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경(洪千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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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경(洪千璟, 1553년〜1632년)은 조선시대 중엽에 남원교수,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고경명(高敬命)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광해군 1년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 장군을 도와 군량의 수집과 수송을 담당하고 정유재란 때는 권율 장군을 도와 명나라 사신에게 글을 보내거나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는 등 문서를 관장하였다.

1553년(1세)
명종 8년에 아버지는 홍응복(洪應福)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지금의 경북 안동), 자는 군옥(群玉), 호는 반항당(盤恒堂)이다.
어려서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고경명(高敬命)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유학에 조예가 깊고, 충의 정신이 강했다.

1589년(36세)
이해 10월 기축옥사(己丑獄事) 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된 이 사건은 정여립과 함께 수많은 동인들이 희생을 한 사건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이 사건을 조사, 지휘하였는데, 자신 당한 개인적인 원한과 서인들의 집단적인 분노를 이 사건으로 해소하고자 하였다. 동인의 편에 서 있던 윤선도는 자신의 저서 고산유고(제3권)에서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홍천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다.
“기축년(1589년, 선조 22년)에 옥사(獄事)를 조작할 당시에, 위관(委官)인 정철(鄭澈)과 동복(同福)의 소유(疏儒)인 정암수(丁巖壽)와 나주(羅州)의 사인(士人)인 홍천경(洪千璟) 등이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날조하여 비단에 문채를 수놓듯 온갖 방법으로 얽어매었는데, 그때에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거론하여 하나의 죄안(罪案)으로 더 첨가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찌하여 세월이 오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이런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 말이 진실이 아니고 실로 날조된 것임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홍천경의 인물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하였다.
“임오년(1582) 연간에 유몽정(柳夢鼎)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당시에, 정개청(당시 나주교수羅州敎授)의 제자인 나주 사인(士人)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 등이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어느 날 나덕준 등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고 정개청을 받들어 귀한 손님으로 모셨습니다. 유몽정 나주목사가 이 말을 듣고 가서 참관하면서, 그 성대한 예절의 모습을 찬미하며 탄식하기를 ‘고례(古禮)가 행해지는 광경을 오늘 보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고을은 바로 인재의 부고(府庫)인데 한갓 사장(詞章)만 힘쓰고 있으니, 모름지기 선생 같은 분을 얻어야만 사림의 기풍을 변화시킬 수 있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봉소(封疏)를 올려 위에 아뢰자, 정개청을 제수하여 나주 훈도(羅州訓導)로 삼았습니다.
이에 정개청이 재삼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옛사람들이 전한 스승과 제자의 예법을 엄격하게 행하는 한편, 《소학(小學)》 및 《여씨향약(呂氏鄕約)》 등 성경현전(聖經賢傳)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全)》ㆍ《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베풀고, 틈틈이 《가례(家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 등 제서(諸書)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교도(敎導)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행한 지 1년 남짓 되는 사이에 효제(孝悌)와 예의(禮義)의 기풍이 향당(鄕黨)의 사이에 날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문인(文人) 재자(才子)로서, 한갓 글 짓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자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조소하고 희롱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교생(校生)인 홍천경(洪千璟)이라는 자가 자신의 글 솜씨를 뽐내며 한 번도 향교(鄕校)에 들어오지 않자, 정개청이 목사(牧使)에게 고하여 회초리로 다스렸으므로 그가 마침내 앙심을 품기에 이르렀는데, 정개청은 이를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홍천경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조작에 관련되어 있다 증거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아, 정개청이 자주 정여립과 산사에서 만나 모의하면서, ‘누구를 섬긴들 나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면,(이런 일이 있었다고 서인들이 고발한 것임-필자 주) 그 상황에 정말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같은 마을의 홍천경(洪千璟) 등이나 이웃 고을의 정암수(丁巖壽) 등이 몰랐을 리가 결코 없는데, 나주에서 무함하여 보고할 때나 위관(委官)과 함께 죄를 얽어 만들 즈음에 어찌하여 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문집인 기언(記言)에 「정곤재(개청)의 사적」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 허목도 다음과 같이 홍천경을 비판하였다.
“곤재(困齋) 선생 정씨는 휘가 개청(介淸)으로 선조 때의 징사(徵士)이다. 선생은 옛것을 독실하게 믿고 좋아하였는데, 은거하여 글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날로 모였다. 선생이 제자를 거느리고 대안학사(大安學舍)에서 향음주(鄕飮酒)의 예를 행하자 목사 유몽정(柳夢鼎)이 가서 보고 감탄하기를 “삼대(三代)의 예가 여기에 있구나!” 하고, 그 훌륭함을 나라에 천거하여 주(州)의 훈도(訓導)로 삼았다. 선생(정개청)은 사제의 예를 엄격히 하여 교육하였는데, 한결같이 《소학(小學)》과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따르고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히 여겼다. (당시) 향교의 생도 중에 홍천경(洪千璟)이란 자가 있었는데, 조소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목사(나주 목사 유몽정)가 그를 벌주었는데, 도리어 말을 꾸며 내어 비방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1592년(39세)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1537년〜1593년)의 의병에 합류하여 군량의 수집, 수송 등을 담당하였다.

