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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국헌(1599-1672)


오국헌(1599-1672)                                                   PDF Download

 

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권상하의 ‘묘갈명’에 송준길(宋浚吉)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는데 송준길 또한 칭찬하고 허여하였다고 하는데, 송준길(1606-1672)과의 나이를 따져보았을 때 제자로 입문하여 배운 것은 아닌 것 같다.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의 ‘문인록’에 오국헌의 이름이 들어있다.

인조반정 후에 서인의 영수로 활약한 김장생은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고,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이후 학계와 정계를 주름잡은 제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자는 중현(仲賢)이고 호는 어은(漁隱)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산립(山立)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로 대사간 사귀(思貴)의 딸이다.

향시(鄕試)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정시(庭試)에 거듭 실패하였고, 병자호란의 치욕이 있은 뒤에는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성리학과 예학에 밝았으며, 나중에 단성(丹城)의 도천(道川)에 옮겨 살면서 마을 이름을 어은동(漁隱洞)이라 고치니 송시열(宋時烈)이 ‘어은(漁隱)’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고 한다.

권상하는 <묘갈명>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읍지(邑誌)>의 기록을 전재하길,

“공은 젊어서 문재(文才)가 뛰어났는데, 누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되지 않자 시골에 내려가 두문불출하고서 수석(水石)과 화조(花鳥)를 완상하며 스스로 즐겼고, 성현(聖賢)의 글을 열심히 읽으며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이 벼슬하기를 권하면 머리를 흔들며 대꾸하지 않았는데 우암 선생(尤菴先生), 송시열(宋時烈)이 ‘어은(漁隱)’이라는 두 글자를 써 주어 공을 가상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공은 또 일찍이 동춘(同春,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는데, 동춘 선생 역시 공을 퍽 칭찬하고 허여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72년 현종 13년) 동짓달 14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74세였다.”

라고 적고 있다.

음직으로 수차에 걸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12년(숙종 38)에 승훈랑(承訓郎)과 호조좌랑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사서해의(四書解義)』 2권, 『역계해의(易繫解義)』 1권, 『잡저(雜著)』 3권, 『유후귀감(遺後龜鑑)』 3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어은유고』 5권만이 전한다.

양응수(楊應秀, 1700-1767)


 

양응수(楊應秀, 1700-1767)                                 PDF Download

 

암 이재(李縡, 1680-1746)의 적전(嫡傳)이다.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그의 문하에 미호 김원행, 역천 송명흠, 녹문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미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은 조선 후기의 집권 계층인 노론의 혁혁한 가문의 후손으로서 학통을 잇는 존재가 되어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의 지위에 있었다. 그는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역천 송명흠(1705-1768)은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인 스승 이재, 윤봉구(尹鳳九),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국 18현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의 현손으로,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녹문 임성주(任聖周, 1711-1788)는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정조 즉위 후 동궁을 보도(輔導)하고 지방관을 지내기도 했지만 평생을 재야에서 학문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철학은 일원론적 구조 위에서 정초되고 있으며, 이기를 기일원론적 관념으로 통일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결정(結晶)을 이루었다. 현상윤은 <조선유학사>에서 임성주를 조선 6대가의 한명으로 꼽고 있다.

김원행, 송명흠, 임성주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이재 문하에서 나왔지만 정작 이재 말년의 유훈을 받고, 그 의발을 온전히 지킨 수제자는 이들이 아니고 백수 양응수이다. 양석승(楊錫升)은 <白水集序>에서 이재의 적전[寒泉之嫡傳]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상영(李商永)은 <묘갈명>에서 ‘연원단적(淵源端的) 직접한천(直接寒泉)’이라 하였고, 유언집(兪彦鏶, 1714-1783)은 <행장>에서

‘주자 문하에서 성리에 대해서는 북계(北溪) 진순(陳淳)이 으뜸이라고 하는데 이재 문하에서 성리에 있어서는 양응수가 으뜸이다’

고 적고 있으며, 이상영은 <묘갈명>에서 이재 문하의

‘박성원(朴聖源, 1697- 1767), 유언집, 송명흠, 김원행 등도 성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을 적에 양응수의 정확하면서도 분명한 조예를 높이 평가했다’

고 적고 있다.

