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 관리의 폐단과 해결책


병사 관리의 폐단과 해결책

 

선조 시대의 군정(軍政)에서 또 한 가지 문제점은 병사 관리가 체계적하지 못하고 병사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율곡은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했다.

“(계축년, 즉 1553년 이후) 지금 20여 년 만에 다시 군적(軍籍)을 만드는 큰 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부족한 군졸의 숫자가 계축년보다도 심하고 병역 의무자(閒丁)의 숫자 또한 계축년보다 훨씬 적다. 아무리 교묘하게 찾아 모은다 해도, 어찌 밀가루 없이 수제비를 만들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군졸을 만들어 내겠는가라는 의미임-필자) 지금 다시 샅샅이 조사해서 찾아 낸 자들은 아이들이 아니면 거지고, 거지가 아니면 양반 사족(士族)일 것이다. 실제로 아직 군역에 나가지 않은 장정이 몇이나 있겠는가? 지금 군적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금방 또 빈 장부가 될 것이다.”

 

왜 군졸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었을까? 율곡은 앞서 제출한 ⌈동호문답⌋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은 거꾸로 매달린 것보다 더 심해서, 만약 급히 구제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텅 빌 형세다. 나라가 텅 비게 된 뒤에는 눈앞에 닥친 수요를 어느 곳에서 마련하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이르고야 마는 이치다. (관청에서 새롭게 군적을 만들 때) 군인의 수를 줄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 그만큼의 군인이 있어야 쓸 때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청에서 가끔 인구조사를 하여 군적을 만드는데 그 군적은 허위로 사병수를 부풀려 만든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너무 곤궁하여 각 지방의 공동체, 즉 농촌 마을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청에서는 허위로 사병을 늘린 뒤에, 그 사병들의 몫에 해당하는 면포를 그 일족에게 부과하여 징수한다. 그래서 율곡은

“만약 급하게 군대를 출동하는 일이 있게 되면, 친척들이 창을 메고 나서지 못할 것이고, 군포로 받은 면포를 가지고도 끝내 사람을 모집하지 못할 것인데,(그것은 마을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필자) 무엇 때문에 허위의 장부를 만들어 백성들이 실제로 피해를 당하게 하는가?”

라고 물었다.

 

이렇게 전쟁이 나도 농촌마을에서 병사를 징집할 대상이 없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율곡은 다음과 같이 ‘일족절린(一族切鄰, 당사자가 없을 때 친척과 이웃에게 세금을 대신 부과하는 일)’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가령 지금 여기에 세금 때문에 도망친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 때문에 반드시 그 친척과 이웃에게 그의 세금을 거두고, 친척과 이웃이 감당할 수 없어 또 도망치면, 다시 그 친척의 친척과 이웃의 이웃에 부담시킨다. 이렇게 한 사람이 도망치면 재앙이 수천 가구까지 파급되어 그 형세는 반드시 백성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된 뒤에야 그칠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10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10가구도 없고, 작년에는 1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한 집도 없게 되었다. 마을이 쓸쓸해지고 민가의 밥 짓는 연기가 아득히 끊어져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만약 이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의 근본이 뒤집어져 나라가 존립하지 못할 것이다.”

 

연좌제 같이 마을 안에서 한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주위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일족절린(一族切鄰)의 폐해 때문에 지방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관청에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동책임을 물었던 것은 범죄를 미리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없애버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더 많은 범죄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면 근무지에서 근무해야할 사람들이

 

“일부러 도망가 전부 군역을 기피하여 군인의 수가 끝내 한 사람도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동호문답⌋)

 

율곡은 이렇게 대답한다.

“백성이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모두가 절박하여 부득이한데서 나온 것이다. 저들이 비록 간사할지라도 만약 생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누가 떠돌아다니는 고통을 기꺼이 취하겠는가? 만약 일족절린(一族切鄰)의 관습으로 피해를 당할 근심이 없고 자신의 군역만 책임지게 된다면, 백성들이 삶을 편안하게 여기고 생업을 즐기는 것이 마치 물에 빠지고 불에 탄 고통에서 빠져나온 것과 같을 것이다. 어찌 모두 군역을 기피할 이치가 있겠는가?”

(⌈동호문답⌋)

 

그래서 우선 율곡은 이러한 ‘일족절린’의 폐해를 과감히 없애고 현실에 입각하여 정확한 군적을 만들자고 제한했다.

“군적(軍籍)을 만드는 일을 실제의 군인 수를 확보하는 데 힘써야지 억지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 병역 의무자(閒丁)라고 할지라도 15세가 안 된 소년들은 이름과 나이만을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해당되는 나이가 되면 군적에 편입해야한다. 날품팔이나 거지는 모두 군적에서 삭제해야 한다.”

