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정구


의병장 정구

 

조선시대 유학사에서 성리학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분야가 예학이다. 예는 시대의 산물로서 그 당시 사회의 삶과 문화를 반영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대학민국에서 조선시대 사회상과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예학은 어찌 보면 낡은 옷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예학 분야 연구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에 뛰어드는 상황을 비춰보면 예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선시대 양대 학파를 꼽자면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꼽는다. 성리학으로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한 이황에서 시작한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원류가 된다면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한 이이에서 시작한 율곡학파가 기호학파의 원류에 해당할 것이다. 예학으로 꼽자면 기호학파에 김장생이 있다면 영남학파에는 정구를 들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박세채의 글 중에 정구와 김장생을 비교한 내용이 나온다.

“계해년(1623) 초에 신흠(申欽)이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지를 때 정경세(鄭經世)가 찾아왔다. 신흠이 마침내 공의 평소의 학문의 깊이를 물으면서 말하기를, ‘김사계(金沙溪 김장생)와 어떠한가?’ 하니, 경세가 답하기를, ‘비록 자세히는 모르나 장점과 단점을 서로 맞추면 서로 같을 것이다.’ 하였다.”

신흠이 정구의 신도비를 적을 적에 영남학맥을 계승한 정경세를 찾아 정구에 대한 여러 일화나 내용을 자문하였을 것이다. 예학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있지만 정경세가

“비록 자세히는 모르나 장점과 단점을 서로 맞추면 서로 같을 것이다.”

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정구가 이황과 조식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이황과 조식 외에 우계 성혼을 들고 있다.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 보는 사람마다 신동이라 일컬었다. 한창 젊었을 때에 포부가 매우 커서 우주간의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산수(算數),병법(兵法),의약(醫藥), 풍수(風水)에도 모두 통달하였다. 처음에 오건(吳健) 덕계(德溪)에게 배우고, 또 이황ㆍ조식ㆍ성혼 세 선생한테 가서 배웠는데, 모두 마음으로 허여하였다.”

정구는 성주에서 출생했는데, 이곳은 남명의 탄생지와 멀지 않아 인근에서 남명의 제자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정구는 13살 때 남명의 제자인 오건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는데 그 재주가 뛰어났고 특히 주역을 금새 익혔다고 한다.

정구가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한 내용 중에도 주역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역시 박세채의 기록이다.

“공은 어렸을 때에 뛰어난 천재여서 13세에 학업이 이미 이루어지니, 오건이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어 시를 주어 격려하였다. 18세에 《주역》을 읽어 대의를 깨달았다. 이에 의문되는 부문을 표기하여 이황에게 나가 질문하고 장차 머물면서 배우려고 하였는데, 만나서 질문하기에 이르니 의심난 부분은 이황도 이따금 또한 알지 못하므로 공이 드디어 하직하고 돌아가려고 물러 나오다 조목(趙穆)을 만났다. 조목이 묻기를, ‘어째서 갑자기 돌아가는가?’ 하니,

공이 그 이유를 갖추어 말하자 조목이 꾸짖기를, ‘역학(易學)이 본래 알기가 어려운 것인데, 선생이 비록 의심나는 곳을 일일이 투철하게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군이 나이 어린 사람으로 선생의 도덕을 듣고 수백 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왔는데, 그 보고 느낀 흥기(興起)하는 바가 어찌 한갓 한두 군데 문의(文義)에 있겠는가.’ 하니, 마침내 한 달 동안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이황이 일찍이 사람에게 답하는 글에, ‘정구라는 자가 찾아왔는데, 또한 심히 영리하고 민첩하다. 다만 그 민첩한 곳이 도리어 병통이 될까 염려된다.’고 하였으니, 대개 이 때문이었다.”

이황과 조식 두 스승에 대한 정구의 생각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이 신흠의 신도비에 나온다.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자 비로소 소명(召命)에 나아갔는데 선조(宣祖)께서 친히 인견(引見)하시고 묻기를, ‘그대의 스승이 이황과 조식인가?’ 하고, 아울러 두 사람의 기상과 학문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이황은 덕량이 굉후(宏厚)하고 조행(操行)이 독실하며, 조식은 기국이 엄정하고 재기가 호매(豪邁)합니다.’고 하였다.”

정구가 예학에 밝은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주역에 정통했다는 것은 덜 알려진 바이고 그가 국난에 처해 몸소 전장에 뛰어든 의병장이라는 사실은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구가 서울에 침범하여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피난하자 선생은 의병(義兵)을 창도(唱導)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각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 정예병을 소집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관북(關北)의 토병(土兵)이 왜적에게 붙어 혼란을 선동하여 선조의 친형인 하릉군(河陵君)이 깊은 산 속에서 궁지에 몰려 목을 매어 죽자,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서 통분한 나머지 꾀를 써서 적을 사로잡고 하릉군의 시신을 찾아 손수 직접 빈염(殯殮)한 뒤에 행재소(行在所)에 보고하니, 선조께서 몹시 애절하게 느끼고 선생을 통정 대부로 승진시키도록 명하여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무기를 제조하고 둔전(屯田)을 확장하고 군사 훈련을 엄격하게 실시하고 굶주리는 자들을 구제하여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여러 가지 정무(政務)를 모두 제대로 거행하였다.”

정구가 학문만 하는 선비가 아니라 정무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유자라는 점은 그의 예학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신흠이 정구를 평한 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아! 사현(四賢)이 세상에 나오자 정학(正學)이 밝아졌는데, 그것을 절충(折衷)하여 집성(集成)하는 일은 오직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이 그렇게 해내신 분이고, 선생은 그 분을 친히 보고 알아서 그 단전(單傳)을 얻었다.

주 부자(朱夫子)를 모범으로 삼고 이 선생을 지남(指南)으로 삼아서, 내면에 축적한 식견이 넓고 배양(培養)한 지기(志氣)가 깊었으므로 거의 자신을 완성하고 나아가 남을 완성하여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었으나, 말단 관직과 고을 수령만을 지냈으니 어찌 크게 시행할 수가 있었겠는가.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 이후로는 세상이 극도로 혼암(昏暗)하였으므로 선생이 죄에 걸려들지 않고 면한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선생이 전후로 올린 소장(疏章)은 천백 년의 후대에까지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고 국조(國祚)를 영원토록 이어지게 하였던 것이니, 선생 같은 분은 세운(世運)의 성쇠(盛衰)에 관계가 있었던 분이 아니겠는가. 황도(黃道)가 다시 밝아지고 태양이 제 빛을 되찾은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선생의 도(道)야말로 모범으로 삼아 본받을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늘이 정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세상의 이른바 유자(儒者)라는 사람들이 높은 자는 한 가지 절개에 치우치고 낮은 자는 비근(卑近)한 데에 빠져드는데, 능히 전체적인 대용(大用)에 힘을 써서 도를 보위한 공로가 있는 자는 오직 선생뿐이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