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과 복권


복직과 복권.

 

조 1년(1623년) 3월 16일의 일이다.

“김장생(金長生)을 장령(掌令)에 임명하였다. 김장생은 타고 난 자질이 훌륭하고 순수하였다. 일찍부터 이이(李珥)를 사사하면서 학문에 침잠하여 당대의 대유(大儒)가 되었다.
계축옥사 때 그의 동생 두 사람이 고발을 당하니, 광해군(전 임금)이 반역을 고발한 자(박응서 – 필자주)에게 친히 이렇게 물었다.
‘김모(金某, 김장생)도 미리 알고 있었는가?’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김모는 현인이라, 저희들의 모의를 그가 들어서 알까 염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장생은 죄에서 벗어나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뒤 두문불출하고 부지런히 학문을 강론하니,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의 선비들이 모두 높이 추앙하였다. 이때에 와서 맨 먼저 헌직(憲職, 사관헌의 관직 즉 장령)으로 불러들였다.”

『인조실록』1권, 인조 1년(1623년) 3월 16일자 다섯 번째 기사에 실린 기록이다. 김장생을 사헌부의 장령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워 나중에 대유학자가 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장령(掌令)’이란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4품 관직이다. 사헌부(司憲府)는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으로, 지금의 감사원에 해당한다. 정치를 살피고 관리들을 규찰하는 직책이다.
김장생(金長生, 1548년 〜1631년)은 나중에 문묘에 종사된 인물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대유학자의 반열에 든 사람으로 『인조실록』의 ‘대유(大儒)’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예학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그 아들 김집(金集)은 이를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김장생이 철원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1613년(광해군 5년)에 계축옥사(癸丑禍獄) 사건이 발생했다.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 등이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범인 일당들이 모두 서얼(庶孼)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적서 차별을 폐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상소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무륜당(無倫堂)을 만들고 화적질을 일삼았다.
당시 대원군 밑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 관리들은 그들이 반란을 모의했다고 조작하였다. 그들은 역모를 일으켜 영창대군(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으로, 계모 인목왕후의 아들)을 옹립하려고 하였으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가담했다고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때 김장생의 서제(庶弟, 서자 동생)인 김경손(金慶孫)과 평손(金平孫)의 이름도 거론되어 그 역시 역모의 의심을 받았다. 당시 그 동생들은 모두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김장생도 체포되었는데, 심문 과정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앞에 소개한 『인조실록』의 기록에는 당시 임금이던 광해군이 직접 심문에 참여하여 반역을 고발한 자에게 김장생도 관계하였는지 물었으며, 심문을 받던 자는 박응서였다. 박응서는 우호적인 답변으로 김장생은 위기를 모면하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대원군이 권좌에서 끌려 내려오고 정권을 잡고 있던 북인의 대북파 관리들이 물러나자 그 자리를 서인과 남인들이 차지하였다. 이들이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대원군을 몰아내는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조가 즉위한 직후에 공신들에 대한 사례가 추진되었고 대원군 시대에 배척 받았던 많은 관리들이 복권되었다.
고향에 내려가 있던 김장생 역시 복권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상소문을 올려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다만 임금을 위하여 반정(구데타) 공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임금을 잘 보좌할 것, 민생을 구제할 것, 폐주(광해군)의 생명을 보전할 것, 옥사를 삼갈 것, 인재를 수용할 것, 기강을 진작시킬 것, 공도(公道, 바른 도리 혹은 정의)를 넓힐 것, 탐욕의 폐풍을 혁신할 것 등을 간곡히 경계하였다.
김장생은 어렸을 때, 처음에 구봉 송익필(宋翼弼, 1534년∼1599년)에게 예학을 배웠다. 송익필은 서얼 출신으로 나중에 환천(還賤, 양민의 자격을 잃고 천민으로 돌아감)의 위기에 처했으나,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가 그를 10여년간 먹여 살린 적이 있다. 송익필 외에도 김장생은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이날 『인조실록』의 김장생 관련 기록에는 김장생의 스승으로 오직 율곡만 거론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이 다시 권력을 잡음으로써 율곡의 지인들이나 제자들이 다수 중앙의 권력 있는 자리에 속속 배치되었다.
3월 16일자로 김장생과 같이 복권된 인물 몇 사람의 기록을 소개한다.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이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앞선 조정 때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온 나라 사람들의 중망(重望, 큰 기대)을 받았다. 혼란한 시절 임해군(臨海君, 선조의 장자이며 광해군의 친형)의 옥사 때 맨 먼저 은혜를 온전히 하는 의리로 그 일의 부당함을 개진하였고, 폐모론(廢母論,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이 한창일 때에 또 상소문을 올려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힘껏 개진하였으므로 흉도들(광해군 당시 집권세력인 대북파)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시골마을로 귀향해 있었다.”