(⌈만언봉사⌋)

 

동호문답⌋에서도 군적을 정확히 만들어야 한다며, 이렇게 상세하게 제안했다.

“마땅히 각 고을에 명령을 내려 장부에 올라 있지 않은 장정을 찾아내 모자라는 군사에 충당하고, 장부에 올라있는데도 입대하지 않은 인원을 모두 차출해 정규군에 보충해야한다. 나아가 새로 설치된 부대인 위(衛)의 경우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는 자와 한역(閒役, 힘들지 않은 부역) 장부에 이름이 들어있어 관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자를 제외한 인원을 모두 찾아내어 군역에 충당해야한다. 군사를 담당한 관원으로 하여금 그 사무를 총괄하게 하여 반드시 실제의 수효를 파악하게 하면, 비록 군적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설치하지 않더라도 군적은 이미 완료가 될 것이다.

그런 뒤에 한정(閑丁, 부역을 하지 않은 장정)을 찾아내어 발견 되는대로 보충을 하고, 매번 세초(歲抄)할 때마다 지방 관청에 명하여 군적(軍籍)을 병조(兵曹)에 올리게 하고 그에 따른 장부는 해당 관청에 올리게 하여, 다만 실제 숫자만 기록하고 허위 명단은 다 지워버려야 한다.”

(⌈동호문답⌋)

 

동원 가능한 장정은 모두 정확히 차출하여 활용하고, 그렇지 못한 장정은 명단에서 제외하여 군적이 정확하게 유지되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그동안은 군적을 통해서 현상 파악이 불가능 하였던 것이다. 부조리는 바로 그러한 틈으로부터 발생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사전에 막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또 이렇게 제안했다.

“수령들에게 명을 내려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고 생활을 안정시키며 부지런히 그들의 수고를 위로하도록 하고, 장정이 생기는 대로 군적에 보충시키되, 일정한 기한을 정하지 않더라도 꼭 채우도록 해야 한다. 또 6년마다 반드시 군적을 고쳐서 갑자기 생기는 소요(騷擾)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

(⌈만언봉사⌋)

군적이 정확해야 병사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수시로 군적의 정리를 제안한 것이다. 평소에 그러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갑자기 일어나는 사태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동호문답⌋에서는 수령들이 해야 할 업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좀 더 상세하게 제안했다.

 

“만일 한정(閑丁)을 잘 찾아내어 10호 이상을 증가시킨 수령(守令)은 상을 주고, 새로 도망하는 집이 생겨 그 수효가 축소되어 5호 이상이 감소시킨 수령은 죄를 주되 파직하거나 강등시키고, 심한 자는 죄를 무겁게 주며, 늘고 줄어든 것이 같은 자는 불문에 붙이고, 3년간 고을을 다스렸으나 호구의 증가가 없는 자에게도 죄를 준다.

또 어사로 하여금 암행하게 하여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 수령의 현명함을 살피도록 한다. 만약 전과 같이 사사롭게 일족절린(一族切鄰)이 있거나 호구를 거짓으로 증가시켜 포상을 노리는 자가 있으면, 곧 뇌물죄의 법률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동호문답⌋)

 

율곡은 이렇게 실행을 하면 ‘수령들은 법을 두려워해서 마음을 다하여 백성을 보호할 것이니, 10년 못가서 백성들의 생활은 넉넉해질 수 있으며 군사의 수는 충족될 수 있다.’(⌈동호문답⌋)고 단언하였다.

그는 그래도 병사들이 부족할 경우에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안하기도 했다.

“만약 병사들이 부족하여 여러 곳의 군역에 대응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현재 자신의 차례가 되어 교대 근무를 하러 들어가는 병사들의 수를 줄이고, 그래도 부족할 때는 방비가 허술해도 큰 지장이 없는 곳의 군졸의 수를 줄이면 된다. 그래도 부족한 경우에는 남쪽 지방의 겨울철에 요충지를 방비하는 병사들의 수를 적절히 줄이고, 그래도 부족할 경우에는 면포를 바쳐 병역을 면제받는 보병(步兵)의 수를 반으로 줄여서 군사적 요충지를 방비하는 병사의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게 해야 한다.”

 

이상이 율곡이 제안한 군적(軍籍)과 병사를 관리하는 요령이며, 궁극적으로는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러한 제안을 통해서 우리는 율곡의 개혁 정신을 잘 알 수 있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군정(軍政)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복잡한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었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