양응수는 스승이 죽자 심상(心喪) 중의 일들을 <축장일기(築場日記>로 자세하게 남기고 있는데 스승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잘 느낄 수 있다. 또한 백수(白水)라는 양응수의 호는 이재가 지어준 것인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재가 말년에 주연을 펼친 후에 제자들에게 시를 읊도록 했는데, 양응수의 시는 고준한 기상이 있었다. 이에 이재가 흥에 겨워 붓을 들어

‘얼큰한 취기에 경설을 논하고 센 수염(白鬚) 휘날리며 시를 읊는데 이것이 궁핍한 유자가 뜻을 얻은 것일세.’

라고 써서 양응수에게 주자, 동문들이 양응수를 백수(白鬚)라고 불렀다. 후에 양응수가 호를 부탁하자 이재가 백수(白水)라는 호를 주었는데, 이는 양응수가 백호(白湖)에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이재가 양응수를 허여한 당시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유언집이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자는 계달(季達)이고 호는 백수(白水)이다. 순창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승의랑(承議郞) 처기(處基)이며 어머니는 강화최씨(江華崔氏)로 휴지(休之)의 딸이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꿋꿋하게 학문을 연마하였다. 후에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이재가 한천에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이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사제지간으로서 이재와 양응수는 마치 부자지간과 같아서 다른 제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755년(영조 31)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익위사부수(翊衛司副수)로 옮겨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오로지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만 전념해 「사서강설(四書講說)」 등 성리에 관한 정통한 저작과 논설들을 남겼다.

유언집이 <행장> 말미에 성리설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양응수의 글이 좋은 길안내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의 문집에는 성리설에 대한 내용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문집 내 비중으로 보더라도 양응수의 <백수집>은 김원행의 <미호집>, 송명흠의 <역촌집>, 임성주의 <녹문집>에 비하여 성리에 관한 논설들이 더욱 많다.

양응수는 스승 이재와 마찬가지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낙론(洛論)을 지지하고, 호론(湖論)을 배척하였다. 그의 학설은 이재의 ‘일리이기(一理二氣)’설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양응수의 일리이기설에 기반 한 인물성동이론의 입장은 그가 스승의 심상 기간의 일들을 일기형식으로 남긴 <축창일기>의 정묘년 정월 17일의 기록에서 대강을 엿볼 수 있다.

이철하(李徹夏)가 이재의 영정에 조문한 후에 양응수를 방문하여, 근래에 심설에 대한 논의들이 벌어져서 호우(湖右, 한원진과 윤봉구) 쪽은 마음은 선악이 있으며 미발시에도 숙특(淑慝)의 종자가 있다고 하고, 호좌(湖左, 채지홍, 이간) 쪽은 마음은 본래 선하며 불선한 것은 구각혈기(軀殼血氣)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양응수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두 설이 모두 편중되었다. 이재 선사의 리일기이(理一氣二)의 설이 확실한 정론이다. 마음의 리는 하나이지만 기는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본연지기(本然之氣)는 명덕(明德)으로 주자의 “마음의 본체는 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다. 혈기지정영(血氣之精英)은 “정신이 발동하여 지각이 된다(神以發知)는 것”으로 진안경이 “모두가 선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발동하면 불선한 생각이 나오기 쉽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호좌(인물성동론)는 본연지기가 순선하다는 것은 보았지만 혈기정영은 반드시 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호우(인물성이론)는 혈기지정영을 마음의 본체로 여겨서 본연지기가 순일하고 부잡하다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리는 하나이고 기는 둘이다(理一氣二)라고 해야 마음의 체단이 원전하면서도 구분이 명확해진다. 이 입장은 성현의 말씀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이런 설명을 듣고 이철하가 “네, 네! 잘 알겠습니다.” 했다.

저서로는 <백수문집(白水文集)> 30권 17책이 전해온다.

심조(沈潮, 1694-1756)


 

심조(沈潮, 1694-1756)                                           PDF Download

 

상하의 만년 제자이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로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 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 숙종 연간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는데,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고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였다.

