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과 이이가 어떻게 다른가?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성혼과 이이가 어떻게 다른가?

 

강민우: 성혼선생이 이이와 유교적 이상국가의 꿈을 함께 꾸고,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면서 고락을 나누며, 죽어서는 문묘에 함께 배향되는 운명 공동체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비슷한 점만 공유한 것이 아니라, 학풍이나 기질에 있어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어 보입니다.

성혼: 두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본인들이 잘 알고 있어서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벗의 단점을 솔직하게 지적하여 착한 길로 인도하는 것은 친구 간의 의리로서, 유학에서는 이를 책선(責善)이라고 부릅니다. ‘책선’은 ‘착한 일을 하라고 나무라다’는 뜻으로, 모든 인간관계에 널리 쓰지 않고 친구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친구끼리 착한 일을 권한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저희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책선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이 보이면 주저없이 지적하여 고치라고 권고합니다.

강민우: 바로 그런 보완적 자세가 두 사람의 학문과 인격을 높이는데 적잖이 기여를 했겠습니다.

성혼: 저희 두 사람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으면 섭섭해 할 친구가 또 있습니다. 파주의 구봉(龜峰: 지금의 파주 고하읍 심학산) 아래 살던 송익필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세 사람을 묶어서 삼현(三賢: 세 분의 현인)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기이하게도 셋은 모두 파주 사람이고, 나이도 엇비슷하여 송익필이 1534년생, 성혼이 1535년생, 이이가 1536년생으로 각각 한 살 차이입니다.

강민우: 그러나 세상을 떠난 나이는 이이가 49세, 성혼이 64세, 송익필이 66세였으니, 출생순서와는 정반대로 세상을 떠나셨네요. 가장 오래 살았던 송익필은 죽던 해에 아들에게 부탁하여 세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삼현수간(三賢手簡)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지요. 세 사람의 교우 관계를 정리한 이 책에서 ‘삼현’이라는 말이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혼: 삼현수간은 일명 「현승편(玄繩編)」라고도 합니다. 본래 출처는 송익필의 문집인 구봉집속에 실려 있는 「현승편」인데, 후대의 유학자가 세 사람의 친필 서한만을 묶어 삼현수간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삼현수간은 송익필 집안에서 바로 직계제자인 김장생 집안으로 전해지고, 김장생의 수제자인 송시열에게 전해지고, 다시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지금 삼현수간의 원본은 호암미술관에서 소장되어 있습니다.

강민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송시열이 정치적으로 불우하여 귀양 갈 때도 이이 일기 친필본과 이 삼현수간만은 꼭 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애지중지 했다지요. 아무튼 이 삼현수간은 이들 삼현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의 중요한 원류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혼: 저희 세 사람은 동시대에 한 고장에서 학자가 배출되어 서로 책선하고 격려와 경쟁을 통해 자신들의 학문을 키웁니다. 더욱이 수많은 후학들을 키워내어 조선 후기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정치세력과 학파를 형성합니다. 조선 후기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대부분 이들 삼현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에 속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강민우: 당시 파주의 삼현이 배출한 후학들은 어림잡아 수백 명에 이릅니다. 삼현 가운데 가장 많은 후학을 기러낸 인물은 단연코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서실(서재)을 세워 4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한 성혼선생입니다.

성혼: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삼현이 모두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후학들은 이들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배울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더 큰 학덕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호학파 성리학자들의 진원지가 이곳이라고 말합니다. 성리학을 일보 전진시킨 조선 후기 실학의 진원지도 따지고 보면 이 지역에서 출발하여 서울을 거쳐 한강 이남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강민우: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파주와 비교될 만한 지역이 있다면 어디라고 보십니까?

성혼: 파주보다 조금 앞서 이황이 후학을 길러낸 경상도 안동(安東) 지역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황의 학문과 행실은 이이를 비롯한 저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삼현의 학문도 영남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두 지역 간에는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이황의 영향을 받은 영남학파에서도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훌륭한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지만, 그 힘이 기호학파의 위세를 압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황 이후로 영남학파 가운데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마도 당시 정치를 주도한 세력이 서인인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과 이이의 성격상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성혼: 성격상으로 보면, 이이와 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이가 명석하고 개방적이며 자신만만한 외형적 기질을 가졌다면, 저는 세심하고 근엄하며 겸손한 내향적인 기질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이이의 외향적 성향은 오만하고 겸손하지 못한 것으로 비쳐져서 주변의 질투와 미움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 성혼선생은 겸손하고 자중자애한 도사의 모습을 지녀 후학들의 존경을 많이 받았다지요.

성혼: 이런 차이는 천부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은 듯합니다. 이이는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등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친족인 덕수 이씨(德水 李氏) 집안의 가풍은 오히려 그의 삶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계 친족인 이기(李芑)는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인물입니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도 어머니 신사임당이 ‘웬쑤’라고 불렀다는 풍설이 나돌 만큼 조신한 선비가 못됩니다. 그래서 이이는 친가보다 외가인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외할아버지 신명화(申命和)를 더 존경했습니다. 아마 이런 가정환경이 이이로 하여금 한층 외향적인 성향을 갖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기묘명현’은 조선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신하들을 말합니다. 한편 저는 창녕 성씨(昌寧 成氏) 가문의 가풍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평생을 파주의 은일처사로 살았습니다. 먼 친척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과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成聃壽)가 있는데, 이들 역시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입니다. 저는 의리와 지조를 중시해온 성씨 집안의 가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특히 아버지의 영향은 직접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이 저로 하여금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고 세속을 멀리하는 종교인의 모습을 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이이와 성혼의 기질적 차이는 학풍에 있어서도 분명한 차이로 드러났겠습니다. 두 사람은 주자학을 유일한 정학(正學)으로 받아들이고 유교적 이상 국가를 추구한다는 점은 같지만, 성혼선생은 이이보다 주자학을 더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았던 것이죠.

성혼: 저는 주자학에 이론을 제시하거나 토를 다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하고, 오직 주자학의 본질을 체득하여 실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주자학을 가장 충실히 따르고 실천하는 인물로 34세 연상인 이황을 꼽았으며, 그에 대한 무한 신뢰와 존경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저와 생각이 다릅니다. 큰 틀에서 주자학이 정학인 것은 인정하지만, 주자학이 이기설을 비롯한 형이상학의 모든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주자학이 아닌 선가(禪家)나 노장사상, 제자백가의 여러 사상까지도 폭넓게 공부하면서 주자학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주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도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고 보고, 이를 수정하여 여러 종류의 향약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던 것이군요.

성혼: 이이는 ‘백성을 변화시켜 풍속을 이룬다’는 목적으로 서원향약․해주향약․사창계약속․해주일향약속 등을 지역의 특성에 알맞도록 제정하여 실시합니다. 여씨향약의 4대 덕목인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 중에서도 특히 서로 어려울 때 구제한다는 환난상휼을 중시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주자의 증손여씨향약을 좀 더 보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향약을 통해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하고 인간관계를 모든 가치의 근원에 두며 공동체 의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입니다.

