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기남아, 백호 임제


조선 최고의 기남아, 백호 임제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난이
잔(盞)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백호집(白湖集)』)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황진이 무덤 앞에서 지은 유명한 시다. 『해동가요』에 ‘송도의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이 노래를 지어 조문하다.’라는 기록이 있는 작품이다. 임제가 1583년 평안도 도사(都事)로 부임해 가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잔을 올리고 이렇게 시를 읊으며 넋을 달랬던 것이다. 사대부가 일개 기생의 묘를 참배하고 시까지 읊다니. 과연 조선이라는 유교사회에서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결국 조정에서 큰 말썽을 일으키고 말았고, 그는 삭탈관직을 당해야 했다. 이처럼 세속의 예법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임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1549년 전라도 나주의 문무를 겸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남달랐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비온 뒤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글을 지으라고 한 일이 있었다. 이에 그는 다음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푸르고 붉은 몇 필 되는 비단을
직녀의 베틀에서 끊어내어
견우의 옷을 짓고자/ 비 온 뒤 씻어 하늘에다 걸었도다.

(『백호집』)

 

과거시험 위주의 글에는 흥미가 없던 그는 22세 때 속리산에 있던 재야학자 성운(成運)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성운은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시와 학문과 거문고를 함께하며 각처에서 학문을 배우러 온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등 많은 학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큰 선비였다.

스승은 격정적이고 분방한 임제의 성격을 바꿔보고자 중용을 1천 번 읽을 것을 주문했다. 임제는 지리산의 한 암자에서 중용을 800번 읽는 등, 그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6년 동안 이렇게 공부하다가 속리산을 떠나면서 다음의 시를 읊었다.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
[山不離俗俗離山]

 

임제는 1577년 1월 속리산에서 하산한 후 그해 9월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홍양현감, 서북도병마평사, 예조정랑 등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다.

그의 호방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술을 좋아했던 그가 벗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말을 탄 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시중을 들던 하인이

“대감마님, 취하셨나 봅니다. 신발이 왼쪽은 가죽신이고, 한쪽은 짚신이옵니다.”

라고 했다. 이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길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왼편에서 보는 사람은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그게 무슨 탈이냐?”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자 했던 그의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검과 퉁소, 거문고를 항상 지니고 다녔던 임제는 풍류남아이고, 자유분방한 시인이었다. 가는 곳마다 여인이 있고, 술이 있고, 시가 있었다. 모르는 기생이 없고, 발길이 가지 않은 명승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하는 이들에게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 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후에 이리저리 유랑하다 고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1587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주변 오랑캐 나라들이 다 제왕이라 칭했는데도, 유독 우리 조선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이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의 내가 살아간들 무엇을 할 것이며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울 일이 아니니 곡을 하지 마라.
[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

는 유언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물곡의 유언 ‘물곡사(勿哭辭)’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임백호(林白湖) 제(悌)는 기개가 호방하여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가 병이 들어 장차 죽게 되자 여러 아들들이 슬피 부르짖으니 그가 말하기를, ‘사해(四海) 안의 모든 나라가 제(帝)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방(陋邦)에서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 하며, 명하여 곡(哭)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또 항상 희롱조로 하는 말이 ‘내가 만약 오대(五代)나 육조(六朝)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천자(天子)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였다.”

(『성호사설』권9, 인사문)

사학자인 호암 문일평 선생은 그의 유언에 대하여,

“임백호의 멋진 생애에서 가장 감격적인 장면은 그의 위대한 임종이다.”

라고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조선의 대문호 신흠(申欽)은 『임백호집』서문에서,

“내가 백사 이항복과 만나 임백호를 논하기를 여러 번인데 매양 기남아로 일컬었고, 또 시에 있어서는 그에게 90리 이상 훨씬 뒤떨어져 그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