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를 알아야 성혼을 알고 성혼을 알아야 이이를 안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이이를 알아야 성혼을 알고 성혼을 알아야 이이를 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어떤 인물입니까? 절친한 친구로 잘 알려진 이이와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성혼: 저를 이해하는 지름길은 이이(李珥, 1536~1584)와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이이의 호가 율곡(栗谷)이므로 주로 율곡이라 부릅니다. 관직은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후에 서인의 영수로 추대됩니다. 시호는 문성(文成)입니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이와 저는 같은 고장인 파주에 살면서 30년간 가장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공자를 제사지내는 성균관 문묘에 동시에 배향되어 선비들의 사표가 됩니다.

강민우: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성혼: 문묘(文廟)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을 뜻합니다. 위패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그의 혼을 대신한다는 상징성을 갖는 나무 조각으로, 목주(木柱)·영위(靈位)·위판(位版)·신주(神主)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위패는 종이로 만드는 신주인 지방(紙榜)과 달리 나무로 만드는데, 주로 단단한 밤나무로 만듭니다.

강민우: 문묘에는 주로 어떤 인물들이 배향되어 있나요?

성혼: 우리나라 선비로서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되어 만세토록 선비들의 추앙을 받은 인물은 모두 열여덟 명입니다. 이들을 동국18명현(東國十八名賢)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두 명은 신라 때의 인물로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이고, 두 명은 고려 때의 인물로 안향(安珦)과 정몽주(鄭夢周)이며, 나머지 열네 명은 조선시대 인물입니다.

강민우: 문묘가 공자를 비롯한 중국 역대 성현과 우리나라 역대 명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국가에서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면,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선비들의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성혼: 본인의 영광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도 국가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만인의 사표가 될 만한 행실이 있어야 하고, 전국적인 선비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일부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문묘 배향을 요청하더라도 임금이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전국적인 여론의 지지가 있을 때까지 결정을 유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묘 배향의 결정은 짧아도 몇 년, 길면 몇 십 년을 끌다가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여론의 지탄을 받아 중도에 낙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강민우: 특히 당쟁이 일어난 조선 후기에는 문묘 배향이 더욱 어려웠겠는데요. 아무리 훌륭한 행실과 업적이 있더라도 당색(黨色)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반대ˇ당에서 극력(極力:있는 침을 아까지 않고 다함)하게 반대했을테니까, 더욱 힘들었을꺼 같아요.

성혼: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열 네 명의 문묘 배향자 가운데 당쟁이 없던 조선 초기의 인물로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인데, 이들 여섯 명은 비교적 순탄하게 문묘 배향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당쟁이 일어난 이후의 인물인 이이․성혼․조헌(趙憲)․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 등은 우여곡절 끝에 문묘 배향이 결정됩니다. 이들 여덟 명 가운데 이이․조헌․성혼은 모두 서인에 속했으나, 훗날 이이․조헌은 노론의 추앙을 더 받았고 성혼은 소론의 추앙을 더 받았습니다.

강민우: 나머지 다섯 명 가운데에 박세채만 소론에 속하고, 네 명은 모두 노론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반대당인 남인 측에서 문묘 종사에 적극 반대했던 것이겠군요. 조선 후기 남인 인물 가운데 문묘 배향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의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성혼: 숙종 때에 남인이 잠시 권력을 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정권을 주도하지 못한 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남인 중에도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이가한(李家煥)․이중환(李重煥)․채제공(蔡濟恭)․정약용(丁若鏞)과 같은 뛰어난 유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당시의 주류 이념이던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개혁적인 실학을 발전시킵니다. 게다가 천주교에 관련되어 있는 인사들도 적지 않아 학술계의 주류에서 밀려납니다. 이들은 현대에 와서는 크게 주목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국적인 선비들의 추앙을 받는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강민우: 조선 후기에 선정된 문묘 배향자는 당색이 짙어 주로 집권당 쪽에서 배출되고, 반대당에서 호된 비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그 때문에 문묘 배향에 대한 권위가 많이 실추된 것도 사실이지만, 권력이라는 것도 결국 절대 다수의 지지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문묘 배향 과정이 권력의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재야 선비들의 압도적인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정되기 어려운 절차를 거처야 했으므로 학문적인 권위나 추종자 없이는 문묘에 배향될 수 없습니다.