강민우: 이이가 성학집요를 편찬한 것도 당시 제왕 학문의 교과서로 알려진 진덕수(陳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가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고 여기고 보완했던 것이죠.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진덕수가 벼슬을 하다 재상 사미원(史彌遠)의 탄핵으로 파직 당하자, 시골에서 대학연의를 집필하여 임금에게 바칩니다. 이 책은 이후 조선의 선비들에게 널리 읽힙니다. 중종은 이 책을 간행하면서 나라의 안정과 혼란은 학문이 장려되는지의 여부에 있음을 지적하고, 이 책을 통해서 모든 선비들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대강을 알아서 태평성대를 이루는데 도움을 줄 것을 당부합니다. 그 뒤부터 이 책은 과거시험 때마다 출제와 채점의 기준이 되니,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에게 필수과목으로 지목됩니다.

성혼: 성학집요는 이이가 임금의 학문을 위하여 1575년에 저술한 정치서적입니다. 이이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서문에 의하면, 성학집요는 사서와 육경에 씌어 있는 도(道)의 내용만을 뽑아서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서육경은 너무 방대하여 거기에서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길을 잃기가 십상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 핵심 내용만을 뽑아 놓음으로써 누구나 쉽게 도를 쫓아갈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현들의 모든 계획이 대학의 기본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대학을 기본 지침서로 삼습니다. 그래서 이이는 대학을 ‘덕으로 들어가는 문(入德之門)’라고 말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이이의 명석한 이론에는 항상 경탄을 보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고 아쉬운 감정을 가지기도 했다죠.

성혼: 제가 우려한 것은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늘같이 믿고 따르는 선현들의 학설이 아직 원숙하지 않은 30대의 젊은 이이에 의해 비판받는 것입니다. 주희나 이황의 권위가 손상당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이의 명쾌한 이론이 머리로는 승복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승복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내용은 학술적 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제자를 가르칠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근엄함과 단정함, 그리고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을 때에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보다는 성인의 말씀을 깊이 사색하면서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요.

성혼: 제가 따로 저의 학설이나 주장을 담은 저서를 내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옳은 것으로 봅니다. ‘술이부작’은 성현의 말씀을 가르칠 뿐 독자적인 의견은 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술이부작’은 논어「술이」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으로, 학자의 겸손한 자세와 객관적 태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성현을 능가할 수 없는 후학은 성현의 말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에 그쳐야 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성현의 말씀을 전달할 때,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여 듣는 사람이 지루함이나 피곤함을 느끼게 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지요. 그래서 매일 일기를 쓰면서 자신이 남에게 말을 많이 하여 폐를 끼친 것을 반성하고, 반면에 다른 사람이 성혼선생의 약점을 지적하면 상대가 제자라도 받아들였던 것이죠. 자신의 단점과 부족함을 항상 걱정하고 반성하는 시각에서 보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성현의 약점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이이와는 비교되며, 이이의 이러한 모습이 매우 위험한 일로 보이기도 했겠습니다.

성혼: 저는 이이의 이러한 비판적 행동이 그의 학문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이는 이미 30대에 동호문답․「만언봉사」 등을 내고, 40세에는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대체하기 위해 성학집요를 편찬하는 등 발 빠른 저술 행보를 보이며 이름을 떨칩니다. 그러나 저의 눈에는 이이의 저술 활동이 ‘술이부작’의 정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행위로 보였습니다.

강민우: 벼슬을 기피한 성혼선생의 눈에 이이의 과거 응시는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기도 했겠습니다.

성혼: 이이는 과거 응시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호소했습니다. 실제는 이이는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4형제의 가솔들까지도 껴안고 살았기 때문에 100여명에 이르는 식구를 거느리고 있어서 심각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이이는 선조와 뜻이 맞지 않아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향촌으로 돌아갔지만, 임금이 부르면 사양하지 않고 지체 없이 달려갔습니다. 이러한 처신도 저의 눈에는 선비답지 못한 행위로 비쳐졌습니다. 저는 이이에게 가정 형편을 이유로 벼슬하면 언젠가는 이욕에 매달리는 타락한 선비가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강민우: 벼슬살이에 관한 한 성혼선생은 이이와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죠. 과거도 일찍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34세에 학생으로 천거된 뒤 죽을 때까지 30년간 수십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실제로 복무한 것은 모두 합쳐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1년 중에서도 정식으로 관청에서 근무한 것은 몇 달 안 되고, 대부분은 성혼선생의 사퇴를 임금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명목상으로만 벼슬한 것입니다.

성혼: 제가 처음 받은 벼슬은 종9품의 참봉(參奉)이었는데, 벼슬을 사양할 때마다 품계가 높아져서 마지막에는 종2품 참판(參判)과 정2품의 참찬(參贊)에까지 올랐습니다. 문과도 거치지 않은 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것은 엄청난 특혜였습니다. 이이가 29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했지만, 그가 마지막 받은 벼슬은 정2품 판서(判書)를 거쳐 종1품의 찬성(贊成)에 그쳤으니, 제가 받은 혜택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강민우: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이이의 충고와 권고를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죠.

성혼: 비록 이이의 권고를 받아들여 잠시나마 벼슬에 나아갔지만, 제가 평생 벼슬을 멀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선비는 벼슬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과 건강문제가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선조가 겉으로는 선비를 우대해도 속으로는 선비의 말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이의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벼슬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욕과 명예를 추구하는 행위로 끝나기 때문에 자신의 지조와 신념에 어긋난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이이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점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신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제 환경의 차이도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성혼선생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파주의 우계에 있는 본가는 안채와 사랑채(서재)가 나누어진 몇 칸짜리 집으로, 손님이 며칠씩 묵어갈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성혼: ‘죽우당’으로 불리는 서재가 있는데, 이 방은 원래 아버지 성수침이 사용하던 사랑채였습니다. 집 주변에는 약간의 농토가 있어서 몇 명의 종(노비)을 데리고 직접 농사일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기도 했습니다. 36세가 되던 1570년(선조 3년)에는 죽우당의 동쪽에 3칸짜리 우계서실을 지었는데, 기와집입니다. 전라도 순창(淳昌)에도 몇 이랑의 토지가 있어 송익필이 노비가 되어 유랑할 때 그곳에서 수학한 곡식 일부를 가져다준 일도 있습니다.

강민우: 임진왜란 중의 기록을 보면, 이 땅을 팔아서 서울 근교의 여러 곳에 땅을 사겠다고 말한 기록이 보입니다. 그밖에 황해도 배천(白川)에도 노비가 살고 있어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혼선생은 이이보다 집안 사정이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저는 조상의 무덤이 있는 파주의 향양리에도 가끔 머물렀는데, 이곳에는 재실(齋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세운 건물)과 제전(祭田: 제사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급된 토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적이 없었으니 가정형편이 넉넉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환곡(還穀: 국가 구휼제도로서 춘궁기에 대여했다가 추수 후에 회수하던 곡물)을 받지 않으면 봄철을 넘기기 어려웠으니, 항상 생활에 곤궁을 느끼며 살아갈 정도였습니다. 다만 이이처럼 많은 가솔을 거느리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외아들이므로 조카들이 없고,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습니다. 딸은 시집가서 출가외인이 되었고, 두 아들 가운데 장남 문영은 19세에 일찍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 문준만이 남았으니 가솔은 비교적 단촐하여 이이처럼 가솔들에 대한 심한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의 생활도 매우 어려웠지만 이이보다는 나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이는 부모의 재산을 5남매가 똑같이 나누어 가졌기에 물려받은 재산이 극히 적었습니다. 이이는 두 형님 이번과 이선, 누이 이매창, 동생 이우 모두 5남매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집에 모일 때에도 이이의 집은 좁아서 모이지 못하고 성혼선생의 집에 모이는 경우가 많았던 거죠.

