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율곡학 포럼 제2차 3부

 

 

3부. 기획주제: 율곡과 기호유학
발표: 소론계 격물(格物) 논변을 통해 본 주자 격물설의 쟁점

이원준(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논평: 김영건(전 서강대 외래교수)
토론 및 사회: 최영진(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국제 율곡학 포럼 제2차 1, 2부

 

제2차 국제율곡학 포럼, 1부, 2부 동영상입니다.

포럼제목: 동남아시아 지역 한국문화 교육 현황과 기호유학
일시: 11월 25일 오후 1시30분 – 6시30분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소 세미나실

<프로그램>

1부. 개회식
사회: 단윤진(단국대학교 강사)
개회사: 사회자
원장 인사: 우관제(파주문화원 원장)

2부. 동남아시아 지역 한국문화와 교육 현황
1. 싱가포르에서의 한국어 교육의 현황
지서원(싱가포르 국립대 교수)
2. 캄보디아 학습자를 위한 효과적인 한국문화 교수법
클롯 잔데카(왕립 프놈펜대학 교수)
3. 말레시아 지역의 한국문화 교육의 현황과 시사점
장문정(경희대학교 교수)
4. 베트남 대학의 한국문화 교육 현황 및 발전 방안
Phuong Mai(베트남 호치민 국립대 교수)
5. 토론
사회: 최영진(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2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2

 

강민우: 실제로 주리․주기의 관점은 이이의 이론과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성혼: 그렇습니다. 주리․주기는 리와 기가 함께 있는 속에 나아가 분리시켜는 방법입니다. 비록 리와 기가 함께 있음을 전제하지만, 결국 리를 주로 하거나 기를 주로 하는 식으로 분리시키기 때문에 합쳐서 보려는 이이의 관점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이는 항상 리와 기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이는 리와 기의 관계를 그릇에 담긴 물에 비유합니다. 물은 리에 해당하고 그릇은 기에 해당합니다. 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반드시 그릇이 움직여야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릇이 움직이고 나서 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움직이면 동시에 물이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릇 속의 물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듯이, 리는 결코 스스로 움직이거나 발동할 수 없다는 뜻이군요. 이이는 이러한 리의 특징을 무위(無爲)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리는 실제로 작용성이 없는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발동(發)과 같은 말을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이는 이황의 ‘리가 발한다’는 말이 잘못이라고 비판한 것이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해서는 이이의 견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연지성은 순수한 성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며, 기질지성은 기질과 기질 속에 들어있는 성을 함께 말한 것입니다. 실재하는 성은 기질지성 하나이며, 이 기질지성 속에서 성(리)만을 가리킨 것이 바로 본연지성입니다. 이것은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정은 칠정 하나이며 이때의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듯이, 성은 기질지성 하나이며 이때의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포함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하듯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근원은 본연지성이고 칠정의 근원은 기질지성이 라 말한 것이군요.

성혼: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에 대한 저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현실사회에 대한 반영입니다. 예컨대 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의 목숨을 앗아간 이기(李芑) 같은 악한 인물이 천수를 다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가 작용하여 리가 무너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때도 기가 홀로 작용하고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이의 말처럼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으나, 리와 기가 함께 있는 가운데 기가 주가 되기 때문에 이기와 같은 악한 자가 승리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이이와 수 차례의 편지를 통해서 리와 기, 사단과 칠정, 그리고 인심과 도심의 문제를 토론하지만, 오히려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거나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는 것이고 인심은 형기에서 생겨난 것이다’는 이황과 주자의 주장을 버리지 못하여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 것이군요.

성혼: 결국 이이는 답답함을 느끼고 다섯 번째 편지에서는 답장 대신 시를 한 수 지어 보내왔습니다.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항상 함께 있음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원기(元氣)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元氣何端始

무형이 유형 가운데 있도다 無形在有形

근원을 찾으니 본래 합해 있음을 알겠다 窮源知本合

리와 기는 본래 합쳐진 것이요, 理氣本合也,

처음으로 합쳐진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非有始合之時

리와 기를 둘로 나누려는 자는 欲以理氣二之者

모두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皆非知道者也. 「理氣詠」

그리고 이이는 시 뒤에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성이란 리와 기가 합한 것입니다. 리가 기 가운데 있는 뒤에 성이 되는 것이니, 만약 형질(기) 가운데 있지 않으면 리라고 해야 하고 성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형질에는 리와 기가 있으며, 그 가운데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본연지성입니다. 자사와 맹자는 본연지성을 말하고 정자와 장자(장재)는 기질지성을 말하지만, 그 실상은 하나의 성입니다. 다만 주로 하여 말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주로 하여 말한 뜻을 알지 못하고 성이 둘이라 말하거나 정에 이발과 기발의 구분이 있다고 말한다면, 어찌 리를 알고 성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강민우: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두 개의 성이 아니듯이, 사단과 칠정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이 아니라는 뜻이군요. 성은 기질지성 하나이고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 것이 본연지성이듯이, 정도 칠정 하나이고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 것이 사단인 것이고요.

성혼: 이이의 다섯 번째 편지를 받은 뒤에 비로소 서로의 의견이 하나로 귀착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를 어느 선현의 말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해하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이이가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이의 비판처럼, 이기호발설이 리와 기가 각각 나온다(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리와 기가 동시에 나오지만, 다만 리가 주도할 경우도 있고 기가 주도할 경우도 있다는 뜻입니다. 리가 주도할 때는 ‘이발’이 되고, 기가 주도할 때는 ‘기발’이 됩니다.

강민우: 그래서 성혼선생은 이이의 설과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이황과도 다르고 이이와도 다른 ‘이기일발설’을 내세운 것이군요. 이이는 성혼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에서 ‘어떤 말은 나(이이)의 견해와 일치하지만, 어떤 말은 이황의 이론을 끌어오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은 1572년(선조 5년) 여름 성혼이 38세, 이이가 37세 때 여섯 차례의 왕복 편지를 통해 이루어진 토론의 요지입니다. 이상의 토론 내용을 정리해 보면, 토론이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좁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혼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 출발하지만, 이이의 비판을 받으면서 ‘리와 기가 각각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이 하나임을 전제하고, 하나의 성이 발할 때 다만 리가 주도할 때도 있고 기가 주도할 될 때도 있다는 ‘주리주기설’ 또는 ‘이기일발설’로 수정합니다. 이것은 이황의 ‘사단은 리(또는 본연지성)에 근원하므로 이발이고, 칠정은 기(또는 기질지성)에 근원하므로 기발이다’는 주장과는 다릅니다. 또한 이이 역시 처음에는 ‘기발이승일도’를 내세워서 기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리의 가치를 폄하하는 데로 흘렀지만, 성혼의 지적을 받으면서 리가 중하기도 하고 기가 중하기도 하다는 성혼의 주리주기설을 일부 긍정하면서 ‘기발이승일도’를 보완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단․칠정이 아니라 인심․도심의 내용에 반영됩니다. ‘도심은 리가 주가 되고 인심은 기가 주가 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강민우: 성혼과 이이의 논쟁에서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냐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성혼: 그렇게 판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두 사람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이는 우주를 존재론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의 심성의 문제를 해석합니다. 반면 성혼은 인간의 윤리적 당위성에서 출발하여 우주의 원리를 역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이의 설명방법은 오늘날의 과학철학에 가깝고, 성혼의 설명방법은 윤리철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명방법의 차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행동양식에 있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에서 선을 추구하려는 자세와 도덕적 수양을 통해 선을 추구하려는 행동양식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이는 전자에 속하고 성혼은 후자에 속합니다.

강민우: 결국 사단과 칠정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어떻게 선을 실현할 것인가를 따지는 과정에서 이들 논쟁이 발생된 것이군요. 이이가 현실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론을 전개한 것이라면, 성혼선생은 도덕의 당위론적 관점에서 이론을 전개한 것이고요.

성혼: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이의 이론이 더 타당하지만, 도덕적 요청이나 필요성에서 보면 저의 이론이 더 타당합니다.

강민우: 지금까지의 설명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혼: 저도 강민우님과 여러 가지 이론을 논의할 수 있어서 매우 즐거웠습니다.

 

 

<참고문헌>

한영우, 우계 성혼 평전, 민음사, 2016

성기영 글, 이현주 그림, 만화 우계 성혼, 우계문화재단, 2019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1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1

 

강민우: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나고 기대승이 세상을 떠난 해에, 성혼과 이이가 다시 사단과 칠정을 가지고 이기논쟁을 벌입니다. 이들 논쟁은 기본적으로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을 심화시켰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성혼: 그것은 제가 이황의 설에서 출발하고 이이는 기대승의 설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리와 기가 서로 섞일 수 없다는 불상잡(不相雜)의 입장에서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한다면, 이이는 비록 리와 기가 형이상의 원리와 형이하의 사물로서 구분된다고 하더라도 사단칠정과 같은 인간의 심성에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기대승의 불상리(不相離)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결국 두 선현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겠다는 것이 논쟁을 벌인 뜻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 역시 처음에는 기대승의 이론을 지지하고 이황의 이론에 회의를 품었다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혼선생의 견해가 점차 이황의 이기호발설로 기울어지고, 결국 이이와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면서 성혼선생이 먼저 논쟁을 걸었다죠.

성혼: 제가 질문하고 이이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1592년 한 해 동안 총 9차례에 걸쳐 편지가 왕복됩니다. 제가 모두 9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가운데 3․7․8․9번째 편지는 유실되고 이이의 답신만이 전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의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다소 한계가 있겠습니다. 유실된 편지는 아마도 임진왜란 때 집이 불타면서 함께 없어지거나 문집을 만들 때 누락된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결국 성혼선생의 사단과 칠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1․2․4․5․6번째 보낸 편지가 전부이군요.

성혼: 이이와의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은 제가 질문하고 이이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래서 분량 면에서도 이이의 대답내용이 몇 곱절이나 많고, 저의 질문내용은 상대적으로 소략합니다.

