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구곡담기를 지어 율곡을 추억하다


고산구곡담기를 지어 율곡을 추억하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은 최립(崔岦: 1539~1612)은 율곡보다 세 살 아래였지만 약관의 시절부터 율곡과 벗으로 지낸 인물이다. 최립은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굴하지 않고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여, 1559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여러 외직을 지낸 뒤 1577년 주청사(奏請使: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수시로 보내던 사신)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 문단의 대표적 문인인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했는데 그 곳 문인들로부터 명문장가로 격찬을 받았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시인인 석주 권필이 ‘이 세상에는 시로써 나에게 적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어느 날 최립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서 문(文)이라면 마땅히 선생을 우두머리로 모셔야하겠지만, 시(詩)는 누구를 우두머리로 추대해야합니까?”

하였다. 그 말 뜻에는 의례 자기에게 그 말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립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최립은 말하기를,

“늙은 내가 죽으면 당신이 계승할 것이다.”

고 하였다. 이에 권필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현재에는 나 이외에 아무도 나를 당할 자가 없다는 자부심이었다.

 

율곡이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석담으로 낙향한 1576년~1580년의 5년 여 동안은 당장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재령군수로 있던 최립은 친구인 율곡이 석담에서 대장간을 차려놓고 농기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쌀가마니를 보냈다. 그러나 짐꾼이 등에서 쌀가마니를 풀기도 전에 율곡은 짐꾼에게 말했다.

“쌀을 내려놓지 말고 그대로 지고 다시 돌아가거라. 그리고 사또께 아뢰어라. 뜻은 고마우나 쌀은 받을 수 없다고.”

심부름을 온 사람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쌀가마니를 받아주길 청했다. 그러나 율곡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짐꾼은 쌀을 다시 등에 지고 돌아갔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율곡의 하인들은 아까운 듯 율곡에게 불평을 늘어 놓았다.

“대감님, 모처럼 성의로 보내 주신 것을 돌려보내시면 어쩝니까?”

그러자 율곡은 친구의 사정을 짐작이나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옛 친구가 보낸 사사로운 물건이라면 왜 안 받겠느냐. 아까 그 쌀은 관가의 물건이니 함부로 받아서는 죄가 되느니라.”,

“그것이 관가의 물건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신을 지낸 나도 이렇게 넉넉지 못한데 하물며 지방 수령을 지낸 친구야 오죽하겠느냐.”

그 후 율곡이 죽은 지 25년이 지난 1609년에 최립은 서경에서 율곡의 아들 경림(景臨)을 만났는데, 경림은 그에게 율곡이 머물던 해주 고산(高山)의 구곡담(九曲潭)에 대해 기문(記文)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최립은 율곡이 처음 그곳에 터를 잡을 때부터 이웃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자주 왕래하던 곳이라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가 지은 구곡담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곡(曲)은 관암(冠巖)이다. 해주성을 벗어나 골짜기로 들어가서 45리 지점에 있는데, 바다의 입구와는 2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산 정상에 관(冠)처럼 생긴 바위가 우뚝 서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산의 형세가 구불구불 휘돌아 계곡물과 함께 나란히 뻗어 내려오는데, 갑자기 끊어져 벼랑을 이룬 곳마다 그 아래에는 반드시 맑은 못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은자(隱者)가 머물러 살기에 충분한 장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대개 이쯤에서부터 산촌(山村)의 몇 가호가 비로소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제2곡화암(花巖)이다. 관암에서 5리쯤 떨어진 거리에 있다. 암벽이 벌어진 곳이나 바위 틈새마다 모두 진달래와 같은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 뒤쪽으로 가면 산촌 10여 가호를 볼 수가 있다.

제3곡취병(翠屛)이니, 화암에서 3, 4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기이한 바윗돌들이 더욱 많아지면서 마치 푸른 병풍처럼 둥글게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앞에 자그마한 들판이 펼쳐져서 산골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으며, 들판 가운데에 일산(日傘:볕을 가리기 위한 양산)처럼 서 있는 반송(盤松: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뻗어서 퍼진 소나무) 한 그루 밑에는 수백 인이 앉을 만한 자리가 있다. 취병 북쪽에는 사인(士人) 안씨의 집이 있다.

제4곡송애(松崖)이니, 취병에서 3, 4리쯤 떨어져 있다. 1천 척 높이의 석벽 위에 송림이 해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못 중앙에 배가 반쯤 드러난 모양의 바위가 솟아 있어서 선암(船巖)이라고 이름지었는데, 그 위에 여덟 명 정도는 앉을 수가 있다. 사인 박씨네 집이 이 선암을 마주 대하고 있는데, 그는 율곡 공을 따라서 이 골짜기로 들어온 사람이다.

제5곡은병(隱屛)이니, 송애에서 2, 3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높고도 둥근 석봉의 모양이 조촐하고 산뜻하여 특이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못 주위를 마치 계단처럼 돌로 모두 쌓아올려 내려오는 물을 담아 두고 있다. 병(屛)의 뜻이 앞서의 것보다도 은(隱)하기 때문에 은병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인데, 이와 함께 공이 자신의 가까이에서 취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쉬려는 뜻을 여기에다 부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공이 처음에 석담에 와서 집을 지을 때에는 간략하게 혼자서 서식할 공간만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공을 따라와서 배우는 이들이 많아지자 서로 더불어 머물 곳을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계하면서 선현을 존숭하고 후학을 인도하는 일에 하나라도 부족함이 없게끔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은병정사(隱屛精舍)가 세워지게 되었고, 그 뒤로 이 정사의 부속 건물들도 차례로 낙성되면서 어지간히 면모를 갖추었다.

조계(釣溪)라고 하는 곳은 은병에서 3, 4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침계(枕溪)의 바위 가운데 낚시터로 삼을 만한 곳이 원래 많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여기가 바로 제6곡이다.

풍암(楓巖)이라고 하는 곳은 조계에서 2, 3리쯤 떨어져 있다. 바위산 전체가 온통 단풍나무 숲으로 뒤덮여서 서리가 내리면 마치 노을처럼 현란하게 비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여기가 바로 제7곡이다.

그 아래쪽에 몇 가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데, 뽕나무와 사립문의 정경 등이 그야말로 은연중에 하나의 화폭을 이루고 있다. 금탄(琴灘)이라고 하는 곳은 여울물 소리가 그지없이 청랑하여 거문고 소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가 바로 제8곡이다. 문산(文山)이라고 하는 곳은 옛 이름 그대로 부른 것인데, 여기가 바로 제9곡으로서 구곡의 끝이다.

최립은 이 구곡담기를 지으면서 ‘나는 예전부터 공을 알고서 함께 어울렸으나, 공이 이미 지하 세계에 들어가서 다시 일으킬 수가 없으니 어떻게 구곡의 맑은 물가에서 술잔을 나누며 노래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다만 함께 공부하며 문자의 교분을 나눈 이들이 있으니, 이들이 공을 위해 글을 지어 읊는다면, 추억 어린 구곡으로 공의 혼백을 다시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구곡담기를 지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