이원익(1547년〜1634년)은 율곡(1536년〜1584년)보다 11살 어리다. 17살의 나이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그는 율곡이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선조 7년, 1574년경), 율곡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일을 잘 처리하여, 율곡의 눈에 들었는데, 율곡의 추천으로 1576년 정언이 되었으며, 1578년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이후 선조시대에 그는 우의정과 영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광해군 때에도 초기에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는 인품이 곧았으며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불필요하게 사람을 사귀거나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율곡은 이러한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자기보다 11살이나 어리지만 존경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원익은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정여립의 옥사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남인의 편에 섰다. 학문적으로 남명 조식을 따르던 사람들은 북인으로, 퇴계 이황을 따르는 사람들은 남인으로 모였다. 광해군 때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 하다가 집권파인 대북파에 밉보여 유배를 당했었다.

같은 날 『인조실록』에는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의 복직 기사도 실렸다.

“오윤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오윤겸은 그 사람됨이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온화하였다. 일찍부터 성혼(成渾)의 문하에 수학하여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성혼이 자주 칭찬하였다. 또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고상한 지조를 지녀 이국인들이 또한 존경하였다. 경신년 이후에 중국에 갈 때는 해로를 이용하였는데, 사신을 보낼 때면 사람들이 모두 기피하였다. 그러나 오윤겸은 사명을 받은 즉시 출발하였으므로 광해군이 이를 가상히 여겨 ‘신하가 된 자의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주위에 권장하였다.”

오윤겸은 우계 성혼의 제자였다. 1602년(선조 35년) 성혼이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스승을 변호하다가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쫒겨 났다가 그 뒤 7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때는 다시 서울로 들어와 호조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광해군 아래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정인홍을 탄핵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으나 계축옥사 사건이 일어나 정계가 혼란해지자 부모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여 외지로 나갔다.
그는 1617년에는 일본 파견 사절단의 정사로서 400여 명의 인원을 이끌고 일본에 가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구해오기도 했으며, 1618년 북인들이 인목대비 폐모론을 제기할 때는 이를 반대하다 탄핵을 받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1622년는 다시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단에 선발되어,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당시 육로는 여진족의 후금에 의해서 봉쇄되어 있었다. 광해군이 그를 칭찬한 것은 그러한 어려움을 피해서 명나라에 잘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 성혼은 성리학에 일가견이 있었던 부친 성수침(成守琛)에게 글과 성리학을 배우고 휴암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당시 같은 고을 파주에 살던 율곡도 백인걸에게 글을 배웠는데 두 사람은 이때부터 동문으로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서로 동문, 동창 관계이다.
한편 성혼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대신 학문 연구에 뜻을 두었는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을 찾아가 사물의 이치 등을 논하기도 하였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에 깊이 감동하였다. 성혼의 이러한 태도가 오윤겸에 영향을 미쳐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탄핵하였던 것 같다. 오윤겸은 1623년 대사헌에 임명된 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위에 소개한 인물들 외에도 서성(徐渻), 정경세(鄭經世), 이수광(李睟光), 박동선(朴東善), 김덕함(金德諴), 윤지경(尹知敬), 조정호(趙廷虎), 정온(鄭蘊), 엄성(嚴惺) 등이 복권되거나 복직되었다. 이들은 대개가 광해군 시대 때 탄핵을 받고 쫓겨났거나 탄압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조정의 율곡 이야기


조정의 율곡 이야기.

