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軍政)을 개혁해야한다


군정(軍政)을 개혁해야한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백성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섯 가지 사항을 제시했는데, 맨 마지막으로 군사와 관련된 정치를 제시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군정(軍政)을 개선하여 안팎으로 방비를 굳건히 해야 한다.  (改軍政, 以固內外之防.)”

 

만언봉사⌋는 율곡이 1574년에 지어 올렸기 때문에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 18년 전의 일이다. 선조가 이때부터 율곡의 제안에 따라 군정(軍政)을 개혁했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발생하였더라도 경복궁이 불타고 임금이 압록강 부근까지 도망가는 사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율곡은 군정의 개혁에 대해서 대략 4가지 사항의 문제점을 나열하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장수들이 병사들을 착취한다.

2)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

3)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

4)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

 

이하 각 항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장수들이 병사들을 착취한다.

율곡은 우리나라 법제에 결함이 많다고 하면서 다음 사항을 지적했다.

 

“(법에는)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 등의 벼슬을 설치해 놓고 그들이 먹고살 녹봉은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병사(士卒)들을 통하여 생계를 해결하고 있다. 변방의 장수들이 병사들을 착취하는 폐단은 여기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국법이 느슨해지자 탐욕과 포악한 짓이 더욱 성행했다.”

 

또 장수를 뽑을 때도 공정하게 선발하지 않고 뇌물을 통해서 장수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장수가 된 사람들은 자격이 미달된 사람들이 많아, 병사들을 도구 삼아 착취하고 그 돈으로 더 높은 자리로 출세하는 것만 신경을 썼다. 국방은 염두에 없었다. 율곡은 그 사람들이 어떻게 현장에서 착취를 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병졸들 가운데 근무가 힘들다고 여겨 대신 면포(綿布)를 바치고 면제받으려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장수는) 기뻐하면서 그것을 허락한다. (중략) 사람이 목석이 아닌 이상 누군들 자신을 아끼지 않겠는가? 면포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받은 자들이 자기 집에 편히 누워있는 것을 보면, 부러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고 그들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병역 근무를 면제받은 사람들이 늘어나 수비를 해야 할 진(鎭)과 보(堡)가 비게 되면, 상부에서 조사 나올 때 근처에 사는 백성들을 꾀어서 가짜로 점호(點呼)를 대신 받게 한다. 지역을 순시하며 검열하는 관리는 그 숫자만을 조사할 뿐이니, 그 누가 진짜와 가짜를 따지겠는가?”

 

실지로 나라를 지켜야할 병사들이 제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병사들은 군역(軍役)에 징발될 양인들이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군역에 차출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지면 뇌물을 주어서라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장수들은 그것을 봐주고 뒷돈을 받았던 것이다. 그 돈으로 장수들은 자기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어서 율곡은 그러한 폐습이 어떻게 백성들의 안위를 위협하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복역을 면제받는 것이 비록 편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대신하는 면포를 마련하는 일도 어렵다. 그래서 병역 근무에 여러 번 걸리면 집안 살림이 바닥나 지탱할 수가 없어, 도망치는 자들이 계속 생겨난다. 그 다음 해에 장부에 있는 숫자대로 병역 근무를 독촉하면, 해당 고을에서는 도망간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서 한 사람을 대신 응하도록 하고, 그 사람이 또 도망가면 그 친척의 친척에게까지 근무를 하도록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병역근무를 담당하는 백성들은 피해가 커지는 것이다. 반대로 뇌물로 장수가 된 뒤에 병사들을 쥐어짜 뇌물을 거둬들인 자들은 부자가 되어 처첩(妻妾)을 두고 생활하며 또다시 권문세가에게 뇌물을 바쳐 더 많이 해먹을 수 있는 높은 자리로 승진을 꾀한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율곡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 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규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모든 병영(兵營)·수영(水營)·진(鎭)·보(堡)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고을의 장부에 올라 있는 것 이외의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변방 장수의 양식으로 넉넉하게 제공해야 합니다. 만약 그 고을의 곡식만으로 부족하면 이웃 고을의 곡식을 거두어서라도 반드시 변방의 장수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장수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착취를 하고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율곡은 지적하고 개선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생계가 가능하게 한 뒤에는, 조정에서 법을 엄격하게 정하여 장수들이 병사들로부터 한 톨의 쌀이라도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변방 군대의 검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개선책을 제시했다.