강민우: 이이와 논변을 전개한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혼: 저는 일찍이 이황을 매우 존숭했음에도,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중용(中庸)의 서문에 나오는 주자의 글을 보고, 즉 주자가 성명에 근원하는 도심과 형기에서 생겨나는 인심으로 도심과 인심을 둘로 나눈 것을 보고,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자는 도심과 인심의 차이를 혹원혹생(或原或生)으로 설명합니다. ‘혹원혹생’은 도심은 혹 성명에 근원하기도 하고 인심은 혹 형기에서 생겨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이이에게 질문하면서 이이와의 논변이 시작된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도 처음에는 기대승의 이론에 기울어졌으나, 주자의 인심․도심에 대한 해석을 보고 이황의 뜻에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군요. 그리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적극 비판하는 이이에게 인심․도심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타당하다는 것을 질문합니다. 인심․도심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사단․칠정에 적용하면, 기대승의 견해보다는 이황의 견해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죠.

성혼: 그렇습니다. 도심․인심을 리에 근원하는 것과 기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상대시켜 볼 수 있다면, 사단․칠정도 같은 논리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리에 근원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 근원하므로 기가 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타당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강민우: 결국 성혼선생은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같은 맥락에서 보고, 사단․칠정의 내용보다는 인심․도심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는 이이를 반격했군요.

성혼: 물론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은 성이 발한 것과 심이 발한 것이라는 명목상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심의 작용을 말한 것입니다. 성리학의 심통성정(心統性情)에 따르면, 심이 성과 정을 총괄하므로 성이 발한 사단․칠정이나 심이 발한 인심․도심은 모두 심의 작용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심․도심이 비록 심에서 발한 것이지만 성(性)․정(情)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심에서 발한 인심․도심이든 성에서 발한 사단․칠정이든, 단지 명목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심․도심을 기에 근원하는 것과 리에 근원하는 것으로 상대시켜 볼 수 있으면, 사단․칠정도 리가 발한 것과 기가 발한 것으로 상대시켜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주자의 인심․도심의 해석에 근거하여 볼 때, 이이와 달리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타당하다는 말씀이군요.

성혼: 주자가 말한 ‘도심은 리에 근원하고 인심은 기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이황이 말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타당합니다. 물론 성혼도 이이처럼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 하나로 보는 것이 간단하고 분명한 장점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를 저의 학설로 삼고도 싶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을 참고해보면 모두 둘로 나누어 설명하기 때문에 이이의 견해를 따를 수 없었습니다.

강민우: 인심과 도심을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듯이, 사단․칠정도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성혼선생은 이이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황의 견해는 정당하다’고 강변했다지요.

성혼: 사단과 칠정을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으니,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입니다. 그 이유로써 사단은 인․의․예․지의 성에 근원하고 칠정은 형기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단과 칠정이 서로 다른 별개의 정이라는 말입니다. 기대승처럼 정은 칠정 하나이므로 칠정의 중절한 것을 사단으로 보는 것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강민우: 그렇지만 성혼선생이 이황의 이기호발설 내용을 모두 인정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황의 견해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성혼: 이이의 말처럼, 사단의 근원인 리와 칠정의 근원인 기가 각각 따로 있다가 발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합니다. 이황의 주장처럼 사단의 근원은 리가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가 된다면, 자칫 리와 기가 각각 따로 떨어져 있다가 서로 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단과 칠정으로 발하기 이전의 성은 하나여야 합니다.

강민우: 결국 성혼선생과 이황의 가장 큰 차이는 정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성을 하나로 전제한다는 사실이군요.

성혼: 이황은 사단과 칠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상대시켜 설명합니다. 본연지성은 순수한 성만을 말하며, 기질지성은 기질과 기질 속에 내재된 성을 아울러 말합니다. 실재하는 것은 기질지성 하나이며, 그 가운데 성만을 가리킨 것이 본연지성입니다. 이황처럼 사단의 근원은 본연지성이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질지성이 된다면, 두 개의 성이 있게 됩니다. 이황의 이러한 견해에는 반대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성이 발할 때에, 다만 리가 주가 되면 사단이 되고 기가 주가 되면 칠정이 될 뿐입니다.

강민우: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성혼: 리를 주로 하는 사단과 기를 주로 하는 칠정이라는 두 가지 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인․의․예․지의 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리가 주가 되며, 칠정은 형기에서 감응하여 생긴 것이므로 기가 주가 됩니다. ‘리가 주가 된다’는 것은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기가 주가 된다’는 것은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단과 칠정은 성이 이미 발하여 드러난 정이므로 모두 리와 기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이황처럼 사단의 근원은 본연지성이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질지성이 된다는 구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강민우: 이것은 이이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한 내용이기도 하죠.

성혼: 그렇습니다. 만약 이황처럼 사단의 근원이 본연지성이고 칠정의 근원이 기질지성이라면, 아직 발하지 않은 성의 상태에는 두 개의 성이 있게 됩니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두 개의 근본이 있게 되니 옳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리를 제기합니다. 저는 이황과 달리, 성이 하나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성은 하나이고, 다만 이 하나의 성이 막 발하는 시점에 주리․주기의 논리를 적용합니다.

강민우: ‘주리’는 리를 주로 한다는 뜻이고 ‘주기’는 기를 주로 한다는 뜻이죠. 이 말에는 이미 리와 기가 함께 있음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리와 기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있어야 ‘리를 주로 한다’거나 ‘기를 주로 한다’는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혼: 어찌되었든 성이 발하여 드러난 정은 이미 리와 기를 겸합니다. 사단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칠정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습니다. 이황처럼, 정으로 발하기 이전의 성에는 사단의 근원인 본연지성과 칠정의 근원인 기질지성이라는 두 개의 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막 발할 즈음’에는 리를 주로 하는 사단과 기를 주로 하는 칠정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사단과 칠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이고, 다만 하나의 성이 발하여 사단과 칠정으로 드러날 때에 주가 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군요.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가 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혼선생이 이해하는 이황 호발설의 뜻인거죠.

성혼: 결국 저도 이황처럼 사단과 칠정을 서로 다른 별개의 정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이이가 정은 칠정 하나이며,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사단으로 보는 것과 다릅니다. 그렇지만 이이처럼 성이 하나인 것에는 동의합니다. 이것은 이황이 사단과 칠정의 근원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하는 것과 분명히 다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의 사단칠정설에는 이황의 견해와 같은 부분도 있고 이이의 견해와 같은 부분도 있군요. 반대로 말하면, 이황의 견해와 다른 부분도 있고 이이의 견해와 다른 부분도 있다는 뜻이겠군요.

성혼: 저는 ‘이기일발(理氣一發)’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리와 기가 하나로 발한다는 뜻으로, 결국 근원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황처럼 정이 발한 근원으로서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든 칠정이든 그 근원은 하나의 성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이의 견해와 일치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성이 발하여 정이 되는 그 시점, 즉 성혼선생의 표현대로 ‘막 발할 즈음’에는 주가 되는 것에 따라 사단과 칠정이 구분된다는 것이죠.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므로 하나의 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이 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황의 견해와 일치하겠군요.

성혼: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가 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한 이황의 이기호발설 내용입니다. 결국 저의 해석은 이황과도 다르고 이이와도 다릅니다. 이황과의 차이는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이와의 차이는 리를 주로 하여 말하거나 기를 주로 하여 말함에 따라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구분해본다는 점입니다.

강민우: 결국 이황처럼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둘로 구분하지는 않지만,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서로 다른 정으로 이해한다는 말이군요. 이것이 바로 성혼 사단칠정설의 특징이겠습니다. 그래서 성혼선생이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종합하여 절충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요.

성혼: 이이처럼 사단과 칠정을 막론하고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로 보면서도, 동시에 이황처럼 리가 주가 되는 사단과 기가 주가 되는 칠정이라는 서로 다른 두개의 정으로 구분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이황의 최종 수정안인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에서 ‘기수지’와 ‘이승지’의 표현에 대해서는 반대했다죠.

성혼: 저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이발(理發)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발(氣發)임을 인정할 뿐이지, 그 뒤에 나오는 ‘기가 따른다(氣隨之)’와 ‘리가 탄다는(理乘之)’는 표현에는 장황하다는 느낌이 들어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발과 기발 뒤에 ‘기수지’와 ‘이승지’를 덧붙일 경우, 이이의 비판에서처럼 시간상의 선후관계가 설정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이황이 ‘기수지’와 ‘이승지’를 추가한 것은 기대승의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다’는 불상리(不相離)의 조건을 수용한데 따른 것입니다.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이며,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은 이발과 기발에다 ‘기수지’와 ‘이승지’를 덧붙인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기수지’와 ‘이승지’의 추가 없이 ‘사단은 리가 발한 것(理發)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氣發)’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본 것이군요. ‘기수지’와 ‘이승지’를 더하면 자칫 ‘리가 발하고 나서 기가 따르거나 기가 발하고 나서 리가 타게 되어’ 리와 기 사이에 선후관계가 생기게 됩니다. 굳이 ‘기수지’와 ‘이승지’를 추가하여 리와 기 사이에 시간적 선후관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성혼: 물론 ‘사단은 리가 주가 되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된다’는 식의 주리와 주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저의 주장에 대해 이이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리․주기의 견해는 궁극적으로 리와 기를 둘로 분리시켜 보는 이원론의 한계를 갖기 때문입니다. 이이는 리와 기는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일원론적 사고를 끝까지 견지합니다. 리는 항상 기에 타고 있으므로 기가 없으면 리는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강민우: 그래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막론하고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으므로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하나’라는 의미의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주장한 것이죠.

성혼: 사단도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이며, 칠정도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입니다.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발하는 것은 기이고 다만 리는 기 위에 올라탈 뿐입니다. 그러나 기는 선악을 겸하므로 결국 사단에도 선악이 있고 칠정에도 선악이 있게 됩니다. 이이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사단에도 선악이 있게 되므로 사단을 순선한 감정으로 보는 맹자의 본뜻에 어긋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이가 직접 ‘사단에도 선악이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발이승일도’의 논리에 따르면 사단에도 선악이 있게 되므로 순선함을 표방하는 사단의 도덕적 가치가 위태로워집니다.

