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인재를 보는 눈


율곡의 인재를 보는 눈

 

조선왕조의 위기라 칭해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회오리 속에서 수많은 위인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양란을 모두 몸소 겪으며 쓰러져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쳤던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다. 이원익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중심을 잡고 바른 정치를 펼쳤으며,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 이르러서도 청렴함으로 높이 칭송받은 인물이다.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이다. 태종의 아들 익령군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함천부사를 지낸 이억재(李億載)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 관원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1573년(선조 6)에는 성절사 권덕여의 질정관(質正官: 사신과 동행하여 글의 음운이나 기타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오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이원익을 장차 크게 쓰일 인물로 점찍은 사람이 있다.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이다. 이준경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 이준경의 눈에 한 가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건강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원익은 키가 3척(1미터 내외)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작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을 때는 몸도 약해서 관직에 오르기 전에 몸부터 챙기라는 주위의 걱정을 꽤 들었던 모양이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이준경이 이원익을 왕에게 추천하면서 몸이 허약해서 걱정이라고 하니 왕이 산삼을 내려 병을 고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원익을 직접 본 왕이 그 작은 키를 보고 “괜히 산삼만 내다버렸구나.” 하고 웃었다고 한다.

1569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이원익은 승문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때 서애 유성룡이 그를 자주 찾아와 교류했다. 이원익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지만, 유성룡은 그런 그가 믿고 의지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유광익이 쓴 『풍암집화(楓巖輯話)』에는 두 사람의 사람됨을 비교하여,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고 하였다.

이준경에 이어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아본 이는 율곡 이이였다. 1574년(선조 7)에 이원익이 황해도 도사로 부임했을 때 마침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때의 일이 『선조수정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이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이가 서울에 들어와 숙배한 뒤에 부임해 상소하면서 도내의 폐막(弊瘼: 없애기 어려운 폐해)를 전부 개혁하겠다고 청했다. 그런 뒤에 학교를 크게 수리하고 학범(學範)을 신명하여 탐활(貪猾)한 자를 제재하고 선량한 자를 정표하며, 백성의 아픔을 보살피고 군정(軍政)을 닦으니 군사들과 백성이 감열(感悅)했으나, 그가 건의한 것을 조정이 많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유감으로 여겼다. 이때 도사(都事) 이원익은 명망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서관(庶官)으로부터 막직(幕職)에 보직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시했으나, 이이는 한 번 보고 그의 재주를 알아 마침내 정무(政務)를 맡겼다.

선조수정실록』권8, 선조 7년 10월 1일

 

황해도사 이원익을 정언으로 삼았다. 원익은 젊어서 과거에 올랐는데, 조용히 자신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성균관 직강으로 있다가 황해 도사가 되었는데, 감사 이이가 그의 재주와 국량이 비범함을 살피고서 감영의 사무를 맡기었다.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와 원익의 재기(才器)와 조행(操行)이 쓸 만하다고 말하고, 드디어 홍문선(弘文選)에 기록하였다. 이윽고 정안에 제소되니 대신들이 제목(除目)을 보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재주가 있는데도 하급 관료로 침체해 있었는데, 이제야 현직(顯職)에 통하였으니 조정에 공론이 있다 하겠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권10, 선조 9년 1월 2일

 

이원익은 당시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처리를 잘해서 나이 많은 아전들도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고 하는데, 이이는 이러한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웬만한 일은 모두 그에게 맡길 정도로 깊이 신임했다. 이이는 이때 이원익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서 한양으로 돌아와서는

“이원익이란 젊은이가 참으로 쓸 만하다.”

고 칭찬하고 다녔으며, 그가 홍문록(弘文錄: 홍문관 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 제도)에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힘썼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이의 추천을 받은 이원익은 이듬해인 1575년(선조 8) 중앙 관직인 정언이 되었다.

이원익이 재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크게 명망을 얻지 못하다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해 주목을 받는 사람이 있다. 이원익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는 전쟁 직후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역임했으며 피난 가는 선조의 호송을 맡았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체찰사로 임명된 후 흩어져 버린 병사들을 수습하고 1593년 1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 또한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을 보살피고, 모함으로 파직되었던 이순신을 끝까지 변호하여 다시 기용되도록 하였다.

1598년 좌의정에 오른 이원익은 명나라 장수 양호의 변무사(辨誣使: 중국에서 조선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는 일이 있을 때, 이를 밝히기 위해서 임시로 중국에 보내던 사절)로서 연경에 가서 주본(奏本: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올렸다.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는 영의정이 되었지만, 넉 달 만에 사직하였다. 이유는 유성룡이 이이첨 등에게 탄핵을 받았을 때 그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북인 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남인과 서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도 이원익은 남인의 영수로서 광해군 대의 대북 정권에서 영의정을 지냈고, 서인 정권인 인조 대에도 영의정을 지냈다. 이원익이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던 당시에 이렇게 성향이 다른 정권에서도 영의정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물 그 자체로 본성이 정직하고 청렴해 당파를 막론하고 신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사람을 챙기려고 인사권을 남용하거나 경쟁자를 공격하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지도 않았다. 이런 공명정대한 태도가 선조에서 광해군으로, 광해군에서 인조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대에 원로대신으로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유난히 작은 키 때문에 다른 대신들 사이에 서 있으면 잘 보이지 않아 왕이 자리에서 일어서야 보일 정도였다는 이원익. 그러나 그는 작은 체구와 병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치적을 쌓아 인심을 얻었고, 전쟁 중에는 전공을 세워 나라를 구했다. 또한 그는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에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 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