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숙기(兪肅基, 1696-1752)


유숙기(兪肅基, 1696-1752)                                 PDF Download

 

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년-1722)의 문인이다. 김양행(金亮行, 1715-1779)은 유숙기의 겸산집(兼山集 서문에서, 유숙기가 일찍이 김창흡의 문하에서 배울 적에 경전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서 그 단서만을 알려주어도 단박에 깨달아서 본래 제자들을 쉽게 허여하지 않는 김창흡이지만 유독 유숙기에 대해서는 매우 흡족해하고 허여했다고 적고 있다.

김창흡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를 지낸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응시하여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장자』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으며,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하여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그는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형 김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형 창협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한 이이의 주장을 찬성하였다.

자는 자공(子恭)이고 호는 겸산(兼山)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의정부우참찬 명웅(柳命雄)이며, 어머니는 임천조씨(林川趙氏)로 인천부사 현기(趙顯期)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여 헛되이 말을 하지 아니하고 행동을 엄격히 자제하여 어른을 잘 섬겼으며, 스스로 학업에 힘써서 1715년(숙종 41)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한때 송산(松山)에서 성리서(性理書)에 전념하였으며, 교하(交河)의 매음(梅陰)으로 이거한 뒤 원근의 선비들을 가르쳤다.

1733년 명릉참봉(明陵參奉)으로 벼슬길에 들어가 효릉참봉(孝陵參奉)·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금구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뒤 임피현령(臨陂縣令)과 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김양행은 유숙기의 겸산집(兼山集 서문에서 유숙기의 학문적 성취를 이렇게 적고 있다.

“삼연 선생(김창흡)은 사람들의 질문에 따라 대략적으로 알려줄 뿐 극진하게 변론하지는 않았는데 겸산 선생(유숙기)이 호락논쟁에 대한 제가들의 변론이 극성할 적에, 저들의 글을 모두 읽어보고 취사선택하여 지당한 귀결을 내리고자 하였다. 올바른 관점에다가 표현이 정확한데, 가령 미발오상(未發五常)과 심기(心氣) 등의 변론은 매우 훌륭하다.”

유숙기는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에서 심과 성에 대해 김창흡의 이론을 지지하면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였고, 「심여기질부동설(心與氣質不同說)」은 심과 기질에 대하여 논술한 것으로 이기(理氣)에 있어서 역시 김창흡과 가까운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하였다. 「태극도설차의(太極圖說箚疑)」에서는 태극도설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고 주돈이(周敦頤)·주희(朱熹) 등 송유(宋儒)의 이론을 중심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학설을 광범위하게 인용,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밖에 한원진(韓元震)의 심자설을 논변한 「심자설변(心字說辨)」과 정언환(鄭彦煥)의 이기설에 대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이론을 인용하여 논변한 「이기설변(理氣說辨)」,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었을 때 그 입장을 변호한 「우암선생변무소(尤庵先生辨誣疏)」, 윤지술(尹志述)의 신원을 청한 「북정윤지술신원소(北汀尹志述伸寃疏)」가 있다. 「중용차의(中庸箚疑)」와 「서경차의(書經箚疑)」 등은 경서 연구에 도움이 된다.

후에 이 글들은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제자 金載順(1732년-미상)과 아들 유언부(柳彦傅) 가 상의하여 1775년(영조 51)에 간행한 겸산집(兼山集)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