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의 정치


붕당의 정치.

 

서 소개한 인조 1년 7월 6일자 『인조실록』 기록에 붕당의 폐해에 대한 인조와 정엽의 대화가 보인다.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병이 든 것은 모두 붕당(朋黨)때문이다.(我國受病, 皆由於朋黨也)”

붕당이란 뜻이나 이익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한다. 한자말을 살펴보면 친구 붕(朋), 무리 당(黨), 즉 친한 친구들의 모임이다. 끼리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어울려 정치를 하는 것이 붕당정치라고 한다. 인조는 이러한 붕당 때문에 우리나라가 병에 걸렸다고 본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정엽은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께서 타파하려 하시나 병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갑자기 제거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인조는 광해군 시기에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전횡으로 우리나라가 병이 들었다고 보고 정엽은 그에 동의하면서 그 병의 뿌리가 너무 깊어 갑자기 제거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인조가 이이첨이나 정인홍 등을 꼬집어 말하지 않고 붕당의 폐해를 말한 것은 인조반정시 도움을 준 서인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경계를 하여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인들도 패거리 정치를 하고 있었으며 갈수록 인조에 대한 집단 요구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시로 자신들이 공을 세워서 인조가 즉위할 수 있었음을 발언하여 인조를 압박했다. 인조로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자신도 광해군과 같은 신세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엽이 “병(붕당)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갑자기 제거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라고 발언한 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금 서인의 붕당정치를 갑자기 제거할 생각은 마십시요’라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사실 인조 자신이 붕당의 덕분에 정권을 잡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중에 또 그 붕당의 폐해를 교묘히 이용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조정에 들어온 서인의 공신 세력이 함부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서인 세력 중 아직 산림에 있던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을 불러들여 조정의 서인 세력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또 이원익 등 남인을 기용하여 서인의 공신 세력을 견제하였다.
1624년(인조 2년) 1월 22일(음력) 인조가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서인 중에서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은 항왜병 100여명을 선봉장으로 하여 1만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강을 지나자 인조는 수원을 거쳐 공주로 피난을 갔다. 이괄은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서자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반군 집단에 내분이 일어나 이괄은 살해되고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붕당이 반드시 나쁜 점만 있을까? 같은 해 (인조 2년) 3월 21일 김장생이 강연에 참가하여 임금에게 『논어』를 강의하던 날, 이런 대화가 있었다.
참찬관 정경세(鄭經世) 이렇게 말했다.

“군자와 소인이 다른 까닭은 공(公)과 사(私), 의(義)와 리(利)일 뿐입니다. 이것은 임금이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즉 이 말은 군자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고 의와 리를 잘 구분하여 행동을 하는데 소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다. 사적인 일에 마음을 쓰고 이익에 집착하는 것이 소인인데 임금은 이점을 잘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정경세는 류성룡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그러므로 정경세는 남인에 속한다.
그는 또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영합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전에 한기(韓琦)·부필(富弼)·범중엄(范仲淹) 등이 자기 임금을 섬길 적에는 반드시 품은 뜻을 아뢰면서 논쟁하고 변호하기를 마지않았으나, 물러가 있을 때에는 즐거운 모습으로 서로 화합하였는데, 이것이 군자의 도리입니다.”

한기(韓琦), 부필(富弼), 범중엄(范仲淹)은 북송의 제4대 황제인 인종(仁宗, 1010년〜1063년, 재위 1022년〜1063년)때의 관료들이다. 정경세의 말에 따르면, 군자들의 모범적인 행동 방식은 임금을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가감 없이 잘 표현하고 또 다른 신하들과 논쟁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나 평소에는 서로 잘 화합하는 것이다. 조정에서 의견이 달라 논쟁하는 것은 서로 싫어해서가 아니라 사심이 없이 나라를 위해서 하는 마음일 뿐이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 임금은 이렇게 물었다.

“말세에는 소인이 아니더라도 화합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즉 세상이 혼탁한 때에는 군자들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싸우는데 이것은 왜 그런가 하는 물음이었다. 이에 정경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논의하는 사이에 평화스럽지 못한 말이 있더라도 이것은 해로울 것이 못됩니다. 그러니 마음에 두어 잊지 않는다면 이것은 군자의 일이 아닙니다.”

