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국, 정파를 넘어 오직 실력으로


김신국, 정파를 넘어 오직 실력으로

 

김신국은 정파적으로 북인에 속한다. 광해조는 북인들이 득세하였지만 서인이 주축이 되어 인조반정을 일으킨 후 북인들은 실세했다. 김신국은 북인임에도 불구하고 인조조에서도 여전히 중책을 맡았다. 인조가 그의 탁월한 경세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김신국은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립되자 남이공(南以恭)과 함께 소북의 영수로서 활약했다. 그는 광해군대의 정국 최대 이슈였던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에는 적극 찬성을 하지 않았으나, 폐모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여함으로써 인조반정 이후 일시 유배되기도 했다. 이는 이후 인조 시대에 녹을 먹는 내내 괴롭혔다. <연려실기술>에 기록이 있다.

“갑자년에 김신국(金藎國)이 도승지가 되었다. 유백증(兪伯曾)이 신국은 전에 폐모(廢母)시키자는 정청의 계사(啓辭)를 지었다고 하여 탄핵하고자 하였다. 이에 여러 재상 중에 서너 명이 모두 일찍이 정청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서로 잇달아 도승지의 처지가 되어 모두 인책하고 나오지 않으니, 온 조정이 소란스러웠다.”

김신국은 광해군 11년(1619) 호조판서를 제수 받아 인조반정 때까지 역임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도 광해군대의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평안도 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정권의 성격이 전혀 다른 광해군과 인조 양대에 걸쳐 6번이나 호조판서를 맡았던 것은 그만큼 김신국이 실무에 능했던 관료임을 증거하고 있다.

 

김신국이 재기 있는 선비임을 보여주는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있다. 기지를 발휘하여 위급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임진왜란에 영남에서 충주(忠州)에 달려 이르렀는데, 길이 막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아우가 왜적을 만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어 격문을 초하여 의병 천여 명을 모집하여 적을 죽이고 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조정에서 듣고 멀리서 참봉을 제수하였다. 모부인이 여주(驪州)로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행장을 재촉하여 근친(覲親)하려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가는 데는 반드시 적진을 지날 것이니, 경솔히 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게 한 꾀가 있다.’ 하고, 군사 수십 명을 시켜 흰 깃발을 가지고 따르게 하고, 공은 남여를 타고 의관을 바르게 하고 천천히 길을 가며 기세가 태연하니, 적병이 바라보고 의아하게 여겨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김신국이 실무에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인물임을 여러 유현들의 평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계사년에 도원수 권율이 종사관으로 불러서 같이 일하면서 탄복하여, ‘참으로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할 재주가 있다.’ 하였다. 을미년에 훈국(訓局)을 처음 설치하였는데, 도감 제조(都監制調) 이덕형이 아뢰기를, ‘김신국은 나이가 젊은데 재간과 국량이 있고 군사(軍事)에 뜻이 있습니다.’ 하고, 군색랑(軍色郞)으로 불러 썼다.”

김신국은 경세능력 중에서 북방과 경제 방면에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다.

국방에 대한 김신국의 탁월한 능력은 1613년(광해군 5) 평안도관찰사를 맡으면서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그는 후금이 필시 침략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계책으로서 진관을 설치하고(置鎭管), 조련을 밝게 하고(明操鍊), 군율을 엄히 하고(嚴軍律), 사기를 장려하고(勵士氣), 상 주기를 중시하고(重賞頒), 기계를 수선하고(繕器械), 전마를 공급하는(給戰馬) 7가지의 방안을 제시했다. 김신국은 광해군대에 변방의 임무에 밝은 인물이 등용되는 비변사 당상(堂上)에 강홍립(姜弘立) 등과 함께 추천되었으며, 1623년의 인조반정 이후에도 평안도관찰사에 즉각 기용되는데, 이것은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그가 국방에 대한 실무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638년에는 판중추부사로 인조의 명을 받아 강화도의 형세에 대해 보고한 후 바로 강화유수를 제수 받았다. 김신국은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임을 강조하고, 남한산성이 방어처로서 부적절함을 지적하였다. 김시양이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이 조선의 보배라고 한 데 대하여, 김신국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남한산성 때문이라면서, 병자호란 당시 군권을 장악했던 김류(金瑬), 김자점(金自點) 등의 산성(山城) 중심의 방어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연려실기술>에 김신국이 김시양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병자년 난이 지난 뒤, 김시양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나라에 남한산성이 있어 그것을 힘입어 망하지 않았으니, 남한산성은 보배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대도 또한 이런 말을 하오. 나라에 남한산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오.’ 하니, 시양이 그 말에 매우 감복하였다.”

경제 방면으로 말하자면 김신국은 1619년부터 1623년의 인조반정까지 4년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국부(國富) 증대 정책을 추진하는 핵심에 있었다. 김신국은 호조판서로 임명된 직후 ‘식화(食貨)는 왕정이 먼저 할 바이며 축적(蓄積)은 생민의 대명(大命)’이라는 인식하에 은광 개발과 주전(鑄錢)의 통용을 건의하였다.

김신국은 1625년(인조 3)에 김신국은 다시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가 다시 발탁된 데에는 광해군 후반 정치적으로는 큰 혼란이 있었지만 경제정책은 안정성을 유지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신국은 그해 국용을 절제하고(制國用), 전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며(行錢幣), 바다의 이익을 거두는(收海利)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김신국은 양입위출(量入爲出: 구입액을 고려하여 비용을 절약함)의 철저한 이행과 서리(胥吏)들의 이익추구 방지가 국가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기본임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화폐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숙종대에 이르러 상평통보가 전국에 널리 유통되는데, 이러한 유통의 기반에 김신국과 같은 선구적인 관료가 있었다.

김신국은 양란 이후 사회 재정비의 방향을 농업경제보다는 상공업 중시 쪽으로 설정, 국부를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경제정책은 실무적 경험을 바탕으로 개혁조치를 취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김신국은 이처럼 탁월한 경세능력을 소유한 인물로 정파를 추월하여 중용되었다. 그가 이처럼 중용된 데에는 그의 탁월한 경세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인데, 이 능력이 현실적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동력자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지지와 헌신을 이끌어내야 한다. 김신국은 이 능력 또한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 <연려실기술>에 일화가 나온다.

“호조 판서 때에 중국 조정에 은을 올리는 일이 있었는데, 공이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아래 관원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봉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어떤 산원(算員) 한 사람이 곁에 있다가 공이 잠깐 다른 데를 보는 틈을 타서 은 한 덩어리를 몰래 훔쳐 가지고 곧 일어나 나가서, 용변하는 것처럼 꾸미고 몰래 다른 곳에 두고 돌아왔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여도 공 혼자만 알았으나 짐짓 모르는 체하고, 즉시 모두 자리 파하기를 명하며, ‘산증(疝症)이 일어나려 하므로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하면서 한쪽 방에 은을 보관하도록 하고, 그 산원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다음날을 기다려 문을 열고 은을 봉함하는데, 과연 은이 축난 것이 없었다. 공이 그 죄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십여 일 뒤에 다른 작은 일을 가지고 그 직책을 갈았는데, 사람들이 그 아량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을 잘하려는 의욕이 앞서면 아랫사람을 독려하는 게 지나쳐서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랫사람들의 자발적인 헌신을 유도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김신국은 이를 몸소 잘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김신국(金藎國)-당쟁을 초월해 실무능력을 인정받은 국방, 경제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