성혼: 이이는 가난하여 파주에는 후학을 가르치는 서실을 세우지 못하고, 재산을 가진 처가가 있던 해주에 가서 서실을 세웁니다. 저의 경제력이 이이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임진왜란을 만난 이후 만년에는 처참할 정도로 곤궁했습니다. 집이 불타고 먹을 양식도 없고 입을 옷이 없어서 종이로 만들어 입는가 하면, 관직에 있는 친구들에게 옷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절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이이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하고 예견하는데 그쳤지만, 저는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이의 저서나 언행에 드러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에 더욱 감동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이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이 보였고, 그의 학설이 가진 우수성에 머리를 숙여졌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성혼선생은 이이를 단순한 친구로 보지 않고 선생으로 존경했던 것이군요. 특히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살아있을 때보다 이이를 한층 높여 ‘존선(尊先)선생’으로 부르면서 그의 문집 편찬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거죠.

성혼: 이이가 죽은 뒤에야 그의 학문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저와 이이의 학문과 기질의 차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문은 이이가 저보다 뛰어나고 도덕은 제가 이이보다 뛰어났다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이 점은 두 사람이 서로 인정하는 바입니다.

강민우: 일찍이 성혼선생이 학생으로 천거 받을 때 선조 임금이 이이에게 성혼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이이는 “만약 견해의 경지를 가지고 논한다면 제가 다소 나은 점이 있겠으나, 품행의 독실함은 제가 성혼에게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평가야말로 두 사람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이이는 선조 임금에게 성혼의 재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마다 재주가 똑같이 않으니 홀로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려서 백성을 구제함)의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자가 있고, 선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의 재주를 쓸 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성혼의 재주가 홀로 경세제민의 책임을 맡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치지만, 사람됨이 선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충분합니다. 이 어찌 쓸 만한 재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성혼선생이 경세제민을 이루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선을 추구하는 도덕성은 매우 높다는 말이군요.

성혼: 저와 이이는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녔으며 그 개성이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서로 책선하면서 충돌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갔습니다. 두 사람은 죽은 뒤에도 한 쌍으로 엮여져서 문묘 배향이 추진되고, 숙종 때에는 함께 문묘 배향이 이루어집니다. 이후에도 함께 폐출되고 또 다시 함께 배향되는 기이한 운명 공동체를 이룹니다.

강민우: 다만 두 사람이 후세의 당쟁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불행하게도 두 당파로 갈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숙종 때에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이이는 노론의 추앙을 더 많이 받고 성혼은 소론의 추앙을 더 받습니다. 이는 성혼의 외증손자 윤증(尹拯)이 소론의 영수가 된 것이 그 계기입니다. 하지만 이념상으로 보면 명분보다 실리를 존중하는 소론의 정책과 성혼의 이념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성혼: 제가 실리적 모습을 보인 것은 임진왜란 중에 선조보다 광해군에 기대를 걸었던 것뿐입니다. 이는 당시 국내 상황의 현실성을 고려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보면 저는 결코 실리주의자가 아닙니다. 저의 직계 제자들은 대부분 벼슬을 포기하거나 벼슬을 하다가도 향리로 은퇴하여 지조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 인사가 많다는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비록 그들의 후학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했지만, 노론과 소론 모두 저와 이이를 동시에 존경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청년시절, 평생의 지우를 만나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청년시절, 평생의 지우를 만나다.

 

강민우: 성혼과 이이의 친교관계가 얼마나 두터웠던 가를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성혼선생은 죽기 직전까지 이이의 제자들과 함께 그의 문집을 편찬하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물론 성혼은 이이의 문집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지만, 큰 틀을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성혼선생은 이이를 존선선생(尊先先生)이라는 극존칭으로 불렀으며, 평소에도 “살아서는 이이와 생사를 같이하고 죽어서는 함께 열전(列傳: 일생의 업적을 기록한 책)에 오르겠다”라며 이이와의 일심동체를 말했습니다. 성혼선생 사후 100년 뒤에 문묘에 배향될 때, 이이와 함께 배향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성혼과 이이는 쌍벽을 이루며 선비사회에서 높이 추앙받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살아서도 한 몸 같았으며 죽은 뒤에도 함께 문묘에 배향됩니다. 그렇다면 성혼선생도 이이처럼 오늘날 우리 곁에 함께 있어야 마땅한데, 성혼선생은 아직 이이만큼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성혼: 하하하. 제가 21세기 현대에는 이이보다 인기가 없다는 말씀이군요.

강민우: 아닙니다. 성혼선생은 위대한 학자요, 교육자요, 선비였습니다. 평생을 병마와 싸우고, 종이로 옷을 지어 입고,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선조 임금이 내린 벼슬을 수십 차례나 거부하고 파주 우계(쇠내)의 오두막집에서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인근에 살던 이이와 송익필(宋翼弼, 1534~1599) 등 친구와 교유하면서 참선비의 삶을 실천하셨지요.

성혼: 제 일생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한 살 아래인 이이와의 만남입니다. 이이는 외가가 있던 강릉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그 뒤 아버지를 따라서 서울에서 생활합니다. 17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서울에서 여의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19세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됩니다. 제가 이이와 친교를 맺을 때가 20세였으니, 아마도 이이가 금강산에서 나와 백인걸을 만나러 파주에 들렀다가 저를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이는 1년간의 승려 생활을 마치고 환속한 뒤로 자신의 승려 생활을 반성하는 「자경문(自警文)」을 쓰고, 본격적으로 유학 공부에 전념하고 서울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합니다.

강민우: 「자경문」은 ‘스스로를 경계하여 조심하는 글’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세운 인생의 지침서라 할 수 있습니다. 자경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목표를 크게 가진다. ②말을 적게 한다. ③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④혼자 있을 때에도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한다. ⑤옳고 그름을 알기 위해 독서를 한다. ⑥재물과 명예에 관한 욕심을 경계한다. ⑦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다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단호히 끊는다. ⑧정의롭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가진다. ⑨누군가 나를 해치려고 한다면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⑩밤에 잘 때나 병이든 때가 아니면 절대로 눕지 않는다. ⑪공부를 게을리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공부는 평생 꾸준히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이는 「자경문」을 써서 그것을 바탕으로 일상을 펼쳐나갑니다. 가끔 파주에 내려와 백인걸 문하에 드나들고, 성혼과 송익필 등과의 교유가 이루어집니다. 성혼선생은 20대에 또 한 사람의 학우로서 나이가 한 살 위인 송익필을 만나게 됩니다.

