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관료의 필수 코스, 사가독서(賜暇讀書)


엘리트 관료의 필수 코스,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 학문이나 예술이 발전하는 기세)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사가독서’ 제도를 시행하였다. 조선에서 사가독서제를 최초로 실시한 임금은 최고의 학자 군주였던 세종대왕이었다.

세종대왕은 학술기관으로 집현전을 설립(1420년)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된 선비들 중 유능한 자를 선발하여 업무를 보도록 하였으며, 세종 8년(1426) 12월부터는 이들에게 별도로 휴가를 주어 집에서나 사찰 등에서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사가독서자로 발탁된 자는 권채․신석조․남수문 등 세 사람으로, 세종은 이들에게 일정기간 휴가를 주고 집에서 글을 읽는 ‘재가독서(在家讀書)’를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가독서’는 친구들의 빈번한 왕래 때문에 독서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사찰에서 독서하는 ‘산사독서’를 하게 하게 하였다. 당시 ‘산사독서’를 한 선비들로는 『대동야승』에 박팽년․신숙주․이개․성삼문․하위지․이석형 등이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를 하였고, 『용재총화』에서는 홍응․서거정․이명헌 등이 장의사(藏義寺)에서 독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세종 때 시작된 사가독서제는 인재양성의 토대가 되었고, 문종 때에도 이 제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가독서제는 세조 때 큰 위기를 맞는다.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집현전 학사들의 목숨을 내던진 저항에 부딪쳤던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면서 사가독서제까지 폐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종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부활하기에 이른다. 조선 개국 이후 제도와 문물 정비에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가졌던 성종이 체계적으로 인재를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따라서 성종 7년(1476)에 새로이 사가독서를 할 젊은 문신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계속된 가뭄 및 기근 등으로 사가독서가 정지되기도 하였다가, 성종 22년(1491)에 다시 부활되었다. 이때 사가독서를 부활하면서 독서의 장소를 사찰로 정하려고 하였다가 나라를 이끌 동량(棟樑)들이 독서하고 학문을 닦는 곳이 허름하고 또한 이름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여론이 크게 일었다. 이에 이듬해 성종은 용산의 빈 절을 대폭 수리하도록 한 다음 ‘독서당(讀書堂)’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당시 독서당은 20칸 규모에 시원한 대청마루와 따뜻한 온돌방이 모두 갖춰져 여름과 겨울에도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사가독서자의 대우 문제는 국가에서 모든 식량을 공급하였으며, 수시로 독서권장을 목적으로 사가독서자에게 임금이 직접 술과 안주를 내리기도 하였다. 성종 24년(1493) 8월 18일에는 성종이 독서당에 술과 수정배(水精杯)를 하사하자 홍문관의 관원이 도금으로 수정배의 받침대를 만들고 김일손이 수정배에 글을 지어 새기기도 하였다. 이 수정배는 연산군 11년(1505)에 홍문관을 혁파하면서 승정원으로 옮겨졌는데 중종 때 사가독서의 부활과 함께 다시 독서당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훗날 영조가 독서당에 소장된 수정배를 들여오라고 명하고 친필로 ‘이제야 옛날 물건을 보니 팔순에 좋은 구경을 하였다. 특별히 술잔 셋과 함께 보관하라.’고 써서 내리고, 전 대제학에게 발문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성종은 사가독서자에게 식량과 술 및 물품 등을 내려주며 독서를 권장하였고, 과제를 주어 수시로 그 결과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가독서자는 강혼․권건․권경유․권오복․김감․김상건․김일손․박증영․신용개․신종호․양희지․유호인․이경동․이승건․이의무․이종준․조위․조지서․채수․최부․허집․허침 등이었다. 연령별로 보면 10대가 1명, 20대가 12명, 30대가 7명, 기타 연령 2명으로 20대가 가장 많았다.

이렇게 용산에 터를 잡은 독서당은 연산군이 들어서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신진 관료와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혐오한 연산군이 사림을 대거 죽인 갑자사화 이후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그 뒤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사가독서제는 부활했지만 용산의 독서당은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 중종 12년(1517) 두모포(豆毛浦: 현재 성동구 옥수동)에 독서당을 지어, 이곳에서 사가독서를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용산의 독서당을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이라 하고, 두모포의 독서당을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고 불렀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의하면,

“한강 북쪽 기슭에 자리한 동호당은 규모가 남호당보다 넓고 꾸밈도 더 화려하며, 국가에서 제공하는 식량 및 공급물도 더 많고 훌륭하다. 그래서 모두가 독서에 열중하였으므로 독서당은 항상 빈집처럼 조용하였다.”

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참화는 또다시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에 위기를 불러왔다. 전란의 와중에 동호독서당은 불타 버렸고, 사가독서제 또한 있으나 마나 한 제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 대제학 유근의 요청으로 한강별영(漢江別營)을 임시로 사용해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나,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정치 혼란과 전란을 겪으면서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더욱이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사가독서제가 폐지되어 독서당은 그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렇게 사라져 버린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은 정조 임금에 와서 새로이 설치된 초계문신제와 규장각으로 말미암아 본래 뜻과 의미를 되살릴 수 있었다.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했을 때 그 권위와 학문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조선의 관제(官制)상 고위 관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몸을 담아야 했던 홍문관 못지않은 인재 양성 기관이 독서당이었다. 따라서 사가독서에 뽑히는 것은 곧 탄탄한 관직 생활을 보장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주 엄격한 과정을 거쳐 매우 적은 인원만을 사가독서로 선발하는 제도를 마련해, 한 번에 여섯 명 가량의 신진 관료만을 뽑았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인정받아야 오를 수 있었던 문형(文衡: 대제학)의 경우는 반드시 사가독서를 거친 사람 중에서 나오도록 제도화되어 있을 정도였다.

율곡 이이의 정치사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술로서 왕도정치의 이상을 문답의 형식으로 서술하여 올린 『동호문답(東湖問答)』또한 율곡이 34세 되던 1569년(선조 2) 홍문관 교리로 동호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하면서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