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과 이이가 어떻게 다른가?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성혼과 이이가 어떻게 다른가?

 

강민우: 성혼선생이 이이와 유교적 이상국가의 꿈을 함께 꾸고,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면서 고락을 나누며, 죽어서는 문묘에 함께 배향되는 운명 공동체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비슷한 점만 공유한 것이 아니라, 학풍이나 기질에 있어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어 보입니다.

성혼: 두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본인들이 잘 알고 있어서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벗의 단점을 솔직하게 지적하여 착한 길로 인도하는 것은 친구 간의 의리로서, 유학에서는 이를 책선(責善)이라고 부릅니다. ‘책선’은 ‘착한 일을 하라고 나무라다’는 뜻으로, 모든 인간관계에 널리 쓰지 않고 친구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친구끼리 착한 일을 권한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저희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책선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이 보이면 주저없이 지적하여 고치라고 권고합니다.

강민우: 바로 그런 보완적 자세가 두 사람의 학문과 인격을 높이는데 적잖이 기여를 했겠습니다.

성혼: 저희 두 사람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으면 섭섭해 할 친구가 또 있습니다. 파주의 구봉(龜峰: 지금의 파주 고하읍 심학산) 아래 살던 송익필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세 사람을 묶어서 삼현(三賢: 세 분의 현인)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기이하게도 셋은 모두 파주 사람이고, 나이도 엇비슷하여 송익필이 1534년생, 성혼이 1535년생, 이이가 1536년생으로 각각 한 살 차이입니다.

강민우: 그러나 세상을 떠난 나이는 이이가 49세, 성혼이 64세, 송익필이 66세였으니, 출생순서와는 정반대로 세상을 떠나셨네요. 가장 오래 살았던 송익필은 죽던 해에 아들에게 부탁하여 세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삼현수간(三賢手簡)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지요. 세 사람의 교우 관계를 정리한 이 책에서 ‘삼현’이라는 말이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혼: 삼현수간은 일명 「현승편(玄繩編)」라고도 합니다. 본래 출처는 송익필의 문집인 구봉집속에 실려 있는 「현승편」인데, 후대의 유학자가 세 사람의 친필 서한만을 묶어 삼현수간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삼현수간은 송익필 집안에서 바로 직계제자인 김장생 집안으로 전해지고, 김장생의 수제자인 송시열에게 전해지고, 다시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지금 삼현수간의 원본은 호암미술관에서 소장되어 있습니다.

강민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송시열이 정치적으로 불우하여 귀양 갈 때도 이이 일기 친필본과 이 삼현수간만은 꼭 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애지중지 했다지요. 아무튼 이 삼현수간은 이들 삼현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의 중요한 원류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혼: 저희 세 사람은 동시대에 한 고장에서 학자가 배출되어 서로 책선하고 격려와 경쟁을 통해 자신들의 학문을 키웁니다. 더욱이 수많은 후학들을 키워내어 조선 후기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정치세력과 학파를 형성합니다. 조선 후기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대부분 이들 삼현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에 속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강민우: 당시 파주의 삼현이 배출한 후학들은 어림잡아 수백 명에 이릅니다. 삼현 가운데 가장 많은 후학을 기러낸 인물은 단연코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서실(서재)을 세워 4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한 성혼선생입니다.

성혼: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삼현이 모두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후학들은 이들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배울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더 큰 학덕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호학파 성리학자들의 진원지가 이곳이라고 말합니다. 성리학을 일보 전진시킨 조선 후기 실학의 진원지도 따지고 보면 이 지역에서 출발하여 서울을 거쳐 한강 이남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강민우: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파주와 비교될 만한 지역이 있다면 어디라고 보십니까?

성혼: 파주보다 조금 앞서 이황이 후학을 길러낸 경상도 안동(安東) 지역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황의 학문과 행실은 이이를 비롯한 저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삼현의 학문도 영남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두 지역 간에는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이황의 영향을 받은 영남학파에서도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훌륭한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지만, 그 힘이 기호학파의 위세를 압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황 이후로 영남학파 가운데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마도 당시 정치를 주도한 세력이 서인인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과 이이의 성격상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성혼: 성격상으로 보면, 이이와 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이가 명석하고 개방적이며 자신만만한 외형적 기질을 가졌다면, 저는 세심하고 근엄하며 겸손한 내향적인 기질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이이의 외향적 성향은 오만하고 겸손하지 못한 것으로 비쳐져서 주변의 질투와 미움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 성혼선생은 겸손하고 자중자애한 도사의 모습을 지녀 후학들의 존경을 많이 받았다지요.

