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노비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율곡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로 노비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가 지적한 노비제도는 노비제도 전체가 아니라 ‘선상(選上)’이라고 하는 제도였다. 당시 관청에는 관노비가 있었는데, 지방 관청의 관노비를 일부 선발하여 중앙 관청의 관노비로 일을 하게 했다. 그렇게 선상을 통해서 중앙의 관노비가 된 사람들의 삶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노비제도 자체도 문제지만 율곡의 인식은 거기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관료이며 지식인이었던 그였지만 시대에서 오는 한계는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단지 율곡이 현실에 맞지 않고, 백성들의 삶을 옥죄는 제도는 과감히 고치자고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 관청의 노비(奴僕)만 가지고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지방에 있는 관노비들이 돌아가면서 서울에 올라와 일을 돕도록하는데 이것을 선상(選上)이라 부른다.”

 

지방 관청의 노비가 서울에 올라와 일을 하면 그 자체로 아무런 고통은 없을 것이다. 요즘에 지방의 공무원들이 서울에 올라와 근무를 하게 한다면 오히려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서울로 올라오는 가난한 관노비들이 자기가 먹을 양식을 싸 가지고 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당하는 고통이 많아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서 면포를 바치는 것으로 노역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은 단지 면포를 징수할 뿐이고, 서울로 올라 와서 노역을 치르는 공천은 한명도 없다.”(⌈만언봉사⌋)

 

서울에 머물며 근무하면서 관노비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단지 면포(綿布)를 내는 것으로 그 노역을 면제해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노비들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율곡은 관노비들이 2년은 부역을 하고 1년은 선상을 치르다, 대체로 3년이 되면 반드시 한 집은 망한다고 하였다. 집안이 망하면 유랑민으로 떠돌거나 도적이 된다. 율곡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일을 맡은 관아의 아전들이 선상 대상자를 나누어 배정하는 것도 공평하지 못하다. 비록 관노비의 수가 많은 고을이라도 뇌물을 주면 적게 배정하고, 겨우 몇 가구만 있는 고을이라도 뇌물을 주지 않으면 많이 배정한다. 지탱할 힘이 없으면 그 침해가 일족에게 미쳐, 일반 백성들까지도 고초를 당한다.”  (⌈만언봉사⌋)

 

아전들의 횡포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아전들은 관청에서 실무를 맡는 최하급의 관리다. 원래는 지방의 호족들이었으나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지방 세력을 형성하다, 조선시대에 중인계층으로 관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의 지위는 세습되었는데, 과거시험에서 문과를 볼 수 없어서 고급관리로 올라가는 길이 막혀있었다. 그들은 급여가 거의 없거나 아주 적었기 때문에 부정부패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율곡은 ⌈동호문답⌋에서 아전의 횡포를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세상의 도리가 땅에 점점 떨어지고 폐단이 날로 늘어나 교활한 관노비나 약아빠진 아전들이 온갖 물건을 사사로이 준비해 두고 관청을 우롱하고 백성을 가로막아, 백성들이 비록 좋은 물건을 가지고 와도 끝까지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반드시 자기들이 사사로이 준비해둔 물건을 대신 납부한 뒤 백성들에게 백배의 값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법이 무너지고 해이해져 금지하지 못한 것이 오래 되었으며, 나라의 비용은 조금도 늘지 못하고 민간에는 살림이 텅 비게 되었다.”

(이종란 역해, ⌈동호문답⌋, 율곡연구원, 2016, 142-143쪽.)

 

이것은 방납의 폐해이다. 그 외에도 율곡은 당시 아전들의 횡포에 대해서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단이라 하여 이렇게 소개했다.

 

“권력을 휘두른 간신들이 나라의 물을 흐린 뒤로 상하 사람들이 오직 뇌물만을 일삼고 있다. 관직은 뇌물이 아니면 승진하지 못하고 소송도 뇌물이 아니면 판결이 안 나며 죄도 뇌물이 아니면 사면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관료들이 법도가 아닌 것만 배우고, 아전들까지도 법조문을 가지고 농간을 부린다. 그리하여 백성이 온갖 물건을 관청에 납부할 때에 좋은 물건인지 나쁜 물건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많은지 적은지도 계산하지 않으며, 오직 뇌물의 등급으로 판단한다. 심지어 관청의 일개 하인이나 노비까지도 조금이라도 일 맡으면 금방 착취를 일삼는다. 이뿐만 아니라 소송이라는 중대한 일도 역시 교활한 아전의 손에 맡겨져 뇌물에 따라 옳고 그름이 가려지니, 이것은 참으로 정치를 혼란시키고 나라를 망치는 고질병이다. 지금은 권력을 휘두른 간신들이 이미 제거되고 공론이 조금은 시행되고 있어 조정에서는 옛 습속이 약간 고쳐졌다. 하지만 아전들의 간사함은 이전보다 더 심하다.” (⌈동호문답⌋)

 

이서주구(吏胥誅求)’의 ‘이서(吏胥)’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속해 있는 하급 관리를 말하며, ‘주구(誅求)’란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일을 뜻한다.