군자라면 조정에서 심한 논쟁을 벌였더라도 그것이 해로운 일은 아니므로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인들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에 지사 이정구(李廷龜)가 이렇게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각자 소견을 가지고 논쟁한다면 간혹 화합하지 못하더라도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이정구의 의견에 따르면 분당 정치가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다. 조정에서 서로 심한 논쟁을 벌이더라도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것은 그 일을 소인의 마음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기억하고 있다가 이용하는 것이다.
이에 이귀가 임금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붕당(朋黨)이 이미 갈라진 뒤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아니면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신의 스승 이이(李珥)가 늘 말하기를 ‘동·서(東西) 두 글자를 타파해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동·서 두 글자는 나라를 망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은 지난날처럼 심하지는 않으나 아직도 모두 제거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동인들은 동서 분당의 책임이 율곡에게도 있다고 보았는데 서인에 속한 이귀는 이에 반대한다. 율곡도 동인·서인으로 나누어 당파를 만드는 것을 개탄했다는 것이다. 동서분당이 결국 나라까지 망치게 될 것이라고 늘 말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귀는 인조2년 3월 21일 현재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원익은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운 뜻이 없는데도 아직도 자기 당에 대해서는 반드시 구제하려 합니다. 붕당을 제거하는 근본은 실로 전하께서 밝게 살피시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고, 아래에 있는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원익은 인조반정 직후에 영의정에 임명된 인물로 당파로는 남인에 속한다. 이귀의 말에 따르면 이원익은 지극히 공정한데도 자기 당파사람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임금이 직접 잘 파악하여 당파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귀의 말 가운데 인조반정 직후에 혼란스러운 정국을 서로 협력하여 끌어가고 있던 남인과 서인 사이에도 당파의 미묘한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귀는 계속해서 인조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그리고 여러 어진 사람이 조정에 가득 차 있는데도 나라 일에는 조금도 효과가 없으니, 이것은 대신들 중에 (짓궂은 일을-필자) 담당하려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다면 경연(經筵, 임금과 함께 글을 읽는 일)도 겉치레일 뿐입니다. 전에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대간(臺諫, 간언을 하는 관리)을 폐지시켜야 국가의 일을 할 수 있다.’ 하였는데, 신도 대간을 없애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연소한 무리들이 시무(時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처음 간관(諫官, 간언을 하는 관리)에 임명되면 반드시 남을 논핵(論劾, 허물을 캐묻고 따짐)하려 하는데, 이것은 폐조(광해군 시기)에 있었던 버릇입니다.”

간관의 존재는 붕당을 촉구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제도적으로 임금의 옳지 못한 처사나 과오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어느 특정 당파의 의견에 휘둘리거나 아니면 당파 끼리 서로 싸우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귀는 아예 그런 제도를 없애버리자고 건의한 것이다.

붕당의 폐해에 대해서는 이해(1624년, 인조2년) 8월 9일에도 경연의 자리에서 논의되었다. 동지사 정엽(鄭曄)이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선조(宣祖) 때부터 사론(士論)이 갈라져서 오늘날까지 그 폐단이 그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치도(治道, 다스리는 도리)가 융성하지 못해 세상이 더욱 쇠퇴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인조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 이이(李珥)의 행장(行狀)을 보건대, 박근원(朴謹元), 허봉(許篈) 등이 한 일이 매우 놀랍다.”

율곡 선생의 행장은 김장생의 『사계전서(沙溪全書)』 제6권과 7권에 실려 있다. 상편과 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행장에 비해 매우 상세하며 길다. 박근원 등이 등장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허엽(許曄)이 경상 감사가 되어 병이 몹시 위중하였는데, 그 아들 허봉(許篈)이 응교(應敎)로서 사직서를 내고 그 아버지를 뵈러 가서는 기생을 끼고 놀기만 하다가 병간호를 잘 하지 않아, 허엽이 결국 죽고 말았다.
선생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속된 무리들이 허봉을 직제학에 추천하려 하자, 선생은 그 일을 가지고 배척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허봉의 무리가 많이 원망하였다.
박근원(朴謹元)이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에 선생이 일찍이 정지연(鄭芝衍)에게 권하여, 개인 일만 돌보고 공적인 도리는 생각하지 않아 업무를 그르친 것으로 탄핵하게 하였다. 선생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는 또 박근원이 욕심 많고 비루하며 간사하다고 탄핵하였다. 그리고 또 선생은 중립에 서서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서 혼탁한 자를 배격하고 깨끗한 사람은 치켜세우며, 서인(西人) 중에 쓸 만한 사람을 거두어 등용하고 동인(東人) 중에 편벽된 사람을 억눌렀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나 헐뜯는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모함해 온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터지게 되어 그들이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인조는 조정에 중책을 맡이 일을 하는 서인들이 많아지자 서인 관리들이 존경하는 율곡의 행장을 꼼꼼하게 읽었던 것 같다. 임금이 박근원과 허봉에 대해서 말을 꺼내니 정엽이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붕당(朋黨)의 화(禍)는 을해년(1575년 선조 8년) 부터 비롯하였는데 신은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에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에 들은 것을 조용히 갖추어 아뢰겠으니, 임금께서 한 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박근원은 수릉관(守陵官)으로 있을 때 본분을 다 하지 않았으므로 이이가 배척하였고, 허봉은 이름 있는 아비의 아들로서 상주(尙州)에 그 아비를 뵈러 가 그 아비의 병이 약간 차도가 있는 틈을 타서 상주 목사(尙州牧使)와 연회장에서 술을 마시다 그 아비가 죽는 것도 몰랐습니다. 이 말이 퍼지자 이이가 그의 승진을 막았습니다.
그 뒤 선왕께서 이이를 신임하여 대우가 날로 융숭해지게 되니, 송응개(宋應漑)·허봉·박근원이 과거의 일로 유감을 품고는 모함하여 ‘교만하여 위(임금)를 업신여긴다.’고까지 탄핵하였는데, 선왕께서 진노하시어 그들을 다 멀리 귀양 보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뒤로 허봉과 박근원의 무리가 눈을 부릅뜨고 밉게 보며 끝내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이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아는 자인데 조정에서 오래 안정할 수 없었으니, 매우 아깝다.”