성혼: 송익필의 호가 구봉(龜峰)인데, ‘구봉’은 지금 파주시 교하면의 출판단지 부근에 있는 심학산의 별칭입니다. 송익필은 산 이름을 따서 호를 삼은 것입니다. 당시 송익필은 파주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와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편지의 내용은 주로 학문에 관한 것들입니다. 송익필은 신분에 문제가 있어 처음부터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열중했습니다.

강민우: 송익필의 신분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성혼: 송익필의 할아버지 송린(宋璘)은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인 감정(甘丁)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송사련(宋祀連)을 낳습니다. 송사련은 훗날 중종 때 권신으로 사림을 탄압한 남곤(南袞)․심정(沈貞)에게 아부하여 벼슬에 오르는데, 송사련의 아들이 바로 송익필입니다. 다시 말하면, 송익필의 할머니는 안돈후의 천첩 소생이므로 신분이 미천했습니다. 천첩(賤妾)은 양인 남성이 천인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둘 경우 그 여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양인의 딸을 첩으로 삼으면 양첩(良妾), 기생이나 계집종을 첩으로 삼으면 천첩이 됩니다. 양인(良人)은 조선시대에 천민인 노비를 제외한 모든 계층으로, 양반․중인 및 일반 백성을 포괄합니다. 그럼에도 송사련은 안처겸의 역모를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어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습니다.

강민우: 이 사건은 1521년 신사년에 발생한 신사무옥(辛巳誣獄)을 말합니다. 안처겸 집안과 가족처럼 지내던 송사련이 기묘사화 이후의 정치 상황에 대한 안처겸의 불만을 훈구계 권신인 남곤·심정에게 알리면서 발생합니다. 송사련은 처남인 정상(鄭鏛)을 시켜 안처겸이 이정숙(李正叔)·권전(權磌) 등과 함께 남곤·심정 등의 대신을 살해하기로 모의했다고 고발합니다. 남곤·심정 등은 이 사건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안처겸을 역모로 간주하여 안당(아버지)·안처겸·안처근(동생)을 비롯하여 이들과 평상시에 교류하던 많은 사림을 연루시켜 축출합니다. 송사련은 그 공으로 절충장군의 품계로 승진하고 죄인들에게서 몰수한 전답․가옥․노비를 받습니다.

성혼: 송익필은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동생 송한필(宋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치고, 명문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합니다. 초시(初試: 과거의 맨 처음 시험)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합니다. 특히 예학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송사련이 죽자,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집니다. 그 결과 송익필의 형제들이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속됩니다. 아버지 잘못으로 뜻하지 않게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 형제들은 안씨 집안에서 자신들을 죽여 복수할 것을 예감하고 이름을 바꾸고 도피생활에 들어갑니다. 이때 송익필은 이미 53세의 노인이었답니다.

성혼: 억울하게 죽은 안처겸은 고종사촌인 송사련의 신분이 비록 낮아도 가족처럼 따뜻하게 감싸주고 살았는데, 송사련은 항상 자신의 신분에 대해 열등감을 지녔습니다. 그러다가 사주를 보았는데, 자신은 부귀를 얻을 운이었고 안씨 집안은 망할 운이었습니다. 송사련은 자신이 본 사주를 믿고 있다가 정치상황에 대한 안처겸의 불만을 듣자, 드디어 운이 돌아왔다고 믿고 안처겸을 모욕죄로 고발하여 출세의 길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송사련이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성리학자의 길을 걷습니다. 특히 4형제 가운데 송익필과 그의 동생 송한필은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로 이름을 날립니다.

강민우: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됩니다. 그 뒤에 또 동인들을 비난한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와 관련하여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동생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됩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나지만,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습니다.

성혼: 이렇게 말년에 기구한 삶을 살다간 송익필이지만, 1586년 안씨 집안의 송사 전까지는 파주의 구봉산 아래에서 문호를 열어놓고 후진들을 양성합니다. 그 문하에서 김장생·김집·정엽·서성(徐渻)·정홍명(鄭弘溟)·강찬(姜澯)·김반(金槃)·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됩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최립(崔岦)·이순인(李純仁)·윤탁연(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 때의 팔대문장가로 불렸습니다.

강민우: 송익필의 도피 생활을 도와준 사람은 평소에 절친하게 지내던 정절과 김장생 같은 제자들입니다. 성혼선생은 그를 도와줄 힘도 없었거니와, 안씨 집안이 가까이 살고 있어서 그럴 처지도 못되었죠. 그래서 점차 도피하고 있던 송익필과의 편지 연락도 끊어지게 됩니다.

성혼: 이이와 사별하고, 송익필과 생이별하여 파주의 삼현(三賢) 가운데 저만 홀로 남게 됩니다. 송익필은 자신의 신분적 약점 때문에 도리어 많은 시기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정치 감각도 뛰어나서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이를 알아야 성혼을 알고 성혼을 알아야 이이를 안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이이를 알아야 성혼을 알고 성혼을 알아야 이이를 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어떤 인물입니까? 절친한 친구로 잘 알려진 이이와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성혼: 저를 이해하는 지름길은 이이(李珥, 1536~1584)와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이이의 호가 율곡(栗谷)이므로 주로 율곡이라 부릅니다. 관직은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후에 서인의 영수로 추대됩니다. 시호는 문성(文成)입니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이와 저는 같은 고장인 파주에 살면서 30년간 가장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공자를 제사지내는 성균관 문묘에 동시에 배향되어 선비들의 사표가 됩니다.

강민우: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성혼: 문묘(文廟)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을 뜻합니다. 위패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그의 혼을 대신한다는 상징성을 갖는 나무 조각으로, 목주(木柱)·영위(靈位)·위판(位版)·신주(神主)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위패는 종이로 만드는 신주인 지방(紙榜)과 달리 나무로 만드는데, 주로 단단한 밤나무로 만듭니다.

강민우: 문묘에는 주로 어떤 인물들이 배향되어 있나요?

성혼: 우리나라 선비로서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되어 만세토록 선비들의 추앙을 받은 인물은 모두 열여덟 명입니다. 이들을 동국18명현(東國十八名賢)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두 명은 신라 때의 인물로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이고, 두 명은 고려 때의 인물로 안향(安珦)과 정몽주(鄭夢周)이며, 나머지 열네 명은 조선시대 인물입니다.

강민우: 문묘가 공자를 비롯한 중국 역대 성현과 우리나라 역대 명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국가에서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면,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선비들의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성혼: 본인의 영광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도 국가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만인의 사표가 될 만한 행실이 있어야 하고, 전국적인 선비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일부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문묘 배향을 요청하더라도 임금이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전국적인 여론의 지지가 있을 때까지 결정을 유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묘 배향의 결정은 짧아도 몇 년, 길면 몇 십 년을 끌다가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여론의 지탄을 받아 중도에 낙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강민우: 특히 당쟁이 일어난 조선 후기에는 문묘 배향이 더욱 어려웠겠는데요. 아무리 훌륭한 행실과 업적이 있더라도 당색(黨色)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반대ˇ당에서 극력(極力:있는 침을 아까지 않고 다함)하게 반대했을테니까, 더욱 힘들었을꺼 같아요.

