금하였다고 전한다. 오태주가 후사가 없게 되자 오원이 오태주에게 입양되었다. ⌈영조실록⌋에 오원에 관한 기사 중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아들이다’라는 내용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오태주는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사서(司書)로 있을 때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進言)하여 받아들이게 하였고 직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났다.

1729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탕평책을 적극 반대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1732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교리(校理), 검토관(檢討官), 이조좌랑, 응교(應敎)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6년 참찬관(參贊官)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신구(伸救)하려다가 또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1739년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승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실록⌋ 16년에 오원의 졸기가 실려 있다.

“공조 판서 오원(吳瑗)이 졸(卒)하였다. 오원은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의 손자인데, 일찍이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깨끗하여 욕심이 없고 소탈하였으므로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는데, 졸(卒)할 때 나이 41세였다. 임금이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이 있는데도 일찍 죽은 것을 애석히 여겨 차탄하고 애도하였으며,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성품은 정직하고 성실하면서 온후(溫厚)하였으며 총명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나고 문장 또한 깨끗한 절개를 지녔다 하여 진정한 유신(儒臣)이라는 평을 들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