정엽이 임금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김효원(金孝元, 선조시기 동인의 중심인물)이 젊었을 때에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드나들었으므로 심의겸(沈義謙, 서인의 중심인물)이 그의 사람됨을 천박하게 여겨서 배척하였는데, 그 뒤에 김효원이 조식(曺植)을 만났더니 조식이 심의겸을 극력 공박하므로 김효원이 그와 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쪽지방 사람들이 김효원을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얼마 안 가서 외척이라는 이유로 심의겸을 힘껏 공박하므로, 이이가 서로 화해시키려 하였으나 되지 않았습니다.”

정엽은 율곡이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정철을 변호하다 탄핵을 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당론(黨論)을 아직 타파하지 못하였으니, 오직 임금께서 평화롭게 진정시키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뒤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식도 율곡을 변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인측) 김효원을 곧은 선비라고 합니다만 무뢰한 사람과 결탁했으니, 이것이 곧지 못한 이유입니다. 당초에 선왕께서 김효원을 경원(慶源)으로 발령을 냈는데 이이가 상소하여 삼척(三陟)으로 바꾸서 발령하였으니, (율곡이) 지성으로 화해시키려던 뜻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듣고 인조는 차라리 그때 선조 임금이 ‘김효원과 심의겸에게 중한 형벌을 내렸으면 어떠하였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양비론적인 입장에서 동인도 서인도 모두 잘못했으니 그 중심인물을 모두 함께 중벌을 내렸으면 사태가 조금은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이에 정엽은 다시 이렇게 답변하였다.

“그냥 무심하게 보고 다스리면 군자는 죄를 얻고 소인은 요행히 면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인은 몰래 자기편을 심어 두고도 겉으로는 화평한 체하는데 반해 군자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 친근한 사람일지라도 가리켜 쓸 만하다고 하여 당에 치우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법입니다. 이 점을 임금은 가장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소인은 교묘하게 숨어서 나쁜 짓을 벌이지만 군자는 솔직하기 때문에 솔직하게 행동하다가 오히려 편당을 한다는 오해를 받는다는 말이다. 이어서 정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이 어떤 관리를) 쓰고 버리는 것이 공론에 맞는다면 자연히 융화될 것인데, 어찌 오직 중한 형벌을 쓰기까지 하겠습니까? 근래에는 배척하는 일이 없는 듯하고 또 크게 시비하여 알기 어려운 곳도 없습니다. 서인(西人)이라고 해서 어찌 미진한 일이 없겠습니까마는 폐조(광해군) 당시에 폐모론(廢母論, 인목대비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은 것만은 (잘한 행동으로 보아) 취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유성룡(남인의 중심인물)과 서로 알던 사람일지라도 쓸 만한 선비가 있으면 써야 할 것이고, 그들과 교분이 두터웠더라도 사람됨이 쓸 만하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용하여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나 이이첨(李爾瞻, 북인으로 대북파의 지도자)에게 아첨하여 섬기던 무리는 결코 조정에 같이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정엽은 어디까지나 서인의 입장에 서있었다. 그래서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함께 하는 남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용서를 하고 서로 화합해나갈 수 있지만 광해군 때 활동하였던 대북파 무리와는 절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당쟁의 폐해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자리였으나 실지로 현장에서 활동하였던 당사자들에게 붕당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인조 6년(1628년) 5월 5일에 우찬성 이귀는 붕당의 폐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우리나라의 태조·태종·세종께서 앞서 문명화된 정치를 열어 억만년토록 다함이 없을 복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유교를 높이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 유도(儒道)가 무너지고 전해지지 않아 인심이 나빠졌습니다. 선비들이 모두 살육당하고 학문의 계통이 끊어진 뒤 이황(李滉)이 떨쳐 일어나 창도(倡導)함으로써 선비들의 기풍이 일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도를 깊이 알고서 돈독하게 좋아한 자는 오로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뿐이었습니다.”

