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구(尹鳳九, 1683-1767)

윤봉구(尹鳳九)                                                       PDF Download

윤봉구는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자는 서응(瑞膺)이며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윤비경(尹飛卿)이다. 아버지는 윤명운(尹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우참찬 윤봉오(尹鳳五)의 형이다.

28세(1710) 증광 초시 종장 수석을 취소당했다. 사간원에서 논핵하기를, “금번에 감시(監試) 1소(所)의 종장(終場)에서 수석을 차지한 윤봉구는 시문(試文)이 전연 과식(科式)에서 벗어나 보통 격식과 크게 달랐으며, 첫머리에 심지어 ‘재배경실(再拜敬悉)’ 등의 말까지 있었습니다.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문체인데 시험을 관장하는 관리가 도리어 높은 등급에 두었으니, 문체를 바로잡아 뒷날의 폐단을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감시 1소의 종장에서 수석을 차지한 윤봉구를 특별히 빼어버리도록 하고 해당 시관(試官)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이후 숙종이 좌도의 방(榜)은 다만 종장(終場)에서 입격(入格)한 사람을 빼어 버리고 윤봉구의 글 또한 격식에서 어긋난다 하여 빼버리도록 명하였다.

32세(1714) 진사가 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다.

43세(1725, 영조 1년) 윤봉구(尹鳳九)를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삼았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써 평소부터 사림의 명망이 있었고, 영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사부였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49세(1731) 향리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강연(講筵)에서 토론한 바는 바로 <성학집요(聖學輯要)>입니다. 신의 스승인 선정신 권상하가 항상 말하기를, ‘이 책은 마땅히 한천(寒泉)의 편찬에 나란히 나열해야 한다.’ 하였고, 선정신 송시열은 또 효종대왕께 고하기를, ‘주자의 시대는 오늘의 시대와 가장 가깝고 조우한 바의 시세도 또 그와 서로 동일하기 때문에 그 말이 낱낱이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시기의 앞뒤는 5백여 년이고 국가의 크고 작음은 중화와 외국의 구별이 있는데도 그 말이 다 적용될 수 있음이 이미 이와 같습니다. 더구나 이이는 바로 우리 동국의 대현이고 또 본조의 규모는 선조 이하로는 하나의 도철(塗轍)입니다. 그 시사를 우려한 의논이 오늘날에 적중되지 않음이 없는데 또 그 의리가 모두 주자에게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군주가 먼저 이치를 밝히지 않고 한갓 억측과 지레 짐작만으로 관찰을 한다면, 공(公)으로써 사(私)를 삼고 아첨으로써 충성을 삼지 않을 경우가 적습니다. 이치를 밝히는 것은 <대학>의 궁리 공부인데, 거경(居敬)은 또 궁리의 근본이 됩니다. 한원진이 한번 망언한 것으로 인해 혹 중벌이라도 가한다면 옛사람의 이른바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쓴다.’는 의미로 볼 때 아마 이와 같이 해서는 부당할 것이며 평일에 선비를 대우하는 예의가 장차 이로부터 파괴될 것입니다.” 하고 이것을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로 끌어댔다.

51세(1733) 한원진을 변호하며 사직의 상소를 올렸다. “신은 한원진과 어려서부터 같이 배워 뜻과 행동이 서로 합했으니 굶주리고 배부른 것과 춥고 더운 것을 의리상 달리할 수 없습니다. 어찌 처음에 서로 간여한 것이 없다 하여 혼자만이 영진(榮進)하겠습니까? 아! 숙종대왕께서 세상의 변고를 두루 겪으셨는데 그 시비의 원인을 추구하여 이미 선정신 송시열을 어진 군자로 삼았으니 송시열을 배반하는 자는 바로 소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탕평(蕩平)’ 두 글자를 가지고 다스리는 신부(信符)와 조정(調停)하는 틀로 삼아 반드시 그 근원부터 시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심지어 정미년 하교가 있기까지 하여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세도(世道)가 날로 변하여 난역(亂逆)이 겹쳐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탕평이 그 요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시고 도리어 요즘의 변란(變亂)은 붕당(朋黨)에 연유되었고 붕당의 원인은 사문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다. ……따라서 사림 사이에 바른 논설이 사라지고 조정에서는 충절이 없어져 군자는 물러나고 소인은 나오며 양(陽)이 사라지고 음(陰)이 길어져서 송시열의 도가 날로 더욱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신은 선정 권상하에게 배워서 송시열의 도를 사표로 삼아왔는데 송시열의 도가 이미 다시 오늘에 칭송되지 않으니 스스로 초개처럼 버려짐을 달게 생각합니다.”

