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조 최고의 호조판서 이명


인조조 최고의 호조판서 이명

 

이명은 재정 운용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인조, 선조조 최고의 호조판서라는 평이 있다.

“공이 재정을 운용하는 것이 대개 국가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하도록 힘썼다. 재화가 값이 천할 때에는 내보내고 귀할 때에 사들여서 그 남는 것을 저축하니, 관직에 있은 지 수년 만에 창고가 가득 찼다.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선조ㆍ인조 이래로 나라 살림을 맡은 사람으로 이만한 사람이 없었다.’ 하였다.

 

이명(李溟, 1570-1648)은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자는 자연(子淵)이고 호는 구촌(龜村)이다.

 

광해군 초년에 이조정랑을 지내면서 이이첨(李爾瞻)이 세력을 모으는 것에 반대하였고, 1613년(광해군 5)에 김제남(金悌男)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보호하였으며, 이덕형(李德馨)을 두둔한 상소를 지었다고 지목받아 관작이 삭탈되었다. <연려실기술>에 기록이 있다.

“삼사(三司)에서 이덕형 베기를 청할 때에 부제학 이성(李惺)이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공이 응교로 있으면서 원(院)에 들어가 말하기를, ‘이공이 무슨 죄이기에 곧 역적과 함께 같은 법으로 다스리려 하오.’ 하고,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또 정온과 함께 이덕형을 구하는 소의 초고를 만들었더니, 간당들이 귀양 보내도록 청하였다.”

 

이듬해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전라도관찰사에 특진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 인조의 공주 몽진을 도왔다.

 

이명은 정파로 북인에 속했고 반정의 주체는 서인이었다. 그럼에도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이명이 은밀하게 반정에 동조했음을 알려준다.

“공이 황해 감사로 있을 때, 이귀가 은밀히 반정할 계획으로 공에게 의논하였는데, 공은 거짓 취한 체하며 답하지 않고 작별할 때에 칼 한 자루를 선사하였다.”

이귀가 반정할 계획을 발설했다는 것은 반정에 동조할 여지가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터인데, 필시 이명이 김제남(金悌男)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보호하고 이덕형(李德馨)을 두둔한 상소를 지어 관직을 삭탈당한 것을 고려했을 것이다. 이귀의 계획을 듣고 거짓 체한 체했다는 것은 정파가 북인이라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칼 한 자루를 선사했다는 것은 반정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1623년의 인조반정 때는 황해도 관찰사로 있었는데, 반정 후에 탈출을 기도한 폐세자(廢世子)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있어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받았으나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처음에 이이첨과 결탁하였고 뒤에는 유희분(柳希奮)에게 의지하였다는 죄목으로 관작을 삭탈 당했다.

 

이명이 이이첨과 결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일찍이 어사로 용만(龍灣)에 갔는데, 부윤 이이첨이 날마다 공에게 문후하며 매우 친근하게 하였다. 공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소인이구나.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자다.’ 하였는데, 이첨이 듣고 감정을 품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경기도관찰사로서 전란 수습에 공을 세웠고, 그 뒤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국경방비를 강화하였다. 그 뒤 여러 곳의 관찰사를 거쳐 호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뒤에는 다시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전란 후 고갈된 재정을 잘 수습하였다.

 

국자의 재정을 담당하는 자로서 이명이 진심진력하여 좋은 성과를 냈음을 보여주는 <연려실기술>의 기록이 있다.

“병자년 난리 후에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는 큰 난리가 겨우 진정된 때였기 때문에 국고에 남은 저축이 없었다. 공이 시장의 매매를 조절하고 잡비를 아껴 방납(防納)을 금지하고 호조 안의 모든 일과 전곡의 출입을 정밀히 정비하여 금, 은, 포목 등을 그 좋고 나쁜 데 따라 나누어 세 가지 등급으로 구별하였다. 일찍이 별도로 누만(累萬)을 저축하여 두고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가에 급한 일이 생기면 이것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가볍게 쓰지 마셔야 합니다.’ 하였다. 세자와 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가 있으므로 본국에서 달마다 공급하는 것이 있고, 심양의 사신이 자주 왕래하면서 백 가지로 물건을 요청하는데도 호조에서 여유 있게 수응하여 부족함이 없고, 백성들에게 긁어내지 않았다. 임금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호조에 사람을 얻었으니 백성이 그 은혜를 입는다.’ 하고,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였다. 심양에 바치는 세공미가 만 석인데 공이 말하기를, ‘이 부담이 그대로 가면, 나라가 반드시 피폐할 것이다.’ 하고, 계책을 세워 사신을 보내니, 9천 석의 감면을 얻었다.”

난리가 막 끝난 후라 국가의 재정이 결핍한 상태에서 심양에 인질로 가 있는 세자와 대군의 재용을 충당하는 일과 청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대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았을 텐데 이명이 호조 판서가 되어 잘 처리했기에 인조가 “호조에 사람을 얻었으니 백성이 그 은혜를 입는다” 하고 칭찬을 한 것이다.

 

이명이 이처럼 호조의 재정을 잘 처리하는 데에는 용의주도한 일처리가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일화가 나온다.

“청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관한 일을 맡은 자가 일찍이 일본의 보검을 구하므로, 민간에서 찾아 얻었더니 매우 좋은 칼이 있었다. 공이 이 칼을 받아 감추고, 낭관들을 시켜 다시 다른 칼을 구하게 하였더니, 다시 칼 한 자루를 구하여 올렸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처음 칼만을 못하지만 또한 쓸 만하다.’ 하고, 그것을 청장에게 주었다. 얼마 뒤에 청국 황제가 그 장수의 칼을 보고 다시 구하였는데, 공이 즉시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어주며 낭관에게 말하기를, ‘그때 내가 이미 이럴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이명이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일처리를 했기 때문에 호조의 직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것이다.

“원두표(元斗杓)가 일찍 공을 비방하였는데 공을 대신하여 호조에 들어가게 되자 부중(府中)에서 조치하여 놓은 일을 보고 크게 탄복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재주가 이 같을 수 있는가? 나는 공의 규모를 지키기만 하면 족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시끄럽게 새로 고치랴.’ 하였다.”

심지어는 이명을 비방했던 이조차 그의 일처리에는 탄복을 했다니 인조, 선조 시대 최고의 호조판서라는 평은 헛말이 아닌 성 싶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