성혼: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열 네 명의 문묘 배향자 가운데 당쟁이 없던 조선 초기의 인물로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인데, 이들 여섯 명은 비교적 순탄하게 문묘 배향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당쟁이 일어난 이후의 인물인 이이․성혼․조헌(趙憲)․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 등은 우여곡절 끝에 문묘 배향이 결정됩니다. 이들 여덟 명 가운데 이이․조헌․성혼은 모두 서인에 속했으나, 훗날 이이․조헌은 노론의 추앙을 더 받았고 성혼은 소론의 추앙을 더 받았습니다.

강민우: 나머지 다섯 명 가운데에 박세채만 소론에 속하고, 네 명은 모두 노론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반대당인 남인 측에서 문묘 종사에 적극 반대했던 것이겠군요. 조선 후기 남인 인물 가운데 문묘 배향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의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성혼: 숙종 때에 남인이 잠시 권력을 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정권을 주도하지 못한 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남인 중에도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이가한(李家煥)․이중환(李重煥)․채제공(蔡濟恭)․정약용(丁若鏞)과 같은 뛰어난 유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당시의 주류 이념이던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개혁적인 실학을 발전시킵니다. 게다가 천주교에 관련되어 있는 인사들도 적지 않아 학술계의 주류에서 밀려납니다. 이들은 현대에 와서는 크게 주목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국적인 선비들의 추앙을 받는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강민우: 조선 후기에 선정된 문묘 배향자는 당색이 짙어 주로 집권당 쪽에서 배출되고, 반대당에서 호된 비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그 때문에 문묘 배향에 대한 권위가 많이 실추된 것도 사실이지만, 권력이라는 것도 결국 절대 다수의 지지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문묘 배향 과정이 권력의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재야 선비들의 압도적인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정되기 어려운 절차를 거처야 했으므로 학문적인 권위나 추종자 없이는 문묘에 배향될 수 없습니다.

강민우: 서인이나 노론에서 가장 많은 문묘 배향자를 배출했다는 것은 그들의 학문이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하겠군요.

성혼: 좋고 나쁨을 떠나 조선 후기의 정치사와 학문사는 이들이 주도한 것이 사실입니다.

강민우: 오늘날 우리나라 화폐에는 문묘 배향자 가운데 두 사람의 초상화가 들어있습니다. 이황과 이이입니다.

성혼: 이들은 모두 주자학자이고 당파에 따라 평가가 엇갈립니다만, 워낙 행실과 업적이 뛰어났기 때문에 문묘에 올랐고,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조선시대 당쟁의 와중에 비판과 반대를 받았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그 영향 아래서 문묘 배향자를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좋은 일을 했는가 여부이지 모든 당파의 추앙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문묘 배향의 문제는 이정도로하시고 다시 성혼과 이이에 대한 질문드리겠습니다. 성혼과 이이 두 사람은 비슷한 점도 많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후세 사람들이 이들을 우율(牛栗)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후학들을 ‘우율학파’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실과 바늘처럼 가까우며, 동시에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됩니다.

성혼: 저희 두 사람은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요순시대의 이상사회를 이 땅에 건설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고 도덕이 꽃피는 나라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중국 문화권에서는 훌륭한 군주를 가리켜서 ‘요순과 같다’고 찬양합니다.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을 합쳐 요(堯)․순(舜)․우(禹)․탕(湯)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요순시대는 주로 뛰어난 군주의 치세를 일컬으며 태평성대와 같은 의미입니다. ‘되돌아갈 수 없는 좋은 옛 시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강민우: 특히 이이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자신이 처했던 시대를 무너지는 가옥과 병든 사람에 비유하여 시급한 경장(更張:정치적,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롭게 함))의 필요성을 선조 임금에게 역설합니다. 그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는데, 바로 그 점이 권세에 연연하던 보통 선비들과 다른 점입니다.

성혼: ‘경장’은 정치․사회의 폐단이 누적되었을 때 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일신해야 한다는 개혁안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조선유학사에서 이 경장론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조광조와 이이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이의 역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모든 시기는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更張)의 3기로 구분됩니다. 역사의 전개에서 일단 창업이 이루어지면, 그 혁명의 이념과 정신을 잘 보존하고 전수하는 수성의 시기가 오게 되고, 수성의 시기가 오래 지속하다 보면, 정신과 문물제도가 병들게 되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오게 마련입니다. 그런 경우에 개혁과 같은 경장을 해야 하는데, 경장할 때가 되어서 경장을 하지 못하면 나라에 큰 병폐가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관에서 이이는 당시를 경장의 시대로 규정하고, 사회와 정치의 묵은 폐단을 지양하고 새로운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강민우: 이이는 20대에 과거에 급제하므로 성혼선생보다 먼저 벼슬에 오릅니다. 이후 엘리트 코스에 해당하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요직을 거치면서 동호문답(東湖問答)․「만언봉사(萬言封事)」․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선조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경연에서 임금을 만날 때마다 성인을 본받아 시급히 경장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압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성혼: 그 결과가 임진왜란의 참변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수많은 경장 가운데 이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어진 자를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라는 것과 민생의 안정을 위해 공납제도를 개선하라는 것입니다.

강민우: 공납(貢納)은 조선시대 세제의 하나입니다. 각 지역의 토산물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토공(土貢)이라고도 하며, 이는 정부의 여러 가지 용도에 충당키 위한 것입니다. 공물에는 수공업품으로서 직물·종이․돗자리 등과 각종의 광물·수산물·모피·과실·목재 등이 있습니다.

성혼: 이이는 경장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임시기구로 경제사(經濟司)의 설치를 건의했는데,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의미가 포함된 ‘경제사’에서 바로 개혁을 추진하고 경제를 일으키는 역할을 맡기자는 내용입니다.

강민우: 이이와 달리, 처음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던 성혼선생은 과거시험도 외면하고 오직 학문과 교육 사업에만 전념했 답니다.

성혼: 34세부터 학생(學行)으로 천거되어 여러 번 벼슬이 내려졌으나 받지 않다가, 47세(1581) 되던 해에 종묘서령(宗廟署令: 종5품)과 내섬시 첨정(僉正: 종4품)에 천거되었을 때 처음으로 선조임금을 만났습니다. 저는 임금에게 경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실행하는 임시기구로 혁폐도감의 설치를 건의했습니다. 선조 임금은 저의 말을 듣고 이이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저는 임금에게 이이와 친구이므로 생각이 비슷한 것은 당연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렇듯 저희 두 사람은 경장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하면서 운명 공동체를 이루지만, 이이가 먼저 세상을 뜬 뒤에는 서인 세력이 약화되고 동인세력이 커지면서 이들의 공격이 저에게 집중되어 큰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혁폐도감과 경제사라는 개혁기구의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으니, 두 사람이 평소 이러한 개혁기구의 설치에 대해 필요성을 공감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사실은 제가 임금을 만나기 전에 임금에게 무엇을 말할지 이이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줄 만큼 서로 통하는 사이였고, 이이는 저의 천거를 배후에서 적극 도와주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도 이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성혼: 1583년(선조 16년)에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였습니다. 니탕개(泥湯介)가 이끄는 2만 명의 여진족이 함경도에 침입하자, 이를 막아내기 위해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군마(軍馬)를 바치는 군인에게 전장에 나가는 것을 면제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반대당인 동인들이 들고 일어나 이이에게 무군오국(無君誤國), 즉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명을 씌워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이이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당시 선조는 이이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이의 실수를 임금은 탓하지 않았으나 동인들이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판단하고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이 일로 이이는 끝내 벼슬을 버리고 해주로 낙향했다가, 병이 들어 다음 해 1월에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민우: 이때 이이의 행동을 변명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성혼선생이었죠. 동인의 주장이 허황되고 거짓이라고 말입니다. 이때부터 성혼선생은 동인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동인들은 성혼과 이이를 같은 무리로 묶어서 공격했다지요.

