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이기설(李基卨)


효자 이기설(李基卨)

 

이긍익이 <연려실기술> 유현(儒賢) 조에 이황을 첫 번째로 소개하고 이어서 이이를 배치하여 두었는데, 이기설 또한 유현 조에 나온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참봉 이계장(李繼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掌令) 이언침(李彦忱)이고, 아버지는 이지남(李至男)이며, 어머니는 정원(鄭源)의 딸이다.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이기설의 스승인 박지화는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암(守庵). 아버지는 형원(亨元)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유·불·도 등에 통달하였다.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수암유고』·『사례집설(四禮集說)』 등이 있다.

박지화는 유학 보다는 선학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택당 이식이 박지화를 평한 글이 있다.

“박지화는 서족(庶族)으로 태어나 널리 배웠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또한 理學을 잘 한다는 이름이 있었고 고청(孤靑) 서기(徐起)는 천인(賤人)으로 경사<經史)를 밝혀 학자들에게 교수하였다. 두 사람이 다 같이 산수를 좋아하였고 명산에 은거하였으니 모두 화담 문도(門徒)의 조류(潮流)이며 또한 자못 괴이한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박지화를 말하여 신선이 되어 갔다고 하니 화담의 기풍을 배운 사람은 대개 이와 같다.”

<국조인물고>에 유몽인이 지은 박지화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학관(學官) 박지화(朴枝華)의 자(字)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수암(守菴)이다. 일찍이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수업하였고 젊어서부터 명산(名山)을 유람하며 소나무 잎만 먹고 곡식을 먹지 않았다. 학자(學者)들과 같이 산사(山寺)에서 머물면서 한 달이 되도록 한 벌의 베옷만 입은 채 낮에는 책을 베개로 삼아 자고 15일 밤은 왼쪽으로, 15일 밤은 오른쪽으로 누워 잤는데, 베옷이 새로 다린 것처럼 구겨지지 않았다.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불가(佛家)의 세 가지 학문에 모두 공부를 깊이 하였고 특히 예서(禮書)에 정밀하고 해박하였다. 그 문장은 시(詩)와 문(文)이 모두 고상하고 뛰어났는데, 일찍이 부마(駙馬)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에 대한 만사(挽詞)를 지었을 적에 시인(詩人) 정지승(鄭之升)이 마지않고 칭찬하기를, ‘그 사람은 가문의 지위는 비록 낮지만 문장가의 지위는 가장 높다.’고 하였다. ……일찍이 금강산(金剛山)에서 노닐었는데, 그때 나이 70여 세였으나 몇 발 정도 떨어진 사이를 건너 다녔고 발검음이 나는 것 같았으므로 산중에 중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는가 하면, 도성 안에 살 적에는 문을 닫고 온종일 방안에 꿇어앉아 읊조렸으므로 마치 산림(山林)처럼 적막하였다.”

이기설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586년(선조 19) 효행과 순덕(純德: 도덕을 빠짐없이 행함. 또는 순수한 덕)으로 남부주부에 특별 임명되고, 다시 청산현감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의 뜻을 거역하지 못해 그 해 겨울 무주현감을 거쳐 이듬 해 송화현감으로 나갔다.

1591년 한성부판관이 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의 발발로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지자 구제에 힘썼다. 이듬해 호조정랑으로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도감낭청(都監郎廳)을 겸했으며, 해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그 해 겨울 왕과 함께 환도하면서 군향(軍餉) 수급의 책임을 지고, 또 비변사낭청까지 겸해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2월에 덕천군수로 나갔으나 1594년 어머니 정씨(鄭氏)의 사망으로 사직하였다. 1596년 청풍군수에 제수되었는데, 군(郡)이 고향 가까이 있어서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해 얼마 되지 않아 충북에서 가장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는 평을 들었다 한다. 1599년 이산해(李山海)의 강력한 추천으로 상원군수로 나갔다.

1601년 청백리에 뽑혔으며, 이듬해 연안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군자감부정·사도시정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천부사·예빈시부정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고, 1610년(광해군 2) 부호군 임명도 거절하였다.

그 뒤 승지 등의 직책을 내렸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서인(庶人)으로 쫓겨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시국을 개탄해 끝내 벼슬을 사양하였다. 서울 삼청동백련봉(白蓮峯) 아래에다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학문에 전심해 경사·천문·지리·율학·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당시 사대부의 사표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633년 인조가 특명으로 정려를 내렸는데, 편액을 효자삼세(孝子三世)라 하였다. 저서로는 『연봉집』이 있다.

이기설은 효행으로 유명한데,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 그 일단을 적어두었다.

“20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물과 미음도 입에 대지 않은 것이 7일로 스스로 반드시 죽기로 결정하여 눈물이 다하자 피가 이어 나왔다. 장사 지내기에 이르러 모친 정씨가 지나치게 애통해하다가 병이 중하게 되었다. 형 기직이 모친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육즙(肉汁)을 만들어 올리니, 모친이 의심하여 기설로 하여금 먼저 맛보도록 하였다.

공이 알지 못하고 맛보고 나서 모친에게 먹도록 권하였다. 물러 나와서야 알고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즉시 칼로 혓바닥을 긁어내니 피가 흘러 입에 가득하였다. 형이 지나치게 애통해하다가 먼저 죽으니, 물과 미음조차 입에 넣지 않아 거의 운명할 지경에 이르렀다. 삼 년 상을 마치고나자 기운이 허약하여 거의 죽은 사람처럼 지낸 것이 10년이었다.

병술년에 효행이 뛰어나 특별히 무주 현감(茂朱縣監)에 제수되자 모친을 받들고 부임하여 한 고을의 녹으로 봉양하였으나 의복 제구는 반드시 노비의 공물을 썼다. 평상시 제수(祭需)에 반드시 꿩을 썼었는데, 송화 현감(松禾縣監)이 되었을 때 기제(忌祭)를 만나 꿩 사냥을 했으나 얻지 못하여 문을 닫고 자책하던 중 새벽에 이르러 꿩이 대청으로 날아 들어와 제물로 썼다.”

“갑오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있었다. 발인(發引)하여 가는 도중에 화적떼가 침범해 왔다가 영구(靈柩)를 지키고 울부짖는 것을 보고 도둑이 그 효성에 감격하여 가버렸다. 적성(積城)에서 정상(停喪)중에 불의에 실수로 불을 내자 몸으로 관을 가려 머리털이 모두 그슬렸으나 다행히 죽음은 면하였다. 고을 사람들에 그 효성에 감동하여 감화된 자가 있었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국역 국조인물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