 

“검열할 때는 단지 군사들을 호명하여 부재자의 유무를 조사하는 일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무기 상태를 검열하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시험해서, 군사들의 훈련이 잘되어 있는지 못한지를 가지고 지휘관의 성적을 매겨 보고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전처럼 재물을 받고 병사를 풀어놓아 보냈다가 발각되면 뇌물죄로 다스리게 하십시오.”

 

당시 변방의 장수들은 생계를 위해서도 백성들로부터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수들은 허위 근무자 명단을 만들어서까지 뇌물을 받았으니 국방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주고 국방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깝게는 국방을 튼튼히 하는 일이고 멀리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2)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

 율곡은 병사들의 근무지가 자기 고향에서 너무 먼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보았다.

 

“(조정에서는)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의 병사들을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근무하게 하지 않는다. 가는 데 며칠이 걸리는 곳에 보내기도 하고, 혹은 천리 밖으로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그곳의 풍토에 익숙지 않아 병에 걸리는 자들이 많다.”

 

그는 병사들의 근무지가 자기가 살던 곳에서 매우 먼 곳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는데도 시일이 걸릴 뿐만 아니라, 병에 걸리는 자들도 많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율곡은 병사들이 현지에 있는 “장수의 학대에 떨고, 또 그 지방 토박이 병사들의 횡포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객지에서 추위와 고통을 겪고 굶주리는 것과 배를 채우는 것도 일정치 않는데, 남쪽지방 출신 군인으로서 북쪽 국경에서 근무를 서는 자들의 경우는 고생이 더욱 심해, 여위고 병들어 몸도 가누지 못하여 얼굴빛은 제 색깔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이 적군을 만나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고 하였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내세울 경우 비용도 많이 든다. 그 점에 대해서 율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황해도 기병으로 평안도에 가서 경비 근무를 서는 사람의 경우, 그 군역을 대신할 사람 한 명을 보내는 비용이 면포 30필∼40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 정도의 면포라면 시골에 사는 백성 몇 가구가 생산해야 하는 양이다. 한 명이 가면 반드시 몇 가구가 파산을 하게 되니, 어찌 궁지에 몰리거나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무지가 너무 멀어 발생한 문제점이다. 그래서 율곡은 해결책으로, 군사 요충지 주변에서 군역을 담당할 병사들을 모아야 한다고 하였다.

 

“전략상 요충지에서 경비근무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고을 출신의 병사들을 모아서 거느려야 한다. 만약에 그 고을 출신의 병졸이 부족할 경우에는 인근 마을에 배정해서 차출해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전략상 요충지에서 복역할 때는 그에게 부과되는 여러 종류의 부역을 모두 폐지하고, 오직 요충지에서 방비하는 군역만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먼 곳에 와서 부역하는 수고로움이 없도록 하는 한편, 순번을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쉬도록 해야 한다.”

 

율곡은 위와 같이 요충지 인근의 인력을 활용할 것을 건의하고 동시에, 국경지방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만약 국경의 경비가 허술해질까 걱정된다면, 국경의 수령들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면 된다. 그리고 3개월에 한 번씩 시험을 보아 화살을 많이 적중시키는 자는 상을 후하게 주고, 두 번 일등을 차지한 자는 그 가족의 부역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 만약 다섯 번이나 일등을 차지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군졸의 경우는 군관(軍官)으로 특별히 임명해야 한다.”

 

요충지 인근의 백성들에게 군사 기술을 가르쳐 활용하는 방안이다. 3개월 마다 시험을 봐서 잘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거나 부역을 면제해주고, 그 중에서도 더욱 잘하는 자들은 군관으로 발탁을 하도록 건의하였다. 노비가 만약에 그러한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천민 신분을 벗어나게 해줄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준비를 한 뒤에, “만약 적이 국경을 침입한다면 사람들은 제각기 스스로 지킬 것인데, 누가 힘써 싸우지 않겠는가?”하고 물었다.

 

 

3)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

조선시대에 양반과 천민을 제외한 평민 성인 남자, 즉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良人)은 두 가지 부역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병역의무인 군역(軍役)이고 다른 하나는 일시적으로 토목공사나 물자 수송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이다.

율곡은 이전에 ⌈동호문답⌋에서 이러한 부역이 공평하지 않게 운영되고 있다고 ‘역사불균(役事不均, 부역이 고르지 않음)’의 폐단을 지적한 바 있다.

