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 이렇게 키우자


내 아이 이렇게 키우자

주자의 『동몽수지』
율곡 선생의 『소아수지』는 남송 때의 주자(朱熹, 1130~1200)의 『동몽수지(童蒙須知)』와 이름이 거의 같다. 동몽(童蒙)이란 어린이를 말하니, 뜻으로 보면 책 제목이 거의 같다고 하겠다. 『동몽수지』의 내용을 보면 ⑴의복과 신발말과 걸음걸이주변정리와 청소 책 읽고 글자 쓰는 일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로 되어 있다. 비록 목차는 다르지만 선생의 이 책과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선생은 아마도 주자의 『동몽수지』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그것에 자극받아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몽수지』도 그렇지만 이 책은 더 간략하다. 앞서 소개한 17개의 항목을 보면 주자의 그것과 큰 차별이 보이지 않으나, 다만 주자가 개인생활을 영역별로 나누어 기술한 반면 선생의 것은 통합해서 대체로 가족과 교우 관계를 중심 중심으로 기술하고, 개인 영역은 소략하다. 그러니까 주자의 그것보다 인간관계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하겠다. 이 두 책을 상세히 비교하면 주자의 그것과 선생의 아동 교육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1577년에 『격몽요결』을 편찬한다. 그 서문에서 한두 명의 학생들이 따라와 묻고 배우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공부의 방향을 잡고 공부에 착수하게 하려고 썼다고 말하고 있다. 『소아수지』를 언제 썼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내용의 논리나 조직적 체계를 보면, 이 『격몽요결』에 앞서 저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격몽요결』이 『소아수지』에서 말한 것을 좀 더 구체화 하고 영역별로 조직화시켜서 쓴 것으로 보며, 주자의 『동몽수지』를 넘어서 그만의 체계적인 교육적 견해를 피력한 책으로 본다.

고리타분한 유학자의 말이라고?

흔히 유학자들의 말을 전하면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이다. 유학이 전근대적 가부장제도의 근원으로 여겨서 한국사회의 온갖 비리의 원인제공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른바 진보적 인사들 중에서도 폐단이나 폐습을 비판할 때 한결같이 유교의 영향이라고 지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극단적인 사례로서 유학을 오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유교경전의 하나인 『역경』, 이른바 『주역』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아는 바이지만, 역을 공부하는 핵심은 때[時]와 형세[勢]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자로 말하면 시세(時勢)를 아는 것이라 하겠다. 또 『중용』을 보면 ‘시중(時中)’을 강조한다. 시중이란 해당되는 때에 가장 적중한 실천행위나 앎을 가리킨다. 두 경전의 공통점은 바로 시(時)라는 때에 있다.

율곡 선생은 조선중기의 정치가이자 철학자·교육자이다. 선생의 말이 21세기 오늘날 백퍼센트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앞에서 말한 시세를 몰라도 너무 모른 것이다. 또 옛날의 유학자가 말한 것이어서 모두 케케묵고 고리타분한 말로 여겨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필자가 앞서 해설한 『소아수지』도 이런 태도를 따른 것이다. 물론 얼마나 때에 맞게 풀이했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선생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따른 것은 아니다. 다만 선생이 살았던 당시와 오늘의 입장을 비교해서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점을 말했을 뿐이다. 따라서 옛날 사람의 말이라고 다 케케묵은 것도 아니고 반면에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그것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해서 현재의 우리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필요하다. 필자가 선생의 글에서 취한 입장도 그러하지만, 오늘날에 맞게 얼마나 잘 해석했는지는 독자의 평가에 달려있다.

21세기 더욱 요구되는 바른 인성

우리가 옛 것을 살펴보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단순히 옛 것을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나 힌트를 얻기 위해서이다. 지금 현실에 도움이 안 된다면 옛것을 알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잘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제4차 산업혁명에 진입하였다. 모든 일을 기계나 로봇이 대체해 나가고 있다. 인간은 직장에서 점점 쫓겨나 할 일을 잃어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내 아이가 어떻게 살아남을까? 당장의 입시를 위해 강제된 알량한 영어나 수학 문제 푸는 재주만으로 그런 세상을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

