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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의 관작 회복


성혼의 관작 회복.

 

1623년(인조 1년) 3월 25일,(『인조실록』의 기록)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예조판서에 임명된 이정구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올렸다.

“기묘사화를 겪은 후부터 사람들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성혼(成渾)이 차분히 학문하여 사림의 창도자가 되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유일(遺逸, 초야에 묻힌 재능 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로 발탁하여 참찬(參贊)을 제수하기까지 하시니 높이고 권장함이 극진하였습니다. 뒤에 정인홍의 무고(근거 없는 고발)를 입어 관직을 박탈당함에 이르렀으므로 사림(士林, 유학자들)이 지극히 분노하였습니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 11월(음력)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다.
이정구는 정철,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장생과도 친분이 깊었으며 서인에 속하는 정엽(鄭曄)과도 가까운 사이였다.(오세현, 『월사 이정구의 문한활동과 학통의식』,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004, 국문초록 참고) 이 때문에 율곡과 우계 성혼이 사망한 뒤 서인측 선비들이 율곡과 성혼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서인의 학통을 정비하는데 이정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정구는 또 율곡과 성혼의 행장을 짓고 시호를 요청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이보다 9일전, 즉 3월 16일에 예조 판사에 임명되어 인조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있었다.
이정구의 발언을 듣고 인조 임금이 이렇게 물었다.

“정인홍의 탄핵이 언제 있었는가?”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대북파의 영수였다. 광해군이 이 해(1623년) 실각하면서 처형당했다. 인조는 80세 이상의 재상은 처형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그를 참형에 처한 바 있다.
임금이 탄핵시기를 물은 것은 어느 왕 때의 일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정구가 이렇게 답하였다.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에 있었습니다. 근래에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선비의 풍습이 혼란한 것이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3월 16일 대사헌에 임명된 오윤겸이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인홍의 탄핵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성혼이 일찍이 정인홍의 옳지 못한 점을 말하였고, 또 최영경(崔永慶)의 처신이 옳지 못함을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못하는 짓이 없이 모함하였습니다. 최영경이 죽음에 이르자 성혼 또한 원통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아들 성문준(成文濬)을 시켜 위문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어려서 부터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였기 때문에 그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혼은 곧 이이(李珥)의 친구입니다. 이이와 성혼은 이황(李滉) 이후 일인자로서 그 학문을 펴지 못하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으니 애석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성혼의 제자 오윤겸은 이이와 성혼을 나란히 언급하면서 두 사람은 친구사이이고, 퇴계 이후 학문의 일인자라고 소개하며 그들이 학문을 펴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애석해하였다.
이에 이정구는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선조 임금 즉위 초에 특별한 예우를 받고 심지어 임금 스스로가 이이와 성혼의 당(黨, 즉 서인당)이 되고 싶다는 하교(임금의 말씀)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동인들의) 당론으로 쫓겨나 영원히 뜻을 펴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근래 유학자로서 학문의 올바름에 이이와 성혼 같은 이가 없으니, 국가에서 의당 사제(賜祭, 임금이 칙사를 보내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 줌)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기에 아룁니다.”

이러한 건의를 듣고 임금이 말했다.

“성혼이 죄를 입은 것은 선왕조의 일이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다.”

정인홍이 성혼을 탄핵한 것을 결국 선조 인금의 결정에 따른 일이니 인조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결정한 사항을 자신이 뒤집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만약 광해군 때였다면 인조가 그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윤겸이 임금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임금께서) 새로 즉위하신 때라 좋고 나쁨을 분명히 보여주셔야 합니다. 시비를 잘 살펴 조처해야지, 어찌 선왕조 때의 일이라 하여 망설이실 수 있겠습니까.”

예조판서 이정구가 대사헌 오윤겸의 말을 거들었다.

“선왕조(선조 임금시기)때는 초기에 즉시 명묘조(明廟朝, 명종 때)의 위훈(僞勳, 잘못된 공훈. 잘못 지정된 공신 칭호)을 혁파하였으니, 이것 또한 선왕 때의 일이 아니었습니까? 오직 일의 시비에 달렸을 뿐입니다.”

시비를 따져서 옳으면 추진하면 되는 것이지 선조 임금이 결정한 사항이라고 하여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에 인조는 다음과 같이 성혼에 대한 복권을 허락하였다.

“공론이 이와 같다면 그 관작을 회복하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기록을 하던 사관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견을 덧붙여 놓았다.

“성혼은 자질이 순수하고 태도와 행실이 확고하였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계를 받아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도덕의 완성을 추구하는 학문)에 전심하였고, 또 이이와 사귀어 절차탁마의 도움이 있었다. 학문과 실천의 성과를 함께 이루었고, 평소의 언행이나 집안을 다스리는 예법을 한결같이 『가례(家禮)』(주자가례)와 『소학(小學)』에 의해서 행하였다. 파산(坡山)에 은거하여 영달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생을 마치려 하였는데, 선묘(宣廟, 선조임금)께서 그 명성을 듣고 여러 차례 초빙하여 은총과 예우가 극진하였다.”

성혼에 대한 이러한 우호적인 평가는 물론 사관이 서인이거나 서인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파산은 파주 파평면에 있는 산으로 현재 이곳 파평면 눌노리에는 파산 서원이 있다. 파산 서원 뒤편에 경사가 가파른 파산이 있으며 서원 앞으로 우계(牛溪)가 흐르는데 지금은 눌로천(訥老川)이라 부른다.
파산서원은 동쪽으로는 감악산이 우뚝 솟아있고 맞은편에는 파평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작은 마을 파평면 눌노리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뒤편 파산(坡山)은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앞으로는 우계(牛溪, 소 개울)가 흐르는데 우계는 현재 눌로천이라 불리며 임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혼의 호가 우계인 것은 바로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선조가 성혼을 자주 부르게 된 것은 율곡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관은 이어서 성혼이 억울하게 탄핵을 받고 결국에는 복권을 하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신묘 사화(辛卯士禍, 1591년 선조 24년에 일어난 사화)가 일어나자 평소 성혼이 정철(鄭澈)과 친했다는 이유로 연좌되었고, 최영경의 죽음을 구제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한 다른 당의 지목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께서 임진강에 이르러 성혼의 집이 이곳에서 어디쯤인가 하고 그 원근을 물었을 때 이홍로(李弘老)가 망령되게 근처 강변의 민가를 가리켜 (거짓으로) 대답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격발하기도 하였다.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 정인홍이 그 무리를 사주해 상소하여 지난 일들을 들추어내며 불측하게 모함함으로써 끝내는 관작이 박탈되기까지 하였다.
앞서 최영경이 옥에 갇혔을 때 성혼이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매우 강력하게 구제하니, 정철이 조정에 들어가 임금께 최영경의 구제를 간곡하게 건의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상(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뒤에 와서 도리어 (동인들이 성혼이) 최영경을 모함한 것이라고 죄목을 만들었으니, 이는 군소배(群小輩,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들)가 평소 성혼의 높은 명망을 시기하여 반드시 모함해 해치고자 한 것이다.
성혼이 선조임금과의 만남에서 유종의 미를 보지 못한 것 역시 임금께서 이홍로의 거짓된 보고에 현혹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림(유학자들)이 몹시 애통해 하였고, 태학(太學, 성균관)에서는 여러 차례 상소하여 그 원통함을 호소하기까지 했으나 다 반응이 없었다. 이제 와서 드디어 인조 임금께서 복관을 명하고 이어 제사를 내리며 시호를 주었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축하하였다.”

