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원진(韓元震, 1682-1751)

한원진(韓元震)                                                        PDF Download

 

한원진은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덕소(德昭)이고 호는 남당(南塘)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한유기(韓有箕)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박숭부(朴崇阜)의 딸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8세에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문장파악이 매우 느렸으나 수년이 지나자 한번 본 문장은 곧바로 암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12세에 조부의 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상례를 지켰다.

36세(1717) 학행으로 천거 받아 영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다. 40세(172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44세(1725, 영조1년)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앞서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45세(1726) 경연에서 영조가 호포(戶布), 결포(結布), 구전(口錢), 유포(遊布)의 이해와 편리 여부를 물었는데, 한원진이 네 가지 법 중에 호포(戶布)가 가장 시행할 만하다고 대답했다. 영조가 칭찬하여 좋게 여겼다. 한원진이 물러나가자, 시독관 김용경(金龍慶)이 말하기를, “산야에 있던 사람은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고 나오기는 어렵게 여기는 법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심으로 머물러 있게 하여 자주 경연에 입시하게 하소서.” 하니 영조가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했다.

50세(1731) 영조가 경연에서 명 태조가 맹자를 문묘에서 출향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삼가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경연에서 ‘명 태조가 맹자를 문묘에서 출향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합니다. 먼 외방에 떠도는 말이어서 비록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혹 털끝만큼이라도 그렇다면 거의 한 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맹자의 어짊은 한나라 이후로 매우 존상하였는데 명 태조가 갑자기 배척을 가하였고, 이로 인하여 여러 유현을 더욱 경멸하여 주자를 오활한 노유라고 지목했으며, 또 친히 논문을 저술하여 경설을 무너뜨렸습니다. 처음에 가르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명나라의 세대가 마치기까지 도술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단이 분분하게 일어났으며 의리가 날로 어두워지고 습속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유자라고 이름 한 자들이 걸핏하면 정주에 대해 이론을 세우고 성현을 능가하여 세도가 무너지고 화란(禍亂)이 그 틈을 탔으니 그 혹심한 화가 거의 서진(西晉)의 청담보다 심했습니다. 이는 비록 명 태조가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 유폐의 원인이 되었으니 백세 뒤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장이 들어가자, 영조는 노하여 “한원진은 황명 태조와 맹자를 서로 거론하여 감히 별도의 의리를 만들었으니 참람하고 망령됨이 심하다. 한원진은 산림에 있는 사람으로 역시 시상(時象) 가운데 들었으니 내가 매우 그르게 여긴다.” 하였다.

60세(1741)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하여 그 뒤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69세(1750) 판의금 원경하(元景夏)가 권상하가 먼 앞날을 기대하여 한원진은 산림의 경제인(經濟人)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자, 영조가 “내가 일찍이 이 사람을 보았는데, 비단 학식이 고명(高明)할 뿐만 아니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했다.

70세(1751) 졸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27년 2월 기사에 그의 졸기가 있다. “한원진의 자는 덕소로, 선정신 권상하의 문인이다. 임금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뽑혀서 경연관이 되었는데, 한원진은 임금이 새로 대위(大位)를 계승하여 협조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시니 초야의 선비가 한갓 고상한 뜻만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여 드디어 부름에 나아갔다. 그때 세변(世變)을 겪어 의리가 밝지 못하였는데, 한원진은 생각하기를, ‘성무(聖誣)를 분변하고 징토(懲討)를 엄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급선무이다.’라고 여겨 들어가서는 고하고 나가서는 상소를 올려 간곡히 청해 마지않았다. 임금이 본래 당론을 싫어하고 조제하려는 뜻이 있어 한원진이 진언할 때마다 비록 칭찬하고 권장하여 표시하였지만 실은 채용하지 않았으니, 한원진이 누차에 걸쳐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고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명나라 태조가 맹자를 출향한 일을 언급하면서 맹자의 말로써 잘못되었다고 하였는데, 한원진이 상소하여 간함에 있어 말이 매우 절직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심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임금의 뜻을 엿보고는 잇달아 공격하여 마침내 파직을 당하였다. 얼마 안 있어 견서(甄敍)되었으나 권우(眷遇)는 더욱 쇠(衰)하였고 한원진도 또한 세상에 뜻이 없어 호해(湖海)의 물가에 숨어 살았다. 협소한 집은 소연(蕭然)하고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대처(對處)하기를 유연(逌然) 하였고, 날마다 학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밝히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저술로는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 <주서동이고(朱書同異攷)>, <의례보(儀禮補)> 등이 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70세였다.”

한원진 사후 정조 23년(1747)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순조 2년(1802) 문순(文純) 시호를 내렸다.

한원진은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명철하였으며, 『주역』, 『시경』, 『서경』 및 사서(四書), 『태극도설』, 『통서(通書)』, 『계몽(啓蒙)』 및 여러 경세서(經世書) 등을 정독하여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60세(1741) 완성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에 착수했지만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스승인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한 한국성리학의 대표적인 거작이다.

한원진은 후인들이 주자의 논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공자와 같은 성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도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를 알기 위해서는 주자를 알아야 하고 주자를 모르고서는 공자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므로 그 말의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만 주자는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者]이므로 초년설과 만년설이 다를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 책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주자의 설에 대해 시간상의 선후와 의리(義理)라는 표준을 세우고 말은 비록 다르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뜻이 서로 통하는 것과 본래는 다름이 없는 것인데 학자들이 다르게 본 것 등으로 나누어 일일이 변정하였다. 특히 조선성리학의 핵심 문제들을 주희의 만년정론(晩年定論)으로 확정해 풀어나가는 것이 특색이다.

첫째는 기는 유위(有爲)로써 발동하는 것이고 리는 무위로서 발동하지 않는다 하여 퇴계학파의 이발(理發)을 부인한다.

둘째는 사단과 칠정에 대해 둘이 모두 본성의 작용[性之用]으로 정(情)이라는 이이의 설을 확인한다.

셋째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서 주자가 인물성상이(人物性相異)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넷째는 이기선후(理氣先後)에서 유행의 측면에서는 이기가 선후가 없고, 본체의 측면에서는 이선기후이며, 발생의 측면에서 보면 기선이후이지만 이기는 원래 선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섯째는 이동기이(理同氣異)에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을 기준으로 이일분수(理一分殊)를 확인한다.

정리하면 이이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호론(湖論)을 확인하려는 목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물성동이논쟁과 관련해서는 이간(李柬)을 중심으로 하는 낙론(洛論)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주장을 반대하고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대표했다. 한원진은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운위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이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원진은 이와 같은 사고를 바탕으로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미발심체논쟁에서는 이간이 주장하는 미발(未發)의 심체(心體)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미발심체순선론(未發心體純善論)을 반대하고, 미발의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기질지성유선악론(未發氣質之性有善惡論)을 주장한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