1597년(44세)
일본군들이 다시 침략해왔다.(정유재란)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 소속되어 문서를 관장하고,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1609년(56세)
광해군 1년.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함에 따라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광해군은 직위 초에 당쟁의 폐해를 억제하기 위해서 서인과 남인 측 인사들을 함께 대우하였으나 대북파의 세력은 날로 드세어졌다. 이에 따라 이해 10월 11일 서인에 속했던 홍천경에 대해서 사간원은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홍천경은 본시 성품이 음흉하고 간특한 사람으로서 어진 선비를 무함하다가 사림(士林)에 죄를 지어 잇달아 정거(停擧, 과거 응시자격 제한)를 당했으니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 지난번 복시(覆試) 때에도 공론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또 정거를 당해 첫 날에는 응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정거가 풀려 복시에 참여하였습니다. 대체로 정거를 해소하는 규례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합치된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몇몇 사람이 멋대로 해소시켰으니, 이것은 옛 규례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공론을 무시한 것이 그지없습니다. 따라서 그날 해소시키기를 주장한 사관(四館)의 관원들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이러한 건의를 받고 광해군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홍천경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너무 심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어찌 영원히 버릴 수 있겠는가. (과거 응시자격 제한을) 풀어준 사관의 관원을 파직시키는 일에 관해서는 윤허하지 않는다.”
이러한 보고가 있고 3일 뒤 10월 14일 열린 광해군 등극 기념 증광 별시에서 홍천경은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 나주교수, 남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해 광해군 일기 10월 14일자 기사 제목은 「등극 증광 별시(登極增廣別試)에 〈응시자에게 책문(策問)을 시험보여〉홍천경(洪千璟) 등 33 명을 뽑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관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현재 대간이 홍천경의 정거(停擧)를 해소시킨 일에 대해서 사관(四館)을 논핵하고 있는데 천경은 물의를 고려하지 않고 전시(殿試)에 들어갔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홍천경이 대인임을 칭찬하는 말이다.

1623년(70세)
음력 3월 12일,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등극하였다.(인조반정) 그동안 탄압을 받던 서인 일파가 동인의 대북파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인조)을 옹립하였다.
이해 홍천경은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32년(79세)
인조 10년에 사망하였다.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작으로 반환유집(盤桓遺集)이 있다.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4년에 간행한 시문집으로,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문에는 임진왜란에 종군하면서 느낀 점, 그리고 종전 직후의 감회를 읊은 시들이 많다. 전란으로 인한 고통과 그 피폐에 대한 상심을 잘 표현하였다. 그 외에 명나라 사신에게 보낸 글들도 포함되어 임진왜란 당시 지식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적지 않다.
조선시대 문신 양경우(梁慶遇, 1568년〜?)는 홍천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문 홍천경(洪千璟)의 호는 반환(盤桓)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업(業)으로 삼아 남쪽 지방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운수가 기이하여 뜻이 어긋나 나이 오십이 지난 후에야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오래지 않아 또 장원으로 급제하여 폐조(廢朝, 광해군) 때에 전라도 벽사 찰방(碧沙察訪)이 되었다. 그때 참의(參議) 이광정(李光庭)이 분사 지조(分司地曹)로서, 홍공(洪公, 홍천경)에게 곡식 모으는 임무를 맡겼는데, 다른 관원보다 훨씬 우수하게 곡식을 모은지라,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인조반정 후에는 시대의 버림을 받아 한 관직도 지내지 못하고 죽었으니, 슬프다.
그는 평생 시 짓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가끔 기특하고 힘이 있었다. 과거 시험장에서 지은 작품은 붓을 휘두름에 바람이 이는 듯하였고, 시어(詩語)는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니 역시 한 시대의 호방한 재주였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609년 10월 11일 기사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609년 10월 14일 기사
허목, 기언제26권 하편 세변(世變), 「정곤재(鄭困齋) 사적」, <한국고전종합DB>
윤선도, 고산유고(孤山遺稿) 권3, <한국고전종합DB>
김용국, 「홍천경(洪千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8
이원구, 「반환유집(盤桓遺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홍천경(洪千璟)의 글씨(서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