사관의 이러한 평가는 선조 35년(임인년), 즉 1602년 성혼이 탄핵을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당시 사헌부는 동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정철은 천하의 간흉인데, 성혼이 정철과 교분이 깊고 정이 친밀하여 한 몸이 되었으니 모든 모의에 참여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경인년(1590년, 선조 23년) 무렵에 정철이 사방으로 통문을 보내어 쌀과 포목을 수합하여 성혼의 아비 성수침(成守深)의 청송당(聽松堂)의 옛터에 큰 집 한 채를 지어놓고는 정철이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날마다 모여서 성혼의 지휘를 들으며 흉모를 자행하였으니, 성혼은 곧 정철의 모주(謀主, 모의를 꾸미는 두목)입니다.
또 신묘년(1591년 선조 24년) 무렵에 정철이 강계(江界)로 귀양갈 때는 성혼이 파주(坡州)로부터 송도(松都)에까지 따라가서 이틀 밤을 함께 자며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임진년에 적(왜군)이 경성에 접근했을 때는 성혼은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하로서 경기의 하룻길 거리에 있었는데도 변란의 소식을 듣고 달려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가(大駕, 임금을 모신 가마)가 그가 사는 곳을 지나갈 때에도 나와서 뵙지 아니하였으니, 간사한 인간(정철)의 편을 들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이에 이르러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비판을 받았던 성혼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제자들과 지인들 덕분에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율곡은 그러한 성혼의 친구로서 성혼과 나란히 새로운 조정의 권력자들이 존경하며, 칭송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복직과 복권


복직과 복권.

 

조 1년(1623년) 3월 16일의 일이다.

“김장생(金長生)을 장령(掌令)에 임명하였다. 김장생은 타고 난 자질이 훌륭하고 순수하였다. 일찍부터 이이(李珥)를 사사하면서 학문에 침잠하여 당대의 대유(大儒)가 되었다.
계축옥사 때 그의 동생 두 사람이 고발을 당하니, 광해군(전 임금)이 반역을 고발한 자(박응서 – 필자주)에게 친히 이렇게 물었다.
‘김모(金某, 김장생)도 미리 알고 있었는가?’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김모는 현인이라, 저희들의 모의를 그가 들어서 알까 염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장생은 죄에서 벗어나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뒤 두문불출하고 부지런히 학문을 강론하니,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의 선비들이 모두 높이 추앙하였다. 이때에 와서 맨 먼저 헌직(憲職, 사관헌의 관직 즉 장령)으로 불러들였다.”

『인조실록』1권, 인조 1년(1623년) 3월 16일자 다섯 번째 기사에 실린 기록이다. 김장생을 사헌부의 장령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워 나중에 대유학자가 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장령(掌令)’이란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4품 관직이다. 사헌부(司憲府)는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으로, 지금의 감사원에 해당한다. 정치를 살피고 관리들을 규찰하는 직책이다.
김장생(金長生, 1548년 〜1631년)은 나중에 문묘에 종사된 인물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대유학자의 반열에 든 사람으로 『인조실록』의 ‘대유(大儒)’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예학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그 아들 김집(金集)은 이를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김장생이 철원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1613년(광해군 5년)에 계축옥사(癸丑禍獄) 사건이 발생했다.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 등이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범인 일당들이 모두 서얼(庶孼)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적서 차별을 폐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상소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무륜당(無倫堂)을 만들고 화적질을 일삼았다.
당시 대원군 밑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 관리들은 그들이 반란을 모의했다고 조작하였다. 그들은 역모를 일으켜 영창대군(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으로, 계모 인목왕후의 아들)을 옹립하려고 하였으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가담했다고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때 김장생의 서제(庶弟, 서자 동생)인 김경손(金慶孫)과 평손(金平孫)의 이름도 거론되어 그 역시 역모의 의심을 받았다. 당시 그 동생들은 모두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김장생도 체포되었는데, 심문 과정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앞에 소개한 『인조실록』의 기록에는 당시 임금이던 광해군이 직접 심문에 참여하여 반역을 고발한 자에게 김장생도 관계하였는지 물었으며, 심문을 받던 자는 박응서였다. 박응서는 우호적인 답변으로 김장생은 위기를 모면하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대원군이 권좌에서 끌려 내려오고 정권을 잡고 있던 북인의 대북파 관리들이 물러나자 그 자리를 서인과 남인들이 차지하였다. 이들이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대원군을 몰아내는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조가 즉위한 직후에 공신들에 대한 사례가 추진되었고 대원군 시대에 배척 받았던 많은 관리들이 복권되었다.
고향에 내려가 있던 김장생 역시 복권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상소문을 올려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다만 임금을 위하여 반정(구데타) 공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임금을 잘 보좌할 것, 민생을 구제할 것, 폐주(광해군)의 생명을 보전할 것, 옥사를 삼갈 것, 인재를 수용할 것, 기강을 진작시킬 것, 공도(公道, 바른 도리 혹은 정의)를 넓힐 것, 탐욕의 폐풍을 혁신할 것 등을 간곡히 경계하였다.
김장생은 어렸을 때, 처음에 구봉 송익필(宋翼弼, 1534년∼1599년)에게 예학을 배웠다. 송익필은 서얼 출신으로 나중에 환천(還賤, 양민의 자격을 잃고 천민으로 돌아감)의 위기에 처했으나,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가 그를 10여년간 먹여 살린 적이 있다. 송익필 외에도 김장생은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이날 『인조실록』의 김장생 관련 기록에는 김장생의 스승으로 오직 율곡만 거론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이 다시 권력을 잡음으로써 율곡의 지인들이나 제자들이 다수 중앙의 권력 있는 자리에 속속 배치되었다.
3월 16일자로 김장생과 같이 복권된 인물 몇 사람의 기록을 소개한다.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이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앞선 조정 때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온 나라 사람들의 중망(重望, 큰 기대)을 받았다. 혼란한 시절 임해군(臨海君, 선조의 장자이며 광해군의 친형)의 옥사 때 맨 먼저 은혜를 온전히 하는 의리로 그 일의 부당함을 개진하였고, 폐모론(廢母論,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이 한창일 때에 또 상소문을 올려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힘껏 개진하였으므로 흉도들(광해군 당시 집권세력인 대북파)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시골마을로 귀향해 있었다.”