학술적으로 그는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애초에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권상하가 죽은 후에 남당 한원진에게 졸업하였다. 그의 족손(族孫)인 심기택(沈琦澤)이 쓴 <묘지명>에는

‘강문(江門, 한수재 문하)의 만학으로 남당에게 졸업했으며 한수재를 섬기듯이 한원진을 섬겼다’

라고 한다. 남당 문하의 고족이자 심조의 문인을 자처한 김근행(金謹行, 1712-?)이 쓴 <정좌와선생행장(靜坐窩先生行狀)>에는

‘계축년(1733)에 남당 문하에 수개월을 머물면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근원이나 왕패치란(王覇治亂) 근본에 대하여 논한 후에, 남당 선생은 금세에 둘도 없는 통유이시다. 내가 남당 선생에게 지극한 가르침을 받았다. 후에 거처하는 서실의 편액을 靜坐로 정하고 그 명문과 서액을 남당에게 요청하여 걸었다’

라고 적고 있다. 그의 자호인 정좌와는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권상하의 만년 제자로 한원진에게 졸업했다는 심기택의 <묘지명>은 김근행의 <정좌와선생행장(靜坐窩先生行狀)>과 수미로 연결된다 할 것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자는 신부(信夫)이고 호는 정좌와(靜坐窩)이다. 선조 조 최초의 동서분당 때에 서인의 영수로 지목받은 심의겸의 동생 집안으로, 아버지는 심수정(沈壽鼎)이고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도사(都事) 정전창(鄭展昌)의 딸이다.

오십을 넘긴 1747년에 조명리(趙明履, 1697-1756)가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추천하였는데, 한원진이 취임할 것을 적극 권유하여 힘써 나아가 맡은 소임을 다했다. 이어 가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오래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사직하고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근행이 <행장>에서

‘선생은 경세(經世)를 자부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백성을 보호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것(保民興學)이 다스리는 큰 법도이며 삼대의 다스림에서 본받을 것은 심범(心法)이니 묵은 자취들을 본받을 것이 없다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사문의 가르침을 받은 것인데 이런 것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

라고 적고 있다.

만년에 김포에 우거하면서 중봉 조헌을 모신 우저서원(牛渚書院)에서 신미년(1751)부터 강학을 시작했다. 당시 우저서원에서는 강학을 하지 않았다. 원근의 학자들이 모여 들여 성황을 이루었고 사풍이 진작되었다. 교육 내용은 <소학>과 <가례>를 배운 후에 사서를 학습하였다.

김근행이 <행장>에서 ‘오늘날 선생의 면모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생의 편지글을 읽어 보아라’고 하였는데, <정좌와집>에 수록된 편지들은 한원진, 윤봉구, 이재 등과 주고받은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논학서가 주종을 이룬다. 심조는 인물성동이론에서 호론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비록 인물성 이론으로 남당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한원진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이재와도 상당한 학문적 교유를 나누고 있었다. <묘지명>에 의하면, 심조의 현명함을 이재가 극찬했지만 남당 문화 제자들이 의심하지 않았는데 이는 심조의 공명정대한 심사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학술 변론이 점차 파당적 배타성을 갖게 되고, 이론적 변론에만 치우쳐 유학의 본질인 일상공부와 실천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조가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인물성동이론을 비롯한 유학에 대한 심도 깊은 사색의 성과들이 즐비하다. 이는 여느 문학지사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한편 김근행은 <행장>에서 심조가 또한 산수를 무척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그의 문집에 <도봉행일기(道峯行日記)>가 있다. ‘갑술년 8월 27일’로 시작하는 이 산행기는 그가 죽인 두 해 전인 1754년의 도봉산 일람기를 적은 글이다. 우저서원에서 강을 마친 후에 심조가 제생들에게 도봉서원은 도학의 정신이 남아 있는 곳이고 그곳의 산수가 아름다우니 강학도 하고 산수를 유람하자고 제안하여, 9월 12일에 출발하여 17일에 돌아오는 5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여행의 전 과정을 사진으로 찍듯이 기록한 글들은 당시 도봉서원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임과 동시에 심조의 소슬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본래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에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한 남언경(南彦經)이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는 뜻으로 도봉 서원을 건립하고 이듬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도봉 서원은 300여 년간 서울·경기 지역 선비들의 주요 교유처가 되었다. 특히 산수가 빼어나서 선비들이 즐겨 찾는 서원이었다.