성혼: 일부 동인의 줄기찬 모함과 비난에도 선조 임금은 저와 이이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는 성혼과 이이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두 사람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선조 임금은 벼슬을 버리려는 이이를 극구 만류하고, 벼슬을 사양하는 저를 갖은 정성을 들여 불러들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저를 뒤에서 후원하던 이이와 영의정 박순(朴淳) 등이 세상을 떠난 뒤로 서인세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동인세력이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를 장악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갈수록 외톨이가 되었고, 동인의 공격은 살아있는 성혼과 죽은 이이에게 집중되었던 것이군요.

성혼: 임진왜란 초기에는 세자 광해군과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아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호종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지를 전전하면서 추위와 배고픔, 병마의 고통 속에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를 하여 휴전한 뒤에야 고향 파주로 돌아왔으나, 집은 모두 불타버리고 폐허가 되어 부근 절에서 밥을 얻어먹을 어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더 크게 괴롭힌 것은 육체적 고통보다도 일부 동인들로부터 받은 비판과 모함입니다. 일부 동인들은 제가 서인들과 작당하여 권력을 농단한다고 공격했습니다. 벼슬도 없이 시골에 파묻혀 있는 저에게 권력을 농단한다고 공격한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받은 비판과 모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더라구요.

성혼: 하나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터졌을 때의 일입니다. 최영경(崔永慶)이라는 경상도 처사가 감옥에 있다가 병사했는데, 이 사건을 처리한 중심인물이 바로 저의 절친한 친구인 정철(鄭澈)입니다. 일부 동인들은 제가 정철에게 구명운동을 하지 않아 최영경이 죽었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아들을 보내 최영경을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실권이 없었는데도 동인들은 제가 최영경을 죽였다고 두고두고 공격했습니다.

강민우: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기축옥사로 불립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는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 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릅니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박순을 비판합니다. 선조가 이를 불쾌히 여기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립니다. 낙향한 뒤에, 정여립은 호남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합니다.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합니다. 그러자 이들의 활동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발이 임금에게 전해집니다. 고발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지만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합니다.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서인들, 특히 정철과 그 배후의 성혼․송익필에 원한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성혼: 저의 입장을 더욱 어렵게 만든 사건은 임진왜란 중에 일어납니다. 선조 임금이 밤중에 몰래 궁궐을 떠나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피난할 때 임진 나루터에 이르러 “성혼의 집이 어디 있느냐”라고 호종하던 신하 이홍로(李弘老)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바로 옆에 있는 동네를 가리키며 “저 곳에 산다”고 했습니다.

강민우: 당시 선조 임금은 근처에 있으면서 나와서 배알(拜謁:지위가 높고나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가 뵘)하지 않는 성혼을 매우 섭섭하게 여겼겠군요.

성혼: 그러나 저희 집은 실제로 임진 나루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또한 임금이 언제 이곳으로 피난 왔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호종하던 신하가 임금에게 거짓말을 하여 저를 불충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을 더욱 곤궁한 처지에 빠지게 한 것으로는 선조 임금에게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를 주장한 이정암(李廷馣)을 충신이라고 말한 사건도 있습니다. 선조 임금은 명나라가 일본과 강화하는 것을 반대하고 적극적으로 싸워서 섬멸(殲滅:모조리 무찔러 멸망시킴)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성혼선생이 강화를 찬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성혼: 선조 임금의 섭섭함을 부추긴 또 하나의 사건으로는 제가 내심으로 세자 광해군에게 선위하기를 기대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사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서인들은 개혁에 소극적인 선조 임금에 실망하여 광해군이 집권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럴수록 선조 임금은 세자를 더욱 싫어했습니다.

강민우: 이렇게 성혼과 임금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면서, 급기야 임금은 성혼의 모든 벼슬을 박탈하는 조처를 내립니다. 성혼선생은 가족들을 모두 평안도와 황해도에 남겨둔 체 홀몸으로 파주로 돌아왔으나, 집은 모두 불타 폐허가 되고 사찰에서 끼니를 얻어먹을 정도의 비참한 상황에 놓였다가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죠.

성혼: 저의 정치 행적은 말년에 선조 임금의 미움을 받으며 끝납니다. 그러나 생전에 이이와 힘을 합하여 임금을 성군으로 이끌고,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한시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경장을 촉구하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수차례나 올리고, 혁폐도감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과감하게 개혁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저의 주장은 이이의 개혁안과 기본적으로 일치하여 이이의 개혁운동에도 크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저는 수없이 벼슬을 사양했지만,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상소를 올려 국정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강민우: 성혼과 이이를 흠모하고 따르는 유생들이 반대하는 세력보다 월등히 많았으므로 이들이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이 근 100년이 지나서 숙종 때에 이루어진 것은 아마도 치열한 당쟁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인과 그 후속 당파인 북인과 남인은 두 사람이 생전에 받았던 모함과 선조 임금이 성혼의 관작을 삭탈한 것을 근거로 줄기차게 문묘 배향에 반대했습니다. 반면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두 사람에게 씌워진 비난이 모두 모함이고 이들이야말로 깨끗한 선비의 표상이요, 조선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이라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서인이 독자적으로 집권한 1682년(숙종 8년)에 이르러 성혼과 이이는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지만, 7년 뒤에 남인이 집권하면서 문묘에서 폐출됩니다. 그러다가 5년 뒤인 1694년(숙종 20년)에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문묘에 다시 배향되어 왕조 말까지 이어집니다. 성혼의 일생과 사후의 명성은 이이와 하나로 결속되어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일들은 그 옳고 그름을 떠나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한복판에 두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혼을 단순히 재야의 처사로만 바라보는 것은 매우 협소한 시각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성혼의 학문은 뒷날 사위 윤황을 매개로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등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성혼이 소론파 학문의 종장으로 추앙된 것도 그가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혼: 저와 이이는 본래 한 몸처럼 살았으나, 후학들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기호 유학의 물줄기가 둘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제가 본래부터 소론의 성향이 있었다거나, 이이는 본래부터 노론과 같은 학풍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과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을 토해내는 충성심, 이 둘로 똘똘 뭉친 참선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조선 왕조를 500년간 이끈 정신적 기둥은 바로 이런 참선비들이 뿌리고 키운 씨앗에서 왔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혼: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지금 성균관대학교 경내의 문묘(대성전)에는 성혼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일부 유림이 제사를 올리고 있으나, 일반 국민들은 눈길을 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파주가 낳은 위인으로 이이가 있고, 이이의 제사를 모시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이 법원읍 동문리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 성혼의 흔적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파주 파평면 눌노리 쇠내(우계)에 성혼과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 그리고 성혼의 스승 백인걸을 모신 파산서원(坡山書院)과 성혼이 살던 집터, 그리고 우계서실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제 이이의 분신이 성혼이요, 성혼의 분신이 이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쇠내 개울가에도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위기지학의 처사, 아버지 성수침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위기지학의 처사, 아버지 성수침