강민우: 서인이나 노론에서 가장 많은 문묘 배향자를 배출했다는 것은 그들의 학문이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하겠군요.

성혼: 좋고 나쁨을 떠나 조선 후기의 정치사와 학문사는 이들이 주도한 것이 사실입니다.

강민우: 오늘날 우리나라 화폐에는 문묘 배향자 가운데 두 사람의 초상화가 들어있습니다. 이황과 이이입니다.

성혼: 이들은 모두 주자학자이고 당파에 따라 평가가 엇갈립니다만, 워낙 행실과 업적이 뛰어났기 때문에 문묘에 올랐고,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조선시대 당쟁의 와중에 비판과 반대를 받았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그 영향 아래서 문묘 배향자를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좋은 일을 했는가 여부이지 모든 당파의 추앙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문묘 배향의 문제는 이정도로하시고 다시 성혼과 이이에 대한 질문드리겠습니다. 성혼과 이이 두 사람은 비슷한 점도 많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후세 사람들이 이들을 우율(牛栗)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후학들을 ‘우율학파’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실과 바늘처럼 가까우며, 동시에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됩니다.

성혼: 저희 두 사람은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요순시대의 이상사회를 이 땅에 건설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고 도덕이 꽃피는 나라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중국 문화권에서는 훌륭한 군주를 가리켜서 ‘요순과 같다’고 찬양합니다.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을 합쳐 요(堯)․순(舜)․우(禹)․탕(湯)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요순시대는 주로 뛰어난 군주의 치세를 일컬으며 태평성대와 같은 의미입니다. ‘되돌아갈 수 없는 좋은 옛 시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강민우: 특히 이이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자신이 처했던 시대를 무너지는 가옥과 병든 사람에 비유하여 시급한 경장(更張:정치적,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롭게 함))의 필요성을 선조 임금에게 역설합니다. 그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는데, 바로 그 점이 권세에 연연하던 보통 선비들과 다른 점입니다.

성혼: ‘경장’은 정치․사회의 폐단이 누적되었을 때 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일신해야 한다는 개혁안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조선유학사에서 이 경장론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조광조와 이이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이의 역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모든 시기는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更張)의 3기로 구분됩니다. 역사의 전개에서 일단 창업이 이루어지면, 그 혁명의 이념과 정신을 잘 보존하고 전수하는 수성의 시기가 오게 되고, 수성의 시기가 오래 지속하다 보면, 정신과 문물제도가 병들게 되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오게 마련입니다. 그런 경우에 개혁과 같은 경장을 해야 하는데, 경장할 때가 되어서 경장을 하지 못하면 나라에 큰 병폐가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관에서 이이는 당시를 경장의 시대로 규정하고, 사회와 정치의 묵은 폐단을 지양하고 새로운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강민우: 이이는 20대에 과거에 급제하므로 성혼선생보다 먼저 벼슬에 오릅니다. 이후 엘리트 코스에 해당하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요직을 거치면서 동호문답(東湖問答)․「만언봉사(萬言封事)」․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선조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경연에서 임금을 만날 때마다 성인을 본받아 시급히 경장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압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성혼: 그 결과가 임진왜란의 참변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수많은 경장 가운데 이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어진 자를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라는 것과 민생의 안정을 위해 공납제도를 개선하라는 것입니다.

강민우: 공납(貢納)은 조선시대 세제의 하나입니다. 각 지역의 토산물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토공(土貢)이라고도 하며, 이는 정부의 여러 가지 용도에 충당키 위한 것입니다. 공물에는 수공업품으로서 직물·종이․돗자리 등과 각종의 광물·수산물·모피·과실·목재 등이 있습니다.

성혼: 이이는 경장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임시기구로 경제사(經濟司)의 설치를 건의했는데,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의미가 포함된 ‘경제사’에서 바로 개혁을 추진하고 경제를 일으키는 역할을 맡기자는 내용입니다.

강민우: 이이와 달리, 처음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던 성혼선생은 과거시험도 외면하고 오직 학문과 교육 사업에만 전념했 답니다.