강민우: 이이의 말처럼 ‘칠정 속에 사단이 있고, 사단은 칠정의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다’면,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칠정을 결코 포기할 수 없겠습니다. 이황처럼 칠정은 절제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분방한 감정으로 보았던 것이네요. 성혼선생의 언행이 조심하고 신중한 것과 달리, 이이의 언행이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모습을 보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어 보입니다.

성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는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매우 다릅니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따르면,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므로 선하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므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가능한 칠정을 절제하고 사단을 확충해야 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황의 학문이 마치 종교인처럼 엄숙하고 감정을 억제하면서 도덕적 수양에 치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민우: 이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는 형이하의 개념으로 실제로 발동이 가능하지만, 리는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실제로 발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황의 ‘이발’이라는 말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합니다. 리와 기를 이렇게 형이상의 개념과 형이하의 개념으로 구분하는 것에서 보면, 이이의 견해가 이황의 견해보다 한층 논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저는 사단과 칠정의 해석에서 이황의 학설을 더 신봉합니다. 이황의 학설이 주자학의 본질에 더 맞다고 보고, 이황을 비판한 이이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이러한 논쟁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벌어졌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신념에 찬 모습으로 강경하게 맞섰습니다. 그러나 논쟁이 길어질수록 이이의 견해도 조금씩 수용하여 절충적인 입장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과 칠정을 막론하고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이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가 발한 것이다’는 이황의 견해도 수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기일발설’과 ‘주리주기설’입니다. 결국 저의 견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의 중간쯤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이이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지 완전히 승복한 것은 아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만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 이이의 이기설이 매우 독창적이고 탁월하여 자신의 스승이 되었다고 토로한 것으로 보아 만년에는 이이의 이기설에 상당 부분 동조한 듯합니다.

성혼: 여기에서 이이의 이론을 조금 더 보충하겠습니다. 이이에 의하면, 실재하는 정은 칠정 하나이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말합니다. 이것은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이이는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컨대 칠정 가운데 기쁨․슬픔․사랑․욕구는 인(仁)의 단서가 되고, 분노․미움은 의(義)의 단서가 되며, 두려움은 예(禮)의 단서가 되고, 옳고 그름의 아는 것은 지(智)의 단서가 됩니다. 반대로 사단 가운데도 칠정이 들어있습니다. 예컨대 사단의 측은한 마음(仁)은 칠정의 슬픔에 속하고, 사단의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義)은 칠정의 미움에 속하며, 사단의 공경하거나 사양하는 마음(禮)은 칠정의 두려움에 속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智)은 지(知)에 속합니다.

강민우: 이황이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므로 선하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므로 악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라는 선과 악의 대립적 개념으로 보는 것과 달리, 이이는 칠정 가운데도 사단이 있고 사단 가운데도 칠정이 있다는 상호 내포적 관계로 이해합니다. 이이의 주장처럼 사단 가운데도 칠정이 있고 칠정 가운데도 사단이 있다면, 사단과 칠정을 무엇 때문에 개념적으로 구분했는지 그 이유가 무색해질 수 있겠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하나의 정으로 이해합니다. 하나의 정이므로 사단이 칠정 속에 포함되기도 하고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결국 칠정에도 사단의 의미가 있고 사단에도 칠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대해 찬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황처럼 사단은 사단이고 칠정은 칠정으로 서로 다른 두개의 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래서 이이는 성혼선생처럼 사단을 도심에, 칠정을 인심에 대비시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한 것이죠.

성혼: 저는 사단․칠정의 관계를 인심․도심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같은 구조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심이 성과 정과 총괄한다(心統性情)면, 성이 발한 사단․칠정이나 심이 발한 인심․도심은 모두 우리 마음의 작용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사단칠정은 성이 발한 것이고, 인심도심은 심이 발한 것이라는 명목상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강민우: 성에서 발한 사단칠정이든 심에서 발한 인심도심이든 모두 마음의 작용 가운데 이름만 다를 뿐이라는 말씀이군요.

성혼: 도심과 인심의 차이에 대해서도 도심은 사단처럼 선한 것이고 인심은 칠정처럼 그렇지 못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주자가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는 것(或原)이고 인심은 형기에서 생겨난 것(或生)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 나아가 이황은 성명을 리로 보고 형기를 기로 봄으로써, 도심은 리에서 나온 것이고 인심을 기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합니다. 주자와 이황은 모두 도심과 인심을 리와 기, 선과 악 등의 대립적 구조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이는 도심과 인심을 모두 같은 성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합니다. 도심도 성에서 나온 것이고 인심도 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인심과 도심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이며, 다만 발한 이후에 인심과 도심으로 갈라질 뿐입니다.

강민우: 이이는 사단․칠정과 마찬가지로, 인심과 도심의 관계를 ‘근원은 하나이나 발한 이후에 둘로 나누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일원이이류(一源而二流)로 말하는데, 하나의 근원이 흘러가서 둘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혼: 또한 이이는 ‘사단은 도심에 해당하나, 칠정은 정의 전체를 말하므로 도심과 인심을 합친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같은 구조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같은 구조’란 사단과 도심은 모두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과 인심은 모두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강민우: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타당하다는 말씀이군요. 결국 성혼선생께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인심․도심의 내용을 가지고 논증한 셈이군요.

성혼: 이이는 인심․도심의 관계를 사람이 말에 타는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말을 타고 문을 나설 때, 혹 말이 사람의 뜻을 따라 나가는 경우도 있고, 혹 사람이 말이 가는대로 맡겨두고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이 사람의 뜻에 따라 나가는 것은 사람이 주가 되므로 도심이고, 사람이 말이 가는 대로 맡겨두고 나가는 것은 말이 주가 되므로 인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말을 타고 문을 나서기 전에는 사람이 주가 될지 말이 주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도심과 인심은 처음부터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강민우: 이것은 성혼선생이 주장하는 ‘이기일발설’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사단이든 칠정이든 성은 하나이며, 이 하나의 성이 막 발할 때에 사단은 리가 주가 되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는 것처럼, 도심은 사람(리)이 주가 되고 인심은 말(기)이 주가 됩니다. 결국 이이의 인심․도심에 대한 견해는 성혼선생의 사단․칠정에 대한 견해와 비슷해 보입니다. 이것은 이이가 성혼선생과 토론을 거치면서 성혼의 이론을 수용한 것이 아닐까요.

성혼: 꼭 그렇지 않습니다. ‘리를 주로 한다’거나 ‘기를 주로 한다’는 주리․주기의 관점은 결국 리와 기를 분리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이는 리와 기를 분리시키는 것에는 결코 반대합니다. 이이에 의하면,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으므로 도심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인심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습니다. 도심에도 기가 있고 인심에도 리가 있으니, 성인이라도 도심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일반 사람이라도 인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인도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싶고, 추울 때는 옷을 입고 싶어 합니다. 결국 인심이 지나치지 않으면, 인심이라도 도심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이의 생각입니다.

2022 파주 국제율곡학포럼

제1회 국제율곡학포럼

율곡과 기호유학 – 호락논변을 중심으로 –

 

 

일시 : 2022년 8월 19일(오후 1시 – 6시)

장소 : 파주 운정행복센터 3층 복지동 통합회의실

주최 : 파주문화원

주관 : 율곡학사업단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일정표>

1.등록 1시-1시 30분

2.개회식 1시 30-2시 사회(박지훈 : 서영대 교수)

개회사 : 사회자

인사말 : 우관제(파주문화원 원장)

축사

3.기조발표 2시 -2시 40분

제목 : 기호유학이 한국문화 발전에 이룩한 공헌

발표 : 윤사순(고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휴식> 2시 40분-3시

 

4.주제발표 3시 – 4시 40분

<논문1>

제목 : 기호유학의 특질 :호락논변을 중심으로

발표 : 곽신환(숭실대 명예교수)

논평 : 이봉규(인하대 교수) 논평문

 

<논문2>

제목 : 호락논변에 대한 연구성과와 전망

발표 : 배재성(성균관대 연구교수)

논평 : 邢麗菊(중국 復旦大 한국학연구소 소장)

 

<휴식> 4시 40분 –5시

5.종합토론 및 폐회 : 좌장(최영진, 성균관대 명예교수) 5시 – 6시

 

<파주문화원장 인사말>

안녕하십니까.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시고 참석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발표자 및  논평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파주는 율곡의 본향이며 기호유학의 본산입니다. 파주문화원은 이와 같은 전통을 계승하여 <율곡과 기호유학>이라는 주제로, 율곡을 중심으로 기호유학에 대하여 논의하고 토론하는 국제율곡학포럼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본 문화원은 기호유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기호유학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공사다망하실 줄 믿시오나 끝까지 참석하셔서 질정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8월 19일

파주문화원 원장 우관제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2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2

 

강민우: 실제로 주리․주기의 관점은 이이의 이론과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성혼: 그렇습니다. 주리․주기는 리와 기가 함께 있는 속에 나아가 분리시켜는 방법입니다. 비록 리와 기가 함께 있음을 전제하지만, 결국 리를 주로 하거나 기를 주로 하는 식으로 분리시키기 때문에 합쳐서 보려는 이이의 관점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이는 항상 리와 기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이는 리와 기의 관계를 그릇에 담긴 물에 비유합니다. 물은 리에 해당하고 그릇은 기에 해당합니다. 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반드시 그릇이 움직여야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릇이 움직이고 나서 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움직이면 동시에 물이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릇 속의 물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듯이, 리는 결코 스스로 움직이거나 발동할 수 없다는 뜻이군요. 이이는 이러한 리의 특징을 무위(無爲)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리는 실제로 작용성이 없는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발동(發)과 같은 말을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이는 이황의 ‘리가 발한다’는 말이 잘못이라고 비판한 것이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해서는 이이의 견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연지성은 순수한 성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며, 기질지성은 기질과 기질 속에 들어있는 성을 함께 말한 것입니다. 실재하는 성은 기질지성 하나이며, 이 기질지성 속에서 성(리)만을 가리킨 것이 바로 본연지성입니다. 이것은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정은 칠정 하나이며 이때의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듯이, 성은 기질지성 하나이며 이때의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포함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하듯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근원은 본연지성이고 칠정의 근원은 기질지성이 라 말한 것이군요.

