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없이 벼슬에서 물러나노라.


미련 없이 벼슬에서 물러나노라.

 

중국 초나라 항우는 키가 8척에 힘이 세고 장수의 풍모를 지녔으며 재기가 뛰어나고 군사적인 전략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그는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이었고, 그러다보니 점점 오만해져 자기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이 없어졌고 결국 전횡을 일삼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만일 그가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알았다면 초나라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인간의 미덕이긴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특히 지금과 같이 무한경쟁사회에서 양보란 마치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누구든 밟고 올라서야만 성공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무조건 양보만 하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관료가 되어 자신과 집안을 빛내는 것이었다. 입신양명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벼슬을 서슴없이 양보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물론 양보하는 마음조차 성인군자의 자세라고 치부했지만 실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선조대의 명신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대단히 예외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전라도 나주 출신인 박순은 명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성우윤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육봉(六峰) 박우(朴祐)의 아들이자, 조선 제일의 시인으로 불리는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그는 젊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는데, 동료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이에 퇴계․율곡․우계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가장 존숭하는 당대 제일의 인물로 그를 꼽기도 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16세의 어린 나이로 선조가 즉위하자 박순은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대제학이란 어떤 벼슬보다도 가장 명예로운 벼슬로 ‘문형(文衡)’이라고 불렸다. 문형이란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의미이다. 대제학은 정이품으로 판서와 동등한 품계였지만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나 육조 판서보다도 높은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대제학이란 벼슬을 제수 받았다는 건 개인으로서나 가문으로서나 크나큰 영광이자 명예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르고 싶어도 오를 수 없는 벼슬을 퇴계 이황에게 양보하였다. 퇴계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퇴계는 당시 예순여섯의 나이로 대제학의 아래인 제학에 제수되었다. 박순은 자신이 학문과 도덕이 높은 퇴계의 윗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사양하며, 자신과 퇴계의 벼슬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퇴계가 여러 모로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학식으로나 도덕으로도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수 받은 벼슬을 바꿔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당시의 일이 『선조수정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황에게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직하게 하였다. 그때 박순이 대제학, 이황은 제학이었는데 박순이 사양하기를, ‘나이 많은 석유(碩儒:큰 선비)가 차관(次官) 자리에 있고 신이 후진(後進)의 초학으로서 그 위에 있는 것은 맞지 않은 일이니 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여 이 명이 있었다. 그러나 황이 다시 굳이 사양하여 갈리었다.”

선조수정실록』선조1년(1568) 8월 1일(무진)

 

결국 선조는 박순의 뜻을 이해하고 퇴계가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에 오르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벼슬에 큰 뜻이 없었던 퇴계는 오래지 않아 사퇴하고 낙향하면서 박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숙(和叔: 박순의 자)과 마주하고 있으면 한 덩어리 맑은 얼음과 같아 정신이 아주 상쾌하다.”

고 하였다.

이듬해 박순은 이조판서가 되고, 1572년에는 우의정, 그 다음해에는 좌의정을 거쳐 1579년 마침내 영의정이 되었다. 그리고 1586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4년 동안 정승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는 당쟁의 시기였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불이 붙자 그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추천하여 나라를 바로잡고자 했다. 특히 율곡은 당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해서 사림의 분열을 극복하고 결속을 다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율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갈등만 심해지고 그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지자 그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고 만다. 이에 율곡과 도의지교를 맺은 우계 성혼은 탄핵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선조는 박순에게 성혼의 상소문과 율곡의 죄의 유무를 물었다. 박순은

“지금 사람들이 이이와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니 탄핵한 것은 공론이 아닙니다.”

라고 율곡을 두둔하자, 선조는 율곡을 탄핵한 자를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를 두고

“박순이 바로 이이요, 이이가 바로 성혼이라, 이 세 사람은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

라는 비난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 후 박순은 동인의 공격으로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는 등 거센 비판에 힘든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쟁이 점점 가열되어 가는 시점에서 겸양을 미덕으로 알았던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그는 14년간의 영의정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강호로 돌아가는 결정을 내렸다.

그가 떠나는 날, 선조는 동대문 밖 보제원까지 나와 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14년간 정승으로 지냈던 신하에 대한 예우이자 진정으로 그를 존중하는 배려였던 셈이다. 그는 영평으로 물러나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우들과 함께 시를 지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 아침에 시를 읊다가 갑자기 베개를 베고 신음하더니 부인 고씨를 찾았다. 그리고는 “나 가오.”라는 단 한마디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 날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우레 소리가 진동했으며, 밤에는 백기(白氣)가 하늘에 뻗쳤는데, 그 광선이 땅에 비쳐 밝은 달과 같아서 산중 사람들이 바라보고 놀라며 의아해했다는 일화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