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와 성혼, 지우(知友)이자 라이벌


 

이이와 성혼, 지우(知友)이자 라이벌

 

이이는 1536년 생이고 성혼은 1535년 생으로 성혼이 한 살 더 많다. 양현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우다. 문과를 보지 않은 성혼이 관직에 나오게 되는 데에는 이이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동국18현으로 문묘에 종사될 때에도 양현은 공동운명이었다. 같이 들어갔다가 같이 퇴출되고 그리고 다시 같이 들어갔다.

양현은 기호학파의 두 영수로 영욕을 같이 한 바가 있다. 조익(趙翼)이 양현을 변호하며 올린 상소에도 이런 저간의 사정이 드러난다.

“두 신하의 현부(賢否)는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이(李珥)를 모함한 자는 정여립(鄭汝立)이요, 성혼을 모함한 자는 정인홍이었습니다. 두 신하의 문인으로 저명한 자는 조헌(趙憲)ㆍ오윤겸(吳允謙)ㆍ이귀(李貴)ㆍ황신(黃愼) 등이고, 그 밖에도 행실을 법도 있게 한 자와 벼슬살이를 청렴하게 한 자 및 전야(田野)에 은거하면서 몸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하여 평생을 마친 자도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에 와서 볼 때 여림과 인홍의 말이 옳습니까, 조헌과 김장생의 말이 옳습니까. 유직(柳稷)의 논의는 바로 여립과 인홍이 남긴 말을 조술(祖述)한 것에 불과합니다.

영남 한 도로 말씀드리더라도, 처음엔 한 도의 논의가 두 사람을 배척했는데 똑같다가 그 후에 점점 깨닫는 자가 있었으니, 대개 정구(鄭逑)는 두 신하를 유현(儒賢)이라고 하였으며, 장현광(張顯光)은 높이 사모하여 다른 말이 없었고, 정경세(鄭經世)는 처음에는 그 지방 풍속을 따라서 경멸하고 멸시하기를 면치 못하였으나 그 뒤에 깨닫고, 항상 높이 칭송하였으니, 그 높이는 말을 신도 또한 들었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그 중에서도 어질다는 이름이 있는 자는 모두 두 신하를 사모하였고, 다만 심하게 미혹하여 빠진 자만이 오히려 변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기호학파는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조선 후기의 정계와 학계에서 긴장과 갈등관계를 유지했다. 애초에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이 되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할된다. 노소 분당은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이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지만 노론은 율곡과 사승의 연원을 갖고 있다면 소론은 성혼에게서 그 학문적 연원을 찾는다.

애초에 양현을 문묘 종사하는 일에 관한 송시열(宋時烈)의 기록이 <연려실기술> ‘성혼’ 조에 나온다.

“인조반정(反正) 초에 유순익(柳舜翼)이 맨 먼저 율곡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청을 경연에서 발론하니, 녹당 이민구(李敏求)가 뒤이어 아뢰기를,‘이 일은 지금 이미 늦었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해주(海州) 유생 윤홍민(尹弘敏)이 사계(沙溪)를 와서 보고 말하기를, ‘저희들은 율곡의 종사를 청하려고 왔습니다.’ 하니, 사계가 ‘좋다.’ 하고 말하였다.

조금 뒤에 다시 와서 뵈니 사계가, ‘너희들의 하는 일이 어찌 되었느냐?’ 하니, 홍민이 말하기를, ‘판서 오윤겸(吳允謙)이 저희들의 말을 듣고 바로 월사(月沙 이정구) 댁으로 가서 말하기를, 오늘 우계를 함께 거론하지 않으면 훗날에는 도모하기 어렵소. 공은 왜 해주 유생을 불러서 말하지 않소. 하여 월사가 저희들을 불러 오 판서의 뜻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자 사계가 탄식하기를, ‘일은 어렵게 되었다.’ 하였다.

그 후 을해년에 나의 종형(從兄)이 관학(館學)에서 발론하였는데,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은 율곡만의 단거론(單擧論)을 극력 주장하고 판서 이정백(李靜伯)은 우계, 율곡의 병거론(幷擧論)을 극력 주장하므로 종형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중의 논의까지도 좋지 않다고 여겨 동춘에게 의론하니, 곧 말하기를, ‘이와 같은 큰일을 어찌 사문(斯文)의 어른께 여쭙지 않는가.’ 하였다. 이에 연산(連山)으로 사람을 보냈더니, 신재(愼齋 김집(金集))가 회보하기를, ‘우계는 율곡에 비해 실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 종사한 제현(諸賢)에 비한다면 어찌 우계가 못하다 하겠는가.’ 하여, 그 논의가 드디어 정해졌다.”

종사와 관련한 실상을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업적과 학문으로 보건대 이이가 성혼에 앞서는 것으로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현의 고하를 따지는 일이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님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이긍익은 종사에 관한 송시열의 이 기록 바로 아래에 소론의 영수가 되는 윤증이 평한 다음의 글을 기록해 두었다.

“선현의 고하(高下)는 스스로 사림(士林)의 정론이 있으니, 종사(從祀)의 청으로 말하면 또한 우계를 율곡의 다음으로 쳤으니, 자손들이 어찌 사의(私意)를 그 사이에 둘 수 있겠는가.”

잘 알려진 것처럼 선조에게 성혼을 추천한 이가 바로 이이이니, 성혼을 제일 먼저 알아준 이는 틀림없이 이이다. 그렇지만 이이가 당시의 명유들을 평하는 <석담일기>의 직필은 막역지우를 논하는 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이가 일찍이 공에게 이르기를,

‘군은 7번이나 임금의 명을 받았는데, 어째서 한 번도 사은(謝恩)하지 않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어디 나같이 병들고 무능한 자를 부른 때가 있었는가.’

하였다. 이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인재는 각기 그 때를 따르게 마련이다. 소열(昭烈 유비의 시호) 때에는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이 으뜸가는 인물이었으나, 만약 그를 공자ㆍ맹자와 동시에 태어나게 했다면 공명이 어찌 제일가는 인물이 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세상에 마침 인물이 적고 보니, 소명(召命)이 어찌 그대에게 내리지 않겠나.’

하였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대면한 자리라면 거북할 법도 한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이이이고 보면 역시 이이이고, 이 말을 듣고 거북해했다는 성혼의 뒷말이 없으니 성혼이 역시 성혼이다.

<우계행장>에 이이가 성혼을 평한 내용이 나오는데,

“만약 도달한 견해에 대해 말하면 내가 약간 낫다고 하지만 독실한 지조와 행동에 있어서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

는 말은 허언이 아닐 듯싶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