성혼: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에 대한 저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현실사회에 대한 반영입니다. 예컨대 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의 목숨을 앗아간 이기(李芑) 같은 악한 인물이 천수를 다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가 작용하여 리가 무너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때도 기가 홀로 작용하고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이의 말처럼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으나, 리와 기가 함께 있는 가운데 기가 주가 되기 때문에 이기와 같은 악한 자가 승리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이이와 수 차례의 편지를 통해서 리와 기, 사단과 칠정, 그리고 인심과 도심의 문제를 토론하지만, 오히려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거나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는 것이고 인심은 형기에서 생겨난 것이다’는 이황과 주자의 주장을 버리지 못하여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 것이군요.

성혼: 결국 이이는 답답함을 느끼고 다섯 번째 편지에서는 답장 대신 시를 한 수 지어 보내왔습니다.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항상 함께 있음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원기(元氣)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元氣何端始

무형이 유형 가운데 있도다 無形在有形

근원을 찾으니 본래 합해 있음을 알겠다 窮源知本合

리와 기는 본래 합쳐진 것이요, 理氣本合也,

처음으로 합쳐진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非有始合之時

리와 기를 둘로 나누려는 자는 欲以理氣二之者

모두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皆非知道者也. 「理氣詠」

그리고 이이는 시 뒤에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성이란 리와 기가 합한 것입니다. 리가 기 가운데 있는 뒤에 성이 되는 것이니, 만약 형질(기) 가운데 있지 않으면 리라고 해야 하고 성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형질에는 리와 기가 있으며, 그 가운데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본연지성입니다. 자사와 맹자는 본연지성을 말하고 정자와 장자(장재)는 기질지성을 말하지만, 그 실상은 하나의 성입니다. 다만 주로 하여 말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주로 하여 말한 뜻을 알지 못하고 성이 둘이라 말하거나 정에 이발과 기발의 구분이 있다고 말한다면, 어찌 리를 알고 성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강민우: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두 개의 성이 아니듯이, 사단과 칠정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이 아니라는 뜻이군요. 성은 기질지성 하나이고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 것이 본연지성이듯이, 정도 칠정 하나이고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 것이 사단인 것이고요.

성혼: 이이의 다섯 번째 편지를 받은 뒤에 비로소 서로의 의견이 하나로 귀착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를 어느 선현의 말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해하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이이가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이의 비판처럼, 이기호발설이 리와 기가 각각 나온다(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리와 기가 동시에 나오지만, 다만 리가 주도할 경우도 있고 기가 주도할 경우도 있다는 뜻입니다. 리가 주도할 때는 ‘이발’이 되고, 기가 주도할 때는 ‘기발’이 됩니다.

강민우: 그래서 성혼선생은 이이의 설과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이황과도 다르고 이이와도 다른 ‘이기일발설’을 내세운 것이군요. 이이는 성혼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에서 ‘어떤 말은 나(이이)의 견해와 일치하지만, 어떤 말은 이황의 이론을 끌어오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은 1572년(선조 5년) 여름 성혼이 38세, 이이가 37세 때 여섯 차례의 왕복 편지를 통해 이루어진 토론의 요지입니다. 이상의 토론 내용을 정리해 보면, 토론이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좁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혼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 출발하지만, 이이의 비판을 받으면서 ‘리와 기가 각각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이 하나임을 전제하고, 하나의 성이 발할 때 다만 리가 주도할 때도 있고 기가 주도할 될 때도 있다는 ‘주리주기설’ 또는 ‘이기일발설’로 수정합니다. 이것은 이황의 ‘사단은 리(또는 본연지성)에 근원하므로 이발이고, 칠정은 기(또는 기질지성)에 근원하므로 기발이다’는 주장과는 다릅니다. 또한 이이 역시 처음에는 ‘기발이승일도’를 내세워서 기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리의 가치를 폄하하는 데로 흘렀지만, 성혼의 지적을 받으면서 리가 중하기도 하고 기가 중하기도 하다는 성혼의 주리주기설을 일부 긍정하면서 ‘기발이승일도’를 보완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단․칠정이 아니라 인심․도심의 내용에 반영됩니다. ‘도심은 리가 주가 되고 인심은 기가 주가 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강민우: 성혼과 이이의 논쟁에서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냐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성혼: 그렇게 판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두 사람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이는 우주를 존재론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의 심성의 문제를 해석합니다. 반면 성혼은 인간의 윤리적 당위성에서 출발하여 우주의 원리를 역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이의 설명방법은 오늘날의 과학철학에 가깝고, 성혼의 설명방법은 윤리철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명방법의 차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행동양식에 있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에서 선을 추구하려는 자세와 도덕적 수양을 통해 선을 추구하려는 행동양식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이는 전자에 속하고 성혼은 후자에 속합니다.

강민우: 결국 사단과 칠정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어떻게 선을 실현할 것인가를 따지는 과정에서 이들 논쟁이 발생된 것이군요. 이이가 현실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론을 전개한 것이라면, 성혼선생은 도덕의 당위론적 관점에서 이론을 전개한 것이고요.

성혼: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이의 이론이 더 타당하지만, 도덕적 요청이나 필요성에서 보면 저의 이론이 더 타당합니다.

강민우: 지금까지의 설명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혼: 저도 강민우님과 여러 가지 이론을 논의할 수 있어서 매우 즐거웠습니다.

 

 

<참고문헌>

한영우, 우계 성혼 평전, 민음사, 2016

성기영 글, 이현주 그림, 만화 우계 성혼, 우계문화재단, 2019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1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1

 

강민우: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나고 기대승이 세상을 떠난 해에, 성혼과 이이가 다시 사단과 칠정을 가지고 이기논쟁을 벌입니다. 이들 논쟁은 기본적으로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을 심화시켰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성혼: 그것은 제가 이황의 설에서 출발하고 이이는 기대승의 설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리와 기가 서로 섞일 수 없다는 불상잡(不相雜)의 입장에서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한다면, 이이는 비록 리와 기가 형이상의 원리와 형이하의 사물로서 구분된다고 하더라도 사단칠정과 같은 인간의 심성에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기대승의 불상리(不相離)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결국 두 선현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겠다는 것이 논쟁을 벌인 뜻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 역시 처음에는 기대승의 이론을 지지하고 이황의 이론에 회의를 품었다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혼선생의 견해가 점차 이황의 이기호발설로 기울어지고, 결국 이이와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면서 성혼선생이 먼저 논쟁을 걸었다죠.

성혼: 제가 질문하고 이이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1592년 한 해 동안 총 9차례에 걸쳐 편지가 왕복됩니다. 제가 모두 9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가운데 3․7․8․9번째 편지는 유실되고 이이의 답신만이 전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의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다소 한계가 있겠습니다. 유실된 편지는 아마도 임진왜란 때 집이 불타면서 함께 없어지거나 문집을 만들 때 누락된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결국 성혼선생의 사단과 칠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1․2․4․5․6번째 보낸 편지가 전부이군요.

성혼: 이이와의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은 제가 질문하고 이이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래서 분량 면에서도 이이의 대답내용이 몇 곱절이나 많고, 저의 질문내용은 상대적으로 소략합니다.

강민우: 이이와 논변을 전개한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혼: 저는 일찍이 이황을 매우 존숭했음에도,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중용(中庸)의 서문에 나오는 주자의 글을 보고, 즉 주자가 성명에 근원하는 도심과 형기에서 생겨나는 인심으로 도심과 인심을 둘로 나눈 것을 보고,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자는 도심과 인심의 차이를 혹원혹생(或原或生)으로 설명합니다. ‘혹원혹생’은 도심은 혹 성명에 근원하기도 하고 인심은 혹 형기에서 생겨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이이에게 질문하면서 이이와의 논변이 시작된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도 처음에는 기대승의 이론에 기울어졌으나, 주자의 인심․도심에 대한 해석을 보고 이황의 뜻에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군요. 그리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적극 비판하는 이이에게 인심․도심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타당하다는 것을 질문합니다. 인심․도심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사단․칠정에 적용하면, 기대승의 견해보다는 이황의 견해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죠.

성혼: 그렇습니다. 도심․인심을 리에 근원하는 것과 기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상대시켜 볼 수 있다면, 사단․칠정도 같은 논리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리에 근원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 근원하므로 기가 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타당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강민우: 결국 성혼선생은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같은 맥락에서 보고, 사단․칠정의 내용보다는 인심․도심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는 이이를 반격했군요.

성혼: 물론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은 성이 발한 것과 심이 발한 것이라는 명목상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심의 작용을 말한 것입니다. 성리학의 심통성정(心統性情)에 따르면, 심이 성과 정을 총괄하므로 성이 발한 사단․칠정이나 심이 발한 인심․도심은 모두 심의 작용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심․도심이 비록 심에서 발한 것이지만 성(性)․정(情)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심에서 발한 인심․도심이든 성에서 발한 사단․칠정이든, 단지 명목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심․도심을 기에 근원하는 것과 리에 근원하는 것으로 상대시켜 볼 수 있으면, 사단․칠정도 리가 발한 것과 기가 발한 것으로 상대시켜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주자의 인심․도심의 해석에 근거하여 볼 때, 이이와 달리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타당하다는 말씀이군요.

성혼: 주자가 말한 ‘도심은 리에 근원하고 인심은 기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이황이 말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타당합니다. 물론 성혼도 이이처럼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 하나로 보는 것이 간단하고 분명한 장점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를 저의 학설로 삼고도 싶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을 참고해보면 모두 둘로 나누어 설명하기 때문에 이이의 견해를 따를 수 없었습니다.

강민우: 인심과 도심을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듯이, 사단․칠정도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성혼선생은 이이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황의 견해는 정당하다’고 강변했다지요.

성혼: 사단과 칠정을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으니,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입니다. 그 이유로써 사단은 인․의․예․지의 성에 근원하고 칠정은 형기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단과 칠정이 서로 다른 별개의 정이라는 말입니다. 기대승처럼 정은 칠정 하나이므로 칠정의 중절한 것을 사단으로 보는 것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강민우: 그렇지만 성혼선생이 이황의 이기호발설 내용을 모두 인정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황의 견해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성혼: 이이의 말처럼, 사단의 근원인 리와 칠정의 근원인 기가 각각 따로 있다가 발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합니다. 이황의 주장처럼 사단의 근원은 리가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가 된다면, 자칫 리와 기가 각각 따로 떨어져 있다가 서로 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단과 칠정으로 발하기 이전의 성은 하나여야 합니다.