문집으로 『정좌와집(靜坐窩集)』이 전한다. 특히 본 문집은 행장과 연보가 있어서 그의 삶과 사상의 내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편리하다.

심정진(沈定鎭, 1725-1786)


 

심정진(沈定鎭, 1725-1786)                                 PDF Download

 

려서는 박필주(朴弼周, 1665-1748)에게서 배웠다. 박필주는 서울 주변에 세거하면서 서울의 학계를 주도하며 영조의 완론 탕평 체제 속에서도 산림(山林)의 입장을 존중하며 노론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노론 낙론(洛論) 계열 산림이자 학자였다. 과거에 응하지 않고 스승인 김창흡(金昌翕) 아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조선 후기 인성과 물성에 대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의 이론가로서 활발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가 이길보(李吉甫)에게 쓴 편지에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내용으로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후에 이재(1680-1746)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이재는 김창협의 문인으로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며,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심정진은 <제미호선생문(祭渼湖金先生文)>에서 사도의 도통을 논하면서 중국에서는 맹자 이후로 이정과 주자를 들고 동방에서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을 이어서 도암 이재를 들 정도로 추숭의 일념과 스승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자는 일지(一志)이고 호는 제헌(霽軒)이다. 아버지는 사증(師曾)이며 박세채(朴世采)가 박태두의 작은아버지뻘 되는 종숙이다. 집안이 대대로 서인 노론계에 속하였다.

1753년(영조 2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758년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74년에 다시 부수(副率)로서 세손인 정조를 보살폈고, 특히 경학에 뛰어나 강설(講說)이 좋았다는 칭송을 받았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중부도사(中部都事), 호조좌랑을 거쳐 회덕현감에 부임하여 송준길(宋浚吉)이 만든 향약을 이곳 주민에게 시행하여 백성들의 교화에 노력하였다. 1781년(정조 5) 병으로 사직한 뒤에는 향약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송준길이 만든 향약을 다시 다듬어 전국적으로 실시할 것을 상소한 바 있다. 1783년에는 다시 복직하여 호조좌랑이 되고 이어 제용감판관·송화현감을 지낸 뒤, 1785년에는 사어(司禦)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심정진의 인물성동이론은 학계에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의 문집인 <제헌집>에 기록된 인물성동이에 대한 논설들을 통하여 낙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예리한 논리들을 만날 수 있다.

<天命之謂性說>에서

‘사람들이 대동(大同)의 성(性)이 리인데 이는 만물에 품부되기 이전으로서 같은 것이고, 본연의 성은 만물에 이치가 품부된 후로 다르다고 하는데 이는 내 생각과 갈리는 핵심 지점이다. 기질에 섞이지 않는 본연의 성이 어찌 대동의 성이 아니란 말인가? 이미 본연이라고 했으면 품수 받기 이전과 이후의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당시 호론에서 성삼층설에 기반하여 초형기의 대동지성과 인기질의 본연지성을 구분하는 논리에 대하여 낙론의 입장에서 반박하고 있다.

<미호선생언행록(渼湖金先生語錄)>에서는 호락논쟁에 대한 미호의 견해를 알 수 있는 문답이 들어있으며, 그 중에는 진정한 공부에 대한 사제 간의 대화도 들어있다.

‘어느 날 정진(심정진)이 혼자 있을 적에 선생(김원행)이 옛날의 학자들로 가령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스승과 주고받은 논의는 모두 위기지학의 학문으로 인애, 효제, 덕을 닦고 사특한 것을 제거하는 것에 관한 것들이었다. 후세에 문의의 의미를 강설하는 공부와는 차이가 있다. 문의를 따지지 않을 수는 없지만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무엇을 배우고자 했는지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

이는 호락논쟁이 단지 이론적인 지적 놀음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려준다고 할 것이다.

저서로는 <제헌집>이 있다.

신헌(申櫶, 1810-1884)


신헌(申櫶, 1810-1884)                                           PDF Download

 

산신씨는 조선에 상신 8명, 대제학 2명, 판서 20여 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는데, 대부분 문희공파, 정언공파, 사간공파에서 나왔다. 이 중에서도 정언공파는 영의정 신흠(申欽)을 중심으로 하는 문신집안이고, 문희공파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신립(申砬)을 중심으로 하는 무신집안이다.