이러한 아전들에게 신상의 제도는 뇌물을 받기에 딱 좋았다. 아전들은 중앙에 보낼 선상의 대상자를 배정할 때, 마음대로 그 수를 정했다. 뇌물에 따라 배정을 조정하는 것이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일반 백성들까지 연계시켜서 선상의 책임을 전가하였다. 율곡은 그래서 임금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해당 관청에 명하시어 노비 장부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십시오. 현존하는 관노비의 수에 근거하여, 매년 남자 노비가 바치는 면포 두 필과 여자 노비가 바치는 면포 한 필 반의 총계가 얼마인지를 조사하도록 하십시오. 그 5분의 2는 면포를 관장하는 사섬시(司贍寺)에 비축하여 나라의 비용으로 쓰게 하고, 5분의 3은 각 관청에 나누어 주어 선상으로 해결하던 노역에 충당하게 하십시오. 면포가 부족할 경우에는 알맞음을 헤아려 노역하는 수를 줄이게 하십시오.”

 

먼저 관노비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고, 그 노비들이 바치는 공물의 수량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에 중앙에서 필요한 인력이나 비용을 예상하여 관노비 징발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중간에서 아전들이 멋대로 장부를 조작하는 일이 불가능해서 아전들의 횡포를 방지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계유지가 어려워서 부정을 저질러야 하는 아전도 문제지만, 각 관청에 소속된 노비의 숫자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조정도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피해를 입는 것은 선상 제도로 차출되는 관노비이며 우매한 백성들이다. 율곡은 이런 노비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정이 현실적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참고로 조선의 아전들이 그렇게 부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국가에서 봉급을 받지 못했다. 율곡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농사짓는 것을 대신할 만한 녹봉을 지급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옛날에는 관청의 아전들이 일정한 녹봉을 위로부터 받아먹었는데 지금 아전들은 따로 녹봉이 없으니, 만일 수탈을 하지 않으면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제도가 아직 완비되지 못한 것이다.”(⌈동호문답⌋)

 

아전들이 그렇게 뇌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봉급을 제공하고, 그들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 뇌물죄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율곡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이 폐단을 고치려면 모든 관료를 엄하게 단속하고 뇌물죄를 다스리는 법을 거듭 밝히며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야 한다. 그래서 조정이 숙연해지고 사람마다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해야 한다. 그런 뒤 수탈하고 뇌물을 받는 습관을 일체 금지하고, 숨기고 감춘 것을 적발하여 그 실정을 파악하고, 백성들이 호소하는 것을 허락하며 그 억울함을 살펴야 한다. 만약 아전이나 사령의 무리가 뇌물을 받았거나 수탈하여 그 사실이 발각되면, 그 수량이 베 1필 이상인 경우에는 모두 전가사변(全家徙邊)의 형률로 다스려 변방에 있는 6진의 빈 땅으로 보내 그곳을 채우도록 한다. 그러면 뇌물을 받는 습속을 완전히 씻을 뿐만 아니라, 장차 국경을 튼튼히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동호문답⌋)

 

율곡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이와 같이 노비제도를 개선하고 그러한 제도를 악용하여 뇌물을 받는 아전의 봉급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제도개혁을 부르짖었던 것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상황의 심각성 때문이었다. 그가 당시 어떻게 상황파악을 하고 있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동호문답⌋의 문장 중에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의 정치를 바꾸지 않는다면, 비록 요순 같은 성군이 있고 고요(皐陶)나 기(夔)같은 훌륭한 신하가 있다하더라도 장차 일어날 혼란을 다스리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백성들은 반드시 썩은 생선처럼 문드러지고 흙처럼 무너질 것이다. 거기다 크게 걱정할만한 것이 또 있다. 지금 백성들의 힘을 헤아려보면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숨을 할딱거리고 있는 것 같아 평일에도 버티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다가 만약에 남쪽이나 북쪽에서 외적이 침입해온다면, 장차 분명히 빠른 바람에 낙엽이 휩쓸리듯 무너질 것이다. 백성은 그만두고라도 종묘사직이 어디에 의탁하겠는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나도 모르게 통곡이 나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이미 조선 사회는 내부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