성혼: 이런 차이는 천부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은 듯합니다. 이이는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등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친족인 덕수 이씨(德水 李氏) 집안의 가풍은 오히려 그의 삶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계 친족인 이기(李芑)는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인물입니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도 어머니 신사임당이 ‘웬쑤’라고 불렀다는 풍설이 나돌 만큼 조신한 선비가 못됩니다. 그래서 이이는 친가보다 외가인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외할아버지 신명화(申命和)를 더 존경했습니다. 아마 이런 가정환경이 이이로 하여금 한층 외향적인 성향을 갖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기묘명현’은 조선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신하들을 말합니다. 한편 저는 창녕 성씨(昌寧 成氏) 가문의 가풍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평생을 파주의 은일처사로 살았습니다. 먼 친척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과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成聃壽)가 있는데, 이들 역시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입니다. 저는 의리와 지조를 중시해온 성씨 집안의 가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특히 아버지의 영향은 직접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이 저로 하여금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고 세속을 멀리하는 종교인의 모습을 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이이와 성혼의 기질적 차이는 학풍에 있어서도 분명한 차이로 드러났겠습니다. 두 사람은 주자학을 유일한 정학(正學)으로 받아들이고 유교적 이상 국가를 추구한다는 점은 같지만, 성혼선생은 이이보다 주자학을 더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았던 것이죠.

성혼: 저는 주자학에 이론을 제시하거나 토를 다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하고, 오직 주자학의 본질을 체득하여 실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주자학을 가장 충실히 따르고 실천하는 인물로 34세 연상인 이황을 꼽았으며, 그에 대한 무한 신뢰와 존경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저와 생각이 다릅니다. 큰 틀에서 주자학이 정학인 것은 인정하지만, 주자학이 이기설을 비롯한 형이상학의 모든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주자학이 아닌 선가(禪家)나 노장사상, 제자백가의 여러 사상까지도 폭넓게 공부하면서 주자학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주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도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고 보고, 이를 수정하여 여러 종류의 향약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던 것이군요.

성혼: 이이는 ‘백성을 변화시켜 풍속을 이룬다’는 목적으로 서원향약․해주향약․사창계약속․해주일향약속 등을 지역의 특성에 알맞도록 제정하여 실시합니다. 여씨향약의 4대 덕목인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 중에서도 특히 서로 어려울 때 구제한다는 환난상휼을 중시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주자의 증손여씨향약을 좀 더 보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향약을 통해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하고 인간관계를 모든 가치의 근원에 두며 공동체 의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입니다.

강민우: 이이가 성학집요를 편찬한 것도 당시 제왕 학문의 교과서로 알려진 진덕수(陳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가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고 여기고 보완했던 것이죠.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진덕수가 벼슬을 하다 재상 사미원(史彌遠)의 탄핵으로 파직 당하자, 시골에서 대학연의를 집필하여 임금에게 바칩니다. 이 책은 이후 조선의 선비들에게 널리 읽힙니다. 중종은 이 책을 간행하면서 나라의 안정과 혼란은 학문이 장려되는지의 여부에 있음을 지적하고, 이 책을 통해서 모든 선비들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대강을 알아서 태평성대를 이루는데 도움을 줄 것을 당부합니다. 그 뒤부터 이 책은 과거시험 때마다 출제와 채점의 기준이 되니,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에게 필수과목으로 지목됩니다.

성혼: 성학집요는 이이가 임금의 학문을 위하여 1575년에 저술한 정치서적입니다. 이이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서문에 의하면, 성학집요는 사서와 육경에 씌어 있는 도(道)의 내용만을 뽑아서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서육경은 너무 방대하여 거기에서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길을 잃기가 십상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 핵심 내용만을 뽑아 놓음으로써 누구나 쉽게 도를 쫓아갈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현들의 모든 계획이 대학의 기본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대학을 기본 지침서로 삼습니다. 그래서 이이는 대학을 ‘덕으로 들어가는 문(入德之門)’라고 말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이이의 명석한 이론에는 항상 경탄을 보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고 아쉬운 감정을 가지기도 했다죠.

성혼: 제가 우려한 것은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늘같이 믿고 따르는 선현들의 학설이 아직 원숙하지 않은 30대의 젊은 이이에 의해 비판받는 것입니다. 주희나 이황의 권위가 손상당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이의 명쾌한 이론이 머리로는 승복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승복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내용은 학술적 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제자를 가르칠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근엄함과 단정함, 그리고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을 때에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보다는 성인의 말씀을 깊이 사색하면서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요.