강민우: 결국 성혼선생과 이황의 가장 큰 차이는 정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성을 하나로 전제한다는 사실이군요.

성혼: 이황은 사단과 칠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상대시켜 설명합니다. 본연지성은 순수한 성만을 말하며, 기질지성은 기질과 기질 속에 내재된 성을 아울러 말합니다. 실재하는 것은 기질지성 하나이며, 그 가운데 성만을 가리킨 것이 본연지성입니다. 이황처럼 사단의 근원은 본연지성이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질지성이 된다면, 두 개의 성이 있게 됩니다. 이황의 이러한 견해에는 반대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성이 발할 때에, 다만 리가 주가 되면 사단이 되고 기가 주가 되면 칠정이 될 뿐입니다.

강민우: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성혼: 리를 주로 하는 사단과 기를 주로 하는 칠정이라는 두 가지 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인․의․예․지의 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리가 주가 되며, 칠정은 형기에서 감응하여 생긴 것이므로 기가 주가 됩니다. ‘리가 주가 된다’는 것은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기가 주가 된다’는 것은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단과 칠정은 성이 이미 발하여 드러난 정이므로 모두 리와 기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이황처럼 사단의 근원은 본연지성이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질지성이 된다는 구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강민우: 이것은 이이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한 내용이기도 하죠.

성혼: 그렇습니다. 만약 이황처럼 사단의 근원이 본연지성이고 칠정의 근원이 기질지성이라면, 아직 발하지 않은 성의 상태에는 두 개의 성이 있게 됩니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두 개의 근본이 있게 되니 옳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리를 제기합니다. 저는 이황과 달리, 성이 하나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성은 하나이고, 다만 이 하나의 성이 막 발하는 시점에 주리․주기의 논리를 적용합니다.

강민우: ‘주리’는 리를 주로 한다는 뜻이고 ‘주기’는 기를 주로 한다는 뜻이죠. 이 말에는 이미 리와 기가 함께 있음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리와 기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있어야 ‘리를 주로 한다’거나 ‘기를 주로 한다’는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혼: 어찌되었든 성이 발하여 드러난 정은 이미 리와 기를 겸합니다. 사단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칠정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습니다. 이황처럼, 정으로 발하기 이전의 성에는 사단의 근원인 본연지성과 칠정의 근원인 기질지성이라는 두 개의 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막 발할 즈음’에는 리를 주로 하는 사단과 기를 주로 하는 칠정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사단과 칠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이고, 다만 하나의 성이 발하여 사단과 칠정으로 드러날 때에 주가 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군요.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가 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혼선생이 이해하는 이황 호발설의 뜻인거죠.

성혼: 결국 저도 이황처럼 사단과 칠정을 서로 다른 별개의 정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이이가 정은 칠정 하나이며,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사단으로 보는 것과 다릅니다. 그렇지만 이이처럼 성이 하나인 것에는 동의합니다. 이것은 이황이 사단과 칠정의 근원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하는 것과 분명히 다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의 사단칠정설에는 이황의 견해와 같은 부분도 있고 이이의 견해와 같은 부분도 있군요. 반대로 말하면, 이황의 견해와 다른 부분도 있고 이이의 견해와 다른 부분도 있다는 뜻이겠군요.

성혼: 저는 ‘이기일발(理氣一發)’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리와 기가 하나로 발한다는 뜻으로, 결국 근원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황처럼 정이 발한 근원으로서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든 칠정이든 그 근원은 하나의 성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이의 견해와 일치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성이 발하여 정이 되는 그 시점, 즉 성혼선생의 표현대로 ‘막 발할 즈음’에는 주가 되는 것에 따라 사단과 칠정이 구분된다는 것이죠.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므로 하나의 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이 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황의 견해와 일치하겠군요.

성혼: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가 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한 이황의 이기호발설 내용입니다. 결국 저의 해석은 이황과도 다르고 이이와도 다릅니다. 이황과의 차이는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이와의 차이는 리를 주로 하여 말하거나 기를 주로 하여 말함에 따라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구분해본다는 점입니다.

강민우: 결국 이황처럼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둘로 구분하지는 않지만,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서로 다른 정으로 이해한다는 말이군요. 이것이 바로 성혼 사단칠정설의 특징이겠습니다. 그래서 성혼선생이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종합하여 절충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요.

성혼: 이이처럼 사단과 칠정을 막론하고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로 보면서도, 동시에 이황처럼 리가 주가 되는 사단과 기가 주가 되는 칠정이라는 서로 다른 두개의 정으로 구분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이황의 최종 수정안인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에서 ‘기수지’와 ‘이승지’의 표현에 대해서는 반대했다죠.

성혼: 저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이발(理發)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발(氣發)임을 인정할 뿐이지, 그 뒤에 나오는 ‘기가 따른다(氣隨之)’와 ‘리가 탄다는(理乘之)’는 표현에는 장황하다는 느낌이 들어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발과 기발 뒤에 ‘기수지’와 ‘이승지’를 덧붙일 경우, 이이의 비판에서처럼 시간상의 선후관계가 설정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이황이 ‘기수지’와 ‘이승지’를 추가한 것은 기대승의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다’는 불상리(不相離)의 조건을 수용한데 따른 것입니다.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이며,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은 이발과 기발에다 ‘기수지’와 ‘이승지’를 덧붙인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기수지’와 ‘이승지’의 추가 없이 ‘사단은 리가 발한 것(理發)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氣發)’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본 것이군요. ‘기수지’와 ‘이승지’를 더하면 자칫 ‘리가 발하고 나서 기가 따르거나 기가 발하고 나서 리가 타게 되어’ 리와 기 사이에 선후관계가 생기게 됩니다. 굳이 ‘기수지’와 ‘이승지’를 추가하여 리와 기 사이에 시간적 선후관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성혼: 물론 ‘사단은 리가 주가 되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된다’는 식의 주리와 주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저의 주장에 대해 이이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리․주기의 견해는 궁극적으로 리와 기를 둘로 분리시켜 보는 이원론의 한계를 갖기 때문입니다. 이이는 리와 기는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일원론적 사고를 끝까지 견지합니다. 리는 항상 기에 타고 있으므로 기가 없으면 리는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강민우: 그래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막론하고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으므로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하나’라는 의미의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주장한 것이죠.

성혼: 사단도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이며, 칠정도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입니다.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발하는 것은 기이고 다만 리는 기 위에 올라탈 뿐입니다. 그러나 기는 선악을 겸하므로 결국 사단에도 선악이 있고 칠정에도 선악이 있게 됩니다. 이이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사단에도 선악이 있게 되므로 사단을 순선한 감정으로 보는 맹자의 본뜻에 어긋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이가 직접 ‘사단에도 선악이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발이승일도’의 논리에 따르면 사단에도 선악이 있게 되므로 순선함을 표방하는 사단의 도덕적 가치가 위태로워집니다.

강민우: 이이의 말처럼 ‘칠정 속에 사단이 있고, 사단은 칠정의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다’면,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칠정을 결코 포기할 수 없겠습니다. 이황처럼 칠정은 절제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분방한 감정으로 보았던 것이네요. 성혼선생의 언행이 조심하고 신중한 것과 달리, 이이의 언행이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모습을 보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어 보입니다.

성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는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매우 다릅니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따르면,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므로 선하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므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가능한 칠정을 절제하고 사단을 확충해야 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황의 학문이 마치 종교인처럼 엄숙하고 감정을 억제하면서 도덕적 수양에 치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민우: 이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는 형이하의 개념으로 실제로 발동이 가능하지만, 리는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실제로 발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황의 ‘이발’이라는 말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합니다. 리와 기를 이렇게 형이상의 개념과 형이하의 개념으로 구분하는 것에서 보면, 이이의 견해가 이황의 견해보다 한층 논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저는 사단과 칠정의 해석에서 이황의 학설을 더 신봉합니다. 이황의 학설이 주자학의 본질에 더 맞다고 보고, 이황을 비판한 이이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이러한 논쟁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벌어졌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신념에 찬 모습으로 강경하게 맞섰습니다. 그러나 논쟁이 길어질수록 이이의 견해도 조금씩 수용하여 절충적인 입장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과 칠정을 막론하고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이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가 발한 것이다’는 이황의 견해도 수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기일발설’과 ‘주리주기설’입니다. 결국 저의 견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의 중간쯤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이이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지 완전히 승복한 것은 아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만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 이이의 이기설이 매우 독창적이고 탁월하여 자신의 스승이 되었다고 토로한 것으로 보아 만년에는 이이의 이기설에 상당 부분 동조한 듯합니다.

성혼: 여기에서 이이의 이론을 조금 더 보충하겠습니다. 이이에 의하면, 실재하는 정은 칠정 하나이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말합니다. 이것은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이이는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컨대 칠정 가운데 기쁨․슬픔․사랑․욕구는 인(仁)의 단서가 되고, 분노․미움은 의(義)의 단서가 되며, 두려움은 예(禮)의 단서가 되고, 옳고 그름의 아는 것은 지(智)의 단서가 됩니다. 반대로 사단 가운데도 칠정이 들어있습니다. 예컨대 사단의 측은한 마음(仁)은 칠정의 슬픔에 속하고, 사단의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義)은 칠정의 미움에 속하며, 사단의 공경하거나 사양하는 마음(禮)은 칠정의 두려움에 속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智)은 지(知)에 속합니다.

강민우: 이황이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므로 선하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므로 악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라는 선과 악의 대립적 개념으로 보는 것과 달리, 이이는 칠정 가운데도 사단이 있고 사단 가운데도 칠정이 있다는 상호 내포적 관계로 이해합니다. 이이의 주장처럼 사단 가운데도 칠정이 있고 칠정 가운데도 사단이 있다면, 사단과 칠정을 무엇 때문에 개념적으로 구분했는지 그 이유가 무색해질 수 있겠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하나의 정으로 이해합니다. 하나의 정이므로 사단이 칠정 속에 포함되기도 하고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결국 칠정에도 사단의 의미가 있고 사단에도 칠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대해 찬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황처럼 사단은 사단이고 칠정은 칠정으로 서로 다른 두개의 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래서 이이는 성혼선생처럼 사단을 도심에, 칠정을 인심에 대비시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한 것이죠.

