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친구와 어울리며 멋 부릴 때


나쁜 친구와 어울리며 멋 부릴 때

 

사귀는 친구 때문에
잘못해서 야단맞을 때 아이는 친구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교실에서 잘못하여 지적당할 때도 자기는 가만히 있었는데 친구가 건드려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을 미루어 보면 집에 가서 부모에게도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할 공산이 크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저학년 아이들의 수준에 해당된다. 이때 부모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이가 좀 자라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이 되면 친구 탓을 하기보다 친구를 따라 부모 몰래 딴 짓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좋은 친구를 사귄다면야 걱정 없겠지만, 몰래 어디로 놀러가거나 오락실 따위에 출입하는 것은 그나마 작은 문제이고, 불량배들과 어울려 담배나 술을 입에 대기도 하고,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청소년 범죄에 가담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어떻게 예방하여야 할까? 특히 맞벌이 부부의 자녀로서 집안에 아이를 돌보거나 감독할 사람이 없을 경우 이런 위험에 노출되기가 쉽다. 또 한 부모 가정이나 부모 없이 조부모가 양육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불량배들은 그런 가정 출신의 아이들을 노린다고 봐야한다.

선생이 쓴 『소아수지』의 한자 ‘小我須知’는 ‘아이들이 알아야 할 것’이라고 옮길 수 있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겠는가? 그것을 교육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주지시켜야 할 것’ 다시 말해 교육을 통해 어린이들이 체득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보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그래서 친구나 남을 대하는 문제에 대해서 선생은 이렇게 경계시킨다.

〔16〕한가하고 일없는 사람을 대하기 좋아하고 잡설을 일삼아 본업을 그만 두는 일(好對閒人, 雜說廢業)

한가하고 일없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놀기 좋아하고 술과 시와 풍류를 즐기는 부류가 아닐까? 때로는 한량이라 일컫기도 했지만 요즘말로 말하면 문학과 예술에 취향이 있거나 몰두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친구이든 나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아이가 이런 사람을 따르는 것을 경계했다. 더구나 예술이나 문학에 종사하게 되면 여러 가지 이론이나 생각이 있을 터, 그것을 잡설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본업이란 도학, 곧 성리학을 공부하는 일을 말할 것이다. 당시는 문학이나 예술이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서 시를 짓는 사람이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또 글씨나 서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경치 좋은 곳에 몰려다니면서 각자의 시를 읊기도 하고 그것을 평하기도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선생과 같은 도학자의 눈에는 그것이 좋아 보일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글의 행간에는 남을 따르는 문제 곧 친구사귀는 문제가 들어 있다. 자기 나이를 기준으로 보아 다섯 살 위아래는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해당될 것이다.

내 아니는 어떤 기준으로 친구를 사귈까?

오늘날 사람들이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외모일까? 아니면 가정의 배경일까? 상대방의 인간성 때문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같이 한 경험 때문일까? 한 가지로 정해 답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필자가 사귀는 친구의 경우도 같이 한 경험, 곧 같은 학교에서 배웠다는 점과 서로에게 어울리는 인간성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떤 기준에서 사귈까? 논리상 위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동네에 살거나 같은 학교나 학원에 다녀서, 나와 같이 잘 놀아주고 먹는 것도 사주어서, 마음이 착하고 내게 잘 대해 주어서, 나보다 능력(힘, 주먹)이 뛰어나서 사귀는 것으로 보인다. 대개 자기중심적이다.
그런데 현대의 경쟁하는 사회에 살다보니 영악한 사람들이 사귀는 것은 다소 의도적이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거나 돈 많은 부자이거나 권력주변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사귀려고 한다. 그래서 대형교회에 출석하여 은근히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향우회나 동창회 등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모두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람을 사귄다고 하겠으니, 아이들처럼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친구의 덕을 사귄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그 사람의 덕(德)을 사귀는 것으로 여겨왔다. 『동몽선습』에 이른 말이 보인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덕을 사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를 사귈 때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골라야 한다. 혹시라도 사귀면서 놀 때 학문과 덕을 닦는 일에 함께하지 않고, 단지 기뻐하고 버릇없이 친하며 장난하고 농담하는 것을 친하다고 여긴다면, 어찌 친구 관계가 오래가겠으며 멀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붕우유신」)

 

친구 사귀는 기준이 명확하다. 바로 덕이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라고 당부하는 것도 바로 여기서 근원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친구 사귀는 것이 이러한가? 덕이 있든 없든 먼저 자기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지 않는가? 어른이 되어서도 이러면 혹 누가 나쁜 마음으로 접근해도 쉽게 넘어가 사기를 당할 소지는 충분히 있지 않은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선생도 친구를 사귀는 문제에 대해서 『격몽요결』에서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친구를 사귈 때에는 반드시 배우기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며 행동이 반듯하고 엄격하며 정직하고 참된 사람을 고른다. 그런 친구와 함께 생활하며 친구가 행동을 바로잡고 조심하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나의 결점을 줄여나간다. 만약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고 나약하며 아첨하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된다

(「접인장」).

