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하고 멍청하며 잘못을 숨길 때


방심하고 멍청하며 잘못을 숨길 때

조는 아이
요즘에도 학교에서 조는 아이가 있을까? 당연히 있을 것이다. 이것은 초등학생보다도 중학생 이상인 아이들에게 해당될 게 확실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수면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개 밤늦게까지 학원공부나 보충공부를 하느라 늦게 자고 또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에 등교하기 때문이다.
한 때 이런 괴담도 있었다. 학원에서 학교보다 잘 가르치니 학교에서 배울 게 없어서 차라리 잠을 잔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정말로 이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학교에 근무하는 후배 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막무가내로 엎드려 자는 아이가 있다고 한다. 교사가 깨우면 되레 화를 내고, 야단치면 대들기까지 한다고 한다. 무서워서 야단치기도 어렵단다.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게 서로 간에 암묵적 합의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교육현장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따지지는 않겠지만, 공부시간에 조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사실 필자도 졸음을 참을 수 없어 졸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때는 선생님에게 발각될까봐 조심해서 오른 손으로 머리를 짚는 척 눈을 가리고 듣는 척 했다. 졸았던 원인은 공부 때문이다. 밤늦도록 공부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또 공부하고 게다가 자취생 처지로서 먹는 것도 부실했으니 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객이 전도된 일이기는 해도 학원 공부 때문은 아니다.

초등학생의 경우에는 특별한 경우를 빼고 아이들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조는 일은 거의 없다. 조는 일보다 장난치거나 떠드는 일이 더 많다. 어쩌다 조는 경우에는 대개 무슨 사정으로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 좀 거시기한 일이지만 밤새껏 동영상 보다가 잠을 설쳐 조는 녀석들도 어쩌다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시간에 조는 일은 요즘에만 있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율곡 선생이 살았던 당시에도 공부시간에 멍하니 앉아 졸았던 모양이다. 그러서 선생은 이렇게 경계했다.

〔14〕마음을 놓아버리고 멍하니 낮에도 앉아서 조는 일(放心昏昧, 晝亦坐睡)
방심하는 내 아이

‘마음을 놓아버리다’의 원문은 방심(放心)이다. 오늘날도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방심하지 말라고. 이 말은 원래 『맹자』에 등장하는데,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놓아두면 찾을 줄 알면서도 본심을 놓아버리고도 찾을 줄 모른다

(「고자상」).”

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 본심이란 인간의 선한 성품으로서 갖춰졌다고 여긴 인(仁)과 의(義)를 보존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한 곳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요즘 말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선생이 말한 방심은 『맹자』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단지 공부하는 일에만 방심하고 앉아 존다고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이점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격몽요결』을 들여다보자.

일이 있으면 이치대로 일에 대응하고 책을 읽을 때는 정성으로 이치를 연구한다. 이 두 가지 일 외에는 조용히 앉아 이 본래의 착한 마음을 모아서 고요하게 하여 어지럽게 일어나는 잡념이 없게 하고, 밝고 밝게 하여 어두워지는 잘못이 없게 해야 한다. 이른바 경(敬)을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이와 같다

(「지신장」).

방심하지 않는 방법으로서 경(敬)을 말했다. 경은 성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의 상태로서 한곳에 집중해서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일종의 감찰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마음으로 본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깨어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더라도 오늘날은 집중하지 않고 멍하니 졸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늘 깨어서 선한 본성을 갖춘 본심을 잘 유지하라고 한들 그것을 따를 아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경험적으로 볼 때 누가 믿겠는가? 물론 그 반대로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래서 학생이 낮에 특히 공부시간에 조는 것은 방심한 일은 틀림없다. 공부하는 사람이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든 사업하는 사람이든 일하는 중에는 멍하니 있으면 안 된다. 물론 졸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멍할 때도 필요하다. 요즘말로 ‘멍 때린다’고 하는데, 그럴 때가 필요하다. 우리의 두뇌는 무조건 많이 쑤셔 집어넣는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학습과 휴식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진행되어야 잘 작동된다. 그래서 그 휴식시간에 멍하게 있을 필요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멍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모든 시름과 걱정을 다 잊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방심하지 말라는 선생의 의도는 공부할 때는 집중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매사에 인간의 착한 본성이 발휘되는 마음 상태를 깨어있어 잘 유지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자가 더 선생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절실히 경계할 것이 있다. 선생은 이렇게 지적한다.

 

