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 출신의 충무공 정충신


천민 출신의 충무공 정충신

 

이순신 장군의 시호가 충무공이다. 무신이기에 무(武) 자에 충(忠)을 붙였다. 이황은 시호가 문순공인데 문인이기에 문(文) 자에 순(純)을 붙였다.

충무공 시호는 이순신 장군 외에도 또 있는데 정충신 장군도 시호가 충무공이다.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은 천민 출신이다.

정충신의 인생에는 중요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 권율 장군과 이항복이다.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다.

정충신은 광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가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정충신 또한 천민으로 태어났다. 정충신은 성장한 뒤에 당시 광주 목사로 재직하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으로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 通引)을 겸하였다. 행동거지가 민첩하고 야무졌기에 권율의 신임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 권율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 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자청하고는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연려실기술>에 기록이 나오는데, 아울러 정충신의 기상을 보여주는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정충신은 자는 가행(可行)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고려 병장 정지(鄭地)의 후손이다. 미천한 집에 태어나서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겸하여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 통인)이었다. 일찍이 절도영에 사역되어 불려갔는데, 늙은 기생의 집에 유숙하였다. 기생이 절도영 잔치에서 남은 음식을 먹으라고 주었는데, 공이 물리쳐 먹지 않고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절도사가 되었으면, 자신이 먹다 남은 음식으로 남에게 먹일지언정 어찌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 하니, 그 뜻과 기운 높음이 이러하였다. 임진년에 목사 권율(權慄)이 행재소에 장계를 전달할 만한 사람을 모집하였는데,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분연히 가기를 청하니,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적병이 길에 가득 찼는데, 공이 단신으로 칼을 짚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당시 권율의 장계를 의주에 파천한 선조에게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광주에서 북쪽 끝 의주까지 가려면 왜군이 깔려 있는 적진을 뚫어야 해서 이 어려운 임무를 아무도 맡아서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정충신이 자원해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선조에게 직접 면천을 받아 양인 신분이 될 수 있었다.

 

당시 행재소에 이항복이 있었는데 정충신을 가르치고 자식처럼 아꼈다. <연려실기술>에 적힌 내용이다.

“이항복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멀리서 와서 몸 둘 곳이 없으니, 내게 머무르게 하겠다.’ 하였다. 이내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공이 재주가 뛰어나 문리가 날로 진보되니, 항복이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가을에 행재소에서 시행한 무과에 올랐다. 임금이 항복에게 이르기를, ‘경이 일찍 정충신의 재주를 말했었는데, 이제 과거에 합격했으니 데리고 와서 나를 보게 하라.’ 하였다. 들어가 뵈니, 임금이 칭찬하며 이르기를, ‘나이가 아직 어리니, 좀 자라면 크게 쓰리라.’ 하였다.”

 

정충신이 비록 천민 출신이지만 남다른 재질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를 적었다.

“공은 키와 몸이 작았으나 눈이 샛별 같고, 얼굴이 아름다우며 말솜씨가 있고, 기상이 좋아 영특하였다. 활발하고 의기가 있고 일을 잘 헤아려서 미리 맞히는 것이 많았다.”

광해군은 후금이 날로 성장해 명나라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중립 외교를 펼치고자 하였고 북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정충신은 만포 첨사로 광해군을 이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정충신은 인조 정권이 집권한 이후 한직으로 밀려났다.

정충신이 다시 중용되는 계기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면서다. 그런데 정충신과 이괄은 평소 형제처럼 친한 사이였다. 그로 인해 곤란을 겪게 된다. <연려실기술>에 이러한 상황을 기록해 두었다.

“김시양이 언젠가 조용히 묻기를, ‘공이 이괄이 반란한 것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와 이괄의 친분이 형제와 같은 것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것이오. 또한 문회(文晦) 등에 의해 고발되었던 것은 다행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잡혀 문초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소. 그리고 이괄이 모반할 때, 내가 영변(寧邊) 근방에 있었으니, 만약 사람들이 의심하게 된다면 나의 본심을 천하에 분명히 밝히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성을 버리고 도망 나와 내 본심을 밝혀서 사람들이 절로 믿도록 한 것이었소.’ 하였다.”

이괄과의 친분으로 고초를 겪은 정충신은 남이흥과 함께 황주에서 기세등등한 반란군을 막아내었으나 패배하였다. 다시 도원수 장만의 휘하로 들어간 정충신은 안현에 주둔할 것을 청하여 2천 명의 관군이 안현 위로 올라가 주둔했다. 공격해 오는 반군과 한바탕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둔다. 안현 전투의 패배로 타격을 입은 반란군은 곧 내분으로 자멸했다. 정충신은 이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 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다가 곧 풀려 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정충수는 병자년에 죽었는데, 그가 죽은 후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정충수는 병중에도 청이 공격할 것을 걱정했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이다.

“병자년 봄에 왜구가 온다고 말이 와전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왜인은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요, 나라의 큰 근심은 곧 북녘 오랑캐다.’ 하였다. 조정에서 오랑캐에게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단절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공이 이때에 병으로 앓아누웠다가 이 말을 듣고 심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해에 결정된다.’ 하였는데, 이해 12월에 오랑캐가 과연 크게 쳐들어왔다.”

 

1636년 병이 심해지자 인조가 특별히 왕이 의관에게 명해 치료에 진력하게 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연려실기술>에 인조의 각별한 정을 적어두었다.

“병자년 여름에 병이 심하였는데, 임금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하도록 하고 달마다 먹을 것을 내려주었다. 의관의 말이, ‘마땅히 인삼 두어 근을 써야 하겠다.’고 하면서도 임금에게 청하기를 어렵게 여겼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면 국력을 다 소비하더라도 아깝지 않은데, 하물며 몇 근의 인삼이겠는냐.’ 하였다. 죽은 뒤에 내시에게 명하여 호상하게 하고, 어포(御袍)를 주어 수의(襚衣)로 하게 하고 관청에서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다.”

정충신은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했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긴 임경업은 정충신의 휘하에 있던 장수였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