앞서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미래 사회에 가장 요구되는 인간의 능력은 뭐니 뭐니 해도 창의성이다. 그리고 그 창의성마저도 다른 인성적 요소와 결합하여 발휘된다. 이른바 호기심·인내심·집중력·자발성·자신감·정직성·개방성·독자성·협동성·진취성·적극성·친화성·포용성 등과 결합하여야 온전히 발휘된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이 부모나 윗사람에게 공손하게 대하고 형제끼리 다투지 않고 친구와 싸우지 말라는 것은 친화성이나 협동성 그리고 인내심이나 포용성을 키우는 것과 관계되는 일이 아닌가? 방심하지 않고 배우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집중력과 호기심과 인내심을 기르는 일이 아닌가? 더욱이 잘못을 숨기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직성과 관련되고, 나쁜 친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독자성과 자신감의 함양과도 관련이 된다.
더구나 앞서 서두에서 말했지만 회사의 CEO나 대학의 인사담당 책임자가 경력사원이나 신임교수를 선발할 때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평가 항목이 바로 이 인성 요소이니, 인성을 따지는 문제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을 신뢰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 배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인성이 좋은 사람을 선호하는 것은 그가 타인을 잘 배려하고, 남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래서 선생이 말한 부모의 일을 곧장 이행하거나 윗사람에게 공손하거나 형제끼리 다투지 않거나 친구와 싸우지 않는 일은 지금도 중요한 보편적 도덕규범이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나중에 사회에 나갔을 때 친화성이 있고 남을 배려하지 않겠는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사회는 경쟁이 심하다보니 남을 배려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심지어 학교에서 자기보다 성적이 좋은 아이는 질투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심하면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경쟁체제에서 부모가 학교 성적만을 강조하게 되면 아이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실의 제도가 어쩔 수 없이 경쟁을 조장하더라도, 부모는 그 해독과 문제점을 알아서 그 제도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학교가 그걸 해결해 준다면야 더 이상 바랄 수 없겠지만, 현재의 학교 여건상 그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그런 영향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겉으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다가도 속으로는 질시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물론 그 성공이 정당하더라고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부조리의 결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도 주위의 성공한 사람보다 자신들에게 호의적이며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을 훨씬 선호한다. 인터넷 댓글을 보라. 그래서 남을 배려하고 남과 협동하는 사람이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훨씬 건강하고 성공적으로 살 가능성이 높다. 인생의 가치를 돈이나 지위로 따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내 아이에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능력을 어떻게 자라게 할 것인가? 그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자매와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런 다음 마을에 나가 어른에게 공손하며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잘 사귀며 지내면서 그런 능력이 점차 확장되고 단단해진다. 그래서 유가들은 일찍이 이점을 간파하고 부모에 대한 효도나 형제끼리 우애나 웃어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해 왔다.
반면에 아이의 기를 죽인다고 야단쳐야 할 때 야단치지 않고, 부모에게 함부로 대해도 그냥 넘어가고, 아이가 아파트 위층에서 밤늦게 뛰고 떠들어도 제지하지 않고, 친구와 싸울 때 자기 아이편만 들고, 나와 상관없다고 이웃 어른께 인사도 안하고, 학교 선생님이 조금만 실수해도 비방하고 따지며, 아이가 보는 앞에서 친척과 경제적 문제로 싸우는 일 등은 모두 아이가 자라서 타인을 배려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치명타의 역할을 한다. 두려운 일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의 부모는 지식보다 지혜를 가져야

젊은 부모들은 아이를 키우는 데 경험이 별로 없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전에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교육프로그램이 전무한 이유도 있겠지만, 직장 다니면서 먹고 살기에 바빠서 그걸 생각해 볼 여유가 없어는 게 더 큰 이유일지 모르겠다.
요즘은 거의 맞벌이 부부라서 아이를 낳게 되면 노부모가 있으면 또 모르되, 대개 아이 보는 사람을 두다가 어린이집 같은 곳에 맡긴다. 아이가 좀 자라면 유치원에 보내고 이어서 초등학교로 올라간다. 그러니까 아이의 인성 또는 인격이 형성되는 중요한 대부분의 시기를 남에게 맡겨버리는 꼴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 교육환경의 비극일지 모르겠다. 설령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노부모가 있다고 해도, 노부모에게 교육적 역할을 거의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것은 또 아이에게 옛날식 가치관의 나쁜 영향을 고려한 선입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젊은 부부가 아이에게 어떤 좋은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옆에서 보지 않는 한 직접 알 길은 없다. 다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들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그 교사들도 학부모의 부정적인 영향을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학부모가 갑이 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금기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름의 방식대로 아이를 키우다가 성인으로 자라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성공한 경우는 극소수이고 나머지는 평범한 청년으로 자라고, 최악의 경우는 아이가 삐뚤어져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 사례로서 부모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의 S대학 출신이면서도 이렇게 자녀를 제대로 키우지 못해 후회한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도 수없이 본 적이 있다. 연구자들에게는 그것이 생생한 교육 자료이다.

이런 까닭은 자녀교육이 일회성이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에게는 자녀 교육에 대한 주변에서 듣거나 본 나름의 정보와 지식은 있겠지만, 자녀를 미리 낳아 길러보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옛날처럼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른다면 노인들의 경험도 있고 또 먼저 키운 아이의 경험을 살려 나중에 아이를 잘 키울 수 있겠지만, 요즘은 그게 불가능하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혜도 부족하다.
흔히 회사 경영을 많이 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혜란 경험과 지식의 결합이라고. 지혜의 특성을 잘 지적했다고 본다. 바로 여기서 젊은 부부들이 경청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들의 경험이 부족하니까 남의 경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가깝게는 노부모부터 멀리는 강좌나 책을 통해서 앞서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운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귀농해 처음 농사를 짓는 사람이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농부의 자문을 구하듯이,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겸손한 부부는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것이다.

내 아이를 행복하게 하라

어렸을 때 불행하게 자란 아이는 커서 행복한 사람이 되기 무척 어렵다. 필자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무척 많이 보아왔다. 아이가 설령 부모의 기대에 못 미쳐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결코 야단쳐서는 안 된다. 아이 자신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인데 그게 야단쳐서 해결될 문제인가? 부모는 아이의 두뇌가 자연스럽게 발달하도록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게 지적인 성장이 느리다면 대신 육체적 성장이나 정서적 성장을 돕고 고려해 보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다. 운동을 시켜 보거나 예능 방면의 기초로서 음악이나 미술·무용 등의 활동을 시켜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굳이 운동선수나 예술가를 키우는 일이 아닐지라도. 문제는 무얼 시키든지 아이가 즐거워하며 행복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일에 아이가 행복감을 느꼈다면 성공의 씨앗은 싹튼 셈이다. 그 행복감을 계속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관리해주면 아이는 스스로 자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