성혼: 저는 사단․칠정의 관계를 인심․도심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같은 구조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심이 성과 정과 총괄한다(心統性情)면, 성이 발한 사단․칠정이나 심이 발한 인심․도심은 모두 우리 마음의 작용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사단칠정은 성이 발한 것이고, 인심도심은 심이 발한 것이라는 명목상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강민우: 성에서 발한 사단칠정이든 심에서 발한 인심도심이든 모두 마음의 작용 가운데 이름만 다를 뿐이라는 말씀이군요.

성혼: 도심과 인심의 차이에 대해서도 도심은 사단처럼 선한 것이고 인심은 칠정처럼 그렇지 못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주자가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는 것(或原)이고 인심은 형기에서 생겨난 것(或生)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 나아가 이황은 성명을 리로 보고 형기를 기로 봄으로써, 도심은 리에서 나온 것이고 인심을 기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합니다. 주자와 이황은 모두 도심과 인심을 리와 기, 선과 악 등의 대립적 구조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이는 도심과 인심을 모두 같은 성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합니다. 도심도 성에서 나온 것이고 인심도 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인심과 도심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이며, 다만 발한 이후에 인심과 도심으로 갈라질 뿐입니다.

강민우: 이이는 사단․칠정과 마찬가지로, 인심과 도심의 관계를 ‘근원은 하나이나 발한 이후에 둘로 나누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일원이이류(一源而二流)로 말하는데, 하나의 근원이 흘러가서 둘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혼: 또한 이이는 ‘사단은 도심에 해당하나, 칠정은 정의 전체를 말하므로 도심과 인심을 합친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같은 구조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같은 구조’란 사단과 도심은 모두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과 인심은 모두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강민우: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타당하다는 말씀이군요. 결국 성혼선생께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인심․도심의 내용을 가지고 논증한 셈이군요.

성혼: 이이는 인심․도심의 관계를 사람이 말에 타는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말을 타고 문을 나설 때, 혹 말이 사람의 뜻을 따라 나가는 경우도 있고, 혹 사람이 말이 가는대로 맡겨두고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이 사람의 뜻에 따라 나가는 것은 사람이 주가 되므로 도심이고, 사람이 말이 가는 대로 맡겨두고 나가는 것은 말이 주가 되므로 인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말을 타고 문을 나서기 전에는 사람이 주가 될지 말이 주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도심과 인심은 처음부터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강민우: 이것은 성혼선생이 주장하는 ‘이기일발설’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사단이든 칠정이든 성은 하나이며, 이 하나의 성이 막 발할 때에 사단은 리가 주가 되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는 것처럼, 도심은 사람(리)이 주가 되고 인심은 말(기)이 주가 됩니다. 결국 이이의 인심․도심에 대한 견해는 성혼선생의 사단․칠정에 대한 견해와 비슷해 보입니다. 이것은 이이가 성혼선생과 토론을 거치면서 성혼의 이론을 수용한 것이 아닐까요.

성혼: 꼭 그렇지 않습니다. ‘리를 주로 한다’거나 ‘기를 주로 한다’는 주리․주기의 관점은 결국 리와 기를 분리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이는 리와 기를 분리시키는 것에는 결코 반대합니다. 이이에 의하면,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으므로 도심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인심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습니다. 도심에도 기가 있고 인심에도 리가 있으니, 성인이라도 도심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일반 사람이라도 인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인도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싶고, 추울 때는 옷을 입고 싶어 합니다. 결국 인심이 지나치지 않으면, 인심이라도 도심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이의 생각입니다.

이황과 기대승이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이황과 기대승이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38세 되던 1572년(선조 5년)은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뜨겁게 달군 여름입니다. 성혼선생과 이이가 성리학의 가장 큰 철학적 주제인 리와 기, 사단과 칠정, 그리고 인심과 도심의 내용을 둘러싸고 편지를 통해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이때 이이는 병으로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종4품)를 그만두고 파주에 내려와 있어서 학문적 토론을 한 만한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사단과 칠정이 조선 중기 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이유는 당시의 양심적인 성리학자들이 사화를 일으킨 권신(權臣: 권력을 가진 신하)과 척신(戚臣: 왕실과 혼인을 맺는 신하)의 횡포와 비리를 목도하면서, 이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가치 기준을 세울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가치 기준을 세우려면 반드시 우주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때 우주는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근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인간의 본질을 우주의 질서에 근원지어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선악으로 말하면, 우주의 질서는 악이 아니라 선이므로 우주 질서 내의 인간의 본질도 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민우: 주자는 우주와 인간의 관계 전반을 리와 기의 개념을 가지고 개략적인 설명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치밀한 분석이 16세기 중엽의 조선에서 전개됩니다. 이것은 세계 철학사에서도 일찍이 없던 심오한 철학논쟁으로 발전합니다.

성혼: 사단과 칠정은 인간 본성(또는 본질)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일찍이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사단을 선한 것의 표준으로 내세웁니다. 맹자는 사람이 선한 이유가 측은․수오․사양․시비의 사단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이러한 사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은 선한 존재임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 뒤 주자는 사단을 리와 기를 가지고 설명하고, 아울러 인간의 또 다른 감정인 희․로․애․구․애․오․욕, 즉 기쁨․분노․슬픔․두려움․사랑․미움․욕심 등 칠정도 리와 기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주자는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리와 기를 가치적으로 말하면, 리는 순수하고 선한 것이고, 기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를 버리고 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실천적 의지를 내포하게 됩니다.

강민우: 갑자기 내용이 복잡해집니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혼: 사단과 칠정은 모두 인간의 감정입니다. 보통 정(情)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정에는 선한 도덕적인 정도 있고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는 일반적인 정도 있습니다. 선한 정을 ‘사단’이라 하고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는 정을 ‘칠정’이라 말합니다. 사단(四端)은 인․의․예․지․가 되는 네 가지 단서 또는 실마리라는 뜻으로서 측은․수오․사양․시비를 가리킵니다. 이때 인․의․예․지는 인간의 본성으로, 맹자가 말한 ‘성선(性善: 성은 선하다)’의 개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사단이라는 네 가지 실마리를 통해 마음속에 인․의․예․지의 본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사단을 인․의․예․지가 되는 단서 또는 실마리라고 말합니다.

강민우: 측은(惻隱)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수오(羞惡)는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이며, 사양(辭讓)은 남에게 양보하거나 사양하는 마음이며, 시비(是非)는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마음을 통해 인․의․예․지의 성이 우리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되겠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인․의․예․지의 성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으로 부여받는 인간의 성품입니다. 이 성품은 본성 또는 천성이라고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사랑(仁),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인 의리(義),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禮), 어떤 일에서 옳은지 그른지를 판별하는 마음인 지혜(智)를 천성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의․예․지의 성은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현실 속에 재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이 곧 리를 가리킨다고 하여 성즉리(性卽理)라고 말합니다. 다만 인․의․예․지의 성은 리에 해당하므로 측은․수오․사양․시비라는 사단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이것을 성리학에서는 성발위정(性發爲情)이라 말합니다. 성이 발하여 정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강민우: 이렇게 보면, 사단이란 인․의․예․지의 성이 드러난 것이겠습니다. 그래서 이황은 이때의 사단을 ‘리가 발한 것(理發)’이라고 말한 것이군요. 리는 곧 성을 가리키니, 사단은 결국 성이 드러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혼: 이황은 주자의 설에 따라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합니다. 이때 호발(互發)은 서로 발한다는 뜻이니, 사단은 리가 발한 것(理發)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氣發)입니다. 이것을 ‘이기호발설’이라 말합니다. 이기호발설은 이황 사단칠정설의 특징을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이때 ‘이발’은 우리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인․의․예․지의 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가 드러나는 것이니 그대로 ‘이발’이 됩니다. 또한 리가 발한 사단과 달리, 칠정은 기가 발한 것입니다. 이황이 보기에, 칠정은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입니다. 비록 기쁨․분노․슬픔․즐거움․사랑․미움․욕심 등이 인간의 일반적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자칫하면 절도에서 어긋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특히 분노․욕심과 같은 칠정은 그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은 칠정을 기가 발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은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고 주장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이황의 설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 26세 연하인 호남의 유학자 기대승(奇大升, 1527~1572)입니다.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은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간 계속되는데, 노학자와 젊은 학자의 치열한 논쟁은 결국 조선 성리설을 발전시키는 큰 계기가 됩니다.

성혼: 두 사람 사이에 논점이 다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사단과 칠정의 개념적 정의를 다르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으로 이해합니다. 사단은 인․의․예․지에 근원하는 선한 정이고, 칠정은 형기에 근원하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정입니다. 이황이 칠정을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으로 이해합니다. 선한 사단과 악으로 흐르기 쉬운 칠정은 분명히 서로 다른 정입니다. 그러나 기대승은 정은 칠정 하나이며, 그 칠정 가운에 선한 부분만을 가리켜서 사단이라고 말합니다.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황처럼 사단은 사단이고 칠정은 칠정으로 서로 다른 정이 아니라, 같은 하나의 정입니다.

강민우: 기대승은 이황처럼 사단은 리에 근원하므로 선하고 칠정은 기에 근원하므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선이 있으므로 옳지 않다고 비판했던 것이군요.