‘친구는 나의 거울’이라는 말도 이와 관련되는데, 나의 단점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이다. 나의 잘못된 비밀을 숨겨주고 나쁜 곳에서 함께 놀며 나의 기분만 맞춰주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결국 유유상종하게 되니 나도 그 사람처럼 되어버리고, 결국은 실패한 인생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젊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노인들은 인생을 이렇게 산 사람의 말로가 비참하게 된 모습을 살아오면서 많이 보게 된다. 이 또한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멋 부리고 낭비할 때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대개의 아이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멋 부리고 시간과 돈을 낭비할 때가 많다. 아이돌 가수나 연예인 흉내를 내느라 머리 꾸미고 화장하며 몸치장 하느라 시간과 돈을 허비한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한번 눈여겨보라!
부모들은 아이들이 이러면 안 좋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면 또래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할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내버려 둔다. 어른들도 어렸을 때 연예인을 흉내 내고 다 이래 봤으니 한 때의 문제라고 가벼이 보아 귀엽게 넘어갈 수 있다.
선생이 살았을 당시도 배우는 자들이 이렇게 본업을 망각하고 다른 데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17〕초서 쓰기를 좋아하고 함부로 끼적거려 종이만 더럽힐 때(好作草書, 亂筆汚紙)

초서(草書)란 서체의 하나로 한자를 흘려 쓴 글씨이다. 필자는 몇 십 년 한문을 공부해 왔지만 초서를 못 읽는다. 초서는 글자가 까다로워 다시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서로 적인 옛 문헌에서 보통의 한자로 옮기는 작업을 탈초(脫草)라 부르는데, 이 분야의 전문가는 희귀하다.
그런데 왜 초서 쓰기를 좋아했을까? 붓으로 한자로 문장을 많이 쓰다보면 획수가 복잡하고, 또 자주 나오는 한자를 자연스럽게 그 획수를 생략해서 쓰게 되면서 초서가 유용하게 되었다. 아마 초서도 그런 필요성에서 생겨났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초서가 서예로서 하나의 예술 분야로 자리 잡고, 또 못난 어떤 이들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초서를 갈겨댔다. 초서를 모르는 사람을 문맹자로 만들고서는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바로 선생은 아이들이 인간의 덕보다는 이런 잔재주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을 경계했다. 선생이 살았던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시대정신에서 볼 때 당연한 말씀이다. 그러나 성리학자라고 해서 필요에 따라 초서를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선생의 경우 즐기지 않았다고 믿어주어야 할 것 같다.

창작과 예술 교육

선생이 살았을 때의 시대정신에서 볼 때 선생의 말은 타당성이 있고, 게다가 친구 사귀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가하고 일없는 사람’과 ‘잡설’이나 ‘초서’가 상징하는 예술이나 문학에 대해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성리학이 뒷받침하고 농업이 주된 생산양식인 전근대적 사회에서 만사를 근본적인 도덕의 잣대로 볼 때는 예술이나 문학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그 도덕률이나 그것이 반영된 인간 사유에 의해 제한을 받기 마련이다. 근본주의적 신학자에게는 인간의 행위가 대부분 타락한 욕망의 발로로 보이듯이, 도덕만을 모든 행위의 준칙으로 삼을 경우 모두 천리를 위반한 인욕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가? 모든 것이 사욕을 위한 것으로 되어버린 지 오래되지 않았는가? 바로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취해야 할 나름의 기준과 태도가 필요하다. 사실 문학이나 예술이 근엄한 도덕군자에게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그 또한 인간사회에 필요한 요소이니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단지 모두에게 보편적인 도덕률이 필요하듯이 문학이나 예술 또한 이 보편성에서 멀어지면 방종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보편적 도덕률이라는 이름으로 제한해서도 안 되며, 그 보편적 도덕률도 예술가나 문학가의 자율에 맡겨진 것뿐이다.

따라서 내 아이가 초서를 쓰든 본업을 팽개치고 잡설을 일삼아도 문제될 것은 없다. 잡설에 능통해 유명 작가가 될 수도 있고, 초서를 잘 써 서예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제 그런 근엄한 도덕률에서 해방된 지 오래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예술가가 된들 누가 천한 직업이라 비웃지도 않을 것이고, 작가가 된들 잡학을 한다고 절대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예술가나 작가도 윤리학자처럼 똑같이 대우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당신의 아이가 종이를 끼적거리며 더럽혀도 괜찮고, 초서쓰기를 좋아한다면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것이다.

유행에 민감한 내 아이

그러니 내 아이가 유행 따라 연예인의 흉내를 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도 청소년이었을 때 그랬으니 다 한때 지나가는 바람이니 하고 내버려 두는가? 아니면 본업을 팽개치고 쓸데없는 일에 매달린다고 야단치는가?
필자는 지나치지 않다면 전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필자의 딸도 중학교 때인가 그룹사운드 가수들의 모습에 빠져 베이스기타와 앰프가 달린 스피커를 사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하다가 말겠지 하고 큰맘 먹고 사 주었다. 그랬더니 한두 달 하다가 그만두었다. 또 한 번은 어떤 코스프레에 참여한다고 가위로 천을 자르고 재봉틀로 박고 야단을 치더니 그것도 한두 번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 뒤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였고, 지금은 나름 원하는 직장에 잘 다니고 있다.

아이들은 유행에 민감하다. 지나쳐서 본업을 망치지 않는다면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경험은 결코 경험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훗날 큰 자산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큰 안목에서 볼 때 쓸데없는 일은 없다. 다만 지나치면 다른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설령 본업이 아닌 그 쓸데없는 일에 더 빠진다면 그것 또한 본업이 될 수 있다. 부모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