이귀는 선비들의 기풍이 일변하도록 창도한 사람은 이황이요, 유교를 깊이 알고 돈독하게 좋아한 자는 오직 이이와 성혼뿐이라고 단언하였다. 유교에 대해서 잘 아는 학자는 이이와 성혼 이전에는 없었다는 뜻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서술하였다.

“이황이 죽은 뒤에는 두 사람의 도덕이 더욱 높아져 백세의 유종(儒宗, 유교의 대가 혹은 우두머리)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질투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들 경모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못 볼까 염려하였으며, 제자의 예를 갖추고 그의 문하에서 종사한 자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오늘날 사대부들이 조금이나마 윤리와 예법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이황과 이이·성혼의 공입니다.”

이이와 성혼은 이황 사후에 조선에서 유교의 대가이자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질투하고 미워하는 사람 외에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당쟁의 폐해를 같이 말한다.

“불행히도 두 사람이 당시의 여론(時論)에 저촉되어 크게 근거 없는 소문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동서(東西)로 당이 나뉘어진 뒤에는 여론에 견강부회하는 무리들이 처음에는 욕을 하며 헐뜯다가 계속해서 공격하여 사림(유학자들)이 두려워하고 나라의 기상이 처참해졌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인물을 진퇴시킬 때에도 반드시 이이와 성혼에 대해 시비한 것을 가지고 취사(取捨, 취하고 버림)하니 동경(東京) 당고(黨錮)의 화(禍)나 남송 위학(僞學)의 화(禍)가 가까운 시일 내에 닥쳐서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동경(東京) 당고(黨錮)의 화(禍)란 후한 말엽 환제(桓帝) 때에 일어난 탄압 사건이다. 동경이란 카이펑(開封, 개봉)을 말한다. 당시 우국지사인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이 태학생(太學生)을 거느리고 국정을 농락하던 환관들을 공격하자, 환관들이 오히려 환제(桓帝)를 움직여 환관을 공격하던 청류당의 이응(李膺) 등 2백 여 명을 붙잡아 투옥했다.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법정진술을 통해서 환관 자신들이 불리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당인(黨人)들을 향리로 돌려보내 금고(禁錮) 처분을 내렸다. 그 후에 영제(靈帝) 때 또다시 황제의 외척과 청류당 사람들이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100여명이 살해되었는데 이 사건을 말한다.
남송 위학(僞學)의 화(禍)란, 송나라 영종(寧宗, 1168년〜1224년, 남송의 4대황제) 때 한탁주(韓侂胄)가 권세를 부리자 주희(朱熹)가 그의 간사함을 파악하여 황제에게 상소를 하였다. 이에 한탁주가 앙심을 품고 도학을 위학(僞學, 거짓 학문)이라 배척하면서 위학의 당을 임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당시 주희는 도학(道學)의 영수였다. 한탁주의 조치로 조정에 올바른 선비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귀의 말은 조선도 잘못하다가는 중국에서 일어난 것처럼 순수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살해되거나 조정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조익(趙翼)과 조경(趙絅)의 행실에 대해서 이렇게 논했다.

“지금 옥당(홍문관)이 예를 의논한 상소문을 보건대, 조익(趙翼)은 스스로 ‘진실로 전하께 충성을 다 하려던 것이었다’고 하였는데, 말하는 사이에 실수한 것이고, 그 역시 후회하고 있으니 크게 따질 것 필요가 없습니다.
조경(趙絅)에 이르러서는, 경망스런 신진(新進)으로 그의 재학과 덕망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는 모르겠으나, 조정의 공적인 시비를 가지고 원훈과 재신들을 모욕하고 산림의 선비들을 헐뜯었으니, 그가 조정을 무시하고 사림을 멸시한 것이 극심합니다.”