 

인조실록』에는 다른 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대화들이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임금을 둘러싼 고관들의 대화, 그리고 각 기관에서 올라오는 상소문, 상주문(보고서)들이 편년체로, 즉 일자별, 시간별로 소개되어 있다. 그 기록 가운데 율곡 이이(李珥)가 언급된 기사는 모두 62건이 있다. 그 기사들을 연도별, 일자별(음력)로 간략한 내용(대화의 주제)과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인조 1년(1623년) 3월 16일: 이원익·이정구 등 관직 임명
2)인조 1년(1623년) 3월 25일: 성혼의 관작 회복
3)인조 1년(1623년) 3월 27일: 이이의 문묘 종사 논의
4)인조 1년(1623년) 5월 7일: 서북 인재의 등용 등 논의
5)인조 1년(1623년) 5월 7일: 사묘(私廟)에 대한 전례 논의
6)인조 1년(1623년) 5월 29일: 김장생·장현광·박지계를 임명
7)인조 1년(1623년) 6월 12일: 유공량에게 형편을 물음
8)인조 1년(1623년) 7월 6일: 사우(師友)의 도에 대하여 논함
9)인조 1년(1623년) 윤10월 28일: 주강에 『대학』을 강함
10)인조 1년(1623년) 11월 2일 : 춘천 부사 신응구의 졸기
11)인조 2년(1624년) 3월 21일: 붕당의 제거와 대간의 폐를 논함
12)인조 2년(1624년) 5월 15일 : 가뭄 대책을 논의함
13)인조 2년(1624년) 8월 9일 : 붕당의 폐단 등에 대해 논함
14)인조 2년(1624년) 9월 6일 : 이귀가 대관 교체의 취소를 건의함
15)인조 2년(1624년) 10월 11일 : 어영청의 군사조직과 조련법 개선 논의
16)인조 2년(1624년) 10월 22일 : 이이 등의 서원 사액에 대한 논의
17)인조 3년(1625년) 2월 22일 : 이이와 성혼의 문선왕묘에 종사 청원
18)인조 3년(1625년) 3월 11일 : 변법에 관하여 논의함
19)인조 3년(1625년) 3월 25일 : 특진관 이귀의 건의
20)인조 3년(1625년) 4월 11일 : 전 대사헌 정엽의 졸기.
21)인조 3년(1625년) 8월 8일 : 왕의 마음의 공부를 간청함
22)인조 3년(1625년) 8월 26일 : 대간 포용 등에 대해 건의함
23)인조 4년(1626년) 5월 7일 : 국경 방어에 대한 계책 건의
24)인조 6년(1628년) 5월 5일 : 당쟁의 폐를 논함
25)인조 7년(1629년) 3월 18일 : 이귀의 건의 등
26)인조 7년(1629년) 3월 21일 : 임금이 『서전』의 내용을 물음
27)인조 7년(1629년) 윤4월 12일 : 이귀가 3권의 책을 만들어 올림
28)인조 7년(1629년) 5월 6일 : 임금이 『서전』을 강하고 그 내용을 물음
29)인조 7년(1629년) 7월 23일 : 속오군의 충원 등을 논함
30)인조 7년(1629년) 10월 17일 : 『격몽요결』을 인쇄하여 올림
31)인조 8년(1630년) 1월 23일 : 속오군 등 국정에 대해 논의함
32)인조 8년(1630년) 1월 27일 : 낭관, 왕세자 책봉 등에 관해 논함
33)인조 8년(1630년) 9월 7일 : 강릉 유생들이 서원 사액을 건의함
34)인조 8년(1630년) 10월 30일 : 주강에 『서전』을 강의함
35)인조 9년(1631년) 8월 9일 :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의 졸기
36)인조 9년(1631년) 10월 17일 : 선비가 공관(空館)한 원인을 논함
37)인조 10년(1632년) 2월 6일 : 태학의 교육 과정 개편 등을 진언함
38)인조 10년(1632년) 7월 1일 : 복제 등을 정할 것을 건의함
39)인조 10년(1632년) 9월 13일 : 붕당의 폐해를 논함
40)인조 10년(1632년) 10월 9일 : 복색에 대하여 의논함
41)인조 12년(1634년) 7월 20일 : 인목 왕후의 부묘에 대해 논의함
42)인조 13년(1635년) 5월 11일 : 성혼과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함
43)인조 13년(1635년) 5월 11일 : 채진후 등이 문묘종사 제안을 반대함
44)인조 13년(1635년) 5월 12일 : 윤방과 김상용이 문묘종사의 상소 올림
45)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문묘 종사 건으로 상소를 올림
46)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문묘 종사에 대한 임금의 답변을 논함
47)인조 13년(1635년) 5월 13일 : 심지원 등이 문묘 종사를 건의함
48)인조 13년(1635년) 6월 6일 : 조익이 임금의 무성의에 사의를 표명함
49)인조 13년(1635년) 6월 6일 : 이이 등의 문묘 종사 문제로 의견 대립
50)인조 13년(1635년) 8월 3일 : 심지원 등이 정사의 바른 도를 건의함
51)인조 13년(1635년) 8월 9일 : 윤방이 문묘종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함
52)인조 13년(1635년) 9월 26일 : 민여기 등이 문묘 종사를 건의함
53)인조 13년(1635년) 12월 21일 : 사서 김익희가 상례에 대해 건의함
54)인조 14년(1636년) 10월 19일 : 이이·성혼을 문묘에 제사하도록 건의함
55)인조 14년(1636년) 10월 21일 : 한극술이 정거문제로 상소함
56)인조 16년(1638년) 7월 19일 : 감사의 구임에 대해 의논함
57)인조 16년(1638년) 7월 22일 : 수군과 인재 등용에 대해 의논함
58)인조 19년(1641년) 2월 12일 : 대제학 이식의 『실록』 관련 건의
59)인조 22년(1644년) 8월 23일 : 대신과 정사를 논의함
60)인조 22년(1644년) 12월 23일 : 장령 이만영이 유백증 등을 논죄함
61)인조 22년(1644년) 12월 28일 : 서경우가 이만영의 논의를 변호함
62)인조 23년(1645년) 10월 9일 : 김집과 송시열을 부름