성혼: 제가 따로 저의 학설이나 주장을 담은 저서를 내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옳은 것으로 봅니다. ‘술이부작’은 성현의 말씀을 가르칠 뿐 독자적인 의견은 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술이부작’은 논어「술이」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으로, 학자의 겸손한 자세와 객관적 태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성현을 능가할 수 없는 후학은 성현의 말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에 그쳐야 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성현의 말씀을 전달할 때,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여 듣는 사람이 지루함이나 피곤함을 느끼게 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지요. 그래서 매일 일기를 쓰면서 자신이 남에게 말을 많이 하여 폐를 끼친 것을 반성하고, 반면에 다른 사람이 성혼선생의 약점을 지적하면 상대가 제자라도 받아들였던 것이죠. 자신의 단점과 부족함을 항상 걱정하고 반성하는 시각에서 보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성현의 약점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이이와는 비교되며, 이이의 이러한 모습이 매우 위험한 일로 보이기도 했겠습니다.

성혼: 저는 이이의 이러한 비판적 행동이 그의 학문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이는 이미 30대에 동호문답․「만언봉사」 등을 내고, 40세에는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대체하기 위해 성학집요를 편찬하는 등 발 빠른 저술 행보를 보이며 이름을 떨칩니다. 그러나 저의 눈에는 이이의 저술 활동이 ‘술이부작’의 정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행위로 보였습니다.

강민우: 벼슬을 기피한 성혼선생의 눈에 이이의 과거 응시는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기도 했겠습니다.

성혼: 이이는 과거 응시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호소했습니다. 실제는 이이는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4형제의 가솔들까지도 껴안고 살았기 때문에 100여명에 이르는 식구를 거느리고 있어서 심각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이이는 선조와 뜻이 맞지 않아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향촌으로 돌아갔지만, 임금이 부르면 사양하지 않고 지체 없이 달려갔습니다. 이러한 처신도 저의 눈에는 선비답지 못한 행위로 비쳐졌습니다. 저는 이이에게 가정 형편을 이유로 벼슬하면 언젠가는 이욕에 매달리는 타락한 선비가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강민우: 벼슬살이에 관한 한 성혼선생은 이이와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죠. 과거도 일찍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34세에 학생으로 천거된 뒤 죽을 때까지 30년간 수십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실제로 복무한 것은 모두 합쳐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1년 중에서도 정식으로 관청에서 근무한 것은 몇 달 안 되고, 대부분은 성혼선생의 사퇴를 임금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명목상으로만 벼슬한 것입니다.

성혼: 제가 처음 받은 벼슬은 종9품의 참봉(參奉)이었는데, 벼슬을 사양할 때마다 품계가 높아져서 마지막에는 종2품 참판(參判)과 정2품의 참찬(參贊)에까지 올랐습니다. 문과도 거치지 않은 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것은 엄청난 특혜였습니다. 이이가 29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했지만, 그가 마지막 받은 벼슬은 정2품 판서(判書)를 거쳐 종1품의 찬성(贊成)에 그쳤으니, 제가 받은 혜택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강민우: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이이의 충고와 권고를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죠.

성혼: 비록 이이의 권고를 받아들여 잠시나마 벼슬에 나아갔지만, 제가 평생 벼슬을 멀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선비는 벼슬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과 건강문제가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선조가 겉으로는 선비를 우대해도 속으로는 선비의 말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이의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벼슬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욕과 명예를 추구하는 행위로 끝나기 때문에 자신의 지조와 신념에 어긋난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이이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점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신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제 환경의 차이도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성혼선생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파주의 우계에 있는 본가는 안채와 사랑채(서재)가 나누어진 몇 칸짜리 집으로, 손님이 며칠씩 묵어갈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성혼: ‘죽우당’으로 불리는 서재가 있는데, 이 방은 원래 아버지 성수침이 사용하던 사랑채였습니다. 집 주변에는 약간의 농토가 있어서 몇 명의 종(노비)을 데리고 직접 농사일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기도 했습니다. 36세가 되던 1570년(선조 3년)에는 죽우당의 동쪽에 3칸짜리 우계서실을 지었는데, 기와집입니다. 전라도 순창(淳昌)에도 몇 이랑의 토지가 있어 송익필이 노비가 되어 유랑할 때 그곳에서 수학한 곡식 일부를 가져다준 일도 있습니다.