조익과 조경은 모두 윤근수(尹根壽)의 제자들이다. 윤근수는 퇴계 이황에게 글을 배웠으나 1575년의 동인과 서인이 분당될 때 이황에게서 같이 배운 동문들을 따르지 않고 서인(西人)이 되었다. 그러므로 조익과 조경도 서인에 속한 관리들이었으나 이귀는 당파를 따지지 않고 조익은 죄를 덮어주고 조경은 비판하였다.
참고로 조경은 숙종 때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그는 그만큼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으나 성품이 너무 곧고 강직하여 조정의 관리들이 싫어했다. 임금에게도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고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어느 정도 인정되어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조정에서 자주 쫓겨났다. 그는 나중에 재상까지 지냈으나 청렴결백하여 가족들이 기아에 허덕일 정도였다. 이귀 역시 그의 바른 말을 싫어해서 임금 앞에서 그를 비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귀는 이어서 조경의 비판을 받고 있는 박지계(朴知誡, 1573년〜1635년)를 두둔하며 이렇게 말했다.

“박지계는 어려서부터 몸소 농사지으며 뜻을 독실히 하여 시골에서 조용히 수양하였습니다. 그의 곤궁함을 지킨 절조와 학문에 힘쓴 노력은 옛 사람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시골에서 덕망을 길러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자로는 오로지 김장생·장현광(張顯光)·박지계가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전하께서 즉위하시자마자 이 세 사람을 예로써 초치하여 사유(師儒, 도를 가르치는 유학자, 즉 성균관의 관원)의 자리에 앉히거나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을 말함)에 앉혔으니, 유교의 도를 높이는 전하의 뜻이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불행히도 박지계가 예를 의논한 것이 시론과 합치되지 않아 직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조경의 무리가 지나치게 공격하여 그로 하여금 다시 이 예에 대하여 의논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들 몇 사람을 시종 권장하시어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범으로 삼을 바를 알게 하여 유도를 높이고 국맥(國脈)을 영원토록 할 바탕으로 삼으소서.”

인조 임금은 어쨌든 이러한 이귀의 장황한 의견에 ‘상주문에서 논한 것이 매우 타당하다. 나는 이를 극히 가상히 여긴다(箚論甚當. 予極嘉尙焉)’라는 의견을 냈다.
참고로 조경의 비판을 받은 박지계는 1623년(인조 1년)에 인조반정 후 왕의 부름으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박지계는 당시 과거제도의 폐단을 논하여, 주자(朱子)의 덕행과(德行科), 조광조(趙光祖)의 현량과(賢良科), 그리고 율곡 이이(李珥)의 선사법(選士法) 등이 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훌륭한 제도라고 임금에게 진언하였다.
박지계는 또 예론에 관한 의견에서 조정의 중신들과 대립되자 잠시 남양(南陽, 현재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거주하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내려가 왕을 호위하였다. 난이 끝난 뒤 그는 김장생과 같이 서울로 돌아와서 양민치병(養民治兵, 백성을 부양하고 병사를 다스림)의 계책을 상소하였다. 또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묘종사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귀로서는 율곡과 성혼을 기리는 박지계의 이러한 활동이 가상히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조경을 더 적극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인조 10년(1632년) 9월 13일 이귀가 붕당의 폐해를 논하며 율곡을 높이자 예조에서 율곡의 서찰 간행을 청하였다.
이날 이귀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상주문을 올렸다.

“붕당의 재앙이 마침내는 반드시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에까지 이르고야 말것인데 신이 그것을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앞 시대의 신하) 이이(李珥)가 선조(宣祖)를 만난 것은 천 년 만에 한 번쯤 만나는 기회라고 말할 만한 것으로서 중년에 특별히 대우한 것이 더욱 융숭하였습니다. 그런데 붕당의 조짐이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에게서 시발되었습니다.”

심의겸(1535년〜1587년)은 서인의 중심이며 김효원(1542년〜1590년)은 동인의 중심이다. 심의겸이 김효원보다 7살 위이며, 율곡(1536년〜1584년)과는 심의겸이 1살 위, 김효원이 6살 아래나이다. 율곡은 나이로 보아도 심의겸과 가깝고 성혼이나 정철 등 교류하는 사람들도 대개 심의겸과 가까웠다.
이귀는 이어서 이렇게 진술하였다.

“이에 두 사람(심의겸과 김효원)의 친구들이 제각기 사사로운 의견을 주장하여 서로들 옹호하고 억눌러 장차 시끄러운 실마리가 있게 될 것을 목격하고, 이이가 상신(相臣)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상의하여 모두 외직으로 보낼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이가 죽은 뒤로부터 당의(黨議, 당쟁)가 날로 극성하여 도리어 조화하고 진정시키려고 하였던 사람을(즉 율곡을) 당적(黨籍)에다 이름을 써 놓고 업신여기며 있는 힘을 다해 헐뜯었습니다. 이때에 조헌(趙憲)이 이이의 문인으로서 상소를 올려 이이와 성혼(成渾)을 구원하였는데, 충의로 인한 분개가 격하여 중도를 잃은 말이 있음을 모면하지 못하여 죽은 스승 이이의 본뜻에 위배됨이 있었습니다.”

