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가 게으르고 독서에 소홀할 때


내 아이가 게으르고 독서에 소홀할 때

 

아이가 독서의 즐거움을 아는가?
지난 수년 사이 도서관이 참 많이 생겼다. 필자가 쓴 책의 작가로서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하러 다니면서 보면 생각보다 크고 작은 도서관이 많이 생겼다. 아마도 지방자치단체의 장들이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거나 자신의 실적을 위해 그렇게 크고 작은 도서관을 만든 모양이다. 그리고 주5일제 수업을 하다 보니 토요일에 아이들이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토요일 도서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곳도 있다.

그런데 강의를 다니면서 그 내막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학생이 좋아해서 프로그램에 참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부모의 성화나 권유에 못 이겨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마저도 대부분 3~4학년 정도이고, 5~6학년 아이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보이곤 했다.
이런 상황은 우연이 아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책을 쓰면서 출판사로부터 꼭 요청받는 사항이 있다. 책의 난이도를 3~4학년 수준에 맞게 써달라는 점이다. 왜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5~6학년 수준으로 올리지 않은지 의문을 가졌지만, 금방 그 실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학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기 때문에 독서할 시간이 없단다. 그래서 입시에 도움이 되는 영어나 수학 위주로 선행학습을 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 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책 읽기를 대개 싫어한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지식 위주의 문제풀이 학습을 시키다보니 아이들이 흥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보다 더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이 좀 많은가? 그러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이런 상황이 되풀이 된다. 대학교에 가서 비로소 책을 읽고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부닥치는데, 독서력이 부족하여 숱한 어려움을 겪는다. 우연히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죽하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필자의 철학동화도 대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겠는가?

물론 예외는 있다. 초등하교 고학년이 되어서도 그리고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독서력이 왕성한 아이들이 더러 있다. 필자는 그런 학생이 입시에 실패했다는 얘기를 거의 들어 본적이 없다. 왜 그럴까?
아무튼 그 옛날에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독서할 것을 권장했다. 이와 관련해 선생도 아이들에 경계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12〕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게을러 책을 읽지 않는 것(蚤寐晚起, 怠惰不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

선생의 생각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좋게 본 것 같다. 그런데 예전에 아이들이 공부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바른생활 또는 도덕책을 보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착한 어린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와 약간 상반 된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늦게까지 자지 않고 독서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성인의 경우 늦게까지 독서하고 일찍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물론 선생의 우려대로 아이들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일’은 도덕적 차원을 떠나서 볼 때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나는 게 상례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어떤 건강이나 습관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선생의 희망사항은 이치에 옳을까? 아이들은 선생의 희망과 달리 대개 늦게 자면 십중팔구 늦게 일어난다. 예전에 늦게 일어나 지각하는 아이들을 보면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하다가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지각은 하지 않았으나 늦게 일어났으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준비물로 못 챙겨 허둥대다가 엄마가 대신 갖다 주는 일도 가끔 있었다.
이러니 선생의 말을 잘못된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선생이 말처럼 ‘늦게 잔다’고 할 때의 시간적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면 금방 깜깜해진다. 호롱불이나 등잔불이 없으면 아무 활동도 할 수 없다. 해가 긴 여름철이면 모르지만, 겨울철이라면 오후 5시만 되어도 벌써 컴컴해진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오후 9시만 되어도 밤이 꽤 오래된 것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9시 정도는 아이들에게는 깊은 밤이다. 그러니까 선생이 아이들이 늦게 잔다는 것도 적어도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 10시를 넘지 않을 것 같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10시 정도면 초저녁이니 옛날로 보면 더 늦게 잔다고 하겠다.
아무튼 선생의 말을 잠만 자지 말고 열심히 독서하라는 말로 보아도 되지만, 요즘말로 하면 늦게까지 텔레비전이나 스마트 폰 너무 오래 보지 말고 책 좀 읽으라고 하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선생의 속뜻은 독서할 시간을 많이 가지라는 의미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경계한다.

 

〔13〕독서할 때 서로 돌아보며 잡담하는 것(讀書之時, 相顧雜談)

독서 할 때 서로 돌아보며 잡담한다는 것은 여럿이 함께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여럿이 함께 공부하는 곳이란 대개 서당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누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글을 읽게 했을 것이다.
이걸 보면 오늘날 학교 교실에서 담임교사가 책을 읽게 하거나 토론이나 토의를 위해 어떤 텍스트를 미리 읽어보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럴 때 그걸 읽지 않고 잡담하면 되겠는가? 따라서 이런 일을 금하는 것은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 일이다.

내 아이이게 무얼 읽힐까?

그러니 독서 자체를 반대할 사람은 없겠다. 문제는 무얼 읽느냐이다. 선생이 독서를 강조했다고 해서 지금의 입장에서 독서를 말하면 좀 문제가 있다. 이점을 좀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선생이 독서에 대해 얼마나 강조하느냐 하는 점은 『격몽요결』에 「독서장」라는 글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선생은 여기서 독서를 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배우는 자는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하여 외부의 사물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이치를 연구하고 선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할 길이 분명하게 눈앞에 있어서 진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길에 들어가는 것은 이치를 연구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은 독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성현들이 마음 쓴 자취와 선을 본받고 악을 경계하는 것이 모두 책이 있기 때문이다

(「독서장」).