51세(1733) 사헌부지평이 되고 52세(1734) 장령(掌令)이 되고, 57세(1739)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59세(1741)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를 보은 춘추사의 송시열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이 되었다.

62세(1744) 왕의 마음공부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 “전하의 전후에 있었던 지나친 거조에 대하여 지난번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에서 이미 두루 말씀하였는데 3, 4년마다 반드시 한 번씩 있었으니 임어(臨御)하신 지 수십 년에 이런 거조가 모두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한 가지 일 때문에 격뇌(激惱)하실 경우 본사(本事) 이외에 번번이 별건(別件)의 비상한 거조가 있어 왔는데 이번은 전일보다 또 더한 바가 있습니다. ……마음은 만사의 근본이고 임금의 한 마음은 또 천하의 대본입니다. 임금이 요순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요순 같은 정치가 있게 되는 것으로, 한·당의 성세(盛世)와 쇠세(衰世)도 그 임금의 마음에 연유하여 그림자가 메아리처럼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의 마음속에 있는 천리와 인욕오 소장과 승부는 단지 이 세도에서 증험할 수 있는 것이어서 전하의 정녕한 하교를 기다리지 않아도 사람마다 모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고요히 보존되었을 때의 마음을 더욱 엄히 지니시고 의념의 싹을 더욱 엄밀히 살핌으로써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 공부에 추호도 미진함이 없게 하신다면 손을 마주 잡고 단정히 앉아 독경(篤敬)하는 마음만 지니고 있어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성색(聲色)을 크게 하지 않아도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영조가 가납하고 “즉시 올라와서 나의 원량을 보좌하라.” 했다.

68세(1750) 영조가 행궁(行宮)에서 윤봉구를 인견하고 “진선(進善)이 한가로이 지내면서 강학(講學)한다고 하니, 좋은 말을 듣고자 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소신은 재주와 학식이 얕고 짧아 공부가 모자라는데 무슨 말과 의논으로써 성덕을 돕겠습니까? 옛날에 신의 스승 선정신 권상하가 숙묘(肅廟)를 진대할 때 정일(精一)의 심법(心法)과 성정(誠正)의 공부를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또 주자의 ‘직(直)’ 자의 가르침을 부연하여 설명하니, 숙묘께서 하나하나를 가납하셨으니, 성문에 서로 전해오는 학문은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선사는 선정의 적통을 전해 받았는데, 진달한 것 역시 이에 그쳤으니, 신이 어찌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신이 오늘 전하 앞에서 이 말을 외어 진달하는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도 숙묘께서 가납하신 뜻을 본받아 다시 구설을 취해 하나하나 몸소 행하시면, 어찌 계술하는 도리가 빛나지 않겠습니까?” 했다. 황경원이 말하기를, “현묘(顯廟)께서 온궁(溫宮)에 거동하셨을 때 선정신 송시열이 들어와 배알하였고, 숙묘(肅廟)께서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에는 선정신 권상하가 와서 배알하였는데, 전하의 오늘 온천 거둥에는 윤봉구가 권상하의 고제로서 와 배알하니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했다.

윤증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삼가 듣건대, 일전에 치제(致祭)하라는 명이 뒤섞여 고 상신 윤증(尹拯)에게도 미쳤다고 하는데 이번 일이 유현(儒賢)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명의에 용납되지 않으니 유현으로 대우해서는 안 되며 상신이기 때문이라면 선왕께서 죄를 주어 삭출하였으니 상신으로 대우해서도 안 되는데, 성의(聖意)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거동은 선대왕의 고사(故事)를 따르는 것인데 선왕께서 항상 배척한 바이니 비록 드러나게 엄히 정토하지는 못하더라도 도리어 치우치게 사제(賜祭)하는 은혜를 입은 것은 실로 전하를 위해 이 거조가 애석합니다. 신은 송시열을 사숙한 사람인데 선정의 도는 혼효(渾淆)를 깨뜨리는 것임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삼가 윤화정(尹和靖)을 정씨(程氏)의 무리들이 배척한 데 따라서 감히 물리치는 은혜를 청합니다.”

78세(1760) 대사헌에 특별 임명되었다. 사후 1804년(순조 4년) 윤봉구에게 문헌(文獻) 시호를 내렸다.

윤봉구는 호락논쟁의 중요한 일원이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간과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한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다는 이간의 학설은 뒤에 이재(李縡)와 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와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윤봉구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병계집(屛溪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