율곡은 어디까지나 중간에서 동인과 서인 사이를 조정하고 화해시켜주려고 하였으나 이이가 사망한 뒤에 사람들은 율곡을 서인당이라고 하여 헐뜯었다는 것이다.
조헌은 율곡과 성혼의 문인이다. 그는 1586년경 스승 율곡과 성혼이 무고(誣告)를 당하게 되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변호하고자 하였다. 조헌은 서울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관찰사를 통해서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올린 상소문은 빈번히 막혀서 임금에게 올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나아가 새로 쓴 상소문과 이전에 올리려다 반려된 상소문을 모두 올렸다. 이 상소문에는 당시 조정 대신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들어 있었는데, 선조는 그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모두 불태워 버렸다.
조헌은 상소문에서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이산해에 대해 “오직 사당(私黨)만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을 품었고, 결국 나라를 좀먹는 간인(奸人)들을 그 지위에 나누어 배치시키고 공심(公心)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선조는 이산해를 깊이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비판은 용납되지 않았다.
조헌은 유성룡에 대해서도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능이 못 되고 원대한 계책을 지닌 식견도 없는데 악당들이 서로 헛된 명예를 과장하면서 몰래 사특(邪慝)한 의논을 주장하며 어진 이를 시기하고 선한 사람을 미워하고, 결국에는 임금을 고립시켰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조헌에 대해서 소개하고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신이 한두 동지와 더불어 한 상소문을 지어 먼저 죽은 스승의 공정한 의론을 개진한 다음에 조헌이 한쪽의 말에 치우친 것을 설파하니, 선조께서 상소문을 보시고서 이이의 말을 만세의 공론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상소문이 한 번 나가자 온 세상에서 혹간 이이가 당론에 간섭되었는가 하고 의심하였던 사람들이 속 시원하게 그 의혹을 풀어, 지금까지 모두들 이이를 백대(百代)의 유종(儒宗)으로 삼고 있으니, 사람 마음의 속일 수 없는 것을 이에 의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이귀 자신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올린 상소문에 의해서 율곡의 붕당 소문이 근거 없는 의혹이었음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 이래로 율곡은 모든 유학자들이 최고의 스승으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에 이르러 성상(인조임금)께서 바야흐로 붕당을 타파하여 화평한 정치를 이루고자 하시니 대단히 훌륭한 생각입니다. 다만 당론의 폐단이 50년을 뻗쳐 할아버지·아들·손자가 보고 들은 것이 피차간에 각각 달라,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일이 아니라서 달래어도 계도할 수 없고 위협하여도 해소시킬 수 없으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선조께서 이이 한 인물을 얻어 당론을 타파하려고 하였는데 뜻이 성취되기도 전에 하늘이 이이를 빼앗아가기를 빨리하였으니, 아마 하늘이 우리 동방을 태평하게 다스리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아, 그 사람(율곡)은 비록 죽었으나 그 말은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을 쓸 만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쓸 만하다면, 그 말을 쓰고 안 쓰는 것이 참으로 국가가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에 관계됩니다.”

그는 현재의 붕당은 50년 가까이 진행되어 하루아침에 달래서 계도할 수도 없고 위협해서 없앨 수도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고 하였다. 또 그는 선조 임금이 율곡을 통해서 당쟁을 타파하려고 하였는데 율곡이 너무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율곡이 한 말과 그 정신은 아직 살아 있으니 임금은 그 말을 따라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감히 신이 죽은 스승을 신원(伸冤)하기 위하여 상소문 4부를 인쇄하여 무례하게 올립니다. 혹시라도 열람하시어 그 말로 그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사람을 상상하여 그 도를 시행한다면, 죽은 스승 이이가 비록 저승에 있을지라도 실로 성상의 세상에서 쓰임을 보게 되는 셈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임금께서 이 상소문을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여, 선현(先賢, 율곡)의 무편 무당(無偏無黨, 편협함이 없고 당파심이 없음)한 마음을 알아 백세 뒤에 본받는 바가 있어 흥기하도록 한다면, 사람들의 다행일 뿐 아니라 또한 국가의 복일 것입니다.”