이상의 연도별 율곡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인조 등극 초기인 인조 1년(10건), 2년(6건), 3년(6건)에 율곡과 관련된 많은 언급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조 5년인 1627년에는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침입한 해였다.(정묘호란) 이해는 조정에서 율곡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 전인 인조 4년과 그 1년 후인 인조 6년에는 율곡에 대한 기록이 각각 1건씩 있었다. 전란 상황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율곡에 대한 기억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전후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인조 7년과 8년에는 율곡에 대한 언급이 다시 늘어나 6건과 4건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2건(인조 9년), 4건(인조 10년), 0건(인조 11년), 1건(인조 12년)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다 인조 13년인 1635년에는 다시 율곡 관련 기록이 12건으로 급증하였다. 이해는 특이하게도 조정에서 율곡의 문묘 종사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문묘 종사(文廟 從祀)’란 무엇인가? ‘문묘(文廟)’는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묘우(廟宇, 신위를 모시는 사당)를 말한다. 공자는 유교를 집대성하기는 하였으나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후대인들은 그를 존경하여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 文宣王)에 추증하여 약칭으로 ’문선왕(文宣王)’이라 부른다. 그래서 문묘는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 있는 문묘는 현재 명륜동 성균관대학의 입구 쪽에 있다.
‘종사(從祀)’란 ‘제사를 지내다’, ‘위패(位牌, 신위)를 모시다’, 혹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는 뜻이다. ‘배향(配享)’을 하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묘종사는 문묘배향(文廟配享)이라고도 한다.
문묘에는 공자의 위패와 함께 중국과 한국의 유명 유학자들의 위패도 함께 모신다. 현재 성균관에 있는 문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배향하고 있으며, 공문(孔門, 공자의 제자) 10철(十哲, 10인의 현자)이라고 하여 열 명의 제자들의 위패도 모시고, 송조(宋朝, 송나라) 6현( 六賢, 6명의 현자)의 위패도 함께 모셔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東方) 18현인(十八賢)의 위패도 함께 모시는데, 여기에 현재는 율곡도 함께 들어가 있다.
율곡을 문묘에 모시자는 논의가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큰 시각에서 보면 중국 중원의 문명과 문화, 즉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발달된 중국문명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문명의 나라 명나라와 오랑캐의 나라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이 명나라에 더욱 기울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로 밀려오는 서구 문명보다는 중국에서 전해진 유교문명의 부활을 통해서 조선을 더욱 평화롭고 안정된 나라로 만들자는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잘못되었지만 당시 지식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조를 둘러싼 지식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것도 이러한 선택의 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조 14년, 즉 1636년에는 율곡 관련 기사가 2건으로 줄었다. 이해 12월에 대청제국으로 간판을 바꿔 단 여진족들이 북쪽에서 침략해 들어왔다.(병자호란) 이 때의 전쟁에 패배한 결과 인조는 1637년 1월 말경 삼전도(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까지 밀고 들어온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 끌려 나가 항복의 예를 올리는 치욕을 당하였다. 그래서 1637년에 조정은 율곡에 대해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율곡에 대해서 1638년(인조16년)에 2회, 3년 뒤인 1641년(인조 19년)에 1회, 또 그 3년 뒤인 1644년(인조 22년)에 3회, 그 다음해에 1회의 언급이 있었다. 인조 시대, 율곡에 대한 기억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럼 이하 각 장면별로 어떤 내용으로 율곡이 언급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제16대 조선왕 인조의 시대