 

강민우: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성혼: 아버지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은 대사헌을 지낸 성세순(成世純)의 아들로, 동생 성수종(成守琮)과 함께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웁니다.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나, 기묘사화의 발발로 스승인 조광조와 그 문하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합니다. 관직에 오르는 것을 포기한 성수침은 ‘청송’이라는 편액을 걸고 경서공부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합니다. 1541년 처가가 있는 경기도 파주 우계(牛溪)에서 모친을 봉양하며 재야 처사로 일생을 마칩니다. 그럼에도 명종실록에는 그에 대한 길고도 아름다운 찬사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습니다. 원래 ‘졸기’는 당상관 이상의 고관이 죽었을 때 실어 주는 것이 관례임에도 벼슬이 없는 처사의 졸기를 넣은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강민우: 그만큼 아버지 성수침이 선비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는 뜻이아닐까요?

성혼: 졸기에는 아버지의 생애와 언행이 매우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수침은 아름다운 자질을 갖고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마치 어른처럼 의젓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람들이 효아(孝兒)라고 불렀다. 22세 때 아버지 성세순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 성수종과 함께 지극히 슬퍼하였고, 죽을 마시면서 삼년상을 치렀다. 어떤 나그네가 무덤 옆의 여막(廬幕)을 지나다가 두 아들의 효성에 감동하여 시를 지어 던져주고 갔다고 합니다.”

강민우: 여막은 무덤 옆에 지은 집인 듯한데, 무던무덤 옆에다 왜 집을 지었나요.?

성혼: 여막은 부모상을 당하여 상주가 무덤을 지키기 위하여 그 옆에 지어놓은 임시 거처를 말합니다. 두 형제가 모두 조광조 문하에서 공부하여 명성이 대단했는데, 동생 성수종은 영특했으나 악한 것을 지나치게 미워한데 반해, 성수침은 독실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성수침은 27세 되던 해(1519년)에 기묘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벼슬길을 포기합니다. 경복궁 뒤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집을 짓고 청송당(聽松堂)이라는 현판을 답니다. 솔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살겠다는 의지의 표시입니다.

강민우: 지금은 그 집이 청운중학교 경내로 들어가 없어지고, 청송당이라는 글자를 새긴 바위만이 학교 뒤편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서울 종로구 창성도 158번지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지역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성혼: 아버지는 청송당에 홀로 앉아 날마다 성인의 가르침을 외우고, 태극도(太極圖)에서부터 정자와 주자의 책에 이르기까지 직접 손으로 베껴가면서 성리학을 탐구합니다. 태극은 성리학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주역「계사전」의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는다”고 한데서 유래하지만, 의미상으로는 선진유학의 천(天) 개념과 연관성을 가집니다. 송나라의 주돈이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어 주역에 나타난 태극의 의미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무극(無極)과 동정(動靜)의 개념을 추가하여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동하면 양이 되고, 정하면 음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오행을 추가하여 태극→음양→오행→만물의 우주생성론을 성립시킵니다. 주자(주희)는 다시 이 태극을 리(理)로 규정하여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는 형이상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물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 존재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리는 모든 사물의 존재 이유 또는 까닭으로서 개개의 사물 속에 내재하게 됩니다.

강민우: 성수침은 52세 되던 해 9월에 어머니 김씨를 모시고 파평산(坡平山) 아래 우계 부근에 별장을 정하여 귀향했으며, 이때 성혼선생은 열 살이었습니다. 우계는 ‘쇠노’로 불리는 작은 하천으로서, 지금은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에 해당합니다. 이곳을 별장으로 정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까?

성혼: 아마도 조상의 무덤이 있는 파주 향양리에서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인 파평 윤씨의 처가가 있는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일 겁니다. 아버지는 키가 훤칠하고 풍채가 좋은 호남입니다. 몸에서 풍기는 품격이 높아서 누가 보아도 덕성을 갖춘 군자로 보입니다. 특별히 즐기는 오락 없이 오직 마음 다스리는 공부에만 몰두하여 산중생활을 표현한 시를 잘 짓고, 특히 중국의 동진시대를 살았던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술을 즐기지는 않았으나, 약간 취하면 맑은 목소리로 시를 읊어 집안에 화기가 가득 했습니다.

강민우: 비단옷 같은 것은 몸에 걸치지도 않았으며, 보통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생활고도 오히려 즐거움으로 삼았다지요. 고 하더라구요.

성혼: 친척 가운데 곤궁한 사람이 있으면 재산을 기울여 도와주면서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남의 착한 일을 보면 언제나 사모하면서 잊지 않았으며, 남의 잘못을 보면 곧바로 배척하지 않고 은미한 뜻을 보여 스스로 깨닫게 했습니다. 이렇게 언행이 모나지 않았지만, 의리의 시비를 판단할 때에는 명확하고 엄격했습니다.

강민우: 일찍이 학자들이 ‘도’라는 뜻을 어려워하자,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지요. “도라는 것은 큰 길과 같다고 성현이 말씀하셨는데, 어찌 알기가 어렵다고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힘써 배운 지식을 실행하는 것이다. 말로는 학문을 이룰 수 없다. 공자 문하에 총명하고 영특한 사람이 많았지만, 끝내 도를 전한 사람은 어리석고 둔한 증자뿐이다”라고 하면서, 항상 자신을 닦는데 뜻을 두는 소학을 사람들에게 권했다고 합니다. 소학은 어떤 책인가요?

성혼: 소학은 송나라의 유자징(劉子澄)이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책입니다. 주자가 엮은 것이라고 씌어 있으나, 실은 그의 제자 유자징이 주자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것입니다. 내용에는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이 모아져 있습니다. 주자는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다”라고 비유하여, 소학이 인간교육의 바탕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들어와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은 8세가 되면 초보교육으로 이를 배웁니다.

강민우: 소학은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서, 오늘날 초등교육 정도가 되겠군요.

성혼: 아버지는 항상 책이 가득 찬 방에 혼자 거처하며 오로지 자신을 닦는 수신에만 몰두하고 세상일에는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정치적 현안에 격분하고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라를 경륜할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주를 펼 수 있는 시대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점에서 아버지는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사는 은둔자와는 다릅니다.

강민우: 성수침의 외아들인 성혼선생은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가훈을 배우고 교육을 받다가, 17세 되던 해에는 파주에 내려와서 당시 파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백인걸에게 성리학을 배웁니다. 그래서 청소년기 성혼의 학문은 아버지와 백인걸 두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죠.