결국 이귀의 이 상소문은 자기 스승 율곡 이이가 동서 분당을 획책한 것이 아니며, 이는 모두 후인들의 근거 없는 악의적 비방임을 알아달라는 신원(伸寃), 즉 율곡이 억울하게 뒤집어쓴 붕당의 죄를 풀어 버리고자 하는 상주문이었다.
이러한 문장을 수령한 뒤, 예조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동인과 서인의 틈이 심의겸과 김효원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교유(交游)가 조심스럽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참으로 실상입니다. 김효원이 심의겸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외척(外戚)이 정치에 간여한다.’고 하였으니 이것 역시 실상입니다.”

김효원은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윤원형은 훈구파 인물이다. 윤원형은 ‘소윤(小尹)’으로 불리는 인물로, 을사사화를 일으킨 인물이기 때문에 당시 많은 선비들이 그를 꺼렸다. 심의겸은 김효원의 이러한 과거를 알고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김효원은 결국 다른 유학자들의 지원을 받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었을 때 외척이라고 반대하였다.
예조의 보고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방향을 헤매다가 나중에 절개 있는 행실에 힘쓰면 옛사람들은 진실로 허락한 바가 있었습니다. 출신은 비록 척리(戚里, 외척)이지만 공로가 선비의 무리에 속한다면 역시 군자가 거절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선배들은 심의겸을 편들어 김효원을 가리켜 맘속에 사사로운 감정을 품었다고 하고, 후배들은 김효원을 편들어 심의겸을 가리켜 궁궐(즉 임금의 힘)에 의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 다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이(李珥)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 둘 다 옳고 둘 다 틀리다는 논리)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다만 그 심의겸은 허용한 이가 적고 김효원은 협조한 이가 많자, 조급하게 벼슬길에 나아가는 무리들이 그 사실을 구명해 보지도 않고 앞 다투어 실정에 지나친 논의들을 하여 시대의 유행에 투합하여, 선배들 중에 맑은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용납 받지 못하였습니다.”

심의겸을 두둔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많았고, 김효원을 편드는 사람들 중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율곡은 둘 다 옳기도 하고 둘 다 잘못하기도 하였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젊은 유학자들은 그런 율곡을 포함하여 심의겸을 두둔하는 선배 유학자들을 모두 비판하였다는 것이다.
예조의 보고는 계속 이어진다.

“이이가 힘껏 구제하여 반복해서 논란한 것은 바로 그 편중된 형세를 조절하여 함께 공경하는 처지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것인데, 도리어 후배들의 의심한 바가 되어 갈수록 서로 격동하여, 이에 명예를 탐내고 국가를 그르친다는 따위의 말로써 죄목을 삼아 온 나라가 함께 일어나 그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이이와 친한 사람들이 (이이를) 재앙의 모태로 간주하여 종적을 거두고 두려워하여 피신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는데, 유독 이귀가 선사(先師, 스승)이 무함(誣陷,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함정에 빠뜨림)받는 것을 통분하게 여겨서, 자기 한 몸의 이해관계를 잊고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이이의 본심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귀의 호소가) 당시에 기피하는 것에 거듭 저촉되어 훼방하는 말이 떠들썩하였기 때문에, 비록 평소에 존경하던 사람일지라도 허튼 논의에 동요하여 이귀를 가리켜 괴이한 귀신으로 여기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율곡을 변호하다가 변호하는 이귀마저 세상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을 한 몸으로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어서 예조의 보고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런데 다행히도 선조 대왕께서 사실을 정확하게 보시고서 만세의 공론이라고 말씀하심에 힘입어 이이를 배척하는 말이 비로소 들어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이귀가 힘껏 변론한 것과 선조 임금의 분명한 결단이 아니었다면, 이이는 일생 동안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걱정한 마음이 마침내 국가를 그릇 쳤다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조정에서 벼슬을 주고 빼앗는 것의 잘못된 점도 말할 수 없었을 터이니, 이귀의 한 번 상소한 공로가 또한 적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이가 죽은 지 지금 벌써 50여 년이 되어 공론이 저절로 밝아져 사람들이 그를 유림(儒林)의 종장(宗匠, 다른 이의 사표 혹은 대표)이라고 이르지 아니한 적이 없으니, 오히려 어찌 이귀의 상소에 의뢰할 것이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그때에 왕래한 서찰이 대부분 문집 중에 실려 있지 아니하여, 후생으로서 늦게 나온 사람들은 혹시 보고 듣지 못하였을 터이니, 그것을 인쇄하여 반포할 것을 요청한 것은 참으로 뜻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관청에서 사고(私稿, 개인의 원고)를 반포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으니, 호남(湖南)에 있는 판본(板本)으로 인쇄하여 사대부들 사이에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돌려가면서 보도록 하는 것이 일이 대단히 온당하고 편리하며, 세도(世道)에 있어서도 또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율곡이 동서 분당에 관하여 주고받은 서신을 인쇄하여 사대부들에게 배포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의견에 대해서 인조는 수긍하고 허락하였다.
여기에서는 붕당에 관하여 『인조실록』에 기록된 율곡 관련 기사를 살펴보았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율곡이 붕당을 해소하고자 노력하였음을 누누이 강조하였으며 인조를 계속 설득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또 율곡에 대한 오해가 풀리지 않으니 그가 사사로이 주고받은 서찰을 모두 인쇄하여 배포하자는 의견까지 제시였다. 그러나 율곡도 서인편이라고 믿고 있었던 반대파 유학자들은 이러한 서인 측의 해명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믿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당파 싸움 혹은 붕당 정치는 대략 1570년대에 시작하여 1800년대 초에 막을 내린다.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일이다. 1800년대 이후, 특히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순조 임금 시기 이후는 외척세력이 왕권을 압도하여, 이른바 세도 정치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다가 물러선 일본은 1910년에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완전히 장악한 뒤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고 많은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붕당 기록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은 신랄한 평가를 하였다.(참고: 「일제가 왜곡한 선비상 아직 못 지워」, 안성규, <온라인 중앙일보>, 2014.3.2.)