제16대 조선왕 인조의 시대.

 

조가 임금으로 있던 시기는 1623년부터 1649년까지 26년간이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조선으로서는 다사다난(多事多難, 여러 가지 일들이 많고 곤란함도 많음)한 시기였다.
나라 안에서는 쿠데타로 임금이 바뀌고 이어서 그 임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여진족이 북쪽에서 두 차례나 침략해왔으며 조정은 역시 두 차례나 피난을 갔는데 결국에는 임금이 항복하여 맨몸으로 신생 청나라의 대장에게 절을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그 여진족에게 60만명 가까운 백성들이 끌려가고 인질로 왕세자들이 잡혀갔다.
눈을 세계로 돌려보면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등장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에도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여 공전의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유럽에서는 장차 지구 전체의 판도를 바꿔버릴 서구 문명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한 때였다.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년〜1642년)가 활동을 하고 있었고,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년 〜 1650년)가 『방법서설』을 집필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근본 원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또 상인들의 국가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지루한 독립전쟁(1567년〜1648년)을 치루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년〜1669년)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년)>, <돌다리가 있는 풍경 (1637년)>, <야경(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1642년)> 등을 그리면서 중세 기독교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씩 걷어내고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년〜1662년)도, 영국의 과학자 뉴턴(Sir Isaac Newton, 1642년〜1727년)도 모두 이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 그리고 종교로 꿈틀거리는 시대였으며 전체적으로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인조의 시대 26년을 간략한 연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23년(인조 1년) 반란이 일어나 광해군이 하야하고 인조가 등극함
1624년(인조 2년) 공신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함
1627년(인조 5년) 만주의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침입(정묘호란)
1628년(인조 6년)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이 제주도 표류
1632년(인조 9년) 사신 정두원이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 등 전래
1636년(인조13년) 만주에 청 제국이 성립함. 청나라가 침입(병자호란)
1637년(인조14년) 삼전도에서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함
1642년(인조19년)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남
1644년(인조21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함
1645년(인조22년) 소현세자가 청에서 과학문물, 서양서적을 들여옴
1649년(인조26년) 인조 사망.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임금(효종)으로 즉위