이원익(1547년〜1634년)은 율곡(1536년〜1584년)보다 11살 어리다. 17살의 나이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그는 율곡이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선조 7년, 1574년경), 율곡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일을 잘 처리하여, 율곡의 눈에 들었는데, 율곡의 추천으로 1576년 정언이 되었으며, 1578년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이후 선조시대에 그는 우의정과 영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광해군 때에도 초기에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는 인품이 곧았으며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불필요하게 사람을 사귀거나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율곡은 이러한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자기보다 11살이나 어리지만 존경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원익은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정여립의 옥사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남인의 편에 섰다. 학문적으로 남명 조식을 따르던 사람들은 북인으로, 퇴계 이황을 따르는 사람들은 남인으로 모였다. 광해군 때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 하다가 집권파인 대북파에 밉보여 유배를 당했었다.

같은 날 『인조실록』에는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의 복직 기사도 실렸다.

“오윤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오윤겸은 그 사람됨이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온화하였다. 일찍부터 성혼(成渾)의 문하에 수학하여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성혼이 자주 칭찬하였다. 또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고상한 지조를 지녀 이국인들이 또한 존경하였다. 경신년 이후에 중국에 갈 때는 해로를 이용하였는데, 사신을 보낼 때면 사람들이 모두 기피하였다. 그러나 오윤겸은 사명을 받은 즉시 출발하였으므로 광해군이 이를 가상히 여겨 ‘신하가 된 자의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주위에 권장하였다.”

오윤겸은 우계 성혼의 제자였다. 1602년(선조 35년) 성혼이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스승을 변호하다가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쫒겨 났다가 그 뒤 7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때는 다시 서울로 들어와 호조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광해군 아래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정인홍을 탄핵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으나 계축옥사 사건이 일어나 정계가 혼란해지자 부모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여 외지로 나갔다.
그는 1617년에는 일본 파견 사절단의 정사로서 400여 명의 인원을 이끌고 일본에 가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구해오기도 했으며, 1618년 북인들이 인목대비 폐모론을 제기할 때는 이를 반대하다 탄핵을 받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1622년는 다시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단에 선발되어,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당시 육로는 여진족의 후금에 의해서 봉쇄되어 있었다. 광해군이 그를 칭찬한 것은 그러한 어려움을 피해서 명나라에 잘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 성혼은 성리학에 일가견이 있었던 부친 성수침(成守琛)에게 글과 성리학을 배우고 휴암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당시 같은 고을 파주에 살던 율곡도 백인걸에게 글을 배웠는데 두 사람은 이때부터 동문으로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서로 동문, 동창 관계이다.
한편 성혼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대신 학문 연구에 뜻을 두었는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을 찾아가 사물의 이치 등을 논하기도 하였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에 깊이 감동하였다. 성혼의 이러한 태도가 오윤겸에 영향을 미쳐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탄핵하였던 것 같다. 오윤겸은 1623년 대사헌에 임명된 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위에 소개한 인물들 외에도 서성(徐渻), 정경세(鄭經世), 이수광(李睟光), 박동선(朴東善), 김덕함(金德諴), 윤지경(尹知敬), 조정호(趙廷虎), 정온(鄭蘊), 엄성(嚴惺) 등이 복권되거나 복직되었다. 이들은 대개가 광해군 시대 때 탄핵을 받고 쫓겨났거나 탄압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조정의 율곡 이야기


조정의 율곡 이야기.

 