성혼: 벼슬이 없는 성수침의 삶은 곤궁하여 종종 식량이 떨어질 정도로 가난했으나, 어머니만은 정성으로 봉양했습니다. 파주에 온 뒤로 아버지는 자신의 호를 파산청은(坡山淸隱)이라 했다가 뒤에는 우계한민(牛溪閑民)이라고 바꿉니다. ‘청은’은 깨끗한 은자를 뜻하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불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부끄럽게 여겨 ‘한민’, 즉 한가한 백성이라고 고칩니다. 그밖에 서재 이름을 죽우당(竹雨堂)이라 하고, 이를 호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성수침을 주로 ‘청송 선생’이라 불렀습니다.

강민우: 만년에 성수침은 몇 년 동안 중풍을 앓다가 72세 되던 해(1564년, 명종 19년) 1월에 세상을 마칩니다. 30세의 아들 성혼이 넓적다리를 베어 낸 피를 약에 섞어서 올리는 등 지극정성을 다했으나 효험이 없었나 봐요.

성혼: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서 국가에서 관․곡식․인력․장례 도구들을 보내 도와주었습니다. 묘소는 성수침의 아버지 성세순이 안장된 파주 향양리에 모셨습니다. 훗날 국가로부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백(淸白: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함)을 스스로 지키는 것을 ‘정(貞)’이라 합니다. 1568년(선조 원년)에는 백인걸과 이이, 그리고 파주 일대 유생들이 발의하여 파산서원을 건립하고, 성수침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냈습니다.

강민우: 이 서원은 1628년(인조 6년)에 성혼의 위패를 추가하고, 1650년(효종 원년)에는 임금의 액자(額字: 현판에 쓴 큰 글자)를 받아 사액서원이 됩니다. 그 뒤로 1705년(숙종 31년)에는 백인걸의 위패를 추가했고, 1785년(정조 9년)에는 기묘명현으로 추앙받은 성혼의 동생 성수종의 위패를 또 추가 했답니다. 이 서원은 1871년(고종 8년)에 대원군이 전국의 사액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죠.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강민우: 안녕하십니까? 강민우라고 합니다. 이이(율곡)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가던 중 이이선생과 항상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던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바로 성혼(우계)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워낙 밀접하여 이이를 알려면 성혼을 알아야 하고 성혼을 알려면 이이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뜻밖에 성혼선생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저로서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 드리고, 많은 배움을 얻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성혼: 저도 강민우님을 만나 21세기의 사회․경제․문화․인생 전반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무척 기쁩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부담 없이 말씀해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혼의 탄생과 가족

 

강민우: 먼저 성혼선생의 개인적 약력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혼: 저는 1535년(중종 35년) 6월 25일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던 서울의 북부 순화방 자택에서 출생했습니다. 바로 청송당이 있던 그 집입니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 청운중학교 부근에 있습니다. 이곳은 백악산 기슭으로 경치가 좋아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대가인 정선(鄭敾)이 그린 그림도 남아있습니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 윤사원(尹士元)의 딸입니다. 윤사원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조카이므로 왕실의 외척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성수침은 비교적 고령인 43세에 아들을 얻습니다. 슬하에 딸이 한 명 더 있으나 아들은 저뿐입니다.

강민우: 43세에 외아들을 얻으셨으니 부모님께서 정말 기뻐하셨겠습니다.

성혼: 아마 그러했을 겁니다. 저는 10세가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면서 아버지 성수침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10세 되던 해에 성수침이 처가가 있는 파주로 이사하면서 저도 아버지를 따라 파주로 가서 농촌 소년이 되었습니다.

강민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15세에는 이미 경학과 역사학에 통달했고, 행실이 바른 소년으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하더라구요. 당시 정승으로 있던 상진(尙震)이 성수침에게 편지를 보내 “자제가 순수하고 바르며 문장을 잘하니 참으로 기남자(奇男子: 재주가 남달리 뛰어난 사내아이)이다. 그대에게 복이 있음을 축하한다”라고 했다지요.

성혼: 과찬이십니다. 저는 17세가 되던 1551년(명종 6년) 7월에 당시 순천 군수로 있던 신여량(申汝樑)의 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부인 신씨는 저보다 네 살 연상입니다. 이이가 22세에 혼인한 것과 비교하면 빠른 편인데, 외아들이므로 후사를 빨리 갖고 싶어했던 부모님의 소망 때문입니다.

강민우: 과거 응시를 단념한 성혼선생은 이해 겨울에 아버지의 권유로 백인걸(白仁傑)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지요.

성혼: 백인걸은 사림을 탄압하던 소윤파 윤형원의 미움을 받아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고향인 파주의 촌장(村庄: 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으로 돌아옵니다. 조광조 문인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아버지 성수침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이도 이곳에서 만납니다. 이이가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가, 1년 뒤에 환속하여 백인걸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 백인걸 문하의 동문으로는 김행(金行)이 있는데, 저는 그와도 평생 친구로 가까이 지냈습니다. 김행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문(祭文)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제문이란 죽은 이를 추모하는 글이지요?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글로 표현한 것이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스승 백인걸선생이 파주에 머문 약 20년 동안 그의 문하에서 이이 등 많은 학자들을 배출합니다. 백인걸이 파주 지역을 성리학의 요람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공로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혼인한지 2년이 지난 19세에 첫 아들 문영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일찍 죽습니다. 25세에 낳은 둘째 아들 문준이 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 가통을 이어 갔으며, 진사를 거쳐 벼슬길에 올라 인조 때는 현감을 지냅니다.

강민우: 아버지 성혼의 영향을 받아 학문이 높고 글씨를 잘 썼다고 전해지더라구요.

성혼: 제가 보기에는 역량이 많이 부족합니다. 저는 21세 무렵에 큰 병을 앓고 나서 비위가 허약해져 고질병이 생겼습니다. 늘 음식을 잘 먹지 못하여 몸이 말라 뼈만 남고 현기증이 심하며 피를 토하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땀이 많이 나는 증상이 있었으며, 벼슬을 사양할 때도 항상 임금에게 고질병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강민우: 현대 의학으로 무슨 병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위장을 비롯한 소화기 계통의 병으로 보입니다.

성혼: 병이 생긴 이유에 대해 집안사람들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느라 어린 나이에 너무 몸을 혹사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성수침은 집안이 가난한데도 마치 손님처럼 집안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안일을 전담하여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아서 그 음식으로 부모님을 봉양했습니다. 제가 6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높은 벼슬을 거부한 것은 아버지처럼 자신을 연마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일생을 마치겠다는 신념 때문이기도 했지만, 벼슬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약한 건강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강민우: ‘위기지학’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성혼: 그렇습니다. 이 말은 공자가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오늘날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데서 유래합니다. ‘위기지학’은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라는 의미로서,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출세지향의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상대되는 말입니다.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자는 “위기지학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이루어주는데 비해, 위인지학은 남에게 인정받는 학문을 하여 끝내는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라고 하여 위인지학을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이후 조선에서 선비를 평가할 때는 위기지학을 했는지가 그 기준이 되죠. 성혼․정엽(鄭曄)․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이 모두 위기지학에 힘쓴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거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