인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기는 참으로 임금노릇하기가 힘든 시기였다. 자신이 광해군 정권을 뒤엎고 왕권을 쟁취하였지만 그 다음해 바로 자신이 반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반란군은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흥안군(선조의 서자)을 왕으로 옹립하여, 인조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 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반란군내부에서 분란이 발생하여 우두머리 이괄은 부하 장수들에게 살해당하고 능지처참 되었다. 인조는 당시 공주로 피난을 가 있었는데 그 곳으로 그 두목의 머리가 배달되었다.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해가던 3년 뒤인 1627년(인조 5년)에 만주의 후금이 침략해 들어왔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조선 조정을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 정묘호란 때 후금의 홍타이지가 보낸 군사는 주력부대가 3만여명으로 3월초(양력)에 약 10여일 만에 정주성, 안주성을 거쳐 평양성으로 치고 들어왔다. 조선의 북방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북방을 책임지고 있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락하고 그 휘하의 부대들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당시 첫째 아들 소현세자를 전주로 피난시키고, 자신은 조정 대신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긴 싸움은 피하고 곧바로 조선의 조정과 강화를 맺었다. 조선과 후금이 형제관계를 맺는다는 조건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오랑캐로 무시하였던 여진족의 추장을 형님으로 모시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 뒤 10년 정도 지난 1636년에 후금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 때 후금은 이미 더욱더 강성해져서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홍타이지는 청태종이라는 천자의 존호를 자칭하고 조선에 대해서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와 전쟁을 선포하였고, 그해 12월 청나라가 침략하였다.(병자호란)
홍타이지가 보낸 청나라 군대는 약 12만명이었다. 이들은 이전에 침입하였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속히 서울로 진격하여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조선의 임금과 조정을 막았다. 당시 인조는 수군이 약한 청나라 군대를 생각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장기전에 돌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수를 읽은 청나라 군대는 신속히 피난길을 막았다. 인조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항전 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은 1만 3천여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사전에 전쟁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군량이 부족하였다. 또 조정에서 전국 각지의 관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청나라 군대가 가로 막아 남한산성은 고립되었다.
청군은 세자빈과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등이 피난을 간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거기에는 왕실 관계자들과 역대 임금의 신주도 함께 피난해 있었다. 청군은 예상을 깨고 수전 경험이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여 강화산성을 함락시켰다. 강화도 함락 사실을 전해 받은 인조는 식량도 떨어지고 있어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청나라에 항복을 하였다.
홍타이지가 이끈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뒤에 50만명이 넘는 조선인들을 포로로 삼아 데려갔다. 인질로 인조의 아들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데려갔다. 이후 그는 명나라를 제압하고 북경을 장악한 뒤에 천하를 평정하였다.
앞서 소개한 연표에서 유심히 봐야할 대목은 세계 역사의 대변화이다.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이 1628년(인조 6년)에 제주도 표착한 것은 그러한 변화의 시작을 조선에 알리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인조는 자기 스스로 반란 세력이 되어 선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임금이 되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반란 세력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고 반란의 두목은 살해되었다. 그리고 외부의 적인 여진족의 침입도 견뎌냈다. 비록 그들을 극복하여 쫒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어차피 중국 천하를 정복하게 될 세력이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신하의 예로 섬기는 것으로 위협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인조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양문명이었다.
박연은 조선에 처음으로 유럽의 존재를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의 선원이었다. 제주도에 표류해온 그는 한양으로 호송되어 심문을 받고 훈련도감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에 임시기구로 설치된 군사기관이다. 이후 상설기구로 바뀌었다. 정예 병사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훈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는 그 자체에 군사 조직 체계도 갖추게 되었다. 급료를 받는 병사들 약 100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훈련도감군이라 부르며 삼수군, 즉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로 구분되는 군사조직이 있었다.
박연은 이곳에 소속되어 나중에는 조선 사람으로 귀화를 하고 조선 이름을 가지고 무신으로 병자호란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는 1648년(인조 2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그는 네덜란드에서 같이 온 부하 2명과 함께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관리하는 일을 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 오랑캐포)’의 제작법과 조종법을 지도했다.
박연이 보여준 새로운 세계의 문물에 이어서 1632년, 명나라에 간 사신 정두원이 서양의 망원경(천리경), 시계(자명종), 그리고 화포 등을 받아왔다. 또 그보다 13년이 지난 1645년(인조22년) 인조가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큰 아들 소현세자가 과학문물과 서양서적을 들여왔다. 인조는 이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 이를 경계하던 터였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해에 사망하고, 인조는 아들의 미망인이자 며느리인 세자빈 민회빈 강씨와 소현세자의 아들들이자 자신의 손자들 두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자신을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서양문물 전래의 싹을 자른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율곡은 왜, 어떤 이유로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 그의 개혁사상이 재평가 되었을까, 아니면 유학 연구의 업적 때문이었을까?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서 정치를 하였을까? 『인조실록』에 나타난 율곡 관련 기사를 읽으며 살펴보기로 한다.

『인조실록』과 율곡


『인조실록』과 율곡.

인조실록』
(『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은 1623년부터 1649년까지 인조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총 50권 5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6년에 걸친 인조 시대 국정 전반에 관한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중 한권이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으로 검색하면 3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첫 번째 기사는 인조 2년, 즉 1624년 7월 19일(음력)자 기사로 「황해도로 하여금 이율곡의 『성학집요』를 인쇄하여 바치게 하다」라는 기사다. 율곡의 문집 『성학집요』를 지칭할 때 사용된 것이다.