인조실록』에는 다른 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대화들이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임금을 둘러싼 고관들의 대화, 그리고 각 기관에서 올라오는 상소문, 상주문(보고서)들이 편년체로, 즉 일자별, 시간별로 소개되어 있다. 그 기록 가운데 율곡 이이(李珥)가 언급된 기사는 모두 62건이 있다. 그 기사들을 연도별, 일자별(음력)로 간략한 내용(대화의 주제)과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인조 1년(1623년) 3월 16일: 이원익·이정구 등 관직 임명
2)인조 1년(1623년) 3월 25일: 성혼의 관작 회복
3)인조 1년(1623년) 3월 27일: 이이의 문묘 종사 논의
4)인조 1년(1623년) 5월 7일: 서북 인재의 등용 등 논의
5)인조 1년(1623년) 5월 7일: 사묘(私廟)에 대한 전례 논의
6)인조 1년(1623년) 5월 29일: 김장생·장현광·박지계를 임명
7)인조 1년(1623년) 6월 12일: 유공량에게 형편을 물음
8)인조 1년(1623년) 7월 6일: 사우(師友)의 도에 대하여 논함
9)인조 1년(1623년) 윤10월 28일: 주강에 『대학』을 강함
10)인조 1년(1623년) 11월 2일 : 춘천 부사 신응구의 졸기
11)인조 2년(1624년) 3월 21일: 붕당의 제거와 대간의 폐를 논함
12)인조 2년(1624년) 5월 15일 : 가뭄 대책을 논의함
13)인조 2년(1624년) 8월 9일 : 붕당의 폐단 등에 대해 논함
14)인조 2년(1624년) 9월 6일 : 이귀가 대관 교체의 취소를 건의함
15)인조 2년(1624년) 10월 11일 : 어영청의 군사조직과 조련법 개선 논의
16)인조 2년(1624년) 10월 22일 : 이이 등의 서원 사액에 대한 논의
17)인조 3년(1625년) 2월 22일 : 이이와 성혼의 문선왕묘에 종사 청원
18)인조 3년(1625년) 3월 11일 : 변법에 관하여 논의함
19)인조 3년(1625년) 3월 25일 : 특진관 이귀의 건의
20)인조 3년(1625년) 4월 11일 : 전 대사헌 정엽의 졸기.
21)인조 3년(1625년) 8월 8일 : 왕의 마음의 공부를 간청함
22)인조 3년(1625년) 8월 26일 : 대간 포용 등에 대해 건의함
23)인조 4년(1626년) 5월 7일 : 국경 방어에 대한 계책 건의
24)인조 6년(1628년) 5월 5일 : 당쟁의 폐를 논함
25)인조 7년(1629년) 3월 18일 : 이귀의 건의 등
26)인조 7년(1629년) 3월 21일 : 임금이 『서전』의 내용을 물음
27)인조 7년(1629년) 윤4월 12일 : 이귀가 3권의 책을 만들어 올림
28)인조 7년(1629년) 5월 6일 : 임금이 『서전』을 강하고 그 내용을 물음
29)인조 7년(1629년) 7월 23일 : 속오군의 충원 등을 논함
30)인조 7년(1629년) 10월 17일 : 『격몽요결』을 인쇄하여 올림
31)인조 8년(1630년) 1월 23일 : 속오군 등 국정에 대해 논의함
32)인조 8년(1630년) 1월 27일 : 낭관, 왕세자 책봉 등에 관해 논함
33)인조 8년(1630년) 9월 7일 : 강릉 유생들이 서원 사액을 건의함
34)인조 8년(1630년) 10월 30일 : 주강에 『서전』을 강의함
35)인조 9년(1631년) 8월 9일 :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의 졸기
36)인조 9년(1631년) 10월 17일 : 선비가 공관(空館)한 원인을 논함
37)인조 10년(1632년) 2월 6일 : 태학의 교육 과정 개편 등을 진언함
38)인조 10년(1632년) 7월 1일 : 복제 등을 정할 것을 건의함
39)인조 10년(1632년) 9월 13일 : 붕당의 폐해를 논함
40)인조 10년(1632년) 10월 9일 : 복색에 대하여 의논함
41)인조 12년(1634년) 7월 20일 : 인목 왕후의 부묘에 대해 논의함
42)인조 13년(1635년) 5월 11일 : 성혼과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함
43)인조 13년(1635년) 5월 11일 : 채진후 등이 문묘종사 제안을 반대함
44)인조 13년(1635년) 5월 12일 : 윤방과 김상용이 문묘종사의 상소 올림
45)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문묘 종사 건으로 상소를 올림
46)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문묘 종사에 대한 임금의 답변을 논함
47)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심지원 등이 문묘 종사를 건의함
48)인조 13년(1635년) 6월 6일 : 조익이 임금의 무성의에 사의를 표명함
49)인조 13년(1635년) 6월 6일 : 이이 등의 문묘 종사 문제로 의견 대립
50)인조 13년(1635년) 8월 3일 : 심지원 등이 정사의 바른 도를 건의함
51)인조 13년(1635년) 8월 9일 : 윤방이 문묘종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함
52)인조 13년(1635년) 9월 26일 : 민여기 등이 문묘 종사를 건의함
53)인조 13년(1635년) 12월 21일 : 사서 김익희가 상례에 대해 건의함
54)인조 14년(1636년) 10월 19일 : 이이·성혼을 문묘에 제사하도록 건의함
55)인조 14년(1636년) 10월 21일 : 한극술이 정거문제로 상소함
56)인조 16년(1638년) 7월 19일 : 감사의 구임에 대해 의논함
57)인조 16년(1638년) 7월 22일 : 수군과 인재 등용에 대해 의논함
58)인조 19년(1641년) 2월 12일 : 대제학 이식의 『실록』 관련 건의
59)인조 22년(1644년) 8월 23일 : 대신과 정사를 논의함
60)인조 22년(1644년) 12월 23일 : 장령 이만영이 유백증 등을 논죄함
61)인조 22년(1644년) 12월 28일 : 서경우가 이만영의 논의를 변호함
62)인조 23년(1645년) 10월 9일 : 김집과 송시열을 부름

이상의 연도별 율곡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인조 등극 초기인 인조 1년(10건), 2년(6건), 3년(6건)에 율곡과 관련된 많은 언급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조 5년인 1627년에는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침입한 해였다.(정묘호란) 이해는 조정에서 율곡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 전인 인조 4년과 그 1년 후인 인조 6년에는 율곡에 대한 기록이 각각 1건씩 있었다. 전란 상황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율곡에 대한 기억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전후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인조 7년과 8년에는 율곡에 대한 언급이 다시 늘어나 6건과 4건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2건(인조 9년), 4건(인조 10년), 0건(인조 11년), 1건(인조 12년)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다 인조 13년인 1635년에는 다시 율곡 관련 기록이 12건으로 급증하였다. 이해는 특이하게도 조정에서 율곡의 문묘 종사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문묘 종사(文廟 從祀)’란 무엇인가? ‘문묘(文廟)’는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묘우(廟宇, 신위를 모시는 사당)를 말한다. 공자는 유교를 집대성하기는 하였으나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후대인들은 그를 존경하여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 文宣王)에 추증하여 약칭으로 ’문선왕(文宣王)’이라 부른다. 그래서 문묘는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 있는 문묘는 현재 명륜동 성균관대학의 입구 쪽에 있다.
‘종사(從祀)’란 ‘제사를 지내다’, ‘위패(位牌, 신위)를 모시다’, 혹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는 뜻이다. ‘배향(配享)’을 하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묘종사는 문묘배향(文廟配享)이라고도 한다.
문묘에는 공자의 위패와 함께 중국과 한국의 유명 유학자들의 위패도 함께 모신다. 현재 성균관에 있는 문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배향하고 있으며, 공문(孔門, 공자의 제자) 10철(十哲, 10인의 현자)이라고 하여 열 명의 제자들의 위패도 모시고, 송조(宋朝, 송나라) 6현( 六賢, 6명의 현자)의 위패도 함께 모셔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東方) 18현인(十八賢)의 위패도 함께 모시는데, 여기에 현재는 율곡도 함께 들어가 있다.
율곡을 문묘에 모시자는 논의가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큰 시각에서 보면 중국 중원의 문명과 문화, 즉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발달된 중국문명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문명의 나라 명나라와 오랑캐의 나라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이 명나라에 더욱 기울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로 밀려오는 서구 문명보다는 중국에서 전해진 유교문명의 부활을 통해서 조선을 더욱 평화롭고 안정된 나라로 만들자는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잘못되었지만 당시 지식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조를 둘러싼 지식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것도 이러한 선택의 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조 14년, 즉 1636년에는 율곡 관련 기사가 2건으로 줄었다. 이해 12월에 대청제국으로 간판을 바꿔 단 여진족들이 북쪽에서 침략해 들어왔다.(병자호란) 이 때의 전쟁에 패배한 결과 인조는 1637년 1월 말경 삼전도(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까지 밀고 들어온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 끌려 나가 항복의 예를 올리는 치욕을 당하였다. 그래서 1637년에 조정은 율곡에 대해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율곡에 대해서 1638년(인조16년)에 2회, 3년 뒤인 1641년(인조 19년)에 1회, 또 그 3년 뒤인 1644년(인조 22년)에 3회, 그 다음해에 1회의 언급이 있었다. 인조 시대, 율곡에 대한 기억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럼 이하 각 장면별로 어떤 내용으로 율곡이 언급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제16대 조선왕 인조의 시대