신헌은 초명이 관호(觀浩)이고 자는 국빈(國賓)이며 호는 위당(威堂), 금당(琴堂), 우석(于石)이다. 할아버지는 훈련대장 신홍주(申鴻周)이며 아버지는 부사 신의직(申義直)으로 전형적인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신헌은 유장(儒將)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과 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다양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이면서도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또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姜瑋), 박규수(朴珪壽) 등과 폭넓게 교유하여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갖고 있었다.

1827년(순조 27) 할아버지 신홍주의 후광을 업고 별군직(別軍職)에 차출되었다가 이듬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헌종 때에는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봉산군수,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녹도(鹿島)에 유배되었는데, 철종의 배려로 1857년에 풀려났다.

철종 대에는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다음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그 뒤 어영대장, 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 진무사(鎭撫使)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해의 요해지인 광성(廣城), 덕진(德津), 초지(草芝) 3진(鎭)에 포대를 구축해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운양호(雲揚號)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는 판중추부사로 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개항 정책을 취하게 되어 점차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불평등조약이었기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조약은 위정척사 세력과 개화 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의 협상 전말을 신헌은 『심행일기(沈行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유장으로서의 신헌의 면모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정약용의 민간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켜 <민보집설(民堡輯說)>, <융서촬요(戎書撮要)> 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하여 자신의 국방론을 집대성시켰다. 또한 김정희로부터 금석학(金石學), 시도(詩道), 서예 등을 배워 현재에는 전하지는 않지만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이라는 금석학 관계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예서(隷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제작에 조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유산필기(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농법에도 관심을 가져  <농축회통(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843년(헌종 9) 전라도우수사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說)>, <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器械圖說)> 등을 지었고, 수뢰포, 마반포차, 쌍포합이 등 신무기 개발을 주도하였다.

신정하(申靖夏, 1681-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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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협의 문인이다. 김상헌의 증손자로 숙종의 묘정에 배향된 김창협은 낙론의 거목으로 도학과 문장에 출중하였는데, 신정하의 문집은 적은 편수지만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글들이 빼곡하다. <제농암선생문(祭農巖先生文)>에서 신정하는 김창협이 범순부의 경학, 구양수의 문장, 주자의 의리(철학)를 한 몸에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였는데, 스승에 대한 존경과 긍지의 소회를 충분히 살필 수 있다.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자는 정보(正甫)이고 호는 서암(恕菴)이다. 증조부는 신준(申埈)이고 조부는 신여정(申汝挺)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신완(琓)이다. 어머니는 황해도관찰사 조원기(趙遠期)의 딸이며 신유(申瑜)에게 입양되었다.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설서(說書)·부교리 등을 역임한 뒤, 1715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적에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발간하면서 발문을 쓴 정호(鄭澔)가 윤증(尹拯)을 비난한 일 때문에 윤증·유계의 제자들 사이에 일어난 소송사건에 연루되었다.

일찍이 효종 때 유계(兪棨)가 주자의 <가례>에 단마다 해석을 붙여 <가례원류>를 편찬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1713년(숙종 39)에 당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또 저자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있으면서 간행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간행하지 못하고, 이 실정을 왕에게 고하여 마침내 1715년에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을 추가하여 출간되었다. 그런데 정호의 발문 가운데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등지고 당쟁을 조장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정계에 파문을 크게 일으켰다.

신정하의 부친 신완은 박세채와 윤증의 문도인 관계로 그도 애초에 비판의 입장에 섰다가, 후에 숙종 42년에 올린 상소문에서는 <가례원류>의 서론과 발문을 쓴 권상하와 정호를 벌 줄 것을 주장한 소론 이진유의 부당함을 누차 상신하고, 유상기의 귀양과 유봉오의 정거를 철회할 것을 청한 것으로 인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했다.

이전에 사헌부에서 관작 삭탈을 주청한 소장에

“전 헌납(獻納) 신정하(申靖夏)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외손으로서 전에 그 자손들과 함께 변명하는 상소에 참여하였는데, 저번에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한 소(疏)를 바친 것은 그 존앙(尊仰)하는 정성이 도리어 전에 원수로 여기던 곳에 있으므로, 마침내 스스로 도리에 어긋나는 지경에 빠졌으니,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하소서.”