두 번째는 인조 3년(1625년) 4월 11일 대사헌 정엽이 사망하였다는 졸기(卒記)에 나온다. 졸기란 나라의 일을 맡았던 관리나 왕실 관련 인물이 죽었을 때, 사망한 사실과 함께 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정엽(鄭曄, 1563년〜1625년)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그리고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도승지,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기사는 정엽을 소개하면서 “일찍이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에 뜻을 두고 율곡 이이,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 참여하여 학문적인 조예가 더욱 깊었다. 가정에 있어서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고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장례와 제사 등은 모두 『가례(家禮)』(주자朱子의 저술)를 따랐다.”고 하였다. 정엽의 스승으로 율곡을 지칭한 것이다.

마지막은 인조 9년(1631년) 8월 9일자 기사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의 졸기」이다. 사관은 김장생이 자질이 훌륭하고 효도와 우애가 깊으며 순수하고 지극하였다고 소개하고 이어서 “율곡 이이를 따라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쏟아 독실히 좋아하였다. 독서할 적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경전(經傳)과 염·락(濂洛) 의 여러 책들을 가지고 담겨 있는 뜻을 탐색하였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낮으로 사색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그 귀취(歸趣, 일이 되어 나가는 형편이나 상황)를 얻고 난 다음에야 그쳤다.”고 칭찬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조실록』에서 ‘율곡’이라는 호는 제자들 김장생과 정엽의 졸기를 기록할 때 스승으로서 소개할 때 사용되었으며 또 율곡의 저술 『성학집요』를 소개할 때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은 1584년(선조 17년)에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나고 임금도 선조→광해군→인조로 바뀌었지만 율곡은 조정에서 그의 저술을 출판하게하고 그 제자들이 사망할 때 스승으로 주목하는 등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이이(李珥)’라는 이름으로 『인조실록』을 검색하면 관련기사가 62건이나 발견된다. 인조는 재위기간이 1623년부터 1649년까지 26년간이었다. 율곡이 사망한지 4, 50년이 지났지만 일 년에 2번 이상씩 조정에서 율곡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퇴계와 비교해보면, 퇴계의 경우 ‘퇴계’라는 호칭은 『인조실록』에 1차례 기록되었으며, ‘이황(李滉)’이라는 이름은 10번 등장한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기억은 퇴계 보다 여섯 배가 넘는다는 것이다.

물론 더 많이 기억된다고 더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러한 기록이 율곡의 철학적 성과나 사상사적 성과가 퇴계 보다 더 뛰어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의 조정은 퇴계보다 율곡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기록은 이전의 광해군 시대와 비교해보면 이상하리만큼 많다. 율곡 관련 기사는 『광해군일기 중초본』에서 20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6건이 있다.(검색조건: ‘이이(李珥)’) 인조의 다음 임금인 효종의 시대를 보면 32건의 율곡 관련 기사가 검색된다. 『인조실록』의 62건에 비하면 1/2에 불과하다. 효종 다음 임금인 현종 때의 실록을 보면 『현종실록』 54건, 『현종개수실록』 93건으로 또 급증한다. 현종 시대(재위: 1659년∼1674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이 활동한 시대다. 이 시기에 율곡의 기록이 많은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송시열은 현종의 스승이었으며 현종의 아버지 효종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또 그는 율곡을 최고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 안팎에서 활동하면서 율곡을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조선 주자학의 대가이기도 하고 서인이 분당한 뒤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사람이다. 그는 앞서 졸기에 나온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며,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다시 『인조실록』으로 돌아와 율곡과 관련된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조정에서 율곡에 대한 기억이 급격히 많아 진 것과 동시에 율곡에 대한 평가가 질적으로 크게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과 퇴계는 과연 서로 대립적이고 서로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 최고의 두 유학자, 혹은 대표적인 두 사상가․철학자일까?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조선 유학을 형성하는 양대 산맥의 최고봉일까? 『인조실록』에 나타난 율곡 관련 기록을 읽어보면서 당시 율곡에 대한 기억이 변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