제16대 조선왕 인조의 시대.

 

조가 임금으로 있던 시기는 1623년부터 1649년까지 26년간이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조선으로서는 다사다난(多事多難, 여러 가지 일들이 많고 곤란함도 많음)한 시기였다.
나라 안에서는 쿠데타로 임금이 바뀌고 이어서 그 임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여진족이 북쪽에서 두 차례나 침략해왔으며 조정은 역시 두 차례나 피난을 갔는데 결국에는 임금이 항복하여 맨몸으로 신생 청나라의 대장에게 절을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그 여진족에게 60만명 가까운 백성들이 끌려가고 인질로 왕세자들이 잡혀갔다.
눈을 세계로 돌려보면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등장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에도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여 공전의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유럽에서는 장차 지구 전체의 판도를 바꿔버릴 서구 문명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한 때였다.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년〜1642년)가 활동을 하고 있었고,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년 〜 1650년)가 『방법서설』을 집필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근본 원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또 상인들의 국가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지루한 독립전쟁(1567년〜1648년)을 치루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년〜1669년)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년)>, <돌다리가 있는 풍경 (1637년)>, <야경(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1642년)> 등을 그리면서 중세 기독교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씩 걷어내고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년〜1662년)도, 영국의 과학자 뉴턴(Sir Isaac Newton, 1642년〜1727년)도 모두 이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 그리고 종교로 꿈틀거리는 시대였으며 전체적으로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인조의 시대 26년을 간략한 연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23년(인조 1년) 반란이 일어나 광해군이 하야하고 인조가 등극함
1624년(인조 2년) 공신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함
1627년(인조 5년) 만주의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침입(정묘호란)
1628년(인조 6년)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이 제주도 표류
1632년(인조 9년) 사신 정두원이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 등 전래
1636년(인조13년) 만주에 청 제국이 성립함. 청나라가 침입(병자호란)
1637년(인조14년) 삼전도에서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함
1642년(인조19년)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남
1644년(인조21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함
1645년(인조22년) 소현세자가 청에서 과학문물, 서양서적을 들여옴
1649년(인조26년) 인조 사망.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임금(효종)으로 즉위

인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기는 참으로 임금노릇하기가 힘든 시기였다. 자신이 광해군 정권을 뒤엎고 왕권을 쟁취하였지만 그 다음해 바로 자신이 반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반란군은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흥안군(선조의 서자)을 왕으로 옹립하여, 인조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 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반란군내부에서 분란이 발생하여 우두머리 이괄은 부하 장수들에게 살해당하고 능지처참 되었다. 인조는 당시 공주로 피난을 가 있었는데 그 곳으로 그 두목의 머리가 배달되었다.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해가던 3년 뒤인 1627년(인조 5년)에 만주의 후금이 침략해 들어왔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조선 조정을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 정묘호란 때 후금의 홍타이지가 보낸 군사는 주력부대가 3만여명으로 3월초(양력)에 약 10여일 만에 정주성, 안주성을 거쳐 평양성으로 치고 들어왔다. 조선의 북방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북방을 책임지고 있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락하고 그 휘하의 부대들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당시 첫째 아들 소현세자를 전주로 피난시키고, 자신은 조정 대신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긴 싸움은 피하고 곧바로 조선의 조정과 강화를 맺었다. 조선과 후금이 형제관계를 맺는다는 조건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오랑캐로 무시하였던 여진족의 추장을 형님으로 모시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 뒤 10년 정도 지난 1636년에 후금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 때 후금은 이미 더욱더 강성해져서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홍타이지는 청태종이라는 천자의 존호를 자칭하고 조선에 대해서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와 전쟁을 선포하였고, 그해 12월 청나라가 침략하였다.(병자호란)
홍타이지가 보낸 청나라 군대는 약 12만명이었다. 이들은 이전에 침입하였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속히 서울로 진격하여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조선의 임금과 조정을 막았다. 당시 인조는 수군이 약한 청나라 군대를 생각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장기전에 돌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수를 읽은 청나라 군대는 신속히 피난길을 막았다. 인조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항전 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은 1만 3천여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사전에 전쟁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군량이 부족하였다. 또 조정에서 전국 각지의 관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청나라 군대가 가로 막아 남한산성은 고립되었다.
청군은 세자빈과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등이 피난을 간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거기에는 왕실 관계자들과 역대 임금의 신주도 함께 피난해 있었다. 청군은 예상을 깨고 수전 경험이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여 강화산성을 함락시켰다. 강화도 함락 사실을 전해 받은 인조는 식량도 떨어지고 있어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청나라에 항복을 하였다.
홍타이지가 이끈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뒤에 50만명이 넘는 조선인들을 포로로 삼아 데려갔다. 인질로 인조의 아들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데려갔다. 이후 그는 명나라를 제압하고 북경을 장악한 뒤에 천하를 평정하였다.
앞서 소개한 연표에서 유심히 봐야할 대목은 세계 역사의 대변화이다.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이 1628년(인조 6년)에 제주도 표착한 것은 그러한 변화의 시작을 조선에 알리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인조는 자기 스스로 반란 세력이 되어 선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임금이 되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반란 세력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고 반란의 두목은 살해되었다. 그리고 외부의 적인 여진족의 침입도 견뎌냈다. 비록 그들을 극복하여 쫒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어차피 중국 천하를 정복하게 될 세력이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신하의 예로 섬기는 것으로 위협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인조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양문명이었다.
박연은 조선에 처음으로 유럽의 존재를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의 선원이었다. 제주도에 표류해온 그는 한양으로 호송되어 심문을 받고 훈련도감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에 임시기구로 설치된 군사기관이다. 이후 상설기구로 바뀌었다. 정예 병사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훈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는 그 자체에 군사 조직 체계도 갖추게 되었다. 급료를 받는 병사들 약 100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훈련도감군이라 부르며 삼수군, 즉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로 구분되는 군사조직이 있었다.
박연은 이곳에 소속되어 나중에는 조선 사람으로 귀화를 하고 조선 이름을 가지고 무신으로 병자호란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는 1648년(인조 2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그는 네덜란드에서 같이 온 부하 2명과 함께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관리하는 일을 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 오랑캐포)’의 제작법과 조종법을 지도했다.
박연이 보여준 새로운 세계의 문물에 이어서 1632년, 명나라에 간 사신 정두원이 서양의 망원경(천리경), 시계(자명종), 그리고 화포 등을 받아왔다. 또 그보다 13년이 지난 1645년(인조22년) 인조가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큰 아들 소현세자가 과학문물과 서양서적을 들여왔다. 인조는 이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 이를 경계하던 터였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해에 사망하고, 인조는 아들의 미망인이자 며느리인 세자빈 민회빈 강씨와 소현세자의 아들들이자 자신의 손자들 두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자신을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서양문물 전래의 싹을 자른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율곡은 왜, 어떤 이유로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 그의 개혁사상이 재평가 되었을까, 아니면 유학 연구의 업적 때문이었을까?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서 정치를 하였을까? 『인조실록』에 나타난 율곡 관련 기사를 읽으며 살펴보기로 한다.