 

결국 독서란 선한 이치를 연구하기 위함이며, 그 이치를 알아야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이치는 성현들이 남긴 자취에 있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선생은 무엇을 읽어야 할지 여기서 밝히고 있다. 그 독서의 순서는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예경』, 『서경』, 『역경』, 『춘추』과 송 대 성리학자들이 남긴 글을 읽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모두 유교경전이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읽는 것과 차이가 있다. 이것들은 지금 우리가 의무적으로 읽어야 할 책은 아니다. 그냥 하나의 고전으로서 읽어야 할 책들이다. 더구나 이 책들을 어린이들이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다. 이것을 어린이들의 수준에 맞게 발췌하여 재해석해서 풀이해주는 것은 몰라도 원전 그대로 절대로 읽힐 수 없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사서(四書)는 몰라도 오경까지 통달하기는 매우 벅차다.

오늘날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들은 대개 권장도서 목록이라 하여 게시하고 있는데, 이것도 합당한지 의문이다. 선정위원의 전공이나 능력을 감안할 때 그렇다. 영역별 주제별 도서가 무척 많기 때문에 학부모들도 선정해 골라주기에는 매우 벅차다. 게다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 좀 많은가? 지금 출판 시장은 어른들이 책을 잘 읽지 않으니까 어린이들을 위한 책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읽든 안 읽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입소문이나 남의 말을 듣고 책을 사주니까 그렇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아닌지는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아이의 수준에 맞는 책이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왜 책을 읽어야 할까?

독서의 필요성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해왔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말하면 식상할 것이다. 해서 남들이 말하는 것은 생략하고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말해보려고 한다.
선생은 책을 읽는 이유를 선한 이치를 탐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것에만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이요, 즐거움을 얻거나 위로를 받기 위해서 읽기도 한다. 그런 것을 위해 독서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것 외에 책을 읽는 이유가 또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필자가 살아오면서 해 온 독서의 이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물어보기 위해 책을 읽는 일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물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크게는 세상이 왜 이렇게 부조리 한지, 내세는 있는지,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지, 리더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 행복하게 사는 것이란 어떤 삶인지,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건강하게 살려면 무얼 먹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제의식을 갖고 독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물음이 진지할수록 진지한 답을 얻을 수 있고, 건성으로 물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그 답을 쉽게 얻으면 쉽게 잊어버리고 힘들고 고생해서 얻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이처럼 독서는 물음의 답을 찾는 과정이다. 바쁘고 젊을수록 더 물어야 한다. 필자도 소싯적에 큰 물음을 갖고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답을 깨닫고 얼마나 기뻤던지 나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춘 적이 있다. 독서의 기쁨은 그런데서 오고, 그래서 책을 더 읽게 된다.
나이가 들면 직장에서 은퇴하고 몸도 쇠하고 할 일이 없어 자칫 뒷방 늙은이로 취급받기 일쑤다. 이럴수록 깨달음을 통한 지혜가 있어야 노후가 빛날 수 있다. 깨달음이란 사색을 통해서 얻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독서를 통해서 얻기도 한다. 책의 저자는 별 생각 없이 말했는데도, 독자가 어떤 문제를 두고 갖은 고민했다면 저자의 사소한 말 때문에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것도 독서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어떻게 읽을까?

독서의 방법에 대해서 쓴 책이 많다. 옛날 사람이 쓴 것도 있고 요즘 사람들이 쓴 것도 있다. 그런 것을 참고하면 되겠기에 여기서 그걸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격몽요결』에서 말한 선생의 방법을 소개하면 이렇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하나의 책을 숙독하여 그 의미를 다 깨달아 꿰뚫어서 의문이 없어야 한다. 그런 뒤에 다른 책을 읽어야 하고, 많이 읽기를 탐하거나 빨리 얻으려고 이 책 저 책 섭렵하지 말아야 한다

(「독서장」).

선생은 다독보다 정독을 권장했다. 도덕적 지식을 구하므로 이렇게 권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내용에 따라 다독할 때도 있고 정독할 때도 있다. 그러니 어느 한쪽에 매달릴 필요는 없겠다.
여기서 좀 더 창의적으로 상상력을 계발하는 독서법을 소개해보겠다. 예전에 아이들에게 많은 써 먹은 방법을 응용하는 것인데, 가령 이야기의 결말로 끝맺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상상해 보라는 식이다. 그냥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묻는 방식이다.

더 나아가 흥부와 놀부가 훗날 어떻게 살았는지, 나무꾼과 선녀가 각각 어떻게 살았는지 묻는 방식에서 좀 더 진행해 작가의 의도를 묻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왜 콩쥐 팥쥐 이야기에는 아버지의 역할이 빠져 있는지, 해와 달이 이미 있었는데 오누이가 호랑이를 피해 하늘에 올라가 해와 달이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등을 따져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생각해보는 것 등이 그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얼마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럴 듯하게 인과관계가 연결되게 말하면 최상이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나 행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