〔15〕부족함을 비호하고 잘못을 숨기며 말에 진정성이 없을 때(護短匿過,言語不實)
믿음이 안 가는 아이

멍청하게 있거나 낮에 조는 것보다 자기의 부족한 점을 변명하거나 잘못을 숨기여 말에 진정성이 없는 것이 실제로는 도덕적으로 더 위험하고, 인성도 좋지 않다.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같이 자란 동무들 가운데도 이런 아이가 있었다. 또 필자는 교사로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간혹 실제로 믿음이 안 가는 아이가 있었다. 자기가 잘못하고도 늘 다른 아이의 탓으로 돌리거나 변명하고, 제 딴엔 결정적 증거가 없다고 판단되면 아니라고 우기는 일이 그것이다. 아이가 상습적으로 이러면 더 이상 야단치거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진다. 다만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할 뿐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을 고치려면 아이가 자라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능력으로서 도덕성이 성장하도록 기다려야 한다. 어릴 때는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되돌아보아 반성할 정도로 정신적 능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야단치거나 혼내서 못하게 하는 것은 잠시 그런 행동을 보류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만두게 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사실 아이가 이런 것은 어릴 때의 양육과정에서 최초의 그리고 그 이후 연속해사 그런 행위가 자신에게 이로움이 되었던 나쁜 경험을 시작으로 학습된 결과 때문이다. 쉽게 말해 거짓말하고 남을 속여서 나름의 이득을 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시도에 실패하고 그 벌로서 야단을 맞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유아기 때는 대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 네 것 내 것의 구분이 불분명하며 거짓말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른 채 자신의 욕구나 욕망만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 욕망의 대상이 대개 먹는 것이나 노는 장난감 따위이다. 그때 부모나 누군가가 그런 행위가 나왔을 때 분명하게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해 주어야 한다. 내 것이 아니라면 주인의 허락을 받게 하고, 거짓말을 못하게 해야 한다. 그때 부모가 애매모호한 태도로 때로는 아이의 편을 들어 옹호하면 그런 도덕적 사태를 잘못 해결하는 학습을 하게 되고, 그것이 누적되면 믿음이 안 가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홀로 있을 때도 삼가다

배우는 학생만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누구나 정직해야 한다고 다들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학교에서 도덕시간에 그토록 정직을 강조해도,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할 때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것은 인간이 정직하게 사는 것이 참으로 힘들어 보이기도 하다.
물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할 때가 있다. 여기서 거짓말이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도적한 동기에서 비롯한 정직하지 못한 행위를 말한다. 적어도 언론에 등장하는 비리를 저지른 고위급 인사나 온갖 사기로 입건되어 처벌받는 사람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에 정직하지 못한 일이 얼마나 퍼져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가도고 남는다. 게다가 보통사람들이 세금을 정직하게 내지 않는 탈세나 위장전입으로 저지르는 온갖 비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율곡 선생은 이렇게 사람이 정직하지 못할 것을 경계하여 이렇게 말한다.

마땅히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아야 한다. 남이 보지 못하는 깊숙한 곳에 있더라도 마치 훤히 드러난 것처럼 행동할 것이요, 혼자 있더라도 여러 사람과 같이 있는 것처럼 여겨, 푸른 하늘에 밝은 해를 보듯이 남이 내 마음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신장」).

이런 가르침은 『대학』에서도 보인다. 바로 신독(愼獨)이 그것인데, 이것은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삼간다는 뜻이다. 소인배들은 남이 못 보거나 혼자 있을 때는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러다가 남 앞에서는 안 그런 척 근엄하게 행동한다. 이것은 표리가 어긋나는 행위로서 위선이다. 그래서 선생은 겉과 속이 한결같아야 한다고 한다. 겉과 속이 다르면 남이 알까 두렵다.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홀로 남몰래 했다고 자기만 알고 남이 모른다고 여기는 데 있다.

“숨기는 것처럼 잘 드러난 것도 없다.”

는 격언을 생각해보라. 소인들이 아무리 숨겨도 그의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남이 다 아는 것을 정작 숨기는 그 자신만 모르기도 한다. 단지 사람들이 입 다물고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남이 모를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 뿐이다.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둘러보라. 그들의 인생이나 삶이 어땠는지 조금만 어울려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은가? 숨긴다고 숨겨지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선생은 차라리

“푸른 하늘에 밝은 해를 보듯이 남이 내 마음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 말했는지 모른다. 어차피 다 보이거나 들통 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 아이가 멍청하게 보이는가?

모든 아이들 심지어 육체적으로 다 성숙한 성인마저도 정신적 능력은 성장한다. 심하게 말해 다 늙어죽을 때까지도 사람 하기에 따라서는 그 능력이 성장하는 사람도 있다.
내 아이가 이웃집 다른 아이에 비해 수학문제를 많이 풀지 못해서 멍청하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국어책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또 아이들과 놀면서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했다고 속상해 하지는 않는가? 그랬다면 당신은 한국의 다수 학부모가 그렇듯이 그 특유의 조바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이웃집 아이보다 내 아이의 학습능력이 뒤 떨어져 외고나 과학고 등에 못 들어가고,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못 들어갔다고 해서 아이의 능력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인 당신이나 당신의 아이는 정말로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껏해야 인생 이십 대 초·중반의 상황을 긴 인생의 승부처로 삼는 것 자체가 불행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나 도덕성 등은 나이가 들어도 더 발달한다. 그 실패를 실패라 여기지 않고 다만 성장이 늦다고 여겨 꾸준히 경험하고 학습한다면, 종국에는 그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을 능가하게 된다. 필자는 그런 분들을 무수히 봐 왔다. 필자 자신을 되돌아 봐도 그렇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국어책에 등장하는 글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수업을 통해서나 참고서에서 말해주는 것 외에는 내 스스로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수많은 경험을 쌓아 책을 읽으니 그 정도의 글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비록 잘 나갔던 또래 아이들보다 느렸지만, 지적 이해력이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다만 인간의 인지발달을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에 평가하여 평생을 좌우하도록 만든 사회의 시스템이 좀 원망스럽긴 해도, 인생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긴 안목으로 내 아이의 성장을 기다려 주고 또 격려해서 도전시킬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