『인조실록』과 율곡


『인조실록』과 율곡.

인조실록』
(『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은 1623년부터 1649년까지 인조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총 50권 5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6년에 걸친 인조 시대 국정 전반에 관한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중 한권이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으로 검색하면 3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첫 번째 기사는 인조 2년, 즉 1624년 7월 19일(음력)자 기사로 「황해도로 하여금 이율곡의 『성학집요』를 인쇄하여 바치게 하다」라는 기사다. 율곡의 문집 『성학집요』를 지칭할 때 사용된 것이다.

두 번째는 인조 3년(1625년) 4월 11일 대사헌 정엽이 사망하였다는 졸기(卒記)에 나온다. 졸기란 나라의 일을 맡았던 관리나 왕실 관련 인물이 죽었을 때, 사망한 사실과 함께 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정엽(鄭曄, 1563년〜1625년)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그리고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도승지,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기사는 정엽을 소개하면서 “일찍이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에 뜻을 두고 율곡 이이,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 참여하여 학문적인 조예가 더욱 깊었다. 가정에 있어서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고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장례와 제사 등은 모두 『가례(家禮)』(주자朱子의 저술)를 따랐다.”고 하였다. 정엽의 스승으로 율곡을 지칭한 것이다.

마지막은 인조 9년(1631년) 8월 9일자 기사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의 졸기」이다. 사관은 김장생이 자질이 훌륭하고 효도와 우애가 깊으며 순수하고 지극하였다고 소개하고 이어서 “율곡 이이를 따라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쏟아 독실히 좋아하였다. 독서할 적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경전(經傳)과 염·락(濂洛) 의 여러 책들을 가지고 담겨 있는 뜻을 탐색하였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낮으로 사색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그 귀취(歸趣, 일이 되어 나가는 형편이나 상황)를 얻고 난 다음에야 그쳤다.”고 칭찬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조실록』에서 ‘율곡’이라는 호는 제자들 김장생과 정엽의 졸기를 기록할 때 스승으로서 소개할 때 사용되었으며 또 율곡의 저술 『성학집요』를 소개할 때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은 1584년(선조 17년)에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나고 임금도 선조→광해군→인조로 바뀌었지만 율곡은 조정에서 그의 저술을 출판하게하고 그 제자들이 사망할 때 스승으로 주목하는 등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이이(李珥)’라는 이름으로 『인조실록』을 검색하면 관련기사가 62건이나 발견된다. 인조는 재위기간이 1623년부터 1649년까지 26년간이었다. 율곡이 사망한지 4, 50년이 지났지만 일 년에 2번 이상씩 조정에서 율곡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퇴계와 비교해보면, 퇴계의 경우 ‘퇴계’라는 호칭은 『인조실록』에 1차례 기록되었으며, ‘이황(李滉)’이라는 이름은 10번 등장한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기억은 퇴계 보다 여섯 배가 넘는다는 것이다.

물론 더 많이 기억된다고 더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러한 기록이 율곡의 철학적 성과나 사상사적 성과가 퇴계 보다 더 뛰어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의 조정은 퇴계보다 율곡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기록은 이전의 광해군 시대와 비교해보면 이상하리만큼 많다. 율곡 관련 기사는 『광해군일기 중초본』에서 20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6건이 있다.(검색조건: ‘이이(李珥)’) 인조의 다음 임금인 효종의 시대를 보면 32건의 율곡 관련 기사가 검색된다. 『인조실록』의 62건에 비하면 1/2에 불과하다. 효종 다음 임금인 현종 때의 실록을 보면 『현종실록』 54건, 『현종개수실록』 93건으로 또 급증한다. 현종 시대(재위: 1659년∼1674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이 활동한 시대다. 이 시기에 율곡의 기록이 많은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송시열은 현종의 스승이었으며 현종의 아버지 효종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또 그는 율곡을 최고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 안팎에서 활동하면서 율곡을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조선 주자학의 대가이기도 하고 서인이 분당한 뒤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사람이다. 그는 앞서 졸기에 나온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며,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다시 『인조실록』으로 돌아와 율곡과 관련된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조정에서 율곡에 대한 기억이 급격히 많아 진 것과 동시에 율곡에 대한 평가가 질적으로 크게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과 퇴계는 과연 서로 대립적이고 서로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 최고의 두 유학자, 혹은 대표적인 두 사상가․철학자일까?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조선 유학을 형성하는 양대 산맥의 최고봉일까? 『인조실록』에 나타난 율곡 관련 기록을 읽어보면서 당시 율곡에 대한 기억이 변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홍천경(洪千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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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경(洪千璟, 1553년〜1632년)은 조선시대 중엽에 남원교수,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고경명(高敬命)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광해군 1년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 장군을 도와 군량의 수집과 수송을 담당하고 정유재란 때는 권율 장군을 도와 명나라 사신에게 글을 보내거나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는 등 문서를 관장하였다.