성혼: 이황은 사단이 선한 정인 반면, 칠정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기보다는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선한 사단은 확충해나가고 악으로 흐르기 쉬운 칠정은 단속하거나 제재해나갈 것을 주장합니다. 결국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모두 수양의 문제에 귀속시킵니다. 수양의 방면에서 볼 때, 칠정은 인간의 일반적 감정으로 그대로 인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가급적 절제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황은 칠정을 ‘기가 발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때의 기는 실제로 발동하는 것과 같은 작용성의 의미보다는 선악의 가치적 의미를 가집니다. 선악의 가치적 의미란 예컨대 리가 선이라면 기는 악에 해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강민우: 이들 두 사람 사이에 논점의 차이 중의 또 하나는 리와 기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이황이 리와 기의 관계를 분리시켜 보려는 한다면, 기대승은 리와 기의 관계를 합쳐서 보려고 합니다. 리와 기의 관계를 분리시켜 보는 것을 불상잡(不相雜)이라 말하고, 리와 기의 관계를 합쳐서 보는 것을 불상리(不相離)하고 말합니다. 이황처럼 리와 기의 관계를 분리시켜 보아야 리가 기를 주재할 수 있는 주재성․능동성 등이 확보되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리와 기는 어제나 함께 있기 때문에 이이는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는데 반대하고 합쳐서 볼 것을 주장합니다.

성혼: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는 이황의 입장에서는 ‘이발’과 ‘기발’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와 기를 합쳐서 보는 기대승의 입장에서는 ‘이발’과 ‘기발’이 큰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황처럼 ‘사단은 이발이고 칠정은 기발이다’고 하면, 사단에는 리만 있고 기가 없으며 칠정에는 기만 있고 리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전적으로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항상 함께 있다는 ‘불상리’에 따른 이해합니다.

강민우: 기대승은 ‘사단은 이발이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으나, ‘칠정은 기발이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칠정에는 기와 함께 리가 있으므로 ‘기발’이라고만 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 리에 대한 설명이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혼: 이러한 기대승의 지적에 따라 이황은 한 걸음 물러나서 “사단은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이며(理發而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이다(氣發而理乘之)”라고 내용을 수정합니다. 여기에서 ‘기가 따른다(氣隨)’와 ‘리가 탄다(理乘)’는 표현은 기대승의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다는 ‘불상리’의 지적을 받아들여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는 뜻을 보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단은 리가 주가 되어 발하지만 기가 없는 것이 아니며, 칠정은 기가 주가 되어 발하지만 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황 사단칠정설의 최종안입니다.

강민우: 기대승 역시 이황의 수정안을 받아들여 자신의 견해를 약간 수정합니다. “정이 발할 때에 혹은 리가 움직이고 기가 갖추어지기도 하고 혹은 기가 감응하고 리가 타기도 한다(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는 것입니다. 이황은 기대승의 새로운 주장에 대해 두 사람의 견해가 좁혀진 것을 기뻐하면서 더 이상 논쟁을 계속하지 않습니다. 이황의 ‘이발(理發)’과 기대승의 ‘이동(理動)’은 그 의미가 비슷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성혼: 그러나 후에 기대승은 이황에게 편지를 다시 보내어 “사단은 순수한 선이고 칠정은 선악을 겸한다고 하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선이 되니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황은 두 사람의 차이가 다만 “근본은 서로 같고 말단이 서로 다를 뿐이다”라면서 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의견이 상당 부분 좁혀졌지만, 리의 발동과 같은 능동성을 인정하려는 이황의 시각과 ‘리와 기는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기대승의 시각 차이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누구의 견해가 더 타당한지는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논리적으로 볼 때, 리는 움직이는 실체가 아님에도 이황이 ‘발한다’ 또는 ‘발동한다’고 주장한 것은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기대승이 리가 발하지 않고 움직인다고 말한 것에서도 발(發)과 동(動)의 차이점이 애매합니다. 게다가 작위성이 없는 무위(無爲)한 리가 움직인다고 본 것도 리의 본질과는 다릅니다.

강민우: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문제가 있는 거군요.

성혼: 이렇게 논리적으로 두 사람의 견해에 모두 문제점이 있다고 해서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논쟁의 바탕에 있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황에 따르면, 리는 선하고 기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리가 발하여 생기는 사단의 선한 가치를 높이고 기가 발하여 생기는 칠정의 불선한 가치를 절제해야 도덕적 기준이 확립됩니다. 반면에 기대승은 사단의 가치나 칠정의 가치를 반대 개념으로 보지 않고 어느 정도 동등하게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키니, 결국 칠정이 선한 사단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황이 선한 감정을 지키고 불선한 감정을 물리침으로써 마치 종교인에 가까운 도덕적 엄격주의를 선호했다면, 기대승은 인간의 자유분방한 감정을 좀 더 존중하려는 예술가적 감각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실제로 시인이나 예술가들의 시각에서 볼 때, 칠정을 지나치게 부정적인 정서로 보는 것은 문학이나 예술을 어렵게 만들고 폄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다. 문학과 예술의 주제는 대부분 기쁨․분노․슬픔․두려움․사랑․증오․욕망(희망) 등 사람의 솔직한 본능적 정서를 다루고, 그런 본능적 감정을 반드시 나쁘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혼: 결국 사단과 칠정의 논변은 모든 사람을 성인과 같은 도덕군자로 만들려는 시각과, 도덕군자는 아닐지라도 평범한 서민의 희․로․애․락의 정서 속에서 아름다움과 선을 찾으려는 시각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황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기대승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리학 논쟁을 민생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부질없는 공론이라고 보는 것을 잘못입니다.

스승 이황을 만나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스승 이황을 만나다.

 

강민우: 1568년(선조 원년) 가을 성혼선생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이황을 찾아가 인사를 드립니다. 이황은 문과에 급제한 뒤로 여러 요직을 거쳤으나, 병약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 귀향하기를 반복합니다. 선조가 즉위하자, 그를 다시 불러 의정부 우찬성(右贊成: 종1품)과 대제학(정2품) 등의 높은 벼슬을 내리고 경연에 참석하게 했습니다. 이황은 1568년 12월에 필생의 노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임금에게 바치는데, 1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가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있도록 그 요령을 도표로 그린 책입니다. 원제목은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입니다. 여기에서 ‘진(進)’은 임금에게 올린다는 뜻이며, ‘차(箚)는 내용이 비교적 짧은 글을 말하니, ‘임금께 성인이 되는 10가지 도설을 올리는 글로, 그림을 첨부한다’라는 뜻입니다.

성혼: 성학십도는 선조 임금으로 하여금 성왕(聖王)이 되게 하여 온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국충정에서 저술된 것입니다. 성학십도는 10개의 그림과 해설로 되어 있는데, 태극도(太極圖)·서명도(西銘圖)·소학도(小學圖)·대학도(大學圖)·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인설도(仁說圖)·심학도(心學圖)·경재잠도(敬齋箴圖)·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입니다.

강민우: 당시 이황은 68세의 노학자로서, 최고의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에 젊은 이이와 성혼도 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더라구요.

성혼: 이이는 이미 23세 때 성주목사로 있던 장인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안의 도산(陶山)에 있던 이황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황은 35세 연하인 이이를 만나보고 “후생이 두렵다”하면서 그의 재능을 극찬했습니다. 저는 34세 때 처음으로 이황을 만났지만, 이황의 학문에 대한 숭상은 이이보다 강했습니다. 이이는 이황의 학문에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지만, 저는 이황의 학문과 언행이 주자학의 정맥을 이은 최고의 학자로 보았습니다.

강민우: 1572년(선조 5년)에 38세의 성혼과 37세의 이이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기설․사단칠정설․인심도심설 등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것도 따지고 보면 이황의 학설을 따르려는 성혼과 그것을 비판하려는 이이의 입장 차이가 바탕에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논쟁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는 이유는 이들 학설에 대한 견해차이라기보다는 이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이이의 태도가 못마땅했기 때문인 것으로도 보여요.

성혼: 저는 이황을 지극히 존경하고 사모하여 항상 제자들에게 “마음을 간직하고 수습하는 것이 바로 심법의 요체이다”라고 하는 그의 심법을 중시합니다. 심법(心法)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방법입니다. 1569년(선조 2년)에 이황이 예안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가서 전송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출발했다는 소식을 중도에 듣고 우계로 돌아왔습니다. 우계로 돌아와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기사년(선조 2년) 늦은 봄에 己巳春暮月

퇴계께서 홀연히 고향으로 가셨네 退溪浩然歸

서울에는 우러를 분 적어지고 京城少宗仰

선비는 의지할 곳 잃었네 士子失所依

대로(大老: 덕망이 높은 노인)께서 복이 없으시니 大老也無福

천운이 쇠미한 때가 되었네 皇天時運衰

산중에서 부질없이 탄식하며 山中空竊嘆

한밤중 눈물만 줄줄 흘리네 中夜涕漣而

강민우: 성혼선생은 36세에 네 번째 벼슬로 적성현감(종6품)에 제수되지만, 역시 임금에게 사은만 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예안으로 물러나 있던 이황에게 편지를 올려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은지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죠. 그러나 이황은 병중에 있었고, 그해 11월 8일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답장을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성혼: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에 후학 교육에 힘쓸 것을 결심하고, 본가 동편에 3칸 남짓한 기와집을 지어 ‘우계서실’이라 불렀습니다. 본가 사랑채에도 아버지 성수침이 공부하던 ‘죽우당’이라는 서재가 있어서 이 방을 학생들의 공부방으로 사용했지만, 공간이 좁아 많은 학생들을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미 30세 무렵부터 성혼의 학행을 듣고 조헌(趙憲)을 비롯한 원근의 학생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이런 이들이 많아지자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따로 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 자신은 초가집에 살면서 지와집으로 학교를 지은 것은 후생들에게 숙식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을 제공하려는 뜻이 담긴 듯합니다.

성혼: 당시 이이도 자주 벼슬을 버리고 파주로 귀향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이는 우계서실이 세워지던 해 10월에 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 야두촌(野頭村)으로 내려가 살 터전을 마련합니다. 고향인 율곡리의 임진강 나루터에서 해주까지는 뱃길이 있어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고, 이이의 처가가 부자여서 그 경제력을 빌릴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 1578년(선조 11년)에는 경치가 좋은 야두촌의 석담(石潭) 계곡에 학교를 세워 ‘은병정사’라고 했는데, 우계서실보다는 8년이 늦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계서실도 이황이 1560년 예안에 세운 도산서당보다는 10년이 늦은 것입니다.

