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으로 절망의 시대를 헤쳐 나간 명재상, 이항복


해학으로 절망의 시대를 헤쳐 나간 명재상, 이항복

 

조선시대 기지와 해학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오성 이항복. 그는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혼란하고 어려운 상황을 호방한 기개와 지혜로 헤쳐나간 명재상이었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이다. 아버지는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이고, 권율의 사위이다.

이항복은 큰 인물답게 신비스러운 일화를 많이 남겼다. 태어나서 사흘 동안 젖도 먹지 않고 울지도 않아서 박견이라는 소경 점쟁이를 불러 보이니

“정승이 될 사주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라고 했다고 전한다.

돌이 되기 전에 우물에 빠질 뻔한 얘기도 전해진다. 유모가 우물가에서 어린 항복을 안고 있다가 잠시 졸았는데, 꿈에 얼굴이 긴 백발의 남자가 나타나 지팡이로 그녀의 종아리를 때렸다.

“어째서 어린아이를 보지 않느냐?”

유모가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어린 항복이 우물에 막 빠지려는 찰나였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항복을 구했지만 꿈에 지팡이로 맞은 종아리가 며칠 동안이나 아파서 유모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항복의 선조인 고려 말 명신 이제현의 제사가 있었는데, 제사상에 오른 영정을 보고 유모는 깜짝 놀랐다. 우물가에서 졸고 있을 때 종아리를 친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기지가 넘쳤던 이항복은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열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는 불운을 겪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이때 함께 등과한 이덕형과 함께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 대제학 율곡 이이의 천거로 이덕형과 함께 사가독서를 받았으며 그 뒤 정자, 저작, 박사, 봉교, 수찬, 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서 선조를 측근에서 호종했다. 또한 정유재란까지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지내며 전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이항복과 그의 죽마고우 이덕형은 오랫동안 인구(人口)에 회자될 만큼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들이 어린 날부터 즐긴 재담과 해학은 ‘오성과 한음’이라는 어린이용 만화까지 나와서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특히 이덕형이 차분하고 위엄 있는 성품이었던 데 반해 이항복은 쾌활하고 호방한 기개가 넘쳐 더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이항복이 8세 때 하루는 아버지가 ‘칼과 거문고’로 글귀를 지으라고 명하니 그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올렸다.

“칼은 장부의 기상이 있고
[劍有丈夫氣],

거문고에는 천고의 소리가 담기었네
[琴藏千古音].”

이 시를 본 아버지는 아들이 장래에 큰 그릇이 되리라 믿었다.

이항복은 도량이 넓어 열두 살 무렵 이미 의(義)를 좋아해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남을 구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항복이 새 옷을 입고 외출을 했는데, 헤진 옷을 입은 이웃집 아이가 그 옷을 가지고 싶어 하자 즉시 벗어 주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신고 있던 신을 벗어서 남에게 주고 맨발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여섯 살에 어머니마저 잃어 외로운 소년 시절을 보낸 이항복은 열아홉 살에 혼인을 했다.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손녀이자 권율 장군의 딸이었다.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가 된 후 공부에 매진해 진사시에 합격하고 스물다섯 살에는 알성시 병과에 급제했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이항복의 해학과 기지는 그대로였다.

이항복이 병조판서이고 그의 장인인 권율 장군이 도원수이던 어느 해 여름의 일이다.

“장인어른, 날씨도 무덥고 하니 오늘 조회에는 의관속대를 다 갖춰 입고 가실 게 아니라 베 잠방이 위에 융복을 걸치고 가시지요.”

권율 장군은 고지식하게도 사위 이항복의 말을 따라 집에서 입는 베 잠방이 위에다 융복을 걸치고 대궐 조회에 참석했다. 물론 이항복은 병조판서의 조복을 제대로 차려 입었다. 그 날 조회에서 이항복이 선조 임금에게 주청했다.

“전하, 날씨가 너무 무덥사옵니다. 관복을 벗고 조회를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선조가 너그럽게 응락했고, 조회에 임한 모든 대신이 관복을 벗었다. 그랬으니 권율 장군이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위의 말을 따라 관복 밑에 짧은 베 잠방이를 걸치고 나왔는데, 바로 그 사위라는 자가 임금에게 관복을 벗고 조회하자고 청하는 게 아닌가. 난감하지만 권율 장군은 관복을 벗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은 긴 옷이 없는가? 어찌하여 짧은 베 잠방이를 입었는가?”

대답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장인을 대신하여 이항복이 대답했다.

“전하, 권 도원수는 집이 가난하여 여름에는 항상 짧은 옷만 입고 지낸다고 하옵니다.”

선조는 좋은 옷 한 벌을 권율에게 하사하였다. 이항복의 의도는 전쟁 중임에도 모시옷이나 명나라에서 수입한 비단으로 옷을 해 입는 다른 대신들을 비판하고 장인의 검소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또 이런 일화가 있다. 비변사 회의가 있던 어느 날 이항복이 유난히 늦게 도착했다. 누군가 “어찌 늦었습니까?” 하고 물어보자 이항복이 대답했다.

“마침 여럿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늦었소.”

“싸우는 자는 누구던가요?”

“환자(宦者: 환관)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하니 여러 정승이 배를 잡고 웃었다. 이항복은 익살스러운 말로 당시의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풍전등화와 같은 전란 속에서 번뜩이는 재치로 위기를 모면한 일화도 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와 평양성을 탈환한 후 연회가 열렸다. 이항복은 병조판서, 이덕형은 접반사로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 도중 이여송은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라는 것을 알고 몹시 놀라며 물었다.

“조선은 어찌 사대부에서 동성 혼인을 했습니까? 이는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 아니오?”

은연중에 조선을 깔보는 기색을 내비친 것이다. 연회에 참석한 조선 대신들은 조선은 본이 다르면 동성도 혼인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그때 이항복이 재치 있게 말했다.

 

“이덕형은 본래 성이 계(季)씨로 계덕형이 이산해의 사위가 된 것이오. 헌데 계덕형이 조정에 머물며 공로가 많아 우리 임금께서 특별히 어성(御姓)을 하사하시어 그때부터 이씨 성이 된 것이라오.”

 

이여송은 고개를 끄덕였고 여러 대신들은 이항복의 번뜩이는 기지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졸지에 계덕형이 된 이덕형은 이항복을 짐짓 흘겨봤으나 곧 이항복의 재치에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항복은 율곡 이이의 문하로 서인에 속하였고, 이덕형은 남인에 속하였으나 서로 당색에 연연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항복은 도승지, 이덕형은 대사헌이었는데 함께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고비마다 힘을 합해 국난을 헤쳐나갔다. 또한 군사의 일을 관장하는 병조판서를 서로 번갈아 맡았고, 전란이 끝날 즈음에는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직을 번갈아 맡았다.

이항복은 한평생 해학과 웃음 속에 살아가면서, 조선 왕조 최대의 위기 상황이던 임진왜란에 슬기롭게 대응하고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