 

“(관청에서는) 지금의 이른바 정군(正軍, 정병正兵이라 칭하기도 함)·보솔(保率, 정병이 거느리던 병사)·나장(羅將)·조례(皀隸) 등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당번으로 세우기도 하고, 2번으로 나누어 세우기도 한다. 혹은 3번, 6번, 7번까지 거듭 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자는 그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도망쳐버리고, 어떤 자는 조금 편안한 생업을 얻어 자신을 보전하고 있다. 다 같은 백성인데 어찌 서로 간에 차별을 두어 괴로움과 즐거움이 같지 않게 하는가?”

(이종란 역해, ⌈동호문답⌋, 율곡연구원, 2016년 참조)

 

이러한 폐단에 대해서 그는 ‘해당 관청이 잘 판단해서 규칙을 정하여 순번이 많은 자는 횟수를 줄이고 적은 자는 늘여야 한다. 모든 부역을 순번대로 번갈아 쉬게 하고 골고루 근무하게 하여, 누구는 너무 괴롭고, 누구는 너무 편안한 폐단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면 도망간 백성들이 다시 모이고, 권세 있는 집안에 스스로 노비가 되어 들어가 부역을 피하는 잔꾀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공평하지 못한 부역의 의무를 시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부역제도에 대해서⌈만언봉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양역(良役, 양인들의 부역, 즉 요역과 군역)은 그 명목이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서도 조례(皁隷)와 나장(羅將)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큰 고역을 치르고 있다.”

 

매우 많은 명목의 부역 중에서 군역에 해당하는 조례(皁隷)와 나장(羅將)의 직책에 부조리가 많다는 것이다. 조례(皁隷, 혹은 皀隸)는 서울의 각 관아에서 부리던 하급 군관을 말한다. 나장은 나졸(羅卒)이라고도 하는데 병조에 속한 하급 직원이다. 그런데 일반 평민이 교대로 그 직책의 군역을 담당한다.

율곡의 지적에 따르면 실지로 그런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평민은 대신 면포를 납부한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부조리가 있다고 한다.

 

“(조례나 나장이) 소속된 관아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이 대신 군역을 치르도록 처리해 놓고 갑자기 저리(邸吏, 서울에 파견된 향리)를 독촉하여 대역의 빚을 갚게 한다. 이 때 저리(향리)는 이자를 따져서 바친 뒤에 거기에 든 기타 비용까지 계산하여 당사자에게 그 세 배를 받아낸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언제나 세 사람의 군역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면 관행대로 일족에게서 그것을 받아낸다.”

 

조선시대에는 일곱 가지 종류의 천인(賤人)들이 있었다. 직업으로 구분하면 중, 무당, 백정, 노비, 기생, 상여꾼 그리고 신발 만드는 기술자(鞋匠)였다. 그런데 관청의 경호나 경비 등 잡일을 하는 조례(皁隷)나 죄인의 압송이나 매질을 담당하는 나장(羅將)도 그런 천인에 속했다.

그래서 일반 평민이 서울의 조례나 나장이라는 직책의 군역을 맡게 되면 실지로 그 일은 하지 않고 면포만 대신 냈다고 한다. 그런데 중간에서 향리가 그 일을 주선하면서 3사람분의 면포를 받아간다.

이러한 폐단에 대해서 그 대책으로 율곡은 다음과 같이 선조에게 제안하였다.

 

“이른바 조례(皁隷)나 나장(羅將) 등은 제각기 소속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이름을 다 폐지하여 모두 보병으로 바꾸십시오.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납부하는 면포는 병조(兵曹)에 직접 납부하게 하고, 병조에서는 각 관청에서 부역을 치르는 사람의 수를 헤아려 면포를 지급한다면 그러한 폐단이 사라질 것입니다. 저리(邸吏)는 불시에 독촉받는 일을 면하게 될 것이며, 민간에서는 세 배나 되는 가혹한 양의 면포를 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안 중 하나로 율곡이 제시한 군정의 개혁안이었다. 향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넘기지 말고 직접 중앙 관청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병조에서 직접 ‘부역을 치르는 사람의 수를 헤아려’ 면포를 받고 지급하는 일을 처리함으로써 백성들이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다음으로 ‘4)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라는 항목은 율곡이 앞서 제시한 ⌈동호문답⌋에서도 병사 관리 문제를 상세히 설명한 바 있기 때문에 별도로 장을 만들어 같이 소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