1553년(1세)
명종 8년에 아버지는 홍응복(洪應福)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지금의 경북 안동), 자는 군옥(群玉), 호는 반항당(盤恒堂)이다.
어려서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고경명(高敬命)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유학에 조예가 깊고, 충의 정신이 강했다.

1589년(36세)
이해 10월 기축옥사(己丑獄事) 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된 이 사건은 정여립과 함께 수많은 동인들이 희생을 한 사건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이 사건을 조사, 지휘하였는데, 자신 당한 개인적인 원한과 서인들의 집단적인 분노를 이 사건으로 해소하고자 하였다. 동인의 편에 서 있던 윤선도는 자신의 저서 고산유고(제3권)에서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홍천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다.
“기축년(1589년, 선조 22년)에 옥사(獄事)를 조작할 당시에, 위관(委官)인 정철(鄭澈)과 동복(同福)의 소유(疏儒)인 정암수(丁巖壽)와 나주(羅州)의 사인(士人)인 홍천경(洪千璟) 등이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날조하여 비단에 문채를 수놓듯 온갖 방법으로 얽어매었는데, 그때에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거론하여 하나의 죄안(罪案)으로 더 첨가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찌하여 세월이 오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이런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 말이 진실이 아니고 실로 날조된 것임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홍천경의 인물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하였다.
“임오년(1582) 연간에 유몽정(柳夢鼎)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당시에, 정개청(당시 나주교수羅州敎授)의 제자인 나주 사인(士人)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 등이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어느 날 나덕준 등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고 정개청을 받들어 귀한 손님으로 모셨습니다. 유몽정 나주목사가 이 말을 듣고 가서 참관하면서, 그 성대한 예절의 모습을 찬미하며 탄식하기를 ‘고례(古禮)가 행해지는 광경을 오늘 보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고을은 바로 인재의 부고(府庫)인데 한갓 사장(詞章)만 힘쓰고 있으니, 모름지기 선생 같은 분을 얻어야만 사림의 기풍을 변화시킬 수 있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봉소(封疏)를 올려 위에 아뢰자, 정개청을 제수하여 나주 훈도(羅州訓導)로 삼았습니다.
이에 정개청이 재삼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옛사람들이 전한 스승과 제자의 예법을 엄격하게 행하는 한편, 《소학(小學)》 및 《여씨향약(呂氏鄕約)》 등 성경현전(聖經賢傳)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全)》ㆍ《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베풀고, 틈틈이 《가례(家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 등 제서(諸書)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교도(敎導)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행한 지 1년 남짓 되는 사이에 효제(孝悌)와 예의(禮義)의 기풍이 향당(鄕黨)의 사이에 날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문인(文人) 재자(才子)로서, 한갓 글 짓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자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조소하고 희롱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교생(校生)인 홍천경(洪千璟)이라는 자가 자신의 글 솜씨를 뽐내며 한 번도 향교(鄕校)에 들어오지 않자, 정개청이 목사(牧使)에게 고하여 회초리로 다스렸으므로 그가 마침내 앙심을 품기에 이르렀는데, 정개청은 이를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홍천경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조작에 관련되어 있다 증거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아, 정개청이 자주 정여립과 산사에서 만나 모의하면서, ‘누구를 섬긴들 나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면,(이런 일이 있었다고 서인들이 고발한 것임-필자 주) 그 상황에 정말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같은 마을의 홍천경(洪千璟) 등이나 이웃 고을의 정암수(丁巖壽) 등이 몰랐을 리가 결코 없는데, 나주에서 무함하여 보고할 때나 위관(委官)과 함께 죄를 얽어 만들 즈음에 어찌하여 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문집인 기언(記言)에 「정곤재(개청)의 사적」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 허목도 다음과 같이 홍천경을 비판하였다.
“곤재(困齋) 선생 정씨는 휘가 개청(介淸)으로 선조 때의 징사(徵士)이다. 선생은 옛것을 독실하게 믿고 좋아하였는데, 은거하여 글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날로 모였다. 선생이 제자를 거느리고 대안학사(大安學舍)에서 향음주(鄕飮酒)의 예를 행하자 목사 유몽정(柳夢鼎)이 가서 보고 감탄하기를 “삼대(三代)의 예가 여기에 있구나!” 하고, 그 훌륭함을 나라에 천거하여 주(州)의 훈도(訓導)로 삼았다. 선생(정개청)은 사제의 예를 엄격히 하여 교육하였는데, 한결같이 《소학(小學)》과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따르고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히 여겼다. (당시) 향교의 생도 중에 홍천경(洪千璟)이란 자가 있었는데, 조소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목사(나주 목사 유몽정)가 그를 벌주었는데, 도리어 말을 꾸며 내어 비방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1592년(39세)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1537년〜1593년)의 의병에 합류하여 군량의 수집, 수송 등을 담당하였다.