“조선 정치는 사사로운 권리 쟁탈이다. 음모가 계속되고 참화를 불사한다……당쟁은 음험하다. 뼈를 깎고 시체에 채찍질하는 참화를 연출한다……한국이 일본의 고문(顧問) 정치에 처하게 된 원인은 고질적인 당쟁이다.”(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한국정쟁지』, 1904년)
조선 성리학의 특징은 ‘종속성, 사대성, 분열성’이다.(다카하시 도루(高橋亨), 『조선의 이언집 부 물어』, 1914년)
조선사회 내면엔 사상의 고착성, 사상의 무창견(無創見), 당파심 등의 형질이 담겨있다.(다카하시 도루(高橋亨), 「조선 및 만주」, 1912년)
“당파는 확고한 주의나 강령이 아니라 형세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나뉜 것이다.”(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조선통사』, 1912년)
“희대의 영웅도 붕당의 악폐는 근절시키기가 어렵다. 그 피를 어쩔 것인가.”(호소이 하지메(細井肇),『붕당·사화의 검토』, 1921년)
“유력한 권위 아래 모이고 당벌을 결성하는 것은 조선의 국민성, 민족적 결함이다. 붕당의 항쟁 시간은 세계적 기록이다. 한인은 뇌동성이 특징이다”(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조선사개설』, 1940년)

한국의 지식인들은 붕당정치는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붕당은 세력 균형을 바탕으로 상호 견제와 비판을 인정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며, 붕당 때문에 책임정치가 이루어지고 정책이 실패하면 정권이 바뀌는 것이라고도 한다. 요즘은 붕당정치가 현대 정당정치의 바탕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일사불란한 조화(和)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은 여전히 수긍이 가지 않는다. 하나의 조직은 통일된 질서가 있어야 하는데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자기주장만 일삼으면 조직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의 민족이면서 남한과 북한이 서로 나뉘어 싸우고, 남한 안에서도 여당, 야당이 서로 비슷한 세력을 가지고, 지역적으로도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면 어떤 발전이 있겠는가?
일본인들이 조선시대의 붕당 상황을 살펴보고 그것이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역사의 뿌리 깊은 당파성, 분열성, 나아가 한국인들의 DNA수준(피)이라고 까지 말하는 것은 물론 멸망해가는 조선의 역사를 보면서 자신들의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자기들이 보기에 이 점이 너무도 특이하고 자기들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요즘 일본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침체해있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당파성’과 ‘분열성’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여야가 지역적으로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싸우다가, 그리고 일부 군인들과 시민들이 총을 들고 대치하다가 결국 민주주의를 이루었다.
경제부문에서 삼성과 LG는 가전제품, 디스플레이를 놓고 경쟁하고, 하이닉스와 삼성은 반도체로 경쟁하고,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은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가끔 이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국가나 민족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드라마, 음악, 영화, 게임 등 문화 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한국인들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전 세계에 통하는 ‘한류’라고 하는 브랜드를 만들어 냈다. 경쟁보다는 조화, 당파보다는 먼저 ‘국가’를 내세우는 일본은 예전의 영광을 뒤로 하고 있다. 요즘 일본의 지식인들이 『인조실록』의 붕당 기록을 읽는다면 ‘당파성’과 ‘분열성’의 이면에 담긴 한국인들의, 국가를 초월한 가치관과 그에 따른 삶의 역동성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