강민우: 임진왜란 중의 기록을 보면, 이 땅을 팔아서 서울 근교의 여러 곳에 땅을 사겠다고 말한 기록이 보입니다. 그밖에 황해도 배천(白川)에도 노비가 살고 있어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혼선생은 이이보다 집안 사정이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저는 조상의 무덤이 있는 파주의 향양리에도 가끔 머물렀는데, 이곳에는 재실(齋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세운 건물)과 제전(祭田: 제사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급된 토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적이 없었으니 가정형편이 넉넉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환곡(還穀: 국가 구휼제도로서 춘궁기에 대여했다가 추수 후에 회수하던 곡물)을 받지 않으면 봄철을 넘기기 어려웠으니, 항상 생활에 곤궁을 느끼며 살아갈 정도였습니다. 다만 이이처럼 많은 가솔을 거느리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외아들이므로 조카들이 없고,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습니다. 딸은 시집가서 출가외인이 되었고, 두 아들 가운데 장남 문영은 19세에 일찍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 문준만이 남았으니 가솔은 비교적 단촐하여 이이처럼 가솔들에 대한 심한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의 생활도 매우 어려웠지만 이이보다는 나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이는 부모의 재산을 5남매가 똑같이 나누어 가졌기에 물려받은 재산이 극히 적었습니다. 이이는 두 형님 이번과 이선, 누이 이매창, 동생 이우 모두 5남매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집에 모일 때에도 이이의 집은 좁아서 모이지 못하고 성혼선생의 집에 모이는 경우가 많았던 거죠.

성혼: 이이는 가난하여 파주에는 후학을 가르치는 서실을 세우지 못하고, 재산을 가진 처가가 있던 해주에 가서 서실을 세웁니다. 저의 경제력이 이이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임진왜란을 만난 이후 만년에는 처참할 정도로 곤궁했습니다. 집이 불타고 먹을 양식도 없고 입을 옷이 없어서 종이로 만들어 입는가 하면, 관직에 있는 친구들에게 옷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절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이이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하고 예견하는데 그쳤지만, 저는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이의 저서나 언행에 드러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에 더욱 감동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이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이 보였고, 그의 학설이 가진 우수성에 머리를 숙여졌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성혼선생은 이이를 단순한 친구로 보지 않고 선생으로 존경했던 것이군요. 특히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살아있을 때보다 이이를 한층 높여 ‘존선(尊先)선생’으로 부르면서 그의 문집 편찬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거죠.

성혼: 이이가 죽은 뒤에야 그의 학문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저와 이이의 학문과 기질의 차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문은 이이가 저보다 뛰어나고 도덕은 제가 이이보다 뛰어났다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이 점은 두 사람이 서로 인정하는 바입니다.

강민우: 일찍이 성혼선생이 학생으로 천거 받을 때 선조 임금이 이이에게 성혼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이이는 “만약 견해의 경지를 가지고 논한다면 제가 다소 나은 점이 있겠으나, 품행의 독실함은 제가 성혼에게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평가야말로 두 사람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이이는 선조 임금에게 성혼의 재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마다 재주가 똑같이 않으니 홀로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려서 백성을 구제함)의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자가 있고, 선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의 재주를 쓸 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성혼의 재주가 홀로 경세제민의 책임을 맡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치지만, 사람됨이 선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충분합니다. 이 어찌 쓸 만한 재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성혼선생이 경세제민을 이루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선을 추구하는 도덕성은 매우 높다는 말이군요.

성혼: 저와 이이는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녔으며 그 개성이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서로 책선하면서 충돌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갔습니다. 두 사람은 죽은 뒤에도 한 쌍으로 엮여져서 문묘 배향이 추진되고, 숙종 때에는 함께 문묘 배향이 이루어집니다. 이후에도 함께 폐출되고 또 다시 함께 배향되는 기이한 운명 공동체를 이룹니다.

강민우: 다만 두 사람이 후세의 당쟁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불행하게도 두 당파로 갈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숙종 때에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이이는 노론의 추앙을 더 많이 받고 성혼은 소론의 추앙을 더 받습니다. 이는 성혼의 외증손자 윤증(尹拯)이 소론의 영수가 된 것이 그 계기입니다. 하지만 이념상으로 보면 명분보다 실리를 존중하는 소론의 정책과 성혼의 이념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성혼: 제가 실리적 모습을 보인 것은 임진왜란 중에 선조보다 광해군에 기대를 걸었던 것뿐입니다. 이는 당시 국내 상황의 현실성을 고려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보면 저는 결코 실리주의자가 아닙니다. 저의 직계 제자들은 대부분 벼슬을 포기하거나 벼슬을 하다가도 향리로 은퇴하여 지조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 인사가 많다는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비록 그들의 후학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했지만, 노론과 소론 모두 저와 이이를 동시에 존경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