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와 절개의 상징, 청음 김상헌


충의와 절개의 상징, 청음 김상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1570년(선조 3) 서울 출생으로 돈령부 도정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의 양자가 되었다. 21세인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입격하고 27세인 1596년에는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부수찬, 좌랑, 부교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한 뒤, 교리, 응요,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1615년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이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김상헌은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등에는 반대하면서도 인조반정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 대사성, 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김상헌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엄격했다. 우스갯소리를 잘하던 그의 아버지조차 친구들과 놀다가 아들이 밖에서 돌아오는 기척을 느끼면 손을 저어 그치고 “우리 집 어사또 오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였다. 『효종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 의하면,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했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50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했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김상헌의 자)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라고 하였다.’

김상헌이 대사헌의 직책에 있을 때의 일이다. 장약관(掌藥官) 박시량이 진흙이 신발에 묻을까봐 조회 때 큰 덧신을 신는 범법 행위를 했고, 부유한 역관 장현이 집을 지으면서 국법에서 금하고 있는 부연(附椽: 처마 서까래 끝에 덧얹는 짧은 서깨래)을 달았다. 김상헌이 죄를 물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박시량의 처가 남편의 선생인 고관 오윤겸에게 구명 운동을 하러 찾아가지만 허사였다. 오윤겸이 거절한 것이다.

“내 아들이 범법하였더라도 김공은 용서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 시량의 일을 부탁할 수 있겠는가.”

김상헌과 오윤겸은 절친한 사이였지만 공사 구별이 상호 추상 같았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처벌받았다.

광해군 대에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취해 중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과의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국면은 크게 바뀌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대북 정권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친명반후금(親明反後金) 정책을 천명했다. 그리하여 후금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자 후금과 조선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명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후방 공격을 우려하고 있던 후금은 1627년(인조 5) 1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평양에 도착한 후금군은 화의를 청해 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을 갔고 후금의 사신이 다시 와서 화의를 청하니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강화에 응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정세는 조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사신을 보내 ‘군신의 예’를 다하라고 통보해 왔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다시 사신을 죽여 조선의 뜻을 알려야 한다는 척화파와 힘이 부족하니 화의를 해야 한다는 주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인조가 우유부단하게 왔다갔다하는 사이 청이 요구한 최후의 시한을 넘겼고 급기야 병자호란이 터지고야 말았다.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고,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50여 일째인 1637년 정월 23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진다. 의병의 원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강화도로 피난한 세자와 세자빈 강씨, 두 왕자와 역대 왕의 옥새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성내에 전해진 것이다. 주화론이 척화론을 압도하고, 인조의 지지를 얻은 주화론자들은 청나라와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명길이 항복의 국서를 작성했는데 김상헌이 그 국서를 찢어버리고 통곡하였다.

“신이 국서를 찢은 죄, 죽어 마땅하나 오늘의 의론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소신을 먼저 죽여서 인심을 하나로 하십시오.”

인조는 김상헌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면서 말했다.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

하니 주변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소현세자 또한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결국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젊은 언관들이 속죄양이 되어 청나라에 잡혀가 척화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지만, 실제 척화론을 주도한 핵심 인물인 김상헌은 주화론의 핵심 인물인 최명길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 이들의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후 김상헌은 안동으로 내려가 학가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목석헌이라는 초옥을 엮어 은거했다.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을 요구해 오자 김상헌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 싸우다가 안 되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의를 지켜야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김상헌은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 예순아홉 노구의 몸으로 끌려간 김상헌을 청나라 사신 용골대가 심문했다.

“정축년의 난에 국왕이 성을 나왔는데도 유독 청국을 섬길 수가 없다 했고, 또 임금을 따라 성을 나오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용골대의 물음에 김상헌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내 어찌 우리 임금을 따르려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노병으로 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주사(舟師:수군)를 징발할 적에 어찌하여 저지했는가?”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나의 임금에게 고했는데. 국가에서 충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 일이 다른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듣고자 하는가?”

용골대를 비롯한 청인들이 감탄했다.

“조선 사람은 우물쭈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1644년(인조 22)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한 후 이듬해 세자와 봉림대군들과 함께 돌아올 때 청의 장수 용골대는 그들을 돌려보내면서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했다. 최명길은 김상헌을 끌어당기면서 함께 절하자고 했으나 김상헌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절을 하지 않았다. 최명길만 4배를 하니 용골대는 김상헌을 노려보다 물러갔다.

때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데도 의리만을 내세우며 척화를 주장한 척화파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청나라는 김상헌은 물론, 척화론자로 청에 잡혀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의 굽히지 않는 절개를 보고

“조선을 정복할 수는어도 통치할 수는 없다.”

고 감탄했다고 한다. 왕이 항복을 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화파의 적절한 대응력에 더해 김상헌과 같은 척화파의 꼿꼿한 선비정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