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신성하의 입장이 전후로 변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관이 이를 두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고, 신정하(申靖夏)는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신정하(申靖夏)는 고(故) 상신(相臣) 신완(申琓)의 아들인데, 젊은 나이에 청요직(淸要職)에 올랐으며 평소에 뜻이 고요하고 소박하며 문장에 능하여 명망이 자자했는데, 한 번의 상소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파직당하고 배척당하여 얼마 안 되어 죽으니, 한때의 명류(名流)가 모두 매우 아까워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해동가요(海東歌謠)> 등에 시조 3수가 전하는데 그 중 박세당의 아들로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치는 것을 극간하다가 장살당한 박태보를 기린 시조가 있다.

“간사(諫死)  박파주(朴坡州) ㅣ 야 주그라 셜워마라, 삼백년(三百年) 강상(鋼常)을 네 혼자 붓들거다. 우리의 성군(聖君) 불원복(不遠復)이 네 죽긴가 노라.”

무슨 의미인가 하면, 충간하다 죽고만 전 파주부사 박태보여 서러워 마시게. 조선의 강상을 오직 그대만이 붙들고 지켰네. 어진 임금 오래지 않아 다시 왕후를 불러들인 것은 필시 그대의 죽음으로 그리된 것일세.

저서로는 <서암집(恕菴集)>이 있다.

신익전(申翊全, 1605-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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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4대 문장가의 한 명이요,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인조 묘정지신의 한 명인 상촌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자는 여만(汝萬)이고 호는 동강(東江)이다.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절도사 제신(濟臣)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국조인물고>에 박세채가 쓴 신익전의 <비명>이 실려 있는데 내용이 상세하다. 신익전은 어려서부터 이미 순박하고 성실하여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열 살 때에 시골에서 부친 신흠을 모시고 있을 적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방문하여 그가 어른처럼 응대(應對)하고 주선(周旋)한 것을 보고 누차 장려(獎勵)하였는데, 이때부터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송독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태극도(太極圖)의 부권(副圈)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요, 양 가운데 음이다.”

하니, 신흠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한다.

1628년(인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郎)이 되고, 이어 검열·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청나라 사신이 와서 “신익전과 그의 큰형인 신익성(申翊聖)이 명나라를 도울 뜻이 있었다.” 하여 몇몇 재신(宰臣)들과 함께 끌고 간 것이다. 큰형 신익성은 호란(胡亂)을 당했을 때 의리(義理)를 세움이 매우 컸고, 삼전도(三田渡)에 비(碑)를 세울 때에는 비에 전서(篆書) 글씨 쓰는 것을 힘써 거절하였다. 신익전은 최명길(崔嗚吉)과 함께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지낼 적에 매우 기휘할 만한 말을 주고받았는데, 당시 이계(李烓)가 청나라의 포로(捕虜)로 잡혀가서는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사람들까지 무함(誣陷)하였다. 신익전이 이계의 간악함을 말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와서는 부응교·사인(舍人)·사간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1639년에는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효종 때 호조·예조·병조의 참판 등을 지내면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한성부의 우윤과 좌윤을 거쳐 도승지에 이르렀다.

지방관으로 나가 선정을 많이 베풀었는데,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을 적에,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곳이 아마도 내가 신명을 바칠 곳이리라.”

하고 숨은 장정을 모두 찾아내어 여러 군대의 궐원(闕員)을 보충하고 경내(境內)를 독려하여 기한 내에 조적(糶糴, 환곡(還穀)을 꾸어 주고 받아들이는 일)의 환곡(還穀)을 수납케 한 것이 거의 수만 곡(斛)이었는데도 감히 뒤지는 자가 없었으며, 죽었거나 딴 곳으로 이사하여 절가(絶家)된 경우가 있으면 번번이 모곡(耗穀, 소모될 것을 감안해서 더 받는 곡식)으로써 상환케 하고, 학교를 세워서 제생(諸生)들을 모아 학업을 장려하여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으므로 돌아올 때에는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한다.

인조를 이어 즉위한 효종 2년에 김자점의 옥사에서 조귀인(趙貴人)과 김자점(金自點)이 사사되는 상황에서 신익전은 그의 형세가 혐의쩍고 처지가 가까워서 자칫하면 위험한 의심을 받을 뻔했지만 끝내 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논자들이

“이때에 능히 충신으로서 스스로를 보전한 이로는, 공이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다.”

