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 반정의 포고문을 짓다


장유, 반정의 포고문을 짓다

 

장유가 애초에는 반정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귀와 나눈 대화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이귀가 당시 일에 강개하여 반정할 뜻을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장유가 듣고 사림(士林)의 화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귀에게 빨리 시골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이귀는 대의(大義)를 들어 그를 꾸짖었다.”

이귀의 설득이 주효했는지 모르지만 장유도 반정에 힘을 보태어 후에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특히 장유와 그의 아우 장신이 훈련대장 이흥립을 반정에 가담시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연려실기술>에 적힌 내용이다.

“인조가 수백금을 내어 심기원의 무리들로 하여금 의사(義士)들을 모집하여 결탁하게 하였으나 힘을 얻기가 어려웠다. 이때에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 안에 있는 것을 여러 사람이 걱정하였다. 이귀는 본래 흥립과 한 마을에서 살면서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뜻을 통하여 결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흥립(興立)이 박승종(朴承宗)과 사돈이 되었으므로 흥립의 첩 딸을 승종의 첩 아들과 짝지었다.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마침내 장유(張維)와 상의하여 아우 장신(張紳)을 시켜 흥립에게 함께 일할 것을 말하게 하여 승낙을 얻었는데 장신은 바로 흥립의 사위이다. 드디어 장유의 집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여 흥립의 편지를 장단 부사 이서와 이천 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에게 전하고 거사할 날을 약속하였다.”

“이때에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조정 안에서 중한 명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걱정하여 그 사위 장신(張紳)을 시켜 설득하게 하였더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이귀도 함께 공모하였는가?’ 하므로 장신이 그렇다고 하니 흥립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 의거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허락하였다. 장유(張維)가 이귀에게 회답하여 알리니 이귀가 크게 기뻐하여 일어나 절하며 사례하였다. 드디어 흥립을 시켜 손수 글을 써서 장단(長湍)에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이흥립이 안에서 호응하기로 하였다.”

장유(張維, 1587-1638)가 누구인가?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은 이다.

 

<연려실기술>에 장유 본인이 자신의 문장을 평한 내용이 나온다.

“나면서 남달리 뛰어났으며, 어려서 맏형을 따랐는데, 그의 배우는 것을 곁에서 듣고 빨리 기억하였다. 윤월정(尹月汀)에게 《한사(漢史)》를 배웠으며, 사계(沙溪)에게 《예기》를 배웠다. 열 살에 두 경의 정문(正文)을 다 외웠으며, 12, 3세에 《소미통감》을 다 읽고 또 능히 외었다. 16세 때에 창려문(昌黎文)을 받아서 읽고 문득 고문의 법도를 알았다. 19세에 한성시(漢城試)에 장원하였고, 20세에 진사가 되고 23세에 과거에 올랐다. 글을 짓는 것이 한유(韓愈)의 짓는 법을 따라 진부한 말들은 쓰지 않았다. 선배들의 명작을 보고서도 뜻에 차지 않는 것이 많았다. 얼마 후에 임자년의 화를 만나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있게 되어 마침내 문장에 힘을 썼다. 다만 병이 많았으므로 부지런히 글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30세 때에 문체가 대략 성취되었다. 일찍이 스스로 평가하여 말하기를, “나의 작품 중에 사부 6, 7편은 마땅히 고려조의 이문순(李文順)과 나란히 할 것이며, 고문 수십 편은 중국에는 감히 내놓을 수 있으나 《동문선》에 끼우는 것은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다만 시는 본래 늦게 배웠기 때문에 끝까지 소가(小家)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후인이 품위(品位)를 매길 때에는 우리나라 어느 분들 사이에 끼워 줄런지 알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문장에 대한 자부가 느껴진다. 그러나 문장만 탁월한 것이 아니라 성덕지사(成德之士)의 인품 또한 숨길 수 없을 것 같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이다.

“백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장유의 문장과 덕행은 비록 공자 문하에 둔다 하여도 안연이나 민자건에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약관에 음부경(陰符經)을 주해하였는데, 독특한 의견이 많이 있었다.”

“정태화(鄭太和)가 일찍이 말하기를, ‘반정 훈신 중에 인망 있는 이가 많았으나 그 후의 처신과 마음가짐을 보면, 당초에 털끝만큼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순전히 종묘사직을 위하는 마음으로 거사를 한 사람은 또한 몇 사람에 불과하니, 지천(遲川, 최명길), 계곡(谿谷, 장유)와 함릉(咸陵), 李澥) 몇 사람이 그러한 이들이다.’ 하였다.”

 

반정이 성공한 후에는 폐정을 혁파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위무하는 순서를 밟게 된다. 장유가 명을 받아 작성한 대사면 포고문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임금이 즉위하여 중외(中外)에 크게 사면하는 교서를 내렸다. 교서의 대략에,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가법(家法)이 매우 올바르니, 인(仁)으로 다스리고 효(孝)로써 도리를 삼았다. 그러나 하늘이 돌보지 않아 드디어 나쁜 운수를 만났으므로 십 수 년 동안 적신 이첨이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국권을 도적질하더니, 마침내는 모자지간을 이간하여 끝내 인륜의 변을 일으켜서 대비를 별궁에 유폐시키고 갖가지 모욕을 주었으며, 대비의 목숨이 경각간에 달려 있었다. 이에 삼강(三綱)이 비로 쓴 듯 없어졌으니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사치와 욕심이 도를 넘고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의 원망과 하늘의 노함이 극도에 이르러 밖으로 무너지고 안으로 다투어 나라를 망치고 제사를 끊기에 충분하였으니 이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다. 모두 대비의 말씀에 갖추어 있으므로 덧붙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가 박덕한 몸으로 선왕의 훈계를 받들어 삼가 집을 지켜 목숨을 마치려 하였더니, 다행히 2, 3명의 충의로운 신하가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된 것을 민망히 여기고 인륜이 끊어짐을 두려워하여, 대의(大義)를 분발해서 내란을 평정하고 이미 대비를 복위시키는 한편 이내 나를 추대하기를 원하니, 내가 아래로 여러 사람의 생각에 몰리고 위로 대비의 뜻을 받들었노라. 이에 깊은 못이나 골짜기에 빠진 듯 두렵도다. 내 어찌 감당할까 생각하니, 즉위한 시초에 반드시 다시 새로운 교화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에 무신년 이래 모함으로 옥에 갇힌 사람과 연좌된 사람과 국사를 논하다가 벌을 받은 자는 모두 그 죄를 씻어주라. 동시에 모든 건축 토목을 일으키던 역사와 조도사(調度使)라는 명목의 관리들이 거두고 빼앗던 것을 일체 개혁하고, 그 밖에 백성을 침노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 외척과 권세부린 자들 소유의 농장 중 세금을 줄여주고 부역을 면제하였던 사실을 함께 조사하여 타파하며, 내수사(內需司)와 대군방(大君房)에서 백성에게 빼앗은 전답을 일일이 돌려주도록 한다. 또 금년 3월 13일 새벽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죄를 지은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한다. 이로써 정치를 새롭게 하는 뜻을 보이노라.’ 하였다. 계곡(谿溪谷) 장유(張維)가 지어 올렸다.”

새로운 왕이 등극했으니 새로운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이다. 광해조의 폐정을 혁파하고 대사면을 조선팔도에 포고한다. 이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정의 동력을 확보하려는 당연한 조치다. 이 중대한 포고문을 장유가 명을 받들어 썼으니 그의 문장과 경륜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인륜을 저버린 불효를 바로잡는 것을 반정의 첫 번째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