성혼: 34세부터 학생(學行)으로 천거되어 여러 번 벼슬이 내려졌으나 받지 않다가, 47세(1581) 되던 해에 종묘서령(宗廟署令: 종5품)과 내섬시 첨정(僉正: 종4품)에 천거되었을 때 처음으로 선조임금을 만났습니다. 저는 임금에게 경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실행하는 임시기구로 혁폐도감의 설치를 건의했습니다. 선조 임금은 저의 말을 듣고 이이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저는 임금에게 이이와 친구이므로 생각이 비슷한 것은 당연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렇듯 저희 두 사람은 경장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하면서 운명 공동체를 이루지만, 이이가 먼저 세상을 뜬 뒤에는 서인 세력이 약화되고 동인세력이 커지면서 이들의 공격이 저에게 집중되어 큰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혁폐도감과 경제사라는 개혁기구의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으니, 두 사람이 평소 이러한 개혁기구의 설치에 대해 필요성을 공감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사실은 제가 임금을 만나기 전에 임금에게 무엇을 말할지 이이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줄 만큼 서로 통하는 사이였고, 이이는 저의 천거를 배후에서 적극 도와주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도 이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성혼: 1583년(선조 16년)에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였습니다. 니탕개(泥湯介)가 이끄는 2만 명의 여진족이 함경도에 침입하자, 이를 막아내기 위해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군마(軍馬)를 바치는 군인에게 전장에 나가는 것을 면제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반대당인 동인들이 들고 일어나 이이에게 무군오국(無君誤國), 즉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명을 씌워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이이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당시 선조는 이이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이의 실수를 임금은 탓하지 않았으나 동인들이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판단하고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이 일로 이이는 끝내 벼슬을 버리고 해주로 낙향했다가, 병이 들어 다음 해 1월에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민우: 이때 이이의 행동을 변명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성혼선생이었죠. 동인의 주장이 허황되고 거짓이라고 말입니다. 이때부터 성혼선생은 동인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동인들은 성혼과 이이를 같은 무리로 묶어서 공격했다지요.

성혼: 일부 동인의 줄기찬 모함과 비난에도 선조 임금은 저와 이이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는 성혼과 이이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두 사람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선조 임금은 벼슬을 버리려는 이이를 극구 만류하고, 벼슬을 사양하는 저를 갖은 정성을 들여 불러들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저를 뒤에서 후원하던 이이와 영의정 박순(朴淳) 등이 세상을 떠난 뒤로 서인세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동인세력이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를 장악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갈수록 외톨이가 되었고, 동인의 공격은 살아있는 성혼과 죽은 이이에게 집중되었던 것이군요.

성혼: 임진왜란 초기에는 세자 광해군과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아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호종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지를 전전하면서 추위와 배고픔, 병마의 고통 속에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를 하여 휴전한 뒤에야 고향 파주로 돌아왔으나, 집은 모두 불타버리고 폐허가 되어 부근 절에서 밥을 얻어먹을 어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더 크게 괴롭힌 것은 육체적 고통보다도 일부 동인들로부터 받은 비판과 모함입니다. 일부 동인들은 제가 서인들과 작당하여 권력을 농단한다고 공격했습니다. 벼슬도 없이 시골에 파묻혀 있는 저에게 권력을 농단한다고 공격한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받은 비판과 모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더라구요.

성혼: 하나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터졌을 때의 일입니다. 최영경(崔永慶)이라는 경상도 처사가 감옥에 있다가 병사했는데, 이 사건을 처리한 중심인물이 바로 저의 절친한 친구인 정철(鄭澈)입니다. 일부 동인들은 제가 정철에게 구명운동을 하지 않아 최영경이 죽었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아들을 보내 최영경을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실권이 없었는데도 동인들은 제가 최영경을 죽였다고 두고두고 공격했습니다.

강민우: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기축옥사로 불립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는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 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릅니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박순을 비판합니다. 선조가 이를 불쾌히 여기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립니다. 낙향한 뒤에, 정여립은 호남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합니다.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합니다. 그러자 이들의 활동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발이 임금에게 전해집니다. 고발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지만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합니다.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서인들, 특히 정철과 그 배후의 성혼․송익필에 원한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성혼: 저의 입장을 더욱 어렵게 만든 사건은 임진왜란 중에 일어납니다. 선조 임금이 밤중에 몰래 궁궐을 떠나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피난할 때 임진 나루터에 이르러 “성혼의 집이 어디 있느냐”라고 호종하던 신하 이홍로(李弘老)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바로 옆에 있는 동네를 가리키며 “저 곳에 산다”고 했습니다.