강민우: 우계서실이 만들어진 뒤에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자, 이듬해 봄에는 학생들이 지켜야 할 공동생활의 규칙에 해당하는 학규를 만들어 「서실의(書室儀)」라고 했다죠. 성균관의 유생들이 지켜야 할 학칙을 참고하고, 주희가 백록롱서원에서 만든 학규도 참고하여 22개조로 나누어 만들었던 것입니다. 주로 어떤 내용입니까?

성혼: 이 학규는 이이가 1578년에 제정한 「은병정사학규」보다 7년이 앞섭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서실에 들어온 자는 먼동이 틀 때 일어나서 스스로 침구를 개어 정돈해야 한다. ②나이 어린 자가 빗자루를 들고 방 안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③차례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바르게 해야 한다. ④각자 독서하는 곳에 나아가서 서책을 정돈하고 책상에 단정하게 무릎 꿇고 앉아서 조용히 읽고 외우되, 어지러운 생각을 하지 말고 딴 일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남들과 잡담을 나누지 말고 제멋대로 출입하거나 일어나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⑤밥을 먹을 때에는 나이 순서대로 앉아서 조용히 정돈할 것이며, 희롱하고 장난하며 음식을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등입니다.

강민우: 공동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군요. 이상의 내용으로 모두 22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구요.

성혼: 이상의 22개 조항은 서실에 들어온 자가 준수하여 각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약조를 어기고 게으르고 방자하여 독서를 부지런히 하지 않거나, 남을 조롱하고 업신여겨 함부로 대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어른과 벗들을 공경하지 않고 남의 타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여러 학생들이 즉시 의논해서 저에게 와서 알려 주도록 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만든 「서실의」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또 앉을 때의 순서는 나이순으로 하는데, 이는 신분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성혼 문하의 학생들은 노비를 제외하고는 신분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하죠.

성혼: 이 학칙을 이이가 8년 뒤에 해주에서 은병정사를 세우고 만든 「은병정사학규」와 비교해 보면, 22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것을 비롯하여 「서실의」와 내용상으로도 서로 같은 점이 많습니다. 다만 「은병정사학규」는 내용이 한층 구체적입니다.

강민우: 우계서실의 생활 규범으로 「서실의」를 만들고, 같은 해 가을에 학생들이 알아야 할 공부의 지침서로서 위학지방(爲學之方)이라는 교재를 만들었다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성혼: 이 책은 주자의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의 어록 등을 기록한 책)과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와 그 문인들의 문답을 기록한 책)에서 직접 아동 교육에 필요한 자료들을 뽑아 만든 것입니다. 책머리에서 저는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이것을 읽고 기본을 세워야 하므로 꼭 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당부했습니다. 뒤에 이름을 주문지결(朱門旨訣)로 바꾸었는데, 1577년(선조 10년)에 이이가 어린이들의 학습을 위하여 지은 격몽요결보다 6년이 앞섭니다.

강민우: 그렇다면 교육에 관해서는 이이가 성혼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위학지방과 격몽요결의 내용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는 위학지방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어 아쉬울 뿐입니다. 성혼성생이 이이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비슷한 행보를 보이지만, 적어도 교육 사업의 일은 성혼선생이 이이보다 앞선 것 같습니다. 후학을 가르치는 학교인 우계서실(또는 우계정사)을 세운 것이 이이의 은병정사보다 앞서고, 학생들의 교육 지침서로 위학지방을 편찬한 것도 이이의 격몽요결보다 몇 년이 빠릅니다.

성혼: 저는 임진왜란 때 고향을 떠난 기간을 제외하고 죽을 때까지 우계서실에서 약 24년간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학생들의 수가 대략 90여명에 이릅니다. 그밖에도 이이와 성혼의 두 문하에서 공부한 학생이 대략 27명 정도이며, 송익필 등 다른 문하에서 함께 가르침을 받은 학생이 대략 18명 정도입니다. 그리고 신원이 확실치 않은 문인들이 80명에 이르니, 이들을 모두 합하면 대략 216명 정도입니다.

강민우: 성혼성생의 문하생 가운데 높은 벼슬을 받은 인물도 적지 않겠습니다.

성혼: 정엽․윤황처럼 학식과 덕망으로 이름을 떨치거나 성리학을 발전시킨 인물이 있고, 김장생․김집처럼 낮은 벼슬을 했거나 재야의 처사로 살면서 학문에 몰두하여 성리학을 전수한 인물도 적지 않습니다. 김장생․김집은 저처럼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어 제사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또 이귀(李貴)처럼 인조반정을 주도했거나 조헌․김덕령(金德齡)․양대박(梁大樸)처럼 왜란 때 의병에 참여한 충신도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조헌은 문묘에 배향된 인물입니다. 그밖에 문묘에 배향된 송준길․송시열․박세채 등도 저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저의 학통을 이은 학자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 6명의 문묘 배향자가 저의 학통을 이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정여립처럼 스승을 배반하고 반역에 가담한 인물도 있고, 인조 때 반정공신이던 김자점(金自點)처럼 반역죄로 처형된 인물도 있습니다.

강민우: 문묘에 배향된 인물답게 훌륭한 제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성혼선생의 학문세계에 관해 여쭤보겠습니다.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다.

 

성혼: 제가 30세 되던 1564년(명종 19년) 1월에 아버지 성수침의 상을 당합니다. 지병인 풍병(중풍)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했다죠. 성수침은 도리어 아들이 병날까 걱정하여 밤이 깊으면 물러가 쉬게 했으나, 성혼선생은 ‘예예’ 대답하고 나와서는 방문 밖에서 아버지를 지키면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셨더라구요.

성혼: 어머니는 이미 3년 전에 돌아가시고 여동생은 출가했으므로 병간호를 책임질 사람은 외아들 저뿐이었습니다. 물론 부인과 두 아들이 있었지만, 이들에게 간호를 미루지 않았으며 아들들은 병간호하기에는 아직 어렸습니다. 어머니 파평 윤씨는 1561년(명종 16년) 12월에 세상을 떠납니다.

강민우: 성수침은 부인을 떠나보내고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상주인 성혼선생은 어머니 상복을 벗자마자 또 아버지 상복을 입게 된 저죠.

성혼: 그렇습니다. 저는 조상 무덤이 있는 파주 향양리에 아버지를 안장하고, 무덤 옆에서 3년간 여묘살이(상주가 무덤 근처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를 했습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는 아버지 신주를 모시고 우계로 돌아와 어머니 신주와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모든 의식은 주자가례를 따랐습니다.

강민우: 신주는 죽은 사람의 위패를 말하는 것입니까?

성혼: 그렇습니다. 시신을 매장한 다음 신주를 만드는데, 혼이 여기에 깃든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혼백은 빈소에 모시다가 대상(大祥: 사망한 날로부터 만 2년이 되는 두 번째 제삿날)이 지난 뒤 태워버리며, 신주는 그 4대손이 모두 죽을 때까지 사당에 모시고 지내다가 산소에 묻습니다.

강민우: 당시 장례 절차는 모두 주자가례에 따라서 했던 것이겠군요. 주자가례의 내용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혼: 주자가례는 중국 남송시대 주자(주희)의 저서로, 사대부 집안의 예법과 의례에 관한 책입니다. 본래 책 제목은 가례(家禮)인데, 주자가 저술했다고 하여 통상 주자가례라고 부릅니다. 주자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인데, 그의 성리학에서 예와 의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사대부들이 준수할 예와 의례를 정리할 목적으로 편찬한 것이 바로 주자가례입니다.

강민우: 성리학에서 예와 의례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혼: 성리학과 예학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로써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성리학의 중심 내용은 성즉리(性卽理)입니다. ‘성즉리’란 천지의 리가 인간에게 성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천지의 리가 인간에게 성으로 구비됨에 따라, 예는 단순히 행위의 외적 형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행위원리로서의 지위를 갖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인․의․예․지와 같은 성이 인간에게 본성으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갖추어진 본성의 자연적 발현에 따라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공경하고, 부모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 예의 실천이 가능합니다. 이로써 예는 외적인 행위규범의 의미뿐만 아니라 내적인 행위원리의 의미를 가짐으로써 ‘왜 예를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강민우: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예를 매우 중시했던 것이군요. 그리고 일상에서 의례는 성년식에 관한 관례, 혼인에 관한 혼례, 장례에 관한 상례, 제사에 관한 제례로 대표되겠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고려 말에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주자가례도 함께 들어옵니다. 이 책은 조선 건국 이후 일반 사대부 집안뿐만 아니라 왕실의 국가의례를 만들 때에도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됩니다. 책의 내용은 관례․혼례․상례․제례의 네 가지 의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주자가례의 상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전통적인 상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부모의 제사뿐만 아니라 외가의 제사에도 신경을 썼답니다.

성혼: 외할아버지 윤사원이 본처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해 제사가 끊어질 형편에 놓이자, 제가 외할머니에게 청하여 서자(庶子: 첩이 낳은 자식)가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서자도 후사 없이 죽자, 제가 외가의 신주를 아예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집안의 사당 뒤에 따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습니다.

강민우: 외손자가 외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혼선생의 후손들이 윤사원의 묘소를 관리하면서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성혼: 서자에게 제사 상속권을 준 것은 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이의 처가에 적자(嫡子: 정실부인에서 태어난 아들)가 없자 서자에게 제사 상속권을 주도록 조처하고, 이이가 죽을 때에도 적자가 없자 서자에게 제사 상속권을 줍니다. 물론 이런 조처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있는 것이지만, 양자를 들여서 제사 상속권을 주던 관례와는 다른 것입니다.

강민우: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으로, 오늘날 헌법에 해당합니다. 헌법과 경국대전은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데 근본 규범이 되는 법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날이 1948년 7월 17일입니다. 제헌절이죠.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과 국가기관의 조직과 권한에 대한 내용이 담긴 근본 규범입니다. 한 나라의 기본이자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법이지요. 우리나라에서 헌법을 공포한 7월 17일은 태조 이성계가 개경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 왕조를 연 날(음력 7월 17일)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이어나가는 의미로 이날에 맞추어 국회에서 헌법을 공포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혼: 조선 왕조에도 오늘날의 헌법처럼 나라를 다스리는데 기본이 되는 훌륭한 법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경국대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