하였다. 이시백은 그의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았다.

박세채가 이를 두고

“만일 쉬움과 어려움을 따진다면 또 분별할 바가 있으니, 이는 어찌 공이 평소에 겸공(謙恭)하고 근확(謹確)했던 증험이 아니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라고 평하면서 신익전의 평소 행실을 밝히길,

“염정(恬靜)을 숭상함에 뜻을 두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왕실(王室)과 인척 관계를 맺기에 미쳐서는 더욱 삼가하여, 비록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담담하기가 마치 초야(草野)에 거처하고 공허(空虛)한 데로 도피하는 것 같았으며, 기미(幾微)를 보고 간략함을 지켜 한결 같이 옛 전적(典籍)에 종사하였으므로, 무릇 속세의 현회(顯晦)ㆍ장부(藏否)는 족히 그의 마음을 얽매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

주역』을 애독하여 깊이 연찬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유집』 19권 3책이 있다.

신응구(申應榘, 1553-1623)


신응구(申應榘, 1553-1623)                                PDF Download

 

혼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특히 성혼을 위한 신원에 적극적이었다. 김상헌이 신응구 묘갈명에서

“성 문간공(成文簡公)이 가문에 전래된 정대한 학문으로 우계(牛溪) 위에서 학도들을 가르쳐 성취한 제자들을 쉽게 다 셀 수 없었는데, 공자(孔子)가 이른 것처럼 문인이 더 친근해졌다는 것에 접근한 자에 있어서는 고령(高靈) 신공(申公)이 가장 선배라고 하겠다.”

라는 평가는 여실하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자방(子方)이고 호는 만퇴헌(晩退軒)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벌(橃)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의형(義衡)의 딸이다.

1580년(선조 13)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천거로 장원(掌苑)이 되었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관계에 들어가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충주목사, 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고,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형조참의·동부승지·좌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신응구의 묘갈명은 김상헌이 만년에 쓴 내용인데, 글 중에

“나는 공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장년에 이를 때까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일찍부터 기풍을 사모하였는데, 3대 동안 서로 주선하며 백여 년을 지내왔으므로 공이 나를 알아준 것이 기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스스로 공을 안다고 여기었다.”

라는 대목을 보건대, 신응구를 잘 알려주는 글로 사료된다. <인조실록>에 실린 신응구의 <졸기>가 폄하의 뜻이 비취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김상헌은 명문에서 신응구의 삶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의 모습을 바라보니, 한 겨울의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고 공의 중심을 살펴보면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어 얼음이 녹듯이 화평했도다. 약관(弱冠)에 향양(向陽)의 마을에 찾아가 배워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니,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를 따른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세상에 어려움을 만나 조금만 시험해 보고 항상 곤궁하게 살았도다. 하늘에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결국 창생의 한을 남기었도다. 아! 매우 슬프도다!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었다는 것은, 앞서 최유원(崔有源) 등이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이 반역을 꾀하였다고 고변하였지만 실상이 매우 모호하였기 때문에 공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끌어넣어 후일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신응구를 빙자하여 말하고 공신록(功臣錄)에 기록하였다. 이는 신응구가 전에 두 번이나 광해군의 사부를 역임한 적이 있었음도 고려한 조치였다. 신응구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누차 상소를 올려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가 아들에게 유서(遺書)를 써서 주었는데, 그 유서에 ‘내가 죽은 뒤에 공신록에 나의 이름이 그대로 있을 경우에는, 장사를 치를 적에 곧바로 담당자에게 반드시 사양의 의사를 관철시켜 나의 뜻을 밝히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로 하여금 지하에서 거듭 죄를 짓게 할 것이다.’는 대목에서 여실히 보인다.

한 겨울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다는 그 기상은, 김상헌이

“공이 젊어서부터 중대한 명망을 지니어 자신감이 적지 않았다. 대체로 공의 재주와 견식이 과감하고 민첩하여 고상한 의논이 종횡으로 넘쳐흘렀으므로 필시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공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매우 뚜렷한 견해가 있다고 여기었으므로 세상에 행세할 적에 꺼리는 자와 인정하는 자가 얽히어 평소 쌓은 바를 펼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한 사람들이 너나없이 매우 애석해 하였다.”