강민우: 당시 선조 임금은 근처에 있으면서 나와서 배알(拜謁:지위가 높고나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가 뵘)하지 않는 성혼을 매우 섭섭하게 여겼겠군요.

성혼: 그러나 저희 집은 실제로 임진 나루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또한 임금이 언제 이곳으로 피난 왔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호종하던 신하가 임금에게 거짓말을 하여 저를 불충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을 더욱 곤궁한 처지에 빠지게 한 것으로는 선조 임금에게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를 주장한 이정암(李廷馣)을 충신이라고 말한 사건도 있습니다. 선조 임금은 명나라가 일본과 강화하는 것을 반대하고 적극적으로 싸워서 섬멸(殲滅:모조리 무찔러 멸망시킴)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성혼선생이 강화를 찬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성혼: 선조 임금의 섭섭함을 부추긴 또 하나의 사건으로는 제가 내심으로 세자 광해군에게 선위하기를 기대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사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서인들은 개혁에 소극적인 선조 임금에 실망하여 광해군이 집권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럴수록 선조 임금은 세자를 더욱 싫어했습니다.

강민우: 이렇게 성혼과 임금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면서, 급기야 임금은 성혼의 모든 벼슬을 박탈하는 조처를 내립니다. 성혼선생은 가족들을 모두 평안도와 황해도에 남겨둔 체 홀몸으로 파주로 돌아왔으나, 집은 모두 불타 폐허가 되고 사찰에서 끼니를 얻어먹을 정도의 비참한 상황에 놓였다가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죠.

성혼: 저의 정치 행적은 말년에 선조 임금의 미움을 받으며 끝납니다. 그러나 생전에 이이와 힘을 합하여 임금을 성군으로 이끌고,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한시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경장을 촉구하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수차례나 올리고, 혁폐도감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과감하게 개혁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저의 주장은 이이의 개혁안과 기본적으로 일치하여 이이의 개혁운동에도 크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저는 수없이 벼슬을 사양했지만,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상소를 올려 국정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강민우: 성혼과 이이를 흠모하고 따르는 유생들이 반대하는 세력보다 월등히 많았으므로 이들이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이 근 100년이 지나서 숙종 때에 이루어진 것은 아마도 치열한 당쟁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인과 그 후속 당파인 북인과 남인은 두 사람이 생전에 받았던 모함과 선조 임금이 성혼의 관작을 삭탈한 것을 근거로 줄기차게 문묘 배향에 반대했습니다. 반면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두 사람에게 씌워진 비난이 모두 모함이고 이들이야말로 깨끗한 선비의 표상이요, 조선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이라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서인이 독자적으로 집권한 1682년(숙종 8년)에 이르러 성혼과 이이는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지만, 7년 뒤에 남인이 집권하면서 문묘에서 폐출됩니다. 그러다가 5년 뒤인 1694년(숙종 20년)에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문묘에 다시 배향되어 왕조 말까지 이어집니다. 성혼의 일생과 사후의 명성은 이이와 하나로 결속되어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일들은 그 옳고 그름을 떠나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한복판에 두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혼을 단순히 재야의 처사로만 바라보는 것은 매우 협소한 시각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성혼의 학문은 뒷날 사위 윤황을 매개로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등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성혼이 소론파 학문의 종장으로 추앙된 것도 그가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혼: 저와 이이는 본래 한 몸처럼 살았으나, 후학들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기호 유학의 물줄기가 둘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제가 본래부터 소론의 성향이 있었다거나, 이이는 본래부터 노론과 같은 학풍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과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을 토해내는 충성심, 이 둘로 똘똘 뭉친 참선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조선 왕조를 500년간 이끈 정신적 기둥은 바로 이런 참선비들이 뿌리고 키운 씨앗에서 왔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혼: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지금 성균관대학교 경내의 문묘(대성전)에는 성혼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일부 유림이 제사를 올리고 있으나, 일반 국민들은 눈길을 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파주가 낳은 위인으로 이이가 있고, 이이의 제사를 모시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이 법원읍 동문리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 성혼의 흔적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파주 파평면 눌노리 쇠내(우계)에 성혼과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 그리고 성혼의 스승 백인걸을 모신 파산서원(坡山書院)과 성혼이 살던 집터, 그리고 우계서실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제 이이의 분신이 성혼이요, 성혼의 분신이 이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쇠내 개울가에도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