1597년(44세)
일본군들이 다시 침략해왔다.(정유재란)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 소속되어 문서를 관장하고,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1609년(56세)
광해군 1년.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함에 따라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광해군은 직위 초에 당쟁의 폐해를 억제하기 위해서 서인과 남인 측 인사들을 함께 대우하였으나 대북파의 세력은 날로 드세어졌다. 이에 따라 이해 10월 11일 서인에 속했던 홍천경에 대해서 사간원은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홍천경은 본시 성품이 음흉하고 간특한 사람으로서 어진 선비를 무함하다가 사림(士林)에 죄를 지어 잇달아 정거(停擧, 과거 응시자격 제한)를 당했으니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 지난번 복시(覆試) 때에도 공론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또 정거를 당해 첫 날에는 응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정거가 풀려 복시에 참여하였습니다. 대체로 정거를 해소하는 규례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합치된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몇몇 사람이 멋대로 해소시켰으니, 이것은 옛 규례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공론을 무시한 것이 그지없습니다. 따라서 그날 해소시키기를 주장한 사관(四館)의 관원들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이러한 건의를 받고 광해군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홍천경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너무 심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어찌 영원히 버릴 수 있겠는가. (과거 응시자격 제한을) 풀어준 사관의 관원을 파직시키는 일에 관해서는 윤허하지 않는다.”
이러한 보고가 있고 3일 뒤 10월 14일 열린 광해군 등극 기념 증광 별시에서 홍천경은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 나주교수, 남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해 광해군 일기 10월 14일자 기사 제목은 「등극 증광 별시(登極增廣別試)에 〈응시자에게 책문(策問)을 시험보여〉홍천경(洪千璟) 등 33 명을 뽑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관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현재 대간이 홍천경의 정거(停擧)를 해소시킨 일에 대해서 사관(四館)을 논핵하고 있는데 천경은 물의를 고려하지 않고 전시(殿試)에 들어갔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홍천경이 대인임을 칭찬하는 말이다.

1623년(70세)
음력 3월 12일,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등극하였다.(인조반정) 그동안 탄압을 받던 서인 일파가 동인의 대북파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인조)을 옹립하였다.
이해 홍천경은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32년(79세)
인조 10년에 사망하였다.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작으로 반환유집(盤桓遺集)이 있다.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4년에 간행한 시문집으로,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문에는 임진왜란에 종군하면서 느낀 점, 그리고 종전 직후의 감회를 읊은 시들이 많다. 전란으로 인한 고통과 그 피폐에 대한 상심을 잘 표현하였다. 그 외에 명나라 사신에게 보낸 글들도 포함되어 임진왜란 당시 지식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적지 않다.
조선시대 문신 양경우(梁慶遇, 1568년〜?)는 홍천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문 홍천경(洪千璟)의 호는 반환(盤桓)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업(業)으로 삼아 남쪽 지방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운수가 기이하여 뜻이 어긋나 나이 오십이 지난 후에야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오래지 않아 또 장원으로 급제하여 폐조(廢朝, 광해군) 때에 전라도 벽사 찰방(碧沙察訪)이 되었다. 그때 참의(參議) 이광정(李光庭)이 분사 지조(分司地曹)로서, 홍공(洪公, 홍천경)에게 곡식 모으는 임무를 맡겼는데, 다른 관원보다 훨씬 우수하게 곡식을 모은지라,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인조반정 후에는 시대의 버림을 받아 한 관직도 지내지 못하고 죽었으니, 슬프다.
그는 평생 시 짓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가끔 기특하고 힘이 있었다. 과거 시험장에서 지은 작품은 붓을 휘두름에 바람이 이는 듯하였고, 시어(詩語)는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니 역시 한 시대의 호방한 재주였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609년 10월 11일 기사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609년 10월 14일 기사
허목, 기언제26권 하편 세변(世變), 「정곤재(鄭困齋) 사적」, <한국고전종합DB>
윤선도, 고산유고(孤山遺稿) 권3, <한국고전종합DB>
김용국, 「홍천경(洪千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8
이원구, 「반환유집(盤桓遺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홍천경(洪千璟)의 글씨(서간문)

윤동로(尹東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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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로(尹東老, 1550년〜1636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공조좌랑, 울산판관,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에게 글을 배웠다. 23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45세 때 관직에 있으면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회의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종사관에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사로이 역마(驛馬)를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탄핵을 받았다. 또 54세로 울산판관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백성들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처벌되기도 하여 관직 생활이 순탄치 못하였다.

1550년(1세)
명종 5년에 생원 윤언성(尹彦誠)과 조우신(趙又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자는 기중(期仲), 호는 수심당(水心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윤수천(尹壽千), 할아버지는 윤임형(尹任衡)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73년(23세)
선조 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95년(45세)
선조 28년 사과(司果)로 재직하고 있을 때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6년(46세)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공식 회의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6월 11일자로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탄핵 사유가 적혀있다.
“공조 좌랑 윤동로(尹東老)는 【단정하지 않은 벗을 사귀고 멋대로 처신함】는 자신이 낭관(郞官, 육조六曹의 5・6품 하급 관원)의 반열에 있으면서 일이 많은 이 때에 허락도 받지 않고 사사로이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공식 회의 때마다 앓는다고 핑계하였으니, 파직하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1597년(47세)
일본군이 다시 침략을 해왔다.(정유재란) 이때 그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종사관에 다시 기용되었다. 하지만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탄핵을 받았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 해 6월 19일자(음력) 지평 남이신(南以信)이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도 도체찰사(四道 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장계를 보건대, 통제사의 종사관 윤동로가 개인 일로 노복(奴僕)을 내보낼 때 역마(驛馬)를 지급하기까지 하였고, 도원수의 종사관 김택룡은 작미(作米)하는 것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에 있는데, 해당되는 복마(卜馬) 이외에 외람되게 역의 대마(大馬) 4필을 거느렸습니다. 요즘처럼 각역이 심하게 파괴된 때를 당하여 규정을 어기고 물의를 일으킨 점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윤동로와 김택룡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조사하소서.”

1604년(54세)
울산판관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 백성들을 심히 탄압한다는 이유로 처벌되었다.

1629년(79세)
인조 7년,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파흥군(坡興君)에 봉해졌다.
이기룡(李起龍)이 그린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에 윤동로가 참석한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해 6월 5일(음력)에 숭례문(崇禮門) 앞에 있던 홍첨추(洪僉樞)의 저택에 열리는 기로회에 참석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술상을 받았다. 이 때 참석자들은 윤동로를 포함하여 이인기(李麟奇), 이유간(李惟侃), 이호민(李好閔), 이권(李勸), 홍사효, 강인(姜絪), 이귀(李貴), 서성(徐㨘), 강담(姜紞), 유순익(柳舜翼), 심논(沈惀) 등 모두 12명이었다.

1636년(86세)
인조 14년에 사망하였다. (일설에 1635년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참고문헌>
선조실록 선조 29년 1596년 6월 11일자 기사
선조실록 선조 30년 1597년 6월 19일자 기사
김용덕, 「윤동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