라는 대목에서 밝히고 있으며, 글의 말미에 “아 슬프도다.”라고 왜 했는지도 대략을 가늠할 수 있겠다.

저서로는 『만퇴집』이 있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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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순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형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며 스스로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9세조인 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조선유학사에서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형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자결하였고 동생 송병순은 1910년 경술국치 후에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억누르다가 마침내 1912년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두 형제가 유학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국권을 빼앗김에 분연히 일어나 순국하였으니 가학이요 학통을 계승한 것이 이와 같았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동옥(東玉)이며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다. 형 송병선과 함께 큰아버지 송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으며, 송달수의 사후에는 작은아버지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이는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이다.

1865년(고종 2)에 서원 철훼령이 내려 만동묘가 헐리게 되자 춘추대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훼손하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만동묘는 송시열이 유명으로 수제자 권상하에게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낼 사당을 건립하라고 하여서 세워졌다. 1865년(고종 2년) 조정에서는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를 철폐했다가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이듬해 왕명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그러다 1907년에는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우고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폐철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킨다. 이런 상황에서도 1910년 송병순(1839∼1912) 등이 존화계를 조직하여 제사를 이어가는 등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이어졌으나,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으로 영영 끊기게 되었다. 여기서도 송병순의 존화양이의 춘추의리 정신을 잘 알 수 있다.

1888년(고종 25)에는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지 않는 등 칩거하였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향약을 보급하여 향인을 교화했으며,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정(自靖)의 생활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만 전념하였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영동군 학산면 활산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 해 9월 5일 강당 위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살하려고 하였다. 그 때 마침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실패하자, 그 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 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독서만집(讀書漫錄)』, 『학문삼요(學問三要)』, 『사례축식(四禮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 『주서선류(朱書選類)』 등이 있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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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며 스스로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이는 조상의 의리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화옥(華玉)이며 호는 연재(淵齋)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대전시 회덕(懷德)에서 출생하였으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고, 송병순(宋秉珣)은 그의 동생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그는 송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작은아버지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이는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이다. 송달수는 조선후기 성리학계를 이분하였던 호락논쟁에만 매몰되지 말고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본연의 연구에 매진할 것을 강조한 순수 학문적 입장을 강조했고, 송근수는 1882년 좌의정 재임 시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였다.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송병선이 ‘전통질서 중의 하나인 복제를 함부로 바꿀 수 없음’을 역설하면서 위정척사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이 또한 그가 계승한 가학 및 학통의 전통이다.
송병선은 국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선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세를 이루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자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이를 위하여 유림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탱해 온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전파하고,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면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었다. 1867년 옥천 이지당(二止堂)에서의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기국정, 고암서당 등지에서 강회를 개최하고, 성주의 노강 등지에서 향음례를 행하고, 무주 구천동의 서벽정을 중건하여 강학하기도 하였다.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이는 성리학의 정진, 언로의 개방, 국가정통성 확립, 국가기강 확립, 재정절약, 인사정책 일신, 조세경감, 왜세 척결 등 8가지 현안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1조와 8조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대의를 밝히고 있는데, 위정을 위해서는 성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여 국왕으로부터 철저히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전 국민이 사상적으로 절대 동요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척사의 대상으로는 왜(倭)와 사교(邪敎)를 꼽고 있는데,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시각에서 일제를 비롯한 서구사상 일체에 대한 척결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여기서 송병선은 각국 공사관에 우리정부의 입장을 표명할 것과 외국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봉사의 핵심은 무엇보다 일제에 맞설 수 있도록 내수를 급히 정비하고, 군사력을 양성하여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자는 것이었다.
그 후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당시 일제는 송병선의 서울 상경, 국왕 면담, 선생을 추종하는 제자그룹 등을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고 판단하였다. 12월 28일 대전으로 압송되어 온 다음날 송병선은 70세의 노구로 조국을 위하여, 후세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다가 끝내 유소(遺疏)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상소이자 제자들에 대한 행동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음독한 후, 후손과 제자들을 모아 ‘도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마지막 유지와 함께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과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